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CBOT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7
검색어 입력폼
  • Adrienne Rich 애드리안 리치의 주요 작품 분석 A+
    신화 해체의 시 쓰기 작업: Adrienne Rich의 주요 네 개의 작품을 위주로Ⅰ. 서론Adrienne Rich는 ‘Leading Feminist’ 작가라고 불릴 만큼 여성 삶에 대한 여러 시 작품에 썼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들이 이야기하는 여성의 삶은 관습적 삶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성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명료하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구체화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의 감정이 기원하는 곳은 사회이며, 개인적 감정은 곧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Adrienne Rich의 시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감정들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혹은 문화적인 기표들이 된다. 주목할 것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변화의 추구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 작품들은 어디로든 밀고 나아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본고는 Adrienne Rich가 여성의 삶을 어떠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러한 서술의 기원을 추적하여 여성의 삶에 대한 그녀의 기대와 방향성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작품마다 이야기하는 주제와 화자가 말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기에 작품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본 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추출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방식은 개별 작품들에 대한 깊은 이해뿐만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Ⅱ. Aunt Jennifer’s Tigers결혼생활에서 여성이 겪는 힘든 무게감을 정확한 어휘로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부족하지 않으면서 과하지도 않은 묘사들은 주제를 아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라고 하면 떠오르는 감상적인 그리고 주관적인 것이 떠오르는 것에 반해 해당 시는 객관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작품 내에 쓰인 단어나 묘사들은 해당 주제를 보여주는 데에 아주 명확하며 그것들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Adrienne Rich는 특정 시점에 특정 어휘를 쓰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한다.작품 내에서 그려지듯 A다. 게다가 Wedding band가 손가락에 육중한 무게를 더하고 있는 모습은 종속적이다. 죽은 후에도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을 것이며 호랑이는 강인한 인상으로 계속해서 활보하는 이미지를 끝에 제시하여 우리는 결혼생활에서 남성의 권위와 권력 그리고 그 아래 위치한 여성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시인이 바라보는 결혼생활에서 여성은 위축되어 있고 옥죄는 것들에 대해서 해방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과장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Adrienne Rich가 기존 남성들이 탁월하다고 하는 정형화된 규칙적 단어와 행의 배열 속에 결혼생활을 하는 여성 Aunt Jennifer를 배치한 것 또한 절묘하다. Adrienne Rich가 생각하는 결혼생활의 삶이란 게 결국 관습화된 구조로의 편입 혹은 틀 속으로 깔려 들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결혼생활 내에서 여성이 따라야 할 가치관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삶이고 끝내 남는 것은 ‘수동성’임을 암시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작품이 어떤 변화를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현실의 단적인 이미지를 탁월하게 그려내기는 하였으나 문제의식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Aunt Jennifer가 죽은 후에도 ‘Wedding ring’이 그녀를 옥죄거나 호랑이들은 끊임없이 활보할 것 같은 이미지는 강렬하고 힘이 있다. 하지만 결혼생활에서의 여성의 수동적이고 종속적 삶이라는 문제의식이 사회의 어떤 부분으로 발산되거나 변화를 촉구한다는 것보다는 다소 회의적인 시각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결혼생활의 고단한 여성의 삶의 묘사에 대해서는 완벽에 가까운 정교함으로 보이지만 변화를 호소하는 목소리로 대변되는 것에 대해서 텍스트 내에서 이렇다 할 단서들을 꼽기 힘들다는 점에서다.Ⅲ. Snapshots of a Daughter-In-Law앞선 작품과 공유하고 있는 주제는 비슷하지만, 해당 작품에서 Adrienne Rich는 비교적 의지적인 목소리를 작품에 투영한다. 열 개의 파트로 구성된 긴 시에 여성의두에 던지는 것은 과거의 현재의 대비되는 여성의 모습이다. “Delicious recollections perfume through the memory”라고 표현하듯 아름다웠던 모습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절정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에 ‘moldering like wedding-cake’, ‘suspicion’, ‘rumor’, ‘fantasy’와 같은 것들이 과거를 대체하고 있다. 