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기파랑’1. 속 ‘기파랑’에 대하여는 신라 경덕왕 때 충담(忠談)이 지은 10구체 향가로, 『삼국유사』에 실려 전한다. 이하는 의 양주동 해독 전문이다.咽烏爾處米 ‘구름을 열치매露曉邪隱月羅理 나타난 달이白雲音逐于浮去隱安?下沙 흰 구름 쫓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是八陵隱汀理也中 ‘새파란 냇물에耆郞矣?史是史藪邪 기파랑의 모습 잠겨 있네!‘逸烏川理叱?惡希 일오(逸烏) 냇가 조약돌에서郞也持以支如賜烏隱 기파랑이 지니시던心未際叱?逐內良齊 ‘마음의 끝’을 쫓으려 하네.阿耶栢史叱枝次高?好 아, 잣가지 드높아雲是毛冬乃乎尸花判也 서리를 모를 그대 모습이여!충담(忠談), 본래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들에는 작품의 창작배경과 전승 과정, 편찬자의 시각 등 다양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의 배경설화는 경덕왕이 충담에게 를 지어주기를 요청하면서, 충담의 실력을 칭송하고자 작품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기파랑’에 대한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기록에 없으나, 우리는 그를 고도의 비유와 상징으로서 찬미하는 향가 를 통해 그의 인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글의 1-3행에 나타나는 ‘달’은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다. 달은 많은 문학 작품에서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며 등장한다. 에서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달은 ‘기파랑’에 대한 그리움과 염원의 달이다. 화자는 ‘달’을 보며 ‘기파랑’을 그리고, 그의 고귀한 인품을 칭송하는데 이때 ‘달’의 등장은 곧 시상을 여는 문(門)의 역할을 한다.글의 4-5행에서 화자는 ‘기파랑’의 모습을 ‘새파란 냇물’에 비유하였다. 냇물의 가장 큰 특징은 ‘흐르는 것’이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겨울’은 자연이 쉬어가는 계절이다. 몇몇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고, 식물들은 가을에 낙엽을 떨구고 겨우내 다음 봄을 준비한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기파랑’이 잠겨 있는 냇물은 여전히 새파랗게 흐른다. 한겨울의 추위마저 이겨내는 ‘새파란 냇물’에 잠긴 ‘기파랑’의 모습은 한결같이 변치 않는 그의 고매한 인품을 나타낸다.6-8행에서의 화자는 ‘기파랑’을 닮고자 하는 소망을 표출한다. 화자는 푸르른 ‘냇가’와 둥그런 ‘조약돌’을 보며 ‘기파랑’의 ‘마음의 끝’을 쫓고 싶어 한다. ‘조약돌’은 화려한 장식용 돌들과는 달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함을 지니고 있지만, 모난 데 없이 둥근 모습으로 돌을 쥐는 자에게 상처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조약돌은 작고 둥근 모양과는 달리, 그 속성은 조밀하고 단단하다. 즉, 화자는 ‘냇가’와 ‘조약돌’이라는 비유를 통해 ‘기파랑’의 변치 않는 정신과, 원만하고 강직한 인품을 표현하였다.9-10행의 ‘기파랑’은 ‘서리’를 모르는 ‘잣나무’이다. 이때 ‘서리’는 ‘기파랑’의 주변에 도사린 고난과 역경이며, ‘잣나무’는 그를 이겨내는 ‘기파랑’의 모습이다. 잣나무는 겨울에도 낙엽이 지지 않는 상록수이다. 화자는 ‘기파랑’을 드높은 잣나무에 비유함으로써 변함없이 푸르른 모습으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기파랑’의 모습을 표현하였다.작품 속에서 충담이 묘사한 ‘기파랑’은 ‘달’처럼 우러러볼 수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겨울에도 한결같이 새파란 ‘냇물’에 잠긴 인물이다. 또한 ‘조약돌’처럼 원만하고 강직한 인품을 겸비하고 있으며, ‘잣나무’처럼 드높고 푸르러 ‘서리’와 같은 시련이 와도 굴하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이러한 와 ‘기파랑’에 대해, 많은 작품들이 현대적 변용을 시도하였다. 그 중 작품 속 인물을 ‘기파랑’에 묘사한 현대시 한 편에서, 작가가 ‘기파랑’의 어떠한 점에 주목하였는가에 유의하며 살펴보겠다.2. 현대시 속 ‘그’에 대하여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나무를 바라보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고(그것은 비정규직의 늦은 밤 무거운가방으로 걸어나오던 길 끝의 느티나무였을까)그는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자신이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우연히 그를 보기 전엔 그가 있는 줄을 몰랐다(어두운 실내에서 문득 커튼을 걷으면거기, 한 그루 나무가 있듯이)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짐이 되지 않았다(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제 곁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부탁하러 갔을 때그의 잎새는 또 잔잔히 떨리며 웃음지었다-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어쩌면 그는 나무 얘기를 들려주러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아니면, 나무얘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그것은 우리의 섣부른 짐작일 테지만나무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성복, 2008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이성복의 은 제목에서도 보여지듯이 ‘강판권’이라는 실존인물을 ‘기파랑’에 묘사하여 시상을 전개한 현대시이다. 