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술적 대상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려는 노력은 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탐구되었으며, 그 대답은 어떤 특정 대상만을 예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특정한 대상만이 예술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입장도 여전히 존재한다. [예술의 대상][2] 모든 대중예술이 통치자나 사제의 후원과 통제 아래에서 만들어져 더 이상 관청이라는 용어가 존재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여전히 대중예술과 관청예술과 같은 구분이 존재하였다. 예술에 대한 철학이론들은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가진 계층들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받는 예술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대중예술은 그 시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널리 유행했지만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짐작건대 사람들은 그러한 예술은 이론적으로 검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러한 예술은 진정한 의미의 예술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중예술과 관청예술][3] 레이놀드 경(Sir Joshua Reynolds 1723년 ~ 1792, 화가)에 의하면 회화작업에 적합한 주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 ‘영웅적인 행동과 양웅들이 겪는 고통을 잘 보여주는 것’ 이며 이에 따르는 대표적인 예로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일어나 대사건이나 신화와 역사’, ‘성서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과 같은 것들로서 이러한 주제는 역사학파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는 로마학파, 피렌체학파, 볼로냐학파는 이러한 원칙에 따라 작품을 만들었고, 이러한 원칙에 의해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학파는 당연히 최고의 칭송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외에 베네치아학파와 플랑드르학파의 그름이 위대한 그림에서 제외된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충분히 설명된다. 만약 레이놀드 경이 드가(Degas)의 , 도미에(Daumier)의 또는 세잔(Cezanne.의 와 같은 작품들이 오늘날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영웅주의적 예술성][4] 이와대상을 지각적 의식이라는 밝고 순수한 빛에 비추기를 거절하는 도덕적 소심성을 없애는 것이 예술의 기능 중에 하나이다. [예술의 기능성 : 도덕적 소심성][8] 예술적 대상의 한계와 범위를 정하는 결정적 요소는 예술가의 관심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에 내재하는 특성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작품이 단순히 재주·모방한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의 진실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관심에 의해 좌우되기 떄문에 예술의 보편적 특징은 예술가의 생생한 관심에 의한 선택은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데 있다. 예술가의 관심은 예술가에 따르 다르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경험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의 보편적 특징][9] 톨스토이는 예술의 대상을 공장 노동자 특히 시골의 농부와 같은 보통사람들의 삶에서 이끌어 낸 주제에 한정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술에 적합한 대상의 범위를 인위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예술가의 예술적 진실성을 제한하게 된다. 즉 예술가들에게 이전에 있던 케케묵은 방식대로 지각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대중의 관점이라도 그것이 정치에 활용되면 퇴보][10]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적 운동과 예술의 변천은 그 당시까지는 합리적 근거에서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던 예술적 재료와 대상에 대한 제한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예술에 공통된 것은 없으며, 예술적 대상이 될 수 있는 잠재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서 예술의 범위를 엄청나게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예술의 공통된 특성은 형식이 있다는 것이다.[11] 특별한 관심이 작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모든 예술은 재료와 재로 사이의 관계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품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은 재료와 형식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형식화된 재료’와 ‘충분히 형식화된 재료’이다. 예술가가 원재료의 어떤 측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작품을 만들 때 원재료는 하나의 형태, 즉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술작품은 원재료 속에 있는 에너지를 질성은 모든 ‘부분’속에 스며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느껴지는 것, 즉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경험사태에서 우리는 질성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다. 총체적 포착상태에서 포착되는 편재적 질성은 흔히 사용되는 철학적 용어로 말하면 ‘직관’에 의해 포착되는 것이며, 예술에서의 직관은 예술작품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관통하며, 구성요소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줄 수 있는 전체에 퍼져 있는 그 예술작품에 고유한 질적 특성인 질성은 오직 정서적으로 직관될 수 있을 뿐이다. [전체적 질성, 총체적 질성, 편제적 질성]4[14-2] 예술작품에는 다양한 구성요소와 구성요소들이 갖는 다양한 질성들이 들어 있다. 