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의 책을 읽고-나는 이 책이 한창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날릴 때 이 책을 구매했었다. 하지만 몇 페이지 읽어 보고는 한동안 손대지 않았었다.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법규범의 이해 과제로서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되었다. 이 책은 하버드 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가 자신의 강의 'JUSTICE(정의)'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벤담, 칸트, 롤스의 철학들을 살펴보며 ‘정의’의 개념을 분석한다. 이 책은 출간 된지 3개월 만에 32만부가 팔려나갈 정도로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정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처럼 ‘정의’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고 느껴서 일까?정의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하여 한마디로 정의하긴 힘들다. 지금껏 이어져왔던 정의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쉬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 최선의 정의로 분류되는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때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최선의 정의인 시대도 있었다. 이처럼 정의란 시대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졌다. 정의에 대한 사고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으며 그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주진 않는다. 다만 우리 스스로 정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우리는 지금 정보화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위의 두 시대와 공존하고 있는 민주주의 시대에서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 현대라고 부르는 이 시대가 되기 전까지 인류는 수많은 역사를 만들어왔으며, 그 과정에서 인류는 선사, 고대, 중세, 근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거쳐 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나긴 역사의 줄을 따라오면서, 어느 시대에서든지 논란이 되었고, 풀리지 않는 토론거리가 되는 존재를 발견 할 수 있다. 그 논란과 토론의 주제가 된 존재는 현재도 전 세계의 권위 있는 학자들의 토론을 만들두가 인정할만한 진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공정한 도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 구성 인원의 대다수가 옳다고 인정을 해도, 소수가 그것은 절대 옳지 않다고 말하며 인정을 하지 않으면, 그 도리가 옳다고 해야 하는가 옳지 않다고 해야 하는가? 이것이 과거에도 매듭이 지어지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과거, 현재와 마찬가지가 될지 모를 정의에 관한 문제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골치 아픈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과거의 지식인,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제기했던 주장들을 소개하는 책이 나오고야 말았다.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불리는 이 책은 자기의 이름 그대로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질문에 답하려던 우리는 이 책의 내용을 보고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정체성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후 우리는 정의에 대해서 더 진지한 탐구와 성찰을 하게 된다.이 책은 처음 부분에서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이 만약 기관사라고 가정하고, 기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상태에서 저 앞에 두 갈래의 레일이 보인다. 한쪽은 인부 다섯 명이 일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인부 한명이 혼자서 일하고 있다. 당신은 기차를 멈출 수 없으며, 둘 중 어느 한쪽을 희생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만약 한쪽을 선택했다고 치자. 우리가 선택을 했다면 이 책은 우리들에게 질문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선택은 옳은 것입니까?” 이 질문을 들은 우리는 처음엔 당연히 “그렇다”라고 대답을 한다.그 다음에 이 책은 우리의 선택이 옳은 이유를 말해달라고 하고,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유를 댄다. 우리의 대답을 들은 책은 우리가 말한 이유에 대해서 의문점을 제기하고, 우리는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는 절대로 풀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든다. 이 책은 우리를 딜레마에 빠뜨리고 난 뒤에 우리들에게 과거의 인물들이 제기한 주장들을 소개한다.그렇게 우리는 기관사 이야기에서 공리주의에 관한 이야기와 문제점으로 넘어가고, 빌순 없으나 맞다고도 할 순 없다.벤담이 주장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맞기도 하나 어떤 부분에선 크게 잘못 되었으며, 밀이 “오랜 기간 동안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 인간 전체의 행복이 극대화 된다”라고 주장한 것 역시 맞는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틀리다. 칸트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정언명령을 따른다고 반드시 옳다고 할 순 없다. 그렇다고 가언명령을 따른다고 반드시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옳긴 하지만 반드시 옳지는 않은, 틀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틀리지도 않은 주장들이 나오고, 이 주장들에 대한 반박이 나오고, 이 반박에 대한 반박이 또 나오면서 정의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그리고 이 주장은 또 반박에 반박을 거듭해 계속 새로운 주장을 낳아 왔다.위의 인물들은 정의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한 끝에 결론을 내렸지만, 그 결론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도 어떤 사건이나 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한 끝에 어느 한쪽이 옳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그 결론 역시 위 인물들의 결론과 마찬가지다.