위대한 칸, 칭기즈의 비밀칭기즈칸의 위대한 정신에 대하여세계를 아우르던 정복자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던 알렉산더 대왕을 높이 평가하는데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은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이룬 알렉산더 대왕은 탁월한 전투 능력을 가진 전사이자 용맹함으로 군대를 이끈 사령관이다. 칭기즈칸 역시 끊임없이 신무기를 개발하고 자신의 군대를 독려하는 자애로운 군주였다. 수 천, 그 보다 많은 군대를 통솔하는 위대한 정복자들에게 자비로운 관용과 통찰력은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칭기즈칸은 투석기와 활 등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들을 용도에 따라 다르게 개발했다. 현재 남아있는 몽골의 마상무예단의 모습은 12세기 활동했던 용감한 칭기즈칸의 병사와 오버랩된다. 흔히 칭기즈칸을 적에게 공포심을 안기는 잔인한 정복자라고 생각하는데 천호장 예순베이 일화를 통해 그는 부드러운 리더십을 가진 정복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순베이는 훌륭한 용사이고 아무리 오래 싸워도 지치지 않지만 병사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휘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칭기즈칸의 어록이다. 칭기즈칸은 군대라는 특성상 수직적임을 잊어서는 안되지만 아랫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가졌다는 점이 나타난다. 칭기즈칸의 4준마인 버르치, 모홀라이, 보로콜, 치라운과 4맹견이라고 불리는 제베, 수베테이, 젤메. 코빌라이가 칭기즈칸을 충성스럽게 모신 것을 생각하면 칭기즈칸은 부하를 위하는 상관이라고 볼 수 있다. 엄격한 군율 아래 전리품을 능력에 비례하여 나누어주고 출신 성분에 따라 선발하는 것이 아닌 능력에 따라 지휘관을 선발하는 천호장 같은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군사 조직은 칭기즈칸만이 가진 능력이며 대제국을 건설한 원동력이었다. 또한 칭기즈칸 이전에는 군대 개념이 없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칭기즈칸이 군대를 조직함에 있어서 매우 깊은 고찰을 했다고 생각한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를 했는데 승리의 비결은 다름아닌 전투 맞춤형 식량이다. 일반 군대는 선발대 뒤에 식량을 배급하기 위한 무리가 뒤따라간다. 이것은 전진하는 속도를 늦추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칭기즈칸의 군대는 버르츠라는 육포 비슷한 음식을 휴대하고 다녔다. 버르츠는 겨울을 나기 위한 몽골의 전통 음식인데 소나 양을 잡아 고기를 몇 개월 건조시켜 만든 것이다. 고단백에 많은 양을 소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유용한 식량이었다. 다른 몽골의 전통 요리도 흥미로운 점이 상당히 많다. 한국의 만두와 흡사한 호쇼르와 우유와 차를 혼합한 수테차, 허르헉이라는 요리는 몽골인에게 하나의 풍습과도 같다. 고기를 먹기 전에 함께 넣었던 뜨거운 돌을 만지는 행위인데 이것은 염소의 영혼이 자신에게 깃듬과 동시에 신체의 혈액순환을 돕는 일환이었다. 아이락은 몽골의 대표적인 음료인데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다. 낮은 도수의 알코올이 포함되어 있지만 몽골인은 아픈 아이가 있으면 아이락을 먹게 한다. 아이락은 몽골인에게 단순히 음료가 아닌 몽골인의 철학이기도 하다. 아이락은 ‘하얀 음식’으로써 행복과 청렴, 진심을 상징한다. 이와 반대되는 ‘붉은 음식’은 풍요를 의미한다. 이는 매서운 겨울을 나는 몽골인의 생활이 담겨있다.칭기즈칸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그의 유년시절을 알아야 할 것이다. 칭기즈칸은 버르지긴씨족 예수게이와 메르키드 부족 칠레무의 처인 허엘룬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다. 본래는 예수게이가 메르키드 부족이 전투 후 부족으로 돌아가는 와중을 습격해 허엘룬을 납치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칭기즈칸이 태어났고 예수게이는 타타르족 장수인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따 칭기즈칸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테무진은 태어날 때 핏덩이를 손에 쥐고 태어났다. 그 모습을 본 샤먼들은 테무진이 흩어져 싸우던 몽골 부족들을 통일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버지 예수게이는 테무진이 9살 때 보르테와 약혼시키고 돌아가던 중 숙원관계였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 당했다. 예수게이가 죽자 버르지긴 부족은 흩어졌고 테무진의 입지 역시 약화되었으며 테무진은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테무진은 어린 나이였지만 부족을 되찾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 다짐한다. 