예술작품은 다양한 구성요소와 질성들을 섞고 융합하여 통합된 전체(총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구성요소, 즉 부분들은 직관되는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파악된 전체적 질성이 없다면 부분들은 서로 아무런 내적 관련이 없는 것이 되며, 전체적 질성 없이 연결시킨다면 그것은 억지로 관련을 맺어 놓거나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전체적 질성에 의해 유기적 구조를 갖게 된 예술작품은 부분이나 구성요소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부분이나 구성요소가 일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것이다. 즉 전체를 형성하게 하는 질성적 전체에 의해 부분들이 일정한 관련을 맺고 엮여 있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이다. 구성부분들이 엮여 하나의 전체가 된 예술작품을 접촉할 때 갖게 되는 전체, 즉 총체에 대한 감각은 예술작품을 경럼한 기록물이지 기념물이며, 앞으로 올 것들에 대한 기대이며, 앞으로 일어날 것을 시사하는 것이며, 앞으로 올것에 대한 전조이기도 하다.[[?????][15-1] 우리가 예술작품을 전시용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생하며 실재하고 있다고 느낄 때 질성은 진정한 존재, 즉 실재가 된다. 예술작품이 구성요소를 구조화하고 통합된 무엇인가를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하여 예술작품을 어떤 고요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바로 전하게 지적할 수 있는 구성요소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전체 상황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18] 하나의 경험에 고루 퍼져 있는 그러나 무엇이라고 쉽게 정의할 수 없는 편제적 질성은 정의될 수 있는 요소들, 즉 인식의 초점이 될 수 있는 대상들을 함께 결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 준다. 편재적 질성은 반성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다. 만일 직접적으로 감각되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반성적 사고에 대한 안내자도 아무런 지침도 갖지 못할 것이다.[19] 예술작품은 이러한 전체적이며 총체적인 질성을 강조해서 표현한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질성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체, 즉 우리가 사는 삶의 세계에 속해 있는 질성을 포착하고 드러내 준다. 강렬한 심미적 인식은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게 너머에 있는 세계,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실재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이때 우리는 저 너머에 있는 세계로 나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하나의 경험 속에서 예술작품은 모든 일상적 경험에 들어 있는 불분명한 전체에 대한 감을 심화시키며, 아누 뚜렷하게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전체를 포착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확대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20] 모든 예술작품은 무엇보다도 편재되어 있는 질성적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매체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경험에서 우리는 특별한 감각기관을 통해서 세계와 접촉한다. 이때 유기체인 인간은 세계에 대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을 중심으로 과거 경험에 의해 획득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유기체 전체가 작용된다.[21] 원시인들에게 사진은 마술적 요소가 들어 있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보통 예술이라고 하면 그림을 의미하며, 예술가라고 하면 화가를 가리키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원시인들은 말로하는 소리에도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고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22] 모든 예술은 고요한 매체를 갖고 있다는 것은수단과 결과가 서로 외적 관계에 있을 때, 심미적인 것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외재적 수단 또는 수단의 외재성은 비심미적인 것을 규정하는 결정적 척도가 된다. (예술가가 예술작품을 통해서 상을 얻기 위한 행위)[26] 경험과 관련하여 보면 외재적 수단은 기계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정신적이라고 하는 것 중에도 많은 것들이 심미적이지 않는 것이 있다.[27] 어떤 활동에도 심미적 질성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과학, 사업, 게임)[28] 수단이 단순히 결과를 위해 사전에 준비해 둔 것이 아닐 때 수단은 매체가 된다. 하나의 매체로서 색은 일상적 경험에서 약하게 드러나는 것을 강렬하게 지각하게 하며 분산된 의미들을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중개인이며, 또한 그림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새롭게 그리고 강렬하게 지각하게 하는 매개물이다. 매체와 심미적 효과는 완전히 융합되어 있다.[29] 매체를 매체로 인식할 수 있는 띄어난 감수성은 모든 예술적 창작과 심미적 지각의 핵심이다. 그런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외적 재료를 무리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수단은 목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목적을 실현하는 매체가 된다. (도구와 매체의 차이)[30] 매체는 중개자이다. 매체는 예술가와 감상자 사이를 중개한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특별한 대상을 매체로 사용함으로써 구성요소들의 통합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예술가는 특별한 재료를 심미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진정한 표현매체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31] 진정한 예술가는 대상 자체를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보되 매체의 관점에서 보고 느끼는 사람이다. 그리고 심미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배운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일을 한다.[32] 단 하나의 매체를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의 중심을 향하여 집중적이고 강렬하게 표현되도록 다양한 요소들을 묶어 주는 단 하나의 감각적 질성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예술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은 실제로 있는 것, 즉 실재하는 것
