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의 누-이인직이 작품은 한국 근대문학사에 나타난 최초의 근대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한국 소설은 그 이전의 전근대적인 때를 벗기 시작하였다. 이전의 한국 고대소설은 이야기 중심이고 우연성이 심하게 나타나 있었다. 이 작품은 10년의 시간 속에서 한국, 일본, 미국을 무대로 한 여주인공 옥련의 기구한 운명에 얽힌 개화기의 시대상을 그린 것으로서 자주 독립, 신교육, 신결혼관 등이 그 주제로 되어 있다. 등장 인물들은 다소 친일적이고 역사 인식이 부족한 인물들이며, 그 당시 대다수의 지식인들과 부합하는 사실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신소설적 성격을 간단히 살피면 언문 일치에 거의 근접해 있었고 서술 시간이 역전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또 표현에서 묘사체 문장이 시도되고 있고, 개화 사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 소재들이 대체로 우리 주변에서 일상 일어나는 일들로 택해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는 것이다.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해보면, 청일 전쟁의 회오리 바람이 막 지나가고 피비린내가 만연한 평양 어느 곳에서 삼십세 가량의 여인이 옷도 풀어 헤친 채 허둥거리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여인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내를 잃고 찾아헤매던 어느 외간 남자와 부딪혀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이 부인은 남편 김관일과 의딸 옥련,세 식구가 난리통에 서로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최씨부인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자 자살을 결심하고 대동강 물에 뛰어 드나 뱃사공에게 구출되어 평양에 그대로 머물렀으며, 김관일은 나라의 큰일을 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옥련은 피란길에 폭탄의 파편을 맞아 부상했으나 일본군 군의관 이노우에의 후의로 그의 양녀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 간다. 그녀는 원래 총명하고 예쁜 탓으로 이노우에 군의의 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옥련은 그 후 이노우에 군의가 전사하자, 부인으로부터 냉대를 받게 되고 갑자기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되어 방황하다가, 구완서라는 청년과 알게 되어 함께 미국으로 대한 교육의 강조이다.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시대적 조건을 외면하고 그 자체만 역설하고 있다. 문명이라고 이름붙은 신식 지식만을 강조할 뿐, 역사적 제약이 준 모순을 가르쳐야 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전통 윤리에의 거부이다. 영채로 대표되는 전통적 윤리관은 병욱의 입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당한다. 이광수에게 전통적 세계관은 끊어야 할 해악으로 비치고 있다. 전통의 완전한 부정 위에 새로운 세계관이 싹트리라 굳게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광수는 전통을 부정하면서도 그가 그리고 있는 사랑은 완전한 자유연애가 아니라, 조금은 청교도적 순결을 강조하는 정신주의가 발견된다.민족의 침체와 비극의 요인이 무지에서만 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무지를 타개하기 위한 교육의 확충을 내세운 것은 그의 현실 의식의 결핍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식민지 상황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내세운 방법론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광수는 전통적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바탕에서 새로운 세계를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전망을 잃고 있는 점도 하나의 결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마음 속의 불길을 일으켜 줄 수 있는 계몽적인 성격이 깊은 문학이라고 생각한다.화수분-전영택1920년대 일제의 수탈이 날로 가속화되어 궁핍화된 식민지적 경제구조에서 서울과 양평을 배경으로 ,화자인 나를 통하여 주인공과 그 일가에 일어난 사건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고 있어서 제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끝 부분에 전지적 작가시점이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화수분은 부무가 잘 살라고 지어준 이름과는 달리 못배우고 가난하지만,마음씨는 순박한 사람이다.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피동적 인물이며, 작가가 보는화수분의 삶에는 아이러니가 들어 있다.어느 추운 겨울 밤, 나는 잠결에 행랑채에서 슬픈 울음소리를 든는다. 그 울음소리는 행랑 아범이 내는 것이었다. 그는 극조도의 가난으로 거지와 다름 없는 살림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딸이 두명 있었는데고, 재혼을 하라는 형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상중(喪中)에, 일본에 있는 '정자'의 간절한 편지를 받는다. 