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파파야의 향기(The Scent of Green PaPaya)-‘익은 파파야는 옅은 노란색이고 달콤한 설탕 맛이 난다’자극적이고 화려한 색감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에 초록빛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휴식을 가져다주는 영화이다. 주인집 아들의 친구 쿠엔을 보며 수줍게 웃는 무이는 쿠엔을 위해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도 되겠냐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오랜 시간 축적된 사랑도 다르지 않다. 노마님에 대한 감정을 간직하고 언제쯤이나 볼 수 있을까 걱정하며 무이에게 안부를 묻는 노인 탄의 사랑도 마치 무이가 파파야 씨를 어루만져보듯이 조심스럽고 애틋하다.이 영화는 큰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초반에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단조롭고, 심지어는 대사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무이와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이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연스럽게 숨을 죽이고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1950년대 베트남, 소녀 무이는 어느 집의 하녀로 들어가 낯선 도시 생활을 시작한다. 악기 연주만을 낙으로 삼는 무책임한 주인과 따뜻한 성품의 주인마님, 주인마님의 세 아들, 불공을 드리며 죽기만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있는 집이다. 무이는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심부름을 하면서 점점 적응해나간다. 무이 또래의 딸을 잃은 주인마님은 무이를 죽은 딸처럼 여기며 아껴준다. 그러나 무이가 성인이 되고 난 후, 날이 갈수록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자 어쩔 수 없이 무이를 아들의 친구 쿠엔의 집으로 보내게 된다. 쿠엔은 약혼녀가 있었지만, 무이에게 사랑에 빠지고, 이전의 집과는 다르게 현대적인 쿠엔의 집으로 간 무이는 쿠엔과 마침내 결혼하게 된다.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베트남의 이미지는 그리 구체적이지 않았다. 베트남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라면 베트남 전쟁, 습한 기후의 동남아 국가라는 단편적이고 먼지 낀 이미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베트남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초록색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더욱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청각적 요소들은 이런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설명을 위한 구구절절한 대사들은 모두 배제시켰다. 대신에 귀뚜라미 소리, 전통악기의 연주 소리, 비오는 소리, 개구리 소리, 새 소리 다양한 자연의 소리를 담아냈다. 적절한 화면에서 등장하는 소리들은 베트남의 어느 시골 오래된 나무 아래 앉아있는 느낌을 주는 것은 물론, 주인공들의 심리 상태와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더불어 영화에 삽입된 음악들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호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베트남의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 드뷔시의 음악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약혼녀가 쿠엔에게 마음이 변했냐고 묻는 장면에서 쿠엔은 잔잔하던 피아노 연주곡을 강렬한 곡으로 바꾸어 치면서 그 마음을 대신 이야기한다. 어떤 말보다도 잔인하고 확실한 의사표현이다.더불어 ‘그린 파파야의 향기’는 당시의 베트남 가정집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베트남의 자연을 그대로 화면에 담아내기 때문에 베트남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영화이다. 대부분의 베트남 소재 영화들이 베트남 내의 전쟁과 상처에 대해 다루고 있는 반면 베트남의 소소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다룬 영화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이 영화는 베트남이 이렇게나 아름답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한 베트남의 역사를 거시적 관점에서 논하려는 게 아니다. 한 소녀의 성장과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에 더 자연스럽고 잔잔한 울림이 있다.불교 문화권답게 영화 속의 집안 곳곳에는 불상이 보이고, 매일 제단에 향을 피우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통금시간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 베트남 전통악기의 모습, 아오자이를 입은 주인공, 다채로운 베트남 음식 등 영화 속 모든 장치와 배경이 베트남의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모기향이 타고 있는 모습도 사실적이고 인상적이다.한편, 이 영화가 끝나고 가장 궁금한 것은 파파야의 향기와 촉감이다. 그린파파야는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키우는 식물이다. 특이한 방식으로 파파야를 다듬어 반찬으로 내놓고, 반을 갈라 그 안의 씨를 어루만지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끝날 무렵, 이 영화의 제목으로 이보다 알맞은 것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그 열매 자체가 영화 속에서 가지는 상징성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남의 집에서 서투르게 밥을 하고, 청소를 하는 무이의 모습은 마치 덜 익은 파파야의 순수함이 묻어난다. 아직은 달달함도 없고, 완벽한 상태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짠하고 안쓰럽다. 세수하고 밥하고 청소하는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무이의 삶은 수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그 자체의 싱그러움이 온 집안에 넘쳐나는 느낌은 든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갈 무렵, 무이는 글자를 배우면서 익은 파파야는 노란색이고 단맛이 난다는 글을 읽는다. 익은 노란 파파야의 성숙함과 달콤함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마침내 쿠엔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는 무이의 모습을 대변하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배우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무이는 진정으로 ‘무이’라는 한 명의 여성으로 거듭난 것이다.
