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외된 노동 요약 개설맑스가 저술한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소외된 노동(die entfremdete Arbeit)은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이번 요약은, ‘노동’의 본질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하여, 당대에 만연한 사적소유의 모습과 국민경제학에 대한 비판,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외된 노동의 형태에 대한 것으로 정리된다. 소외된 노동의 형태는 다시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둘째,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 셋째,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넷째,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가 그것이다.노동의 본질- 유적존재로서의 인간과 노동(1) 유적존재는 의식적 생활 활동을 하는 인간적 자연존재이다맑스는 인간을 유적존재 (類的存在:Gattungs- wesen)라고 정의했다. 이는 ‘인간적 자연존재’로, ‘의식적 생활 활동’(die bewußte Lebenstätigkeit)의 주체이다. 자연은 이러한 인간적 존재방식에서 유적 존재로서의 근거지로 현전한다.(2) 노동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본질적 속성이다인간은 자신이 유로서의 인간에 속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생산적 활동을 하며, 이 의식적 활동으로 자신의 사회성을 깨닫는다. 맑스는 “이 의식적 생활 활동을 최종적으로 노동과 동일시한다.” 이것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본질적 속성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대상적 세계를 가공하면서 자신을 증명한다.1.2 소외된 노동의 제 형태1.2.1 출발점: 사적 소유와 경제학적 사실(1) “노동자는 가장 비참한 상품”이라는 폭로맑스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저술들을 분석하여 “노동자가 상품으로, 그것도 가장 비참한 상품으로 전락한다는 것, 노동자의 빈곤은 그의 생산의 힘과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것, 경쟁의 필연적 결과는 소수의 수중으로서의 자본의 축적이라는 것” 등을 밝혀내기에 이른다.(2) ‘사적 소유’라는 물질적 과정의 본질적 연관관계를 드러내다국민경제학은 이런 상황을 당연시하고 법칙을 찾아내는 것에 급급할 뿐, ‘사적 소유’로 인한 본질적인 연관관계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맑스는 여기에서 “국민경제학적인 사실, 즉 노동자의 궁핍화와 상품화라고 하는 사실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명하려고 시도하게 된것이다.”1.2.2 소외된 노동의 제 형태1.2.2.1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1) 노동 대상에 투여된 생명이 노동자로부터 적대하는 낯선 힘이 되다앞선 정의에 따르면 노동은 본래 인간의 삶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노동하여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는 노동의 ‘대상화’(vergegenständlichung)는 사적 소유를 전제로 하는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의 ‘현실화’(Verwirklichung)가 아닌, 노동의 ‘탈현실화’(Entwirklichung)로 나타난다.” 노동생산물은 노동자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힘으로서 노동자를 지배한다.(2) 노동의 대상이자 생활 수단으로서의 대상물에 예속되는 노동자노동자는 노동자로서, 육체적 주체로서 노동의 대상이자 생활 수단인 대상물에 “전면적으로 예속되지 않으면 안 되는 최악의 상태에 봉착”한다. 생존과 노동을 위해 불가결한 대상을 탈취당하게 되는 것이다.(3) 국민 경제학은 소외의 관계를 은폐하고 있다“국민 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물의 직접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라고 맑스는 비판한다. 노동은 ‘노동’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국민경제학적 ‘법칙’에 따르면 자신의 대상 속에서의 노동자의 소외는 필연적이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물의 관계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1.2.2.2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1) 소외는 생산의 결과뿐 아니라 생산하는 활동 ‘내부’에서도 나타난다“생산물은 활동의, 생산의 요약(Resümee)일 뿐”이다. “노동 대상의 소외는 단지 노동 활동 그 자체에서의 소외”를 요약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 특유의 활동적 기능인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인간은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사물의 소외’ (Entfremdung der Sache)와 구별하여 ‘자기소외’ (Selbstenrfremdung)라고 부른다.