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교육학개론 청각장애 청각장애 특수교육학개론청각장애의 특성 청각장애의 교육적 지원 목차청각장애의 특성 말 , 언어발달 사회와 문화 사회 정서적 발달말 , 언어 발달 일반적 언어로 의사소통 X 구어에 의한 지시 수행 어려움 읽기와 쓰기에 약함 비슷한 음을 가진 단어 사이에 혼돈을 일으킴 표현 어휘가 평균 이하 청각적 자극과 시각적 자극이 동시에 제시되면 지나치게 산만 언어능력의 결여 는 다른 교과목에도 영향 , 전반적으로 학업 성취 저하 청각 장애 아동은 직접 반복 과 교정 훈련 을 통해 배워야 함사회 정서적 발달 연령이 많아질수록 친밀한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움 일반학급에서 사회적 고립 경험 사소한 사회적 관습 , 태도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함 교사 는 일반 아동이 청각장애 아동과 의사소통하고 ,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 을 해야함사회와 문화 자신들 만의 유대가 깊고 , 독특한 사회문화 형성 수화 사용 청각장애인 사회를 위한 자발적 단체와 지원 망 가짐 장애인으로 대하는 사회인식 거부 청각장애인 사회는 일반사회에 포함된 하나의 소수 사회 로서 기능교육적 지원 청각장애의 적절한 도움 교수 절차상의 수정 통합 교육 시각적 지원 청각적 지원 수화 통역사구화교육 - 일반 사회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교육철학에 기초 - 말소리 교육을 통해 전형적인 구어를 발달 - 청능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 - 독화 능력의 발달이 중요 - 조기교육이 필수 구화적 접근 종합적 의사소통 읽고 쓰는 능력을 발달 시키는 것 청각장애 아동의 교육의 가장 중요한 문제 ? 수화 구화를 대안하여 몸짓이나 손짓으로 표현하는 의사전달방법 점차적으로 습득해야 할 정보의 양이 많아지고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도 복잡해지면서 보편적으로 사용 이중 언어 - 이중 문화적 접근 - 청각장애인이 자신의 언어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면서도 일반인들의 문화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 수화 모국어보조공학 배치 기숙제 특수학교 통학제 특수학교 특수학급 전일제 특수학급 보청기 소리의 강도를 증폭시켜서 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돕는 기구 개인의 청력 손실 유형에 맞게 주파수대를 조절해 소리를 확대 인공와우 보청기를 써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고도의 감각신경성 난청아동에게 유용한 청력을 제공하는 방법 다양한 교육환경에 배치 아동의 청각장애 정도 , 취학 전에 받은 치료와 훈련 , 구화 또는 수화 능력 등을 고려 개별 아동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 중복 장애로 인한 교육적 필요에 적절한 대처 필요“ 출처 ” 이소현 · 박은혜 , 『 특수아동교육 3 판 』 ( 학지사 , 2011) 강대옥 외 , 『 특수교육학개론 』 ( 학지사 , 2016) 네이버 지식백과청각장애의 특성과 교육지원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청각장애의 특성과 교육지원{nameOfApplication=Show}
1단계 - 단원 학습목표 설정하기교과: 역사 학년(설계한 단원의 해당 학년): 9학년설계자(학번 및 이름):목표 설정하기[9역01-02] 한반도와 세계 여러 지역의 선사 문화의 발전 과정을 도구의 변천을 중심으로 파악하고, 유물과 유적을 바탕으로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추론해본다.이해문자가 발명되지 않았던 선사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유적과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도구의 발전은 생산력의 발전으로 이어져 잉여가 발생하여 공동체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 변화되었다.본질적 질문문자가 발명되지 않았던 선사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사람들 사이에 빈부의 차이는 언제부터 생겼을까?핵심지식유적과 유물을 통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생활과 모습공동체 사회에서 계급사회로의 변화기능유물, 유적 사진 자료를 통한 해석하기인터넷을 이용한 정보 수집하기해석한 내용을 재해석하며 상황극 만들기협력하여 의사소통하기2단계 ? 단원 평가 계획 수립하기수행과제G: 선사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을 살펴보고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의 이해를 위하여 상황극을 하는 것이다.R: 당신은 다큐멘터리 배우이다.A: 이 다큐멘터리는 중학생 3학년을 위한 것이다.S: 당신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P: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당시에 사용하였던 유물과 유적을 직접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S: 각 시대의 상황극에는 다음 조건이 포함되게 보여 주어야 한다.