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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관과 연행사
    조선 시대의 역관(譯官)과 연행사(燕行使)이@@강@@- 목차 -머리말1. 역관(譯官)1) 역관 개요2) 역관이 본 시험3) 필수 언어4) 팔포무역(八包貿易)5) 대표적인 역관6) 역관 이야기2. 연행사(燕行使)1) 연행사 개요2) 연행사의 종류3) 연행사의 구성4) 연행사의 경로5) 대표적인 연행사6) 황재(黃梓)의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맺음말※ 참고문헌머리말명대의 조천사(朝天使)에 비해서 조선이 청에게 당한 수모로 인해 청대의 연행사(燕行使)는 다녀온다고 해서 가문의 자랑이 될 수는 없었으나 연행사는 통신사(通信使)와 함께 조선에게 있어서 얼마 되지 않는 해외에서 해외의 문물과 문화를 접할 중요한 창구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에 연행사와 통신사가 외국을 다녀오는데 걸리는 기간은 6개월에서 길게는 12개월이 걸렸다. 이처럼 교통이 어려운 상황에서 역관(譯官)들은 변화하는 세계를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어려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때문에 조선 역사의 많은 신문물이 역관들을 통해 전해질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역관들은 자신들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문물과 사상을 들여오는 것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급변하는 조선 후기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을 뜰 수 있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 역관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선발되었고, 어떠한 언어들을 배우면서 어떤 시험을 봤는지 알아보고 대표적인 역관들은 어떤 이들이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또한, 정례사행인 절행(節行)과 임시사행인 별행(別行)으로 구분되는 연행사의 종류,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 등의 삼사가 주축이 된 연행사의 구성 인원과 규모, 평양과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지나 북경까지에 해당하는 연행사의 경로, 그리고 대표적인 연행사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행사들이 남긴 기록물인 연행록 가운데서 황재(黃梓)가 쓴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과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황재의 연행록은하는 훈도와 별차가 동료 역관이었기 때문에 쉽게 연결시켜줄 수 있어서 중계무역을 통해서도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별포(別包)라 해서 내의원이나 상의원, 서울과 지방의 각 아문과 군문의 무역을 대행하기 위한 자금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포외별송(包外別送)이라고도 하며, 원래는 각 군문과 아문이 은화를 빌려주는 무역 방식이었으나, 역관에게 무역의 권리를 빌려주는 방편으로 활용되기도 해서 역관들은 이를 칭탁하는 수법으로 규정된 8포를 초과해서 무역을 했다. 하지만 별포무역을 통해 자금을 많이 가져갈 수 있었지만 자금력에서는 사상인들에게 밀렸고, 이에 1797년(정조 21)에 사행의 팔포에 홍삼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고 『삼포절목(蔘包節目)』을 반포했다. 여기서 삼포는 사행원 역관이 채워갈 수 있는 홍삼을 의미하며 이 홍삼을 포삼이라 구별했고, 포삼 1근에 정해진 세액을 징수하는게 포삼제였다.그러나 17세기 말부터 서울상인, 개성상인, 의주상인 등 사상인(私商人)들이 여마제(餘馬制)와 연복제(延卜制) 그리고 사행 역관에 부탁하거나 지방의 관아 무역을 대행하면서 국경에서 무역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18세기 이후 사상인들이 역관과 경쟁하며 서서히 대청무역의 주도권을 잡아갔다. 이에 역관들은 사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상인들의 대청무역을 막으려했으나 쉽지 않았고, 사상인들은 밀무역을 통해 더 번창해갔으며 일부는 지방관원들의 비호를 받으며 비합법적인 국경무역을 행하기도 했다.5) 대표적인 역관대표적인 역관 가문은 허생전(許生傳)의 변부자의 모티브가 된 변계영(卞繼永), 변응성(卞應星) 등을 배출한 밀양 변씨, 청나라와의 국경선을 확정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운 것에 공이 크고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저술한 김지남(金指南)과 김경문(金慶門) 부자를 배출한 우봉 김씨, 역관 장현(張炫)과 장현의 동생이자 희빈 장씨의 아버지인 장형(張烱) 등을 배출한 인동 장씨 등이 있다.(1) 설장수(?長壽) - 1341(충혜왕 복위 2년) ~ 1399(정종 이 여인을 보고 연유를 묻자 여자가 말했다. “저는 본래 남쪽 절강이 고향입니다. 서울(경사(京師))에서 벼슬을 하던 부모님이 불행히도 모두 돌아가셨는데, 객사에 모셔 둔 부모님의 영구를 고향으로 이장할 돈이 없어 부득이 제 몸을 팔러 나온 것입니다.”말을 마치고는 목메어 울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순언이 불쌍히 여겨 장사 지낼 비용을 물으니 300금이면 된다고 하므로 전대를 털어주고 끝내 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순언의 성명을 묻는 여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여인이”대인께서 성명을 말씀해주지 않는다면 첩 또한 이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홍 역관이요”라고 알려주고 나오자 일행들이 그의 오활함에 비웃었다. 