새 길을 찾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에게 새 출발을 축하한다는 편지와 함께 돈 백 원을 보내 주었다.사회고 집안이고 간에, 구더기가 들끓는 공동 묘지 같은 답답한 환경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나'는 불쌍한 아내, 사랑보다 연민이 앞섰던 가련한 아내를 생각하면서 탈출하듯 다시 동경으로 떠난다.당대의 상황을 무덤으로 인식하고 일제치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의 암담한 현실을 냉철히 비판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한 주인공이 아내와 사별하고 다시 서울을 떠나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데, 귀국 도상에서 목격하고 관찰하는 식민지 현실과 몰락해 가는 중산 계급 그리고 그 속에서 비참하고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주인공은 조선의 현실을 '무덤'이라고 규정한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 조선의 총체적 절망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다. 그가 무덤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의식에서 새 빛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무덤이 '공동묘지'로 인식된다면 민족 전체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로, 문제는 심각한 것이 되고 만다.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그 묘지로부터 벗어나려고만 할 것이다.주인공의 태도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엿볼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은 무덤 바깥에 있다는 인식이다. 그가 조선의 문제를 바라보는 예리함을 가진 것은 당위성을 지니지만, 그 이후의 태도는 설득력을 잃는다. 비판은 있되, 해결이 없는 것이다. 냉소적 지성의 소유자이다. 조선에서 그가 얻은 것은 부담감뿐이다. 그래서 묘지 같은 조선을 어서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비극 적인 현실을 잘 표현해 준 소설이기에 한층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읽으면서 약간 화가 나기도 했었는데 그 시대 안의 주인공은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그 삶이 가장 최선의 선택는다. 남편을 죽이고 자기를 강간하고 박재호에게서까지 자기를 빼앗은 것이 곧 장형보임을 안 초봉이는 마침내 장형보를 죽이게 된다. 동생 계봉이와 그의 연인이 된 남승재가 초봉이를 구출하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탁류에 희생이 된 초봉이는 살인자로서 경찰에 자수한다.1930년대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포착해 내고 있는데, 그 당시 도시의 밑바닥에서 열악한 삶을 영위하다가 점차 몰락해가거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하층민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 특히 중산층 농민의 몰락과 도시 하층민의 생성이라는 문제가 이 작품에 어느 정도 제시되고 있으며, 그들이 자본주의의 과도기적 병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 작품은 당대 사회를 속악하기 이를 데 없는 '탁류'로 보고, 그 탁류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살을 갉아먹고 있는 도시 하층민의 생활 방식을 고발하고 있다. 주인공 초봉이의 비극적인 삶을 중심축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가난, 싸움, 간통, 흉계, 탐욕, 추행 등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을 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절망감을 딛고 일어서서 당대 사회의 속악성과 대결할 것을 기약하는 계봉과 남승재 등의 새로운 인간상도 보여준다. 마지막 장의 제목이 '서곡'인 것은, 탁류가 몰고 온 찌꺼기들을 씻어내고 맑은 물이 흐르는 시대가 오리라는 희망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내일에의 기약은 기대로만 그치고 있지 구체적 대안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관념적으로만 미래의 희망을 예비해 둔 작가의 현실인식이 다소 안타깝게 여겨지는 부분이기도 하다.'탁류'라는 제목은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가혹한 수탈과 절대 궁핍의 시기였던 식민지 시대, 경제적 정신적 파탄과 황폐화가 이루어진 속에서 진흙탕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대부분이 속물이고, 탁류와 같이 혼탁한 의식과 생활 행태를 보이는 인물들이다. 정주사, 고태수, 장형보, 유씨 등이 그들을 대표하는 부정적인 인물이며, 긍정적 인물은 승재와성이 아닌 입체적 구성의 작품으로 광복 직후의 현실에서 동학 직후의 부패한 사회상과 일제 강점기에 일인들에 의해서 교묘하게 농토를 수탈 당하는 농촌의 모습을 역전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주인공 '한생원'은 자신에게 불리하면 공동체의 질서나 이상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는 자이다. 지극히 소아적이고 이기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인물이다. 