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는 1962년 미국의 과학사학자인 토마스 쿤이 저술한 책이다. 쿤은 저서에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기존의 의미에서 더욱 발전?확대되어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쿤이 제창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나타낸다.토마스 쿤은 그의 저서를 통해 과학 지식의 변천 및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패러다임은 과학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개념이다. 그는 서론에서 자신의 저서를 통해 역사적인 기록으로부터 드러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과학의 개념을 그리고자 한다고 말한다. 패러다임이라는 획기적인 개념을 통해 과학 지식의 발전에 대해 새로이 정의 내리고자 한다.기존에는 과학의 발전이란, 과학적 테크닉과 지식을 이루면서 날로 쌓여가는 자료 더미에 하나씩 또는 여러 개씩 항목이 덧붙여지면서 차츰차츰 진행되는 과정이며, 과학사는 이러한 연속적인 누적과 이 누적을 방해한 장애물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분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몇몇 과학사학자들은 누적에 의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그 기능을 완수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느끼며, 아마도 과학은 개별적인 발견과 발명의 누적에 의해서 발달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사학자들은 새로운 유형의 질문을 제기하고, 과학에 대해서 색다르고 종종 덜 누적적인 발전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쿤은 이전 과학의 객관적이고 누적적인 특성으로는 과학의 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문제 제기한다. 과학이 누적적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해왔다는 관념은 문제가 있음을 얘기하고, 과학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누적적이지도 않음을 지적한다.쿤은 책에서 ‘정상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 ‘정상과학’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취에 확고히 기반을 둔 연구 활동을 뜻하며, 쿤이 정의한 ‘정상과학’의 시기에 진입하게 된다. 여기서 패러다임은 두 가지 특성을 띠는데, 하나는 과학자 집단을 유인할만큼 신선하고 놀랍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과학자 집단에게 온갖 종류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남겨놓을 만큼 융통성이 있다는 것이다.쿤은 이전 과학 지식의 누적적 발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후,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정상과학 시기에 패러다임은 과학자 공동체에 고유된 것으로, 공유된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연구하는 사람들은 과학 활동에 대한 동일한 규칙과 표준에 헌신하게 된다. 과학자 공동체는 패러다임과 함께 풀이를 가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문제들을 선정하는 기준을 획득하게 된다. 패러다임은 과학자 집단이 시급하다고 느낀 몇몇 문제를 푸는 데에 경쟁 상대들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라는 이유로 그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나 보다 성공적이라는 말은 단일한 문제에 대해서 완벽하게 성공적이라든가,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상당히 성공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관찰과 기존의 이론이 일치하도록 실험과 이론의 정확성을 증진시키고, 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도록 패러다임의 범위를 확장하며, 패러다임을 명료하게 하는 법칙을 수립한다. 이렇게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하고 정교하게 하는 것은 퍼즐 풀이를 하는 것과 같다고 얘기한다.어느 과학의 발달에서나 최초로 수용된 패러다임은 보통 그 과학의 종사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관찰과 실험의 대부분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설명하는 듯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더욱 발달함에 따라서 정교한 장치의 제작과 심오한 의미의 용어와 숙련의 개발이 이루어지며, 개념이 점점 세련되면서 상식적인 원형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한편으로 이런 전문화는 과학자의 시야를 크게 제한하며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서 상당히 저항하게 만든다.변칙현상은 패러다임에 의해서 제공되는 배경을 거스르면서만 나타난다. 변칙현상의 감지, 즉 패러다임이 연구자에게 미처 채비를 갖추게 하지 못한 현상이런 변칙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단계가 되면 정상과학은 위기의 국면과 과학혁명의 국면으로 접어든다.여기서 과학혁명이란 옛 패러다임이 양립되지 않는 새 것에 의해서 전반적이거나 부분적으로 대치되는, 누적적이지 않은 발전의 에피소드이다. 즉, 오래된 패러다임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변칙을 잘 설명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서, 신구 패러다임이 경쟁하게 된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오래된 패러다임에 집착하는데, 새로운 패러다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보다 이전의 패러다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더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혁명기에 오래된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쿤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과학자들은 그것의 미적 단순함 또는 아름다움과 같은 과학 외적인 요소에 끌렸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보았을 때 패러다임의 선택은 종교적 개종과 같으며, 과학혁명 시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하는 과학자에게는 과학 내적인 요소보다 문화적, 철학적, 미적 요소와 같은 과학 외적인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쿤은 잇달아 나타나는 패러다임 사이의 차이는 필연적이며 동시에 양립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전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차이는 총체적이며 같은 잣대로 평가될 수 없다는 것을 쿤은 '공약불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얘기하였다. 