(2) 노동의 소외가 나타나는 이유 3가지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가 노동에게 부여하는 특성이 1)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외적인 것이며, 2) 그의 노동이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 강제 노동(Zwangsarbeit)이며, 3) 그의 노동이 그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속하기 때문에 노동의 소외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3) 노동의 소외 결과 인간은 동물로 전락한다자발성이 결여된 타자의 활동으로서 노동을 수행한 결과 노동자는 압력만 없어지면 이 같은 노동 활동에서 곧장 도피하여 동물적인 기능에 안주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을 해방시키는데 기여해야 할 노동 활동은 이처럼 인간을 동물로 전락”시킨다.1.2.2.3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1) 유적 생활이 개인적 생활의 수단이 된다앞선 두 가지 형태의 소외는 “유적 생활과 개인적 생활을 소원한 것으로 만들고 추상화된 개인생활을 추상화되고 소외된 형태로서의 유적 생활의 목적으로 삼음으로써 유적 생활을 개인적 생활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이다.”(2) 자신과 대상, 정신과 육체가 노동의 도구로 수단화되다노동의 대상의 탈취는 인간이 유적 존재를 탈취 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소외된 노동은 생산의 대상을 빼앗아서 유적 대상성을 빼앗고, 유적 활동인 자유로운 활동을 실존을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킨다. 인간이 가진 자신의 몸, 외부의 자연은 유적인 본질로부터 분리되어, 노동의 도구로 전락한다.1.2.2.4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1) 인간이 자신에 대립한 것은 동시에 다른 인간과의 대립자신이 유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똑같이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 자신에 대립해 있을 때에 동시에 “그는 다른 인간과 대립”하게 된다.페이지 PAGE3 / NUMPAGES4
자기소개서저는 아직 제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아닌 것’은 확실하게 압니다. 공무원이나 고시공부도 ㅇㅇ(자신이 하던 일)도, 이건 ‘아니’었습니다.저는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있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ㅇㅇㅇ(지원하는 곳)이라면 ‘삶’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지원하는 곳의 특성)을 보았습니다. 다른 곳(지원하는 곳과 유사한 곳, 자신이 경력 있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좋은 재료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그 과정(지원하는 곳의 특성)이 어찌나 빛났던지, 남들은 그곳은 직장이 아니라며, 과도기라며, 경험 삼아 해보라고, 안쓰럽게 바라봤지만 저는 그곳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부모님이 제 걱정에 마음 아파하시는 것을 알고 억지로 눈물 반 호기심 반으로 넣어 보았던 다른 직장 이력서가 붙어 그곳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계속 일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릅니다.저는 다시 삶의 ‘빛나는 순간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곳이 ㅇㅇㅇ(지원하는 곳)와 함께였으면, 하는 막연한 꿈을 꾸며 이 이력서를 쓰고 부칩니다.저는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 애써 자신을 위안하며 붙어있던 ㅇㅇㅇ(예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하고 싶던 일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혼자 시간이 날 때에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언가를 그만두고 새로운 곳을 찾아, 그리고 이곳을 찾아 이력서를 쓰고 붙인다는 이런 기묘하고 신기한 결정을 내리게 된 계기에는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있었습니다. 극중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사무직, 돈, 안락함이라는 현실에 취해 과거의 솔직했던 자신, 소년다운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저는 보다가 콱 하고 정말 절실하게 ‘나는 절대 저걸 잃으면 안 되겠다’는 감각에 번쩍 깨어났고, 몇 날 몇 일의 검색 끝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붙여주시지 않으셔도 좋으니, 따뜻하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그 공간에서 어떤 아름다운 공간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파트타임보다는 직원을 지망합니다.