[1] 예술적 대상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려는 노력은 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탐구되었으며, 그 대답은 어떤 특정 대상만을 예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특정한 대상만이 예술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입장도 여전히 존재한다. [예술의 대상][2] 모든 대중예술이 통치자나 사제의 후원과 통제 아래에서 만들어져 더 이상 관청이라는 용어가 존재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여전히 대중예술과 관청예술과 같은 구분이 존재하였다. 예술에 대한 철학이론들은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가진 계층들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받는 예술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대중예술은 그 시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널리 유행했지만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짐작건대 사람들은 그러한 예술은 이론적으로 검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러한 예술은 진정한 의미의 예술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중예술과 관청예술][3] 레이놀드 경(Sir Joshua Reynolds 1723년 ~ 1792, 화가)에 의하면 회화작업에 적합한 주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 ‘영웅적인 행동과 양웅들이 겪는 고통을 잘 보여주는 것’ 이며 이에 따르는 대표적인 예로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일어나 대사건이나 신화와 역사’, ‘성서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과 같은 것들로서 이러한 주제는 역사학파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는 로마학파, 피렌체학파, 볼로냐학파는 이러한 원칙에 따라 작품을 만들었고, 이러한 원칙에 의해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학파는 당연히 최고의 칭송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외에 베네치아학파와 플랑드르학파의 그름이 위대한 그림에서 제외된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충분히 설명된다. 만약 레이놀드 경이 드가(Degas)의 , 도미에(Daumier)의 또는 세잔(Cezanne.의 와 같은 작품들이 오늘날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영웅주의적 예술성][4] 이와고 있다.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바로 어떤 대상에서 도피하려는 마음을 갖거나, 그러한 대상을 지각적 의식이라는 밝고 순수한 빛에 비추기를 거절하는 도덕적 소심성을 없애는 것이 예술의 기능 중에 하나이다. [예술의 기능성 : 도덕적 소심성][8] 예술적 대상의 한계와 범위를 정하는 결정적 요소는 예술가의 관심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에 내재하는 특성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작품이 단순히 재주·모방한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의 진실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관심에 의해 좌우되기 떄문에 예술의 보편적 특징은 예술가의 생생한 관심에 의한 선택은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데 있다. 예술가의 관심은 예술가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경험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의 보편적 특징][9] 톨스토이는 예술의 대상을 공장 노동자 특히 시골의 농부와 같은 보통사람들의 삶에서 이끌어 낸 주제에 한정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술에 적합한 대상의 범위를 인위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예술가의 예술적 진실성을 제한하게 된다. 즉 예술가들에게 이전에 있던 케케묵은 방식대로 지각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대중의 관점이라도 그것이 정치에 활용되면 퇴보][10]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적 운동과 예술의 변천은 그 당시까지는 합리적 근거에서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던 예술적 재료와 대상에 대한 제한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예술에 공통된 것은 없으며, 예술적 대상이 될 수 있는 잠재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서 예술의 범위를 엄청나게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예술의 공통된 특성은 형식이 있다는 것이다.[11] 특별한 관심이 작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모든 예술은 재료와 재로 사이의 관계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품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은 재료와 형식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형식화된 재료’와 ‘충분히 형식화된 재료’이다. 예술가가 원재료의 어떤 측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작품을 만들 때 원재료는경우에도 질성적 전체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통제 된다.