사학과 교수인 강판권씨는 ‘나무인간’으로 더 알려져 있다. 강판권씨는 자신이 하는 공부를 ‘수학樹學’이라 칭한다. 강판권 교수가 나무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위의 시 1연에서도 나타난다. 과거 비정규직으로서 불안한 생계를 이어가던 강교수는 평소 위안을 얻어온 나무에서 희망을 찾았다. 이후 10년간 나무와 인문학을 접목하여 공부를 이어갔으며, 스무 권이 훌쩍 넘는 책을 발표하였다.나무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나무는 스스로를 위로 드높이면서 옆으로는 나이테를 늘려가는 반면에, 인간은 숫자에 불과한 나이에만 집중한 탓에 스스로를 발전시키지 못하여 쉬이 삶의 균형을 놓치곤 한다는 것이다. 강판권씨가 나무에게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자존自尊’이다. 인간과 달리 나무는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남의 능력을 시기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 발휘에 집중한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강판권씨는 자신의 나무이름을 ‘쥐똥나무’라 한다. 주로 울타리로 쓰이면서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나무가 바로 ‘쥐똥나무’이다. 그것은 강교수가 지향하는 삶과 일치한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 속의 ‘그’를 ‘느티나무’에 비유한다. 느티나무는 사철 푸른 상록수로, 병이나 날씨 변화에도 강하다. 곧고 아름다운 느티나무는 가로수나 정자나무로 쓰인다. 누군가 관심을 주지 않아도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쥐똥나무’처럼 살고자 하는 강교수의 신념이, 작가에게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사철 푸른 모습으로 그늘을 만들어주는 ‘느티나무’처럼 비춰진 것이다.그렇다면 작가는 강판권 교수의 어떠한 면에서 ‘기파랑’의 면모를 보았을까? 시의 2연을 보면, 화자가 묘사하는 ’그‘는 ‘자신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때 ‘자신’은 자기 자신(自身)이자 자신감의 자신(自信)이다. ‘문득 커튼을 걷으면’ 보이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화려하게 부각시키거나 자신감을 내비추지 않는 겸손함을 보인다. 이는 ‘기파랑’을 비유한 ‘잣나무’의 자존(自尊)과 통한다. 사철 푸르른 ‘잣나무’는 외부환경인 ‘서리’에 굴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서 여전히 푸르른 채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며 스스로를 드높일 뿐이다.다음으로 시의 3연을 살펴보면, ‘그’는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으며 남을 구박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 강판권 교수가 나무와 인간의 차이점에 대해 논한 바처럼, 시 속의 ‘그’는 나무와 같이 자신과 남을 비교하고 시기하지 않는다. 이는 ‘냇물’로 묘사된 ‘기파랑’의 면모와 유사하다. ‘냇물’은 자신이 도착해야 할 강으로 꾸준히 흐른다. 어느 대상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그저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때때로 자신의 영역을 좁히거나 넓혀가며 흐를 뿐이다.시의 4연에서의 ‘그’는 어려운 부탁을 하는 이에게 ‘자신이 할 일’이라며 잔잔히 ‘잎새’를 떨며 웃는다. 누군가의 부탁마저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부탁에 대한 부담감을 지녔을 누군가의 짐을 덜어준다.
에세이-로 알아보는 산업혁명의 그림자와 국가의 역할-1. 서론2. 본론(1) 속 19세기 영국과 산업혁명의 그림자(2) 자본주의 사회 속 국가의 역할3. 결론1. 서론16세기 등장한 자본주의의 도래 이후,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자본주의체제 아래에서 국가의 경제생활을 영위해왔다. 16세기 봉건제도에서 비롯된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지를 중심으로 점차 발달하여 영국의 산업혁명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이후 19세기에는 미국과 독일 등지까지 파급되었다.‘자본주의’라는 단어는 본래 사회주의자들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여 점차 보급된 형태의 용어인데, 그 단어에 명확한 정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다. 이윤, 화폐,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에 반하는 사유재산제, 자유주의 경제 등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상황에 따라 그 뜻은 천차만별로 변화할 수 있다.모든 경제체제가 그러하듯, 자본주의 역시 그 흑과 백이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국가와 개인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으며, 교통과 통신 등의 발달을 촉진하여 상품, 문화, 생산요소 등의 이동을 확대시켰다. 교육과 복지, 민주주의 등 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의 실질적인 초석을 다지기도 하였다.