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론 과제원/달러 환율의 변동은 한국 경제의 안정성과 경쟁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로 한국 경제 활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원/달러 환율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2015년 1월부터 2023년 12월까지의 거시 경제 자료인 물가, 화폐량, 이자율, 국민소득, 경상수지를 사용하여 환율 변동 요인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물가와 환율의 관계2015년의 환율은 약 1,130원이었으며, 소비자물가지수는 94.861이다. 2016년에는 환율이 약 1,160원으로 상승하였고 소비자물가지수는 95.783으로 소폭 증가했다. 2017년 환율은 1,130원으로 약간 하락하였으며, 소비자물가지수는 97.645으로 증가했다. 2018년에는 환율이 1,110원대로 낮아졌고 소비자물가지수는 99.086으로 상승했다. 2019년에는 환율이 1,160원대로 증가하였고 소비자물가지수는 99.466으로 약간의 상승을 보였다. 2020년에는 환율이 1,190원으로 올랐고 소비자물가지수는 100.0으로 상승했다. 2021년 환율은 1,140원대로 감소, 소비자물가지수는 102.50으로 상승했다. 2022년 환율은 1,290원으로 큰 폭의 상승이 있었으며, 소비자물가지수도 107.72로 상승하였다. 2023년에는 환율이 약 1,300원으로 증가하며 소비자물가지수 역시 111.59로 높아졌다.2015년부터 2023년까지 소비자 물가는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다. 소비자 물가의 전년 대비 증가율은 2016년: 0.97%, 2017년: 1.94%, 2018년: 1.48%, 2019년: 0.38%, 2020년: 0.54%, 2021년: 2.50%, 2022년: 5.09%, 2023년: 3.59%로 나타난다. 특히 2022년과 2023년에는 소비자 물가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환율도 함께 상승하고 있다. 이는 환율 상승으로 인해 수입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소비자 물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환율이 상승하면 수입품의 원가가 상승하여 국내 소비자 물가에도 상승하는 경2,911.9억 원이며, 환율은 약 1,130원이다. 2016년에는 화폐량이 약 2,342,621.3억 원으로 증가하였고, 환율은 1,160원으로 상승하였다. 2017년에는 화폐량이 약 2,471,225.6억 원으로 증가하고 환율은 1,130원 수준으로 약간 하락하였다. 2018년에는 화폐량이 약 2,626,902.0억 원으로 증가했으며, 환율은 1,110원대로 낮아졌다. 2019년에는 화폐량이 약 2,809,943.7억 원으로 증가하면서 환율은 다시 1,160원대로 상승하였다. 2020년의 화폐량은 약 2,948,124.6억 원이며, 환율은 약 1,190원이다. 2021년에는 화폐량이 약 3,148,262.7억 원으로 증가하였고 환율은 약 1,140원으로 약간 하락하였다. 2022년에는 화폐량이 약 3,338,419.5억 원으로 더 증가하였으며, 환율은 약 1,290원으로 큰 폭의 상승을 보였다. 2023년에는 화폐량이 약 3,512,710.8억 원으로 증가했고 환율은 약 1,300원으로 약간 더 상승하였다.2015년부터 2023년까지 화폐량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화폐량의 전년 대비 증가율은 2016년: 7.32%, 2017년: 5.49%, 2018년: 6.30%, 2019년: 6.97%, 2020년: 9.28%, 2021년: 11.71%, 2022년: 8.52%, 2023년: 2.90%로 나타난다. 2020년과 2022년의 화폐량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환율도 상승하고 있다. 화폐량이 적정 수준 이상으로 상승하면 시장에 더 많은 원화가 풀리게 되어 원화의 실질 구매력이 하락하고 수입품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원화가 이전보다 더 많이 필요해지면서 환율이 상승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하지만 2021년의 경우 예외적으로 화폐량이 큰 폭으로 증가했음에도 환율이 하락하였다. 2021년의 사례는 화폐량 증가가 항상 환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다른 경제적 요인에 따라 환율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변동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이자율과 환율의 관계2015년의 이자환율은 1,110원대로 낮아졌다. 2019년에는 이자율이 1.25%로 하락하면서 환율은 다시 1,160원대로 상승하였다. 2020년의 이자율은 0.50%이며, 환율은 1,190원이다. 2021년에는 이자율이 0.75%로 상승하였고 환율은 1,140원으로 하락하였다. 2022년에는 이자율이 1.25%로 상승하였으며 환율은 1,290원으로 큰 폭으로 상승하였다. 2023년에는 이자율이 1.75%로 상승하였고 환율은 약 1,300원으로 상승하였다.2015년부터 2023년까지 이자율의 변화율은 2016년: -0.25%, 2017년: 0.25%, 2018년: 0.25%, 2019년: -0.5%, 2020년: -0.75%, 2021년: 0.5%, 2022년: 2.25%, 2023년: 0.25%로 나타난다. 특히 2022년에는 이자율이 큰 폭으로 인상되었으며, 환율 또한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이자율이 인상되면 국내 투자에 대한 수익률이 높아지고 국내 금융 시장에서 자본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며, 외국 자본 유입을 유도하게 되어 환율 상승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하지만 2021년의 경우 예외적으로 이자율이 소폭 인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율이 하락하였다. 이는 이자율의 인상이 항상 환율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환율이 다른 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자율과 환율 관계의 복합적인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경상수지와 환율의 관계2015년의 경상수지는 105,118.6백만 달러이며, 환율은 약 1,130원이다. 2016년에는 경상수지가 97,923.7백만 달러로 감소하였고, 환율은 1,160원으로 상승하였다. 2017년에는 경상수지가 75,230.9백만 달러로 더 감소하고, 환율은 1,170원으로 소폭 상승하였다. 2018년에는 경상수지가 77,466.5백만 달러로 약간 증가했으나, 환율은 1,110원으로 하락하였다. 2019년에는 경상수지가 59,676.1백만 달러로 다시 감소하면서 환율은 1,160원으로 상승하였,290원으로 상승하였다. 2023년에는 경상수지가 35,488.2백만 달러로 약간 증가하였고 환율은 1,300원으로 약간 더 상승하였다.2015년부터 2023년까지 경상수지의 전년 대비 변화율은 2016년: -6.84%, 2017년: -23.17%, 2018년: 2.97%, 2019년: -22.97%, 2020년: 27.19%, 2021년: 12.29%, 2022년: -69.69%, 2023년: 37.4%로 나타난다. 특히 2019년과 2022년에는 경상수지 흑자가 큰 폭으로 감소하면서 환율이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경상수지 흑자가 줄어들면 외환 시장에서 외화 수급이 줄어들게 되어 원화가 약세를 보이며 환율이 상승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는 경상수지 흑자가 감소할수록 외화 유입이 줄어들기 때문에 외환 시장에서 원화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는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하지만 2021년의 경우 예외적으로 경상수지 흑자가 12.29%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환율이 하락하였다. 이는 경상수지 흑자가 환율 하락에 기여하는 주요 요인이지만 환율이 항상 경상수지에만 영향을 받지 않으며, 다른 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변동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국민소득과 환율의 관계2015년의 국민소득은 1,745,962.1십억 원이며, 환율은 약 1,130원이다. 2016년에는 국민소득이 1,839,390.5십억 원으로 증가하였고 환율은 1,160원으로 소폭 상승하였다. 