제 땅을 일본인 지주에게 팔아 버렸는데, 일인이 물러가자 그것이 고스란히 제 손에 들어와야 한다는 억지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아적 견해를 가진 자가 나라 운운한다는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단견으로 역사를 조망하고, 현실을 파악하는 저급한 인물의 행태를 비판하고,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웃음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바위-김동리일제 시대 초가을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글은 문둥이 어머니의 모성애적 비애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한 작품이다.이 작품의 중심 인물은 문둥병에 걸린 불행한 여인이다.그 여인은 이 불치의 병 때문에 '영감'과 아들 '술이'로부터 떨어져 살면서 아들을 그리워하고 찾아헤맨다. 아들은 장가 밑천으로 일백 몇 십원을 저축 했다가 그 대부분을 어미의 약값으로 쓰고 나머지 이십여 원을 술과 도박으로 없애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영감은 아들을 잃은뒤 줄곧 아내를 학대하므로 그 여인은 하는 수 없이 집을 떠난다. 여인은 마을을 헤매면서 구걸을 하고 노숙을 하지만 결국 그것은 아들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어느날 그녀는 자기 손으로 기차다리 가까이에 토막 하나를 지었다. 이는 기차다리 가까이에 복바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바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들어 자기의 소원을 빈다.이 여인 역시 복바위를 갈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난 뒤 우연인지 복바위의 영험인지주야로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아들을 만나보게 된다. '피와 살은 썩어가도 눈물은 역시 옛날과 변함없이 많았다.' 어미와 아들의 해후도 잠깐, 어미는 문둥이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각각 헤어진다. 그러나 아들은, 다시 만.
시간이 지날 수록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낙뢰같은 강렬한, 그리고 전율, 그 모든 것들이 소설 안에 응집하고 있었다. 전격을 체험한 모임이라는 생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어린시절 겪은 전격의 체험들은 소설을 긴장감과 빠른 전개로 이끌어 주었고, 읽는 나에게 지루함과 느슨함을 사라지게 해주었다.그녀가 자신의 전격 체험때문에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했었다는 생각은 그녀가 생애에 잊을 수 없는 그 때를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였다. 전격을 체험하고 나서 엄마와 아버지품으로 파고 들었을 때의 감촉을 잊지 못하는 그녀는 '아다드'의 모임에 이끌리듯 참가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의 행동을 믿을 수 없어 하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 일을 몸이 원하고 있었다고 그녀는 설명했다. 그리고 의젓해보이는, 목덜미에 선명한 전격자국인 전문이 새겨진 J를 따르게 된다. 같은 경험을 했기에 그에게 끌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전격체험을 얘기하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부끄러운 그녀의 최초의 고백은 모임에서 찬사를 받았었고 그녀가 늘 비밀처럼 간직해 두었던 마음의 짐을 털어놓은 기분이었다.하지만 J는 그녀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무엇인가 빠져있다고 말했다. '배설' 그녀가 수치스럽게 여겼던 예민한 부분이었다. 여성의 몸으로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엔 부끄러운 부분을 그가 짚어주며 그것때문에 살아난 것이라는 신비로운 얘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부끄러워했던 것이 자기를 살린 것이었다는 것을...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왜 모임을 갖는 것인지 존재의 의문을 J에게 제기해 왔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다시한번 그 체험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라고 했었다. 당혹스러워 하는 그녀는 그 후 모임에 나가지 않았지만 매일 밤 꿈을 꾼다. 피뢰침이 서있는, 때론 고목나무가 서있는 꿈을, 매일 밤 번개가 치는 그 꿈들을.그녀는 자신의 몸에 남겨진, 그동안 몰라보았던 전문을 발견하고, 자신이 몸이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디오니소스'의 신화를 듣게 된 그녀, '제우스'가 '디오니소스'를 넓적다리에서 키웠던 것 처럼, 자신의 내면에 번개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갑자기 내려진 탐뢰여행에서 그녀는 머뭇거리면서도 그를 따라 나선다. 공기는 표백제 냄새를 띠고 있고 그는 끊임없이 떠들며 낙뢰를 기다린다. 어지러운 그 풍경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긴 막대기를 들고, 피뢰침 처럼 서있는 사람들. 두려워 하는 표정들과 환희에 찬 표정들.번쩍ㅡ. 세번의 전격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전격을 체험했다. 