우리들이 이 책에서 본 영국 선원들의 표류이야기, 빌 게이츠와 마이클 조던의 자산에 대한 이야기, 징병제와 모병제에 대한 이야기, 대리출산 이야기, 과거 잘못에 대한 사과와 보상이야기, 안락사와 동성혼문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위의 문제에 대해서 일단 어느 쪽이 옳다고 결론을 짓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답하고 의문점을 지적당하면 우리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우리들의 결론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옳다고 할 순 없기 때문이다. 정의란 그런 것 같다. 타당하고 이치에 맞는 답을 만들어 낼 순 있지만, 그 답이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나의 답이 틀린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답도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에 관한 문제는 애초에 답이 없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해답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목숨을 걸어가며 계속 답을 만들어 가는 것일까? 나는 이 답을 만들전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자신이 구할 수 있는데, 둘 중 한 사람이 자기의 가족이라면 자기 가족을 구했지 다른 사람을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팔을 안으로 굽히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을 거치는 도중에 다른 존재와의 충돌은 불가피할 것이다. 실제로 과거의 인류는 자기 집단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아무런 죄 없는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당했다. 그러나 정의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하게 되면서 인류는 조금씩 생각을 바꾸어 나간다. 정의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서로간의 충돌을 최소화하고, 조금씩 다른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하려고 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물론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팔이 안으로 굽으면서 충돌을 피할 순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나오고, ‘이 결정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인도적으로 보았을 때 이 결정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순 없어도 바람직한 결정이 될 순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된 것이리라. 늙어서 죽기 직전의 환자에 대한 안락사 문제에 대한 논란을 예로 들어보자. 정작 당사자는 고통을 잊고 싶어서 편안히 죽고 싶은데, 생명을 죽일 순 없다는 논리로 억지로 고통스럽게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과연 옳은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고통을 잊고 편안하게 저승으로 가라고 안락사를 시켜주는 것 역시 옳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호소를 하나 해보자. ‘옳다고 할 순 없지만 때로는 예외를 인정해줄 순 없을까? 반드시 절대적인 원칙을 만들어야 하나? 그때그때 당사자의 의지를 존중해주는 결정을 해주자고. 옳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예외는 인정해주자고. 이것은 자연법칙처럼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안락사 불허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안락사를 원하는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사자의 고통을 모른다. 그들은 안락사가 사람을 죽이는 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인도적이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당사자의 심정을 모른 채 자기만의 이기적인인들도 상이군인훈장을 받을 자격의 여부, 또 금융 위기에 무분별한 투자로 파멸을 초래한 AIG 그룹에서 정부의 막대한 자금 지원금으로 부서 임원들에게 상여금을 지급한 일의 정당성 등 이와 같은 문제들을 세 가지의 판단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이다.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제목에서 던진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주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곧 내 생각이 짧았음을 보았다. 늘 받아먹는 식의 공부에 길들여져 있는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책은 내가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나의 시선을 더 넓힐 수 있게 도와주었다.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의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고 느껴서 일까? 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래서 정의롭지 않은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에 대해 찾아보았다. 한 서평꾼은 ‘무조건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 소수 부유층을 위한 내각 구성, 끊이지 않는 비리 등으로 합법 정부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은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정의라는 가치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인지 이 처럼 집권 세력의 퇴행 정치를 바라보게 된 시민들은 행동하는 양심, 사람 사는 세상을 강조했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많이 찾아 읽기 시작하고 민주주의, 인권, 평화의 가치를 다시 세우기 위해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에 가입이 늘고 있다. 또한 민주당은 이명박 정권의 집회 탄압, 공안정국 조성과 권력 독점, 부자 감세로 심해지는 부의 양극화 등이 한국 사회의 정의를 해치고 있다고 소리 내고 있다. 이 같이 정의롭지 않다고 느끼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 행복을 극대화하는 공리주의나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로는 부족하며 ‘좋은 삶은 무엇이냐’는 공동선을 고민해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는 그 순간만큼은 나의 사상, 내가 평소 생각지도 않았던 내 안에 내제되어있았다.