2017년에는 국민소득이 1,941,716.5십억 원으로 증가하였고 환율도 1,170원으로 소폭 상승하였다. 2018년에는 국민소득이 2,014,588.5십억 원으로 증가했지만 환율은 1,100원으로 하락하였다. 2019년에는 국민소득이 2,057,204.1십억 원으로 더 증가하였으며 환율은 1,160원으로 다시 상승하였다. 2020년의 국민소득은 2,075,410.3십억 원이며, 환율은 1,180원이다. 2021년에는 국민소득이 2,245,326.5십억 원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환율은 1,140원민소득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국민소득의 전년 대비 증가율은 2016년: 5.36%, 2017년: 5.56%, 2018년: 3.75%, 2019년: 2.11%, 2020년: 0.88%, 2021년: 8.19%, 2022년: 4.73%, 2023년: 3.89%로 나타난다. 특히 2021년과 2022년에는 국민소득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환율 또한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국민소득이 증가하면 국내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소비가 확대되고, 이는 수입품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이어져 환율 상승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국민소득의 증가가 국내 통화량과 구매력에 영향을 미쳐 환율 상승을 유도하는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하지만 2020년의 경우 예외적으로 국민소득이 소폭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환율이 상승하였다. 이는 국민소득 증가가 환율 안정에 기여하는 요인으로 작동하지만 환율이 단순히 국민소득 변화에만 영향을 받지 않으며, 다른 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변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결론2015년부터 2023년까지 물가, 이자율, 화폐량, 국민소득, 경상수지와 환율 간의 관계를 분석해 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각 요인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가 상승은 수입품의 원가를 높여 환율이 상승할 수 있고 이자율 인상은 외국 자본 유입을 촉진해 환율 하락에 기여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화폐량이 증가하면 원화의 실질 구매력이 떨어져 환율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국민소득 증가는 수입 수요 확대를 통해 환율이 상승할 수 있다. 경상수지 흑자 감소는 외화 수급 악화로 원화 약세를 유발하여 환율 상승 요인이 되기도 한다.그러나 각 요인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이 항상 일관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2021년의 경우 물가, 화폐량, 국민소득이 모두 큰 폭으로 증가하였지만 환율은 하락하는 예외적인 사례가 나타났다. 이처럼 환율은 단일 요인의 변화보다는 국제 경제 상황과 다양한 요인들의 상호작용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음을
교과목명 : 서양고대철학o 과 제 명 :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자아 정체성에 대해서 쓰시오.”1)밀란 쿤데라의 을 읽으시오.2)영화 시청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 정체성에 대해서 서술하시오.자신의 생각에는 밑줄 칠 것.- 목 차 -I. 서 론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II. 본 론밀란 쿤데라의 불멸불멸과 이미지아녜스와 로라의 자아공각기동대와 자아정체성2-1. 쿠사나기의 불완전한 자아2-2. 인형사의 불완전한 자아2-3. 완전한 자아정체성III. 결 론나를 위한 ‘나’참고문헌서론나는 누구인가?김광규 시인의 라는 시는 “살펴보면 나는/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나의 형의 동생이고/나의 동생의 형이고/나의 남편의 아내고/...(생략) 오직 하나뿐인/나는 아니다/과연/아무도 모르고 있는/나는/무엇인가/그리고/지금 여기 있는/나는/누구인가” 라며 정체성에 대해 필자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나의 정체성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나’와 수많은 관계 속에서 타인이 생각하는 ‘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나’는 오늘의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내일의 내가 생각하는 ‘나’가 다를 수도 있다. 또한 타인이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진정한 ‘나’가 아닌 꾸며낸 ‘나’, 상상된 ‘나’를 연기하고 있을 수도 있다. 수많은 ‘나’ 속에서 진짜 ‘나’는 존재하는 것인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 것이며, 타인과의 관계 밖에서 독립된 ‘나’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누구인 것인지’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필자는 본론과 결론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해보려 한다.본론밀란 쿤데라의 불멸불멸과 이미지밀란 쿤데라가 말하는 불멸에는 누군가에게 기억되길 바라는 범위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두 가지 불멸이 있다. 자신이 불특정 다수에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큰 불멸과 자신이 사랑했던 소수에 한정되어 기억되길 바라는 작은 불멸이다. 속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로 대변할 수도 있다. 베티나는 바로 그러한 불멸적 이미지로 자신이 실존하게 한다. 베토벤에게도, 괴테에도, 그의 남편 아르님에게도 말이다. 그녀의 의지는 '사랑이 아니라 바로 불멸'이었다.” 작중 대사처럼 결국 베티나는 자신이 원했던 대로 괴테와 함께 불멸하게 되었던 모습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알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품에 등장하는 아녜스와 로라를 통해 작가는 불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풀어내고 있다. 로라는 “인생은 한 번뿐이야 피할 일이 아니라고 그래도 뭔가 우리 뒤에 남겨둬야 하지 않겠어?”라며 큰 불멸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기도 하고 연인에게 버림받고 베르나르의 별장에서 자살하겠다며 폴에게 전화하는 장면에서는 자신이 사랑했던 소수에게 기억되길 바라는 작은 불멸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로라는 결국 베티나가 그랬던 것처럼 아녜스의 남편인 폴과 결혼하여 작은 불멸을 이뤄낸다. 아녜스는 갑작스러운 자동차사고를 당하고 자신의 죽음을 남편에게 보이기 싫어 마음속으로 죽음을 바란다. 소설 속에서 불멸을 이루고자 했던 베티나와 로라는 작은 불멸이든 큰 불멸이든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불멸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책의 주인공인 아녜스의 마지막은 폴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아 마음속으로 죽음을 재촉한다. 아녜스에게 불멸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불멸이 아닌 폴이 가진 ‘아녜스의 이미지’의 불멸이기 때문에 아녜스가 폴에게 기억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나’로 인식되기보다는 타인의 시선 속에 있는 이미지로써의 ‘나’로 인식된다. 