이는 쿤의 저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되었으며,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쿤은 패러다임의 변화들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연구 활동의 세계를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고 하였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연구자, 과학자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혁명이라고 얘기한다.쿤은 정상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한, 연구자는 퍼즐 풀이자일 뿐, 패러다임의 검증가는 아니라고 한다. 어느 특정 문제의 풀이를 찾는 동안 과학자는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는 접근법을 피해서 수많은 대안적 접근법을 시도하게 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서 그가 패러다임을 검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저자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승리를 거두려면 초기지자도 거의 없고 지지자의 동기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이 유능한 경우에는 패러다임을 개량하고, 그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것에 의해서 인도되는 과학자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진행됨에 따라서, 만일 패러다임이 투쟁에서 승리를 거둘 운명이라면, 설득력 있는 논증들의 수효와 강도가 증강 될 것이다. 그에 따라서 보다 많은 과학자들이 개종할 것이고, 새 패러다임의 탐사작업이 계속될 것이다. 점차 새 패러다임에 기초한 실험, 기기, 논문, 서적 등의 수효가 불어날 것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관점이 효과적이라는 점에 설득된 더 많은 사람들이 정상과학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하게 되면서, 결국 소수의 나이 많은 저항자들만이 남을 것이라고 한다.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서 과학의 발전은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이것과 공약불가능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형태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여러 사례를 통해 과학이 누적적으로 진보한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쿤의 생각이다. 그는 과학의 발전은 꾸준히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즉, 과학의 발전은 패러다임과 패러다임의 혁명적 교체의 반복 과정인 것이다.2. 중국의 4대 발명품과 패러다임의 전환쿤의 패러다임은 과학의 발전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으며, 자연과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자연과학에 있어서 패러다임이란, '보편적으로 인정된 과학적 업적으로, 일정 기간 전문가 집단에 있어서 문제나 해결방법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지금부터는 나의 전공과 패러다임을 연결 지어 보고자 한다. 나의 과는 '중국언어문화학과'로 다양한 소재들 중에서 '중국의 4대 발명품과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제로 삼았다.중국의 4대 발명품은 종이와 인쇄술, 화약, 나침반이다. 이들은 모두 세수조차 없으며 어떠한 교파나 제국 천문의 영향도 이 세 가지 발명품이 일으킨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 베이컨은 인쇄술과 화약, 나침반을 이른바 '세상을 바꾼 3대 발명'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 종이를 더하면 중국의 4대 발명품이 된다.우선 가장 먼저 종이의 발명과 그로 인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종이 이전에 문자는 단지 돌이나 금속에 새기거나 죽간, 목간, 베 등에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매우 불편할 뿐만 아니라 문화의 전달과 보존에도 매우 큰 제한이 되었다. 종이의 출현으로 문자를 쓰고 보존하는 것은 매우 편리하게 되었고 문화의 전달 조건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어 세계 문명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다. 동한 시기에 채륜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제지술에 혁신을 일으켰다. 그 결과 만들어진 종이는 재료의 내원이 광범위하고 편리하며 경제적이어서 종이의 질도 향상되고 대량 생산도 가능하게 되었다. 후에 중국의 제지기술은 끊임없이 혁신되어 종지의 질도 더욱 좋아졌으며 종류와 수량도 더욱 많아졌다. 중국의 제지 기술은 8세기 중엽, 당나라와 아바스 왕조 사이에 벌어진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아랍 국가로 전해졌다. 포로가 된 당군 중에서 제지기술공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지술은 12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계속해서 유럽 각 국으로 전해졌다가, 그 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해졌다. 중국 제지기술의 서방 전파는 유럽 문화의 발전과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유럽의 문예부흥에 큰 영향을 주어 근대 유럽사회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두 번째로 인쇄술의 전파를 통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인쇄술은 중국의 제지술에 뒤이어 문자의 전파 기술사상 또 하나의 중대한 발명으로 그 의의는 제지술의 발명을 능가한다. 제지술은 비록 문자의 수록 장소 문제는 해결하였지만,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책에 한 글자씩 손으로 베껴 적어야 했기 때문에 속도가 매우 느렸을 뿐만 아니라 복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중국 인쇄술의 탄생은 마침내었다.