그러나 자본주의체제는 동시에 수많은 폐해를 낳았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인간소외현상이 일어났으며, 물질만능주의가 성행하게 되었다. 모든 것에 값이 매겨지기 시작하면서, 사람의 신체마저 값이 매겨져 지하경제에서 거래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어떠한 현상을 성장의 결과만으로 평가하였으며, 그에 따라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었다.이처럼 자본주의체제는 그 장단점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현재까지 세계는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제작되는 다양한 예술작품들 역시 자본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후 본론에서는 그러한 예술작품 중 하나인 찰스 디킨슨의 (1838년作)를 중심으로, 19세기 9세기의 영국 사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사회였다. 산업혁명의 산물인 기계가 쏟아낸 부의 배분을 둘러싼 노사 간의 갈등과, 수직적이었던 사회가 수평적인 계급 사회로 바뀌면서 겪는 혼란 등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유발하였다. 국가의 부는 번영하고, 자본가는 스스로 배를 불렸으나 공장에 속한 노동자들은 쉽사리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을 고용한 고용주들이 노동자의 인권보다는 부의 축적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산업혁명으로 발달한 도시는 농촌의 인구를 흡수하여 인구를 불렸는데, 지나치게 밀집된 사람들로 인해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도시의 슬럼화와 농촌의 노동인구 부족, 그리고 노동자들의 위생과 인권문제가 매우 심각하였다. 성인 남성들에 비해 고용하고 부려먹기 쉬운 여성들과 아동들이 아주 적은 임금을 받고 일을 했으며, 하루 20시간 이상의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다. 부모가 없는 아동들이 공장주로부터 납치되어 일을 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들이 수두룩하게 일어났다.당시 영국 사회의 다양한 사회문제들에 대해 다룬 의 배경 역시 19세기 영국이다. 찰스 디킨슨은 를 통해 당시 영국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풍자하였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비약적으로 생산량이 증가했으며,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가치들을 사회의 핵심적인 가치로 여겼다. 그러나 사회가 그토록 진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숨겨져 있었던 도시빈민의 발생과 범죄의 증가, 아동과 여성의 노동 착취 등의 사회문제들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우리는 의 주인공 올리버의 삶을 통해 이러한 19세기 영국의 사회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소설의 줄거리는 이러하다.올리버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리포드에게는 두 부인이 있다. 리포드는 사악한 첫째 부인이 아닌 둘째 부인인 아그네스를 사랑했으며, 아그네스는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의 어머니이다. 부유한 숙부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로마로 향한 리포드는, 이후 숙부의 유산을 정리하여 아그네스와 함께 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리포드는 곧 자신을 찾아온 첫째 부인과 그하게 현상을 분석해보겠다.1) 올리버는 무작정 걸었다. 걷다가 지치면 잠시 앉아서 쉬고, 또 일어나 걸었다. 누군가 뒤쫓아오는 것 같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런던처럼 큰 도시로 가면 누구도 자신을 찾아 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버는 표지판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올리버는 빈민원에서 도망친 뒤로 런던을 향해 무작정 걷는다. 도망친 올리버가 많은 지역들 중 하필 런던으로 떠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19세기의 런던에서는 연극과 레저, 철도, 박람회 등의 발전이 도시를 더욱 매력적으로 연출했으며, 백화점이 생기고 소비문화가 발전함으로써 런던은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때문에 사람들은 런던을 꿈의 도시로 생각했으며, 런던의 인구 역시 급증하였다. 급기야 17세기 중반 268만 명밖에 되지 않았던 런던의 인구가, 19세기에는 약 700만 명까지 이르게 된다. 영국의 사람들은 성공을 생각했을 때 자연스레 런던을 떠올리게 됐으며, 소설 속의 올리버 또한 많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런던에 살기를 희망하였다.2) “오늘 아침에도 일을 했겠지, 얘들아?” “아, 네, 열심히 일했죠.” 미꾸라지가 대답했다. “기를 쓰고 일했죠.” 찰리가 덧붙였다. “장하다, 장해! 미꾸라지, 넌 뭘 벌어 왔니?” 페긴이 소리쳤다. “돈 지갑 두 개요.” “두둑하더냐?” “제법요.” 미꾸라지가 초록색과 붉은색 지갑 두 개를 보여주면서 대답했다. (중략) 그러더니 그는 올리버를 보며 의미심장한 말투로 물었다. “어때, 올리버. 너도 좋은 재주를 배우고 싶지?” “네, 배우고 싶어요.” 