(자신의 지원 분야) ㅇㅇ기간 이상 근무할 계획(자신의 근무 계획)입니다. 이 곳도 하나의 꿈이고, 가까우면 내년 중에 기회를 보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만을 한 달 동안 꿰어버리겠다는 일생의 꿈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가고 일할 직원을 기대해 주셔도 좋습니다.만약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괜찮게 읽어 주셨다면 우선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해리 포터’를 읽고- 죽음과 고통에 관하여: 인물들의 서사를 중심으로나의 사춘기 시절 아이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을 꼽으라면 해리포터 시리즈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평소에 우리는 죽음이 보이지 않게끔 잘 포장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죽음에 가까운 상태인 병에 걸린 때에도 대부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 하에 밝게 치장된 병원에서 지내고 있고, 장례식장도 굳이 찾아가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격리된 곳으로 여겨지는 등) 소설 해리포터에서는 아이들이 읽는 판타지 치고 죽음이라는 소재가 전 편을 관통하고 있다. 해리는 부모님의 죽음 덕분에, 그 죽음 위에 살아있는 아이고, 그 대적(對敵)인 볼드모트Voldemort는 죽음을 피하고 싶어 발버둥치며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아이로 예언된 해리포터를 없애기 위해서 기를 쓴다.첫 편에서 부모님의 죽음으로 시작된 해리포터의 삶은, 외로움, 고독,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5편 대부의 죽음에서 그 죽음은 '이별'과 '고통'으로 극대화되고 마지막 편인 7편에 이르러서는(심지어 제목조차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아이들용 판타지 치고 무거운 제목이 아닌가?) 수많은 친구들이 전투에서 죽어가고 해리 자신마저 죽음에 이름으로써 죽음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는 어느 정도 새로운 국면을 띈다.우선 볼드모트의 이야기 -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삶. 욕망과 고통에 대하여. 불사(不死)에 대한 욕망은 흔한 이야기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강한 힘을 가졌다. 힘에 도취해 삶을 놓고 싶지 않아한다. 그리고 시간이 길면 길수록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더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더 이상 이때까지 가졌던 것을 잃는단 것이 그에게는 가장 두려운 일이다. 자신의 영혼을 조각내어 마법의 물건들 속에 숨겨둔다.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욕망하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 고통 받는다. 죽음, 이별, 그 고통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고 삶을 함께하고 싶은 가장 근원적인 욕구가 더 이상 채워질 수 없음을 깨달을 때의 고통이 죽음으로(혹은 실연으로?) 겪는 상실감이라는 고통이다. 질투, 내가 갖고 싶은 어떤 것을 상대방이 가졌을 때, 내가 가지지 못함에 고통 받는 것. 하지만 그 고통은 어찌 보면 삶의 추동력이다. 끝내 채워질 수 없는 것을 인간이 욕망할 수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지금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내거나 이뤄내려는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이유가 없다. 그 본질상 욕망은 언제가 내가 더 채울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욕망은 소금물처럼 자꾸만 증폭되어 가는 것이다. 볼드모트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 죽음의 영역까지 손을 내뻗는다. 죽음의 성물 세 가지를 차지해 죽음을 지배하고자 한다.그가 가지는 욕망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어린아이가 자신의 손에 무언가를 가져야 하고, 생존을 위해 내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어야 하고, 내 몸에 무언가 걸쳐야 하는 소유욕에 가까운 욕망이다. 소유에 대한 욕망, 그것은 제로섬 게임이다. 나의 영역과 그 외의 영역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고 원하는 것이 ‘나의 경계’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되는. 그 고통은 영영 이겨낼 수 없고 더 큰 고통으로 변한다. 