당시 몽골 지역에는 나이만, 메르키드, 케레이트, 타타르, 옹구트, 금나라 등 수많은 부족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부족장들은 부족간 세력 다툼으로 인해 언제나 죽음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은 은으로 된 식기를 썼는데 이는 독살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서였다. 성장한 테무진은 통일 전투에서 크게 패한 적이 있었다. 테무진 곁에 남은 부하는 19명이었는데 먹을 식량이 없어 소중히 아끼는 말을 잡아먹고 흙탕물을 마셨다. 그는 흙탕물을 마시며 19명을 기억하는 맹약을 했다. 이 기록은 테무진이 얼마나 의리를 중요시 여겼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마치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복사꽃 아래에서 의형제를 맺은 도원결의를 연상시켰다. 칭기즈칸은 어려서부터 각고의 노력 끝에 40대에 부족을 통일하고 다스리는 칸이라는 호칭을 썼다. 칭기즈칸이라는 호칭은 오논 강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정해졌는데 이후 칭기즈칸을 쿠릴타이 회의를 연다. 쿠릴타이 회의는 몽골 지역을 다스리던 각지의 수령들을 불러모아 민주적인 절차로 진행되던 회의이다. 칭기스칸은 절대 군주였지만 오롯이 자신의 의견만 관철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이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몽골 제국을 번영시켰다. 칭기즈칸은 실크로드를 연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칭기즈칸은 몽골과 교역하는 상인들을 보호해주었다. 칭기즈칸은 교역을 장려하면서도 끊임없이 영토를 넓혀갔는데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장수를 보내 몽골 군대가 매우 위협적이라고 소문을 내고 검은 복장을 한 병사들을 밤에 보내 게릴라 작전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군대를 일렬 횡대로 편성하여 적군을 포위하는 독특한 전술을 쓰며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위인인 칭기즈칸이지만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인 다달솜에는 그의 흔적이 적다. 테무진이 전투를 하기 전 신에게 기도를 올리던 산인 부르칸 칼둔 만이 그때와 같을 뿐이다. 그가 남긴 물건이 없는 이유는 유목생활이라는 생활 양식에 따른 결과였다. 몽골이 옛날부터 한국과 교류가 많은 국가이기 때문인지 생활 양식이 비슷한 점이 많다. 한국의 서낭당과 같은 몽골의 오보는 한국처럼 사람들이 신에게 소원을 비는 장소이다. 또 몽골인들은 물고기를 잘 먹지 않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물고기는 눈을 감고 자지 않기 때문에 주변을 늘 경계하는 동물을 상징한다. 두 번째는 물고기는 많은 알을 낳음으로써 번식을 하는데 이는 다산을 상징한다. 한국은 물고기를 먹지만 성씨에 따라 물고기를 먹지 않기도 한다.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고 선조에게 도움을 준 길한 생물이라고 생각해 보답의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몽골과 한국은 샤머니즘이 작용하는 공통점이 있다. 몽골인의 시조라고 불리는 푸른 늑대인 ‘버르테 천’과 흰 사슴인 ‘거마랄’은 각각 힘과 양식을 상징한다. 우리 나라에도 웅녀 설화가 존재한다. 몽골과 한국은 비단 생김새만이 아닌 비슷한 사상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1227년 서하 원정 도중 사망한다. 칭기즈칸은 늘 백성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아픔을 공유하며 사는 평범한 삶을 꿈꿨다. 살아서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죽어서는 무덤도 남아있지 않은 칭기즈칸의 삶을 되돌아 보며 공수래 공수거를 느꼈다. 유목민의 삶은 무소유와 닮아있다. 욕심부리지 않고 그저 필요한 만큼만 취하는 것. 칭기즈칸이 죽기 전까지 유목 생활을 저버리지 말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무소유의 삶을 후손들이 이어가길 바랐던 칭기즈칸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TV 공중파 방송에서 아이돌 스타들의 선정성-방송사, 기획사, 대중의 관점에 관한 연구목 차Ⅰ. 서론연구의 목적과 방법Ⅱ. 아이돌의 선정성이 방송사에 미치는 영향선정성 규제와 방송사Ⅲ. 아이돌의 선정성이 연예 기획사에 미치는 영향기획사와 섹슈얼리즘Ⅳ. 아이돌의 선정성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수용자의 안목Ⅴ. 결론요약ㆍ참고 문헌Ⅰ. 서론1. 연구의 목적과 방법요즈음 TV 공중파 방송에서 아이돌 스타들의 선정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아이돌 스타들이 무대 위에서 입는 의상과 노래가사, 춤 등 무대 위의 퍼포먼스가 매우 선정적 이여서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선정성이란 어떤 감정이나 욕정을 복 돋워 일으키는 성질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TV 공중파 방송에서 아이돌 스타들의 무대 위의 퍼포먼스가 시청자들에게 어떤 감정이나 욕정을 복 돋는 것과 같은 상황이 생겨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이다.