여성의 삶이 결혼을 전후로 어떻게 달라지는 가에 대한 암시적 묘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시는 여성의 주체적 삶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구체화한다. ‘Angel’이라고 하는 여성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목소리에 혼란을 겪는 장면은 특히 이를 단적으로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천사와 대비되는 목소리라고 할 수도 있는 “Have no patience”, “Be insatiable”, “Save yourself; others you cannot save”는 곧 천사의 목소리가 되며 어떤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자신에게 자상을 입히는 것 또한 내면 안에 억압되어있는 주체성을 발산하려는 무언가로 상징된다.이후에는 생각하는 여성(Thinking Woman)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내면적 질문 혹은 답변으로 이어진다. 시간과 관습에 의해 굳어진 것들에 의문을 던지고 해체하고자 하는 의지가 투영된 서술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녀가 제시하고 있는 경험과 감정들은 무엇일까? 여성의 재능은 곧 굳어진 일상생활 혹은 은밀한 공간에서 사용되어야 하며, 그러면서도-규범적인 혹은 관습화된-여성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Dulce ridens, dulce loquens’, 이것을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지켜야만 하는 삶이다. 노래를 부를 때에도 여성 자신의 노래를 할 수 없었고, 용감한 여성이 쓴 글에 대해서도 평가는 가혹했다. 이러한 것들이 알게 모르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의도적 배제의 역사였음을 넌지시 짚어내듯 “You all die at fifteen” Diderot의 말을 Adrienne Rich를 마친다.앞서 작품들을 살펴본바 Adrienne Rich의 서술이 다소 파편화되어 나타나 있음에도 그 뿌리는 여성의 주체적 삶에 기반을 두고 쓰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Virginia Woolf의 “Killing the Angel in the house”의 의미와 결을 같이하고 있다. 억압되어있는 것에서의 해방을 위해서는 결국 내면의 천사를 죽여야 한다는 비유처럼 작품에 제시한 경험과 감정 그리고 역사에 저항해야 한다는 점에서다. 결론적으로 과거에서 출발하여 미래에 대한 기약 없는 소망으로 이어지는 시는 Adrienne Rich가 기대하는 여성의 삶이 주체적인 삶의 획득임을 말하고 있다. 앞선 Aunt’s Jennifer’s Tigers와 다르게 정형화된 틀-기존의 남성 시인들이 닦아놓은 시 창작 규범-에서 벗어나는 파격적인 형식은 또한 시인의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태도를 보여준다.Ⅳ. PlanetariumAdrienne Rich의 Planetarium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부분은 여성 천문학자로서의 삶에 대한 묘사와 함께 그녀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읽는 이에게 질문을 던지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시인의 목소리가 짙어지며 첫 번째 부분의 메시지를 구체화한다. 시인이 보거나 경험했던 온전하지 못한 여성의 삶을 제시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짙은 목소리를 투여하는 내용전개의 흐름은 ‘Snapshots of a Daughter-In-Law’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가 길어 다소 긴 호흡으로 읽어내야 했던 ‘Snapshots of a Daughter-In-Law’와 달리 ‘Planetarium’은 더욱 세련된 방식을 택한다. 텍스트 내에 무작위로 배치된 것처럼 보이는 공백이 바로 그것이다. 공백은 시를 읽음에 있어서 쉼표와 같은 효과를 제공하는데, 이는 읽는 이가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나 자세에 따라 읽는 호흡이 개별적으로 달라짐을 뜻한다. 이러한 공백은 다르게 보기의 방식으로써 시를 풍부하게 r’는 Caroline Herschel뿐만 아니라 여성 천문학자들이 평범한 여성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당대의 현실을 드러낸다. 별이 되어 떠 있는 그녀는 평생을 천문학도로서 살아왔지만, 그녀의 모든 능력과 업적들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기록되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서술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34행 “I am bombarded yet I stand”부터 시작된다. 위아래의 공백과 함께 쓰인 해당 행은 단독자로 강인하게 서 있는 여성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시 속의 ‘I’는 우주의 신호를 받아 ‘relief of body’와 ‘reconstruction of the mind’를 위해서 그것을 이미지로 바꾸는 혹은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번역은 결국 Adrienne rich가 행하고 있는 시 쓰기 작업과 다르지 않다. 포격을 받아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곧은 자세로 당당하게 어떤 이미지에 대한 번역작업을 멈추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즉, 여성이 계속해서 억압받아온 그리고 인정받지 못했던 역사에 대한 글쓰기를 굽히지 않는 것이다.작가 자신의 꿋꿋한 의지가 드러나는 ‘Planetarium’은 ‘Snapshots of Daughter-In-Law’에 나타난 만져질 수 있는(Palpable) 삶을 소망하는 Adrienne rich의 실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가 기대하는 여성의 삶 역시 육체와 정신 모두에서 주체성을 획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Galaxies of women’의 묘사처럼 관습적인 패턴과 규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녀의 소망을 개인적인 것에서 공동체의 것으로 확장하고 있다.Ⅴ. Diving into the WreckAdrienne Rich의 ‘Diving into the Wreck’은 깊은 내면세계로의 여행과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이를 난파선에 빗대어 표현한다. 난파선이 있는 깊은 수면 아래로 떠나는 여정은 일반적인 여행이 아니라 탐구과정과도 같다. 굳이 지상 밖의 넓은 외부세계가는다.