[14-1] 이러한 질성은 모든 ‘부분’속에 스며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느껴지는 것, 즉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경험사태에서 우리는 질성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다. 총체적 포착상태에서 포착되는 편재적 질성은 흔히 사용되는 철학적 용어로 말하면 ‘직관’에 의해 포착되는 것이며, 예술에서의 직관은 예술작품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관통하며, 구성요소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줄 수 있는 전체에 퍼져 있는 그 예술작품에 고유한 질적 특성인 질성은 오직 정서적으로 직관될 수 있을 뿐이다. [전체적 질성, 총체적 질성, 편제적 질성]4[14-2] 예술작품에는 다양한 구성요소와 구성요소들이 갖는 다양한 질성들이 들어 있다. 예술작품은 다양한 구성요소와 질성들을 섞고 융합하여 통합된 전체(총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구성요소, 즉 부분들은 직관되는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파악된 전체적 질성이 없다면 부분들은 서로 아무런 내적 관련이 없는 것이 되며, 전체적 질성 없이 연결시킨다면 그것은 억지로 관련을 맺어 놓거나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전체적 질성에 의해 유기적 구조를 갖게 된 예술작품은 부분이나 구성요소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부분이나 구성요소가 일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것이다. 즉 전체를 형성하게 하는 질성적 전체에 의해 부분들이 일정한 관련을 맺고 엮여 있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이다. 구성부분들이 엮여 하나의 전체가 된 예술작품을 접촉할 때 갖게 되는 전체, 즉 총체에 대한 감각은 예술작품을 경험한 기록물이지 기념물이며, 앞으로 올 것들에 대한 기대이며, 앞으로 일어날 것을 시사하는 것이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전조이기도 하다.[[?????][15-1] 우리가 예술작품을 전시용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생하며 실재하고 있다고 느낄 때 질성은 진정한 존재, 즉 실재가 된다. 예술작품이 구성요소를 구조화하고 통합된 무엇인가를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다. 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함축적인 것은 명확하게 지적할 수 있는 구성요소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전체 상황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18] 하나의 경험에 고루 퍼져 있는 그러나 무엇이라고 쉽게 정의할 수 없는 편제적 질성은 정의될 수 있는 요소들, 즉 인식의 초점이 될 수 있는 대상들을 함께 결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 준다. 편재적 질성은 반성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다. 만일 직접적으로 감각되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반성적 사고에 대한 안내자도 아무런 지침도 갖지 못할 것이다.[19] 예술작품은 이러한 전체적이며 총체적인 질성을 강조해서 표현한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질성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체, 즉 우리가 사는 삶의 세계에 속해 있는 질성을 포착하고 드러내 준다. 강렬한 심미적 인식은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게 너머에 있는 세계,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실재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이때 우리는 저 너머에 있는 세계로 나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하나의 경험 속에서 예술작품은 모든 일상적 경험에 들어 있는 불분명한 전체에 대한 감을 심화시키며, 아누 뚜렷하게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전체를 포착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확대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20] 모든 예술작품은 무엇보다도 편재되어 있는 질성적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매체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경험에서 우리는 특별한 감각기관을 통해서 세계와 접촉한다. 이때 유기체인 인간은 세계에 대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을 중심으로 과거 경험에 의해 획득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유기체 전체가 작용된다.[21] 원시인들에게 사진은 마술적 요소가 들어 있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보통 예술이라고 하면 그림을 의미하며, 예술가라고 하면 화가를 가리키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원시인들은 말로하는 소리에도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고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속에 떠올리고 생각해 본다면 수단과 결과가 서로 외적 관계에 있을 때, 심미적인 것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외재적 수단 또는 수단의 외재성은 비심미적인 것을 규정하는 결정적 척도가 된다. (예술가가 예술작품을 통해서 상을 얻기 위한 행위)[26] 경험과 관련하여 보면 외재적 수단은 기계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정신적이라고 하는 것 중에도 많은 것들이 심미적이지 않는 것이 있다.[27] 어떤 활동에도 심미적 질성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과학, 사업, 게임)[28] 수단이 단순히 결과를 위해 사전에 준비해 둔 것이 아닐 때 수단은 매체가 된다. 하나의 매체로서 색은 일상적 경험에서 약하게 드러나는 것을 강렬하게 지각하게 하며 분산된 의미들을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중개인이며, 또한 그림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새롭게 그리고 강렬하게 지각하게 하는 매개물이다. 매체와 심미적 효과는 완전히 융합되어 있다.