더욱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10대 아이돌 스타들의 선정성과 10대 청소년들의 모방심리 때문에 비롯된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것 이다. 아직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내세우고,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 질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10대 아이돌 스타들이 선정적으로 무대 퍼포먼스를 하고, 또 그런 무대 퍼포먼스를 보며 10대 청소년들은 연예인들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이 주목받길 바라는 생각에 무작정 연예인을 따라하게 된다.또 다른 문제로는 공중파 방송사들이 선정성에 대한 통일되지 않은 심의규정을 내세움으로써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KBS는 12세 이상가 에서 15세 이상가로 시청등급을 상향조정함과 동시에 사회통념을 벗어난 복장에 자체적인 점검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SBS와 MBC는 별다른 심의규정을 내세우지 않았다. SBS는 미성년자가 배꼽티나 짧은치마를 입고 나올 경우 경고조취 하겠다고 밝혔으나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으며, MBC또한 강력한 제재가 가해지지 않고 있다.이와 같이 TV 공중파 방송에서 아이돌 스타들의 선정성이 문제되고 있는 것 등 가요프로그램이 지나친 노출과 선정성으로 주의를 받았다.방통심의위는 "미성년자가 포함된 여성그룹 등 일부 가수들이 지나친 노출의상을 입고 선정적인 춤을 추거나 자극적인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내용을 청소년시청보호시간대에 방송한 것에 대해 각각 '주의'를 결정했다"고 전했다.이에 KBS 뮤직뱅크는 시청연령등급을 ‘12세 이상 시청가’에서 ‘15세 이상 시청가’로 상향조정했고, 뮤직뱅크에 출연하는 출연자의 무대의상과 안무를 규제한다고 밝혔다. 이는 계속해서 대두된 선정성 논란에 대한 정부차원의 노출 규제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음악 프로그램 특성상 주된 시청자가 청소년이므로 과도한 노출의상이나 선정적인 안무는 연예인을 동경하고 그들을 따라하는 청소년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TV 주요 채널(흔히 말하는 지상파 3사) 중 일부 방송사는 여전히 가수들의 과도한 노출의상과 선정적인 안무를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다. 그 사례로 가수 ‘HAM’을 들 수 있다. 여성 그룹 ‘HAM’은 지난 10월 1일 디지털 싱글 3집 “Take It Off” 을 발표했지만, 선정적인 가사와 안무가 문제가 돼 KBS에서 방송금지 판정을 받았다. 그룹 ‘HAM’ 의 소속사는 문제가 된 가사 “내 안에 들어와”를 “이 노랠 들어봐”로 바꾸겠다고 밝혔지만 이날 MBC에선 원래대로 “내 안에 들어와”로 방송됐다. 이는 KBS에서 방송을 허용하지 않는 음악과 안무를 MBC에서는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의 원인은 의상의 노출 수위와 안무의 선정성에 대한 명확한 법 규정 없이 정부가 3사 프로그램 제작진의 자율성에 맡기기 때문에 방송사마다 다른 규제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방침으로 규정되어 방송되어지는 상황에서 시청자에게 혼란을 주고, 들쑥날쑥한 방송사의 기준이 ‘아이돌 선정성 논란’이 계속되는 것을 야기한다.이와 관련해,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가 인상적이다. 27일 모노커뮤니케이션즈에 따르면 지난 20일 전국 10대 치를 보였다. 여론조사 결과 조사에 참여한 과반수이상의 국민이 미성년자 걸 그룹의 선정성에 대한 규제를 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또한, 방송사간에 시청률 경쟁도 아이돌 선정성 문제에 원인이 된다. 12월 첫째 주를 기준으로 ‘KBS 뮤직뱅크 5.7%’, ‘MBC 쇼! 음악중심 6.1%’, ‘SBS 인기가요 7.4%’ (TNmS 기준) 등 공중파 음악프로그램의 시청률이 평균 6%대로 시청률이 매우 낮은 것으로 집계된다. 주 시청자인 10대가 케이블 채널, 인터넷 등 다양한 경로로 음악을 접하면서 굳이 TV를 시청하지 않아도 가수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각 방송사는 보다 높은 시청률을 얻기 위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권고조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돌의 선정적 안무나 의상을 강력히 제제하지 않고 있다. 대다수의 가수들은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출 혹은 섹시코드로 이목을 끌려고 하고, 이러한 이유로 현재 아이돌 여가수뿐만 아니라 남성 역시 성 상품화로 전략하게 됐다.선정성 논란의 원인으로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대중들의 심리가 크게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정성 논란’은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사항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대중매체에 노출되는 방송에 대한 노출 수위 기준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더불어 각 방송사는 각기 자율적 심의가 아닌 동일한 심의규정을 해야 한다. 