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발공업국 독일의 기술교육과 산업경쟁력: 영국과의 비교를 중심으로목차Ⅰ. 서론Ⅱ. 기술교육의 성립과 특징Ⅲ. 정부와 기업의 역할 : 공급과 수요Ⅳ. 기술교육의 결과 : 구조조정과 인력자원의 확보Ⅴ. 결론참고문헌Ⅰ. 서론선진공화국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산업혁명을 성취한 대표적 후발국에는 독일이 있다. 독일은 18세기 말부터 공업화의 단초가 드러났지만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선진공화국인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낙후된 농업국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이 진행되었으며 1913년에는 괄목할 만한 공업화를 달성하였다. 비록 1874~ 1880년 사이 제조업 성장이 일시 정체되었으나 1880년~1896년에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투자율이 다시 급증했고 노동생산성도 크게 상승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영국에 이어 유럽 최고의 공업국이 되었다.여기서 알 수 있듯 독일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공업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은 화학공업, 전기공업 등 생산재공업의 ‘기술진보’였다. 그리고 독일이 기술혁신을 촉진할 수 있었던 필수적 조건에는 ‘기술교육’에서의 혁신이 있었다. 특히 독일 대학의 선진적 기술교육은 신산업의 급속한 팽창을 촉진했으며 새로운 과학과 기술의 적용범위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공공 대중교육에서 독일은 적어도 19세기 동안 유럽최고 위치를 유지하였으며 과학기술교육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이를 통해 독일은 영국보다 수십 년 늦게 공업화를 시작하였지만 단기간 내에 훨씬 집약적으로 빠르게 이를 완수했던 것이다.이러한 기술교육의 중요성은 영국의 산업쇠퇴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독일의 경제부상과 함께 영국은 상대적 쇠퇴를 맞이하였는데 대표적 원인으로서 영국 기술교육 자체에 결함이 지적되기 때문이다. 즉, 영국과 독일의 기술교육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으며 이로 인해 20세기 초 두 국가가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따라서 이 글에서는 영국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독일의 기술교육의 배경과 결과를결정적 차이는 식민지 사업의 유무에서 초래했다. 독일 기업은 여러 나라의 다양한 수요자를 상대해야 했으며 다양한 기술적 요구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초기부터 많은 인력자원과 기술발전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정부의 주도 하에 기술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독일 대학의 높은 기술교육수준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지원 아래 화학, 전기분문과 같은 신기술이 독일 근대산업의 중심에 위치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역설적으로 독일은 식민지 확보를 통한 이익을 누리지 못한 만큼 세계시장의 급변과 격렬한 경쟁에 한층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이에 반해 영국 기업은 주로 식민지 시장에 판매할 제품을 생산하기에 많은 수의 전문기술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산업인력을 작업장내에서 수행되는 도제제도를 통해 양성하였으며 이러한 도제 제도 하에서는 기술교육이 거의 전적으로 실습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높은 수준의 이론은 요구되지 않았다. 영국은 이미 19세기 전반에 전통적인 도제제도 하에서 훈련된 소규모의 기술 인력을 활용하여 산업분야의 성공을 달성하였기에 기술교육에 있어 혁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영국의 산업가들과 기술자들 역시 자신들이 채택하고 있는 기술교육 방식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영국의 기술교육은 오랜 시간 도제제도 단계를 거치는 것 외에 거의 별다른 정규 교육과정이 없는 상태로 지속되다.하지만 19세기 말 이래로 과학기술 부문에 혁신이 이루어짐에 따라 전통적인 도제제도에 입각한 기능훈련은 심각한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기계화의 확대와 이에 따른 대규모 생산방식이 출현했다. 이로 인해 산업생산의 기반은 높은 수준의 기술과 인력의 급증을 필요로 했다. 이제 기술은 단순한 손재주가 아닌 지식과 이해력, 융통성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시대적으로 기술교육의 변화가 요청되었다. 즉 전통적인 도제식 기술교육은 정규 기술학교에서 제공되는 교육으로 대체되거나 최소한 보완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는 것9 (2.0)191041.2 (21.4)24.4 (4.6)191450.3 (26.4)33.6 (6.3)자료 : 장민수. (1998). 「공업화 심화기 (深化期) 독일 경제의 부상과 (浮上) 그 원인 - 독일과 영국의 비교 -」, 『경제사학』, 24(0), 179-204. 16p에서 작성(표 1) 독일과 영국의 과학기술발전을 위한 정부의 재정지원 상황을 비교해 보면 지출총액에서는 20세기에 들면서 양국이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독일의 인구가 영국보다 1.5배 많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며 실제로 국민소득 대비나 예산 대비로는 양국이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 다만 괄호 안의 수치는 지출액 중 대학의 과학기술 연구개발비로 지출된 금액인데 이는 독일은 대학 내에서의 과학 기술 연구개발을 위한 지원이 높은 것으로 보아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대학에서의 연구 활동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교육재에 대한 정부의 공급확대 노력과 교육재 공급량을 볼 때 독일이 정부 주의 교육재 공급에 있어 눈에 띄게 우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실제로 19세기 후반기 양국 중앙정부의 교육재 공급확대 노력은 모든 측면에서 경쟁적으로 이루어 졌다. 실질적으로 영국의 경우도 19세기 후반기 교육기관 특히 기술교육기관의 공급 확대 등 교육재의 공급확대 정책이 적극 이루어졌으며 런던 주위의 3개 기술교육기관과 110개의 지역 기술교육 기관이 만들어졌다.하지만 만국박람회 이후에도 영국은 애 지속적인 산업발전에 필요한 기술 인력을 육성하는데 속도는 매우 완만했으며 1930년대까지 영국 산업계에는 숙련 노동자가 부족한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기술교육 발전에 대한 점진적인 인식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에서 제시된 많은 수의 유용한 건의들이 대부분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역대 정권들은 기술인력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였지만 이러한 관심은 단기간에 그쳤으며 실제로 성취된 결과가 매우 미약했다.영국에서 기술교육의 혁신은 다른 유럽 국가였으나 점차 기술혁신이 더 절실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업의 재정지원은 자신들의 회사나 재단의 영리만을 위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표하는 연구를 지원하기보다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연구를 지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영국에서 비용과 편익을 고려하여 무조건적인 이익을 추구한 하여 새로운 자연과학의 연구개발을 꺼린 것과 달리 독일에서는 이와 같은 개발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다.