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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리교육과 임용고시 자료, 다산 정약용 요약본.
    서론 : 신형묘합의 인간관다산의 인간론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인간론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그는 ‘정신과 신체가 잘 결합하여 인간이 된다.’ 라고 함으로써, 인간을 ‘신(神)형(形)묘합’한 존재로 규정한다. 여기서 神은 인간의 신령한 마음을, 形은 인간의 육체를 의미한다,다산 역시 인간이 理氣 묘합의 존재임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가 인간론에서 언급하는 리와 기는 성리학의 리기론과는 상이하다.리理 : 조리를 의미한다. 주재적이거나 도덕 본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기氣 : 생명체의 혈기血氣.고로 다산에게 있어서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은 리와 기가 아닌 마음(心)이다. 물론 성리학에서도 마음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맥락은 다산과는 상이하다. 다산은 마음의 기호(嗜好)와 권능(權能)을 중심으로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해명한다.1) 성은 기호이다다산은 성性을 마음의 기호라고 규정한다. 즉,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질, 성향, 소질이 바로 성性이다.성이란 본심(本心)의 호오(好惡)이다.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성은 성인이나 범인이 모두 같은데, 이 때문에 본래 서로 가깝다고 한다.성은 다름 아닌 ‘마음’의 기호이다. 즉,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성이다. 그런데 이는 ‘선악에 대한 것’을 중점으로 삼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약용은 성을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기호’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호덕치악(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 하는 성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공통된 것이다.2) 성과 심의 관계성은 마음의 기호이지만, 마음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성은 대체大體를 온전히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마음 가운데에 있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치를 잡아서 별도로 하나의 이름을 정한 것이다.대체는 영명한 마음을 의미한다. 영명한 마음은 신령하고 밝은 것, 즉 도의를 지각할 수 있고, 상제의 뜻을 알 수 있는 천부적인 마음이다.성은 이러한 대체의 기호이지만, 대체 그 자체일 수는 없 영위하는 윤리적 존재’이다.1-1 영지의 기호, 형구의 기호, 권형.천은 인간에게 ‘선을 할 수도 있고 악을 할 수도 있는(可善可惡)’ 권형(權衡)을 부여하고, 아래로는 ‘선을 행하기 어렵고 악을 행하기는 쉬운(難善易惡)’ 형구(形軀)를 주었으며, 위로는 다시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樂善恥惡)’ 성(性)을 주었다.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낙선오악樂善惡惡의 성은 대체인 마음의 기호이다.선을 행하기 어렵고 악을 행하기 쉬운(난선이악) 이목구체의 기호는 형구의 기호이다. 행사(行事)의 측면에는 이러한 형구의 기호의 개입이 두드러진다.성이 선을 지향하는 성향을 가졌다면, 형구는 악으로 경도되기 쉬운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가선가악의 권형, 즉 자주지권을 가지고 있어서, 선악을 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달려 있다.2) 자주지권과 도덕적 책임성다산은 성기호와 심의 자주지권을 주장하면서 인간 행위의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밝힌다.그리고 이는 도덕 실천의 문제와 직결된다. 다산은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실질적 목적은 가치 실천이라 말한다.성(性)과 심(心)을 논하는 것은 장차 무엇하려고 하는 것인가? 선을 밝히는 것은 장차 몸을 성실하게 하려는 것이고, 성과 심을 논하는 것은 일의 행함(行事)을 위한 것이다. 맹자가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논하는 것은 이 마음을 확충하여 그 인(仁)으로써 온 천하를 덮고자 하는 것이다.다산에 따르면, 성리학자들은 이기나 심성의 문제를 운위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삶의 문제와 연결되지 않는 공허한 관념론에 머물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그가 주장하는 자주지권론은 사람들이 오직 자기 노력에 의해 선을 행하고 덕을 실천해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성과 실천성을 강조하는 것이다.다산이 심성론에 대해 논하면서 성기호, 자주지권을 주장한 것은 윤리적 책임성과 실천성을 강조한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자기의 의지에 의해 도덕적 판단과 행위를 할 수 있으므로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온전히 개인에게 귀속된다.즉증하려고 시도하는데, ‘징험’과 ‘필경’이 그 논증의 근거가 된다.‘징험’의 공효는 ‘조짐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도둑에게 청렴하다고 하면 기뻐하는 것이 그 예시이다.‘필경’의 공효는 ‘마침내 그렇게 되는 지경’을 의미한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 마음이 넓어지고 편안하며, 악한 일을 하면 부끄러운 것이 그 예시이다.다산은 징험과 필경의 공효를 통해서 보면,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선을 마땅하게 여기고 즐거워하며, 악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이를 통해 다산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이 선하기 때문에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도 결국에는 선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성리학의 성선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다산은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성선은, 인간의 성에 인의예지의 덕이 과립처럼 이미 결정된 상태로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바라본다.