물론 선정성에 대한 유해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의에 자율성을 갖은 각 방송사는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청자와 기획사가 인정할 수 있는 바람직한 심의를 규정해야 한다.Ⅲ. 아이돌의 선정성이 연예 기획사에 미치는 영향1. 기획사와 섹슈얼리즘아이돌의 선정성의 원인들 중 하나는 연예기획사들의 경쟁에서 비롯된다. 2007년에 10만장을 넘긴 음반은 단3장으로 대한민국 음반시장이 깊은 불황의 늪에서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음악성이 있는 음반을 만들어서 흑자를 기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자극하는 것이 연예기획사 측에서는 훨씬 이익이 남는다. 데뷔 때는 풋풋한 이미지였다가 섹시한 콘셉트로 바꾼 아이돌을 쉽게 볼 수 있을뿐더러 아이돌이라는 특성 자체가 기획 자체를 섹시코드로 잡는 경우도 많다. 섹슈얼리즘을 내세운 아이돌 그룹들은 이제 의상과 안무, 그리고 가사까지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다. 여성 아이돌 그룹 미쓰에이(Miss A)는 JYP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박진영 특유의 섹슈얼리즘이 잘 묻어나 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도 성인여성의 요염함을 드러내는 콘셉트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의상 콘셉트도 성인여성의 섹시함을 과시한다. 그러나 미쓰에이의 멤버인 수지의 나이는 17세인 미성년자이다. 아이돌의 평균 데뷔 나이가 10대 중후반으로 점점 낮아지는 추세이고 이들을 대상으로 성 상품화가 이루어고 있다. 사랑이나 이성간의 감정을 선정적으로 보여주는 현재 대중음악의 특징을 미성년자 아이돌이 부른다면 주체성과 가치관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미성년자 아이돌은 청소년과 근로자로써 주어진 권익에 대해 합당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연예기획사에 비해 상대적인 약자인 미성년자 연예인을 보호하는 관련 법규는 미비하다. 현재 표준계약서가 존재하지만 실제로 지켜지는 일은 드물다. 대중적인 걸 그룹인 f(x)의 설리, 카라의 강지영, 지피베이직의 헤나와 제이니 등의 미성년자 아이돌은 취직인허증 없이 활동하고 있다.2010년 11월 9일에 문화체육관광부는 청소년 연예인을 위한 성 보호와 학습권, 근로권을 보장하는 ‘청소년 연예인 권익보호 대책 발표’했다. 무분별한 연예기획사 난립을 막기 위해 연내 연예 기획업 등록제 도입을 검토 중이다. 이를 비롯해 연예기획사와 소속 연예인간 신뢰 기반의 상생시스템 확립을 위해 공정거래위원회와 같은 유관부처 등과 협력하여 내실 있는 표준계약서를 보급하고 개선해 나가는 한편, 산업계의 표준계약서 준수에 적극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심야시간대에 연예활동을 제한하는 법규를 마련하는 등 청소년 연예인에 대한 보호를화산업의 주요 요소가 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대중문화계가‘육체의 바다’에 빠졌다. 더 이상 음악성이 아닌 선정성이 대중의 관심사가 된지 오래이다. 대중의 기호는 이제 음악성 보다 선정성을 선호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선정성’이라고 치기만 해도 연관검색어로‘선정성 뮤직비디오’가 올라오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잘 아는 가수들도 선정성을 앞세운 노이즈 마케팅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선정성이 곧 경쟁력인 것이다. 가수들의 선정성은 단순히 문화산업에 영향을 미칠 뿐 만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는 대중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중은 언제부터 시작 된지도 모를 가수들의 선정성에 무뎌져가고 있다.대중이 점점 선정성에 익숙해 갈수록 선정성의 수위는 높아져 현재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크게 보면 당장 대중에게, 세분화해보면 아직 정체성 확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중들은 아이돌을 내세운‘성(性)의 상품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했듯, 정작 문화산업의 중축인 이들은 보이면 보이는 그대로 느껴지는 그대로 매체를 수용한다. 방송매체와 기획사 그리고 매체들로부터 이들은 변별력 있는 수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인들은 점차 어려지는 아이돌을 보며 ‘성의 상품화’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반면, 청소년들은 아이돌을 우상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성인을 보며 정체성을 쌓아가려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성인아이돌을 보며 그들이 생각하는 소위 어른이 할 수 있는 행위를 모방한다. 모방행위의 대부분은 아이돌의 선정성 행위와 연관이 있다. 때문에 아이돌의 선정성은 이들 모방심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한다고 할 수 있다. 청소년들은 아이돌의 성(性)표현 접촉으로 성과 관련된 비행을 유발시키는 직접적인 효과를 가지기 보다는, 오히려 여성에 대한 가치를 비하하는 관념 및 왜곡된 성의식(강간신화)과 더 나아가 반사회적 태도와 심성을 형성하는 데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속된말로 TV를 틀었다 하면 아이돌의 선정성이 한다.