통합교육이 일반아동에게 미치는 영향Ⅰ 서론민주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개인은 자아실현을 통해 자신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법적 ?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또한 현대 사회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로 인해, 장애인도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치관이 정립되었다. 이에 장애인 역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며 심신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는 더욱 더 행복한 삶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기본 이념 아래, 이제까지 장애로 인해서 분리된 교육을 받아야 했던 장애아동도 일반 아동과 상호 협력하여 더불어 배워 가는 통합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오늘날의 특수교육은 분리교육에서 주류화 교육, 주류화 교육에서 나아가 특수교육프로그램을 일반학교 안으로 끌어들여 일반학교 주도의 교육으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통합과정을 거쳐 완전통합의 방향으로 단계적 발전과정에 이르고 있다.현실적으로 일반학교에 통합되어 있는 장애아동들은 교우관계, 진학, 진로, 정서적인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학부모, 특수학급 교사 그리고 일반 교사들 또한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통합교육의 진정한 효과는 장애 아동에 대한 일반아동의 긍정적 수용태도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통합교육이 일반아동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일반아동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매우 중요하다. 이제부터 통합교육이 일반아동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로부터 어떤 시사점이 있을지 알아보겠다.Ⅱ 본론ⅰ.통합교육이란?통합교육은 다양한 교육적 필요와 능력을 가진 아동들이 함께 교육받는 것으로서, 그 특징은 장애학생과 일반학생이 여러 가지 측면, 즉 사회적 활동이나 교수활동에서 의미있는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통합교육은 장애학생들이 일반학생들에 비해 불리한 신체적 ? 지적 조건 때문에 사회로부터 분리되거나 차별 받아서는 안된다는 전제 아래 일반학교에서 최상의 교육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교육형태이다.통합교육은 우리나라 장애학생의 학교교육 환경이 특수학교가 유일하던 것에서 부터 일반학교의 특수학급 및 일반학급으로까지 확대되게한 개념이다. 통합교육은 일반학교에는 비장애학생만이 소속되어 교육을 받고 장애학생은 특수학교에 소속되어 교육을 받는다는 이분법적 논리를 희석시켜왔으며 일반학교에서 비장애학생과 동등한 한 학생 구성원 자격을 장애학생에게 부여하여 적합한 교육을 제공한다는 지향을 둔 점에서 교육적 의의가 있다. 통합교육은 장애학생 본인과 부모 입장에서는 분리교육 환경인 특수학교 외에 학교 선택의 폭을 넓혀준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통합교육은 특수교육대상 학생의 학교교육 환경으로 특수학교가 유일하던 시절에 비교하여 일반학교의 특수학급 및 일반학급에서의 교육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특수교육 기회의 양적 확대를 가져오게 하였다. 통합교육 실행은 제한된 수의 특수학교에서만 특수교육을 제공하던 한계를 경감시키는데 기여하였고 장애학생에게 학교교육 기회 제공을 증가시킴으로써 장애인 교육권 보장 증진과 특수교육의 규모 확대에 일조를 하였다.통합교육의 양적인 확대뿐 아니라 통합교육의 질 향상 과제가 현재 우리나라 교육 분야 전체의 주요 쟁점의 하나로 부각될 필요가 있다. 통합교육의 실제는 특수와 일반이 아닌 모든 학생을 위한 학교교육 내실화에 기여할 수 있으며 학교관리자, 교사, 지원인력, 학생들 모두가 서로를 돌보는 ‘학교공동체’를 생성시키고 강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ⅱ. 통합교육이 일반아동에게 미치는 영향통합교육을 실시할 때 흔히 부딪히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일반아동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이와 같은 우려는 일반 교육의 책임을 맡고 있는 교사와 학교 운영자들의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들이 행해졌으며, 통합교육이 일반아동에게 미친부정적인 영향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유아기 통합교육에 있어서는 장애유아들에게 제공되는 교과과정과 교수방법에 대한 신중한 배려가 일반아동들에게도 함께 제공되면서 발달과 행동적 측면에서 효과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서, 장애아동들과 함께 통합된 일반아동들은 발달적 측면에서 비교집단보다 수개월 앞서거나 자신의 연령보다 더 높은 발달적 성취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최근에는 통합 환경의 일반아동들과 통합되지 않는 일반아동들의 학업적 성취에 있어서의 차이를 비교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에 의하면 장애아동이 같은 학급에 포함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일반아동의 학업 성취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교사들에게 개별화 교육을 위한 지원이 제공될 때 학급의 모든 학생들이 학업성취 측면에서 혜택을 받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실질적으로 통합교육을 통해서 일반아동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효과는 장애인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반아동들은 통합 환경에서 장애아동들과의 상호작용을 경험하면서 장애인도 나와 비슷한 점을 많이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 수용하게 되며, 학교라는 지역사회가 장애아동들도 포함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적인 책임감을 학습하게 된다. 또한 통합교육을 통해서 실제로 장애인에 대해서 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의 행동적인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게다가 통합교육은 일반아동에게 여러 가지 교육적 효과가 있다. 