인의예지가 본심의 온전한 덕이라고 안다면, 사람들의 일은 단지 벽을 향해 마음을 들여다보기만 하고, 회광(廻光)의 빛을 반사해서 이 심체(心體)로 하여금 허명(虛明)하고 통철(洞徹)하게 하여 마치 인의예지와 같은 네 개의 과립(顆粒)의 어렴풋한 모습이 있어 나의 함양(涵養)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이게 할 뿐이다.다산은 이러한 성리학적 성론에 입각하면, 인간에게는 실천적인 수양도 필요 없이 마치 선불교처럼 마음만 보고 있으면 된다고 말하며. 동시에 이러한 덕이 과립처럼 갖추어져 있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악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성리학의 성론으로는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반면, 성기호와 마음의 자주지권을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악한 행위를 하는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또한 그 사람이 선하게 되는 것도 설명할 수 있다.다산은 성선이 인간의 바른 길, 즉 道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라고 여긴다. 이는 성선이 단지 관념적인 명제에 불과한 것이 아닌, 실제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가치 실천을 가능케 하는 선천적 인간 본연의 특성은 선악에 대한 자율적인 판단과 실천적 행위 능력에 있다고 바라본다. 인간만이 선과 악을 주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라는 것이다.사람은 선악에 대해 모두가 스스로 할 수 있어서 그것을 능히 스스로 주체적으로 해 나가고, 동물은 선악에 대해 스스로 할 수 없어서 그 행동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산은 도심을 중심으로 인간과 동물의 성을 비교하기도 한다. 도심은 도의의 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에게만 있는 마음이며, 동물에게는 기질지성으로부터 연유된 마음인 인심만이 있을 뿐이다.인심은 기질이 발한 것이고, 도심은 도의가 발한 것이다 .사람은 이 두 가지 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동물의 경우에는 본래 받은 것이 기질의 성일 뿐이다. 이 하나의 성을 제외하고 또 어떻게 형체를 초월한 성이 그 몸에 깃들 수가 있겠는가?기질이 온전히 부정적으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산은 인간이 품부한 기질의 긍정적 의미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기질이라는 생물적 특성은 인간이라는 존재 형성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며, 그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의 혈과 기는 ‘인간이 나서 길러지고 움직여 깨닫는’ 이유이다.이렇게 기혈을 중심으로 인간의 생물적 특성을 설명하는 다산의 입장은 그의 욕구 긍정론으로 연결된다.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 특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 같이 지각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모두 욕구를 가지는데, 이러한 욕구는 단순히 식색의 욕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농업과 수공업, 문학과 예술, 더 나아가서는 선과 악을 하려고 하는 지향까지도 해당되는 것이다.선이나 악을 하려고 하는 것도 욕구이므로, 이러한 욕구가 없다면 선을 하고자 함이 없고 이는 곧 욕구가 없다면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내가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보니, 그 마음이 담백하여 욕구가 없어서, 선을 할 수도 없고 악을 할 수도 없으며, 문학을 할 수도 없고 산업을 할 수도 없으니, 바로 이 세상에 버려진 물건이다. 사람이 어떻게 욕구가 없을 수 있겠에서 희로애락을 도리에 맞게 발현할 수 있다.미발(未發)은 희로애락의 미발이며, 심지사려(心知思慮)의 미발이 아니다. 미발 시에 조심하여 상제를 속임 없이 섬기고 항상 신명(神明)이 옥루(屋漏)를 내려보고 비추고 있는 것 같이 여겨 계신공구(戒愼恐懼)하여 허물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교만하고 격한 행동을 저지를까 두려워하고 편벽된 감정이 싹틀까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마음가짐을 지극히 공평하게 하고 마음 둠을 지극히 바르게 하여 외물(外物)의 접근을 기다리면 이것이 천하의 지극한 중(中)이다. 이때 기뻐할 만한 것을 보면 기뻐하고, 노(怒)할만 한 것을 보면 노하고, 슬픔을 당해서는 슬퍼하고, 즐거움을 당해서는 즐거워할 것이다.또한 인간은 상제와의 교감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는 도심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도심은 호덕오악하는 마음이며, 선의 판단과 실천을 가능케 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도심은 성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이 된다.인간의 마음에는 도심이 있으므로 선악을 잘 분별할 수 있고 또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함으로써 결국에는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그런데, 이러한 다산의 상제에 대한 주장들은 인간의 자주지권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즉 상제가 인간에게 부여한 자주지권과, 인간의 선의 실천을 위한 감시자, 경고자로서의 상제의 개념이 서로 충돌할 여지가 있다.그러나 상제의 명령과 경고는 인간이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즉, 상제의 감시와 명령은 자율적인 도덕적 판단과 실천이라는 근본 명제를 완전히 지배하고 구속하는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그 성을 다하는 것은 천으로부터 받은 바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스스로 닦아서 지선에 이르면 나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다스려 지선에 이르면 사람이 각각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이니 그 공功이 나에게 있다.6. 마음 수양의 방법과 행사적 실천윤리비록 인간이 상제로부터 성선의 기
    인문/어학| 2020.02.23| 14페이지| 1,000원| 조회(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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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리교육과 임용고시 자료, 율곡 이이 요약본.