1. 의궤란 무엇인가?의궤는 의식과 궤범이란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며 왕실과 국가의 주요한 행사를 마친 다음에 제작하는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혼례, 장례, 제사, 잔치/ 세자, 왕후의 책봉, 존호 올리기, 궁궐건축, 국왕의 행차, 선원보략(조선왕실족보), 국왕의 행차, 친잠(조선시대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던 일련의 의식. 백성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이를 널리 장려하고자 하는 것), 대사례 의식(국가에 행사가 있을 때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서 활을 쏘아 그 예의 도수를 살피는 의례), 중국 사신 영접, 태실 봉안 등의 의례나 행사, 사업을 시행할 때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하여 거행하였다. 도감은 일을 마친 다음 곧바로 이에 관한 보고서인 의궤를 편찬하였다.기록만이 아니라 주요한 장면을 그림으로 담아 현장의 모습을 보다 생동감 있고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의궤를 편찬한 다음에는 이를 여러 건으로 제작하여, 한 건은 국왕에게 올리고 나머지는 관련 기간과 사고에 보관하였다.2. 의궤의 내용의궤의 내용은 국왕에게 아뢴 말과 국왕의 명령, 공문서, 담당자 및 장인의 명단, 제작된 물품, 비용, 급료 지급 등을 기록한 것이다. 기록 가운데는 악기, 의복, 건물, 기물, 기계, 도구 등의 그림과 의식의 행렬도인 반차도가 들어있어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시각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반차도는 의식 참여 인원, 의장, 가마 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채색화로서,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의궤는 왕실 문화와 함께 행사를 준비하는 장인들의 이름과 역할, 연장이나 재료의 우리말 이름 등을 수록하여 일반 민의 삶과 문화도 함께 담았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의 의례와 문화를 알려주는 기록 문화의 꽃이다. 모든 사항을 철저히 기록하려는 기록정신과 기록이 곧 역사라는 역사의식에 의해 의궤는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보존되었다. 의궤의 기록문화로서의 가치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2007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 기록된 각종 행사를 위해서는 도감이라는 임시기구가 먼저 설치되었다. 도감은 행사의 명칭에 따라 가각 그 이름이 다른 기구로, 즉 왕실 혼례에는 가례도감,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에는 영접도감, 궁궐의 건축과 같은 일을 행할 때는 영건도감 등과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행사의 임시기구인 각 도감에서는 각자 맡은 행사를 주관하게 되는데 도감은 말 그대로 임시로 설치되는 기구이므로 관리들이 겸직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행사의 성격에 따라 인원의 규모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이렇게 각각의 행사에 따라 구성된 도감에서는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 과정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기록을 먼저 만들고 이를 정리하여 의궤를 제작한다. 의궤에 수록된 그림은 당대의 유명 화원들이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의궤는 기록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사 보고서라 할 수 있다. 반차도와 도설은 대개 천연색으로 그려져 문자 기록만으로는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행사나 사업의 현장감을 전달한다. 의궤는 보통 5~9부를 제작하였는데, 열람자나 보관처에 따라 왕에게 직접 올리는 어람용과 분상용(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는 의궤)로 구분되었다. 나머지 분상용 의궤는 의정부, 춘추관, 예조 등 관련 부서와 지방의 각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종대에 황제를 칭한 이후에는 황태자가 거처하는 시강원에 보관하는 것도 관례가 되었다.의궤 중에서는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왕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제작된 ‘어람용 의궤’다. 어람용 의궤는 책 오른편에 세로로 길게 놋쇠 조각을 대어 제본하는 철장을 하였다. 철장은 격식을 갖추어 오래 보존할 가치가 있는 책의 경우 사용하는 제본 방식이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녹색 비단으로 감싸고 제목은 흰색 비단에 써서 붙였다. 안의 종이는 초주지를 사용하는데, 붉은 괘선을 치고 해서체(글씨체 중 하나로, 곧고 바른 느낌을 줌)로 글씨를 썼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는 어람용 의궤의 형식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황제에 바치는 어람건과 황태자에게 바치는 예람건 봉 등의 의식 예법을 뜻한다. ‘가례도감의궤’ 들이 모두 왕이나 왕세자의 결혼식을 정리한 기록임을 볼 때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가례는 곧 왕실의 혼인의식, 특히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의식을 뜻하는 용어로 볼 수 있다. 즉, 가례도감의궤는 왕실의 혼인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이를 기록으로 보존하여 후대에도 본보기로 삼으려는 취지에서 편찬했음을 알 수 있다.‘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의 간택을 비롯해 혼인의 주요 행사는 물론 혼인에 필요한 각종 물품의 재료와 수량, 물품 제작에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행사와 관련하여 각 부서 간에 교환한 공문서 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가례도감의궤’는 기록과 그림에서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베어나 기록된 내용들도 활기차고 신명이 넘치며, 결혼 행렬을 그림으로 표현한 반차도를 함께 실어 보다 생동감 있게 구성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전기부터 왕실의 혼인을 위해 ‘가례도감’이 설치되고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가 편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조선전기의 의궤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현재 전하는 가례도감의궤 중 최초의 것은 1627년 (인조5) 소현세자가 강석기의 딸 강빈과 혼인한 의식을 정리한 [소현세자 가례도감의궤]이다.[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부터 2책으로 제작하여 후대에까지 이 관행이 이어졌는데, 1책으로 구성된 의궤의 반차도는 행렬이 8면에서 18면에 걸쳐 그려질 만큼 규모가 소략하고 왕비의 가마만이 그려진데 비해, 2책으로 구성된 의궤의 반차도에는 왕과 왕비의 가마가 함께 그려지면서 46면에서 92면에 이르는 긴 행렬이 화면을 채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조선 후기로 오면서 가례 행사의 규모가 커지고, 행사의 내용이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2. 반차도란?‘반차’란 ‘임무나 등급에 따라 나뉜 순서나 절차’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반차도는 행사의 모습은 물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에 따라 어디에 서 있는지 까지 인식함과 동시에 신분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것이 신분이나 당색보다 능력을 우선한 ‘탕평책’을 적극 추진한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영조는 1704년 달성 서씨인 진사 서종제의 딸과 혼인하였다. 