Ⅰ. 중동의 이슬람 원리주의1. 와하비즘18세기 말엽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에 의해 일어난 와하비 운동은 아랍인들이 코란의 가르침대로 살자는 이슬람교의 민족 운동이다. 이슬람교의 타락과 형식주의를 비판하여 순수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으로 인해 와하브 왕국이 성립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가 리야드로 된 것은 이 운동이 리야드에서 일어난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와하비즘은 아랍민족주의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와하비즘은 이슬람 복고주의 또는 이슬람 정통주의 운동으로서 그들의 주체는 이슬람이었지 아랍민족이 아니었고, 타락한 무슬림의 숙청이 목적이었지 아랍민족국가 수립이 목적은 아니었다. 와하비즘은 금욕적인 생활과 엄격한 준법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한 면에서 1640∼1660년 영국에서 청교도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청교도 혁명과 비슷한 면이 있으나 와하비즘이 이슬람 부흥운동과 무슬림들의 각성에 시발점이 되었으면서도 다른 일반 무슬림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라비아 반도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나친 보수적 경향과 제한되고 한정된 종교관, 그리고 과격행동주의 때문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1964년 왕위에 오른 파이잘(Faisal)이 와하브 교단에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교단은 왕가의 통치를 지지하면서 와하비즘은 점차 극단적인 운동으로 변질되었다.2. 사누시 운동와하비즘보단 온건한 사누시운동은 무하마드 이븐 알리 앗세누시에 의해 주창된 운동이다. 사누시 운동은 독특한 사상을 기반으로 자위야라는 조직을 만들어 유럽 열강의 팽창주의에 맞서 새로운 무슬림사회 구성의 모델을 제시했다. 와하비즘과 사누시 운동 간의 공통된 특성은, 초기 정통주의 운동으로서 ‘샤리아’를 강조하고 있고, 오염된 이슬람의 순화를 역설하고 있으며, 둘 다 세계적인 열망을 지니고 있는 그들의 메시지를 온 인류에게 전파시킬 의무와 사명을 역설하고 있다. 와하비즘과 사누시 운동 모두 국가와 정치체제 수립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이들은 사우디왕국과 카다피 혁명제정을 목표로 삼는다. 이슬람 정신의 회복을 위해 폭력을 쓰는 대신, 병원과 학교 건설 등 빈곤층에 대한 의료, 복지 지원 활동에 집중하면서 국민적인 지지를 받아 이집트는 물론 10여 개 인근 국가로 세력을 빠르게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이슬람 단체 가운데 지지 기반이나 조직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1948년 무슬림형제단의 일원이 마후무드 파흐미 노크라쉬 당시 이집트 총리를 암살하고, 1952년 이집트 청년장교단이 나세르혁명으로 집권하면서 군부의 탄압을 받아왔으며, 1954년 나세르 전 대통령 암살 시도 배후로 지목되어 테러단체 명단에 올랐다. 군부의 탄압을 피해 무슬림형제단원들이 시리아,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으로 망명하면서 이들이 사상이 북아프리카와 중동 등 아랍 전역으로 퍼졌다. 지난 2012년 6월에 군부 집권 60년 만에 이뤄진 첫 직선 투표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지원하는 모하메드 무르시가 당선됨으로써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이슬람 정권이 탄생하였다.4. 이란 혁명과 전통주의제2차 세계대전 후의 팔레비왕조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하에서 미국의 지원과 막대한 석유이윤에 안정기반을 구하고 국민에게는 탄압정치로 일관하였다. 1962년 이래의 백색혁명이나 1970년대의 석유이윤으로 추진한 근대화는 신흥특권계층을 대두시켰으나, 이슬람원리의 전통을 붕괴시키고 농촌과 도시의 상공업 바자를 몰락, 파산하게 하였다. 이로 인한 인구이동으로 도시는 급팽창하였으며 국민들은 비밀경찰 사바크가 지배하는 암흑정치 아래 소외와 억압을 당하게 되었다. 이란 국민의 태반을 차지하는 이슬람교의 시아파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 등은 이러한 상황을 이슬람교도 공동체(움마)의 위기로 보고 본래의 이슬람원리주의에 기초한 움마의 재생과 결부시켜 국민에게 왕제 타도를 제창, 반국왕운동의 선두에 섰다. 