올리버가 순진하게 대답하자 세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중략) 그 사이 두 아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른 손놀림으로 담뱃갑, 지갑, 줄 달린 회중시계, 브로치, 손수건, 안경갑까지 뽑아 냈다.- 위 장면은 올리버가 런던에서 만난 악당 페긴과 그 밑에서 일하던 부하인 아이들이 소매치기를 하고 올리버에게도 소매치기 기술을 교육시키려 하는 장면이다.실제 19세기 런던은 급격히 인다가 부려먹을 사람에게는 일금 오파운드와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아이를 준다는 것이다.- 위 장면은 소설에서 올리버가 빈민원장에게 식사를 좀 더 달라고 요청했다가, 한 장의사에게 5파운드에 팔려가게 되는 부분이다. 빈민원은 본래 빈민들에게 구호를 제공하고, 적절한 노동 현장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었으나 당시 영국의 빈민원에 살던 사람들은 소설 속의 올리버처럼 제대로 배도 채우지 못할 만큼의 식사만 제공 받으며 살아갔다.급격한 산업화로 사람들은 일을 찾아 도시로 몰렸으며, 때문에 도시의 일자리는 점점 부족해졌다. 한정되어 있는 일자리에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린 탓에 자연히 노동력의 값이 떨어졌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왔지만 결국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한 순간에 빈민으로 전락했다.때문에 당시의 영국에서는 ‘신빈민구제법’이 시행되었다. 신빈민구제법은 지방에서 빈민을 구제하고 관리하는 법으로, 노동할 여건이 되지 않는 빈민과 아동에게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빈민구제법은 그 내용과는 달리 오히려 빈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빈민들을 가둬놓음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겠다 주장한 악법이었다.이 신빈민구제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이 전의 영국에는 1601년부터 시행된 ‘엘리자베스 빈민법’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빈민법은 건강한 사람을 근로하게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법안이었다. 이후 법 개정을 시도했을 때, 당시에는 개인의 경제활동과 사생활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자유방임주의가 경제적 정치적 사상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하던 엘리자베스 빈민법을 보완하여 심화된 빈곤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많은 사상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또한 빈민에게 구호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상류층에서 세금을 거두어야 했는데, 이 세금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게 되자 상류층에서 불만과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그들은 빈민들은 일하기 싫어하며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생각했고, 국가는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법안을 제정하였다. 그설명한 구빈원 혹은 빈민원이라고 불리던 고아원과, 자녀를 일터로 보내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하려던 부모들에 의해 공급되었다. 당시 아동노동자들 중에는 6세에서 7세밖에 되지 않은 아동도 있었으며, 휴일 없이 노동시간은 하루 12시간에서 20시간까지 이르렀다. 아동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도 매우 나빠서, 아동들에게는 죽지 않을 정도의 식사만 제공했으며 기계 안에 들어가 기름칠을 하는 등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조건에서도 일을 하게 했다.아동노동에 대한 문제가 점차 심각해지고,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1842년 영국 정부는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광산에서 노동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보호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한 처벌도 강화하였다. 아동보호법은 다른 산업으로도 점차 확대 적용되었으며, 아동들에 대해 기초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의무교육제 또한 도입되어 아동의 노동 강도를 줄였다.(2) 자본주의 사회 속 국가의 역할간디의 7가지 악덕 중 두 번째 악덕은 바로 ‘도덕 없는 경제’이다. 모든 산업, 특히 경제에 관련된 산업에서는 적당 선의 윤리적 틀이 필요하다. 도덕 혹은 윤리가 부재한 경제 활동은 에 나타난 다양한 사회문제들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19세기 영국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법안이 출현하였듯, 윤리적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이 필수적이며 시대가 지날수록 그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자본주의를 비판하며 그 대체적 개념으로 제시되었던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오늘 날 서구의 선진 국가들은 ‘복지 자본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다. 