영조는 당시 숙종의 제 4왕자인 연잉군 위치에 있었으며, 그와 혼인한 서씨 부인은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다. 경종이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어 연잉군이 세제에 봉해지자 서씨 부인은 1721년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가 즉위하여 왕비에 오라 정성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조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이 1757년 사망했다. 정성왕후가 사망하자 영조는 1759년 계비로 김한구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다.2. 정순왕후정순왕후 김씨는 경기 김씨 김한구의 딸로 15세의 꽃다운 나이에 영조에게 시집왔다. 정순왕후는 특히 자식뻘인 사도세자 내외와는 무척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시집 올 당시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나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다. 영조의 사후 정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비록 31세에 불과했지만 곧바로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정조와 정순왕후의 관계에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갈등의 골은 깊었는데, 정순왕후의 부친인 김한구와 그녀의 형제들은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조를 한 나경언이라는 인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순왕후의 친족들은 영조대에 노론 강경파의 핵심으로 활약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1800년 개혁군주 정조의 급서는 야심에 찬 여인 정순왕후에게 정치적으로 날개를 달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대왕대비가 된 정순왕후는 여군 또는 여주로 자처하며 수렴절목을 제정하여 수렴청정을 공식화시켰다. 정순왕후는 2년 반 동안의 수렴첨정을 통해 국정에 깊이 개입했으며, 정조가 구축한 탕평정치의 기반을 파괴하고 자신의 친인척들과 노론 벽파의 세력 확장을 후원했다.그러나 1804년 순조의 친정체제가 이루어지자 정순왕후는 수렴을 걷고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상징적 존재로 되돌아갔다. 권력을 잃가는 50면에 달하는 가 실려 있는데 379필의 말과 1,29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를 통해 당시 결혼식의 모습, 나아가 왕실 행사의 단면을 조명해 볼 수 있다.2. 의미‘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는 영조대에 혼인 의식을 재정비한 ‘국혼정례’(1749년(영조 25) 박문수(朴文秀) 등이 왕명을 받아 국혼에 관한 정식(定式)을 적은 책)와 ‘상방정례’(1750년(영조 26) 상의원(尙衣院)에서 편찬한 궁중의복 관계의 책)가 만들어진 후 이에 준거하여 만든 최초의 의궤로서 조선시대 왕실 결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이들 책의 간행으로 의식 절차가 보다 정밀하고 체계화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의궤의 내용도 한층 상세해지고 분량도 늘어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당시의 기록들에서 왕실 혼인의 구체적인 모습과 함께 국가의 정치, 문화, 경제적 역량이 한데 집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의궤 제작에 사용된 깨끗하고 질긴 종이, 정성을 들인 유려한 필체, 250여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깔끔하게 채색되어 전혀 변질되지 않은 그림 등은 문화재로서 의궤의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한다.3. 내용영조와 정순왕후 결혼식의 전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의 첫머리에는 요즘 흔히 보는 책들처럼 위와 같은 큰 제목들을 적은 목록이 나온다. 의궤의 목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행사와 관련된 각종 공문서, 분담 업무, 유공자 포상, 행사의 모습을 그린 기록 등이다.이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일방의궤, 이방의궤, 삼방의궤, 별공작의궤, 수리소의궤 등 의궤 속의 의궤의 형태를 띠는 부분이다. 이들 의궤 속의 의궤는 각방에서 이루어진 업무를 세밀히 보고한 것으로 세부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가례도감의 좌목에서는 행사를 주관하는 담당 관리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영조대왕의 가례를 거행하기 위해 1759년 6월 6일 이조에서 올린 담당 관리의 총 명단은 다음과 같다. 행사의 담당은 현이다.
Ⅰ. 동서양의 전통적 자연관의 비교1. 동양적 자연관- 고대 중국의 고전 中 우주 생성의 원리태초에 아무것도 구분이 안 된 혼동상태가 있으며, 그 중심에 ‘氣’가 있었다. 그 기가 음과 양의 이기로 나뉘게 되었다. 탁하고 무거운 것은 땅, 맑고 가벼운 것은 하늘이 되었다. 음과 양의 이기가 상호작용을 해 오행(화, 수, 목, 금, 토)을 만들어 냈다. 음과 양과 오행이 작용하여 우주를 낳고 일체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동양의 오행설- 오행의 상생(생성) : 목→화→토→금→수→목- 오행의 상극 : 목>토>수>화>금>목- 유기체적 자연관.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다.그러므로 그 속의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되어있다. 인간계와 자연계는 서로 구분될 수 없다. 인간계와 자연계는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자연계에는 자연계를 운행하는 독자적인 원리나 법칙은 없다. 인간계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군림하는 존재가 아님. 자연계를 구성하는 부분일 뿐.→ 근대과학의 정신에 위배가 되는 생각2. 서양적 자연관- 1966년, 린 화이트의 논문 서양적 자연관(성서 속)이 환경파괴의 주범이다.신이 인간을 위해 우주만물을 창조했다. 인간은 자연계에 군림하며, 마음대로 이용?개발 할 수 있다.- 고대 : 목적론적 자연관 / 중세 : 성서적 자연관 / 근대 이후 : 기계적 자연관? 목적론적 자연관 : 우주는 합리적인 설계의 산물이다. 질서?조화?목적이 있음. 일체의 자연현상은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질서 있게 일어남. 지계와 천계는 서로 이질적이다. 따라서 자연계에는 자연계를 움직이는 독자적인 법칙이나 원리가 있다.? 성서적 자연관 : 신계, 인간계, 자연계 - 위계적, 이질적? 기계적 자연관 : 무신론적 성격. 우주?자연은 하나의 기계다. 자연에는 물질과 그 물질의 운동만이 있다. 영혼만이 非물질적인것(인간우위사상)3. 동서양 자연관의 비교- 동양의 자연관 : 일원론적 자연관. 인간은 특별한 존재X. 자연의 한 부분. 자연과 인간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함.