Ⅰ. 미얀마 민주화와 문제제기1) 미얀마 민주화에의 문제제기지난 3월 30일 미얀마에서 자유선거를 통해 군사정부에서 문민정부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54년 만에 첫 문민정부가 출범한 데에는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핵심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지난 1988년 창설된 이후 ‘888항쟁’을 주도했으며 결국 군부 정권은 직접선거를 허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1월 총선에서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큰 승리를 거두며 미얀마 최대 정당으로 부상했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표면적으로 보면 미얀마에도 정말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정말 총선과 대선에서의 승리가 민주화의 전망까지도 밝게 해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이러한 의문점을 가지고 미얀마의 민주화 전망에 대해 분석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얀마에서의 1900년대 식민지 시대를 거쳐 독립, 그리고 그 후의 군부세력 집권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가기까지 시대적 상황이 우리나라와 상당히 비슷함을 알게 됐다. 그러나 2016년 현재 한국은 민주주의 공고화 단계에 근접했고 미얀마는 아직 군부독재에 고통을 받고 있다.2) ‘지연된 민주화’와 ‘성공적 민주화’앞으로 본 고에서는 비슷한 상황의 두 국가였지만 현재 다른 민주적 양상을 보이는 미얀마와 한국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그 중 민주화를 저해할 수 있는 요인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미얀마를 ‘충분한 능력은 있지만 어떠한 요인이 있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한 지연된 민주화의 국가’로, 한국은 ‘민주주의 공고화를 이룩한 성공적 민주화의 국가’로 가정했다. 요컨대 우리는 한국과 미얀마 사이 민주화 과정에서의 비슷한, 혹은 다른 특성들을 비교하면서 그 요인들이 미얀마의 민주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혹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어떻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는지에 대한 것까지 폭넓게 다룰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얀마의 민주화 과정을 한층 심도 있게 분석해 보고, 특히순을 인정했고, 1974년 신헌법에 의해 미얀마식 사회주의의 수정이라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사회주의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사기업의 존재와 활동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5회에 걸친 4개년개발계획 등도 실시했다. 이로써 미얀마의 경제는 잠시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들어 국가재정부족과 석유 부족, 외환위기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는 미얀마의 대규모 민중 봉기로 이어진다.1962년 미얀마식 사회주의와 그에 따른 경제적 성과는 1962년 이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 성장한 한국의 경제와 비교해볼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지표로, 1970년대 미얀마의 GDP는 총 21억 달러에서 64억 달러로 약 3배의 증가에 그쳤으나, 한국은 81억 달러에서 932억 달러로 약12배나 증가하였다. 또한 한국의 GDP별 생산구조는 산업과 제조업 부문이 증가했지만, 미얀마는 농업부문만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제 성장의 지표인 도시화 부분 역시 한국이 미얀마를 크게 앞질렀다.비슷한 시기 군사정권을 경험하고 비슷한 시기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한국과 미얀마의 경제가 이런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두 국가 간의 “상이한 경제체제”의 도입이다. 네윈은 쿠테타 당시, 독립 이후 외국인에 대한 민족주의, 부자들에 대한 저항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주의식 경제체제를 채택했다. 농업이 크게 발달해 있던 미얀마의 상황에 맞는 자신들만의 사회주의 모델을 구축한 것이다. 반면 한국의 경우, 이념적 갈등이라는 국제질서 속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아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자연스럽게 도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민생고 해결과 경제재건이라는 명분으로 1961년 쿠테타를 일으켰다. 한국은 기술과 자본은 물론, 천연자원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노동집약적인 수출 산업에 집중했다.두 번째로, “국가의 유형”에 차이가 존재한다. 