전문대학뿐 아니라 전문연구소의 설립 역시 정부의 주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업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요컨대 19세기 후반기 기술대학이나 전문 기술연구소의 설립이 정책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업들에 의해 협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듯 대학의 설립 시 기업체가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기술자의 공급에 대한 기업의 요구였으며, 이는 기업이 자체적인 기술개발에 주력하는 한편 정부보다도 기술인력 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단편적 예이다.요컨대 독일 기술교육투자의 공급측면에서 성공요인은 정부 주도 하의 교육재와 공급확대보다 수요측면에 맞춘 구조에 이었다. 물론 이러한 교육재 공급구조는 처음부터 교육재의 최종결정자인 기업 측의 학교교육 신뢰와 학교교육의 독자성을 분명히 인정한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이는 기업들의 학교에 대한 신뢰를 상승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기업가들이 기술인력 확보에 적극적이었다 해서 국가가 기술교육 발전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예로 1890년 이후 정상 근무 시간에 노동자들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법률적으로 강제하여 매우 보수적이었던 기업가들도 직공들의 학교교육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든 것이 있다.요컨대 독일의 산업우위를 가져다준 교육, 특히 기술교육의 우위는 일차적으로 기업 측의 학교교육에 대한 분업인정과 높은 평가 및 신뢰라는 수요 측면에 있었다. 여기에 독일의 교육정책 역시 비용절감형 수요증대 정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독일 교육의 우위와 차별적 예외성은 바로 교육재시장의 수요측면에 맞독립하여 발전하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그리고 1871년 이후부터는 그 이전의 성장과 발전을 토대로 규모·양적·속도 면에서 보다 크고 빠르고 넓은 진행양상을 보였다. 1875년에는 프로이센에만 1196개의 기계공장이 162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1850년대 초에 비해 공장 수는 약 7배로, 노동자수가 약 17배로 증가한 것이다. 1882년에는 독일 전체에 355000명, 1907년에는 112만명으로, 세계 기계 수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880년 이후 독일은 세계시장에서 영국기계와 충분한 경쟁력을 가지면서 판매되고 있었다.화학공업의 경우 역시 이미 1860년대부터 급성장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에는 화학공업이 거의존재하지 않았으나 다른 산업들의 성장으로 산업용 화학제품, 특히 알칼리와 황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또한 농화학의 발전으로 인조비료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기도 했다. 초기 독일의 화학공업은 영국의 발명품에 의존하였지만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대학의 자연과학 육성과 기술교육을 통해 독자적 기술진보를 도모하고자 했다. 특히 유기화학공업은 대학 연구진과의 연계 하에 많은 신상품과 신기술을 개발했다. 예컨대 독일 화학자 호프만의 제자인 퍼킨이 공업용 합성염료를 최초로 제조한 덕에 독일은 합성염료공업에서 세계 최고가 되었다. 1900년경 세계 합성염료생산에서 독일의 비중은 90%였고, 1911~1913년 화학공업 종사자는 27만 명에 달했다.이렇듯 생산재산업의 발전과 종사자의 증가는 독일 기업의 제품 다양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기업의 산업별 분포에서도 나타났다. 표 3에서 볼 수 있듯 독일에 비해 영국은 식품, 담배와 같은 소비재 공업의 비중이 큰 반면 새로운 산업분야인 운송기계, 전기분야는 대기업비중이 적다. 또한 제품의 다양화에 있어서도 독일 기업에 못 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 독일의 중화학 공업의 발달과 제품의 다양성은 미국을 뛰어넘기도 했다.표 2 독일과 영국의 자본금 순위 50대의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경제발전 정책: 경제적 동기부여와 칭짱철로 부설을 중심으로서론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부터 개혁개방정책이 추진된 1978년까지 두 가지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하나는 억압적이면서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이민족의 한족동화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한족 중심의 사회주의체제로 소수민족들을 편입시키려는 유화정책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게 된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정책을 이전보다 완화하고자 하였다.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의 요인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소수민족지역의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고되었다. 둘 째, 과거 티베트 무력점령과 분리독립에 대한 억압적 이미지를 완화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셋 째, 문화대혁명 시기 추진되었던 강제동화정책의 실패이다. 이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는데, 중국의 소수민족문제가 무력적인 방법을 통하여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혁개방기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소수민족의 자율성과 전통문화를 보호하는 민족융합정책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1959년 티베트 사건 이후 강경책이 사용되었던 티베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예로부터 티베트는 중국정부가 일관되게 주시하고 관리하는 가장 민감한 소수민족자치구역이었는데 그 이유는 티베트가 1949년 중국 건국 이전에 자민족국가를 세운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티베트인들은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독립된 왕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민족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병합정책에 특히 심한 반발을 보였다. 따라서 중국정부는 일찍부터 티베트만을 위한 경제적, 문화적, 민족적 프로젝트를 시기적으로 전개해왔으며 이러한 특징은 개혁개방시기에도 나타났다.개혁기 중앙정부는 티베트인들에 대한 각종 특혜 및 우대정책과 민족지역의 실정을 고려하는 경제발전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재정지원, 지정지원(對口支援), 간부지원(幹部援藏)과 같은 경제적 동기부여 정책과 2006년의 칭짱철로(靑藏80년부터 5억 위안의 기초위에서 매년 10%씩 재정보조를 티베트에 증액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1992년 중앙정부가 티베트에 준 재정보조는 재정상으로 보았을 때 전국 인구 1인당 연평균 622위안이었다. 이는 1992년 기준으로 1인당 농민 평균 순수입 630위안보다 많은 것이었다. 또한 3차 서장공작회담이 열린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범위를 더 늘려 62개 프로젝트에 48.6억 위안의 재정을 지원하였다.그 결과 성장률 목표였던 10%를 초과 달성하며 연 평균 12.4%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기록하였다. 또한 2000년 기준으로 티베트의 GDP가 117.46억 위안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1995년의 2배, 1990년의 4배의 수치에 달한다. 이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 이전의 수준에 비하면 수치상으로는 30배의 증가를 보인 것이다.둘째, 지정지원은 재정지원 정책과 연계하여 이루어졌다. 티베트는 연해지역 지정지원의 발원지이자 실험지역으로 선정되어 자금, 기술, 공정건설, 간부, 과학기술전문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원받았다. 