푸른 불빛의 섬광. 하늘에서 하나로 내려와 수만가지로 뻗는 번개. 그것을 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나도 전격을 체험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체험보다는 지금 글이 표현하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눈으로 본 듯 그려놓고 있어 직접 이런 모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처음 책을 들고 휘리릭 책장을 넘겼을 때 '이것이 소설인가?'라는 강한 의구심까지 들 정도로 특이한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수 많은 소설의 형식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은 나에게 굉장히 어색함을 주면서도 개성있는 모습으로 다가오게 되었다.'이게 과연 소설일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는 아닐까?' 글을 읽어가는 내내 난 이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소설의 형식이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 말 줄임표가 대부분을 이루는 글은 지금까지 배워왔던 형식을 탈피한 새로운 것이었다. 문단을 나누지 않은채 어지럽게 적혀있었고, 시간의 흐름은 화자가 말하지 않는 이상 잘 모를 정도였으니,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은 자신만의 일기같기도 하였다. 글을 다 읽고 난 후 제일 처음 가졌던 생각은 꽤 오랜시간 화자는 망설이고,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시간적인 부분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기에 감정적인 부분에서 많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것 같았다. 한국문학사 시간에 배워오던 소설들의 흐름을 보면서 80년대 소설들의 딱딱한 문체에서 벗어난 감성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했다.나는 지금까지 소설을 읽고 감상문을 작성하는 과제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거의 매번 그 작품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곤 했었다. 소설은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그렇게 사회적인 부분을 알게 되면 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소설이라고 보여지지 않았다. 그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풍자한 소설의 모습도 아니었고, 현실의 어려움을 얘기한 소설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화자의 마음을 느끼고 같이 함께 슬퍼하는, 친구가 된 것만 같았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그녀의 필체가 보였고 정신이 나간 듯 얘기를 적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소설 안의 여인은 나와 동떨어진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또한 사건들의 나열이 뒤죽박죽이 된 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알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글 안의 그녀는 늘 시계를 바라보고 대문을 바라보며, 전화기를 바라보았음을 직감헹다. 그 모든 마음을 독자인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작품은 굉장히 섬세해 보였다.글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지금까지 내가 읽어오던 소설과 다르기에 긴장이 들긴 했었다. 마치 잔뜩 숨을 쉬고 긴장한 상태로 물로 뛰어들 듯이, 온 몸은 경직되어 있었고 소설 안의 뜻을 파헤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나의 긴장상태는 글 안의 그녀모습에서 금새 풀어지고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는 친구의 사이로 돌변했다. 글은 불안한 그녀의 심리를 대변해 주었다. 소설론 시간에 배웠던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적은 듯 보였다.그녀는 소설의 초반부에 얘기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경치를 설명하거나, 자신의 오래된 습관을 적어놓았었다. 그로 인해 나는 글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모를 정도로 헤매었었다. 역구내 수돗가에서 손을 씻는 사소한 습관에도 주의를 기울일 만큼 그녀의 내면은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그 수돗가에서 손을 씻으면 그녀가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 도시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끝을 흐렸다. 아마도 그녀가 도시에서 있었던 아픈 기억을 잊으려고 하는 내면의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그 곳에서 잃어버린 그가 사준 노란 시계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 다시 찾으러 돌아가지 않은 채 그냥 잃어버렸다고 생각만 하는 그녀는 지금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어린 시절의 그녀의 과거에 남겨진 한 여자를 통해서 그녀는 변했다. 