미얀마는 소수의 권력층에 의해 국민이 집단적 약탈을 당하는 약탈국가, 한국은 국가가 개입하여 강력한 산업정책을 집행하는 발전국가의 성격을 보는 신정부 출범 이후, 과도정부가 아닌 향후 완성될 정치 체계에서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기 위한 일환으로서 자율성을 극대화시키려는 노력을 해 왔는데, 그 양상은 실질적인 측면과 제도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우선 실질적으로, 내각을 구성하는 민간 출신 인사가 늘어났음에도 여전히 구성원 다수가 군부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1974년부터 현재 시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과거를 먼저 살펴보면, 1974년 두 번째 헌법이 제정되던 당시 군사정부의 권력이 민간정부로 이양되기 시작하지만, 중앙기구의 구성원들이 현역 및 퇴역 군인들 다수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 구조는 군정과 유사한 형태를 띠었다. 특히 군인들이 퇴역한 뒤 문민신분으로서 인민의회를 장악함에 따라, 인민의회와 현역 군인 간의 협력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군부는 일정 부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군부 행정부에서 민간 행정부로의 변화가 더 뚜렷이 나타나긴 하나, 2012년부터 2015년까지 군부출신 인사는 그 수를 꾸준히 유지해 왔고, 민간출신 인사의 비율은 매번 절반을 채 넘지 못하고 있다. 즉 여전히 군부를 중심으로 한 권력 나눠먹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상위 권력층인 대통령과 부통령 2인도 군부 출신의 인사가 맡을 가능성이 상존한다. 대통령 선출은 의회에서의 간접 선거를 통해 진행되는데, 특히 어느 누구도 일정 득표수 이상을 받지 못해 당선인이 결정될 수 없는 때에는 최고득표자 두 명을 대상으로 재투표의 절차를 거친다. 이 때 양원 각 1인과 군부 출신 1인이 후보로 나오기 때문에, 군부 출신 인사는 최소 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으며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러한 투표 방식 외에 민간 출신의 인사가 다수 등용될 만큼 인적 기반이 튼튼하지 않다는 점도 군부 출신 인사의 당선 확률을 높여주는 요인이다. 1962년 군부가 관료사회를 장악했던 탓에 연줄 없는 민간인이 고위 관료로 뽑힐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제도적인할 수 있었다. 둘째, 반면 반정부 엘리트들은 군부 엘리트와 달리 강한 결속력을 갖지 못해 반정부 세력의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약한 결속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과 독자적 정당 결성이라는 반정부 엘리트 간의 갈등구조를 형성시켜 더 이상 반정부 민주화 운동을 전개할 수 없게 했다.미얀마 민주화 운동 과정 속 엘리트는 우 누, 아웅지, 틴우, 아웅산 수치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우 누는 1962년 네윈의 쿠데타 이전까지 수상을 지냈으며, 1988년 국민민주주의연합(NLD)을 결성했다. 하지만 반정부 지도자들의 동의 없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이를 합법정부로 승인해 줄 것을 각국 대사관에 요청하는 등의 독자노선을 고수하여 반정부 세력의 분열을 초래시켰다.아웅지는 네윈의 쿠데타에 참여하여 2인자로 등장했으나 민정 복귀가 아닌 군정의 지속을 반대하며 민주화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그는 이후 국민민주주의연합 결성에 참여하고 의장으로 취임하지만, 동료들과의 갈등을 겪고 독자적 조직인 국민연합민주당(UNDP)을 창당함으로써 주류 민주화 운동 세력으로부터 이탈했다.틴우는 1974년 민정 이양 당시 정부 관료를 지냈으며, 1988년 즉각적 민정 실시 요구의 서한을 당시 대통령인 마웅마웅에게 보내며 민주화 운동 세력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국민민주주의연합에 합류하게 되며 아웅산 수치와 노선을 함께했다.아웅산 수치는 국민민주주의연합 결성 당시 부의장으로서 반정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가택연금에 처하게 된다. 1990년 5월에 치러진 미얀마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를 당수로 한 국민민주주의연합은 59.5%의 지지를 받아 총 485개의 의석 중 392석을 차지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더불어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이끈 공을 인정받아 1991년 노벨상과 1995년 네루상을 수상하며 미얀마에서 단순한 야당 정치지도자 그 이상의 위상을 갖게 되고,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또한 엘리트 중심으로 진행되는 모습이 나며, 도로와 교량 건설과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도 막대한 지원을 하였다. 또한 1987년 이래 1억 5천만 달러의 무기를 제공하여 미얀마군을 중국산 장비로 무장시켰고, 이외에도 중국은 매년 800만 달러에 이르는 원조를 제공했다.미얀마와 중국의 이러한 협력 증대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미얀마에 대한 서방세계의 외교적 고립정책과 제재였다. 즉, 1988년 9월의 소 마웅의 쿠테타로 인해 미얀마는 서방 세계로부터 강력한 비난과 경제제재를 받으면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중국은 바로 이러한 공백상태를 파고들어 미얀마 군부에 탈출구를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때 신군부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외적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국과 거래를 한 것인데, 이로 인해 이후 중국은 미얀마의 대외 교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중국의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미얀마는 1988년 민주화 운동 당시 약 19만 명에 불과하던 미얀마군을 1990년에는 23만 명으로, 1992년에는 30만 명으로 증가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중국을 통해 미얀마에 제공된 군사무기들은 민주화 운동 탄압에 활용되었고, 또 공산주의 반군과 소수민족반군을 소탕하는데 사용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얀마 군부의 통제력을 강화시켜준다.미얀마 신군부 정권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강력한 비난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미얀마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하게 된 연유는 바로 미얀마가 지닌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다. 미얀마는 중국 운남성에서 서쪽으로는 방글라데시·인도·중동 지역 등과,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로 진출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또한 뱅골 만에 중국의 해군을 진출시킴으로써 카시미르 지역의 분쟁과 티베트 병합 등으로 인해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인도의 동남부 지역을 견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ASEAN 국가들 간의 AFTA가 실현되면 동남아시아는 거대한 시장으로서 주목받게 되는데, 중국은 미얀마를 통해 이들 지역에 진출함으로써 엄