자신의 영역은 아무리 확장한다 해도 언젠가 벽에 부딪치게 되고, 타인의 고통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만족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개념) 프루스트의 갇힌 여인에서 마르셀이 알베르틴에게 가지는 병적인 소유욕과 그 질투에 서로 갇혀 고통받는다. 그 욕망과 고통은 다른 형태로 화(化)해야 한다.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은 미루고 미뤄도 생존이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스네이프의 이야기 -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기반한 필생(필사적으로 사는 것). 죽음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변하는데, 단지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에 이유가 생긴다. 해리포터의 앙숙인 교수 스네이프는 해리의 어머니인 릴리를 평생 사랑했다. 자신의 마법은 그녀가 가진 상징을 닮아간다. 언제나 지켜주고 싶은 존재. 해리가 그녀의 죽음을 '잡아 먹고 살아난 아이'라는 것을 고까워하지만 그녀의 눈을 가진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지켜준다.우리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만 살 수 있다. ‘죽음을 먹는 자’라는 어둠의 마법사에 대한 총칭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가장 거칠게 말하자면 내 앞에 살아있던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지구는 포화 상태가 되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고, 내가 먹는 고기의 재료인 동물이 죽지 않았으면 나는 배고파서 죽었을 지도 모르고, 식물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건 내가 삶을 갖고 누군가의 삶을 빼앗아 욕망을 충족했을 때의 기쁨(소유가 주는 기쁨, 볼드모트가 가지는 기쁨)으로 그치지 않는다. 스네이프는 릴리를 소유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 욕망으로 고통스러워 했지만) 그녀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사는 것, 존재하는 걸 지켜주고 싶다는 삶의 추동력으로 고통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큰 의미로 작용하고 그를 강하게 한다. 죽음을 보지 않으려하는 볼드모트의 태도와 대조적인 것이 그는 죽음에 집착에 가까운 주목을 한다. 그는 릴리의 죽음 위에 살았다. 그 릴리의 자식 해리를 지키기 위해 볼드모트에게 하인처럼 굴복하면서 결정적으로 해리의 죽음을 막아내고 자신도 죽는다.자신이 죽음 위에 기반한 삶이란 걸 알았기에 그의 삶은 처절하게나마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냈다.(릴리를 사랑함, 다른 남자가 가진 릴리-질투, 더 강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 릴리의 죽음으로 남은 삶을 그녀의 아이를 지키는 데 쓰게 됨) 그 삶과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 죽음이었다. 그것이 위의 죽음 개념과 가장 다른 점이다. 사람을 사랑했고 필멸하는 사람의 죽음마저 사랑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사람의 이야기까지 자신의 죽음 위에 다시 쓰여지도록 할 수 있는 삶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 설 줄 아는 삶이다.그리고 해리포터의 이야기 - 새로운 욕망과 고통을 넘어선 힘에 대하여.죽음을 거부하고 싶은 만큼 거부하기에는, 매일 매 초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자신의 욕망의 좌절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을 지닌 아이. 자신이 죽어야만 사람들이 살아나갈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아이.이미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죽음 덕에 살아났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자란다. 고통, 상실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극복해나간다. 자신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마저 이뤄지지 않는 고통으로 작용하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데서 느끼는 위안과 살아나감이 그를 죽음에 대한 욕구에서도 멀어지게 끌어낸다.그는 끊임없이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떠난 이들을 원하지만, 마지막 자신이 죽어야 하는 장소에서(해리 자신도 볼드모트 영혼의 일부를 가졌기에 자신이 죽지 않으면 그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부활의 돌을 통해 죽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해리의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하는 질문에 "우리는 너를 떠난 적이 없단다"는 말을 듣게 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 중에서 죽음이 가지는 내포를 가장 잘 표현한 대목이다. 죽음은 늘 곁에 있는 것이므로, 괴로워하거나 고통 받을 필요 없는 것이다. 삶 속에서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만큼 가지거나 소유해야 충족되는 게 힐링, 치유, 삶이 아니라 내가 감각하지 못해도 지나간 모든 것들이, 그리고 지나갈 것들이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행동하는 용기를 얻게 된다. 해리포터는 부활의 돌을 버림으로써 흘러감 자체로의 삶을 표현한다.