[29] 매체를 매체로 인식할 수 있는 띄어난 감수성은 모든 예술적 창작과 심미적 지각의 핵심이다. 그런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외적 재료를 무리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수단은 목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목적을 실현하는 매체가 된다. (도구와 매체의 차이)[30] 매체는 중개자이다. 매체는 예술가와 감상자 사이를 중개한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특별한 대상을 매체로 사용함으로써 구성요소들의 통합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예술가는 특별한 재료를 심미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진정한 표현매체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31] 진정한 예술가는 대상 자체를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보되 매체의 관점에서 보고 느끼는 사람이다. 그리고 심미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배운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일을 한다.[32] 단 하나의 매체를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의 중심을 향하여 집중적이고 강렬하게 표현되도록 다양한 요소들을 묶어 주는 단 하나의 감각적 질성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예술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은 실제이다.
시뮬라크럼(simulacrum)박사과정(미학) 박용식1. 들어가는 말플라톤은 이데아의 관념을 앞장 세워 인류 지성을 대상으로 가히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초월적 포격을 퍼부었으며, 그 이데아의 파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제거되지 못한 채 머물러 썩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니체를 선동으로 하여 플라톤의 관념을 반격함으로써 그 파편들은 차츰 제거되어 썩어가던 것들이 회복되어 가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제는 포스터모더니즘의 막강한 첨병들이 플라톤의 관념을 소멸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 지성의 왕위를 독차지했던 이성이 이제는 예술에게 그 직위를 내어주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예술은 더 이상 이성의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지성의 목적이 될 수 있는 실현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현상에서 “시뮬라크럼(simulacrum)”은 예술을 위한 참모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시뮬라크럼을 이해하기 선행적으로 첫째 미적가상이란 무엇이며, 미적가상의 위상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둘째 시뮬라크럼에 관한 이론과 예술작품을 짚어봄으로써 시뮬라크럼을 이해하고자 한다.2. 미적가상미적가상을 논의하기 전에 가상(appearance, Schein, 假想)에 대해서 먼저 짚어보면, 가상의 사전적 정의는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사실이라고 가정하여 생각하는 것’이며, 철학적 정의는 ‘그 자체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면서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형상’이다. 따라서 가성은 ‘사실이 아닌 것’, ‘존재하지 않는 것’, ‘가짜’, ‘사이비’ 등의 부정적 인식을 수반한다.그리고 이러한 가상개념은 필연적으로 예술작품과 연관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미적가상’이 된다. 왜냐하면 첫 번째 예술이란 명시적으로든 함축적으로든 반드시 인간의 감성능력을 매개로하기에 감각능력 앞에 현전해야만 하며, 두 번째 예술일반이 형식적으로 볼 때 실제의 사물이 리는 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신에 대한 미적가상을 가지고 있에 신을 드러낼 수 있으므로 미적가상은 긍정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적가상에 대한 이러한 상반대의 관점이 어떻게 변화되어 해석되고 있는지를 조금 더 짚어보자.3. 미적가상에 대한 해석3.1. 플라톤플라톤(Plato)은 『국가』 재7권에서 ‘동굴의 비유’(514b)를 통해서 현상계 자체는 이미 하나의 가상으로 평가한다.“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흉장)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사람들 앞에 야트막한 휘장(칸막이)이 쳐져 있어서,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 주듯 말일세.”“목수는 어떤가?”, “그는 침상의 장인(d?miourgos)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화가도그런 것의 장인이며 제작자(poi?t?s)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럼 자네는 그를 침상의 뭐라 말할 건가?”,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그를 부르기에 제일 적절한 것 같습니다.”, “저 장인들이 만드는 것의 ‘모방자’라고 말씀입니다.” 그가 말했네. “좋으니, 그 본질(physis)로부터 세 번째인 산물의 제작자를 자네는 모방자라 부르는가?”, 내가 물었네. “물론입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러니까 비극 작가(trag?dopoios)는 그런 자일 걸세.”, “진정 그가 모방자라고 한다면 말일세. 그는 본성상 왕과 진리로부터 세 번째인 자이며, 다른 모든 모방자도 그러하이.”위의 내용에서 보여주듯이 플라톤은 이데아의 관념의 세계만이 본질, 창조자 또는 신의 세계이며, 그 이외 나머지는 이데아의 모방(mim?sis)에 불과한날 수 있는 또는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구의 성격을 가지지만 이것은 역사의 개별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경험적 현실을 능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도 심오하고 ‘철학적’이라는 평가까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3.3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헤겔에 있어서 ‘가상은 본질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이 말은 헤겔 철학체계 내에서의 예술의 위치가 절대정신의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첫 번째 단계의 절대정신, 즉 예술에서 신과 진리는 감각적으로 직관되며, 그 직관은 신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어떤 감각적, 물질적인 것으로서 인식되고 표현된다. 