의원정수는 현행 유지, 비례대표제는 강화해야2014년 10월 헌법재판소는 현재 3:1인 선거구별 인구의 편차가 너무 크다는 이유를 들어 2:1로 조정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에 따라 국회 정개특위는 2015년 총선의 6개월 전인 10월 13일까지 선거구 획정안을 결정짓고 11월 13일까지 선거법 개정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결국 인구대표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여야는 선거구 획정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선거구 조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역구 의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고, 여야가 국회의원정수 확대 및 비례대표 축소와 관련해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국회의원은 지역구 246명, 비례대표직 54명으로 총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비율을 어떻게 조정하고 총 인원수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긴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국회의원정수에 대한 사회 각 층의 의견은 어떨까. 우선 대부분의 국민들은 의원정수 확대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반대를 넘어서서 축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들도 적지 않다. 물론 국민 대다수가 의원정수나 선거제도에 대한 구체적이고 깊은 이해를 통해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와 국회의원의 행태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국회의원이 더 늘어난다고 하니, 일단은 거부감이 드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반면 지난 7월, 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대부분인 71.2%가 비례대표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해야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학자들은 의원정수 역시 현행 300명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학자들이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써 의원정수에 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선관위는 이에 대해 ‘연동형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주장한다. 300개의 의석을 유지하되 지역구를 200명로 줄이고 비례직을 100명으로 늘려서 연동형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적용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분할해서 권역별 인구수에 따른 의석수 배정, 2대 1로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 배분 등의 주장을 담고 있다.한편, 새누리당은 선거인구편차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지역구의 수가 늘어나게 되는 만큼, 비례대표를 줄여 현행 국회의원정수 300명을 유지하자는 입장이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연)은 비례대표 감축에 반대하며 의원정수를 현행 300명에서 269명으로 늘리고, 지역구는 유지하되, 비례직을 현행 54명에서 123명으로 늘릴 것과 함께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주장하고 있다. 정의당 등의 소수 정당인 경우 사표의 의미를 살리고 유권자의 뜻을 비교적 정확히 전달하는 비례대표 유지에 대한 지지의 입장을 보인다.결국 새누리당은 지역구를 늘리고 비례대표를 줄이자, 새정연은 비례대표를 줄일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여야의 논쟁의 초점이 비례대표 의석수로 맞춰지면서, 급기야는 비례대표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까지 가중되었다. 비례대표가 기존의 기능과는 다르게, 지역구 진출의 관문으로 왜곡되고 있으며, 비례대표에 대한 이미지가 계파공천, 당대표 인사 지명 등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이렇게 각 사회의 목소리가 다른 상황에서 결국 선거를 치르기 전에는 의원정수 및 비례대표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이번에 합의를 이루지 못해 현행을 유지하더라도 한번 쟁점화가 된 이상, 다음 선거가 다가오면 이러한 논쟁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따라서 이 논쟁에 대한 적절한 개선방안을 찾자면, 국회의원정수는 현행을 유지하되, 비례대표의원정수는 확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된다.분명 우리나라는 여타 선진국에 비하여 한 명의 의원이 대표하는 국민의 수가 많은 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보다 인구 당 국회의원의 수가 훨씬 적은 미국이나 일본의 의회는 잘 운영되고 있다. 