    1. 도학적 사유와 정신율곡은 성리학이라는 개념보다는 도학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사용해왔다. 이는 내면적 도덕성의 각성을 중시함과 동시에 실천궁행實踐躬行의 유학정신에 상당한 무게를 두는 것이다.그는 도학을 ‘인간 윤리의 내면성을 밝혀 인간의 도리를 극진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즉, 도학은 격물치지와 성의정심으로 수양하여 천덕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다.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앎을 이루어서(格物致知) 선(善)을 밝히고,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誠意正心) 몸을 닦고, 이를 몸에 잘 갖추면 곧 천덕(天德)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을 다스림에 시행하면 왕도(王道)가 되는 것이다.2. 이기론의 논점과 윤리적 사유의 토대율곡의 이기론의 핵심 개념은 이기지묘, 기발이승일도, 이통기국으로 집약된다. 이기론은 율곡의 도학사상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토대적인 논의로서의 의미를 갖는다.1)기발이승일도의 이기 상보적 특성율곡에 따르면 리는 발하는 것이 아니며, 발하는 것은 오로지 기이다. 그러므로 율곡은 ‘리가 동한다’, ‘리가 발한다’ 라고 주장하는 퇴계의 이기론의 논점을 비판한다.“기가 발하고 리가 탄다는 것이 옳다. 칠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단도 역시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것이다.”이것은 리는 활동성이 없으며, 만들고 짓는 것도 없으므로, 능동적으로 발하고 작위하는 주체가 될 수 없음을 뜻한다. (無爲, 無造作)율곡은 퇴계의 이기호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만약 (리와 기가) 서로 발용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리(理)가 발용할 때 기(氣)가 혹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고, 기가 발용할 때 리가 혹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기에 흩어지고 합해짐이 있고 선후, 동정이 있고, 단초가 있고, 음양에 시작이 있게 되니 그 착오가 적지 않다.만약 리와 기의 호발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리와 기가 각각 그 완정(完整 : 완전하고 가지런함)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전제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상정하기 곤란한 전제이다.기발리승일도만을 지니면서 상호 보완하는 것이자, 조화를 이루어 서로 완정해지는 것이다.2) 이기지묘율곡에게 있어서 리와 기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묘’의 관계로 설명된다. 이는 리기의 조화를 의미하는데, 달리 말해 리의 주재성과 기의 발용성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느냐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해설하면 다음과 같다.(1) 이는 작용함이 없고, 기는 작용함이 있기 때문에 기는 발하고 이는 타는 것이다. 즉 기발리승이다.(2) 리는 기의 근저(근거, 주재)가 되고, 기는 리의 의저할 바(리가 드러나고 구현될 수 있게끔 하는 것)가 된다.(3) 리와 기는 ‘일이이 이이일(一而二 二而一)’, 즉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조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이를 종합해보면, 리와 기가 각각 리는 리고 기는 기이지만, 리는 작용함이 없고 기는 작용함이 있어서, 기가 발하고 리가 올라타면 리가 기의 근저가 되고 기가 리의 의저가 되어 조화를 이루고 리와 기 두 개념이 각각의 고유한 자기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리(理)는 기(氣)의 주재(主宰)요 기는 리가 타는 곳이다. 이가 아니면 기의 근저(近著)할 곳이 없다. (리와 기는) 이미 이물(二物)도 아니요 또한 일물(一物)도 아니다. 일물이 아니므로 하나이면서 둘(一而二)이요, 이물이 아니므로 둘이면서 하나(二而一)이다. 일물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리와 기는 비록 서로 떨어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묘합하는 가운데 리는 스스로 리, 기는 스스로 리로서 서로 섞이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일물이 아니다. 이물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인가? 비록 리는 스스로 리, 기는 스스로 기일지라도 잘 어우러져서 틈새가 없으며 선후도 없고 흩어지고 합하여짐도 없으므로 그 이물(二物)됨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물이 아니다.3) 리통기국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의 양상리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율곡은 형체의 유무가 곧 리가 통하고 기가 국한되는 근거라고 말한다.기의 근본은 맑고 깨끗한 것뿐인데, 어떻게 것은 기가 국한되기 때문이다. 본체 가운데 유행이 갖추어져 있고 유행 가운데 본체가 있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리통기국설이 어느 일변에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율곡은 이통기국에 입각하여, 인간과 만물의 리의 이동(異同 : 다름과 같음), 그리고 인성과 물성의 이동에 대해 논한다.(1) 인간과 만물의 리의 이동 : 인간과 만물의 리는 같은가 다른가?천(天), 지(地), 인(人), 물(物)이 비록 각각 리(理)가 있지만, 천지의 리는 만물의 리이며, 만물의 리는 곧 사람의 리다. 이것이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이라는 것이다.‘통체일태극’은 천지의 리와 인물의 리를 동일한 것으로 규정하는 맥락을 지닌다. 리는 만상에 각각 주어져 있지만, 그것은 총체적 리인 태극의 온전함을 지닌다.즉, 리의 측면에서 보면 만상은 동일한 리를 예외 없이 가지고 있다.(2) 인성과 물성의 이동 : 인성과 물성은 같은가 다른가?비록 일리(一理)라고 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동물의 본성이 아니며, 개의 본성은 소의 본성이 아닌데, 그것이 이른바 각일기성(各一其性)이다.