    인문/어학| 2021.11.23| 5페이지| 3,000원| 조회(142)
    미리보기
  • 뉴스의 시대 독후감
    뉴스를 바라보는 망원경과 현미경알랭 드 보통이 쓴 에는 저자가 뉴스를 바라보는 방식 전반이 담겨 있다. 그리고 뉴스의 성격 혹은 종류에 따라 어떻게 그 뉴스를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관점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텍스트 전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뉴스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 혹은 방법에 대한 서술이 주요하다. 다시 말해 뉴스를 해체하고 뜯어낸 작업의 결과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정치, 해외, 경제 등등 여러한 분야로 나눠져 있고 여러 예시가 존재하여 다양한 측면에서 볼 수 있게 한다. 본고는 해당 책에서 더 심층적으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주제들을 가져와 생각을 덧붙이는, 그러한 확장의 방식으로 구성해보고자 한다. ‘선택적’으로 책의 주제들을 꺼내오는 것이기에 책의 전반을 다루기엔 한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최대한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가져와 궁극적으로는 파편화된 것들을 통합할 수 있는 그러한 결론을 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 있어서 더욱 깊게 봐야 하는 것에는 현미경을, 멀리 떨어져서 봐야 하는 것에는 망원경을 쓰고자 한다.1. 언론이 알려주지 않는 것저자는 가장 파격적인 것을 먼저 제시한다. 우리는 뉴스가 전달하는 메시지에는 주목하지만 언론사에는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보의 홍수 시대에서 수많은 정보가 제공되는 와중에 주류 담론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뉴스 자신은 ‘우리가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주류 담론을 형성하는 주 매체가 무엇인지 뉴스 자신이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뉴스는 뉴스의 작동원리가 거의 보이지 않게 하는 방법을,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의문을 제기하기 어렵게 하는 방법을 안”다고 언급한다. 물론 뉴스가 대중들에게 정보가 도달할 때까지의 과정을 세세하게 알려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만큼의 규모의 대중들이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측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대중들이 전어느 정도 뉴스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는 얼마만큼 닿아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이 부분에서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 사이에 뉴스는 더욱 고도화된 수작을 부린다. 굳이 뉴스가 수작을 부리지 않는다더라도 때때로 신념은 자기 스스로 무너지기 마련이다. 즉, 신념을 전제한 비판적인 시각은 곧 편향적인 시각이 되며 종속될 가능성도 생긴다. 우리가 이것을 인지했는지 혹은 그러지 못했는지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면 논리적 말장난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 같아 관두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적어도 뉴스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나’와 뉴스 사이에서 벌어진 간극을 두고 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아야만이 제대로 된 뉴스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이러한 부분을 서문에 파격적으로 제시한 것은 납득되는 일이며 아마도 가장 적절한 서문이 아니지 싶다.2.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실체두 번째 장에서는 정치 뉴스와 관련된 전반의 이야기를 한다. 정치 뉴스가 따분하고 지루한 이유, 뉴스가 두려움과 분노를 사용하는 방법 등등 여러 이야기를 다룬다. 그중에서도 객관주의 저널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본질이 흐려진 정치 뉴스 기사들이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 현재 대다수의 기사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속전속결’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미덕인 것 마냥 쓰여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타 여러 국가들의 이야기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근래 한국에서의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따옴표 저널리즘으로 흡수된 듯하다. 특히 정치를 주제로 한 기사들은 더욱이 그러하다. 실제 기사들을 보면 많은 경우 정치적 공방을 위주로 자극적인 ‘대사’를 뽑아낸다. 그리고 그것들을 한 데 이어붙여 한 ‘장면’으로서 사실적 보도를 감행한다. 객관주의는 허울뿐인 상태로 말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상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대중들이 한 기사를 보고 더 큰 주제로 다가갈 수 있는 일종의 해석이 개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사는 우리가 도대체 어떤 본질과 대면과 굿 비즈니스’모델을 제시하며 탐사보도가 객관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탐사보도가 한 사안에 대해서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에 객관주의를 표방한 기사가 만연한 시대에서는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은 탐사보도에 눈길을 더 끌 것이고 이것은 곧 굿 비즈니스가 되고, 탐사보도의 심층성이 굿 저널리즘을 가져올 것이라 하였다. 