인간은 누구나 불멸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나’의 존재로 불멸할 것인지, 다른 사람이 기억하는 ‘나’는 진짜 내가 맞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괴테는 과연 베티나와의 관계가 불특정 다수에게 기억되며 불멸하기를 바랐을까? 괴테가 생각한 괴테와 우리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괴테는 같은 존재가 맞는 것일까? 밀란 쿤데라는 써 소설 속 아녜스의 이미지는 유지시켰다. 이를 통해 괴테와 같이 우리가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 그가 가진 고유한 이미지가 이미 고착화되어 있고 고착화된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남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미지가 아닌 ‘나’로 불멸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아녜스와 로라의 자아아녜스와 로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아녜스의 자아 탐구방식은 축소 지향적, 내면 지향적인데 반해 로라의 자아 탐구방식은 확장지향적, 외부지향적이다.아녜스는 고립된 상태로 외부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한다. 아녜스는 육체적인 특징, 얼굴과의 동일성도 부정하며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들을 모두 제외시킨다. 아녜스가 빼기 전략을 사용하여 자신의 자아를 탐구하려고 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은 어린 시절 자신이 사용했던 개성적인 몸(짓)을 로라가 모방했던 것과 아버지의 개성적 자아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아녜스의 아버지는 세계를 하나의 컴퓨터로 간주하고 컴퓨터는 ‘인간’이라는 특성이 프로그램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육체는 기본적으로 일종의 대량생산품으로 각 개인의 육체는 모델을 제한된 범위 내에서 변주할 뿐이고 “개성적 본질은 가지고 있지 않다”라며 치열한 투쟁보다는 고독과 자연을 즐기는 염세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로라의 확장지향적, 외부지향적 탐구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로라는 육체적인 자아도 자신의 자아라고 생각하고 자신과 얼굴을 동일시한다. 로라는 어렸을 때부터 아녜스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아 아녜스로부터 많은 것을 모방해 그것을 자신의 자아의 ‘부가물’로 만든다. 그녀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은 검은 선글라스도 언니로부터 모방한 것이다. 로라가 끊임없이 모방하고 덧붙여서 만들어낸 자아는 ‘나의 본질’이 맞는 것인가? 하지만 아녜스처럼 모든 것을 제외한다면 우리에게 결국 남는 것이 자아라고 할 수 있으며, 남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어떤 방식자아정체성을 찾기 위해 더하기 전략을 사용했던 것에 비해 자아정체성을 찾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반성한다.공각기동대와 자아정체성공각기동대는 불멸에 등장하는 아녜스가 그랬듯이 데카르트의 육체 기계론적 관점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인 쿠사나기는 공안 9과라는 기관 소속 군인으로 공각이라는 것을 타고 특수 작전을 수행하기 때문에 공각기동대라고 한다. 공각기동대는 고스트와 관련된 사건을 전담한다. 또 다른 인물인 인형사는 고스트 해킹을 저지르는 역할로 등장한다. 고스트는 기계와 인간을 구별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육체도 정신도 기계로 대체될 수 있는 상황에서 기계가 아니라 인간만이 가진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내에서는 고스트를 해킹하는 것이 가장 큰 범죄이며 고스트를 복사하면 원본은 망가지고 고스트를 복사한 안드로이드는 고스트 더빙을 통해 더 인간다워질 수 있다. 이를 이용하여 인형사와 같은 고스트를 복사하는 범죄가 나타나기도 한다.2-1. 쿠사나기의 불완전한 자아쿠사나기는 공안 9과에 들어오기 전의 기억이 거의 없으며, 몸은 전부 의체이고 뇌의 대부분은 전뇌이지만 고스트는 존재하는 상태이다. 영화 초반에 쿠사나기는 자신이 고스트를 가진 기계와 차별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트와의 대화에서 쿠사나기의 생각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많은 부품이 필요하듯이 자신이 자신답게 살려면 아주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타인을 대하는 얼굴, 자연스러운 목소리, 어린 시절의 기억, 미래의 예감, 전자두뇌가 접속할 정보와 네트워크. 그 모든 것이 ‘나’의 일부이며 ‘나’라는 의식을 낳고 동시에 계속해서 ‘나’를 어떤 한계로 제약하지”라며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자신의 자아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쿠사나기는 고스트가 해킹당한 청소부처럼 자신의 기억이 조작된 것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 의해 해킹당해 기억이 조종당할 수 있다면 자신의 자아는 진정한 ‘자신의 자아’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나아가 자신의 존재자체를 의심한다.의 정체성을 이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형사는 인간이 가진 인간의 DNA와 프로그램은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은 ‘기억’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억이 완전하지 않았던 쿠사나기의 자아는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완전할 수 있는 존재인가? 고스트 해킹이 가능한 작품 내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기억은 완전하지 못하다. 누군가의 기억은 미화되고 잊혀지고 각색되어 현실과는 다르게 인식된다. 우리의 기억은 원래부터 온전치 못한 상태이고 우리에 의해 조작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도 쿠사나기와 마찬가지로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2-3. 완전한 자아정체성영화에서 쿠사나기는 완전하지 못한 기억으로 인해 자아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고 인형사는 유전적인 한계로 인해 불완전한 자아를 가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서로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둘은 융합하여 서로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며 진정한 자아정체성을 확립하였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데카르트의 육체 기계론적 관점과 유사한데 육체는 인간의 자아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자아는 인간의 본질이지 육체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결론불멸과 공각기동대를 통해 필자가 내린 결론은 ‘나’의 존재가 타인을 위한 ‘나’보다 나를 위한 ‘나’가 우선되었을 때 진정한 ‘나’와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물론 나라는 존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가정에서는 긴 시간 이어지는 계보가 있는 존재이며, 가정 밖에서는 학교나 생활 속에서 여러 사람과 교류하는 사회적인 과정과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일 것이다. 케빈 베이컨은 6단계 법칙을 주장하며 여섯 단계 이내에 지구의 모든 사람은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 얽히며 의존하는 연계 관계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나의 존재가 오롯이 ‘나’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끊임없는 의심으로 변치 않는 진리인 사유하는 나의 존재를 발견했듯이 나만의 고유명사 철학을 계속한다면,