- 서한 수준의 역법? 1669년, 조선 현종 대, 두 개의 시계- 이민철 : 물을 동력으로 함.수경식 천문시계- 송이영 : 자명종식 천문 시계.? 송이영의 혼천시계- 서양식 태엽, 톱니바퀴, 추 도입- 국보 제 230호- 고려대 박물관 소장- 동양의 전통적 천문학 + 서양의 과학기술- 하루에 12번 시각을 알려줌. 지구와 태양 의 움직임 정확히 재현.- 세계 과학기술사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음. 동서양의 과학기술이 결합된 유일한 시계 이다.2. 천문학과 관측기구* 조선 천문학 발달의 이유 : 유교사상과 밀접한 관련 有.- 관천수시의 사상 : 정확하게 천문을 관측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알고 시간을 알려준다.? 앙부일구(귀) : 앙부일구는 솥처럼 생긴 오목해시계. 시간과 계절에 따른 해 그림자의 변화를 이용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시계. 이 시계는 시각선과 절기선 2종류의 호가 새겨져 있다. 이 시각선과 절기선을 이용하여 시각을 재는 시계인 동시에 절기를 알려주는 달력 구실을 하였다. 세종은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백성이 널리 사용토록 하여 공중시계 역할을 하였으며, 시각 눈금 위에 시를 나타내는 12지신을 그려 글자를 모르는 백성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자격루? 자격루 : 1434년 제작. 스스로 때리는 물시계.2. 천문학과 관측기구? 자격루? 시각을 알려주는 시보장치와 시각을 계측하는 장치 두 부분. 임진왜란 때 소실됨.? 파수호로부터 수수호로 흘러들어간 물의 양으로서 시간 파악. 긴 원통 모양의 수수호 안에는 잣대가 있어서 격발장치를 건드리면 구리 알이 떨어지면서 지렛대를 움직이고, 지렛대는 시보인형을 움직인다. 궁 사방의 문지기들이 이를 듣고 반복한다.? 15세기 당시 전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최첨단 기계장치였음.? 측우기? 조선시대에는 천문학과 기상학이 하나의 분야. 천문기상학.? 세계 최초로 규격화 된 용기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전국에 배포. 매일, 주, 달의 강우량을 측정해 중앙에 보고. 이를 농사, 과세하는데 참고.? 세종실록조선 고유의 의학 탄생.* 세종시대에 추진된 향약정책의 내용(1) 향약과 당재(중국약재),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 비교, 검토(2) 지리지의 작성 : 새로이, 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지리지 작성- 전국 각각의 지형과 풍속과 인구, 생산품, 어떤 약재가 나는지 등의 분포를 자세히 기록. 세종시대에 보다 우수한 지리지를 만들려는 노력이 이루어짐.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식물성 약재가 243종, 동물성 약재가 46종, 광물성 약재가 14종이 수록. 이는 동양의학사상 놀라운 성과이다.(3) 수입약품을 대체할 국산 약재의 발견, 개발, 생산 노력(4) 제생원이라는 기관 설립- 향약정책 추진. 향약재 사용해서 의학서 편찬 등의 역할을 함.- 향약재 개발, 평가 역할. 향약 생산의 대량화, 과학화 추진- 이때 많은 의학서가 편찬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2가지가 (1445), (1433)이다.? (1443) : 향약운동의 결과. 우리 고유의 약재 소개. 85권.? (1445) : 의학의 백과사전. 그때까지 동양문화권에서 발간된 의학서를 전부 모아서 정리하고 있는 책. 365권에 달하는 방대한 의학백과사전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보다 우수한 병의 진단과 치료가 이루어졌다.- 세종대 이루어진 한방의학은 동양 최고의 수준이었다.- 허준 : 1613년. 조선의학의 결정체.? 임진왜란 이전의 의학 성과 집대성.? 독창적인 의학의 성립.? 총 1402종의 약재가 나오는데, 당약은 90종 뿐. 1724년과 1794년 사이에 계속적으로 출판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허준의 동의보감이 1763년, 1793년, 1896년에 발간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동양 한방의학계에 널리 보급되고 있다. 이를 통해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독보적으로 우수한 책임을 알 수 있음.5. 농업분야의 발전- : 각 지역의 토지의 풍토를 알려줌.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인 농업기술서.이를 널리 보급하여 북부에서도 본격적으로 농업을 하도록 도움. 국가재정에도 도움.- 휴한법의 극복. 상경정을 위해 뛰어난 업적을 세운 셈이다. 바로 그 시대의 과학기술 발달은 그런 정신적 안정을 향한 새 왕조의 노력이 세종을 통해 나타난 것이었다. 세종의 과업은 조선의 문화 수준을 드높이는 일이었다. 세종은 그런 노력을 여러 갈래에서 추진했고, 그것이 크게 성공한 것이다. 그런 일체의 노력은 당연히 세종시대의 ‘정치적’ 업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세종의 과학기술은 꼭 지금과 같은 의미에서의 ‘과학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고 나아가서는 그의 왕조를 반석에 올려놓으려는 새 임금의 결의에 찬 실천이었다.따라서 세종 이후 과학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것은 그리 놀라울 일이 못된다. 세종 이후에는 조선 왕조의 왕권은 그야말로 반석 위에 놓여졌고, 당연히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의 정비나 천문학의 연구 개발이 새삼 필요하지는 않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옛날에도 ‘필요는 발명의 아버지’였다.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발달은 세종시대의 독특한 필요성에서 가능했던 눈부신 업적이었던 것이다.Ⅳ. 조선 문화의 일본전파 - 임진왜란과 조선 문화의 일본 전파- 조선 후기 = 일본 에도시대(1603-1868)- 17, 18세기 200년간 한·일 간의 관계는 대단히 평화로운 시기. 우호적인 시기.-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서서히 쇠퇴. 반면 일본은 폭발적인 문화 향상.- · 1978년, 미국의 MIT 대학 출판부. 에도시기에 일어난 지적 폭발. 이는 중국 문화의 물결이 그 원인이다. → 에도시대 일본은 어느 나라와도 문화교류가 없는 상태. 임진왜란을 통해 철저히 약탈된 조선의 과학기술, 조선인으로 인해 문화적 향상이 일어난 것임.? 엄청난 수의 조선인이 일본에 강제로 이주.- 약 20만명이 일본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고 얘기됨. 그러나 실제는 이보다 많음.- 당시 일본은 280여개의 번국으로 나뉘어 있었음. (에도막부가 그 위에 군림)- 그 중, 사쓰마 번에 끌려간 조선인만 30,700명. 이는 광해군 일기 9년조를 보면 알 수 있음. 당시 경상도 지역의 지진왜란과 조선 문화의 일본 전파⑤ 인쇄술, 제지술의 전파- 조선으로부터 잡혀간 인쇄공들로부터 일본에서 출판문화가 활짝 꽃피었다.- 일본의 인쇄문화는 금방 조선을 따라잡아, 출판 산업으로까지 발달하였다.⑥ 조선 통신사의 역할- 에도시대에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조선 통신사이다.- 200년 동안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대략 450~500명으로 보통 10개월 정도 근무하고 모든 경비는 일본에서 부담하였다.