타자화된 집단: 솔로낭만적 연애와 결혼, 가족 이데올로기의 주변인들목차Ⅰ. 서론Ⅱ. 사회가 솔로를 고립시킨다1. 20대: 인간의 상품화와 물물교환2. 30/40대: 결혼 이데올로기의 주변인들3. 50대 이상: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사회Ⅲ. 솔로, 그들만의 ‘정상성’에 반발하다1. 솔로의 능동적 정치집단화의 시초 “솔로대첩”2. 성역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커플 “보스턴 결혼”3. 가족 외의 공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 “비혼”Ⅳ. 결론Ⅰ. 서론현재 우리 사회는 사람에게 붙는 ‘솔로’라는 꼬리표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솔로가 커플이 되고자 하는 ‘짝’이라는 TV프로그램이 최고시청률을 찍는가하면, 3천?4천명의 솔로들이 여의도 공원에 나온 행사가 ‘솔로대첩’이란 이름으로 국민적 관심을 받으며 개최되기도 하였다. 어느 시대나 타인과 관계 맺고자 하는 욕망은 연애서사와 로맨스로 화해 사람들의 관심대상이 되었으나, 지금 커플이냐 아니냐는 사람을 설명하는 다양한 요소 중 하나를 넘어서 그 사람의 경제력과 가치관, 인간관계를 평가하는 큰 의미가 되었다.‘모태 솔로’, ‘25년 이상 솔로는 마법사’와 같이 희화화된 단어에서 솔로는 사회적 결격, 외로움과 비참함을 함의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솔로인 이유를 발본색원하려 애쓰며 공동체는 그들의 탈솔로화를 위해 소개팅 미팅 등을 활성화시킨다. 휴식과 즐거움을 위해 시청하는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들조차 낭만적 사랑과 행복한 커플을 최고의 가치로 장려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온갖 소외의 해결책은 늘 연애나 가족으로 귀결됨으로써, 연애나 가족공간의 결여는 손쉽게 결핍과 우울로 해석된다.사회구조적 모순을 단지 개개인의 무능력에서 오는 책임인양 인간을 타자화시키는 현대사회의 단면이 솔로라는 타자화된 집단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본 논문은 결격자로 표현되는 솔로에 대한 타자화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무엇이 솔로를 만들었으며 어떻게 솔로가 소외되고 있는가를 정치ㆍ경제ㆍ문화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솔로들을 선 그어 만드는 9일 방송된 SBS 에 나온 남성 듀엣 이천 원의 자작가사는 남자가 예쁘고 젊은 여자와 연애할 때 수반하는 경제적 부담을 주제로 하고 있다. “네 생일은 명품백 사백만 원 짜리, 네게 돈 쓰는 게 아까운 게 아니야, 적어도 날 만날 때 지갑은 들고 나와” 이 가사는 심사위원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SBS의 인기 프로그램 ‘짝’은 솔로를 탈출하기 위해 인간이 보여야 하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들을 낱낱이 보여준다. 12명의 사람들은 남자 1호~6호, 여자 1호~6호로 바뀌며, 남자는 더 좋은 직업을 가질수록, 여자는 얼굴이 예쁠수록 더 많은 관심을 받는다. 다른 연령대보다 행동력(욕구가 구매로 이어질 수 있는 능력)과 외모가 높게 평가되기 때문에, 그들의 경제력과 외적인 가치는 더 중요해진다.또한 여성에게 더 강요되는 외적 자질은 다시 경제적 문제로 돌아오는 현상을 보인다. 2012년 12월 15일 방송된 에 출연한 여성 그룹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성형수술을 통해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SNL 뮤직비디오 를 통해 밝혔다.우릴 욕할 때가 아냐, 거울 좀 봐. 눈 코 입은 요즘 헐값, 명품 가방 살 돈으로 눈 코 입을 달아. 세트로 하면 디씨 돼, 친구랑 하면 더 디씨, 부끄럽게 생각 마, 자신감이 중요해. 당당해. 우린 너무 당당해. 과거 사진 좆까라 해. 꺼내 봐. 네 얼굴에 가려진 매력들. 넌 씨발 존나 매력 있어.성형수술은 눈꺼풀 성형시 1백만원가량에서 신체 부위마다 최고 3억의 비용이 든다. 수술을 통해 예뻐진 여성들이 당당할 수 이유는 그녀들이 돈이 있었고, 돈을 통해서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여서 그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남성을 획득할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이다.이처럼 낭만적 사랑을 획득할 수 있는 기준은 외모,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금 동원력으로 수렴하기에 ‘못생긴 여자, 돈 없어서 고치지도 못한 여자’나 ‘못생겼거나 능력이 없는 남자’는 여기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KBS 의 희극 여배우들 코너에서는 여전히 않은 30대 이상의 솔로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결혼’이라는 행위에 가해지는 법?