장보고에 관하여장보고 생애의 서술과 사료비판을 중심으로목차Ⅰ서론Ⅱ본론 장보고의 생애장보고 활동의 시대적 배경 1-1 신라의 배경1-2 당의 배경1-3 일본의 배경청해진의 건설과 번영 2-1 청해진 설치의 배경과목적2-2 청해진의 지리적 이점2-3 청해진의 번영장보고의 반란과 암살3-1 왕위쟁탈전에 참가한 장보고3-2 장보고의 반란3-3 장보고의 죽음에 관해4, 장보고의 한계4-1 독자적 정치 집단으로서의 한계4-2 장보고의 신분적 제약4-3 중앙 귀족과 관료의 장보고 견제4-4 청해진 세력의 중심 인물 부재Ⅲ.결론 Ⅳ.참고문헌서론장보고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동양 세계의 바닷길을 장악하여 해상권을 지켜낸 영웅이다.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기록에서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두목(杜牧)의 ≪번천문집≫에 장보고가 등장하는데 두목은 장보고를 ‘인의지심이 충만하고 명견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했으며, ‘나라에 한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빗대어 장보고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일본의 승려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일을 기록했고 일본에 적산 선원을 세워 제자들에게 적산 명신을 봉제하게 하면서 장보고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이처럼 한 개인이 동양의 해양을 지배한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장보고의 영향력이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이렇듯 장보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타국에서 발견되는 반면에 우리나라의 기록은 오히려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반역자’, ‘미천한 해도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에 의문을 표하며, 장보고의 생애를 살펴보고 두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기 위해 글을 쓰려 한다.본론장보고의 생애장보고의 원래 이름은 궁복(弓福),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의미(활보)이며, 유년에 대한 기록은 없 내리고 ‘하대’의 귀족 연립시대로 이행하였다. 이후 ‘하대’의 귀족 연립시대에서 중앙의 왕위쟁탈전과 농민에 대한 착취와 흉년으로 인해 민심이 떠나면서, 지방 세력의 탈왕권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풍속이 점점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아 다만 외래품의 진기한 것만을 숭상하고, 도리어 토산품의 야비한 것을 싫어하니, 예절이 참담함에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옛 법에 따라 엄명을 베푸는 것이니, 그래도 일부러 범하는 자가 있으면 국법에 따라 형을 집행할 것이다.’ 라는 흥덕왕 9년(834년)에 내린 교서가 있다. 공무역이 쇠퇴하고 사무역이 확대되면서 신라의 백성들이 외래품을 경쟁적으로 구입하고 사치를 부려 골품제에 입각한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신분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이렇듯 동아시아의 사무역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사무역의 주요 담당자는 당나라와 신라, 일본에 흩어져서 살고 있던 재당 신라인이라고 불리는 상인들이었다. 재당 신라인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면서 강제 이주를 당한 후손들과 8세기 후반 이후 신라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당으로 건너간 신라인들을 말한다.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같은 기록을 통해 재당 신라인들은 산둥 반도의 문등현 적산포에서 아래로 절강성의 명주 일대에 이르는 연해지역 및 내륙 운하주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상업, 무역, 운송 특히 해운업에 종사하면서 중국의 국내 교역뿐만 아니라 중국의 동아시아 해상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중국의 물자보급망을 장악한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재당 신라인들은 당왕조도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자치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서 그들을 조직하고 관리한 것이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신라에 귀국하기 이전 재당 시절에 국제 해상무역가로 활동할 때부터 그들과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장보고가 산둥 반도 장보고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신라의 중앙 정부는 왕권을 둘러싸고 쟁탈을 벌이며 민생에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고 자연재해까지 더해져 백성들의 신라 정부에 대한 민심이 흉흉해진 상태였다. 따라서 당나라에서 명성을 펼치던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 주도권을 장악하고 해적을 소탕하게 된다면 민심의 안정과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셋째, 장보고의 신라에 대한 애국심이 청해진을 설치하게 했을 것이다.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할 때, 해적들이 신라인을 약탈하여 당나라에서 노비로 삼고 있다고 말하며 이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보고는 무령군으로 활동하며 무장으로 명성을 펼친 인물이기에 해적들에게 신라인이 약탈당해 노비로 부려지는 것을 막을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신라인들의 고난을 막을 수 있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지위에 있지 못했다. 따라서 장보고는 신라로 건너와 자신의 능력을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서 활용하여 신라의 국민을 구하고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것이다.2-2 청해진의 지리적 이점한반도 서남해안 지방은 당나라, 일본, 신라의 삼국을 연결하는 바다의 중심점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국제 해상무역의 중심기지의 건설에 알맞은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청해진의 위치는 삼면의 조망이 확 트이고 수심이 깊어 선박을 대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태풍을 피할 수도 있는 자연적 요새지이다. 청해진은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반도 연안 항로의 중요 지점에 위치한 것이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한반도의 남해안이나 서해안으로의 연결은 물론이고, 중국 대륙과 바다를 통해 교류하고자 할 때 이용할 수 있는 항로도 결국은 청해진 지역을 통과해야만 가능했다. 게다가 일본은 당시 안정적으로 황해를 건너 중국대륙과 연결할 수 있는 항해 능력이 없었다. 항해술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장기간에 걸가 그를 지지하던 김양과 남은 병사를 수습해서 837년 8월에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도망갔다. 