- 17c 7회 / 18c 4회 / 19c 초 1회-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오랫동안 뒤떨어진 나라였는데, 조선통신사의 파견과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17,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조선 문화를 모두 흡수해 새로운 문화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⑦ 역법의 전파- 정향력 : 1684년. 일본의 역법- 조선통신사 박안기의 도움을 받아 만듬.? 조선 문화가 일본의 문화 향상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서양 상인으로부터 화약의 제조법을 전래받고, 1543년에 일본 각국의 영주들은 우수한 청포들을 개발하고 만들어, 15년 정도가 지난 후 일본 전역에 개인 소총이 유통되었다. 개량도 급속하게 이루어져 일본인의 체형에 맞는 우수한 무기를 만들어냈다. 조선의 실학자 이수광의 에 ‘일본의 소총의 천하제일이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일본은 특히 무기기술, 시계기술 등 정밀기술 분야에서 서양에 지지 않는 우수한 단계에 이르렀다. 일본은 16세기 후반부터 동양 3국에서 으뜸으로 서양의 선진기술을 흡수하여 발전했다.근대식 기계 시계현대 산업사회를 연 열쇠는 증기기관이 아니다. 증기기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계다. 얼마나 정확한 기계시계를 만들 수 있느냐가 산업 분야에서 우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시계가 근대 과학기술에 있어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일본의 시계제작 능력을 보면 이미 16세기 중간에 일본 최초로 서양의 상인들이 와서 시계를 팔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근대적인 무기를 만들게 된다.일본은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하였는가?번역 했다.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사회 주도세력을 통해 보는 신라의 해체과정과 고려의 성립-목차Ⅰ.머리말 Ⅲ.호족의 할거Ⅱ.신라하대의 상황 1.호족의 등장배경1.골품제의 모순 1)골품제의 모순1)귀족의 분열과 왕위 쟁탈전 2)선종과 풍수지리설2)6두품의 세력의 도전 2.호족세력의 대두2.대토지겸병과 토지제도의 문란 1)해상세력 출신의 호족3.농민층의 피폐와 농민봉기 2)군진세력 출신의 호족3)성주, 장군의 자립Ⅳ.맺음말Ⅰ.머리말신라 하대는 한국사에 있어서 고대사회의 종말기로 여러 가지 사회모순이 노출된 시기였다. 신라의 모든 사상과 생활을 지배하던 골품제도의 모순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중앙정치는 혼란스러워졌고, 이 혼란은 신라의 사회와 경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라정부가 정치, 사회적 혼란으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지방 세력인 호족이 성장하였고, 이는 후삼국의 정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은 한국 중세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진통으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Ⅱ.신라 하대의 상황1.골품제의 모순1)진골귀족의 분열과 왕위 쟁탈전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되는 신라사 중 무열왕계를 따라 왕권이 계승되던 중대의 말부터 이미 왕권에게 도전하는 귀족의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무열왕의 통일 이후 유지된 사회적 안정과 전제 왕권적 관료제는 귀족 세력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경덕왕은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한화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경덕왕 말기에 녹읍이 부활하였던 점을 보았을 때 귀족들의 도전은 쉽게 막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귀족들의 도전은 혜공광대에 더욱 거세져, 768년(혜공왕4) 대공의 난부터 시작하여 96각간들이 서로 싸우는 반란이 일어난다. 이 대란들은 비록 진압되었지만 조정은 안정을 찾지 못하였고, 혜공왕 16년 김지정의 거병을 상대등 김양상이 제압하는 과정에서 혜공왕이 살해당하게 되었다. 그 후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 하대가 시작 되었다. 선덕왕을 이어 내물왕계를 자처하는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하여 부“나라에 5品이 있으니 聖而(성이)요 眞骨(진골)이요 得難(득난)이라.”고 적혀있듯 6두품은 얻기 힘든 신분이었고 그 아래 4두품, 5두품이 감히 비길 수도 없는 귀한 신분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6두품들은 관등과 관직에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17관등 중 제6관등인 아찬까지만 허용됐고, 상대등, 중시는 물론 각 부의 장관직에도 오를 수 없었다. 6두품들은 주어진 한계 안에서 지위를 누리거나 혹은 종교, 학문 등에 의지하여 출세하는 다른 길을 트거나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 숙위학생이 되었다.신라 하대에 이르자 6두품들은 정치, 사회적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역량을 확대시켜 나갔다. 당으로 유학을 떠난 숙위학생들 중 많은 수가 당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시행한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다. 당에서 벼슬을 하고 신라로 돌아온 6두품들은 중앙관청에 근무하며 그들이 배워온 능력본위의 인재등용과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고취시켰다. 숙위학생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3최라고 불리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가 있다. 그중 최치원은 귀국하여 10조의 시무책을 건의하였는데 그 내용에는 과거제에 의한 인재 등용, 유교적 정치이념의 실천 등이 있었다.허나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골품제 안에서는 결코 신분 상승을 할 수 없었다. 신분을 초월하여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을 갈망하던 6두품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골품제 자체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신라 신분제도의 근간인 골품제도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은 곧 신라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2.대토지겸병과 토지제도의 문란신라의 귀족들은 관직에 복무하고 그 대가로 녹읍을 지급 받았다. 녹읍은 일정한 지역의 토지를 의미하는데, 귀족들은 지급받은 녹읍 안에서 조세, 공납, 역과 같은 경제적 수취도 보수로서 인정받았다. 이처럼 귀족의 위세를 보여주던 녹읍은 강력한 왕권이 완성된 신문왕 9년에 단순 조세만을 취할 수 있는 관료전과 녹봉으로 대체되어 폐지되었지만, 신라 중대에 이르러 경덕왕 16년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토지제기에다 때마침 불어 닥친 흉년이라는 재앙이 겹치면서 농민들은 참담한 삶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소농들은 토지를 유력자에게 양도하고 그 아래로 들어가거나 유망하기 시작했다.