물론 모든 영역에서 탐사보도화를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객간주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탐사보도가 하나의 활로를 개척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개인적으로는 뉴미디어의 폭발적인 확산과 대중화로 인해 선정주의를 전제한 정보전달방식 또한 급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에 뒤지지 않게 정치 영역 뉴스들이 클릭 수를 갈구하게 된 경향도 없잖아 있다고 본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이상적인 해결책을 대전제로 두고 우리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매체의 역전과 급전의 조류 그리고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등등 여러 면에서 더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살펴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3. 해외 재앙 뉴스해외에는 재앙만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저자가 일러둔 것처럼 뉴스는 각종 재난, 사건 사고들을 우선순위에 두고 우리에게 정보를 조달한다. 해외뉴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해외에서 일어나는 각종 자연재해나 정치적 사건들은 우리에게 전달되지만, 대부분의 내용들은 뉴스거리가 될 만한 일들만을 담기에 국내에서 해외뉴스르 통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해외로 눈을 돌리면 마치 국내외에서는 재앙이 펼쳐지고 있는 장면이 상상되고 그려진다. 해외뉴스가 국내 대중들에게 그려낸 이러한 상상은 생각보다 거대하다. 캐나다에서 보냈던 지난 학기를 떠올려보면 저자의 말이 대부분 유효하다. 해외뉴스 보도는 ‘큰 것’들을 위주로 보도하기 때문에 해외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알기 힘들다. 코로나가 닥쳤던 시기에 우리나라에 보도되는 캐나다관련 해외뉴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정작 캐나다에 살고 있었던 당시에 캐나다 주류 언론사에서 보도하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이 같으면서도 생산하는 정서가 다르다. 코로나가 퍼지고 있으니 집에 안전하게 있으라는 총리의 말. 그리고 순차적으로 검사되고 확진자는 격리되는 것, 요양시설의 방문을 금하고 기타 교육기관이나 상점들을 폐쇄하는 것 등등 구체적인 사항들이 캐나다의 보도에 실렸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토론토의 외곽부라 확진자가 많지도 않았고 안전했다. 이 둘의 핵심적인 차이라고 한다면 앞에서 말했듯 생산해내는 감정 및 정서의 차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대중들의 시각을 변형시킨다. 두 뉴스를 모두 본 입장에서 해외뉴스와 관련해 재앙, 재난과 같은 이야기만 접해 들을 수 있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다시 고민하게 됐다. 재앙 위주로 담긴 짧은 영상들과 이미지들의 연속은 해외를 파국적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했듯 우리는 한 나라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 나라의 재앙같은 소식만 전해 들으니 그 나라에 대해 적대시한 태도와 편협한 프레임이 씌워진 된 듯하다. 북미 사람들의 마스크에 대한 인식을 예로 들자면 나를 포함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철저히 착용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마트에 입장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북미권’은 마스크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식의 보도는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역시 뉴스거리가 될 만한 일이기에 보도가 된 것이고 그것은 전체가 될 수 없다.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해외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보자면 저자의 논리는 설득력 있고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4. 움직이는 사진과 멈춰있는 사진뉴스는 시청자로 하여금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저자가 지적한 부분 중 가장 타당성 있고 우리에게 그리고 뉴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뉴스는 단순 ‘정보제공’을 할 뿐이지 우리가 그 정보에 진정성 있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지 않는다정면에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나 어느 정도 대중들이 뉴스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타인의 아픔이나 상처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야 우리가 어떤 실천적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알랭 드 보통의 또 다른 저서 에서는 ‘이미지’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치유하는지에 대해 서술했다. 또한 현재 글쓰기의 대상인 에서도 예술이 활용하고 있는 방법들을 뉴스에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이 말에 동감하며 우리가 보다 뉴스에 공감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다음의 사진은 1994년 퓰리처상을 받은 케빈 카터의 사진이다. 사진은 아프리카의 식량난 문제에 대해 국제적으로 관심을 갖도록 환기시켰으며, 그 영향력 또한 대단했다. 이 사진을 통해 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겠지만,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사진처럼 우리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미지는 더 이상 뉴스에서 보기 힘든 것 같다. 뉴미디어의 새 국면은 우리의 눈이 고정된 이미지보다 움직이는 사진인 영상에 훨씬 더 익숙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사진은 따분한 것이 되어버렸다. 단순 부가설명을 위한 사진만이 존재할 뿐이다. 영상 텍스트는 우리를 몰입하게 만들고 우리의 눈이 텍스트 밖으로 돌아가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몰입하게 하는 요소는 아프리카의 빈곤에 처한 사람들의 숫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담긴 사진은 대중들의 공감능력을 일깨우고 보다 더 뉴스를 깊게 보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이미지를 ‘응시’하도록 하고 이미지의 바깥 세상까지 감각하도록 해야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수전 손택이 그녀의 저서 에서 언급했듯 매스 미디어의 세상에서 ‘충격’과 ‘전율’을 일으키는 수많은 전쟁 이미지들을 우리는 매일같이 보게 됐고, 우리는 이제는 그러한 이미지들에 대해 감각이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뉴스를 생산하는 방식 면에서 더욱 신중을 기울이고 단순 정보전달로써의 뉴스보다도 한층 더 고차원적인 텍스트를 생산해야 한다. .