훗날 이 여인은 예부시랑 석성의 계실이 되었고, 석성은 순언의 의로움을 높이 사서 조선 사신을 볼때마다 홍 역관이 왔는지 꼭 물었다고 한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선조 조 고사본말홍순언은 환국한 뒤 공금횡령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종계변무 때문에 전후 10여명의 사신을 보냈으나 아무도 정정 약속을 받아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임금(선조)이 노하여 교지를 내렸다. “이것은 역관의 죄로다. 이번에 가서 또 시정 약속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기필코 수석 통역관의 목을 베리라.” 그러자 어떤 역관도 선뜻 가겠다고 나서질 못했다. 이에 역관들이 모여 “홍순언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이 없으니, 우리가 빚진 돈을 갚아주고 그를 보내는 게 어떻겠소? 만일 그 일을 허락을 받고 돌아온다면 그에게는 행복이 보장될 것이고, 죽는다 하더라도 한이 될 일은 없을 것이오”라고 의견을 취합하여 함께 가서 그 뜻을 알리니 순언이 당장에 허락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던 홍순언은 선조 17년(1584)에 황정욱을 수행하여 북경에 이르렀는데, 조양문 밖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때 한 기병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역관이 누구시냐?”고 묻고는 “예부의 석시랑이 공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파견된 것은 역시 삼절겸연공사인데 대부분 동지사로 기록되어 있다. 동지사는 매년 음력 10월 말이나 11월 초순에 출발해 그해 12월 안에 북경에 도착해서 40~60일 동안 머무른 뒤 2월 중에 출발해 3월 말이나 4월 초순에 귀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연행이 결정되고 날짜가 정해지면 사신 일행은 궁궐에 들어가 국왕을 배알한 다음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던 반송정(盤松亭)에서 전별식을 가졌다. 부연사신들의 행차는 조선에서부터 매우 떠들썩하게 진행되었다. 중도에 전송 나온 지방관들의 술자리가 줄을 이었고, 색향(色鄕) 평양에서는 기생(妓生)과 동침하는 별부(別付)까지 행해졌다.3) 연행사의 구성당시 연행에 소용되는 경비는 여러 관청에서 분담했는데, 호조(戶曹)는 의복비를, 선혜청(宣惠廳)에서는 노자(路資)를 지급했고, 사행로 주변의 관아에서도 일부 보탰다. 사행 경비 중에 청나라 지방관이나 예부 관리들에게 안겨 줄 인정가물(人情價物)이 가장 많았다. 연행 초기에는 부채, 종이, 포목 등과 같은 물품을 주었지만 그들이 다량의 은자(銀子)를 요구하는 바람에 부담은 가중되었다. 그 때문에 조정에서는 비상수단으로 역관들에게 무역 특권을 허용해 사행 경비를 자체 조달하게 했다. 연행단의 공식 인원은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삼사를 필두로 종사관(從事官)에 역관(譯官) 열아홉 명, 의원 한 명, 제술관(製述官) 혹은 사자관(寫字官) 한 명, 화원畵員 한 명, 군관 일곱 명, 만상군관(灣上軍官) 두 명, 우어별차(偶語別差 )한 명 등 총 35명이었다. 그 외에도 사신들의 말을 몰고 가는 견마잡이를 비롯해 짐말을 모는 마부와 하인 등을 포함하면 300명에서 500명 정도의 인원이 사행에 참여했다. 주요 교통수단이던 말은 중국에 전달할 물품과 소요 물품을 실어야 했으므로 200여 필 이상 동원되었다. 정사는 사행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는데 관직과 품계에 따라 사행의 등급이 결정되었다. 부사는 정사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서장관은 사신단 일행을 감독, 관리하·반정균(潘庭筠)·육비(陸飛) 등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북경 방문은 『연기(燕記)』 속에 상세히 남아 있다. 그의 연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다.특히, 이 기록 가운데 『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인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과학사상을 담은 『의산문답(醫山問答)』 역시 북경 여행을 배경으로 쓰였다.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숨어 사는 실옹(實翁)과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 사이에 대화체로 쓰인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전설·생명관·우주무한론으로 전개되는 홍대용의 자연사상은 상대주의의 입장으로 일관된 것으로, 이와 같은 상대주의는 그의 사회사상에 연장, 발전된다.첫째, 그는 중국과 조선 또는 서양까지를 상대화하여 어느 쪽이 화(華)이고, 어느 쪽이 이(夷)일 수 없다고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한다. 둘째,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한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과거의 인본적(人本的)인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것으로 상대화하였다. 셋째, 그는 당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그의 과학사상과 그에 바탕을 둔 사회사상 등은 상당한 독창성을 보이고 있지만, 서양 과학과 도교적인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서양 과학의 근본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관측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서를 썼으며, 여러 가지 천문다.