사회의 무게와 가까운 가족들이 가해자라는 점에서 더 심각해진다. 통상 가족은 결혼한 남녀커플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이루어진 가족은 ‘결혼은 생물학적 본능의 당연한 귀결’이라거나 ‘종교적 의미에서 성스러운 것이 결혼’이라는 근거로 자식에게도 결혼과 재생산의 역할을 따르도록 교육한다.결혼하지 않은 솔로(특히 여성)이 등장하는 TV프로그램으로 는 결혼 이 단지 따뜻하고 낭만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환상을 보여준다. 사회가 정해놓은 성 역할과 사랑에 대한 지배적 담론들을 따르며 꿈(결혼하기)을 이루기 위해 성장한 등장인물들은 낭만적 사랑의 신화와 유교주의 성 역할 이데올로기의 전형을 표출한다.앞서 Ⅱ.2에서 논의한 상품화 공격이 잦아들기도 전에 어떤 ‘엄마’와 어떤 ‘아빠’가 되기 위한 성 역할 이데올로기가 솔로에게 폭격을 가한다. 경제적이나 심적으로 준비되지도 않은 여성에게 성스러운 모성, 현모양처의 표상이 되기를 강요하는 시댁 식구들은 하나의 인격체를 필요한 모양대로 깎아낸다. 남성이 짊어지는 ‘가장’이라는 타이틀도 가볍지 않다. 공적 영역에서의 성취만이 인정받는 남성은 직장에서 지치고, 집에 와서는 money earning nobody로 표현된다. 2011년 통계청 자료 에 따르면 20~39세 남성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었다.또한 결혼은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해 기피대상이다. 2012년 1월 17일에 방영한 은 ‘허니문 푸어, 빚과 결혼하다’는 주제를 다뤘다. 허니문푸어란 결혼 준비 과정과 결혼 생활에서 구조적으로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20~30대를 가리키는 신조어이다. 2010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총 결혼 비용은 남자 평균 8078만 원, 여자 평균 2936만원으로 집계되었다.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솔로이기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더라도 솔로로 남는다,현재 법적 혼인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이 개념은 커플이지만 성별 의 부족에 대한 책임이 그나마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집단에게 돌려지는 사회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전구성원 차원에서 주어지는 중?노년기의 안락함을 찾지 못한 이들은 황혼 결혼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경제력이 뒷받침 되는 사람들만 가능한 이야기다. 황혼 결혼은 낭만적 사랑과 결혼을 중?노년 가족에게 다시 환기한다. 커플서사에 편입되지 못하는 중?노년 솔로는 여전히 생계와 직결된 불안함 속에서 고독사, 도시빈민층 형성에 일조한다.Ⅲ. 솔로, 그들만의 ‘정상성’에 반발하다1. 솔로의 능동적 정치집단화의 시초 “솔로대첩”솔로를 설명하는 기존의 이야기는 이렇다: 솔로는 못생겼고, 매력 없고, 돈이 없었기 때문에 커플이 되지 못했다. 그 이야기에서 솔로가 솔로인 이유는 철저히 개인의 책임이기 때문에 그들은 흩어져 있었다. 라디오 사연의 단골소재인 ‘솔로를 탈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하는 질문의 DJ의 답변은 주로 ‘사연 보내주신 분의 다이어트! 자기관리! 매력 어필!입니다’이지 ‘그건 솔로가 아니기 힘든 사회에서 외로움의 짐이 (정형화된, 결혼을 전제로 한)커플로만 돌려지는 것이 이상한 거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다이어트를 위한 모임이 그러하듯 솔로들의 모임도 현재의 자신을 인정하기보단 주류가 되기 위해서, 과도기 단계로 만들어진 집단이라는 것에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대규모 오프라인 솔로 모임이라는 솔로대첩은 ‘솔로’들의 현실적 집단화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정치가 사적 사람들의 작은 모임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과거부터 우리나라 정치의 시작은 가족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부터 솔로는 배제되었다. 대부분 유교의 룰이 지배하던 그 공간에서는 결혼해서 상투를 틀었을 때에야 아이들은 어른으로서 정치적 목소리를 인정받았다. 결혼상대가 없으면 나이가 몇이든 ‘철이 덜 들었다’ ‘결혼 하고 아이를 키워봐야 안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같은 가족의 일원이라도 어머니들은 집안일과 육아라는 공통경험을 하면서 쉽게 집단화하고 정치적 행위를 했으나, 솔로의 면 솔로라고 이름 붙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부차적 존재로서의 솔로가 아니라 기존 주류서사를 극복하려하는 커플 그 이상의 모습을 제시한다.그러나 나는 또한, 레즈비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섹스를 덜 하고, 그것은 레즈비언들이 이성애적 삶의 방식을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레즈비언들은 남자들처럼 뭔가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이성애자 여자들은 자기가 성적으로 매력적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이성애자 남자들은 자기가 남자답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가 이성애 관계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심히 유감이다.