김우징은 838년 2월에 장보고에게 거병을 요청했고 장보고는 이를 승낙했다. 장보고는 김우징의 요청에 따라 정년에 군사 5,000을 줘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위에 옹립하였는데 그가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왕위쟁탈전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장보고에게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는 것까지가 장보고의 암살 전 상황이다.그렇다면 장보고는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왕위쟁탈전에 참여한 것일까? 그가 왕위쟁탈전에 개입하게 된 또 다른 이유를 추측건대 그는 단지 반란을 진압하고자 김우징에게 군사를 내어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장보고가 정치적인 야망이 가득한 인물이었다면 김우징이 피신을 왔던 시점에 왕위쟁탈전에 바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보고는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의탁한지 7개월이나 지난 뒤에 군사를 내어주었다. 이는 838년에 상대등 김명이 시중 이홍 등과 함께 자신이 옹립한 희강왕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김명 스스로 왕위에 올라 민애왕이 된 반역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장보고가 김우징을 청해진에 받아준 것부터가 정치적 야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장보고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정년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장보고에게 의탁했을 때와 훗날 자신을 암살할 염장이 청해진에 찾아왔을 때도 장보고는 그들을 수용했다. 이를 두고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두목은 안록산의 난을 맞아 곽분양이 사사로운 적대감을 떨치고 이임회를 용납한 미담에 비유해 감복해했으며, 장보고를 인의지심과 명견이 있는 인물이라 극찬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의 인간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당나라에서 재당 신라인을 결집시켜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한 이력이 있다.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 세력을 결집하여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보다 국제 해상무역과 연결시켜 신라인들의 안전과 경제적 발전을 도모했던 인물이기에 정치적인 야욕을 가지고 기능할 수 없게 됨으로써 장보고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2 장보고의 신분적 한계장보고의 출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고 할 때 신하들이 장보고가 섬 출신 해도인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반대했던 것으로 보아 장보고의 출신이 높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사회는 골품제에 입각한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따라서 장보고가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인물이라고 해도 출신이 미약하기에 관료로 임명되어 높은 직책에 오른다거나 출세하는 것에 많은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청해진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장보고가 앞서 언급했듯이 ‘대사’라는 직책을 받았던 것은 중앙 관직을 내려주기엔 장보고의 출신 성분으로 인해 골품제 신분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장보고가 강력한 청해진 세력과 국왕의 인정을 기반으로 해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해도 타고난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서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활약하기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4-3 중앙 귀족과 관료의 장보고 견제로 인한 한계흥덕왕 때에 장보고의 활동과 관련하여 장보고에 대한 중앙정치인들의 견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이려 했을 때, 많은 신하가 골품제 신분 질서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신하들은 부부의 도는 인륜의 커다란 윤리라는 명분과 중국 고대의 임금 중 부인을 잘못 맞아들여 나라를 잃은 경우가 많다는 이유를 들면서 문성왕의 혼인을 반대했는데 이는 장보고의 미미한 신분 출신의 딸과의 혼인은 국가의 멸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신하들의 반대이유는 장보고의 출신이었지만 실질적인 반대의 이유는 이미 해상세력을 장악한 장보고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중앙 정치에 관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경계하고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4-4 청해진 세력의 중심 인물 부재청해진 세력은 장보고를 제외하면 출중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91
서희의 외교 성공-고려사 열전 서희전을 중심으로--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서희의 외교 성과 배경과 고려-거란-송의 이해관계1-1. 고려의 경우1-2. 거란의 경우1-3. 송의 경우2. 고려와 거란의 대치 상황3. 서희의 활약3-1. 할지가 아닌 협상3-2. 소손녕-서희 회담Ⅲ. 결론 ……………………………………………………………………………서희의 협상 성공 이유서희의 협상이 가지는 의의Ⅳ. 참고 문헌……………………………………………………………………………Ⅰ. 서론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국가 간 영토 분쟁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우리의 것이 분명함에도 동북공정과 독도를 둘러싼 갈등을 명확하게 해소하지 못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영토분쟁은 국가의 권리와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대부분 희생자를 낳게 된다. 필자는 영토 분쟁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의 소식을 접하며,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더 큰 문제로 이어짐을 알게 되었고 고려의 서희가 그랬듯이 국가 간 이성적인 방식의 협상을 통한 해결이 필요함을 느꼈다. 우리는 고려사 열전을 통해 우리의 역사에서 치밀한 외교와 협상으로 분쟁을 해결한 서희의 성공사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평화롭고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Ⅱ. 본론1. 서희의 외교 성과 배경과 고려-거란-송의 이해관계본론에서는 먼저 송과 거란이라는 강대국의 대치 상황에서 고려의 외교전을 중심으로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 과정에서 전쟁 없이 외교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각 나라의 배경과 이해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1-1. 고려의 경우태조 왕건은 즉위하여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칭했다. 이는 고려가 통일신라를 계승한 것이 아닌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고려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할 명분을 가지며, 이계에 전념할 수 없었다. 