- 구석기 시대 : 불의 사용, 의식주 표현, 도구 사용- 신석기 시대 : 농사, 가축, 고기잡이, 의식주 표현, 도구의 정교화, 평등사회- 청동기 시대 : 벼농사 발달, 의식주표현, 청동으로 만든 도구 사용, 고인돌, 계급 사회핵심준거(루브릭)역량역사적 사고력정보활용능력문제해결력이해공감, 설명, 해석해석개인별보고서가중치40%30%30%상조건에 따라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각각의 유물과 유적을 활용하는 모습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함.책이나 인터넷에서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자료를 해석하는 능력이 우수함.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을 정확하게 구별하며 청동기 시대의 생활 모습을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함.중조건에 따라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각각의 유물과 유적을 활용하는 모습을 일부의 모습만 표현함.책이나 인터넷에서 자료를 수집하였으나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있으며 자료를 해석하는 능력이 보통임.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을 대략적으로 구별하며 청동기 시대의 생활 모습을 간략히 나타냄.하조건에 따라 구석기 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각각의 유물과 유적을 활용하는 모습을 표현하지 못함.책이나 인터넷에서 자료를 수집하는 기능이 부족하며 자료를 해석하지못함.구석기, 신석기 시대의유물과 유적을 구별하나 오류가 있기도 하며 청동기 시대의 생활 모습을 간단한 문장으로 나타내는 것을 어려워함. 혹은 모르고 있음다른 증거- 개인별 보고서(모둠 평가 활동이 끝난 후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을 기록하는 개인 보고서 작성하기)- 자기 평가, 동료 평가- 모둠 협력 활동을 할 때 모둠원들의 협력 태도는 어떠하였는지, 모둠에서 우수하게 활동한 동료는 누구인지, 어떠한 점에 대한 생각인지를 간단히 쓰도록 한다.3단계 - 학습 경험 계획하기차시학습활동(WHERETO)11. ‘몸으로 말해요’ 게임을 통해 말을 할 수 없고 문자도 쓸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하기(H)2. 문자가 없었던 시대의 문화를 어떻게 알 수 있을지 모둠별로 생각하여 발표하기 (H)23. ‘문자가 발명되지 않았던 석기 시대 사람들과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본질적 질문 제시하기(W, H)
2. 백제 정복기사 논쟁광개토왕비문을 통하여 확인되는 당시 고구려의 대외 관계는 대체로 전쟁 기사와 결부지어진다. 비문의 전쟁 기사는 신묘년조를 포함하여 영락 5년조, 영락 6년조, 영락 8년조, 영락 9년조, 영락 10년조, 영락 14년조, 영락 17년조, 영락 20년조 등 9개이며, 그 대상은 백제, 왜, 숙신, 거란, 후연, 동부여, 임나(가라) 등으로 추정된다.비문은 그 가운데서도 많은 부분을 대백제전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백제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당시 고구려의 가장 큰 적이자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비문의 대외 관계 기사 중 상당 부분이 백제 관련 전쟁 기사일 뿐만 아니라, 유독 백제의 명칭만을 백잔이라는 비칭으로 다루고 있는 점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상대국에 대한 국명을 원래의 명칭을 버리고 비칭으로 표현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다. 고구려의 증오에 가득 찬 언어의 선택은 백제와의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나온 것으로 고구려의 백제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비문의 백제정벌 기사를 분석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고자 한다. 광개토왕의 국가적 과제는 그동안 숙적이었던 백제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광개토왕의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는 선대(先代)의 피해에 대한 보복전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는 4세기 초 낙랑군, 대방군의 해체로 양국의 군사적 충돌이 시작되었지만, 직접적으로는 371년 백제 근초고왕 부자의 평양성 공격 때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고국원왕이 피살된 사건이다. 백제군에 의한 조부 고국원왕의 전장에서의 죽음은 차기 왕위계승자인 광개토왕과 장수왕대까지 선대의 숙원인 대백제 복수전을 강하게 의식하였을 것이다.이후 양국은 대방계를 사이에 두고 375년, 376년 공방전을 벌였고, 377년에는 백제 근구수왕군이 3만의 병력으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국양왕 3년(385)에 광개토왕 담덕은 태자로 책공 되었는데, 그 해 8월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 즉위 후 수년간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군사적 17년 정미년 조의 정벌 대상 국가의 실체를 둘러싼 논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1) 영락 6년조의 백제정벌과 작전배경영락 6년(396)조는 백제정벌에 관한 것이다. 