    독후감/창작| 2021.11.23| 4페이지| 2,500원| 조회(230)
    미리보기
  •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
    말로우의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 메피스토필리스(Mephistopheles)의 포스터스(Faustus)에 대한 양가적 태도에 관한 고찰: 메피스토필리스의 욕망 실현으로서의 서사크리스토퍼 말로우(Christopher Marlowe)의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에서 주인공 포스터스(Faustus)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지적 열망을 보여준다. 극중에서 그와 항상 함께하는 인물은 메피스토필리스(Mephistopheles)이다. 극 내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메피스토필리스와 포스터스의 관계가 악마와 인간의 정통적인 양상으로 설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피스토필리스가 포스터스에게 양가적 태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포스터스가 악마와의 계약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메피스토필리스가 지옥에서의 고통과 저주를 반복적으로 상기하며 후회를 드러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 과정에서 메피스토필리스는 악마임에도 적극적으로 포스터스의 지적 열망과 타락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스터스의 응고한 피를 녹이기 위해 횃불을 가져오거나 지옥에 떨어뜨리기 위해 단검을 주기도 하는 등 행동에 있어서는 메피스토필리스의 다분한 의도성을 보여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메피스토필리스의 양가적 태도에 관한 고찰을 통해 그의 캐릭터성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메피스토필리스의 행동 동기를 분석하여 작품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도모하고 서브 캐릭터를 분석하는 것 자체는 흔히 주류에서 벗어난 논의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메피스토필리스의 양가적 태도 분석에서 먼저 살펴볼 것은 그의 열등감이다. 열등감은 흔히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부족한 자신의 무언가를 극복하기 위해 작용한다.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모든 인간은 목적을 갖고 사회적 존재로서 열등감을 지닌 채 이를 극복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 동기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열등감에 기인하여 어떤 행동을 하기 마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메피스토필리스는 악마로 등장하여 인간이라고 규정하기에는 어렵지만 그는 극 내에서 인간성을 지닌 등장인물로서 행동하고 포스터스와 소통한다는 점에서 예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메피스토필리스가 열등감을 갖고 있는 존재라면 그의 행동 동기, 그리고 이를 넘어서 그의 행동목적의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그의 열등감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포스터스와 메피스토필리스가 속해 있는 장소에 주목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그들은 각각 인간계와 지옥에 몸 담고 있다. 극 내 세계관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보면 ‘천국-인간계-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메피스토필리스는 헤어나올 수 없는 지옥에 존재하는 악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터스는 메피스토필리스 보다 실재적으로 우월적인 포지션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메피스토필리스는 세 개의 세계로 분리된 공간의 지위적 차이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대사에는 한때 신의 얼굴을 보았으며 영원한 기쁨이 고통으로 바뀌었다고 직접 언급하기도 하며, 해당 부분에서 그가 악마임에도 지옥과 천국의 지위적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천국의 기쁨을 옹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필연적으로 인간성을 지닌 그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반면 포스터스가 위치한 인간계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연옥과 같은 곳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메피스토필리스를 통해 악마와의 계약에 피로 서명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인간계에 있으며 언제든지 신에게로 회귀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끊임없이 신과 지옥 사이에서 고민하는 장면 또한 그 자신이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마법을 비롯하여 이 세상 모든 학문에 통달하겠다는 지적 허영심이 그를 맹목적으로 그의 선택을 이끌 뿐이다. 