이러한 지정지원은 중앙의 재정적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한족지구와 티베트지구의 지역격차 해소를 통한 공동발전을 목적으로 하였다.셋째, ‘간부지원’ 정책의 제도화 또한 지정지원과 연계하여 추진되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의 요인을 티베트지역의 한족 간부의 부족현상이라고 판단하였고 따라서 중앙정부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한족 간부 이주정책의 필요성을 인지하였다. 하지만 80년대 초부터 한족들의 소수민족지역 기피 현상으로 인해 티베트의 행정관리 부족을 보완하는 긴급조치의 형태로만 실시되어 이데올로기 장려기제와 운동차원으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1994년 지정지원 체제 수립 후 병행 실시되면서 수혜정책의 차원에서 구체화되었다. 간부지원 정책에 참여하는 간부들에게는 승진, 주택분배, 배우자의 호구이전과 직업알선 등의 혜택을 부여하면서 장려하였으며 그밖에 정책적 차원에서도 티베트에 대한 세금의 일시적 면제, 시장가격 이하로지원을 통한 이익과 혜택이 순수하게 티베트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앞서 경제발전을 강조하였던 중국 측의 주장에 티베트 임시정부는 티베트의 경제발전으로 얻은 성과들은 정작 티베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고 반박하였다. 오히려 티베트의 경제발전으로 얻은 성과는 티베트보다 중국에게 돌아가면서 티베트의 경제발전효과를 상쇄시켰다고 일축 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서 우선 경제적 지원은 중앙정부가 티베트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행정적 비용의 성격이 강했음을 들 수 있다.1984년 티베트의 투자비구성을 살펴보면, 티베트는 생산성 투자비중이 31.5%, 비생산성 투자 비중이 68.5%였다. 같은 해 전국평균을 보면 생산성 투자는 60%, 비생산성 투자는 40%였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비생산적 부문이 지나치게 투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투자의 대부분은 정부조직의 인건비와 사회간접자원 건설이었는데, 포탈라궁이나 사원 수리, 인민정부 건설, 행정직원의 급여, 도로 확정 및 보수 등이 그 예시이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지원은 티베트인들의 직접적인 생활향상에 사용되지 않았기에 티베트인들의 실질적인 소득향상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도로 건설을 통해 교통이 편리해지면 외지와의 교역이 원활해질 것이고, 관광도시의 경제가 발전한다면 티베트 인들의 소득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효과가 티베트인들에게 나타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하에서는 티베트인의 주거주지와 취업구조를 통해 도시개발의 혜택의 이익주체를 규명하도록 하겠다.티베트인들의 직업분포를 비교해 보면 그들은 대체로 도시가 아닌 비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 티베트의 취업분포를 살펴보면 1차 산업이 80% 2차산업이 2% 3차 산업이 15%이다. 심지어 꽤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는 3차 산업 종사자들 역시 상업이나 서비스업 종사자가 아니었으며 대부분 티베트 승려 등 종교 계통 종사자들이었다. 따라서 도시지역 경제권은 과 안전, 그리고 중국의 국제적 이미지와 국제투쟁과 관련되어 있다”는 江澤民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수민족지역의 발전불균형 문제를 해결 하지 않고서는 민족문제가 해결될 수 없으며 민족문제의 해결 없이는 중국의 지속적 발전과 현대화도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 재고된 것이다.이러한 서부대개발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된 국가 중점 프로젝트 중 대표적인 것은 ‘하늘 길’ 이라고 불리는 ‘칭짱철로’의 개통이었다. 시닝에서 라싸에 이르는 1956km의 칭짱철도는 제 1기 공정과 제 2기 공종으로 추진되었다. 제 1기 공정은 1958년에 기공하였으며 1984년에 개통된 시닝에서 고르모까지의 814km 구간을 의미한다. 칭짱철로가 쿤룬산 근처에서 멈춘 것은 얼어붙어 있는 동토문제, 청두-라싸(2024km) 또는 시닝-라싸 노선 중에서 어느 노선이 유리한지에 대한 논의문제가 복합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철로의 착공식은 2001년 6월 29일이었으며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2006년 7월 1일 칭하이 성의 시닝에서 西藏의 라싸에 이르는 칭짱철로의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중국은 2001년과 2006년 사이 42억 달러와 10만여 명의 인원을 추가 투입하였다. 여기에는 언제 녹을지 모르는 불안전한 영구동토층이라는 지리적인 난관을 뚫고 최고 수준의 철로 건설 기술도 동원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는 기공 당시에 262.1억 위엔의 투자를 계획했으나, 완공 당시에는 300여억 위엔에 이르는 공사비가 소요되었다. 중국이 천문학적 단위의 자본을 들여가며 이러한 철로를 개설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2000년 이후부터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언급하게 된 ‘중화민족’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다민족 국가 중국에게 ‘중화민족’은 무엇을 뜻하는 개념일까? 사실 20세기 초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이 탄생되었을 때, 그 개념은 현재 의미와 전혀 반대였다. 중화민족은 만주족인 淸에 반대하는 개념으로 이민족과 한족을 분리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수민족문제의 르고’, ‘상업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중국이 칭짱철도를 건설하려 했던 이유라고 보는 것이 타탕하다.서부대개발은 민족지역 개발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이익과 민족지역의 이익 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개발에 따른 이익과 혜택은 대부분이 서부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과 지역 구성원에게 돌아가기 보다는 개발주체인 중국에게 돌아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 예로 철로건설에 참여하는 인원이 3만 8천명에 이르지만 이 중에 정작 티베트인은 6천명에 불과했다. 즉 철도건설 사업으로 인한 티베트인들의 취업기회는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측에서는 철도부설을 통한 티베트의 경제 발전성과를 강조하였는데,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40년대 티베트에 비해 낙후했던 네팔과 부탄이 현재 티베트보다 더욱 발전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결코 주목할 만한 성과가 아니었다.이러한 경제적 성과를 고려해 본다면 서부대개발 정책에 있어서 국가적 차원의 이익주체란 다민족 국가체제 하의 중화민족의 공동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칭짱철로는 “개별민족의 소멸과 중화민족으로의 동화‘라는 정책적 목표를 한족유입과 중국화를 통하여 제도적 틀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했다. 이를 통해 중국이 강조한 ’중화민족‘이란 “중국내 각 민족”을 지칭하는 것 일뿐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는 민족학상의 개념이 아니며 한족을 지칭했던 과거의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크게 변화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그렇지만 티베트인들도 이러한 중국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으며 티베트 망명정부 성향의 인도 언론에서도 철도 건설을 중국화의 수단으로 인식하여 매우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경제발전의 혜택이 소수의 한족들에게 돌아가게 되면서 티베트인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분리주의의 성격이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한족의 이주를 촉진한 것은 티베트인의 전통과 문화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불만이 고조되게 하였으며, 이는 티베트의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예컨대 이러한 불안정이 치솟으면서 발생한 다.
