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말여초의 사회변동
- 최초 등록일
- 2014.11.12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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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머리말
Ⅱ.신라하대의 상황
1.골품제의 모순
1)귀족의 분열과 왕위 쟁탈전
2)6두품의 세력의 도전
2.대토지겸병과 토지제도의 문란
3.농민층의 피폐와 농민봉기
Ⅲ.호족의 할거
1.호족의 등장배경
1)골품제의 모순
2)선종과 풍수지리설
2. 호족세력의 대두
1)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2) 군진세력 출신의 호족
3) 성주, 장군의 자립
Ⅳ.맺음말
본문내용
신라 하대는 한국사에 있어서 고대사회의 종말기로 여러 가지 사회모순이 노출된 시기였다. 신라의 모든 사상과 생활을 지배하던 골품제도의 모순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중앙정치는 혼란스러워졌고, 이 혼란은 신라의 사회와 경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라정부가 정치, 사회적 혼란으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지방 세력인 호족이 성장하였고, 이는 후삼국의 정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은 한국 중세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진통으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중 략>
신라의 귀족들은 관직에 복무하고 그 대가로 녹읍을 지급 받았다. 녹읍은 일정한 지역의 토지를 의미하는데, 귀족들은 지급받은 녹읍 안에서 조세, 공납, 역과 같은 경제적 수취도 보수로서 인정받았다. 이처럼 귀족의 위세를 보여주던 녹읍은 강력한 왕권이 완성된 신문왕 9년에 단순 조세만을 취할 수 있는 관료전과 녹봉으로 대체되어 폐지되었지만, 신라 중대에 이르러 경덕왕 16년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토지제도는 신라 하대에 정치적인 혼란과 더불어 더욱 심하게 문란해진다. 본래 중앙의 감시에서 분립적인 성격이 강해 폐해가 심했던 녹읍과 더불어 문제가 된 것은 사적인 토지인 전장의 확대였다. 귀족들은 신간지 개척 외에도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거나 혹은 고리대 등의 방법으로 사적인 토지를 넓혀갔다.
<중 략>
선종은 석가가 영산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기원하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 때문에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크게 대두되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여,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자기 내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밖으로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고 깊숙한 산간에 파묻혀 수행하는, 이른바 좌선을 행하였다. 누구나 참선에 의해서 성불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선종은 교종의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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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헌. “도선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 : 선종과 풍수지리설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사연구』, 1975, 11, pp.10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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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제11권. 국사편찬위원회, 2013.
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2008.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5191&cid=46648&categoryId=46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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