“우리는 사귀는 사이인 사람들이 하는 일은 모두 한다.” “섹스가 그렇게까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물질적인 것만 중요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가 그 물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안전과 성장이 중요하다. 우리 둘이 함께라면 정말 재미있다. 우리는 둘 다 성장해왔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보스턴 결혼 당사자들의 삶은 주류 기준 바깥의 사람과의 정형화되지 않은 관계에서도 존중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증명한다.3. 가족 외의 공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 “비혼”가족이라는 공간이 주는 환상만큼이나 그 환상에 부합하지 못했을 때의 고통은 크다. 가족이면서도 ‘정상 가족’에 포함되지 않을 때 받는 편견과 구성원들의 심리적 고통, 복지혜택의 변두리에 놓여있는 불안정한 정치?경제적 위치 등은 과연 가족이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기에 이만큼을 다시 가져가는지 생각하게 한다. 화목한 정상가족이 주는 이미지는 그만큼 강하게 오랜 기간 아름답게 보이도록 꾸며졌다. 그렇기에 고통 속에서도 그 이상향을 찾아 끝없이 더듬어가게 했다. 이 프레임 안에서 가족 꾸리기조차 인정받지 못한 솔로들은 의미 있는 공동체를 꾸리지 못할 것이라고 낙인찍힌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가족스러운’ 모임은 부차적 집단, 이상한 집단으로 여겨지기 일쑤다.앞서 살폈듯, 연애와 결혼을 통해 구성하는 가족은 다양한 삶의 형태를 는다.
뮤지컬 헨젤과 그레텔 감상문영화 를 보면 모차르트가 뮤지컬을 지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무대 앞의 모차르트가 무대 위의 주인공 여자와 눈을 마주치며 호흡하는 모습이 신기했었다. 늘 촬영이 끝난 이후, 편집이 깔끔하게 처리된 영화 매체에 익숙해서인지 그 자리에서 음악을 맞추고 라이브로 하는 긴장감이라는 게 신선하게 여겨졌던 탓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을 가서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공연장이었던 마포문화센터 무대 앞부분은 조금 아래로 푹 꺼져있어 그 곳에 오케스트라가 자리했다. 오케스트라 앞에는 관객을 등지고 지휘자가 서 있었다. 모차르트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실제로 보니 엄청 신기했다.뮤지컬을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유독 헨젤과 그레텔은 배우들이 아이 역할이라 그런지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는 움직임이 많은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내가 기존에 생각해오던 음악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좀 더 역동적이었다. 한편 워낙 영화만 많이 보다 보니, 또 영화와 비교하게 되는데, 이야기 전달에서 거의 다 노래가락이 들어간 대사들을 쓰는 것과 지나치게 진한 배우들의 화장이 비현실적이라 웃겼다.헨젤과 그레텔이 집 안을 종횡무진 뛰어다닐 땐 집에 놀러온 사촌 동생들 같아서 귀여웠다. 그런데 밖에 나온 장면에서 난 뻐꾹 뻐꾹 노래를 할 때 뭔가 괴기스러운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는데, 프로그램에 보니 “놀이”라고 되어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지 모르겠다. 뻐꾹, 하고 장난치고, 먼 곳에서 울리는 화답 소리는 아이들이 느낄 법한 숲 속에서의 밤의 분위기를 대사와 노래로 잘 표현한 것 같다.제일 마음에 든 등장인물은 모래 요정이었다. 노래 목소리가 귀를 확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모래를 살살 뿌려 아이들을 재운다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다. 곡의 분위기도 그윽하면서도 경쾌했다. 아침이 되었을 땐 정말 “아침”이라는 느낌이 확 들어서, 노래의 분위기가 저녁과는 사뭇 달랐다. 저녁과 아침이 대조적으로 느껴져 각 곡의 분위기가 더 살았다. 아침은 짤랑대고 경쾌한 노래였다. 꼬마천사들과 요정들의 등장과 그들의 짤랑대는 소리에 더 가볍고 마음이 경쾌해져서 좋았다.숨길 것도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 사실 이 뮤지컬에서 가장 기대한 건 과자집 세트였다. 친구는 가기 전부터 과자집에 한껏 기대를 가지고 갔다. 그래서 보니까 어땠냐고 한다면 당연히 상상에는 못 미쳤다. 그걸 구현해 낼 수 있는 기술이 과연 있을까? 상상 속 우리의 과자집은 마치 4D 영화관처럼 진짜 과자 냄새도 나고 매우 먹음직스러운 엄청난 걸 기대했었으니까! 한 번 웃은 뒤 다시 본 세트는 아기자기, 예쁘고 깔끔했다. 애들이 낼름대며 핥아대는 장면에서는 아, 난 못해, 생각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