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에 관하여-고려사 열전 서희전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23.03.13
- 최종 저작일
- 20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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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서희의 외교 성과 배경과 고려-거란-송의 이해관계
2. 고려와 거란의 대치 상황
3. 서희의 활약
Ⅲ. 결론
1. 서희의 협상 성공 이유
2. 서희의 협상이 가지는 의의
Ⅳ.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국가 간 영토 분쟁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우리의 것이 분명함에도 동북공정과 독도를 둘러싼 갈등을 명확하게 해소하지 못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영토분쟁은 국가의 권리와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대부분 희생자를 낳게 된다. 필자는 영토 분쟁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의 소식을 접하며,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더 큰 문제로 이어짐을 알게 되었고 고려의 서희가 그랬듯이 국가 간 이성적인 방식의 협상을 통한 해결이 필요함을 느꼈다. 우리는 고려사 열전을 통해 우리의 역사에서 치밀한 외교와 협상으로 분쟁을 해결한 서희의 성공사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평화롭고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본론
1. 서희의 외교 성과 배경과 고려-거란-송의 이해관계
본론에서는 먼저 송과 거란이라는 강대국의 대치 상황에서 고려의 외교전을 중심으로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 과정에서 전쟁 없이 외교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각 나라의 배경과 이해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1. 고려의 경우
태조 왕건은 즉위하여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칭했다. 이는 고려가 통일신라를 계승한 것이 아닌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고려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할 명분을 가지며, 이는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국가들에 대한 북방정책으로 작용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대제국 당나라와 천 년 역사를 가진 신라가 멸망한 당시 상황에서 왕건의 정책은 마냥 무모해 보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왕건은 방치되어 있던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재건하여 서경이라고 이름 붙였고 개경과 함께 고려의 도읍지로 삼았다. 훈요 10조에서도 “서경은 수덕이 순조하여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요 대업만대의 땅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4중에 순주하여 머무르기를 백일이 넘도록 하여 안녕을 이룩하라”
참고 자료
장철균, 「서희의 외교담판: 고구려 영토수복 어떻게 가능했나」, 살림, 2004
박종기, 「고려열전: 영웅부터 경계인까지 인물로 읽는 고려사」, 휴머니스트출판그룹, 2019
김용선, 「고려 사회 사람들」, 일조각, 2018
「고려사」 권 94 열전, 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