복지 자본주의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더더욱 중요하다. 복지 자본주의는 개인이 개입하여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이며, 정부의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계획 하에 진행되어야 하는 문제이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복지는 곧 경제적 비효율’이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복지는 단순히 사회의 부를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적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과학자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과학자의 책임’에 대한 논의와 그 현재에 대하여-목차1. 서론2. 본론(1) ‘과학자의 책임’이란 무엇이며, 과학자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2) 에서 나타난 ‘과학자의 책임’에 대한 저자 파인만의 입장(3) ‘과학자의 책임’에 대한 나의 견해3. 결론1. 서론의 저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은 미국 뉴욕시 퀸즈에 속한 마을인 파 락어웨이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에는 MIT를 졸업했으며,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에는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저작인 에서도 언급한 부분으로, 파인만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맨하튼 프로젝트’라는 원자폭탄 개발계획에 참여하였으며, 전쟁 후에는 코넬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 조교수로 지내고 1950년에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그의 저작 은 리처드 파인만의 강연과 인터뷰, 통찰이 담긴 글 들을 모아 엮은 단행본이다. 그의 주 연구 분야였던 물리학뿐만 아니라 종교와 교육, 철학, 컴퓨터, 나노테크놀로지, 과학의 재미, 어린이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글, 챌린저호의 참사를 불러일으킨 원인(관료주의의 비극적 맹목성에 대하여), 과학과 문명의 미래 등 매우 다양하고 넓은 범위의 주제들에 대하여 파인만 특유의 장난과 끼를 담아 총 13편의 글을 수록하였다.이 가지는 다른 과학 분야 책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일반인’을 독자로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에서는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부터 시작하여 유사 과학, 미래의 컴퓨터, 챌린저 호의 사례까지 다루고 있으나, 과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전반적인 내용 이해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상식을 활용하는 선에서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하다.또한 의 가장 큰 장점은 무언가를 배우고 공부하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이 과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들의 생활에도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게의 의견을 서술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이제까지 이루어진 ‘과학자의 책임’에 관한 논의에 궁금증을 지니게 되었고, 과거와 현재 논의된 내용들을 조사해보고자 하였다.본론(1)은 에세이 전개에 바탕이 되는 연구 부분이다. 본론(1)에서는 ‘과학자의 책임’의 개념과 ‘과학자가 책임을 진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해본다. ‘과학자의 책임’을 사례로서 알아보고, 그에 관련된 두 가지의 다른 입장을 알아볼 것이다. 이후 ‘과학자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연구 결과에 대한 책임’과 ‘연구 결과물의 활용에 대한 책임’의 두 가지로 분류해 각각의 정의와 사례를 알아볼 것이다.본론(2)는 에서 나타난 파인만의 입장에 대한 부분이다. 에서는 제 5장 에서 관련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본론(2)에서는 책에 나타난 파인만의 말과 사례를 인용하여 파인만의 ‘과학자의 책임의 범위’에 대한 입장을 설명한다.마지막으로 본론(3)에서는 파인만과 대조되는 입장에서 관련 주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전개한다. 어떤 부분에서 파인만의 입장과 차이를 가지는지에 중점을 두어 서술할 것이다.이후 결론은 본론에서 서술한 내용과 주장을 종합하여 끝맺을 것이다.2. 본론(1) ‘과학자의 책임’이란 무엇이며, 과학자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과학자의 책임에 대한 논의의 현재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과학자의 책임’이란 개념에 대해 알아보겠다. 