왕은 직접 수군을 끌고 백제를 쳐서 58성(城)과 700촌을 공파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뒤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비롯한 포로 1,000명을 얻어 돌아왔다. 이 작전의 대상지역은 대개 임진강 하류, 한강 하류 일대로 비정된다. 비문은 여기서 영락 6년조를 적기 전에 그간의 경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묘년 기사로서 영락 6년에 이루어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百殘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영락 5년 기사 다음에는 다른 기년기사와는 형식을 달리하는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고 하는 이른바 ‘신묘년 기사’가 있어 능비연구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다.현재 신묘년 기사의 문자판독이나 기사성격에 대한 논의는 결론이 나 있지 않은 상태이나, 이는 신묘년(391)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대체로 영락 6년의 백제정벌 및 8년의 신라정토의 명분을 나타내는 전제문인 동시에 영락 6년에서 17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집약 기술한 집약문일 것으로 추정된다.특별히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구절에 집중하여 볼 때 유의되는 사실은 백제와 신라가 예부터 신민으로서 마땅히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포괄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담은 고구려 지배층의 천하관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4세기 후반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 대결상을 지속하였고, 371년에는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한때 고구려에 대하여 우세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4세기 후반 반세기에 걸친 고구려의 굴욕적인 패배에 의해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적개심, 증오심은 뿌리 깊게 그리고 고구려가 추진한 강력한 남하 정책에서 고구려는 필사적으로 대백제전을 감행하였다.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攻取寧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신묘년조에 설정된 백제에 대한 조공, 속민 관계는 사적 전제 위에서 기술된 것이 아니고, 광개토왕의 즉위 후 백제에 대한 열세로부터 반전해서 전승이 거듭됨에 따라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이라 하듯이 백제왕을 복속시킨 우월의식, 즉 당시의 현실적 관계가 과거의 역사에 투영되어 이후 대왕의 정토의 명분을 정당화하는 기술 체제로 되었다.또한 고구려의 승전은 백제의 복속의 맹서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도전을 받아야만 했는데, 이에 고구려는 백제에 대해 ‘殘不服義’라고 명기하듯이 자국의 천하질서로부터의 이탈행위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결국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응징은 백제를 멸망시켜 고구려국에 합병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세력권 내에 편입시켜 조공, 논사(論事)의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영락 6년의 아신왕의 항복과 광개토왕의 은혜로운 용서는 고구려의 백제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대백제전이 확실한 영락 6년조의 경우 광개토왕이 당시까지 전개한 대백제전에서 함락한 성, 촌의 수효와 성성을 쌓았으며, 4년 8월에 광개토왕이 패수(敗數)가에서 백제군에 대승하여 8천여명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다.『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그러한 기사들은 그 기년에 있어선 반드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능비에서 전하는 사실과 유관하다.이를 둘러싼 논의는 이 전역으로 고구려가 차지한 백제 영역에 대한 비정 위주였다. 이 기사는 단순히 그 해에 전개한 군사 활동의 결과로만 얻어진 것이 아니라, 즉위 초부터 이 해까지 전개된 대백제전의 결산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물론 이때 고구려가 백제를 치고 차지한 58성의 위치와 범위에 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갈리기도 하지만 대개 예성강에서 한강 권역으로 보고 있다.2) 영락 17년 정미조 기사에 대한 해석비문의 전쟁 기사와 관련해 학자들의 견해가 갈리는 부분은 영락 17년조 대상의 실체에 대한 것이다. 