    인문/어학| 2021.07.26| 24페이지| 3,000원| 조회(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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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외 반려동물 관련 산업 분석 평가A좋아요
    국내·외 반려동물 관련 산업 분석1. 국내 반려동물산업(1) 반려동물 사료 및 간식2018년 통계청의 인구총조사에 의하면 반려견 양육 가구는 약 454만 가구, 반려묘 양육 가구는 약 112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4분의 1이 넘는 수준으로 네 집 가운데 한 집은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시대입니다. 반려동물을 양육하는 가구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국내 반려동물의 사료 시장의 증가를 의미하며, 2015년에 4,800억 규모였던 반려견 사료 시장은 2018년 5,500억 규모로 성장했고, 반려묘 사료 시장은 2015년 1,200억 규모에서 2018년 3,000억 규모까지 3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성장했습니다. 그 결과 2020년 국내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 규모는 약 1조 규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또한, 반려동물 양육 가구가 증가하면서 특정 사료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거나 사료의 영양을 꼼꼼히 따지는 사료에 각별히 신경 쓰는 소비자들도 덩달아 증가했으며, 동물병원 수의사와의 상의를 통해 간식 하나를 고를 때에도 건강 보조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내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 가능성에 대해 글로벌 기업 중 세계 사료 시장 점유율 1위에 달하는 로얄캐닌은 2017년 전라북도 김제에 960억 규모의 투자를 통해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선점을 위한 생산기지 확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1968년 프랑스의 수의사 장 카타리가 자신이 키우던 셰퍼드 품종의 피부질환이 사료를 바꾸고 나서 치료된 경험을 바탕으로 설립한 로얄캐닌은 오늘날 세계의 160개국에 진출했으며, 반려동물의 품종, 나이, 라이프스타일, 건강 상태 등에 따른 약 200종의 사료 제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글로벌 기업의 수입 사료가 대다수를 차지한 국내 사료 시장에서 하림 그룹의 반려동물 식품업체 하림펫푸드 같은 국내 업체도 출범 4년만인 2021년에 한 해 매출 약 198억 규모를 달성하는 등 국내 사료 시장에서 큰 반려동물의 진료비 표준화는 시장 논리에 맞지 않으며, 일본처럼 반려동물 보험 보험사와 동물병원이 제휴해 보험상품을 개발하는 방안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응해 반려동물의 질병 항목에 대한 표준화 작업 시행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3) 반려동물 장묘국내의 반려동물 장묘와 관련된 합법 장묘업체는 ‘동물보호 관리시스템’에서 확인 가능한 총합 55곳이 존재하며, 지역별로 강원도 2곳, 경기도 21곳, 경상남도 8곳, 경상북도 5곳, 전라북도 2곳, 충청남도 4곳, 충청북도 5곳, 광주 1곳, 대구 1곳, 부산 2곳, 세종 1곳, 울산 1곳, 인천 2곳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단일 지역별로 경기도 광주시가 6곳으로 제일 많았으며, 그 다음으로는 경기도 김포시가 5곳, 경상남도 김해시가 4곳으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해당 장묘업체들의 장묘 가능한 반려동물 종류와 크기까지는 알 수 없지만 지역별 분포를 봤을 때 20호 이상의 인구 밀집 지역 혹은 다수가 집합하는 시설 및 장소로부터 300m 이상의 거리에서 영업 가능한 특성상 과도한 인구 밀집으로 장묘업체의 영업이 불가능한 서울, 도서 지역인 제주도, 광역시 중 유일하게 약 150만의 인구에도 불구하고 장묘업체가 없는 대전, 전라북도의 2곳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전라남도처럼 아예 장묘업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타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지역도 존재했습니다.또한 해당 장묘업체들이 모두 장례, 화장, 봉안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구 같은 경우 유일하게 존재하는 장묘업체가 장례만 담당하고, 인천의 경우 존재하는 두 장묘업체가 장례와 봉안만 담당해 두 지역에서 반려동물의 화장을 위해서는 타 지역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된 서울을 제외하고 1곳의 장묘업체도 존재하지 않는 지역들과 함께 이러한 지역들에 추가적인 장묘업체, 그리고 기존 장묘업체의 서비스 확대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됩니다.다만 ‘동물보호 관리시스템’에 등록된 합법 장묘업체와 달리 허가 냄새를 잡는 요술배변패드 같은 상품들이 거론되었습니다. GS샵은 급성장하는 반려동물 용품 시장에서 차별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밝혔으며, 브랜드와 단독 콜라보한 상품 및 프리미엄 기획 상품 등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것이며, 반려동물의 사료와 간식부터 시작해서 위생과 이용용품, 움직이는 CCTV 로봇과 같은 동물 가전제품, 펫유모차 등 다양한 상품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2. 