국내의 좌익세력도 여기에서 사회적 변혁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공감하였으며, 바자 상인층도 호응함으로써 이슬람원리주의를 축으로 하는 광범한 국민결합대운동이 전개되어 팔열 명의 자산을 동결하고 여행을 제한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에는 또한 카다피 정부가 벌인 행각에 대한 국제 형사 재판소의 조사가 언급되었으며, 이후 카다피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3월, 압둘 잘릴이 이끄는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 아래 당초 난립하고 있던 반정부 세력의 자치 정권이 결집하기 시작했으나 장기전의 양상을 나타냈다. 이러한 혼란을 봉기나 반정부 시위 대신 내전이라고 표현하는 언론이 나타났다. 반정부 세력은 각국에 군사 개입과 비행 금지 구역의 설정을 요청하였다. 후에 프랑스 정부는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를 리비아의 정식 정부로 승인하였다. 나토군 이외에 여러 연합군이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하며 트리폴리가 함락되었다. 카다피 정권의 마지막 보루였던 카다피의 관저 '바브 알아지지아'가 시민군측에 함락되면서, 수도 트리폴리 시내 전역이 시민군측의 통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2011년 10월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를 공격하여 10월 20일에 그를 사살하였다.Ⅱ. 중동의 이슬람 원리주의자1. 사이드 쿠틉사이드 쿠틉은 소년 시절 전통적인 이슬람 교육을 받았고 카이로에서 서구 사상과 문화를 배워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 일하면서 그는 문학도로서 소설을 쓰고 문학 평론을 발표하여 소장파 문학가로 이름을 얻게 된다. 당시 대부분의 아랍 지식인처럼 서구적인 근대화의 길에 공감했던 그는 1948년 인생의 가장 극적인 전환을 맞게 되었다. 교사로서의 능력과 성실함을 평가받아 이집트 교육부의 장학사로 재직하던 사이드 쿠틉은 1948년 정부지원으로 2년간의 미국 유학 기회를 얻었다. 워싱턴의 윌슨 교육대학과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 등에서 수학하며 깊숙이 접한 미국생활은 그에게 인식의 전면적인 전환을 불러왔다.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과 도덕적 부패, 성적 문란을 접한 그는 서구적 근대화를 통한 이슬람의 혁신이라는 기존의 믿음을 완전히 부정하게 된다. 그는 미국적, 서구적 삶의 방식을 원시적이며 야만적인 '자힐리야'로 여기고 오직 이슬람으로의 헌신만이 이집트와 무슬 중축이 되었고 현대 이슬람 사상을 낳는 산파 역할을 하였다. 무함마드 압두는 카이로에 있는 알-아즈하르 대학에 입학하여 정통 울라마로부터 이슬람 법과 종교학을 배웠다. 10대 시절부터 신비주의에 빠져있던 그는 명상과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알 아즈하르 대학 재학 중 알 아프가니와 친교를 맺고, 후일 이집트의 수상이 되는 사이드 자글룰과 함께 알 아프가니의 제자가 되어 그로부터 서구 사상과 과학의 세계, 그리고 전에는 알지 못했던 여러 다른 이슬람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그러나 알 아프가니의 영향과 1880년대 초 이집트의 정치적 위기로 말미암아 압두는 영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터키의 이집트 총독에게도 반대하는 반정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고, 1882년에는 스승과 함께 영국군에 대항하는 우라비 혁명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파리로 추방당하였다. 압두는 이슬람의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면을 분석했고, 과거의 정통 이슬람세계가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세계였으며, 종교와 과학이 이슬람의 기반을 이루는 한 쌍의 근원이라고 간주하였다. 그가 전개한 개혁운동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애국주의였다. 그는 조국을 자랑스러워하는 민족이 그렇지 않은 민족보다 훨씬 더 적으로부터 조국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고, 애국심이 제국주의자나 독재자의 포악한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원동력이라 생각하였다. 압두는 또한 무슬림 사회의 개혁이 이슬람에 대한 재해석과 국가의 교육 및 사회개혁 의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1888년 추방지에서 돌아온 그는 이미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있는 정치적 현실을 받아 들이고, 정치적인 면보다는 종교와 교육 및 사회개혁에 눈을 돌렸다. 그는 알-아즈하르의 교육 개혁을 주도하였고, 이집트의 그랜드 무프티(최고 종교 지도자)로 재직하는 동안 대학의 교과과정을 근대화 했으며, 현대식 교수법을 전통교육에 접목 시켰다. 그의 개혁사상 대부분이 그의 제자인 라쉬드 리다와 함께 출간했던 알-미나르지에 발표되었다. 그는 이슬람에서 금기시된 은행 이자부터‘압두의 대변자’로 불리고 있다. 1865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린 시절 이슬람 전통 교육기관에서 전형적인 이슬람 교육을 받았다. 