영락 17년조는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아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 전역의 객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백제와 후연으로 의견이 갈리고 있으나, 백제로 파악하는 견해가 다소 우세한 편이다.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그 근거는 비문에 보이는 사구성(沙溝城)과 『삼국사기』의 사구성(沙口城)이 같은 성이라는 것, ‘루(婁)’자가 들어간 성명(城名)이 영락 6년조에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것에도 다수 보인다는 점, 북연과 고구려의 교전이 마지막으로 일어난 시점은 406년 3월이고 407년에는 고구려에 우호적인 북연이 들어서는 시기라는 것 등이다. 특히 비문에 보이는 사구성과 누성(婁城)이 비교적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요동과 하북 등 후연 관련 지역은 물론이고 중국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들 성은 고구려가 백제에게 공취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견해도 나왔다.최근에는 17년조 정벌의 대상을 후연으로 파악하는 견해들이 다시 제기되었는데, 막연히 정황적 추측만 하였던 기존과 달리 당시의 역사적 방어체제를 갖추고 있었고, 중국은 평지성 위주였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고구려는 평지에서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지성 위주로 방어체제가 갖춰져 있던 요서 지역이 해당 전역의 주전장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그것은 후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또한 백제설을 주장한 논자들이 내세웠던 북연과의 관계를 고려해 후연 관계 기사를 제외하였다는 주장도 북연이 후연의 계승자가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와의 관계를 더 강조하였던 것을 볼 때 고구려 측에서 먼저 북연의 입장을 생각해 후연 관계 기사를 제외하였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락 17년조 기사는『삼국사기』에 보이는 숙군성 공략 기사를 압축적으로 기록한 것이라 파악하였다.임기환은 비문이 정벌 관련 기사를 매우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정벌의 대상은 17년조에 보이는 ‘斬煞蕩盡’이나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라는 표현에 적합한 상대여야 한다고 보았다. 백제, 신라, 동부여 등은 대왕의 은택을 입은 속민이므로 ‘斬煞蕩盡’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정황상 한 번의 전역에서 빼앗긴 갑옷이 1만 령 이상에 군수 물품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주체가 백제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아 그 주인공은 후연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또한 ‘婁’자가 들어간 지명은 백제뿐만 아니라 동부여 등 부여계 지명으로 확인되므로 후연이 고구려 북방의 부여 지역을 공격하였다면 비록 후연전이라 할지라도 전장이 구부여 지역이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피력하고, 그 시기는 고운(高雲)이 후연을 멸하고 북연왕이 되는 407년 7월 이전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이처럼 비문에 정확한 대상이 들어나 있지 않은 영락 17년조 전역의 상대국이 백제냐 후연이냐로 학계의 견해가 갈리는 중에 양자를 적절히 절충한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곧 광개토왕이 후연을 정벌하고 돌아와서 다시 백제의 사구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공파한 사실이 해당 기사에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당시 북중국의 상황은 전진에 의한 짧은 통일 시기다.
고구려사 2017. 04. 12.광개토왕비에 대한 국가별 연구사 정리목 차1. 머리말2. 광개토왕비 개관과 특징3. 중국의 광개토왕비 연구4. 일본의 광개토왕비 연구5. 한국의 광개토왕비 연구1) 북한에서의 광개토왕비 연구2) 남한에서의 광개토왕비 연구6. 맺음말1. 머리말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는 광개토왕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하였으며 현존하는 고구려 비석 중에서 가장 크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게다가 이 비석은 고구려 5세기의 상황을 알려주는 1차 사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그러나 광개토왕비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로 오래 방치되었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풍파 및 훼손으로 비문 자체를 판독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일본 군부에서는 고대사 연구의 이름을 빌려 근대 일본의 해외침략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반영하기 위해서 광개토왕비 일본운반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너무 크기 때문에 운반하기 곤란하며 글자면 손상의 우려가 있었으므로 중지되었다. 