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광개토왕비 백제정복기사논쟁"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백제 정복기사 논쟁
1) 영락 6년조의 백제정벌과 작전배경
2) 영락 17년 정미조 기사에 대한 해석
2. 참고문헌
본문내용
2. 백제 정복기사 논쟁
광개토왕비문을 통하여 확인되는 당시 고구려의 대외 관계는 대체로 전쟁 기사와 결부지어진다. 비문의 전쟁 기사는 신묘년조를 포함하여 영락 5년조, 영락 6년조, 영락 8년조, 영락 9년조, 영락 10년조, 영락 14년조, 영락 17년조, 영락 20년조 등 9개이며, 그 대상은 백제, 왜, 숙신, 거란, 후연, 동부여, 임나(가라) 등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그 가운데서도 많은 부분을 대백제전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백제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당시 고구려의 가장 큰 적이자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비문의 대외 관계 기사 중 상당 부분이 백제 관련 전쟁 기사일 뿐만 아니라, 유독 백제의 명칭만을 백잔이라는 비칭으로 다루고 있는 점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상대국에 대한 국명을 원래의 명칭을 버리고 비칭으로 표현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다. 고구려의 증오에 가득 찬 언어의 선택은 백제와의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나온 것으로 고구려의 백제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문의 백제정벌 기사를 분석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고자 한다. 광개토왕의 국가적 과제는 그동안 숙적이었던 백제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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