나는 어쩌면 그녀가 이 마을에 올 때부터 그렇게 되리란 것을 알았던 것처럼,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여기를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그녀의 과거 한켠에 자리 잡고 있는 하얀 피부의 여자를 회상하며 그녀는 자신이 그 여자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그녀가 지금 어린 시절 들어왔던 그 여자처럼 불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녀안의 감정 변화는 짐작을 허용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기에 쉽게 느껴지지 못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대문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했다. 수 많은 과거 중에서 뽀얀 여자가 대문을 들어서는 장면을 기억해 낸 것은 자신의 모습에 대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 독자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려주기 위한 친절한 안내 같이 보인다. 그녀가 표현하는 뽀얀 여자는 기억 안에서 굉장히 멋지고 예쁘고 착한 사람으로 묘사가 되어있었다. 어머니에게서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채워주는 사람이었고 그런 여자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큰 오빠에 대해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시골 아낙네에게서 느낄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을 알게 해준 여자, 그 기억들이 그녀를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나는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그 여자가 집에서 10일 동안 머물면서 했던 일 들을. 그 짧은 기간동안 했던 일들을 그녀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다른 밥, 다른 도시락, 다른 간식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할 만큼 여자에 대한 기억은 남달랐다. 그리고 그 여자가 그녀를 제대로 보아 준, 오빠들만 있는 집의 막내여동생의 자리를 알아봐 주었다고 했었다. 그렇게 그녀는 말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씁쓸한 듯 보였다. 왜 그런 걸까... 소설을 모두 읽고 난 뒤 나는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평범한 일상의 작은 물결같은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그녀는 그 여자의 마지막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잠시 집을 들른 엄마의 일상적인 일과를 바라보는, 서있기만 하는 여자의 모습과 마지막에 그녀가 달려가 칫솔을 쥐어 줄때의 그 여자의 표정을 모두 기억했다. 그녀는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자처럼 잠시 부는 바람처럼, 영원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을, 그리고 그 사랑이 지난 후 찾아오는 평온한 일상들을 두려워 했을 것이다. 그녀가 달려가 건네 준 칫솔은 그 여자가 떠나는 그 집에 남기는 자신의 자리였을 것이다.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채 돌아서는 여자의 모습은, 그 여자가 떠나고 난 뒤 폭풍같은 시간도 있었지만 그 시간들을 지나고 나면 억지로 기억해내야만 어렴풋이 떠올려지게 되는 바람같은 존재였다. 그 여자가 남긴 마지막 말 "나 처럼은 되지마." 그 말로 인해 나는 더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었고, 그 감정이 글에 그대로 실려있었던 것이다.그녀는 선택했다. 이 마을에 와서 택한 것이 아니라, 오기 전 이미 선택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자와 먼 곳으로 간다해도 행복하지 못할 것임을, 설사 떠난다 하더라도 남자가 포기했던 가족에게 다시 돌아간다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잊혀질 것임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을에 내려와 수 많은 밤을 고민하고 아파했던 것과는 다르게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아버지처럼 가슴 안에 꼭꼭 숨겨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남자는, 예전 아버지가 앓았던 아픔의 상처를 앓는다 하더라도 자신을 잊은 사람에 불과했다.
무의미한 일상들 속에서 그녀는 푸른사과가 있었던 국도를 떠올린다. 그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에대한 기억인 동시에 회색빛 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바스락 거리는 종이에 담긴 푸른 사과였다. 사과의 푸르름이 기억된 것인지, 아니면 먼지투성이의 길가에 굵게 짠 목도리를 두르고 서 있던 여인들을 기억하는 것일까?그녀의 일상에는 꿈이 없는 듯 하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를 피해 가출을 했을 때 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그녀에겐 꿈이라는 존재는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랑이란 것도 메말라 버린 듯하다. 살아있는 존재일까? 