과학자의 책임은 우선적으로 과학과 기술 응용의 밀접성에 근거해서 논의되고 있다. “현대에는 과학과 그 기술적 응용이 밀접해졌기 때문에 과학자의 연구 성과는 여러 가지 형태로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컨대 일렉트로닉스와 이를 이용한 컴퓨터의 발달로 고도로 정보화된 시대가 실현되고, 한편으론 원자 핵 에너지가 개발된 결과 핵무기가 탄생하여 자칫하면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를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과학의 가치중립성’과 과학자의 연구와 연구 결과의 활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이를 아우르는 개념이자 주제가 바명의 프랑스군이 사망하였고, 그의 3배가 가스에 중독되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하버는 ‘독가스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대량 학살에 이용된 독가스 역시 하버의 연구로 생산되게 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사례에서, 독가스의 활용을 통한 학살의 원인이 과연 하버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논쟁에 대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 과학자이자 미술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나는 사람이 물속에 머무르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래 견딜 수 있는 방법을 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공개하지도, 그 누구에게 설명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악해서, 바다 밑에서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의 바닥에 구멍을 내어 배와 그 안에 탄 모든 사람들을 침몰시킬지도 모른다.”라 말했다. 이 말은 즉, 과학자는 연구를 할 때에 ‘주어진 과학적 과제 해결’만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연구 결과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그 영향의 원인이 과학자 본인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이와 반대되는 의견에 대해서도 알아보겠다. 서강대학교의 이덕환 교수는 “과학자에게 자율과 창의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무릇 모든 창의성이 그렇듯이 과학자의 창의성도 자율과 신뢰가 보장되는 경우에만 발현된다. 제도와 관행에 얽매인 시각과 생각은 편협하고 왜곡될 수 밖에 없고, 사회적 신뢰를 받지 못한 연구자가 사회 발전에 기여하게 될 가능성도 없다. 따라서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한 과학자가 창의적 연구 성과를 내놓을 수 없다.”라 언급하였다. 이는 과학자의 연구 개발에 대한 지나친 억압과 규제, 기대는 과학자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신뢰 받지 못하는 과학자가 사회에 기여할 가능성도 없다는 말이다.그렇다면 과학자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과학자의 연구 결과에 대한 책임과, 연구 결과물의 활용에 대한 책임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연잊지 못한 격언의 내용으로 시작한다. “모든 인간에게 천국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주어졌는데, 같은 열쇠로 지옥문도 열 수 있다.” 파인만은 이 격언의 ‘열쇠’를 과학기술에 빗대었으며, ‘천국문’과 ‘지옥문’을 과학 연구 결과물이 활용될 수 있는 두 가지 방향에 비유하여 나타냈다.천국의 열쇠는 천국문이 무엇이고 지옥문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보가 없을 시에는 매우 위험한 물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열쇠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천국문과 지옥문에 대한 정보가 존재한다 해도 열쇠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 역시 엄청난 공포를 일으킬 수 있으나, 과학이 가치를 지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과학으로부터 진정 무언가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점이 바로 과학의 첫 번째 가치이다. 과학 지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일을 할 수 있게 하며, 온갖 것을 만들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과학 지식을 통해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선택’ 덕분이다. 과학 지식에는 과학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라는 지시가 없다.과학의 두 번째 가치는 ‘지적 유희’이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즐길 거리를 마련해주어야 하며, 그러한 맥락에서 지적 유희는 사회 자체의 성립을 위한 가치를 고려하는 일종의 사회적 책임이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보다 더 깊고 넓은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과학의 세 번째 가치는 ‘의심하는 자유’이다. 