율곡은 사람과 물의 성은 서로 다르다고 보는 입장을 취한다.만물은 천차만별로 다르게 유행한 기氣에 리가 품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때 리는 성性이라고 해야 마땅하며, 성性의 측면에서 보면 사람과 물의 성은 다르다.3. 마음에서 성과 정의 특성1) 성을 규정하는 논점의 특성특히 형질에 있어서 그 리理만 가리켜서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하고, 리기理氣를 합하여 이름해서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한다.율곡은 형질에 부여된 리理는 성性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때 성性이란 곧 기질지성을 뜻한다. 본연지성은 형질에 있어서 따로 리理만 지칭해서 말한 것으로써 단지 개념적으로만 독립성을 가질 수 있을 뿐이며, 성은 오로지 기질지성 하나이다.이러한 맥락에서 율곡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관계에 대해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즉,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겸하는 것으로서, 리와 기를 아울러 지니는 것을 의미 고봉의 입론이 나의 뜻과 부합한다.주자의 ‘리(理)에서 발하고 기(氣)에서 발한다.’는 설은 그 뜻이 반드시 다른 곳에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그 뜻을 터득하지 못하고 다만 그 설만을 지키어 (리와 기로) 분개(分開)하여 끌어대니 어찌 갈수록 그 참뜻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겠는가? 주자의 의도도 역시 ‘사단은 오로지 리만을 말하고, 칠정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라고 한 것에 불과할 뿐이요, ‘사단을 리가 먼저 발하고 칠정은 기가 먼저 발한다.’는 것은 아니다.이러한 사단과 칠정의 관계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관계와 동일하다. 기질지성이 본연지성을 겸하는 것처럼 칠정은 사단을 겸한다. 즉, 모든 정의 총칭이 칠정이며, 사단은 칠정 중의 선일변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사단과 칠정은 바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관계와 같다. 본연지성은 기질을 겸하지 않고 말한 것이요, 기질지성은 도리어 본연지성을 겸한다. 그러므로 사단은 칠정을 겸할 수 없고 칠정이 사단을 겸한다.4. 인심도심종시와 도학의 심론1) 인심과 도심의 의미도심은 도의를 위해 생긴 마음이며, 인심은 신체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생긴 마음이다. 이러한 인심과 도심은 하나의 마음에 근원하는 것으로서, 도의와 식색이라는 각각의 목적을 위해서 발한 것이다.모든 인간에게는 본성과 몸(형체)이 있으니, 마음의 지각이 몸의 추움, 더움, 배고픔, 힘듥, 편안함, 좋아함, 싫어함 등으로 말미암아 발하면 인심이라고 하는데, 이는 본래 선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인욕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에 위태하다. 그러나 직접 성의 인의예지로 말미암아 발하면 도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선하지 않음이 없으며 오직 확충하기에 힘쓸 것이나 정밀하고 미세하여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은미하다고 한다. 발하는 것은 두 이름이 있으나 그 지각은 하나다. 그러므로 인심과 도심은 두 가지 마음이 아니다.율곡은 인심도 원래는 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심은 사사롭게 될 가능성이 뚜렷하므로 위태롭다.반면 도심은 인의예지라는 성에 근거하여 나타이다가 종국적으로 인심이 된 것이고, 혹 형기에서 나왔더라도 바른 이치를 거스르지 않으면 도심과 다름이 없다. 혹 바른 이치를 거슬러도 그 어긋남을 알고 규제하여 그 욕구를 좇지 않으면 이것은 시초에는 인심이다가 종국적으로는 도심이 된다.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마음의 지각과 발함에 있어서 이 경과를 살피는 도덕적 성찰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인 즉,* 한번 마음이 발한 후에 그 마음을 놓아 둘 것이 아니라 사특하게 흐르지 않도록 늘 경계하고 조심하고 살펴서 처음에 일어난 도심이 잘 견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처음에 인심이 발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욕을 성찰하여, 이에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각성과 도덕적 의지를 확실하게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5. 도학의 목적으로서의 聖人율곡은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인聖人이 되는 인격 형성에 있음을 강조한다. 성인은 ‘자기의 성性을 다하고 남의 성性도 다하도록 해주는 사람’으로 규정되는데, 이는 율곡의 성학이 내성외왕적 가치를 구현하는 학문임을 나타낸다.율곡의 성인관은 성誠과 연결된다. 율곡은 원형이정을 천의 誠으로, 인의예지는 인간의 성誠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성인은 ‘성誠을 성性으로 하는 자’를 의미한다.그런데, 사람이 모두가 선한 성을 가지고 있다면, 왜 반드시 수양을 해야만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율곡은 천과 사람의 차이는 ‘사사로움’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사사로움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데, 사사로움을 극복한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지만,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없다.천과 사람은 하나이므로 양자 사이에는 원래 간격이 있지 않다. 다만 천지는 사사로움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사사로움이 있기 때문에 천지와 드넓음을 같이하지 못하는 것이다.그런데, 이 사사로움은 인간이 품부한 기질의 특성과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려 한다면 기질을 교치하는 노력(교기질)이 필요하다. 교기질의 결과가 바로 기의 본연인 호연지기의 회복이다.성인의 천 마디 만 마디 수.