이렇게 비 자체가 훼손이 심각하게 진행되었음에도 광개토왕비에 관한 연구는 꾸준하게 진행해서 연구된 역사가 1세기가 넘었다. 지금도 한국, 중국, 일본 세 국가의 광개토왕비 연구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고구려의 5세기를 파악할 수 있는 1차 사료라는 중요한 가치를 가진 금석문인 광개토왕비는 청나라에서 먼저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1881년 청나라 탁공(拓工)이 처음 탁본을 만든 이후로 다수의 탁본이 제작되었고, 이러한 탁본을 기초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대 학문이란 맥락에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일제 참모본부 군사정보부원인 酒?景信(사코우 가게노부)가 일본으로 탁본을 전송하면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광복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고, 북한도 역시 1960년대 이후로 광개토왕비를 연구하였다.이러한 광개토왕비를 부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광개토왕비, 광개토호태왕비, 호태왕비 등등으로 불린다. 우리나라려비, 덕흥리고분 묵서명, 평양성 석각 등에서 이러한 용례를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마지막에 있는 ‘지(之)’를 대종결사 혹은 공란을 메우기 위한 글자로 보는 것에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의견이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만큼 이 부분에 있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2-3-2) 집안고구려비와 광개토대왕릉비의 문장구성 비교 검토집안고구려비와 광개토대왕릉비는 그 건립 시기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고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집안비 가운데 상당 부분이 광개토대왕비의 서두 및 후반부의 수묘인 연호조와 겹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두 비문의 기술 내용은 상당 부분 겹치며, 문장 자체가 거의 동일한 곳도 있다. 가령 집안비(集安碑)의 Ⅰ행을 “□□□□世, 必授天道, 自承元王, 始祖鄒牟王之創基也.”라고 판독하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는데, “始祖鄒牟王之創基也.”라는 구절은 능비의 문장과 동일하다.상기한 비문 가운데 영락 6년 조의 58성이나 수묘인연호의 명단처럼 고유명사를 여러 개 나열한 기사, 판독 불능자가 포함되어 있어서 구두점을 정확하게 찍기 힘든 기사,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처럼 아주 긴 고유명사, 신묘년조처럼 구두점 위치에 대해 견해차가 심한 기사 등 밑줄 친 부분을 제외하고, 구두점을 기준으로 각 문구의 글자 수를 분석해보면 광개토대왕릉비의 4자 문구가 98개로 가장 많았고, 5자 24개, 6자 21개, 3자와 8자 7개, 7자 6개, 9자 3개, 10자 2개, 2자 1개 등의 순이었다. 집안비와 비교 검토한 결과처럼 4자 문구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능비 찬자는 문장의 형태나 운문적 요소를 중시하면서 비문을 찬술했다. 특히 앞 절에서 검토한 것처럼 집안비(集安碑)와 같은 기존 기록을 참조하여 비문을 찬술하면서 의도적으로 4자나 6자라는 운문적 요소가 강한 문구로 변형하였다. 그러므로 능비의 문장이 기본적으로 운문적 요소가 강하다는 사실에 유의하면서 비문을 분석하면, 능비 전체의 서사구조를 새롭게 파악할 실마리를 확보할 수노, 이마니시, 구로이타 등 현지조사에 의한 석회 도포 후의 탁출 문자에 대한 의심이 나타나게 되어 석회탁본에만 의거한 광개토왕비 연구의 위험성이 강하게 주장되었다. 마찬가지로 1930년대에 들어서 池?宏(이케우치 히로시), 藤田亮策(후지타 료사쿠)도 현지조사를 통해 역시 탁본 제작을 담당하여 글자가 고쳐지고 있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이케우치나 후지타 이후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 현지연구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광개토왕비 연구는 완전히 중단되어버렸다.4-2) 광복 이후의 연구패전 후 1945~60년대에는 일본의 고구려사 연구는 다른 분야에 비해서도, 또 이후 연구 상황에 비해서도 저조하였다. 그리고 앞서 60년대에 북한의 김석형 설이나 박시형의 견해는 학계에 충격을 일으켰지만 좀처럼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中塚 明(나카츠카 아키라)의 논문으로 광개토왕비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그 상황이 변했다. 