나는 그녀를 다시 생각해 본다. 회색빛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꿈이 없는 그녀는 죽음을 생각해 본다. 죽음이 있기에 꿈꿔서 무엇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일상들은 계획도 없이,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이 되어있었다. 소설도 그녀의 일상처럼 과거로 흘러갔다가 어느새 현재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글의 시작은 국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출발점이었는지 모호해지게 된다. 어린시절, 간간히 나오는 그 시절이 그녀일생의 시작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와 헤어지고 난 뒤일까? 그녀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채로 소설은 흘러가고 있다. 그녀의 일방적인 느낌과 생각들이 쓰여진 글에서 반박할 여지를 잃어버린 채 소설들을 흡수하고만 있었다. 때로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의 잘못된 시선을 반박하곤 하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불행한 삶의 혼탁한 길 때문이었을까, 어떤 말을 그녀에게 건네야 하는지,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애정결핍이었던 그녀는 사랑, 진정한 사랑을 아직까지 느끼고 있지 않는 듯 하다. 그런 그녀의 시각 때문인지 그와 디스플레이는 그녀와 사랑, 열정을 바친 사랑을 나누고자 하지않는다. 마치 그녀가 원래부터 그런 여자인 줄 알고는 외모를 보고 좋아할 뿐 내면의 어루만짐은 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녀의 오빠처럼 그녀에게 명령하는 것만 좋아하고, 그녀의 생각과 행동에 불평하기를 좋아했다. 국도를 달렸던 그가 그녀에게 다른 여자들과 똑같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애정결핍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지 잊고 있는듯 보였다.어쩌면 그녀는 국도에서의 푸른사과가 되고 싶었는지도, 푸른사과를 파는 여인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세상의 오아시스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무의미한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기억에 남겨질 만큼 아름답고 빛나는 사과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의 기억속에 깊이 자리박힌 푸른사과처럼 다른 사람의 눈에도 푸른사과처럼 남겨지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사촌과의 만남에서도 그녀는 사촌을 부러워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바라보는 사촌의 삶은 푸른사과처럼 생생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관을 나오던 붉은 뺨을 가진 생기있는 소녀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도 그러하지 않은지 그녀는 삶을 돌아보고 있었다. 소영이의 죽음에서 은빛이 빛나는 견고한 가위를 생각해 내었던 건, 그녀가죽는 순간 소영이의 삶이 빛났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녀가 약을 먹고 죽었다면 결코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먼지로 뒤덮힌 국도의 푸른사과처럼, 그녀는 빛나는 가위로 죽음을 맞이했다.
페미니즘참고영화:1.파니핑크2.델마와루이스3.처녀들의 저녁식사4.싱글즈페미니즘에 관한 영화를 보기위해 가까운 비디오대여점으로 갔었을 땐 내가 봐야 할 비디오가 이미 폐기가 된 후 였다. 아마도 페미니즘을 다룬 영화는 지루하고 대중성이 없기 때문에 인기가 없을 것이다. 비디오 대여점 주인은 내게 "이런 영화는 다른 비디오 대여점에 가봐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었는데 정말 구할 수 없었다. 그나마 싱글즈와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최근 영화라 구할 수 있었고 다른 영화는 인터넷에서 어렵게 찾을수 있었거나 아예 보지 못했다.[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처음 보면서 난 이 영화가 과연 무엇을 관객에게 보이고자 하는지 잘 깨닫지 못했었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숙제이기에 눈을 부릅뜨고 두시간 내내 영화를 뚫어져라 쳐다보니 영화의 내용은 생각나지 않은채 경직된 몸에서 오는 고통만이 느껴졌었다. 다 보고 나서 처음 느낀 감정은 다른 영화와는 달리 생소한 결말과 새로운 스토리진행이라고 느꼈었다. 진부하지 않으면서도 파격적이지만 낯설지 않은 내용의 전개는 내가 여자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여성이 주도권을 갖는 영화의 전개는 기존 남성중심의 내용전개와는 판이하게 다른 색다른 느낌을 주면서도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영화 안에서의 '연이'의 모습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었고, '호정'의 모습은 여성이 주도권을 갖는 시대의 미래상으로 보였었다.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연이'와는 달리 '호정'은 즐기기기위해 남자를 만나고 결혼을 기피하고 있었다. 