또한 현재 국회의원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들은 다른 선진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특히나 의원에게 들어가는 세비와 보좌진, 차량 유지비 등을 합치면 연간 의원 1인당 약 7억 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이렇게 많은 특권을 누리고 많은 세금을 지출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의 국회가 정쟁과 의미 없는 당파싸움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국회의원의 숫자가 적어서 제대로 입법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결국 국회의원들이 먼저 이러한 행태를 개선하고, 스스로의 책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국회의원정수 확대는 시기상조이다. 아무런 혁신과 자정의 노력 없이 단순한 필요의 의해 의원정수만 늘린다고 해도, 국민의 대표성은 향상되지 않을 것이며, 의원들의 기득권도 축소되지 않을 것이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에는 신선한 정치세력의 등장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국회의원정수를 확대하지 않고 기존 거대정당의 관행과 관습을 깰 수 있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비례대표제의 확대이다.현행의 선거제도가 비례성과 대표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례대표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정당에 1표를 투표하는 것은 국민의 정당에 대한 지지도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 표로 선출되는 비례대표의원이 최소 100명은 되어야 한다. 거대 정당에 유리한 소선거구제도의 특성상 사표문제 역시 심각하다. 최근 13대 이후 19대까지 총선의 분석 결과를 보면, 당선자들은 평균 약 987만 표를 얻었지만, 낙선자들은 이보다 많은 1023만 표를 얻었다. 이런 현상을 보완하려면 비례대표제가 확대되어야 한다.현재 심지어는 유권자들이 표를 던진 다수의 의견도 선거가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히고 왜곡되고 있다. 따라서 양당제화 되어가는 국회에 보다 많은 여러 소수정당들이 나타나고, 다양한 의견들이 국회에 반영되어야 한다. 지금의 정치는 기득권층의 권리 지키기에 급급해 보인다.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여야의 싸움으로 논의되던 담론들에 실증을 느낀 국민들 또한 많다.그러나 국회의원정수를 현행 유지하는 상황에서 비례대표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례대표가 늘어나는 만큼 줄어드는 지역구 의원들의 양보가 필요하다. 자신들의 권리,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나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는 이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일부 내려놓기로 합의하는 것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또한 비례대표의 수를 늘린다고 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볼 수는 없다. 비례대표의원이 증가할수록 소수 집단의 이익이 대변될 기회가 증가하는 반면, 그 비례대표의 명부작성이 정당의 손에 의해 작성되는 한, 그 명부의 순위는 공정하지 않을 위험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부작성에 대한 권한을 일정부분 국민들에게 일임하는 등 공천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지역구 배출이 어려운 직능 분야에서 비례대표의원이 배출되어 본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비례대표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수동이 아닌 능동으로부터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운가? 나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 인생은 고민, 걱정, 고난이 뒤섞인 불행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우리의 삶은 아름답다.’고 대답할 것이다. 주인공 괴도 역시 이 질문을 받으면 어디선가 ‘본 조르노’라고 외치며 달려와 인생은 아름답다고 답할 것 같다.“Buon giorno, principessa(안녕하세요, 공주님)!” 사랑하는 여인 도라에게 항상 웃음을 주었던 주인공 괴도의 대사이다. 부족할 것 없는 도라에게 너무나 순수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다가간 괴도를 가장 잘 표현한다. 더구나 수용소에 끌려간 암울한 상황에서도 방송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바보 같은 순수함과 유쾌함은 보는 이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이렇게 희망찬 주인공을 두고도 이 영화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어두운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끔찍하고 처참한 시기이다. 독일의 나치즘과 함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펼치면서 생체 실험과 강제 노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시기이다. 영화의 앞부분에서는 일부 사람들의 욕설 정도로 표현되던 유대인 탄압은 점차 국가적 사태로 번져간다. 그렇게 괴도와 죠슈아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에 끌려간다.이렇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역설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죽음을 앞두고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한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의 독백에서 영감을 얻어 붙여진 것이다. 죽음은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가장 두려운 것이다. 