그는 광개토왕비의 탁본이 청일전쟁 준비 기간 중에 일본에 들어왔다는 점, 그것을 가져온 인물이 참모본부의 군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해독 작업을 참모본부가 했다는 점이 일본에서의 비문 연구와 그것의 해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면서 일본에서의 비문 연구와 그 해석에 대한 재검토를 제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연구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김석형, 박시형과 같은 비문 전체에 입각한 종합적 관점에서의 비문 연구를 하는 방법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이후 비문 관련 연구가 증가하는 등 연구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어 연구 성과의 의의는 높다고 할 수 있다.나카츠카의 문제 제기에 이어 佐伯 有淸(사에키 아리키요)는 요코이가 쓴 『高句麗古碑考』와 참모본부에 대해 연구해 광개토왕비 연구에서의 일본 군부의 관여를 밝혀냈고, 한국 역사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지적했다. 한편 旗田 巍(하타다 타카시)는 비문 연구를 포함한 한국사연구가 대륙정책과 무관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 이 논문은 이 비문에서 일본의 주장을 바꿀 수 있는 글자를 판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석에서 띄어쓰기로 신묘년조의 기사를 병신년 기사까지 연결하여서 한 사건으로 만들며, 신묘년 기사의 주어를 고구려로 만들어서 해석했다. 이 논문의 요지는 신묘년에 고구려는 수군을 통해서 왜를 격파했으나 백제가 왜를 끌어들여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신년에 집적 친정하여 백제에게 승리했다고 보았다. 이 책은 북한 안에서 극찬을 받은 연구이며, 일본의 1970년대에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우리나라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이 연구는 70년대의 일본의 근대사학자와 中塚明(나카즈 아키라)와 佐伯有淸(사에키 아라키요)가 반박했었다. 재일사학자 이진희도 비판적이었다. 김석형 역시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1963년에 「초기조일관계연구」를 했다. 이 논문은 광개토왕비의 내용을 통해서 한일 관계를 다루었다. 박시형의 연구와 공통으로 고구려가 왜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여기서는 백제가 왜를 끌어들여서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해석했다.위의 내용으로 토대로 생각해보면 북한은 광개토왕비를 직접 조사할 수 있었던 것이 연구사에서 큰 의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와 달리 1980년대부터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지정학적 차이라고 생각된다. 중국과 북한은 같은 공산주의 국가로서 서로 교류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전쟁 직후에 반공정책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으므로 연구가 늦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가 달리 직접 조사를 할 수 없으므로 북한의 연구가 성행할 수 있었던 유리한 점이라고 생각한다.북한의 1960년대의 연구는 실제 조사를 바탕으로 진행되었고, 주로 신묘년 기사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도 역시 신묘년 기사 논쟁에 기꺼이 참여했고, 일본과 우리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정인보의 논리에서 더 나아가 백제의 분국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해서 학계에 람들에게 퇴거를 권유하면서 광개토왕비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기반으로 시를 지었고 이 시는 『지봉유설』에 실렸다. 대신 여기서 나오는 광개토왕비는 금 황제의 비로 해석했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기록이 없었고, 신라의 삼국통일과정에서 북쪽의 영토 상실과 관련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 1860년에 완성된 『대동여지도』에서도 압록강 쪽에 황성, 황묘로 표기되어 능비의 실물자체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실체를 알지 못하고 금나라 황제의 비석으로 착각했다. 1908년이 되어서 『증보문헌비고』에 광개토왕비에 관한 내용이 실렸다. 그 이후에 「황성신문」에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서 보았을 때 조선 시대와 그 이전에는 광개토왕비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연구하거나 실체를 알아보려고 노력한 것이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경술국치 이후에는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 기록해놓았다. 공식적으로 광개토왕비에 관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최남선은 「통구의 고구려유적」을 썼다. 하지만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그 후에 이홍직은 「임나문제를 중심으로 흠명기의 정리」를 발표했다. 