다시 말해 지옥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지만 그는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려 있는 연옥의 세계에서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포스터스는 메피스토필리스가 존재하고 있는 불변의 세계와 달리 자신의 선택을 통해 미래의 방향성을 정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세계관의 지위적 차이에 따른 메피스토필리스의 열등감은 그에게 행동 목적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메피스토필리스의 열등감 극복은 일반적인 것과 구분된다. 보통 열등감의 극복은 자신의 능력이나 지위를 높이는 것으로써 상대방을 넘어서고 혹은 비슷한 지점에 위치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메피스토필리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메피스토필리스는 지옥의 악마로 존재하고 있으며 영원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만 존재한다. 포스터스가 지옥으로 타락하여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메피스토필리스의 열등감 극복은 이렇듯 타협될 수 없는 것이며 유일한 욕망 실현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포스터스 박사에게 지옥의 고통을 언급하면서도 계약 이행의 과정에서 계약 이행에 필요한 포스터스의 응고된 피를 위해 횃불을 갖다 주고, 그가 자살을 범하도록 단검을 내어 주는 등 메피스토필리스의 행동은 확고하게 드러난다.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자연스럽게 메피스토필리스가 지옥과 저주 그리고 고통에 대해 후회하는 식의 말을 반복적으로 꺼내는 이유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메피스토필리스의 발언은 포스터스를 강력하게 설득하려는 의도가 담기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실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넌지시 드러내 보인다. 앞서 살펴본 바 메피스토필리스의 지옥의 고통에 대한 묘사는 자신의 열등감 극복의 실현을 막는 것인 동시에 포스터스에게 약소하지만 현실 인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물론 포스터스가 메피스토필리스의 발언으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에 있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거나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맹목적이기는 하지만 메피스토필리스의 대사에서 드러나는 양가적 태도는 아이러니하다.메피스토필리스의 대사의 연유로는 그를 인간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도덕성이 일말의 동정심과 개입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포스터스가 지옥행을 선택하면 자신의 욕망실현 및 자기위안을 이뤄낼 수 있겠지만 포스터스의 얄팍한 지적 허영으로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은 인간 보편의 동정심을 유발한다. ‘Faustian Bargain’은 짧게 보면 이익이 될 수 있지만 길게 보면 엄청난 손실인 포스터스의 악마와의 계약을 의미하는데, 포스터스는 제 발로 지옥에 들어가려는 맹목적인 인물이다. 메피스토필리스는 포스터스를 두고 인간이라면 무릇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메피스토필리스는 악마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포스터스보다 인간적이며 이성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에서 가장 보편적인 인간군상에 가까운 인물은 우월성과 열등감 그리고 일말의 도덕성을 따르는 메피스토필리스라고 할 수 있다.지금까지 메피스토필리스의 열등감과 그의 욕망 실현의 방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느끼는 일말의 동정심을 통해 그에게서 드러나는 인간성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메피스토필리스의 양가적 태도는 복합적인 인간성에 기반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앞선 요소들로 하여 메피스토필리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은 그의 욕망 실현 혹은 열등감 극복의 서사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의 서사가 흥미로운 이유는 주인공 포스터스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지적 열망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곁을 극의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메피스토필리스의 복합성과 양가적 태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말로우의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은 ‘인간과 악마’라는 전통적인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와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의 관계를 빗겨 나간다는 점에서 그의 서사는 전통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입체적 형태의 캐릭터 관계를 형성했음에 성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876)
    인문/어학| 2021.11.23| 3페이지| 2,500원| 조회(212)
    미리보기
  • 데카르트 방법서설 요약과 비판