일반아동은 통합교육을 통해 장애 아동과 같이 생활하면서 장애 아동이 적절한 때에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주는 사회성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며, 장애 아동과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장애 아동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킬 수 있고, 사회구성원들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이해하게 되며 장애인을 수용하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또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돕고 돌보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즉, 장애 아동과 함께 생활하게 됨으로써 그들을 도울 기회를 갖게 되어 더욱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발달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결론적으로, 일반아동들은 통합교육환경에서 장애아동들과 함께 교육받음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으며, 오히려 교사들의 교육에 대한 주의 깊은 계획과 배려로 인해서 발달적, 행동적, 태도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정범모의 교육론에 대한 비판 및 대안한국 교육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학자를 꼽으라고 하면, 아마 많은 사람이 정범모를 지목할 것이다. 그는 1950년대 초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교육학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교육학을 과학의 토대 위에 올려놓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그의 ‘교육학의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평가』 (1954), 『교육심리 통계적 방법』 (1955), 『교육과정』 (1956)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정범모는 『교육평가』에서 과학적 교육평가의 틀을 마련하였고, 『교육심리 통계적 방법』에서 실제로 과학적인 교육학을 하는 데 관건이 되는 과학적 연구 방법론을 제시하였으며, 『교육과정』을 통해 교육의 과정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구성하였다.한국 교육학을 체계화하고 과학화하려는 정범모의 노력은 그가 저술한 『교육과 교육학』 (1968)에서 결실을 맺게 된다. 이 책은 정범모 자신의 교육 개념과 교육학의 성격을 가장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한 한국교육학의 가장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로서, 한국에서 교육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고전에 속한다.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한 교육의 개념, 즉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1968:18)는 한국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각인되어, 마치 이것이 교육의 유일한 정의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오거나 인용되어 왔다.그러나 정범모가 제시한 교육의 개념과 교육학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인가? 정범모가 한국 교육학을 체계화하고 과학화한 선구자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가 한국 교육과 교육학에 끼친 공헌은 마땅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범모의 교육 개념과 교육학은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반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정범모의 교육론에 대해 알아보고 그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해 볼 필요가 있다.Ⅰ 정범모의 교육론정범모의 교육의 개념은 그의 책 ?교육과 교육학?(1968)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로 교육의 개념과 교육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정의를 통해 그는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범모의 교육의 정의에는 다음의 세 가지 중핵 개념 내지 개념적 준거, 즉 ‘인간행동’, ‘변화’, ‘계획적’이 포함되어 있다.ⅰ) 인간행동공업의 관심사가 제조품이고 농업의 관심사가 쌀이나 배추와 같은 농작물이듯이 교육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인간’이다. 교육은 제조품, 농작물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문화 등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교육은 제조품을 직접 생산하기보다는 그것을 생산할 수 있는 인간을, 농작물을 직접 기르기보다는 그것을 재배할 줄 아는 인간 그리고 정치·경제·사회 발전 그 자체보다는 그러한 것들을 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르는 데 관심을 둔다.교육이 인간을 기르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만으로는 교육이 무엇인지가 여전히 막연하다. 그것은 마치 농사가 농작물을 기르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불분명하다. 농작물에는 쌀도 있고 채소도 있고 과일도 있으며, 어떤 농작물을 재배하느냐에 따라 농사의 성격과 방법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의 대상인 인간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따라 교육의 성격과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교육이 대상으로 삼는 인간을 보다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정범모에 의하면 교육에서 인간을 기른다고 할 때의 인간은 ‘인간행동’을 말한다. 이때 ‘행동’이라는 것은 ‘행동주의(behaviorism)’에서 모종의 자극에 대한 신체적인 반응에 해당하는 행동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동’은 과학적 혹은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바깥으로 드러나는 외현적·표출적 행동(over behavior)뿐만 아니라 지식, 사고력, 태도, 가치관, 동기, 성격 특성, 자아개념 등과 같은 내면적·불가시적 행동(covert behavior)이나 특성을 포함한다. 내면적·불가시적 특성을 가진 것을 ‘행동’으로 다루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의미 있게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교육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 때의 인간은 ‘인간행동·경제적·심리적 행동을 관찰하고, 기술하고, 설명하고, 일반화하고, 예언하는 데 목적을 두기는 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지 않다. 