혁명가 트로츠키는 멕시코의 독방에 갇혀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들이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한 극한의 두려움을 직면한 상황에서 트로츠키는 역설적으로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주인공 괴도 역시 다르지 않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다가 결국은 발각되어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들의 희망을 지켜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장난을 친다.그렇다면 이렇게나 어두운 상황에서, 이 영화는 왜 역설적으로 인생이 그토록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고 있을까. 새까만 절규로 가득한 얼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평화롭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 아이가 바로 죠슈아다. 그 소년이 행복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어린 아들의 세계를 지켜내 줄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다.우리는 어떠한 조건 아래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 삶의 목적이 존재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삶의 의미가 된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는 이유를 가졌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고, 우리의 인생은 아름답다. 우리는 많은 고난의 순간을 맞닥뜨리고 많은 순간에 좌절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그건 내가 상처 입는 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또한 모든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는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 사람들의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 중에 하나이다. 스스로가 이루고자 하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어떠한 움직임’을 선택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괴도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아들에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들을 안심시킨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어이없고 한심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괴도는 아들을 위해 그런 행동을 했고, 그것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따라서 괴도의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 하고 싶다.한편,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이다. 빅터 프랭크는 나치 하의 수용소에 직접 수감되었던 경험을 소개한다. 그 안에서 영화와 같이 온갖 오물과 냄새로 뒤덮인 곳에서 생활하면서 강제 노동과 폭행을 견뎌내야 했다. 그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은 자신의 목숨마저도 쉽게 포기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살은 절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고 한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도 나태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의 희망과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어떤 순간에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런 이들의 인생은 너무나도 아름답다.이는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우리 속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낸다. 오히려 온통 절망만이 존재할 때 희망을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괴도가 아들, 아내라는 희망이 없었다면, 절망 속에서 그들의 소중함을 더 큰 희망으로 느끼지 못했다면 괴도의 인생은 절대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언제나 아름답다.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영화 2시간의 장면, 장면이 모두 우리의 삶과 닮아있는 것 같다. 길에서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설렘, 사랑하는 아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는 기쁨, 그리고 절망에서 도망치다가 만난 시체 더미까지 삶의 굴곡이 모두 담겨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웃으면서도 그 다음에 만날 고민을 걱정하느라 시원하게 웃지 못하고, 슬프면서도 견뎌내야 한다는 걸 알기에 웃게 되는 것 같다. 또한 영화의 전반부는 밝고 유쾌함이 가득하지만 후반부는 대조적으로 어두운 배경이다. 이런 설정은 인생의 아름다움은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다.
1.서론14세기 유럽은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위기와 붕괴를 겪었다. 흑사병과 기근은 물론이고 교회의 대분열과 백년전쟁이 그 모습이었다. 그러나 중세 말 15세기 경, 유럽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근대로의 이행 과정을 밟았다. 르네상스 시대인 1450년경을 기준으로 그 전까지는 중세를 지탱하는 제도와 문화가 무너지는 시기였다. 반면 그 이후부터 1520년 무렵까지는 중세의 문명들을 바탕으로 근대적 성격의 사회가 등장하는 과도기였다.흔히 구분하는 중세와 근대가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사회의 성격에 있다. 중세는 정치적으로는 봉건제를 기반으로, 경제적으로는 장원제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집단주의적 사회였다. 반면 근대는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 하는 시민사회였다. 