    인문/어학| 2020.02.23| 9페이지| 1,000원| 조회(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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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리교육과 임용고시 자료, 이황 요약본.
    서론퇴계는 그의 인간론과 윤리론을 구축함에 있어서, 리理의 가치와 의미가 중심적으로 작용하는 주리적主理的 입장을 취한다. 퇴계의 마음에 대한 입장을 주리적 심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1. 이 중심적 입장퇴계는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기본 개념인 이理와 기氣를 대립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뚜렷하다.그에 따르면 이와 기는 자연과 인간 형성의 핵심적 두 요소이긴 하나, 가치적인 측면에 있어서 대등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는 기를 주재하는 장수이며, 기는 주재를 받는 병졸이다.또한, 퇴계는 이理를 어떤 사물이 되도록 하는 원리이자 당위성으로 바라본다. 어떤 사물이 그 사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면 마땅히 이의 가치가 구현되어야 하며, 이의 명령(命)을 따라야 한다.즉, 이理는 명령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으며, 다른 어떤 사물이 이理를 대신할 수 없다.고로, 장수이자 주재자, 그리고 명령하는 것으로서의 이의 가치가 병졸, 주재받는 것, 명령받는 것으로서의 기의 가치보다 우월하며, 기는 이의 가치를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이귀기천).이理는 본래 그 존귀함이 비길 바가 없어서 사물에 명령하는 것이요, 사물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는 것이니, 기氣가 마땅히 이길 바가 아니다.이 : 주재하는 장수, 통제하는 것(통제해야 하는 것), 주도적, 존귀함, 명령하는 것.기 : 주재받는 병졸, 통제받는 것(통제받아야 하는 것), 천함.이러한 입장은 그대로 그의 인성론과 윤리적인 입장에 반영된다.퇴계는 이理가 갖는 ‘소이연(所以然)의 이치’와 ‘소당연(所當然)으로서의 법칙’의 의미를 중시한다.주자는 또 말하기를 ‘소당연(所當然)의 법칙은 왕에게 있어서의 인(仁)과 신하에게 있어서의 경(敬)과 같은 것이요, 소이연(所以然)의 이치는 왕은 무엇 때문에 인을 해야 하고 신하는 무엇 때문에 경(敬)을 해야 하느냐와 같은 것이다.퇴계의 입장에서 이理는 소당연으로서 마땅한 도리를 의미함과 동시에, 소이연으로서 도리가 되는 까닭과 도리를 실천해야 할 이유를 의미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 라고 최종적으로 정리된다.퇴계가 이렇게 사단의 발출 근거를 이理에 부여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1. 사단의 소종래(所從來: 유래하는 바)를 밝히고자 함.2.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순수성에 따라 발출되는 순선한 정(=사단)을 강조하고자 함.2) 사단칠정과 주리主理, 주기主氣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각기 주리, 주기의 관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이발이기수지는(理發而氣隨之)는 주리(主理)로 말할 수 있어서 말한 것일 뿐, 리가 기를 벗어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니 사단이 바로 그것이다.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는 주기(主氣)로 말할 수 있어서 말한 것일 뿐, 기가 리에서 벗어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니 칠정이 바로 그것이다.이는 사단에도 리만 있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칠정에도 기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단과 칠정은 근본적으로는 이와 기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다.무릇 사단에 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칠정에 이가 없는 것이 아님은 고봉도 말하고 나도 말했다.하지만 퇴계는 이러한 전제에도 불구하고 사단을 주리, 칠정을 주기라고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같은 곳에 나아가 논한다면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만약 사단과 칠정 두 가지를 대구對句로 놓고 그 근원을 미루어 본다면, 참으로 이와 기의 구분이 있는데 어찌 다름이 없다고 하겠는가?즉, 사물에 응하여 발하는 정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사단과 칠정을 하나의 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나, 그 근원으로 보면 사단은 이理를 그 근원으로 삼는 정이며, 칠정은 기氣를 그 근원으로 삼는 정이므로, 사단과 칠정을 각각 개념화해야 한다고 바라보았던 것이다.종합적으로, 퇴계는 사단과 칠정이 근본적으로는 이와 기의 상호작용의 산물로서 사물에 응하여 발하는 정이지만, 그 근원이 다르므로 서로 달리 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사단은 기가 없지 않은데도, 이의 발이라고만 말하고, 칠정은 이가 없지 않은데도 기의 발이라고 말하는 뜻이 이것과 같다.같이理에서 발하는 것인가, 기氣에서 발하는 것인가? 그리고 절도에 맞아 가는 곳마다 선하지 않음이 없다는 선과 사단의 선은 같은가 다른가?퇴계 : 그것은 비록 기氣에서 발한 것이지만, 이理가 타서 주인이 되는 까닭에 그 선함은 같다.5) 사단칠정론의 윤리적 의미퇴계는 사단칠정을 보는 자신의 입장을 분석적 관점으로, 고봉의 입장을 통합적 관점으로 진단하며 고봉의 입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사단칠정이 비록 전체적,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개념적인 차이를 제대로 분별해야 그 의미를 온전히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지금 그대의 변론은 이것과 달라서 합동(合同)하기를 좋아하고 분리(分離)하기를 미워하며, 뭉뚱그리기를 좋아하고 분석하기를 싫어하여 사단칠정의 소종래(所從來)는 따지지도 않고 일률적으로 리와 기를 겸하여 선악이 있다고 여겨서 분별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사칠논쟁에서 퇴계와 고봉이 주목한 초점 중 하나는 칠정에 대한 입장이다. 