유독 교육과 교육학만이 인간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일차적인 관심이 있다고 볼 수 있다.교육이 ‘인간 행동을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때의 ‘변화’는 ‘육성, 조성, 함양, 계발, 교정, 개선, 성숙, 발달, 증대’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행동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없던 지식을 갖추게 되고, 미숙한 사고력이 숙달되며, 몰랐던 기술을 알게 되고, 이런 생각 혹은 관점이 저런 생각 혹은 관점으로 바뀌게 되는 것 등 없던 것이 있게 되거나 있던 것이 없게 되는 것, 약한 것이 강하게 되거나 강한 것이 약하게 되는 것 등을 포함한다. 교육은 인간의 변화가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인간 행동의 변화 가능성은 교육이라는 활동과 교육학이라는 학문의 성립 기반인 동시에 그 존재 이유가 된다. 교육이 참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인간 행동의 변화를 실지로 일으켜야 한다. 그러한 인간 행동을 실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교육력’이라고 한다.ⅲ) 계획교육이 기본적으로 ‘인간 행동을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때, 그러한 인간 행동의 변화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일어난다. 인간 행동의 변화는 체계적인 계획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자연적 성숙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약물중독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인간행동의 변화되었다고 해서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정범모에 의하면 ‘교육’과 ‘교육이 아닌 것’, 가령 ‘학습’이나 ‘성숙’ 등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행동의 변화가 ‘계획에 의한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교육이 ‘인간 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라고 할 때의 ‘계획적’이라는 말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기르고자 하거나 변화시키고자 하는 인간 행동에 대한 명확한 목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교육을 체계적이면서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그 점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교육은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교육의 정의 그 자체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서 ‘인간행동이 계획적으로 변화되기만 하면 모두 교육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이 나올 수 있다. 첫 번째 의문점은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도 교육이라 할 수 있는가이다. 예를 들어 범죄방법을 가르쳐서 한 사람의 범죄자가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인간행동이 계획적으로 변화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를 우리는 교육이라 부르지 않는다. 교육은 통념상 적어도 나쁘지 않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의문은 가치중립적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에 관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가 자신들의 물건을 팔기 위해 광고행위를 할 때, 소비자들은 그 광고를 통해 그 회사제품을 이용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는 분명히 인간행동이 변화된 것이며, 그 변화된 행동이 나쁜 행동도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 대신 광고라는 말을 사용한다. 세 번째 의문점은 바람직한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이지만 교육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문제이다. 의사가 환자를 고치는 경우, 치료계획을 통해 그 환자를 고칠 것이다. 이 경우 환자의 행동이 의사의 계획에 따라 변화되었고, 그 변화방향도 바람직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말하는 대신 치료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몇 가지 의문점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바는 인간행동이 계획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해서 모두 교육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정범모의 교육의 정의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분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둘째, 정범모의 정의가 교육실제에 가져온 결과적 측면에 대한 평가이다. 정범모의 정의는 무엇보다도 교육을 체계화하였으며, 교사의 역할을 명확히 하였다. 교육을 체계화하였으며, 교사의 역 목표했던 행동이 실제로 일어났느냐에 있다. 말하자면,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에 상관없이 평가단계에서 실제로 목표했던 행동이 일어난다면, 개념상 성공적으로 교육이 된 것이고, 목표한 행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교육이 되지 않은 것이다. 교육을 이렇게 규정하게 되면, 교육의 목적이나 교육의 과정은 간과될 수밖에 없으며, 오로지 결과에만 관심을 두는 교육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평가가 교육의 목적을 지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셋째, 앞의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정범모의 정의가 가지고 있는 기본 전제에 대한 평가이다. 정범모에 의하면, 교육학이 인간의 행동변화에 관한 법칙을 발견하고 설명하는 이론에 관심이 있다면, 교육은 인간의 행동변화를 실제로 일으키는 데 관심이 있다. 그런데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학문이 ‘행동과학’이라면, 그러한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행동공학’이다. 정범모는 ‘행동의 설명’이라는 ‘행동과학’을 ‘행동의 변화’라는 ‘행동공학’으로 바꾼 셈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는 ‘교육’의 정의라기보다는 ‘행동과학’의 정의라고 보아야 한다. 