농민들의 몰락은 국가의 재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정부는 재정의 어려움을 농민들에게 더 부담 지움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다. 신라는 진성여왕대에 재정난이 이미 한계에 도달하였고, 결국 그는 전국에 공부를 독촉하게 된다. 흉년과 전염병 등으로 이미 어려움을 겪던 농민들은 공부의 독촉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농민봉기의 첫 횃불을 든 것은 사벌주 지방의 원종과 애노였다. 이들 세력은 매우 강하여 진압하러 나선 정부군들이 그들의 기세에 눌려 싸울 생각조차 못했다고 전해진다. 원종과 애노의 반란에 뒤이어 북원의 양길과 죽주의 기훤, 완산의 견훤, 양길의 부하 궁예 등이 계속하여 일어났다.초적이라는 이름 없는 농민군들도 전국에서 수없이 일어났는데, 초적의 무리가 조직을 갖추어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농민군으로 발전해나갔다. 경주 서쪽 지방에서 적고적이 봉기한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농민군들은 지도자를 추대하여 일정 영역을 단위로 정치적 결사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이 호족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Ⅲ.호족의 할거1.호족의 등장배경1) 골품제의 모순지금까지 연구된 성과로 내릴 수 있는 호족의 정의는 “신라 골품제에서 벗어나려는 지방세력으로, 일정한 지역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사회적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며 신라 골품귀족이나 고려 문벌귀족과는 대비되는 신라 말고려 초의 정치적 지배세력” 이라고 하겠다.신라의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된 진성여왕대에 호족은 지방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하게 된다. 호족이 등장하게 된 것은 신라 골품제사회 여러 가지 문제점들 때문이었다. 당시 골품제사회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진골귀족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진골귀족의 수가 늘어나게 되자 귀족들은 이미 포화상태인 관계 진출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력가들은 독자적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이 신라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독립하여 호족이 되는 건 그들의 배경을 볼 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들은 언제든 골품제의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중앙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고 전국적으로 농민의 반란이 발생한 진성여왕대에 호족들은 전국적으로 대두하게 되었다.2) 선종과 풍수지리설선종은 석가가 영산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기원하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 때문에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크게 대두되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여,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자기 내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밖으로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고 깊숙한 산간에 파묻혀 수행하는, 이른바 좌선을 행하였다. 누구나 참선에 의해서 성불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선종은 교종의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선종은 경주를 중심으로 성행하는 교종과 달리 지금껏 중대되지 않은 지방의 산들을 중심으로 사찰을 짓고 활동하였다. 거기에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이고 단순한 성향을 지녀, 중앙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지방에 웅거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호족의 의식구조와 부합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선종의 유행은 지방호족이 대두되는 사회상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당시 선종의 사찰들이 지방의 산을 중심으로 지어진 데에는 풍수지리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풍수지리설은 음양오행과 역에 기본을 둔 학문으로, 산세와 지세 등을 토대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설명하는 학문이었다. 신라 말기 도선에 의해서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던 풍수지리설은 인간생활의 길흉화복ㆍ성쇠득실에 대한 예언을 믿는 도참사상과 결합되었다. 풍수지리설은 혼란한 시대에서 동요하는 백성들에게 쉽게 스며들어갔고, 동시에 호족들에게는 세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다.이와 같이, 신라 말기에 중앙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지방호족이 대두하여 그 으로 활발해진다.대표적인 해상세력으로는 송악지역에 근거를 두고 활동한 왕건의 조부 작제건이 있다. 작제건설화를 보면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하던 중 서해 용왕을 만나 그의 딸과 결혼하고 칠보를 얻어 돌아왔다고 한다. 여기서 작제건이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하였다는 것은 그가 해상무역에 종사한 해상세력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또한 그가 가져온 7보는 해상무역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서해 용왕은 막대한 재부를 가진 서해 해상세력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가 돌아오자 개주, 정주, 염주, 백천 4주와 황해, 강화, 한강 3현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영안성을 쌓았다는 대목에서 그의 영향력이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부, 강화도, 한강 하류지역에 미쳤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외에도 강주의 왕봉규나 혜성의 박술희와 복지겸, 전라남도 압해도의 능창과 같은 인물들이 해상무역을 통해 호족으로 성장하였다.2)군진세력 출신의 호족신라의 군진은 처음에는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내륙의 요지에 설치되었다. 삼척에 북진을 설치한 것이나, 평산에 패강진을 설치한 것이 이에 속한다. 그 후에는 해적의 퇴치나 해상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해안의 요지에 군진이 설치되었다. 완도의 청해진, 남양만 일대에 당성진,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했다. 이들 지역에서는 군진 지휘관이나 토호 세력들이 군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말에 유력한 호족들로 성장한 경우가 많았다. 패강진 세력을 등에 업고 일어난 왕건이나 청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장보고 등이 대표적이다.청해진은 흥덕왕 3년에 장보고에 의하여 설치되었다. 장보고는 본래 당에 가서 군인으로 출세하였다.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던 그는 서주 무령군에 복무해 장교가 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 등주까지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중국과 신라·일본 등을 내왕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자들도 많았다. 산동반도나 강소성에 그들의 집단거류지가 생겨 신라방으로 불리었고, 자치행정기관