따라서 미적인 것은 절대적 관념적인 것의 필수적인 계기가 되기에 예술에서 이루어지는 미적 가상은 존재론적으로 훨씬 우월한 위치를 서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진리를 얻게 되는 최고의 방식은 아니다. 단지 예술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때에 과거형이다.예술의 시대?종교의 시대?철학의 시대감각의 직관믿음의 표상이념의 사유상징적 예술신이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신비로운 힘으로 인식(자연물 확장)고전적 예술신이 이해 가능한 인간의 모습으로 인식(고대 희랍 조각상)낭만적 예술신이 완전무결한 절대자로 인식(예술의 종언)3.4 하이데거(Heidegger, Martin)하이데거는 기만에서 해방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 띠라서 예술가는 “존재자의 숨겨진 가능성들을 작품으로”가져다 놓으며, “그럼으로써 인간들로 하여금 비로소 현실적인 존재자를 볼 수 있게 만든다.” 즉, 은폐를 통해서 드러나는(비은폐성 : aletheia)으로 존재는 자신을 숨기면서 드러내며, 다른 한편으로 존재는 곧 현상함이 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철학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예술이야말로 진리의 고유한 발현이라 하며 미적가상의 지위를 격상 시킨다.3.5 아도르노(Adorno, Theodor Wiesengrund)아도르로는 인간의, 이러한 비동일성은 미적인 차원에서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대중성의 예술보다는 주관적인 에세이와 쉰베르크(12음주의 무조음악창시자)의 음악 등의 예술 활동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대중적이면 또 다른 버전의 동일성이 되기 때문이다.4. 시뮬라크럼(simulacrum)시뮬라크럼은 “대상과 복제, 원본과 재생산, 이미지와 닮음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유지되었던 이분법을 전복하고 재현 그 자체의 개념을 위협하는 것이기에 오랫동안 재현의 역사에서 억압되어 왔다. 왜냐하면 모방 이미지가 실재를 긍정하는 것이었다면, 시뮬라크럼은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뮬라크럼은 유사성 또는 상사성에 의존하지 않는 대상 없는 실재 ‘이미지’가 된다.”시뮬라크럼을 전문용어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 작가 피에르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이며, 그에 견해에 따르면 시뮬라크럼은 로마제국 말기의 도시 입구에 정렬된 신의 조상과 관계가 있는데, 그는 이 조상이 신의 외적 유사성보다는 신의 내적 마력 혹은 권력을 나타내고 있음으로 파악하여, 환영을 현실화하여 재현함으로써 소통가능하게 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왜곡 하였다.4.1 들뢰즈(Gilles Deleuze)들뢰즈(Gilles Deleuze)는 시뮬라크럼을 받아들여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니체적 문제에 집중하여 플라톤의 본질적인 구별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접근한다. 즉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구별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시뮬라크럼은 이중으로 멀어진 사본이라기보다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은 현상이다. 시뮬라크럼은 모델과 사본의 구별조차 뒤흔들어 놓는다.’라고 말한다. 들뢰즈가 생각하는 시뮬라크럼은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니라, 이전의 모델이나 모델을 복제한 복제물과는 전혀 다른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의 진짜를 복제 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은 복제하면 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나아가 본질을 넘어서는 새로운 본질의의 이론은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뮬라시옹(simualtion)이며,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을 '시뮬라크르'(Simulacra)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파생실재는 흉내 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이며,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실재가 가지고 있는 사실성에 의해서 규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파생실재는 예전의 실재 이상으로 우리의 곁에 있으며 과거 실재가 담당하였던 역할을 갈취하고 있기에 실재로서, 실재가 아닌 다른 실재로서 취급하여야 한다.“더 이상 존재와 그 외양을 나누던, 실재와 그 이념을 나누던 거울이 없다. 더 이상 상상적인 공통분모가 없다. 시뮬라시옹은 발생론적인 추소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실재는 이제 축소된 세포들, 모태들과 기억들, 지휘 모텔들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이로부터 실재는 무한정 재생산될 수 있다. 실재는 이제 합리적일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실재란 더 이상 이상적이거나 부정적인 어떤 사례에 빗대어 측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는 이제는 조작적일 뿐이다. 사실 이것은 더 이상 실재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상상 세계도 더 이상 실재를 포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는 대기도 없는 파생공간 속에서 조합적인 모델들로부터 발산되어 나온 합성물인 파생실재이다. 따라서 실재나 진실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열리고 모든 지시대상은 소멸되어 버린다.”시뮬라시옹이 발생하게 된 것은 현대사회서 절대적인 의미, 이상, 진리, 전통 등과 같은 존재론적 기반이 사라진 시대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체할 가상적 실재가 존재해야만 사회가 유지되고 작동가능하기에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실재를 만들어 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을 생산하는 일이 바로 시뮬라시옹인 것이다. 즉, 가상과 실재는 더 이상 공통분모가 없고, 실재는 무한정 재생산 다.”