이런 두 여자 사이에서 중간적인 역활을 담당하는 '순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어떤 인물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갈수록 '순이'의 모습은 새로운 여성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남자가 없이도 아이를 키우며 잘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이런 '순이'는 영화초반의 순수한 이미지와 달리 파격적이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여성주도적인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또 영화가 점점 진행되어감에 따라 나는 '영달'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는데 그의 모습은 언제나 세 명의 여자들 틈에 둘러싸인 채 심부름을 하거나, 여자들이 던지는 질문에 의례적으로 대답하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에서 남성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남성다움은 '호정'에게서 많이 느꼈었다. 한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고 성을 즐기고 싶어하는 대담함을 가졌고 성적인 부분을 리드하는 입장이었으며 언제나 자신감에 넘쳐났다. 이별에 대한 아픔이나 절망,고통과는 거리가 먼 여성로 그려지고 있었는데 이런 그녀의 모습은 삶의 추락을 통해 평범한 여성처럼 도피를 꿈꾸고 힘겨워 하는 일상적인 여자의 나약함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모습에서 여성의 시대가 와도 남성이 없이는 사회가 불안해져 여성은 다시 남성에게 이용당하고 남성이 주도권을 쥐게 되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영화는 언제나 당당한 '호정'의 모습에서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입장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었지만 마지막에 그녀 역시 남성에게 기댈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려서 아쉬움이 남기도 했었다. 하지만 진정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함을 나타내주었던 인물은 '호정'이 아니라 '순이'였다고 생각한다. '순이'의 순수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남성과의 동등한 위치를 보았었다. 그리고 각기다른 세 여성의 대화를 통해 성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처녀들의 저녁식사]와 달리 [싱글즈]는 일상적인 얘기들 속에서 벌어지는 생활의 모습과 기막힌 결말의 반전을 느끼게 해주었다. 영화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고, 남자의 모습은 여성적이었고 여자의 모습은 남성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여성이 살아가기위해 남자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처럼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이 나는게 아니라 여성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려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통해 더이상 남자에게 속박당하지 않고, 남자를 속박하지 않는 새로운 여성이 등장하는 것이었다.[싱글즈]는 [처녀들의 저녁식사]처럼 여성이 모든 이야기를 꾸려나가고 영화의 중심은늘 여성이 된다. 또한 세심한 남성과 대담한 여성을 한 공간에 살도록 꾸며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이 시대의 여성상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세심한 '동수'는 김치를 담궈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민들레처럼 사랑을 하는 평범한 여성의 일상생활을 담고 있었다. 이에 비해 '동미'는 현실의 남자들의 모습인 연애주의자이며,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을 한 공간에 배치해 둠으로써 결혼을 한듯 보이는 가상적인 현실을 만들어내었지만, 결코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친구사이인 평등한 관계였다. 대담하며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는 여성의 모습, 그리고 직장내의 성희롱문제를 당당하게 제시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런 문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 보여줌으로 더이상 남성주도권의 시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의 결말부분에서 '동미'가 '동수'의 아이를 갖고도 그를 보내는 것과 '나난'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을 듯한 멋진 남자를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다른 영화와 달리 여성적인 독립을 꿈꾸는 사람을 그리고자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나난'이 그와 결혼할 것만 같아서 부럽기도 하면서 뻔한 얘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결말이 아니어서 다행스러웠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건 여자의 행복에는 남자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남자의 불필요성을 얘기하는 [싱글즈]와는 달리 [델마와 루이스]는 남자없이 새로운 삶을 꿈꾸고자 떠나는 두 여인의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술집에서 루이스를 희롱하던 남자를 죽이게 된 깐깐하고 대담한 '델마'와 소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지닌 '루이스'는 살인자로 몰려 도망을 다니게 된다.