    합리성의 함정과 집단지성의 필요성데카르트는 여러 부분들로 구성되고 서로 다른 장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보다 혼자 작업한 것이 더욱 완전성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근거로 한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나 도시가 더욱 잘 정돈되어 있고 아름답기 마련이라고 예시를 들었다. 즉, 한 개인이 설계한 건물이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설계한 것보다 구조적으로 더 완전성을 가진다고 말하며 보편적으로 그렇다고 말했다.또한 진리는 자신의 이성의 힘으로 찾아야함을 주장한다. 그가 혼자 진리를 찾아야함을 주장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그가 명문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것들이 오히려 자신에게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혼란을 가중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네 가지 방밥론을 통해 진리에 도달해야함을 제시한다. 방법론의 핵심은 끊임없는 자기 검열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자신의 이성을 극단적으로 활용하여 진리를 찾고자 하였다.나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합리성의 함정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겸열을 강조했지만 그것의 허점을 지적하며 집단지성의 필요성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요약하자면 데카르트의 비판적 태도는 우리가 수용해야 할 태도이나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목적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는 타인과 필히 소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이성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것은 합리성의 합정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나는 데카르트를 비판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제 2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인 장치인 가스실이다. 나치는 유대인을 어떻게 말살시킬지에 관해서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을 찾게 되었고 그것의 결과물은 가스실이다. 지나친 이성의 강조와 더불어 자신의 오류를 자기가 검토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방법인지에는 의심이 생기는 지점이다. 과연 인간은 합리적은 존재인가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가 평소 글을 쓸 때에도 흔히 이성이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레포트를 쓰고나서 자신이 자신의 글을 검토할 경우에 맞춤법이 틀린 곳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법규칙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한 경우는 빈번히 발생한다. 또한 이러한 사례는 교수님들의 수학수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을 수학에 바쳐 살아온 교수님들 조차도 화이트보드에 수식을 쓰고 계산을 할 때 실수를 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어떤 학생이 조심스레 손을 들고 교수님께 계산실수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교수님은 자신이 범한 실수를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직접적으로 어디에서 어디를 더할 때에 틀렸다라고 학생이 말한 뒤에야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식을 고치신다.
    독후감/창작| 2020.05.27| 1페이지| 1,500원| 조회(304)
    미리보기
  • A+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논평 평가B괜찮아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논평쓰기「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기술의 발달로 인해 예술작품의 무한한 복제가 가능해짐으로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분석한다. 또한 기술적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기존의 예술분야와 현대의 예술, 특히 영화의 등장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 변화들을 발터 벤야민은 책에 서술했다. 즉,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무한한 복제기술의 등장이 어떤 시사점을 가지는지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글의 목적은 벤야민이 쓴 글을 요약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는 데 있다.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해왔다고 벤야민은 말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예술작품에 대해서 언제나 모방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을 해왔다는 것이다. 현대의 미술대학 입시생들이 유명한 조각상을 모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입시생들이 그리는 조각상 또한 이미 원작으로부터 모방된 조형물이다. 그리고 위작을 진품이라고 속여 파는 경우에도 예술작품에 대한 모방은 흔하게 그리고 빈번히 일어났다.예술작품 복제의 역사를 복제기술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자면 목판, 석판, 사진술의 순으로 복제기술은 발달해왔다. 그 중에서도 사진술은 ‘기술적’ 복제의 가능성을 열었으며 단순 복제에 그치지 않았다. 사진술은 예술의 작업 방식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획득할 수준에 도달했다고 벤야민은 책에 서술했다. 이 기술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예술작품의 진품과 위조품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예술들에서는 복제품이 진품의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에 원작만이 가지는 고유함이 있었다. 하지만 기술적 복제에 대해서는 복제품이 나름의 독자성을 지니기 때문에 진품과 위조품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벤야민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첫째는 기술적 복제가 지니는 독자성이다. 사진을 통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작의 모습들을 강조해서 보여줄 수도 있고 또한 기계적 조작의 도움을 받아 자연적 시각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이미지들을 포착할 수 있다. 