기후위기 극복과 자본주의는 결합될 수 있는가?: 그린뉴딜 정책과 문명의 전환을 중심으로한국은 경제성장과 개발 과정에서 막대한 자연환경을 훼손하였다. 지난 38년 동안 매년 사라지는 산림 면적은 약 65㎢이며, 이것은 9년마다 서울면적의 숲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또한 육류 소비가 증가하면서 동물 사육 면적도 늘어났는데, 1980년 77㎢에서 2018년에는 584㎢에 달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국가 중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나라로 꼽히기도 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온실가스 배출량은 증가하고 있다.하지만 문명의 발전은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초래한다. 한국의 올해 1월 평균 기온은 2.8도로 평년보다 3.8도나 높았다. 제주도는 올해 1월에 역대 최고인 23.6도를 기록한 날도 있었다. 보통3~4월에 피는 제주도의 유채꽃은 올해 1월 만발했다. 굳이 과학적인 실험 결과가 없더라도 평범한 시민들이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한국의 기후변화 대응정책은 주로 이명박 정부 시절 제정한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에 근거하고 있다. 이 법은 그 이름에 드러나듯이 기후변화 대응보다도 녹색성장이 주 목표이다. 즉,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정책이 환경적 가치를 추구한 정책은 아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와는 별개로 ’저탄소 녹색성장정책‘이 환경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부재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즉, 녹색성장은 환경가치보다는 국가의 경제성장에 더 치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10년이 지난 2020년, 대한민국은 현재 10년 전과 비교해 훨씬 극심해진 기후위기 앞에 서있다. 현 정부의 핵심정책인 혁신적 표용국가 모델의 적극적인 달성을 위해 예방적?미래지향적 뉴딜 사업의 일환으로 그린뉴딜 정책이 추진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2009년 녹색성장 정책의 주요 사업이었던 4대강 사업이 토목건설사업 중심이었다는 점, 재생에너지보다 원자력 발전사업 중심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을 볼 때 이는 환경을 고려한 정된 배경은 무엇일까? 최근 툰베리의 ‘학교파업’과 같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 글에서는 ‘IPCC 1.5도 특별보고서’와 ‘코로나 19사태’를 두 가지 계기로 꼽고자 한다.IPCC란 Intergovermental Panal on Climate chage의 약자로, 1988년 유엔 산하에 설립되어 1990년 이래 5-6년에 한 번씩 기후변화 보고서를 발표해왔다. 2007년에 제 4차, 2014년에 5차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IPCC는 “지구 온난화가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상황이며, 그 원인은 “화석 연료 사용 때문일 가능성이 90~95% 이상으로 아주 높다”라고 밝혔다.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화석연료를 사용할 경우 온실 기체배출은 2040-2050년 사이 지구온도를 지금보다 1.5-2.5도 상승시킬 것임을 밝혔다.IPCC 4·5차 보고서의 국제 시민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이에 전 세계의 196개국은 국제 시민사회의 압력으로 2020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새로운 ‘파리기후협정’을 2015년 12월에 채택하게 된다. 파리기후협정은 선진국에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과하는 대신에 모든 참여 국가가 자발적 감축목표(NDC)를 제출하도록 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지구 평균온도 상승목표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 각 국가들은 인류 생존을 위한 목표 온도를 2도로 합의하였다.하지만 2018년 10월에는 인천선언에서 IPCC는 특별보고서를 통해 목표 온도를 더욱 낮추게 되었다. IPCC는 1.5℃ 이하로 온난화를 억제할 것을 요청하고, 2030년까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0년 대비 45% 줄여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했다. 그때까지 국제적 합의였던 2도 상승 목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티핑 포인트가 1.5도 상승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파리기후협정과 IPCC ‘1.5도 특별보고서’는 과학자 뿐 아니라 대중적 여론수준에서 기후위기를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만드는 재료를 제공했다. ‘1.5도나왔고, 3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첫 발생 이후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코로나 재난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이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과학자들이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는 신종 감염병의 원인으로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를 지목한 것이다.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로 퍼지기 1년 전, 이미 수많은 발표를 통해 기후변화가 병충해와 질병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충, 쥐 등이 더욱 번성하여 각 종균이 증식되면서 새로운 질병이 창궐할 가능성까지 제시한 것이다. 알다시피 코로나 19은 그 숙주인 야생동물이나 가축들과 인간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나타나는 질병인 인수공통감염으로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인수공통감염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바로 인간에 의한 생태계의 교란과 기후변화이다. 이에 따라 세계보건기구는 기후변화로 인해 코로나 19와 같은 예측 불가능한 감염병 계속해서 발생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요컨대 전 인류는 코로나 19사태로 인하여 기후변화를 막지 못한다면 앞으로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질병의 출현이 계속될 것임을 알게 된 것이며 이는 기후위기를 막아야 할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배경이 되었다.2. 그린뉴딜 - 기후위기 극복과 자본주의의 결합지난 10여 년간 기후 위기는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특히 작년, 수개월 동안 호주를 불태운 거대한 산불과 카리브해 섬나라인 바하마의 60퍼센트를 침수시킨 초강력 허리케인, 지난해 프랑스에서 1500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폭염으로 죽어간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기후위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루빨리 기후 위기를 멈춰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기후 문제를 둘러싼 최근 동향은 마치 거대한 변혁 과정처럼 보인다. 