이 내용을 발표했으나 발표의 내용은 일본의 전통식의 방법에 따라서 정리되었다.경술국치 이후에 광복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연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는 일제의 억압과 국가를 되찾기 위해서 민족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연구를 했거나, 일본의 연구를 그대로 정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한계가 있었지만, 신채호와 같이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광개토왕비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렇게 꾸준히 연구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1960년대 정인보의 연구 이외에 큰 성과가 없었다. 1980년대에 와서야 제대로 된 연구가 시작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광개토대왕비의 글자 1,775자 중에 판독할 수 없는 글자 150자가 있기
교육심리학청소년들의 동기저하현상의 원인 및 해결방안오늘 날 우리나라의 교육은 다양한 측면에서 파행을 겪고 있다. 대학입시로 인한 학생들의 학업몰두와 부적응 행동양식들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극단적인 수준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학습동기가 저하되고 심지어는 무동기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올바른 방향으로의 지식탐구가 이루어지지 못해 학업성취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서 학습 동기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일련의 정신적, 신체적 활동들이 시작되고 유지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학습자들은 주어진 학습상황에서 스스로에게 ‘내가 과연 이 과제를 하고 싶은가?’, ‘내가 이 과제를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 과제를 하려고 하는가?’등의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학습자들의 대답은 바로 그들의 학습동기를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학생들이 무동기 혹은 동기저하의 원인을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측면에서 살펴보고 그에 대응하는 해결방안을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문화적 측면에서는 상호의존적 자기이해, 효의전통윤리, 가족주의로 인한 요인이 있다. 한국 문화에서 개인의 행동은 자신의 내면적 특질보다는 타인이 지녔으리라고 판단되는 사고나 느낌, 그리고 타인이 보이는 행동에 의해 좌우되고 결정된다. 자아를 집단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타인과 상호 의존하는 가운데 자아가 발달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처럼 상호의존적인 자아이해를 추구하는 개인의 경우 당연히 자신이 속한 집단 내 구성원들의 반응이나 행동에 대해 지속적이고 민감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한국의 학생들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하는지에 높은 관심을 가지며, 부모나 교사 등 자신에게 중요한 타인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 내에서 균형있는 조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며 어디에 자기실현의 가치를 부여하느냐 하는 문제는 청소년의 성취동기 유형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다.상호의존적 자아이해를 추구하는 청소년에게 있어서 ‘효(孝)’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이들에게 미치는 부모의 영향력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는 일방향적 한국적 효(孝)에 대한 접근은 청소년이 부모에게 죄송함을 느끼는 것과 동일한 맥락을 지닌다. 효(孝) 개념에 기반을 둔 부모에 대한 죄송함이 한국 청소년의 성취동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한국 청소년이 부모에 대해 느끼는 죄송함은 학습자의 자기효능감을 저하시키고 학습상황에서의 도움요청 회피 성향을 촉진하는 것으로 나타나 후속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효(孝) 우선의 전통윤리는 배타적 가족 중심성과 가족 이기주의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가족주의는 가족 집단을 다른 집단이나 개인보다 우위에 두는 가족 우선성을 기본으로 한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가족 내의 부계 중심성을 강조하고 가족단위 중 최고 세대인 부모를 공경하는 특징을 지니는 데, 가족주의가 모든 이해관계에서 가족의 이득을 우선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동기요인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가족의 도구적 기능이 중시되면서 한국 사회에는 자녀의 성공이 곧 부모의 노후 복지와 사회적 안전판으로 작용한다는 신념이 형성되었고, 자신의 생존과 사회적 ?