중용에 대한 새로운 해석주제: 중용에 대한 새로운 해석문제제기: 주희의 중용에 대한 이해를 통해 중용을 성리학적 실학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함방법론: 주희의 중용 해석에 대한 의문들을 제기하고 이를 새롭게 해석하는 경학연구 방법적용종합적 구성1. 중용에 주목하는 이유1) 유학의 행위원리는 실사구실이며, 이 행위원리는 중용임2) 중용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성리학적 실학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음2. 정주의 『중용』해석에 대한 의문들1) 중용개념 해석에 임한 중中에 대한 역사적 용례2) 중中의 의미풀이3) 용庸을 평상平常으로 이해4) 중中은 대본大本으로 강조되지만 한편으로 감정의 미발未發5) 성性과 도道와 교敎에 일관되는 근원이 천天 또는 천명天命으로 명시되었으나, 성誠을 천도天道라 하고 있어 이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하며, 성誠을 왜 중요시 했는지 의문3. 의문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1) 중용개념: 인간의 심정에 인심과 도심의 상태로 나뉨을 앞세워, 통치자에게 필요한 수양2) 중의의미: 치우침이 없고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음은 균형 있는 조율 자체가 화합3) 용庸: 시중侍中· 미발의 중未發之中· 중절中節 등의 용어로 보아 용도의 다양함 고려4) 중中: 중의 대본은 성선적 덕성윤리이며, 중의 감정의 미발은 의무론적 윤리5) 성誠 : 성실은 진실하여 거짓된 수식이 없음이기 때문에 불변적 진리이기에 성은 천도4. 새 해석에 대한 성찰중용사상은 화합·조화의 정신이며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사상 이며, 이 사상은 대중적 실용화가 이루어 질 수 있음. 따라서 재해석된 중용사상은 주희의 성리학적 실학을 실제로 뛰어넘어,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실학 곧 신실학新實學으로 기능 할 수 있음
주제 : 中庸에 나타난 天命과 性, 道, 敎의 유가미학적 관점에 대한 연구주제이 논문의 주제는 중용에 中庸의 첫 장에 나타난 ‘天命’과 ‘性’, ‘道’, ‘敎’의 개념을 근거로 하여 人性美의 근원과 儒家美學의 관점에서 유가미학을 분석하는 것을 연구목적으로 한다. 왜냐하면 중용은 인간이 천지자연과 함께 더 부어 살아가는 현세 속에서 인간의 도덕적인 삶의 완성을 위한 인성의 본원을 밝히고 지선에 이르는 윤리적 이상을 제시하고 있기 떄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논문 첫째 인성의 본원으로서의 天命과 性을 둘째 率性과 道의 심미적 관점에서의 도덕의지 셋째 修道와 敎의 심미적 관점에서의 도덕수양을 구성하고 있다.문제제기이 논문의 문제제기는 중용의 형이상학적 개념이 어떻게 인격의 아름다움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를 밝히데 있다. 즉 유가에서 주장하는‘中和之美’란 人性에서 비롯된 인격의 아름다움에 대한 도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中和之美”라는 도덕적이고, 형이상학적 개념이 어떻게 미학적인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하늘이 품부한 本性에 대한 이해를 통한 인간심성과 道德行爲의 규명에 있다고 전제한다면, 中庸의 天命과 性, 道, 敎에 대한 유가의 심미의식에 대한 分析은 의미 있는 學問的 省察(성찰)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논증하는데 있어 논자는 그것은 도덕 판단과 미적 판단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논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유가사상을 주체로 하는 중화의 전통미학에 대한 존재를 긍정하는 자세로 논지를 진행하고자 한다.그 근거를 첫째, 리쩌허우(李澤厚)는 공자의 실천 즉 인도와 인성의 완성은 사람의 자연적인 심리감정 일 뿐만 아니라 또 동물적 관능과를 거리가 먼 즐거움이라고 말했으며, 이것은 곧 인생이며, 심미적이며, 인의 최고경지라고 한다. 둘째 동양철학 특히, 선진유가에서 논하는 미는 서양의 미학처럼 우리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미의 객관적 법칙성을 찾으려는 개별과학의 성격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유기적?역동적 관계 속에서 그 의의를 찾으려는 미와 사회의 합일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유학에서 ‘천명天命’이란 인간의 심성인 ‘인성人性’의 근원으로서 중용中庸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발원한 개념이기 때문에 ‘성性’에 내재한 심성心性이 그 중심사유中心思惟이다. 이러한 심성에 대한 관심은 중용中庸에 나타난 천天, 명命, 성性, 도道, 교敎, 중中, 성誠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인성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위주로 하는 심성론心性論을 전개된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인성미는 천리天理를 따르고 사욕을 절제하는 도덕수양에 의하여, 일상에서의 도덕행위로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인성미가 도덕적 행동으로 나타날 때 이것이 유가미학의 참된 의미라고 할 수 있다.이 논문과 관련된 선행연구로서 저자는 첫째 조요한의 사람의 몸에 내재한 성性이 하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도道가 성性에 근거하여 나왔다는 것은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天과 성性에 관한 이해는 성선의 회복이라는 도덕적인 관점에서의 인성미라는 측면과 교육적 차원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그러나 중용中庸을 유가미학적인 측면에서 좀 더 심도 있는 분석이 되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이라 짚고 있다. 