이는 칠정에 대한 긍정적 가치를 어느 정도 부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이에 대해 퇴계는 칠정을 단속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바라본다. 온전히 선한 것은 사단이며, 칠정은 온전히 선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반면에, 고봉의 입장에서 사단은 칠정의 선일변을 의미할 뿐이다. 상황에 맞게 발한다면 칠정이 사단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칠정은 단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불편한 감정이 아니다.퇴계가 사단을 순선한 이가 능동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바라본 것은, 인간 심성에서 선의 근원을 악의 계기와 분별하고, 순선한 본성의 발함을 인정하여 지순한 선의 가치를 뚜렷이 견지하기 위함이다.이는 혼란스러운 당시의 현실에서 인간의 온전한 선성을 확보하여 악을 극복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소산이다.아울러, 이러한 퇴계의 사단과 칠정에 대한 입장은 퇴계의 수양론의 바탕이 된다.퇴계의 이기호발설은 다음 두 가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1. 논리적으로, 이기 개념이 뒤섞일 수 없다.2. 실천적으로, 천리에 근원하는 선을 인욕에 근원하는 악으로 될 수 있고, 악하게도 될 수 있다. 만일 이의 주재가 강하다면 기는 약하므로 선이 나타나고, 이의 주재가 약하면 기가 강한 현상이 나타나서 이가 은미하게 되고 선이 감추어진다는 것이다.이가 나타나서 기가 이것에 따르면 선이고, 기가 덮어서 이가 은폐되면 악이다.그러므로 퇴계는 마음에서 선한 정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가 기를 주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또한 퇴계는 마음의 체體는 성이며, 성은 곧 이理이므로 마음 역시 본원적으로는 선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음이 발하기 이전에는 기가 작용하지 않으므로 순선하다는 것이다.원초의 근본을 말한다면 마음이 발하지 않고 기가 작동치 아니하여 본체가 영험하고 밝을 때면 진실로 선하지 아니함이 없다.즉, 악은 마음의 본래적인 면모(體)가 아니라 마음이 발할 때(用)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즉, 선악의 갈림길은 성性이 발하여 정情이 될 때에 존재한다.성이 발동하여 정이 되는 경계가 곧 한마음의 기미이며, 모든 조화의 추뉴요, 선과 악이 갈라져 나오는 곳이다.2) 의意퇴계는 마음에서 정이 발하는 상황을 선악 발출의 계기로 설정하고 있지만, ‘의’라는 개념을 통해서도 마음의 발함과 선악의 문제를 관련짓고 있다.의(意)가 마음의 발함이 되어 또 그 정을 끼고 좌지우지하여 혹은 공정한 천리(天理)에 따르기도 하고, 혹은 사사로운 인간의 욕망을 따르기도 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이로 말미암아 결정되므로 이것이 이른바 의(意)의 기미가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의意라는 것은 마음이 도덕적 문제 사태에 감응하여 ‘헤아려 비교하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의는 마음이 선악으로 나타나는 계기가 된다.즉, 도덕적 문제 사태에서 도리에 합당한 뜻을 가지거나(선) 사악한 뜻을 가지는 것(악)은 선과 악의 갈림길이 된다.이 점에서 퇴계는 만일 마음에서 의意가 생길 때 사사로운 기가 주도하게 되면 의가 악하게 되고 이가 주도하면 의가 선하게 된다고 말한다.이로부터 종합적으로 귀결되는 이황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가. 선 동일하다. 그러므로 하우의 경우라도 인仁을 온전히 실천하려는 노력을 하고, 마침내 성인이 되도록 분발해야 한다는 것이 퇴계 교학의 핵심이다.5. 거경居敬의 특성과 방법경敬은 인격 수양을 궁극적인 본령으로 삼고 있는 유학 공부의 핵심을 이룬다.경으로 근본을 삼고 이치를 궁리窮理하여 치지致知하고, 몸을 돌이켜 실천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법을 묘하게 하는 것이며, 도학을 전하는 요체이다.경은 리理, 즉 바른 도리를 탐구하는 데 근본이 되는 수양임과 동시에, 도리의 실천을 적절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데 근본이 되는 수양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은 성인 되는 공부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것이다’사람이 학문을 할 때에는 일이 있거나 없거나 뜻이 있거나 없거나를 막론하고 오로지 마땅히 경(敬)으로써 주를 삼아 동(動)할 때에 법도를 잃지 않게 되면 그 생각이 아직 싹트기 전에는 마음 자체가 허명(虛明)하여 근본이 깊고도 순수하며 그 생각이 이미 발함에 이르러서는 의리(義理)가 환히 드러남으로써 물욕(物欲)이 물러나고 모든 시끄러움이 차츰 감소될 것인데 이렇게 쌓고 쌓아서 성숙하기에 이른다면 이것이 바로 학문의 요법이다.경은 이발과 미발을 관통하는 수양이다. 경을 통하여 마음의 본래의 선함을 잘 보존할 수 있고, 올바른 도리를 잘 분별할 수 있으며, 욕심을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경은 공부의 근본이 된다.퇴계는 심학을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마음에서 의식의 산란함을 억제하고 사사로운 욕망을 제어하여 천리와 일치토록 하는 것이다.사사로운 욕망은 몸에서 비롯되며, 이 때문에 몸은 경계의 대상이며, 몸을 주재하는 것이 수양의 핵심이다.그런데, 몸을 주재하는 것은 곧 마음이며, 마음을 주재하는 것은 경이다. 따라서 수양을 함에 있어서 경은 그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퇴계는 경의 주요 방법으로 주일무적, 수렴, 상성성, 정제엄숙을 들고 있다.1) 주일무적주일무적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흩어지지 않도록 전한다.
    임용시험| 2020.02.13| 11페이지| 1,500원| 조회(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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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홉스의 사상에 대하여. 평가A+최고예요