아닌게 아니라 정범모는 교육은 기본적으로 ‘과학’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결국 정범모의 정의는 교육의 과학화 혹은 체계화라는 미명 하에 가치중립적 ‘행동공학’으로 대체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행동 공학적 교육학의 잘못은 엄격해야 할 대상에서 너그러운 대신, 너그러워야 할 방법론에서 엄격한 데 있다. 정범모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그는 교육이론의 ‘자폐성’과 ‘망라성’을 뒤바꿔 사용하여 대상의 폭에서는 ‘망라성’을 적용하고, 방법론에서 ‘자폐성’을 적용하였던 것이다(이학주, 2003: 5, 11, 13). 그러나 교육은 결코 가치 중립적일 수 없으며, 가치를 전제하는 개념이다. 물론 가치의 문제는 복잡하며, 학문적으로 명확하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늘 도사리고 있다. 가령,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 문제는 간단히 대답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념이다.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1. 생애제임스는 매우 유복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유명한 소설가인 헨리 제임스(Henry James, Jr.)의 형이기도 하다. 윌리엄 제임스의 할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유산 덕택으로 윌리엄의 아버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Sr.)는 평생토록 특별한 생업에 종사하지 않은 채 학구적이고 종교적으로 충실한 생활을 하며 자녀들에게 독특한 교육방식을 적용하였다.제임스의 아버지는 신비주의자인 스웨덴보리(Swedenberg)의 영향을 깊이 받은 문필가이기도 하였는데, 자녀들이 독단에 빠지지 않고 충분한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집안에서도 토론을 즐겨하였고, 통상적인 교육 제도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소질과 취향에 따라 다양한 교육을 받도록 배려하였다. 헨리 제임스가 교분을 맺은 사람들 가운데는 홈스(Oliver Wendell Holmes, Sr.)나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같은 인사들이 있었는데, 윌리엄은 자기 아버지나 부친 친구들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수용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많은 지적 성장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 제임스는 주로 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공식적인 기관에서의 교육은 오히려 부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1855년부터 1860년까지 제임스는 외국의 문물을 접해 보기를 권유한 아버지의 충고를 따라 그의 동생 헨리와 더불어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 등지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당시 제임스의 관심은 자연과학과 그림그리기에 쏠려 있었는데, 1860년경에는 전문적인 화가로서의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스스로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여 중도에 포기하였다. 이듬해 그는 하버드 대학의 이과대학에 입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다. 3년 후인 1864년에는 의과대학으로 옮겼으나 학업에 그다지 열중하지 못하였다. 의대 재학 중인 1865년과 1866년에 걸쳐 아가시즈(Agassiz) 교수를 따라 브라질로 탐험을 떠났는데, 천연두와 안질에 걸려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이듬해 요양과 심리학 연구를 위해 독일로 갔다가 그 이듬해인 1868년에는 학위를 받았다. 이것이 제임스가 평생토록 받은 유일한 학위였다. 그는 요양과 휴식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1873년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해부학과 생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875년에는 심리학을, 1879년에는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907년 은퇴할 때까지 거기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가르쳤다. 제임스는 1878년 기븐스(Alice Howe Gibbens)와 결혼하였으며 그 후로 매우 활기 넘치는 생활과 광범위한 연구 활동을 하였고, 건강도 많이 회복하였다. 1890년에는 그에게 세계적인 석학의 명성을 안겨준 대저 『심리학의 원리』를 출간하였다. 만년에 제임스는 세 차례에 걸쳐 일련의 특히 중요한 강연을 하였는데, 그 결과가 나중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1901-1902년에 에딘버러에서 행한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은 그의 유명한 저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으로 출판되었고, 1906-1907년에 행한 로웰 강연(Lowell Institute and Columbia)은 『프래그머티즘』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1908-1909년에 행한 히버트 강연(Hibbert Lectures at Oxford)은 『다원적 우주론』으로 출판되었다. 그밖에도 그의 많은 저서들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진리의 의미』(1909)와 『근본적 경험론』(1912) 등을 들 수 있다.2. 진리론제임스는 실용주의를 단순히 인식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관, 나아가서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는 실용주의의 방법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기술, 즉 사태나 문제들의 실제적인 의미에 관한 연구로 본다. ‘만일 저 개념보다 이 개념이 참이라면,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 실제로 무슨 효과를 낳겠는가?’를 그는 따진다. 참된 것은 마땅히 실천이나 경험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임스는 ‘현금가치(cash-value)’라고 한다. 구체적인 결과를 갖는 것만이 의미를 지닌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진리들은 구체적인 사실들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예컨대 ‘신’, ‘물질’, ‘절대자’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용어나 개념도 현금가치(cash-value)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는 실용주의를 하나의 진리관으로 정립하기 위해 진리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진리란 실재와 관념의 일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따질 때에는 반드시 결과적인 특성, 즉 실제적 의의를 따져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란 절대적인 것이기보다는 다양한 여러 유형으로 구성된 복수의 것 일 수도 있고, 상대적일 수도 있다. 