유년기에 알 아프가니와 무함마드 압두를 비롯한 근대 이슬람 개혁주의자들의 글에 감명을 받은 라쉬드 리다는 후에 무함마드 압두의 제자가 되어 그의 사상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 노력했다. 라쉬드 리다는 스승 무함마드 압두와 함께 출간했던 알-미나르 지에서 무함마드 압두의 사상과 개혁적인 이슬람 법 해석을 발표했으며, 결국 ‘압두의 대변자’라는 호칭을 얻었다. 라쉬드 리다는 이슬람 세계가 쇠퇴한 이유는 진실한 이슬람 근본주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진실한 이슬람 근본주의를 초기 이슬람 시대(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의 이슬람 전통)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로 인하여 라쉬드 리다는 그의 스승들보다 한층 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고, 서구적인 것에는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 그는 다른 이슬람 개혁주의자들과 달릴 단 한번도 서구로 여행하지 않았고, 특히 영국이 이슬람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암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와하비즘의 찬양자였으며, 이슬람 세계가 서구에 대항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이슬람의 원리, 즉 코란, 하디스,수나로 돌아가는 길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라쉬드 리다는 이슬람의 부흥을 위하여, 이슬람 공동체 움마가 바로세워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책에서 그는 평소 자신이 생각해 왔던 칼리프제 이론을 정리했다. 라쉬드 리다의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칼리프제에 대한 선행 연구를 분석한 것이며, 두 번째 부분은 역사 속에서 칼리프제가 운영되어온 것에 대한 자신의 역사적 해석이다. 세 번째는 진정한 칼리프 제도의 부흥에 대해 무슬림 사회에 고하는 라쉬드 리다의 호소와 충고로 되어 있다. 이 책에서 라쉬드 리다는 가장 이상적인 칼리프제는 정통 칼리프 시기였으며, ‘종교의 이익과 세계적 번영’을 위해서 오늘날의 칼리프제 역시 혈통이 아니라 지도자의 능력과 정신에 따.
인생은 아름다워주제 :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과 영화에 나타난 정치 현상인생은 아름다워란 영화는 파시즘과 학살의 순간에도 가족을 향한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등과 같은 영화들은 당시의 상황을 무겁게 그려내는 반면에 인생은 아름다워는 귀도(로베르토 베니니)를 통해 끔찍했던 당시의 상황을 웃음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가족을 향한 사랑은 한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0년이 지난 후에도 이 영화가 오늘날에도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사랑만이 아닌 1930년의 시대상황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실제 경험담이 있는 영화이므로 영화가 묘사하는 시대상황은 무척이나 사실적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감행한 이유와 영화에 나타나는 시대적인 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이탈리아에서 극악한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1930년대말, 귀도(Guido Orefice: 로베르토 베니니 분)는 운명처럼 초등학교 교사인 도라(Dora: 니콜렛타 브라스키 분)를 만난다. 도라에겐 약혼자가 있지만 그 사랑을 운명이라고 생각한 귀도는 그녀와 함께 마을을 도망친다. 귀도의 순수하고 맑은 인생관과 꾸밈없는 유머에 이끌렸던 도라는 그와 결혼하여 아들 조슈아를 얻는다. 평화롭기 그지없던 이들 가족에게 닥쳐온 불행, 독일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따라 귀도와 조슈아는 강제로 수용소에 끌려간다.남편과 아들을 사랑하는 도라는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자원하여 그들의 뒤를 따른다. 귀도는 수용소에 도착한 순간부터, 조슈아에게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실은 하나의 신나는 놀이이자 게임이라고 속인다. 귀도는 자신들이 특별히 선발된 사람이라며 1,000점을 제일 먼저 따는 사람이 1등상으로 진짜 탱크를 받게 된다고 설명한다. 어릴 때부터 장난감 탱크를 좋아했던 조슈아는 귀가 솔깃하여 귀도의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다.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셀 수도 없이 넘기며 끝까지 살아남는다. 마침내 독일이 패망한다. 그러나 혼란의 와중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귀도는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사살 당한다.1,000점을 채우기 위해서는 마지막 숨바꼭질 게임에서 독일군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믿는 조슈아는 하루를 꼬박 나무 궤짝에 숨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정적만이 가득한 포로수용소의 광장에 조슈아가 혼자 서 있다. 