또한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발해의 요동을 거란의 행정구역으로 포함시켰으나 나머지 발해의 땅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발해 유민들의 발해 부흥 운동이 각 지역에서 발생하는 혼란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유목민족인 거란은 기마술을 통해 빠르게 타국의 수도를 침략하여 수뇌부를 붕괴하고 보호 국가를 세워 관할하는 정복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타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멸망시킨 국가의 모든 구역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부흥 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빠른 시기에 점령하는 것이 거란의 전쟁 방식인데 송과의 전투가 장기화하자 주변국가와의 관계에 부담이 되었다.유목민족인 여진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 송에 복속하고 거란을 적대시했다. 고려는 송과 화친을 맺어 송에 우호적이었으며,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고려로 유입시키는 고려의 북방정책은 거란으로 하여금 긴장 상황을 만들었다. 따라서 거란은 낙타와 말, 모포 등을 보내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1-3. 송의 경우당이 멸망한 뒤 중국은 5대 10국으로 왕조가 나뉘었고 이를 통일한 것이 송을 건국한 조광윤이었다. 송태조 조광윤은 내정의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켰으며, 송태종은 거란에 빼앗긴 연운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거란을 공격하기 위해 거란에 복속하고 있는 북한국을 먼저 공격하여 정벌에 성공했으나 연운 16주의 탈환은 실패했다.따라서 송은 중국을 통일시켰으나 불완전한 상태였다. 거란이 연운 16주를 차지하게 되면서 거란과 국경이 맞닿아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고 979년 고량하 전투에서도 거란에 패배했다. 또한 서하가 송의 후방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송은 거란과의 전투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송은 거란과 대치하면서 서하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고 고려와는 친밀한 상태를 유지하여 거란을 압박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2. 고려와 거란의 대치 상황거란과 송의 대치 끝에 거란에 우 삼가 천벌을 주려는 것이다. 만약 강화를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속히 나와서 항복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협상의 결론을 얻는 데 실패했다. 이몽전이 돌아오자 고려의 조정은 “어가(御駕)는 개경(開京)의 궁궐로 돌아가고,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항복을 청하자.”라는 항복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나누어서 저들에게 주고, 황주(黃州)에서부터 절령(岊嶺)까지의 선을 국경으로 삼음이 옳을 것”이라는 할지론으로 나뉘었다.3. 서희의 활약3-1. 할지가 아닌 협상성종은 할지론을 받아들여 식량창고를 개방하였는데 개방 후에도 쌀이 남자 적군의 군량으로 사용될까 우려하여 대동강에 쌀을 던지려 하자 서희만이 “식량이 충분하면 곧 성을 지켜낼 수 있으며, 전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병사들의 승부는 강하고 약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다만 틈을 잘 보아 움직이는 것일 뿐이니, 어찌 경솔하게 버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식량은 백성들의 목숨과 같은 것이니, 차라리 적군의 군량이 될지언정 헛되이 강물에 버린다면 이 또한 하늘의 뜻에 맞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며 반대하였고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수렴해 쌀 수장을 중단하였다. 서희는 또한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의 안북부(安北府)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에 의해서 점유되었는데, 광종(光宗)께서 그 곳을 취하여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지금 거란병이 침입하여 옴에 그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그 말은 고구려의 옛 땅을 취하겠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보기에 그들 병사들의 기세가 매우 성하다고 하여 성급히 서경 북쪽의 땅을 나누어 주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또 삼각산(三角山) 이북지역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골짜기는 채우기 쉬워도 사람의 마음은 채우기가 어렵다[谿壑易滿, 人心難滿]’고 하는 욕심으로써 싫증 낼 줄 모르고 그곳을 요구한다면, 다 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무릅쓰고 담판에 참여했다. 서희는 거란의 군영으로 가서 소손녕과 더불어 동등한 예로 대하면서 조금도 굽히지 않는 기개와 용기를 보여주며 타국의 군영임에도 위축되지 않고 상대의 기선을 제압했다. 소손녕이 먼저 “너희 나라는 신라(新羅)의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의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범하여 갉아먹고 있다. 또 우리와 더불어 영토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宋)을 섬기고 있으니, 우리 대국(大國)이 이 때문에 토벌을 하러 온 것이다. 이제 영토를 나누어 바치고 조빙(朝聘)의 예를 취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손녕은 거란이 옛 고구려의 영토를 가지고 있고 고려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기에 신라를 계승한 나라라고 주장하며 고구려의 옛 땅을 고려가 거란에 돌려줄 것과 송과 단교하고 거란에 복속할 것을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서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렇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한 것입니다. 토지의 경계를 논하자고 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의 영역에 있는 것이 되는데, 어찌 침식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역시 우리의 영역 안쪽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도적질하여 기거하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변덕을 부리므로 길이 막혀 통하지 못함이 바다를 건너는 것 보다 더 심하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입니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주어 성(城)과 보(堡)를 쌓고 길이 통하게 하여 준다면 감히 조빙의 예를 갖추지 않겠습니까. 