특히 여러 국가에서 탈탄소 전환을 위한 초유의 정책 실험이 제안되고 있는데, 그 중 ‘그린뉴딜(Green New Deal)’이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급부상하고 있다.그린뉴딜은 다소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기후위기로의 전화이래로 ‘탄소 중립’이란 온난화를 유발하는 탄소 배출량을 신재생에너지 발전 등 탄소 감축 및 흡수 활동을 통해 상쇄해 배출 총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현재의 1990년 대비 40%에서 최소 50%로 상향 조정하고 2050년에는 제로를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요컨대 지금 세계의 핵심 아젠다는 단연 ‘그린뉴딜’임에 틀림없다. 그린뉴딜에 대한 세계적 관심과 지지가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의 정의당도 그린뉴딜 지지 대열에 동참했다. 11월 8일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저탄소,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한다는 그린 뉴딜 정책을 정의당의 경제 정책으로 제시했다. 녹색당은 정의당보다 좀 더 급진적인 대안을 밝혔다. 녹색당은 기후위기 시대를 돌파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GDP와 경제성장률, 1인당 국민총소득의 공허한 지표와 결별”하고 “온실가스 감축과 불평등 타파를 국가운영의 최우선 지표”로 삼겠다고 발표한다. 녹색당이 제시하는 구체적 대안으로 2030년까지 핵발전소 가동 중지 및 신속한 탈 석탄 시나리오 구축, 기후위기 시대에 대응하는 산업 전환 시나리오 구축 등이 있다.급기야 정부도 ‘뉴딜’을 거론했다. 지난 5월 7일 부처합동으로 마련된 ‘한국판 뉴딜’이라는 새로운 정책 방향이 발표됐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감염병 충격으로 경제위기와 경제·사회 구조 변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상황에서, 위기를 혁신의 기회로 활용하는 특단의 대책으로 뉴딜을 선택한 것이다. 비록 온실가스 배출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나, 최근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발적 협력, 정부에의 신뢰, 생활양식의 변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확산 등 그린뉴딜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국토 측면에서 그린뉴딜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그린뉴딜 이후 새로운 탄소제로 시대의 공간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요컨대 그린뉴딜을 통한 탄소제로 녹색경제로의 전환은 기후변화 영향으로 인한 다양한 전염병의 발생 가능성을 저감적으로 들린다.요컨대 “녹색”이 “성장”을 위한 가면으로 사용되는 한, 그리고 재생에너지가 화폐자산을 늘려 줄 대안의 사업이라는 발상을 버리지 않는 한, 기후위기는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그린뉴딜 역시 기후위기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닥친 기후 위기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3. 기후위기의 해결안 - ‘의식의 전환’과 ‘문명의 전환’사실 기후위기 문제의 해결안은 너무나 단순하며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 소비, 특히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함께 기후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시도는 에너지의 사용 감소가 아닌 대체 에너지 사업으로 이어졌다. 즉 화석연료가 아니면 기후위기가 극복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예컨대 대체 에너지는 원자력 혹은 태양광, 풍력과 같은 신재생에너지였다.하지만 이러한 대체 에너지가 기후위기를 해결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원자력 에너지는 배수로 수중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또한 태양광을 모으기 위한 부품, 즉 태양광 집열판은 탄소발자국을 남기며 생산되었다. 청정에너지에 사용되는 용수는 엄청난 산성폐수를 생성하였으며 더 많은 면적의 땅을 요구하며 화석연료와 다른 방식으로 환경을 파괴시킨 것이다.화석연료의 사용이 환경을 파괴하고 기후위기를 초래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계속 진행되어온 기후위기는 화석연료의 사용감소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계 값을 이미 초과하였다. 따라서 기후위기의 문제는 ‘하던 대로’ 하거나 ‘조금 고쳐 쓰는’ 방식으로 극복할 수 없다. 요컨대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체제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 체제의 변화는 ‘문명의 발전’이 아닌, ‘문명의 전환’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문명의 전환은 개인적 측면에서는 물론, 사회적 측면에서 변화를 요구한다.먼저 개인적 측면에서는 사고방식, 생활습관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예컨대 사고방식의 변화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자각하는 것과
머리말한국사회가 근대 이후 제국주의의 각축장, 동서 냉전체계의 최전방 초소로 구세계질서에 심각하게 옥죄여온 바 있음을 상기한다면, 지난 10년간 국내외의 변화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새롭게 체계화할 것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사 최대의 소용돌이를 겪었으면서도 사상이 부재한 사회에서 거시적 관점으로 역사를 새롭게 체계화하는 것은 20세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학자에게 당연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그럼에도 역사가 강만길은 사회 내·외부로 혼란의 시기였던 1970년 후반, 시민과 후학들에게 한국역사학의 좌표를 보여준 바 있다. 그의 연구 성과는 군부 독재 하에서 이루어진 한국적 성찰의 성과들이었고 지금의 역사학계는 모두 이를 바탕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이 현대 역사학자들 가운데 강만길을 선택하여 그의 역사관과 연구 성과를 분석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강만길의 학문적 성과가 얼마나 큰 의의를 갖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학술지 「한국사연구」 일 것이다. 2009년 학술지 「한국사연구」에서는 주로 원로 학자의 연구사적 의의를 큰 대표 업적을 비평하는 글을 연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15명의 저서 16권이 다뤄졌는데, 그 중 한사람의 저서가 두 권 다루어진 예는 강만길이 유일하다.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과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이 바로 그것인데, 그의 학문이 각각의 시기가 요구하는 문제의식을 가장 선두에서 개척해왔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기도 하다. 본고가 대상 시대와 소재가 전혀 다른 두 연구 성과를 분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하지만 최근 일부에서는 그의 연구가 당위적이다, 관념적이다 라고 비판하는 경향도 적지 않다. 