누가 1등상을 받게 될지 궁금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조슈아 앞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엔군인 미국 탱크가 다가온다.독일은 제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으므로 식민지를 모두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내의 물가는 치솟았습니다. 국민들의 정서가 매우 안 좋아진 가운데 히틀러가 등장한 것입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으로 싸운 폴란드에 의해 독일 영토 일부분을 빼앗겼는데 이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후 구영토의 반환을 폴란드에 여러 차례 요구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폴란드 내에선 독일을 공격해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정치 환경은 히틀러에겐 무척 곤혹스런 일이었습니다. 독일 내에선 범독일 민족주의의 발언권이 커짐에 따라 과거 독일 제국의 영토를 되돌려 받길 원하는데 폴란드는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군사적인 해결책 외에는 히틀러에게 주어진 선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군사적인 해결책도 쉬운게 아니었는데,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폴란드와 상호 방위조약으로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의 참전을 불러오게 되고 독일은 동시에 2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럴 경우 독일은 제 1차 세계 대전처럼 물량에 압도당해 전쟁에 패하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히틀러는 1935년 독일의 재무장을 천명했고 1939년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그 후 그는 독일이 이렇게 망가져 있는 것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의 탓으로 몰아세우며 유럽인들의 오래된 반 유대인 감정에 불을 당겼습니다. 결국 히틀러가 영도하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통칭 ‘나치스’가 독일인들의 민심과 사회주도권을 움켜쥐기 시작하자, 나치스의 수하인 SA(돌격대)들은 유대인에 대해 잔인한 테러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수상에 이어 총통에 취임하자, 유대인에 대한 압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유대인 학살의 원인입니다.영화에서 주의깊게 살펴봐야할 것은 영화의 배경인 파시즘입니다. 이탈리아는 가장 전형적인 파시즘 국가입니다. 내셔널리즘의 호소를 통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였고, 정치와 경제의 긴밀한 협동체계를 꾀함으로써 파시즘을 창출하였습니다. 이를 주도한 무솔리니는 을 행하여 계급 개념 위에 민족 개념을 두고 임을 주장하였습니다. 1922년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는 자본가와 노동자 쌍방의 직업조합을 결성하고, 협동체 방식에 의한 국가로 개편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맨 위에 가 있고 그 아래 설치된 22개 협동체의 개별적 주도권을 존중해주면서 국가 이익에 조화시키는 권한을 지녔습니다. 34년 2월 협동체에 입법권이 주어짐으로써 무솔리니는 강력한 국가건설과 세계진출의 꿈을 결합시킬 수 있었습니다. 1933년 1월 독일 나치정권과 손잡고 에티오피아 침략, 국제연맹 탈퇴, 3국 동맹체결을 거쳐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도국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전체적 배경이고, 이 영화는 처음은 1930년대정도로 파시즘이 판치는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정책과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우세로 끝나가는 전쟁의 끝나는 기간까지입니다. 영화에는 파시즘을 나타내는 장면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화에서 귀도가 장학사로 사칭하고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장학사의 임무는 민족의 우월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때 당시에는 장학사가 많은 학교들을 방문하여 민족의 우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뭉치게 하는 일들이 실제로도 많았습니다. 파시즘이 나날이 번창할 때 이 들은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이들에게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우월성에 대해 당연시 여기는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