국외 반려동물산업(1) 반려동물 사료 및 간식국내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2019년 기준 전 세계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은 약 101조 규모로 추산되며,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은 그중에서도 2018년에서 2023년까지 약 15%의 성장률이 예상 될 정도로 반려동물 사료 시장의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북미와 유럽 지역에서는 건식 사료가 보편화되었으며, 북미에서는 약 90%가, 서유럽에선 약 65%가 반려동물의 사료를 건식 사료로 주식화했습니다. 반면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건식 사료 사용률은 약 20%으로 이는 여전히 많은 반려동물이 사람이 먹다 남은 잔반이나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시장 성장률이 높은 것은 점차 반려동물의 사료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건식 사료의 구매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외 반려동물 사료 및 간식과 관련해서는 프랑스, 호주, 쿠웨이트 등 3개국을 중심으로 조사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반려동물 사료 시장 규모는 2019년 기준 약 120만 톤 규모로 그중에서 약 33만 톤이 개와 고양이용 습식사료, 약 86만 톤은 건식 사료에 해당되었습니다. 건, 습식 사료의 재료는 약 99%가 유럽 연합 산으로 프랑스 산은 그중 약 69%를 차지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약 180만 톤 규모의 반려동물 식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웰빙 트렌드가 반영된 프리미엄화, 신체 조건에 따른품점, 호텔 서비스 및 애견 커피숍 등이 증가하면서 쿠웨이트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쿠웨이트에서는 개나 고양이 이외에도 새와 물고기 같은 다양한 반려동물의 수요가 함께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개와 고양이의 사료만이 아니라 다른 다양한 반려동물들과 관련된 사료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으며, 현재 다양한 외국 브랜드들이 진출한 상황입니다. 그중에서 현재 가장 쿠웨이트에서 시장 점유율이 높은 것은 미국의 브랜드들입니다.(2) 반려동물 보험2017년을 기준으로 국내 반려동물 보험을 다루는 보험회사가 3개에 불과하고, 가입률이 2021년 기준 약 1.6%인 것과 비교해 해외의 경우 2019년 기준을 기준으로 스웨덴이 약 40%으로 보험 가입률이 가장 높고, 영국이 약 25%, 노르웨이가 약 14%, 일본이 약 6.3%에 달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정보가 최신인 것을 감안해도 해외의 반려동물 가입률이 월등히 높지만 여러 해외 국가들에서도 모든 반려동물들이 가입하는 의무보험은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의 여러 국가들도 한국과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사뭇 달라보였습니다.2017년을 기준으로 호주의 보험사 MDiBANK는 폭넓은 보장 범위를 자랑하는 동물 보험을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보장수준에 차등을 주어 총 3가지 형태의 보장 범위로 고객의 보장 니즈와 보험료를 고려해 가입이 가능하도록 신경쓰기도 했습니다. 또한, MDiBANK는 의료비가 약 1천 호주 달러를 초과하는 반려견의 이무질 섭취, 화상과 골절, 관절형성장애, 열사병, 당뇨를 제외한 백내장, 추간판질환, 위 확장과 염전, 비강협착 등 고비용 항목들을 집중적으로 보장하는 상품을 호주 동물 업계에서 최초로 판매하기도 했습니다.미국 보험사 Allstate의 동물 보험 역시 국내의 동물 보험과 비교하면 넓은 보장 범위를 자랑했습니다. 상해와 질병 치료비를 보장하는 기본적인 것 외에도 항암치료를 포함한 암, 수술, 진단, 선천성질환, 대체는 것을 택한 주인 약 700명도 함께 매장되어 있습니다.일본의 경우 미국과 함께 반려동물에 대한 장묘 문화가 비교적 보편화된 국가로 2000년대 초반부터 반려동물 장묘업체가 급증하기 시작해 일본의 일부 행정구역에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반려동물과의 동반 장묘가 허용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고유한 종교관과 위생 관념상 사람과 동물의 유골을 함께 매장할 경우 묘지의 관리를 담당하는 지역의 사찰 혹은 지역자치단체의 승인을 필수로 하며, 그 결과 2017년을 기준으로 도쿄, 오사카, 홋카이도, 후쿠오카 등 10개의 도, 현에서 동물과 같은 묘지를 쓰는 것에 불쾌함을 느낄 다른 이용자들을 배려해 묘지의 일부 구역을 ‘반려동물 가능 구역’으로 지정해 반려동물과 주인이 함께 묻힐 묘지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기존의 방법과 다르게 반려동물과 주인의 유골을 매장한 다음 그 위에 나무를 심는 수목장도 묘비를 사용한 매장보다 가격 면에서 약 5분의 1 정도로 저렴하고, 수목장은 혼인 혹은 혈연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정한 사람과 함께 매장되기 손쉬워 큰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일부 장묘업체는 직접 반려동물 장묘업체나 묘지로 가지 않아도 2톤 트럭을 개조한 이동식 화장차가 고객의 자택에 방문해 사망한 반려동물의 유해에 대한 화장 및 장례를 진행하기도 합니다.