진보하기 위해서는 무지를 인식하고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과학 지식이란 다양한 수준의 확실성을 지닌 진술들의 집합이며,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마지막으로 제 5장 부분의 마지막에서 나타난 파인만이 생각하는 과학자로서의 책임은 무지의 철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닫고, 위대한 진보가 사상의 자유의 열매임을 깨달으며, 이 자유의 가치와 의심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환영하고 논의해야 할 것임을 바탕으로 모든 다음 세대들도 의무적으로 자유로우라고 다그치는 위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러하다’이다. 과학적 사실 혹은 기술은 그 자체만으로는 철저히 중립적이며 어떠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떠한 균에 대해 진행되는 연구가 있다고 생각해볼 때, 그 균에 관한 여러 과학적 사실과 균을 발견하는데 사용된 기술은 가치중립적이다. 사실은 사실로써 존재할 뿐,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가치를 둘 수는 없다.그러나 그러한 과학적 사실과 기술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인간이 개입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완벽히 객관적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형의 지구를 평면으로 나타낸 지도들에 대해 살펴볼 때, 과거 유럽과 중국, 남반구에서 제작한 지도는 각각 그 모양에 차이점이 존재하였다. 유럽 중심의 세계지도는 지도에 유럽지역을 부각하여 나타냈으며, 중국 중심 지도 역시 그러하였다. 남반구 중심의 세계지도는 남반구를 위쪽에 나타내 남반구를 부각하여 나타내었다. 3차원의 구를 2차원으로 나타내는 과정에서조차 왜곡이 발생하고, 지도마저 객관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인간이 정의한 객관성은 객관성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다수의 일치하는 주관성이 합하여 이루어진 ‘임의의 객관성’이다. 완벽히 객관적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자신의 주관적인 기억에 따라 사실을 구성하고 행위의 목적을 설정한다.그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연구 개입은 절대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모든 연구는 저마다의 사적인 목적성을 띠고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사회에 끼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에서 파인만은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고, 시도해볼 수 있고, 버릴 수도 있고, 더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할 수도 있는 시스템, 시행착오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18세기 말에 과학이 성공적인 모험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함으로써 얻을 성과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과학자들의 의심하는 능력은 작은 의심을 지금의 현대 사회를 .
《미당 서정주 대표시 100선》 에세이본래 나는 시라는 것은 온전히 시를 쓴 시인의 의도대로만 해석해야 한다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국어 책 속의 시들은 모두 내가 해석할 필요 없이 누군가의 해석을 각주로 달고 나왔으며, 우리는 시를 읽거나 감미하기보다는, 스스로 주입하고 암기하였다. 시라는 것은 누군가의 주관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우리는 그의 주관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며 시를 감상해야 한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수업시간 중 보았던 영화 《일 포스티노》의 주인공 마리오는 “시란 시를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대사를 한다. 그 대사를 듣고 나는, 교수님께서 영화를 끄시기 전까지 ‘정말 시란 읽는 사람의 것일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대사대로라면, 누군가의 주관으로 쓰인 시를 감상하며 시인의 주관을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그 시를 나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시 감상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나는 늘 내 생각을 시에 반영하여 읽기보다는, 시인의 의도와 주관을 해석하며 시를 읽으려 했기 때문에 시를 읽는 시선이나 생각이 좁았으며 늘 특정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영화를 보고 소소한 교훈을 깨달은 뒤, 나는 일전에 《미당 서정주 대표시 100선》을 읽으며 좋다고 생각했던 시 몇 개를 다시 읽어보기로 하였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고 여운이 오래 갔던 시는 서정주의 이다. 사실 는 등장이 신선하거나 새로운 시는 아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고, 그만큼 그 해석이 정형화되어 있고 접하기 쉬운 시이다. 그러나 시의 내용은 고등학교 때 보았던 그것과 같은데, 읽는 동안의 기분은 달랐다. 나는 가끔 이토록 일상적인 부분에서 내가 ‘20살’이 되었다든가, 성인이 되었다든가하는 기분을 느끼곤 하는데, 서정주의 를 읽으면서도 그러한 기분을 느꼈다.