    Citical summary : Thomas Hobbes20172112 정지윤홉스의 사상은 그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서양의 고중세 시대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뻗어 나온 목적론적 세계관을 거부한 근대 사상의 선두주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수많은 정신 활동은 분자의 움직임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 역시 수많은 분자들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 세계가 그러한 상호작용들로 인해 거대한 기계와 같이 작동한다는 유물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사상가이다. 이는 그가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사회는 실재하는 것이 아닌 단지 수많은 개인의 집합에 불과하다)과도 일맥상통한다. 개인 없이는 사회가 있을 수 없으며 사회는 개인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유물론적 입장을 받아들였기에, 자연스레 선과 악, 미덕과 악덕 같은 관념론적인 개념의 실재성은 거부된다. 그는 선과 악은 단지 인간이 욕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임의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하는 유명론적 입장을 가진다.어떤 사람이 욕구하거나 욕망하는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사람에게는 선이며, 미워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은 악이다 ... 결국 선과 악, 무시란 언제나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달리 쓰이는 것이므로, 순수하고 절대적인 선 악 무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과 악의 일반적인 기준은 대상 그 자체의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없는 곳에서는 개인에게서 나오고, 국가가 있는 곳에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중재자 혹은 심판관에게서 나오기도 한다.이는 ‘선’ 그 자체가 실재한다는, 선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입장을 전면 거부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인간이 욕구하는 것이 선이라고 말한 것 이외에도 홉스의 욕망에 대한 개념은 꽤나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홉스는 욕망이 끊임없이 지속된다고 말하는데, 이 욕망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멈춰질 수 있다. 이 욕망의 대상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그것이 끊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는 측면에서 보면 욕망의 특성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그리고 이는 인간에게 정해진 목적이 없다고 말하는 홉스의 세계관과도 통한다. 정해진 목적이 없으면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표 역시 없고, 끊임없이 다른 목표가 생기며 그를 욕망하게 되므로 죽을 때까지 인간은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목적론적 세계관의 대표주자인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를 계승한 중세의 사상가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정해진 목적이 있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였기에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면 인간의 욕망이 멈춘다고 말한다. 존 로크의 경우에도 홉스와는 조금 다르게 인간은 지나친 욕망을 지니지는 않는다고 말한다.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 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설명된다(물론 홉스는 이 자연 상태를 실제 역사의 기원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자연 상태의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평등하다. 물론 조금 더 힘이 센 사람, 조금 더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위험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다 평등하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의 평등은 누구라도 본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희망의 평등을 낳는다. 이러한 희망의 평등은 같은 목적을 성취하려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을 서로의 적으로 만든다. 이에 따라 홉스는 분쟁이 일어나는 세 가지 기본적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는 경쟁이며, 둘째는 확신의 결핍이며, 셋째는 명예에 대한 욕구이다. 눈에 띄는 것은 홉스가 명예욕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명예라는 것은 그의 특성 자체에 희소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배분되는 명예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재화가 차고 넘치는 자연 상태를 가정한다 하더라도(물론 홉스는 그러한 자연 상태를 가정하지는 않았지만), 명예욕의 특성상 인간은 끊임없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서의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인하고, 짧다. 이러한 홉스의 자연 상태는 시대착오적 견해일 뿐이라고 수많은 비판을 받지만, 앞서 말했듯 홉스는 이것을 실제 역사의 기원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홉스는 이러한 자연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부분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편안한 생활을 욕구하는 인간의 정념에서,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이성에서 찾는다.