중국의 경우 미국과 일본에 비해 늦기는 하지만 반려동물에 대한 장묘 문화가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며 2015년 기준 중국의 반려동물 규모는 1억 마리이며, 중국인 13명 중 한 명은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는 꼴이라고 합니다. 반려동물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반려동물 장묘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고, 베이징 근교에 위치한 ‘펫 헤이븐’ 같은 동물묘지 같은 경우 현재 약 4천 구 이상의 반려동물이 묻혀 있습니다. 이러한 묘지 사용을 위해서는 최소 30만원에서 최대 100만원 이상의 비용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반려동물 주인들은 합법적으로 사후 처리를 해주는 장묘업체의 부족으로 망설임 없이 선택한다고 합니다습니다.
    경영/경제| 2021.07.26| 10페이지| 3,000원| 조회(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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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년대 국제 정세와 사상적 혼란
    국제 정세와 사상적 혼란이@@1860년대 국제 정세청나라1840년 발발한 제1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을 통해 영국에게 광주를 포함한 5개 항구를 개항하고, 홍콩(香港) 섬의 할양과 무역 독점권을 넘겨주었다. 이는 서양 열강에게 최초로 무력에 의한 개항이었던 남경조약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큰 가시적인 효과를 얻지 못했다. 영국의 주된 상품이었던 면제품은 중국인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고, 면제품 수출로 인한 이익보다 아편 수출로 인한 이익이 많은 상황에서 중국인들이 자체적으로 아편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 적자는 점점 커져갔다. 반면 중국의 차에 대한 영국의 수입량은 급증하면서 제1차 아편 전쟁 이전과 비교해 무역의 구조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진 영국은 미국,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에 남경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다. 청나라는 서양 열강 요구를 거절했고, 영국은 마침 광저우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영국인 소유의 해적선 애로호(Arrow)가 제압되는 과정에서 영국 국기가 훼손되었다는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1856년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이 과정에서 영국과 함께 남경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던 프랑스는 같은 해에 자국 선교사가 청나라에 의해 처형된 것을 빌미로 영국에 이어서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청나라는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배상제회(拜上帝會)가 가난한 빈민들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남경조약으로 인해 청나라 내의 교역로 변동으로 인한 상업 종사자들이 대거 실직하고, 여러 사회적 요인으로 들끓기 시작했던 도적들을 흡수한 끝에 1850년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과 비슷한 시기에 화북 지역에서 발생한 유민과 도적들의 반란인 염군의 난(捻軍之亂)을 진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태평천국은 초기에 남경을 점령한 이후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향해 북벌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1856년 당시에는 지도자 홍수전(洪秀全)이 휘하의 다섯 왕을 이간질 같은 네덜란드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로부터 9년 뒤인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개항을 요구한 흑선내항(?船?航)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페리 제독과 미국 함대의 등장 자체에 대해서는 에도 막부는 일찍이 별단 풍설서를 통해 미국이 일본의 개항을 목적으로 군함을 파견했다는 정보를 통해 페리 제독의 함대가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군함의 명칭과 배수량, 함포의 수와 승무원은 물론이고 지휘관인 페리 제독의 신상 정보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페리 제독은 일본에 도착한 이후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는 한편 일본과 인접한 류큐(琉球) 왕국을 점령할 생각으로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에도 막부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페리 제독으로 하여금 1년 뒤에 다시 방문하도록 했지만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페리 제독은 7개월 만에 기존의 4척에서 5척을 더해 모두 9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와 개항을 요구했다. 