이렇게 중세와 근대는 서로 전혀 다른 사회의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중세가 종언을 하고 근대가 시작 되었을 리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 말, 근대로의 전환기에 드러나는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본론중세의 보편적인 사회는 지방분권적인 형태의 봉건제적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중세 말, 근대로의 전환기에서는 이런 봉건제적 요소들이 사라지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먼저 중세의 농촌 공동체는 자급자족의 사회를 이루며 장원제도의 틀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장원의 중심에는 영주가 있었으며, 제분소, 제빵소, 교회 등의 시설물이 존재했다. 농민은 영주의 땅을 빌려 사는 대가로 그의 직영지를 경작해주는 노동지대를 바쳤다. 그들은 영주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거주 이전의 자유를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이런 장원제는 시장이나 화폐가 없는 농업 사회를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주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자발성이나 특성은 배제된 관습적인 제도로, 사회적 진보와 발전을 가로막는 경향이 있었다. 이 장원제는 중세의 가장 큰 특징인 봉건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다.이런 장원제는 근대 전환기에서 농민의 지위 향상과 화폐경제의 도입과 함께 해체되어 갔다. 중세 유럽은 흑사병과 전쟁으로 인해 급격한 인구의 감소를 겪었다. 그런데 인구 감소는 대도시보다는 노동력이 부족한 농촌 사회에 더 치명적이었고, 영주에게 예속되어 있던 농민의 지위는 이전보다 향상되었다. 또한 이전 시기부터 점차 증가해온 농업생산력은 도시와 상업의 발달을 이끌었는데, 중세 말 근대로의 전환기에는 더욱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결국 토지를 사용하는 대가로 현물과 부역이 제공되던 자연경제가 지대와 임금의 지불, 상품의 거래를 기본으로 하는 화폐경제로 변화하고 있었다.장원 해체의 공통된 특징으로는 첫 번째로 영주가 직영지의 직접 경영을 포기하게 된 것이고, 두 번째로 노동 부역이 화폐를 통한 납부로 변화한 것이었다. 직영지를 직접 경영하여 노동 부역을 받던 장원제가 임금 체제로의 변화에 따라 그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더불어 경제적 예속이 느슨해지자 이것은 그들에 대한 통제권과 여러 권한들의 상시로 이어졌다. 이런 변화는 농민들의 자유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결국 이런 특징들은 사회적으로 농민들의 반란에도 영향을 주었다. 중세 초반의 농민집단은 너무 소규모이고 봉건적 질서 속에서 서로 고립되어 있었기에 지역 단위의 움직임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영주가 모든 통치 기능을 수행하던 시절에서 그 권한들이 정당화되지 않는 상황에 들어서자 그간의 불만들이 밖으로 표출되었다.지금까지의 변화와 사회 특징들은 결국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국왕이 자유농민과 도시 상공업자의 지지를 받으며 지방 영주의 권한을 회복하고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데 이 시기가 바로 근대 시민 국가로 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이는 절대 왕정기라고 할 수 있다.중세에는 교황과 봉건 영주의 존재로 인해 국왕의 권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다. 봉건제도 속에서 군사, 행정, 징세 등의 절차는 모두 개별 영지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결정적으로 세입에 있어서의 지방 분권의 형태는 실질적으로 국왕보다 봉건 영주의 권한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또한 교회는 지방 분권적 사회 속의 중세인의 삶과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말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교황권이 추락하면서 국왕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또한 상업과 도시의 발달, 화폐 유통의 증가는 화폐를 근간으로 하는 국왕 중심의 재정 제도를 안정화시켰다. 이런 경제적 구조의 변화는 정차 지방 분권 경제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고, 영주들의 권한 역시 점차 중앙의 국왕의 것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중세 유럽은 점차 중앙집권적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더불어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통해 왕 중심의 권력 집중현상과 고유의 문화 탄생 역시 봉건국가로부터 왕정 국가로의 이행을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국가적 규모의 전쟁으로 인해 군사 조직과 기술에서의 급격한 변화들은 군사력에 대한 귀족들의 독점권을 무너뜨렸고 봉건의 군대 대신 국왕의 군대를 들어서게 했던 것이다. 또한 중세의 중요 세력이었던 기사 집단이 직업 군인으로 전환되면서 또 하나의 봉건제의 기틀이 사라지는 계기로 작용했다.한편, 제도와 경제적인 면을 제외하고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문화적 변화이다. 어디서부터를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봐야 하는지 등에 대한 논란은 존재한다. 하지만 중세 말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그 무렵 모든 예술 분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미술과 음악 등의 분야에서도 기독교적 세계관을 담고 있었던 이전의 시기와는 다르게 점차 세속적인 느낌의 작품들이 많아졌다. 더불어 중세에서는 건축과 조각이 우위에 있고 회화가 낮게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로의 전환기에서는 회화의 가치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였다. 더불어 전환기에서 유럽의 각 국에서는 이전의 문화와 새로운 문화가 함께 병존하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14세기 후반, 시 문학이 크게 발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