장군께서 신의 말을 가지고 가서 천자께 전달하신다면, 어찌 불쌍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서희는 고려의 국호와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이 고려의 수도임을 주장하며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밝히면서 거란이 점유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도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여진이 압록강 주위에서 도적질을 리의 풍습이 약화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이처럼 신하가 왕에게 직언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희가 이미 할지론으로 정책의 방향이 결정되었음에도 성종에게 의견을 제시하고 설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성종은 국난이 발생하여 국가의 존립 위기가 닥친 상황에 이미 할지론을 받아들였는데도 불구하고 결정을 번복하여 서희의 선항전 후 협상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쉽지 않은 결정을 하였다. 성종은 결정을 번복했지만 우유부단한 왕은 아니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준다.셋째, 태조 왕건이 정립한 고려의 정체성 때문이다. 고려는 태조의 훈요 10조에 따라 건국 이래 최대 목표인 북진정책을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 꾸준히 실행했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에서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기에 신라를 계승한 나라라고 주장하며 현재 고구려의 옛 땅을 점령하고 있는 거란에 고려의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을 때 서희는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라는 국호와 북방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수도로 삼았던 고구려의 옛 수도 서경을 근거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하여 소손녕을 설득할 수 있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부터 정립했던 고려의 정체성이 담판을 성공시키는데 기여했던 것이다.넷째, 고려의 군사력 때문이다. 소손녕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였을 때 “고려의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와 낭장(郞將) 유방(庾方)이 맞서 싸워서 이겼다.”라는 고려사 열전의 기록을 통해 고려군의 군사력이 절대 만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세 번째 이유로 언급했듯이 고려는 북진정책을 위해 서경을 수도로 삼았었다. 따라서 북진정책을 위한 군사적 대비도 이뤄졌을 것이며 안융진에서의 승리가 이를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서희의 협상이 가지는 의의한반도에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지만, 외교전만으로 전쟁이 마무리된 경우는 아주 희귀한 경우이다. 서희는 적의 입장을 간파하여 유연한 정책과 현실적인 태도로 외교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서희의 외교전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서희.
한국 선사 고고학 과제논문 선택 이유신석기 시대는 패총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많아 풍족한 수렵 채집인이라는 개념이 신석기 시대의 생계경제를 설명하는 틀로 많이 활용되었다. 또한 신석기에서 청동기로의 전환은 수렵 채집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이자 물질 자료의 급격하고 급진적인 변환이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축약되는 형태로 설명하곤 한다. (천선행 2016) 하지만 신석기 시대 생계경제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계유지 방식의 다양성과 급격한 물질 자료의 변화라고 여겨진 신석기에서 청동기로의 전환 과정에서 연결성(청동기 초기 토기인 역삼동과 가락동 유형의 토기가 신석기시대 말의 토기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신석기시대 대천리 유적의 탄화 곡물과 관련된 논문에서 신석기 시대 생계유지 방식의 다양성을 살펴보고 신석기-청동기시대 전환과 조기 청동기시대에 대한 논문을 통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연결성을 찾아보고자 한다.논문 요약옥천 대천리 유적의 발굴조사 이전에는 남한의 신석기 시대 집자리에서 생계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탄화 곡물의 출토 예가 없었는데 대천리 유적에서 조, 기장, 쌀, 보리, 밀과 같은 여러 종류의 탄화 곡물이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생업 경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 안승모(2013a)는 발견된 탄화 곡물의 고고학 연구에 있어 식물 유체 분석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후대 교란과 동정의 정확성에 대한 문제와 탄화 곡물의 직접적 연대측정이 필요함을 주장하기도 했다.대천리 유적의 집자리 안에서는 쌀·보리·밀·조·기장 등의 탄화 곡물이 발견되었고 이밖에 도토리 등을 비롯한 미상의 탄화 씨앗이 검출되었다. 대천리 신석기시대 집자리는 구릉 지역에 독립적으로 1기만 자리 잡고 있으며, 인접 지역에는 구석기시대 석기만 출토하였기 때문에 현재까지 신석기시대보다 늦은 시기의 유구는 유적 인접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탄화 곡물이 출토한 재층의 시료를 가지고 분석한 방사성탄소연대정값과 동일하게 기원전 3,500~3,000년에 해당하였지만, 쌀의 경우는 다른 곡물과 비교해 늦은 시기의 연대 값이 측정되었다. 따라서 쌀 3톨을 추가로 2차 AMS 연대측정을 한 결과, 모두 AD 100~400년으로 측정되어 1차에 분석된 결과보다 더 늦은 시기의 연대 값이 측정되었다. 따라서 대천리 유적의 탄화 곡물의 연대측정을 통해 조와 기장, 보리, 밀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 중기의 것이라 확정될 수 있는데, 쌀은 출토맥락이 다른 탄화 곡물과 동일하지만 연대 값이 다르게 측정되어 후대의 교란으로 파악해야 하는가? 곡물의 탄화 과정에서 완벽한 탄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시료 상의 문제로 인한 연대 측정값의 차이가 날 수 있는가? 등 다양한 검토가 이뤄지고 있다.남한의 고고학계에서 오랜 시간 신석기시대의 생계방식을 수렵, 채집, 어로만으로 한정시켜왔는데 대천리 탄화 곡물의 발견을 비롯한 다양한 신석기 유적에서 조, 기장을 비롯한 쌀, 보리, 밀, 콩, 팥 등의 탄화된 곡물이 확인되면서 곡물의 재배 여부를 떠나 신석기시대 생계방식에 있어 주요 먹거리로써 농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신석기 시대 가장 많은 유적에서 확인된 곡물은 조와 기장으로 동삼동과 비봉리의 유적의 전기 토기에서 조와 기장의 압흔이 발견되면서 잡곡 재배의 개시연대가 기원전 5천 년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커졌으며, 북한의 대동강 유역 유적에서도 신석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유적에서 잡곡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신석기 시대 이른 시기부터 잡곡 재배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쌀의 경우도 김해 농소리 조개더미 출토 신석기시대 말기의 이중구연토기에서 벼와 기장족의 규소체가 확인되었으며, 진주 대평리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와 고성 문암리 유적의 탄화미를 통해 신석기시대에도 벼농사를 지었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리와 밀의 경우에는 그동안 맥류를 근동과 아프리카 기원의 작물로 판단하여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맥류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일반적이었는데 대천리 이를 통해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조와 기장뿐만 아니라 쌀, 보리, 밀 등 다양한 곡물을 활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대천리의 신석기시대 집자리에서 확인된 탄화 곡물의 존재는 신석기시대 농경의 증거를 밝히려는 시도가 앞으로 여러 유적에서 꾸준하게 시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보여준다.