그 비판이 객관적이고 정당한 근거에 입각한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의 연구물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강만길의 역사관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선행하여야 그의 연구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강만길은 현대사학계의 다른 어떤 역사연구자들시대까지를 연구대상으로 포함했다는 점이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의 역사학 연구가 식민사학 극복문제에만 안주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강만길은 ‘역사가가 살고 있는 시대는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역사계의 연구경향이 8.15 이후사 연구를 진전시키지 못하게 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강만길은 이와 같은 경향은 식민치하에 살고 있던 국내학자들이 통치 권력으로부터 제재를 받을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 시대를 객관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던 경향이 분단이후에도 이어진 것이며 이는 자기합리화적 변명일 뿐 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따라서 강만길은 ‘과거 식민지시대식 역사 연구의 맥’을 끊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인식을 타파하는 것 뿐 만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자기시대를 객관적으로 다룰 만한 방법론적 성숙성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객관적인 조건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연구를 기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인식했으며 객관적인 상황이 역사가에게 위협을 가하더라도 그를 감수하고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관은 강만길의 연구를 한 시대의 한 사건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시대로 연구범위를 확대하게 만들었으며, 훗날 그가 상공업, 민족해방운동, 민족통일 전선운동, 통일문제까지 다루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한편 강만길은 1984년 조선후기에서 근현대사로 전공을 옮기게 되었는데, 근현대사를 가르치던 중 역사학은 반드시 현재성과 대중성을 함께 가져야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이러한 인식을 가지게 된 것에는 해방 이후 이승만의 문민독재정권과 그에 뒤이은 박정희 등의 군사독재정권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강만길은 그들이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평일 지향이라는 길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왔고 생각했고 한국 역사학계가 이를 외면함으로써 역사학의 현재성이 상실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강만길은 이러한 역사학의 현재성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다고 보았을까? 그는 역사학의 현재성 재고문제는 대중성과 연결될 때에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강만길는 “어떤 사상가나 학자가 역사발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강만길의 역사관은 1980년 이후 ‘민중’으로 개념화될 피지배대중을 역사 변화발전의 주체로 설정하는 역사연구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강만길은 기층대중의 역사적 성장을 한국사에서 체계적으로 밝히는 것과 함께, 한국사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 자본주의 맹아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강만길은 1966년 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시상인이 工匠을 고용, 제조장을 자영하는 방식으로 나아간 사실을 추출하였고 이를 통해 18세기 수공업자와 상인의 관계가 새롭게 변화되어 갔음을 논증하였다. 또한 1968년 에서는 서울 시상인, 송상, 부상의 도고상업자본이 생산부문에 침투된 양상을 모색하였다. 즉 자본주의 맹아의 관점에서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문제를 연구한 것이다.강만길은 1966년부터 조선후기 상업사를 정력적으로 연구하여 위와 같은 연구성과를 보였으며, 1977년 그 연구물의 최종 작이라 말할 수 있는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을 집필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은 조선후기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연구한 실증적 결과물이다. 강만길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를 도고상업 시대로 규정하고, 도고상업을 어용상이나 봉건상업이 아니라 전통적 상업형태가 근대적 상업형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상업형태로 규정하였다. 요컨대 강만길은 도고상업을 전통사회의 붕괴과정과 근대사회의 성립과정에서 전통사회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근대적 생산양식의 전개를 위한 전제조건을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고 본 것이다.강만길은 상업자본을 집적한 세력에 주목했는데, 그 이유는 근대사회 성립을 위한 전제조건을 특권상업, 매점상업을 통한 상업자본의 집적으로 본 데 있었다. 그는 이러한 과제를 담당한 세력의 상업 활동을 모색하여 중세상업의 해체와 근대상업의 전제조건 형성을 전망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강만길은 경강상인, 개성상인, 시전상인의 조선도고, 인삼재배와 가공업진출, 수공업자 지배와 자영생산장 설치 등 그들의 상업음 더 나아가 식민사학이 우리 역사에 덧씌운 정체후진성론이나 타율성론을 극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님을 강조하였다.필자는 자본주의 맹아 이론에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가 조선후기 상업사 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이후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진 상업사 연구의 대부분은 강만길의 연구시각을 부분으로 보완하거나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데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또한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회의가 그의 연구에 과도한 비판을 초래했다고 판단한다. 강만길 또한 “조선후기 경제상황을 밝히겠다는 것이 자본주의 맹아론과 연결된 것이다”라며 연구 동기를 언급했는데 이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가지고 있는 결함과 관계없이 강만길은 제1차적 목적으로 정체론의 극복을 염두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결론적으로 그의 연구에 몇 가지 결함이 있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는 조선상업사 연구자료가 부족했던 상황적 제약 속에서 이룬 ‘최선’의 결과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식민사학의 극복을 통해 한국사를 발전적으로 재구성하려 했던 문제의식이나 분단과 독재라는 현실 조건 속에서 당대 역사학의 과제를 실천적으로 논의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사학사적 의의를 지닌다는 것이다.Ⅲ. 분단극복 사론과 조선민국혁명당 연구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는 결코 적지 않은 학술적 논쟁이 진행됐다. 인문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어떤 논쟁이라 하더라도 현실과 무관한 논쟁은 없다. 인문 사회과학 논쟁들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을 만한 논쟁은 당연 ‘분단 체제 논쟁’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광복을 이루자마자 한반도는 분단됐다. 70여 년간 분단 상태가 한국사회 전반에 미쳐온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분단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광복 70년의 우리 역사와 사회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분단 체제 논쟁이 갖는 의미는 여길의 주장은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운동」 제 6장에 잘 나타있따. 