..PAGE:1한 제국의 사상과역사서술..PAGE:2[1]한 제국의 사상한 제국 초기의 사상-진나라의 사상 통일 → 실패, 멸망의 원인-유방을 비롯한 개국 공신들의 출신-건국 초기의 혼란▶ 다양한 사상들의 혼재: 특정한 학파 중시 X, 선진 시대의 다양한 사상 존재..PAGE:3[1]한 제국의 사상한 제국 초기의 사상-황노사상의 등장-진나라의 정치적 , 사회적 유산 잔재→ 지배계층은 진나라의 흔적을 없애고자 함-도가 계층의 황노사상이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유행-황노사상황제 + 노자-한 제국의 사회, 경제적 안정을 이루는데 큰 공헌-한 고조의 법삼장, 급암, 두태후..PAGE:4[1]한 제국의 사상황노사상조참- 소하 사후, 상국이 되어 황노사상을 정책으로 채택- 백성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일체의 불간섭과 방임정책을 취함 → 백성들의 생활 안정, 윤택, 국력의 회복소규조수 (蕭規曹隨)황노사상-문경지치-문제와 경제 : 황노사상을 바탕으로 무위의 정치 실현-도가의 자유방임적 내용에 많은 가치를 둠-문경의 치세..PAGE:5[1]한 제국의 사상황노사상-쇠퇴-기원전 135년, 두태후의 죽음-기원전 122년, 회남자의 편자인 유안이 주살-한 무제, 유교의 국교화황노사상 정치, 사회에서 쇠퇴황노사상-황노신앙-황노사상이 민간신앙과 결합-종교적 요소를 지니게 되면서 황노신앙으로 변모-후한 말, 태평도교와 오두미도교의 출현..PAGE:6[1]한 제국의 사상태평도교-간길 - 태평청령서-종교 의례, 주술적인 힘을 지닌 물을 만들어 병을 치료-장각-병에 걸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 반성케 함-부적을 넣은 물을 마시게 하여 병을 치료-184년 황건의 난오두미도교-장릉-직접 도서를 만들어 신자를 끌어 모음-교단의 신자에게 치료비나 종교 헌금 명목으로 다섯 말의 쌀을 받아 오두미도라 불림-주문과 귀신을 부리는 술법을 시행하여 병을 치료..PAGE:7[1]한 제국의 사상구 시대의 청산, 새로운 사회의 모색-왕조 지배의 이념적 근거 필요-무위지치가 아닌 새로운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출현-육가[陸賈] 와 가의[賈誼]-나라를 통치하는 데는 유가사상이 유용함을 건의-육가 : 유가의 유용함-가의 : 유가의 이상과 법가의 실용성..PAGE:8[1]한 제국의 사상한 무제 시기의 사상-동중서의 건의 → 유교의 국교화-장안에 태학 설립, 오경박사, 박사제자원과 효렴과-유학은 어떻게 다른 사상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았을까?-진의 폭정을 없애는 명분으로 성립된 한 왕조,법가와 반대되는 유가를 내세우다-유학은 당시 향촌 내의 질서를 통제하는데 적합한 사상-왕조의 집권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효과적으로 사용-자기 절제, 타인에 대한 관심,예에 대한 사랑, 원칙에 대한 헌신, 상위자에 대한 충성..PAGE:9[1]한 제국의 사상동중서유교 국교화의 길-근엄실직한 학자-춘추 전공-경제 : 박사의 지위, 문제 : 본격적 활동-춘추번로 : 춘추의 대의 설명, 음양오행설 접목,천인감응설-군권신수설-춘추공양학, 춘추재이설-역사 순환론 : 삼통과 삼정-성삼품설, 삼강오륜..PAGE:10[1]한 제국의 사상유학일존의 시대-훈고학과 경학의 발달-경학 : 경서를 복원하고 정리하다-금문 경학과 고문 경학의 대립-금문 경서 : 학자들의 기억에 의지해 재구성한 경서-당시의 문자인 예서로 기록하여 지금의 문자(今文)-고문 경서 : 전서로 쓰인 경서- 무제 ~ 성제 시대에 발견..PAGE:11[1]한 제국의 사상금문 경학과 고문 경학-전한 시대 : 고문 경서가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함-전한 말기 : 유흠을 필두로 한 고문 경학의 학자들이 금문 경서 및 그 주석에 대해 학문적으로 도전하기 시작(논쟁의 시작)-전한 말기 : 고문 경학파의 유흠, 왕망에 협조-후한 초기 : 광무제의 금문 경학 부흥-그러나, 고문 경학은 결국 후한을 대표하는 경학으로 자리잡음..PAGE:12[1]한 제국의 사상경서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밝히다-후한 시대, 금문 경학과 고문 경학의 절충-마융과 정현-많은 경서들에 대한 주석을 집필-금문 경학과 고문 경학의 대립 일단락정치적으로 이용된 참위참위설- 후한에서 크게 유행- 미래에 대한 예언- 광무제 유수, 왕망- 참위설의 비판 : 환담, 정흥, 장형, 윤민..PAGE:13[1]한 제국의 사상한 제국의 사상-다양한 사상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발달-후대 중국에 많은 영향-유교 - 전 중국의 정치적, 사상적 기본이념-불교 - 동아시아 문명권의 형성-한 제국의 사상의 의의복잡하고 다양한 중국을 하나의 중국으로만들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사상적 통일의기반을 마련..PAGE:14[2]한 제국의 역사서술사기[史記]-동양 역사서의 근간이자인간학의 보고(寶庫)-전설 상의 황제(黃帝) 시대~한 무제(漢武帝) 때까지2000여 년을 다룬 통사-본기(本紀) 12권,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세가(世家) 30권,열전(列傳) 70권모두 130권 52만 6천 5백자..PAGE:15[2]한 제국의 역사서술사기가 주목받는 이유?-황제,제후,영웅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하층민의 일생에 대한 구체적인 저술이 있다.-지위에 상관없이 큰 역할을 한 인물 등장***예를 들어 황제가 되어 왕조를 세운 적은 없지만,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한동안 천하의 패자로서 세력을 떨친 항우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있다는 점***-그대로의 역사-..PAGE:16[2]한 제국의 역사서술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지나간 일을 기록함으로써미래를 생각한다(術往事思來者)-치욕적인 형벌을 받고도후세에 진실을 전달하려는 의지와있는 그대로 보려는 그의 자세는역사는 다양한 주체들의 참여로만들어진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우주의 눈-..PAGE:17[2]한 제국의 역사서술한서[漢書]-전한 왕조 일대의 단대사-주로 한 왕조에 대한 서술-한서는 12제기(帝紀),8표(表),10지(志),70열전(列傳)으로전 100권으로 이루어졌다..PAGE:18[2]한 제국의 역사서술한서의 특징-약 200년간의 역사를 다룬 한서가 3,000년을 망라했다고 하는 사기보다 분량이 훨씬 많다(문서기록의 발달 등의 사회발전)-황제와 황족의 생활을 을 인물별연대기별로 기술(그들의 민정군정상의 중요한 활동을 포함)-있어야할 역사-..PAGE:19[2]한 제국의 역사서술한서를 저술한 반고-반표(아버지)반고(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