논문에 대한 의견대천리 신석기시대 집자리에서 발견된 탄화 곡물은 신석기시대 다양한 작물 농경의 증거만을 알려준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신석기시대 생계경제에 관한 한정된 시각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대천리 유적을 분석한 본 논문을 읽으며 가능성을 열어두고 새로운 시각에서 다양한 방식을 활용한 고고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논문에서 대천리 유적의 다른 곡물과 다르게 쌀의 연대 값만 달랐던 것에 대해 여러 가설만을 제시했는데 이와 관련된 가설 검증 절차를 진행하여 쌀의 연대 값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후속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대천리 유적에서 다양한 종류의 탄화 곡물이 발견되었으므로 대천리 유적 근처에 신석기 경작유구가 있었을 것이다. 경작지점이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주변 지역을 세밀하게 조사하여 신석기 경작 유구를 발견한다면 쌀·보리·밀·조·기장의 경작 방식과 작물의 생산성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작물의 생산성을 바탕으로 신석기 농경이 생계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통해 신석기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논문 요약청동기시대 조기의 설정은 안재호(2000)에 의해 제안되었고 조기 설정의 목표는 시기의 세분을 통해 이 시대의 물질문화 변동을 세밀하게 복원하여 한국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의 전환과 그 이후 청동기시대 농업사회 형성을 설명하는 데 있다. 하지만 조기 청동기시대의 설정이 한국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전환과 청동기시대 농경사회의 형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안재호에 의해 제안된 조기 청동기리하여 일부를 포함해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토기만으로 구분기준이 명확해지지 않자 주거지와 노지의 형태를 포함하기도 하는 등 조기를 규정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다양해지고 조기와 대비되는 전기의 물질문화를 구분하는 기준도 다양해졌다. 이와 같은 조기와 전기의 구분 짓기 형태는 조기 청동기시대를 설정하게 된 근거인 돌대각목문의 단독기의 존재가 불분명해져 조기의 구분 기준이 타당성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청동기시대 조기가 시기 구분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함에 따라 조기 설정을 유지하기 위해 구분기준을 지속적으로 변경하여 조기 개념의 무한확대와 이에 따른 전기 개념의 자동적 축소가 나타나고 있다. 조기라는 근거가 사실적 측면에서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년과 시기 구분 및 구분 근거에 대한 전제의 문제점에서 기인한다. 편년이 시간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시기 구분은 일정한 기준과 의미를 가지고 시간을 ‘분류’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편년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시기 구분이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한국 고고학은 편년과 시기 구분을 혼동해 세밀한 편년을 ‘시기 세분’하는 작업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여 편년을 시기 구분의 결과물로 이해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조기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조기 설정이 가지고 있는 방법론과 인식론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무조건적인 시기 세분이 오히려 청동기시대 토기 문양의 양식적 요소에 대한 정밀한 편년을 방해한다. 청동기시대 조기 설정의 목표는 한국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의 전환과정에 대한 설명을 위한 것이지만 조기 설정과 관련된 논의가 신석기시대 말기 수렵 채집민의 상황과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의 상황을 합리적으로 연결하게 할 수 있는 방안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수렵 채집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이 다른 시대의 시기 변화에 비해 단절적으로 이루어진 이유, 이주 하는 농경민이 등장하면서 재지 신석기인의 생계경제의 핵심적 기반인 이동성이 제한받게 되거나 이동비용이 상승하게 되어 재지 신석기인들이 수렵 채집 경제를 폐기하고 농경민 화하였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이 성립되려면 재지 수렵 채집민과 이주 농경민 사이 접촉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까지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왜 둘의 공존이 안정적으로 감지되지 못할 만큼 짧았는지, 이러한 현상이 왜 한국 전역에 걸쳐 발생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청동기시대 조기 설정은 두 가지 의문에 관해 설명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논문에 대한 의견필자는 “한국 신석기-청동기시대 전환과 조기 청동기시대에 대하여” 라는 논문의 제목만을 보고 조기 청동기시대가 한국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연결성을 설명해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논문을 고르게 되었는데 논문에서는 필자가 한국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의 연결성이라고 생각했던 토기의 유형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논문은 토기의 구분도 유효하지 않다고 설명하며, 한국 신석기-청동기시대의 단절성을 여전히 학계에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예측했던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견해였다.또한 논문은 조기 청동기시대라는 구분 짓기가 원래 구분기준의 타당성이 유효해지지 않았음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시기 구분을 위한 시기 구분이며, 조기라는 명칭 유지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필자는 이러한 지적에 대해 당연히 조기 청동기 시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논문을 읽고 난 후 신석기시대 말기 사회 양상과 청동기 초기 사회 양상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한국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로의 전환과정에서 조기 청동기시대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 시기의 단절성과 연결성, 조기 청동기시대의 유무를 떠나 논문에서 지적한 대로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여 시기를 이해한다면 언젠간 한국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전환 과정의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참고문헌한창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