그는 민혁당이 중심이 되어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과 조선혁명자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과 함께 구성한 좌파세력의 통일전선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통일전선관을 검토하는 것으로 그의 주장을 실증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식민지 반봉건사회적 성격 때문에 혁명으로서 민족해방의 역사적 단계가 사회주의 혁명 단계가 아니라 민주주의(부르주아-필자) 혁명단계라 주장하면서 통일전선의 계급적 범위를 노농계급을 위주로 하되 반일적 중소자산계급, 자본가, 지주에까지 확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중국지역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파세력 통일전선단계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이 같은 지역의 우파세력까지 전선을 확대해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강만길은 민혁당 및 그것이 중심이 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이론가들이 수립한 통일전선론을 통해 통일전선운동에서 계급전선적 성격보다 민족전선적 성격이 더 강하게 추구되었으며, 따라서 중국 관내(闇內) 지역에서의 통일전선운동에서는 좌익전선이라 해도 이데올로기적 계급적 고집성이 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었다.강만길은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전선이 “헤게모니를 전면에 내세운 계급 전선적 성격이었다기보다 그 전선 전체의 통일에 우선을” 둔 전선이었고, 이와 같은 전선이 분단시대의 통일민족국가 수립 운동에도 계승되었다고 보았다. 이는 광복 전후 민혁당의 움직임을 검토하는 것에서 확인 할 수 있다.1935년 중국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임시정부 고수파를 제외한 민족운동전선 좌우파를에 의해 통일전선 정당으로 조직된 조선민족혁명당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족전선연맹, 임시정부통일전선 내각 등을 성립시키면서 그 창당 목적으로 통일전선을 계속 추진시켜왔으나, 미소 양군이 분할점령한 조국에 돌아 온 후에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체로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운동계와 김원봉 중심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계와 장건상 민족분단이 현실문제로 나타나게 되었을 때.
세계와 시민 기말과제시민의 역사와 세계시민의 시대적 과제대한민국 헌법, 제 1조 총강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공화국은 왕이 없는 정치체제, 즉 반군주제를 의미한다. 즉, 주종 예속관계가 없는 자유인들의 정치체제를 의미한다. 요컨대 민주공화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주종 예속관계가 없는 자유인’이며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주권을 행사하는 ‘시민’임에 틀림없다.역사적으로 시민은 한 지역, 혹은 한 국가에 국한되어 권리를 행사해 왔다. 하지만 세계화로 인해 한 국가의 거주자를 넘어 지구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역할과 함께 21세기의 우리는 단순한 ‘시민’이 아닌 ‘세계시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시민은 역사적으로 등장한 존재이므로 시민의 권리는 시대적 상황과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졌다. 따라서 세계시민으로서 우리는 세계시민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책임을 지닌다. 이러한 ‘세계시민의 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시민이 어떤 의식의 성장을 겪었으며 어떤 권리의 문제와 논쟁을 다뤄왔는지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문제가 오늘 날 세계시민이 어떤 의식을 가져야 하는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공화정과 시민의 탄생을 거쳐 근대적 시민권이 어떻게 확장되어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탄생한 사회계약설과 기본권이 어떤 논란과 함께 발달해왔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논란이 오늘 날에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어떠한 현재적 의미가 지니는지 조명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세계화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시민은 어떠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1. 공화정과 시민의 유래‘Polis’는 ‘시민(Polites)’이 정치적 주체로서 실질적으로 통치·참여·생산에 참여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오늘날 시민정치의 원형은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기본적으로 선거가 아닌 추첨을 통해 선별되었다. 평의회는 50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1년이다. 마찬가지로 행정관 역시 임기는 1년이었는데 연임이 금지되었다. 다만 행정관은 군사 및 재정 부문에서 연임이 가능하였으며 어떤 능력을 가지는지에 따라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다. 전문적인 부문은 특별한 능력을 요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방식을 채택한 것이며 그 외에는 추첨을 통해서 뽑았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추첨은 차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누가 뽑혀도 그 일에 소임을 다할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어 있으며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협조하며 공동체를 이끌어 갈 것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자면 추첨이 오히려 ‘민주주의 꽃’으로 불리는 선거보다 내부 동질성, 평등성, 협조, 공동체 의식을 더 잘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추첨제를 통해 ‘민주주의 꽃’으로 불리던 선거가 과연 민주주의 시행의 올바른 표본인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물론 고대 그리스의 추첨은 고대 그리스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었다. 폴리스 체제에는 아테네인 부모로부터 태어나 남성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시대적 한계가 존재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시민 속에서 이루어진 민주주의 전형 안에서는 추첨이라는 제도를 통해 차별 없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러한 측면은 고대 로마의 시민권의 실현과 비교해본다면 더욱 두드러진다.앞에서 언급하였듯, 고대 로마에서는 그리스 도시국가와 구별되는 시민권의 개념이 등장한다. 오늘날 시민을 의미하는 ‘citizen’이라는 단어 역시 로마의 공화정 ‘civis’에서 유래된 것이다. 로마는 영토를 발전시키면서 제국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데, 이때 영토를 확장하며 시민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법이 생기고 시민권이 확장된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 역시 남성자유인들만이 정치적·법적 지위를 누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와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두 국가의 시민권은 명백히 다른 행보를 보인다.화정은 점차 그 모습을 감추고, 군주정이 정치체제로 자리 잡게 된다.