‘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서정주의 중의 한 구절이다. 본래 이 시는 국화가 피는 것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신비와, 국화 한 송이가 피기까지의 모든 노력들을 불교의 인연설에 근거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읽고, 내 상황에 대비하여 내 방식대로 해석한 결과 이 구절로부터 어떠한 자그만 위로를 얻었다. 나에게 있어 봄부터 이어진 ‘소쩍새의 울음’은 현재 내가 견디고 있는 개인적인 아픔들과, 청춘이므로 겪어라 강요하는 사회의 여러 압박들로 느껴졌다. 봄부터 이어진 소쩍새의 울음은 결과적으로 한 송이의 국화꽃으로 피어났다. 아픔이 사라진 흔적에서 새싹이 돋는 것은 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로 쓰이면서 그를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공하지만, 사실 무언가를 딛고 최종적인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 역시 거의 없다. 모두가 그 현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희망에 운을 걸어본다. 그러한 행위 자체가 스스로에게 위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 첫 구절은 나에게 소소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모든 성공한 결과가 그렇듯,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진부한 패턴이지만 진부하다는 것은 가장 익숙하고 오래된 것이라는 말과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그만큼 가장 정확하고 직접적인 위로 방법이며, 출처를 알 수 없는 우울한 감정의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여러 고민들은 갈수록 내 어깨를 짓누르고, 시기마다 느끼는 압박감과 걱정의 종류는 다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겪었던 감정과 현재 겪고 있는 감정의 종류와 성격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새로운 고민과 걱정은 나를 또 다른 딜레마와 아픔의 상황으로 떨어뜨린다. 이럴 때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누군가가 없다면, 단순한 시의 한 구절로부터 얻는 일시의 위로라도, 구체적인 해결책으로 변모할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 는 나에게 그런 역할을 하였다. 후에 큰 나무로 장성할, 긍정적인 생각의 씨앗 같은 역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에세이: 에서의 비극에 대하여때때로 슬픈 음악이나 글, 영화들은 우리에게 상승의 여지를 준다. 비극적인 콘텐츠를 감상함으로써 우리의 상실감과 우울함의 정도는 극에 달하고, 기분은 바닥을 친다. 극도의 우울을 달리는 기분 속에서, 마지막 남은 경우의 수는 한 가지이다. 바로 ‘상승’인 것이다. 우울을 딛고 상승할 때 느낄 수 있는 그 감정이 바로 ≪시학≫속의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이 관객에 제공하는 중요 작용의 하나로 든 개념으로, 그 정의는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일.’이다.(네이버 사전)≪시학≫에서서는 비극에 대하여 고 한다.비극이 하나의 장르가 되기 위해서는 여럿 가지의 구성 요소가 요구된다. 플롯, 성격, 언어, 표현, 사고력, 시각적 장치, 노래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중 두 가지는 모방의 수단이며 나머지 중 하나는 방식, 셋은 대상이다. 우선 플롯은 비극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플롯의 훌륭한 구성을 위해서는 시작과 끝이 중요하다. 또한 플롯이 일정 길이를 가지는 것 역시 중요한데, 그 길이는 쉬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비극은 사람의 삶, 행복, 불행을 다시금 재현하는 것이다. 때문에 비극은 처음, 중간, 끝이 있어야 하며 사건들은 인과 관계를 통해 얽혀 있어야 한다. 페리페테이아와 아나그노리시스 또한 독자가 알지 못하게 긴밀하게 담아야 한다. 그 외의 장치들까지 생각하면 완성만 있을 뿐 완전한 비극은 골라내기 힘들 정도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비극을 만들고, 읽는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미메시스에 즐거움을 느끼며,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성을 통해 무엇이 미메시스 되었는지 느끼는 능력을 발견하는 데 즐거워한다.’고 말했다.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라면, 비극을 보는 것은 곧 인간의 본능이나 현재 우리는 비극보다는 희극을 즐기려는 성향이 더 큰 듯 느껴진다. 과거에 흥했던 극의 형태가 사회의 변화 추세를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바뀌어왔음을 생각할 때, 예능과 뮤지컬, 코미디적인 요소를 담은 대중가요 등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은 출연진마다의 캐릭터를 설정하고, 유희적인 상황을 연출하며 극 형식을 이루고 있지만, 첫 등장 이후 많은 이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능 프로그램의 강자로 득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