제임스에 의하면, 진리의 기준은 어떤 이론이나 명제의 작동가능성(workability)에 기초한 것이다. 한 관념은 구체적인 경험적 사실들에 적용되어 제대로 작동할 때 참된 관념이며, 작동하지 못하면 참된 관념일 수 없다. 참된 관념은 실제적 가치를 가지지만 그릇된 관념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실용주의의 테스트는 무엇이 가장 잘 작동하는가와, 무엇이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잘 들어맞는가의 여부이다. 그는 이와 같은 실용주의의 테스트를 심지어 신학에도 적용하였다.또한 제임스는 진리의 의미를 만족스러운 경험을 주는 신념과 연관시켜 파악한다. 하나의 신념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그 신념에 입각하여 행위 할 때 경험상의 만족스러운 결과를 산출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어떤 신념을 견지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행위를 한 결과가 만족스럽다면 그 신념은 진리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진리 개념은 ‘만족(satisfaction)’ 또는 ‘만족스러운 결과’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성격의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만족’이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령 순전히 심리적인 것 혹은 생물학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논리적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객관적 혹은 [상호]주관적으로 검증되지 않거나 검증될 수 없는 어떤 신념을 견지하더라도 심리적으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만족의 수준에 있어서도 일시적인 만족과 장기적인 것 간에는 많은 차이가 날 것이다. 제임스는 종교적 신념에 관해 논의할 때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마음의 평온함이 나 종교적 위안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진리의 의미와 부합되는 것에 당연히 포함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함에 있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산출케 해주는 신념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진리의 기준을 심리적 생물학적 만족에 두게 된다면, 제임스의 진리관은 매우 혼란스러운 결과를 초래하는 이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임스가 주장하는 진리의 의미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더 포괄적인 의미는 다음에서 보듯이 진리를 경험의 총체적인 과정과 연관시킨 그의 주장에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개념을 경험의 총체적 과정에 연관시켜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리가 의미하는 바는 […] 다름이 아니라 (우리 경험의 일부에 해당되는) 아이디어들이 우리 경험의 다른 부분들과 만족스러운 관계에 이르게 끔 도움을 줄 때 진리이다.” 이에 따르면, ‘만족’의 개념은 어떤 신념을 다른 신념이나 신념 체계로부터 떼어내서 그 자체로 분리, 고립시킨 다음에 그 신념이 초래하거나 산출할 심리적 혹은 생물학적 결과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경험이나 신념 체계의 총체적인 고려 하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비록 어떤 신념이 그 하나만으로는 ‘현금가치(cash-value)’를 지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경험의 다른 부분들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면 전체적으로 그것은 만족을 주지 못하므로 진리의 의미에 적합치 못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떤 광신도가 믿고 있는 신념은 그 자체로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그 신도에 심리적 위안을 포함한 상당한 만족감을 산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과학적 신념 체계를 비롯한 다른 신념 체계들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진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제임스가 주장하는 진리의 의미에서 ‘만족’은 단순히 심리적 혹은 생물학적인 효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의 경험이나 신념 체계 전반이 고려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Ⅰ. 서론요즘 현대사회에서는 수많은 교육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학생의 인성교육과 내면적 성숙을 고려하지 않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학생과 교사 모두 좋은 학벌에만 연연하며, 교육의 인성적인 측면이라든가 교과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내면적 깨달음 같은 것들은 현대인들에게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교육적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의 하나로서 인본주의 교육에 관한 논의를 들 수 있다. 공동사회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인간의 내면적 성장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인본주의 교육은,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기완성과 자기발전을 지향하며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심도 있게 탐색될 필요가 있다.Ⅱ. 인본주의적 교육ⅰ. 인본주의의 개념15∼16세기의 유럽에서는 중세 이래의 신학 중심 학문체계에 반기를 들고 고대의 학예를 부활시킴으로써 교회적 권위 아래 질식되어가는 자연스런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인문주의의 정신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연스런 인간성을 존중하고, 이러한 인간성에 입각하여 지혜를 탐구하려는 것이었다.인문주의는 각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사상형태로 등장한다. 