이러한 복제의 결과물은 단순히 복제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 되는 경우도 있다.두 번째는 원작이 도달할 수 없는 상황에 원작의 모사를 가져다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듣기 위해 그의 공연을 보러가지 않아도 된다. 그가 이미 죽었을지라도 그의 음악은 우리의 집 부엌에도 있고 심지어는 화장실에 있을 때도 있다. 즉, 기술적 복제는 ‘언제 어디서나’의 성질을 가지며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된 것이다.그러나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잃게 된 것은 ‘여기와 지금의 가치’라고 벤야민은 서술한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는 것은 아우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우라는 무엇인가? 아우라는 흔히 ‘어떤 분위기’를 말할 때 쓰이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아우라가 단순 분위기로 치환될 수는 없을 것이다. 벤야민은 이후에 아우라의 상실이 가져온 예술작품에 대한 수용자의 태도변화를 말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더욱 구체적인 의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아우라는 어떤 예술작품에서 흘러 나오는 분위기, 유일무이함이 주는 숭고함과 같은 것이다. 또한 아우라의 핵심속성은 시공간적인 현재성과 유일성이다. 이러한 개념은 예술작품이 만들어진 여기와 지금에서 생성되는 존재감을 말하기도 한다.기술적 복제의 대량화와 현재화가 가능하게 되면서 예술 작품의 진품성에 대한 가치는 위협을 받았다. 기존의 예술작품들이 갖는 고유한 가치들은 진품성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며 그것들은 세월의 흔적과 역사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복제기술의 발전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대중들이 예술작품을 수용하는 태도가 크게 전환되었는데 벤야민은 이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대중들은 전통적인 예술을 대할 때 다소 보수적인 태도를 지니지만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는 진보적인 태도를 갖는다고 벤야민은 말한다. 그리고 기술복제 시대의 핵심 예술은 영화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수용환경의 차이가 만드는데, 영화의 경우 집단적 수용이 가능해짐에 따라 진보적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글을 읽고 영화라는 분야의 깊이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다. 영화와 영상을 가르치는 고등학교를 다니며 나와 또래인 친구들보다는 영화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데 벤야민의 글은 그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화수업은 토마스 에디슨으로 시작해 현대 영화감독들의 작가론에 대한 공부까지 영화역사를 위주로 한 이론수업과 시나리오 작문, 그리고 영화제작을 주로 한 실습수업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영화의 등장이 갖는 시사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영화는 에디슨이 기술을 발명하면서 등장할 수 있었다고만 들었다. 즉, 단편적으로 영화의 등장배경을 보았고 그에 대한 의미를 공부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벤야민의 글을 읽으며 난해하기도 참 난해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읽을수록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다고 느꼈다,예술작품을 수용하는 대중들의 태도변화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 흥미로웠다. 회화와 같은 기존의 예술들을 향유하는 주체는 비평가들 혹은 관련 전문가들이 향유하는 예술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쉽게 회화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없고 그림 자체를 즐기기에는 대중들은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미술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영화는 대중들도 쉽게 향유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각 개인이 비판적인 자세를 갖고 영화를 보려고 한다. 즉,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수용자는 비평가와 같은 자세로 작품을 관람하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문다는 점에서다. 평소에 예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소통이라고 믿어왔다. 예술에는 특정한 답이 없기 때문에 감상자와 감상자 혹은 비평가와 감상자 또는 비평가와 비평가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자체가 예술의 핵심이다. 또한 그것이 즐거움을 준다면 예술은 제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굳이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규정하지 않고 기존의 예술분야보다는 훨씬 덜하다. 이는 비평가와 감상자의 태도가 어느정도 일치하고 이러한 일치는 그들간의 소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독후감/창작| 2019.12.01| 3페이지| 2,000원| 조회(599)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5
5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3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1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1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6월 16일 화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2:28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