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자녀가 대신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부모의 기대와 가족 이기주의의 추구는 자식에 대한 열성적인 교육열과 자식 교육에 대한 투자로 연결되었다. 이는 다시 높은 사교육비 부담, 입시교육, 조기유학 과열 등의 사회적 현상을 야기 하는 것은 물론, 부모가 자녀에게 지나친 성취압력을 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다음으로 사회적, 제도적 측면에서의 원인이다. 먼저 교육열을 살펴보면 한국 사회의 높은 교육열은 신분상승, 자아실현, 인격도야 등 어디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추구하는지에 관계없이 학생, 학부모 교사를 망라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교육에 대한 열망을 공통적으로 추구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사회 구성원 공통의 교육에 대한 신념과 확신은 한국 청소년이 학업성취를 위해 더욱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 게 만드는 심리적 환경을 조성한다. 교육열이 한국 청소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잘 드러내는 현상 중의 하나는 한국의 성인이 가족의 행복이나 불행의 원인을 자녀의 교육적인 성취에서 찾으려는 귀인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희생할 때 자식들은 부모로부터 강한 정서적 지원을 받는다고 느끼고, 나아가 그러한 지원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부모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높은 교육열은 한국 청소년으로 하여금 부모의 희생에 보답하려는 의무감과 부모가 베풀어 준 경제적, 정서적 지원에 대한 고마움을 통해 높은 성취수준과 긍정적인 성취동기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나친 성취압력으로 인한 부모-자식 관계의 갈등을 유발함으로써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와 부정행위 등 비적응적인 학습동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두 번째는 학력주의인데, 한국 사회 대부분의 구성원은 일류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는 선결조건임과 동시에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쌓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를 학력주의라고 일컫는다. 학력주의에 기인한 과다한 성취압력은 한국 청소년의 심리적 안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학생들은 부모 혹은 교사의 기대가 자신의 현재 학업성취 수준과 현저한 차이를 보일 때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응답하였으며, 이러한 심리적 현상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목전에 둔 고등학교 3학년생일수록 더욱 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학력주의의 뿌리는 매우 깊으며, 이는 대학입시제도와 함께 평가 위주의 학교와 교실문화를 주도함으로써 한국 청소년의 학습동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한국의 대학입시제도는 소수의 엘리트 학생들을 위한 제도이다. 한국 사회에서의 대학입시제도는 배움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유교적 가치관, 높은 교육열, 그리고 학력주의와 맞물려 한국의 교육과정과 교수학습방법, 그리고 청소년의 학습동기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부모와 학교, 사회로부터의 높은 기대 및 성취압력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이처럼 선택권마저 제한받게 되는 학습자는 스스로의 학습에 대한 주도권 상실과 함께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자신이 통제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한국 청소년이 우수한 학업성취에도 불구하고 학습에 대한 내재적 동기가 감소되고 부정적 감정 반응이 나타나며 스스로의 역량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자신감이 저하되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측면에서 살펴본 학생들의 동기저하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먼저 자기효능감을 높여야 한다. 학생들의 자기효능감은 자신이 속한 교실이나 학교 환경에서 어떤 목표가 강조된다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능력과 결과, 상대적인 비교보다는 노력과 과정, 점진적인 향상을 높이 평가하는 학습환경에서 학습자들이 보다 긍정적이고 적응적인 학습동기를 표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