둘째 신창호는 중용中庸의 성性, 도道, 교敎의 의미를 인간학적 관점으로 이해하여 교육학적인 해석을 하고 있어, 즉 중용中庸의 첫 장은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길, 교육을 통한 문화세계가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유기적으로 담고 있는 유교교육학의 강령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은 논자는 솔성率性과 수도修道의 문제를 인간의 자율의지에 의한 부단한 수양의 길로 이해하여 그것을 유가미학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본 논문의 의도와도 상통하는 부분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신창호의 분석은 교육적 차원에만 머물고, ‘天命’과 ‘率性’, 그리고 ‘修道’가 어떻게하여 유가미학의 심미적 의식에 대한 본원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분석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논자는 천天에 인성의 본원이 있음을 밝히고, 유가의 도덕적 인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의식의 지평을 조금이나마 넓히는 학문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방법론이 논문은 논문연구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참고문헌을 살펴 볼 때, 이 논문은 주자의 중용해석과 현대 한국 유학자들의 저서 및 논문을 인용하여 논증하고자 한다.종합적 구성이 논의 구성은 첫째 인성의 본원으로서의 천명天命과 性성의 관계를 둘째 率性과 道의 심미적 관점에서의 도덕의지를 셋째 修道와 敎의 심미적 관점에서의 도덕수양으로 구성되어 있다.1) 인성의 본원으로서의 天命과 性유가는 전통적으로 천天에 근거한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성이 선善하다고 여겼으며, 따라서 천天에 근거한 인간의 性은 인간행위의 도덕적 근본이기 때문에 미덕과美德과 미행美行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리고 中庸에서는 인간이 하늘로부터 품부 받은 바의 인성의 탁월함과 후천적인 선한 습관의 학습과 축적을 강조하고 이것은 인간을 외물들과 구분하게 만드는 인성의 고귀한 특질인 선한 본성의 발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솔성과 도의 심미’, ‘수도와 교의 심미적 관점’으로 전개되는 것을 밝히고 있다.그리고 난 후 천의 관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즉 고대의 천은 조상신, 상제, 자연이었고, 주나라의 천 개념은 은나라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여 천은 인간은 물론이고 천지만물의 궁극자로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지고 무상한 존재였다. 또한 인간생명의 근원이며 종교적숭배의 대상이였음을 짚고 있다. 그리고 서경요의 천에 대한 해석을 인용하여 천은 물리적 자연적 의미의 천과 인격적 의미의 천이 있다고 하며, 이 논문에서는 인격적 의미의 천만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논자는 중용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사회의 질서를 직접 연계하여 천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나타내는 사상이기 때문에 천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지가 아닌 천의天意가 인사人事를 따른다고 하는 현실 긍정 사상이라고 주장한다.그리고 이를 논증하기 위해 첫째 유가의 천명天命의식은 자사子思의 중용中庸을 관통하여 맹자에 이르러 맹자에 있어서 진정한 심미의식은 인간의 심성心性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순선한 성性의 도덕의지로 발전되었다고 하며, 또한 주희 역시 본성에 대하여 인간의 선善을 이를 수 있는 도덕적 근원이라고 논증한다. 이러한 근거를 통해서 논자는 하늘은 유가에게 있어서 인간존재의 도덕적 근거가 되고 존재하는 모든 천지만물의 기원이며 창조의 원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中庸에서의 천명天命은 천도天道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자기실현이기 때문에 중용에서의 성性은 천天의 자기실현의 과정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 속에 구현된 것으로서 본성本然의 성性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하지만 논자는 이러한 증명이 중용中庸에서의 성性이 맹자의 성선설에 입각한 성으로 언급되는 것에무리가 있고 성性을 리理로 간주하는 주희의 주장에 인간과 사물의 본성에 대한 논리적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늘로부터 받은 인간의 성性은 완전한 선善으로 가기 위한 善의 단서가 되는 근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주장한다. 즉 논자는 지금까지 분석한 인간생명의 근원으로의 하늘이며 그 생명의 인성이 아름다울 수 있게 하는 선善의 본원으로서의 천명天命과 성性에 대한 분석의 귀결이라는 것이다.2) 솔성率性과 도道의 심미적 관점에서의 도덕의지논자는 우선 주희를 인용한다. 주희는“솔率은 따름이고 도道는 길路와 같다. 사람과 물건이 각각 그 성性의 자연自然을 따르면 일상생활 하는 사이에 각각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곧 도라고 하는 것이다.” 즉 性을 따르는 것을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주희에 있어서 인간의 길은 자연적인 순선한 도덕적 본성에 따라 가는 것임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주희 등 송대 신유학자들에게 있어 솔성의 의미는 무조건적이고 무의지적 도덕적 본성을 충실히 따르는 맹목적인 순종의 의미라고 말한다.그러나 논자는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率性과 道의 심미적 관점에서의 도덕의지라고 한 이유는 무의지적인 순종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순선한 도덕적 자율의지를 강조하기 위함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자율적 의지가 진정한 솔성率性이며, 率性은 성性을 따르는 것이므로 곧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천명天命이 곧 도道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도道라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잠시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입장에서 말하면 천도天道가 아니라 인도人道가 되는 것으며, 도道는 우리말로 ‘길’이라는 뜻이므로 인도人道란 ‘사람이 다니는 길’이 되는데 사람들은 길 아닌 곳으로 다니기도 하기에 이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사람이 마땅히 다녀야 할 길’로 그 뜻이 확대되고, 또 길을 다니는 것이 사람의 행동인 도는 결국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라는 뜻으로 정리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각기 자질의 차가 있어서 그러한 자질의 차이에 따라서 자기가 지녀온 ‘성性’에 대한 자각정도와 자기실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