하지만 이러한 군주정의 공고화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봉건제 질서의 확립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영주와 농노의 권력, 교왕과 군주의 왕권 대립이라는 갈등 속에서 봉건제 질서를 유지해 나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은 십자군 원정에 나서 이슬람 정복을 통해 권력을 다잡고자 하였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200년간 총 8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차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의 전적을 남겼다. 종교 전쟁의 실패는 교황권의 패배를 수반하였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봉건제에 균열이 온다.이러한 균열 틈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는데 바로 ‘상인’이다. 상인은 십자군 원정 중 물품 공급과 동방무역의 발생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유럽에서 이슬람 지역을 정복하던 와중 이슬람 문물이 유입됨과 함께 인동 중국까지에 이르는 동방무역이 성행한다.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은 오늘 날 부르주아 계층으로 불리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한다.상인의 등장은 근대적 의미의 시민 탄생을 예고하였다. 경제적 기반을 탄탄히 한 상인 세력은 길드를 형성하여 도시 자치권을 요구한다. 일정한 지원을 통해 권력을 보장하며 경제적 지원을 통해 군주와 영주의 권력을 보장하는 한편 자신들은 권리와 권익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상인세력은 신분상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자치 도시에서 사법권, 화폐발행권, 조세징수권 등등 독자적 사법권을 행사하며 시민이 가지는 독자적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요컨대 전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십자군 전쟁을 통해 고대의 노예제를 특징으로 한 봉건제 사회에서 상인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근대적 의미의 시민은 우연을 계기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아이러니’ 가운데 상인 세력은 근대적 시민권의 단초를 마련하였다.상인들은 경제적 지원으로 영주를 제압함으로써 자치권을 확대함으로써 시민의 권리가 확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동시에 군주의 권리 또한 강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상인들의 후원으로 신대륙 발왕의 권한은 신이 내려준 것이라는 신앙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상인들이 마련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과학적 사실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로 인해 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주장 기도교적 세계관 부정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이로 인해 종교와 과학, 신앙과 학문은 분리되기 시작한다.종교적 세계관에 의해 이루어졌던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설명은 과학 혁명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철저하게 종교를 바탕으로 설명되었던 인간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물음은 인간의 본성 나아가 사회의 근원 그 속에서 시민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게 만들었다.이러한 시민 의식의 성장은 사회적 이론을 형성하였으며 시민권을 정당화하려는 학설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계약설과 자연권 사상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상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설명한다.개인은 자연적으로 가지게 된 천부의 권리가 있다. 태어날 때 가지는 권리를 ‘천부의 권리’라고 하며 자연적으로 주어진 권리를 자연권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연권 사상과 천부의 권리는 생명, 자유, 재산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자연권은 로크를 중심으로 제창되었다. 사회계약설은 이러한 천부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인간과 사회관계에 관한 설명이며 곧 근대적 의미의 시민권 확립의 계기가 되었다.사회계약설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인간의 사회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그려낸 사상이다. 사회라는 것은 개인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공동체이며 실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들 관계 속, 개인 사이의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사회이다. 즉, 서로의 권력을 상호 인정하는 개인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모둠판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 전체를 이끌어가기 위한 권한을 또 하나의 계약을 통해 국가에 위임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 즉 사회는 개인의 천부의사회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인간의 가치를 내세울 수 있는 가를 고민하였고 그에 대한 답이 바로 자연권과 사회계약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은 자연권, 즉 천부의 권리를 지니고 태어났으며 이러한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신권도, 군주정의 절대 권력도 아닌 계약에 의해 맺어진 평등한 사회였던 것이다.3. 기본권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천부의 권리인 생명, 자유, 재산이 어떻게 발전했는가’는 ‘시민권은 오늘 날까지 어떻게 확대되어 갔는가’와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천부의 권리가 오늘 날까지 어떻게 확대되었는지. 국가의 가장 기본적 책무가 천부의 권리를 보전하는 것이라면 오늘 날 국가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민권의 측면에서 우리는 천부의 권리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우선 생명권은 안전의 문제, 나아가 사회안전망까지 그 규모를 확대하여 사회전체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기본권, 참정권의 의미가 강했던 자유권은 사회적 관계로 그 규모를 확대하였다. 개인의 측면에서는 내 의지에 따라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며 사회적으로는 표현, 사상, 학문, 종교에서 자율적 의지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판단하고 행위 할 기본 권리가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고 이에 대해 큰 논란도 없었다. 하지만 ‘재산’과 관련한 소유권에 관련해서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은 논란을 빚고 있다. 마셜 (TH Marshall)은 에서 이러한 소유권의 문제를 언급하였는데, 소유권은 초기에는 재산권으로, 그리고 노동3권으로 나아가 사회권으로 확장되었다. 사회권은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아갈 권리, 구체적으로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며 자유권과 더불어 핵심적인 기본권이다. 자유권과 사회권은 시민 권리의 핵심으로 여겨지고 있다.이러한 사회권은 소유권의 논쟁으로 논의되어 왔다. 개인적인 사적 소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