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평화조항을 알려주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자연법이다.자연법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홉스의 독특한 자연권에 대한 개념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홉스는 자연권을 개개인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원할 때는 언제나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외부적인 장애물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법, 계율과 같은 것이 없어 무제약적으로 자연권이 행사되는 자연 상태는 이러한 자연권이 제약될 어떠한 조건도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지니게 되며, 그것은 역으로 자신의 삶을 끔찍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성은 이러한 자연권을 제한할 자연법을 생각해내기에 이른다.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한 평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평화를 얻을 수 없을 때에는 전쟁의 도움과 이점을 활용할 수 있다.첫 번째 문장은 근본적인 자연법의 내용인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따르라’, 두 번째 문장은 자연권이 집약된 내용인 ‘모든 수단을 동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 라는 내용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로부터 두 번째 자연법이 도출된다.평화와 자기 방어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에 대한 자연권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꺼이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허용한 만큼의 자유에 스스로도 만족해야 한다.이러한 자연권의 상호 포기의 목적은 자신의 생명의 보장에 있으므로 만약 상대방이 이러한 계약을 준수하려 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본인도 그 계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 또한, 이러한 계약의 목적을 고려했을 때에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생명이 위협되는 상황에서 저항할 권리는 양도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권리의 상호양도를 계약이라 한다.
    인문/어학| 2019.03.28| 2페이지| 1,000원| 조회(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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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사 평가에 대하여, 교원평가의 허점과 의의
    교사의 평가에 대하여한국교원대학교 과제로 제출한 바 있음.교사 평가는 분명히 허점이 많이 존재하는 제도이다. 학생들과 평소 사이가 좋았던, 학생들과 잘 노는 교사는 보통 좋은 평가를 받고, 수업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학생들에게 낙인이 찍힌 교사는 보통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아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가 하면, 학생들이 공정한 의미에서의 평가가 아닌 평소 쌓아왔던 불만을 표출하면서 비난을 섞은 평가를 하여 선생님에게 상처를 남기는, 학생의 불만 배출구라는 이상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불만, 비난 등도 교사에게 효과적인 피드백이 될 가능성이 많다. 학생들의 그 거친 표현을 걷어내고 나면 학생들이 어떠한 점에서 교사에게 불만을 가졌는지 조금 선명히 보이고, 앞으로 어떻게 수업을 진행하고 아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해 방향을 새로이 잡을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교사 평가의 장점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더 나은 수업, 더 나은 학생과의 관계, 그리고 더 나은 교사가 되기 위한 효과적인 발판을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장점은 앞서 말한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앞서 말한 단점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문제들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내가 주목하고 싶은 단점은, 앞서 말했듯이, 평가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와 평가의 목적에 대한 변질 이 두 가지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 문제는 어디서 기인할까? 학창시절을 돌아보기로 했다. 나 역시 교원평가를 악용하는 학생 중 한 명이었고, 주로 나와 친한 선생님에게는 후하게, 그리고 나와 친하지 않은 선생님에게는 까다롭게 점수를 매겼던 학생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왜 학생은 교원평가라는, 어찌 보면 공정해야 하는 제도에 감정적으로 점수를 매기곤 하는 것일까?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찾고 싶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감정적인 관계가 교원평가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교사가 학생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 것에 적극 찬성하고, 그것이 없으면 수업이 매끄럽게 굴러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적인 관계는 쉽게 틀어지기 쉽고, 이렇게 틀어진 관계는 교사평가 뿐만 아니라 모든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영역에 상당한 피해를 끼친다.
    교육학| 2019.03.28| 1페이지| 1,000원| 조회(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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