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그녀들은 차를 몰고 달리고 있었지만 내면의 세계는 불안했고, 그녀들이 가는 곳에서 언제나 위태로움과 불행이 따르고 있었다. 멕시코로 가기위해선 델마의 불행의 기억이 있는 곳을 지나쳐야만 하는 데 그곳에서 그녀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로인해 그녀들은 범죄를 하게 되는데 그 일들은 그다지 큰 문제나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서 벌어졌고 영화를 보는 내게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가고자 하는 멋진 미래로 가기 위해 필요한 작은 물질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점점 시간이 흐를 수록 불안과 조여드는 경찰의 쫑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마지막 선택은 낭떠러지로 질주하는 것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여성의 탈출, 남자들에게서의 통쾌한 해방이었지만 마지막은 전혀 통쾌하지 않고 슬프다. 결국 그렇게 끝이 나게 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자문을 해 보았다. 남자에게서 완전한 해방을 하는 [싱글즈]의 결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들이 남자들에게서 벗어나는 모습과 그 과정들은 매우 통쾌하고 재미있었지만 결말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현실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그녀들의 꿈을 이루고자 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영화 안에서 그녀들은 매우 행복해하며 죽음을 맞이했지만 영화 밖의 나의 눈에서 그들의 행복보단 불행이 먼저 보였다. 죽음밖에 없는 것일까? 붙잡히지 않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어야만 했었을까? 여성적인 해방의 역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였지만 그녀들이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강인한 모습을 보일때는 남자보다 더 멋져 보였다.나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처녀들의 저녁식사],[싱글즈],[델마와 루이스]보다 [파니핑크]가 더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의 이미지는 매우 어둡고 불안해보였는데 영화안에서 그녀와 '오르페오'의 우정은 현실에선 실현할 수 없는 꿈같은 일을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나오는 '파니핑크'의 독백에서 그녀의 불안한 심리와 절박한 심정을 엿볼수 있었다. 왜 결혼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사랑은 왜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늘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죽음을 준비하는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쉽게 죽는 법을 배우고, 관을 만드는 그녀의 일상적인 모습은 남자가 없기에 찾아오는 외로움이었고 쓸쓸함의 절정이었다. 이런 그녀에게 우스꽝스럽게 등장한 '오르페오'는 그녀가 '23'의 행운의 숫자를 간직하는 금발의 파란눈동자의 멋진 남성과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회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파니핑크'는 그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었다. 우스꽝스러운 '오르페오'의 단순한 농담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그녀의 소심한 성격상 마지막 기회인 남자에게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그 남자를 만나게 되자 돌변한다. 일부로 차를 부딪혀서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오르페오'에게 부탁해서 주문을 외우기도 하며,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한다. 사랑을 이어갈려고하는 그녀의 변화는 예전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임에 나가는 것 보다 훨씬 더 생기있어 보인다. 사랑은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고 삶의 희망을 주었다. '오르페오'가 말한 그녀의 마지막 남자인 건물관리인을 보면서 나는 까닭없이 흔한 드라마의 결말을 생각했었다. 건물관리인과 '파니핑크'의 행복한 결말,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나겠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점 영화가 흘러감에 따라 '파니핑크'가 열망하는 사랑의 대상이 건물관리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모습은 이중적이었으며, 진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