여기서 공통되는 것이라면 ‘인간다움’의 존중이라는 정도이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신이나 절대자와의 관계에서만 자기의 인간성을 비로소 실현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의 자연적 소질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참 인간다움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과학이나 기술의 합리성을 철저히 추구하는 일이 결국은 인간성을 확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류는 새로운 기술의 힘을 구사함으로써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틀림없이 한층 커다란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하여 다른 사람은 그와 같은 행복에 대한 환상은 오늘날 이미 배반당했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기계문명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는커녕, 과학기술에 노예화되었으며, 세계의 합리화와 기계화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과정이므로 이러한 추세에 저항하는 것만이 인본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반론한다. 이와 같이 다같이 ‘인간다움’을 추구한다 해도 그 인간성을 어떤 방향으로 확충해 나가는가가 문제이다.인본주의라는 것이 풍속, 습관, 사상이 자기들과 같은 인간만을 인간다운 인간이라 생각하고, 그 밖의 인간을 모두 인간의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독단적인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본주의의 본질은 그러한 자기중심주의, 자국중심주의에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해나가는 것이다.ⅱ. 인본주의적 교육인본주의 철학에서 지식의 가치는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증대시켜 준다거나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힘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여 무지와 편견에서 해방시켜 주고, 자기 발전을 가능케 해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 교육이 국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기능적 인간을 양성해내는 작업으로 전락하는 경우 등은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교육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육은 국가발전, 사회개조, 그리고 기술이나 지식의 습득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인간됨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인간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존중하는 교육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교육의 인간화란 이렇듯이 인간의 천부적 자유와 존엄성, 자아실현과 완전 가능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사상에 근거하여 현대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비인간화, 소외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본주의 사상은 인간의 자유에 기초한 철학으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자유와 선택의 중요성, 개성을 무엇보다 존중한다. 즉 인간 스스로가 능동적 주체자로서 여러 형태의 소외와 싸워 스스로를 완성시켜 나가는 창조자라고 본다.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이란 진리라고 여겨지던 객관적 지식을 학생에게 주입하는 일방적인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교육이란 인간을 무한히 자유롭고 존엄함 존재라는 신념에 근거한 것으로써 인간의 자유, 잠재력,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여 인간의 창조적인 삶을 중요시 한다. 여기에서 지식이란 주체의 외부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가 외부적 자극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창조해 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진리는 선택되는 것이고, 모든 사물이나 사건은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는 만큼 이에 대한 주관적인 안목이 필요하므로 실재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중요하다. 지식이 인간에게 의미 있는 경우란 개인의 진정한 목적에 연결되어 자기발전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학생은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학습하도록 해야 한다. 교육이 지식자체의 목적이나 학생의 장래 직업을 위한 준비 수단으로 보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Ⅲ. 인본주의적 교육을 위해 가져야 할 태도첫째, 교사는 허용 적이고 수용적이며 학생은 적극적, 능동적이어야 한다. 즉 인간중심적인 교사는 반드시 개방적이고 학생의 생각과 행동을 충분히 받아들여야 하며 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일들을 다루어주어야 한다. 학생들도 자신의 느낌과 행동을 자발적으로 외부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능동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둘째, 교사와 학생 간에 상호신뢰감 속에서 교육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교사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학생을 자극하고 안내하며 학습을 촉진시킬 수 있는 도전적인 상황을 제공해 주되 구체적인 목표와 학습과제는 교사와 학생간의 공유된 관계 속에서 설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학생이 학습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긍정적인 교사, 학생 관계를 고무시키고 상호의사소통이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셋째, 인간중심적인 교사의 행동은 개별적 처방에 관심을 갖고 학생은 자신만의 독자성을 발휘해야 한다. 즉 교사는 학생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일이 판에 박은 것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중심적인 교사는 학생에 따라 개별적인 처방을 해야 하며, 따라서 학생 개개인의 흥미와 필요와 재능을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