페리 제독의 함대는 막부의 수도 인근의 에도 만 입구에 버티고 있었는데 에도 만을 통한 해상 운반이 봉쇄된 상태에서 9척의 군함을 상대로 승산이 보이지 않았던 에도 막부는 어쩔 수 없이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미국의 개항 요구를 수용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約)을 통해 일본은 2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미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 당시 미국은 동아시아 무역을 위한 항로와 중간 기점 확보의 필요성이 다급했기에 어디까지나 일본의 개항에만 집중하고 무리한 통상까지는 요구하지 않았으나 미일화친조약에서 4년 뒤인 1858년에 체결된 미일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約)은 일본의 관세 자주권을 상실시키고, 미국의 치외법권 인정, 최혜국 대우 등 일본에게 불리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체결 과정에서 당시 막부의 권력을 장악했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덴노의 승인도 없이 가나가와(神奈川)에서 조약을 체결하면서 막부의 이러한 결정에 고메이(孝明) 덴노선 조정에 의해 수감된 김대건(金大建) 신부를 구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이와 같은 프랑스의 요구에 대해 통상 거부와 더 많은 천주교 박해로 응답했고, 그 결과 김대건의 처형일을 앞당겼다. 김대건은 결국 조정의 배교 요구에도 불구하고 거부한 끝에 처형되었다.결국 프랑스의 세실 제독은 베트남의 소치제(紹治帝)가 천주교를 박해한 것을 구실로 다낭(??)을 포격하고 일본과의 관계 구축을 위해 오키나와로 향했던 2척의 군함과 약 700명의 병력을 조선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는 북상 과정에서 암초에 걸려 충청도 인근 바다의 외연도(外煙島)에 표류하게 되었다. 세실 제독은 어쩔 수 없이 조선에 대한 개항 요구를 포기하고 대신 조선에 자신들의 구호를 요청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프랑스군의 요청에 따라 그들을 위한 식량을 전달했고, 결국 세실 제독과 프랑스 함대는 영국의 함선에 의해 구출되어 청나라 상해에서 함선 3척을 빌린 끝에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처럼 일본의 개항보다 이른 시기에 조선을 개항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시도는 무산되었고,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한 진출과 1856년에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 전쟁에 동참하면서 한동안은 조선에 대한 진출을 포기하게 되었다.러시아러시아는 일찍이 19세기 초부터 영국과 중앙아시아와 아시아의 식민지 확보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지속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지니고 있던 때에 하와이로의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었고, 알래스카를 미국에게 판매한 것도 영국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청나라까지 그 손길을 미치게 되었는데 청나라가 내부의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 같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과 프랑스 두 열강과의 제2차 아편 전쟁으로 궁지에 몰리자 러시아는 1860년에 이들의 사이를 중재하면서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그 결과 러시아는 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조선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이후 러시아는 1864년에 함경북도 경흥(慶興)까지인 만력제가 장비의 환생인 조선의 선조를 위해 원군을 보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관제 신앙은 이처럼 임진왜란이 진행되면서 임진왜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관우의 덕이라는 식으로 조선 병사들에게 퍼지기 시작했으며, 선조 이후 숙종 대에는 아예 숙종이 대소신려들에게 관우 숭배를 강요할 정도로 관제 신앙이 민간만이 아니라 국가와 왕실의 안위를 지켜주는 충효의 수호신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숙종은 관왕묘의 제사를 정기화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제 신앙을 장려했고, 1701년에 모든 지방의 관왕묘에 기존의 예에 따라 제사를 거행할 것을 지시했다. 숙종 이후 영조와 정조 대를 거쳐 관제 신앙은 확실한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다. 영조는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관왕묘 제사를 소사에 공식으로 입전시켰고, 1746년에는 영조가 직접 관우를 기리는 현판을 써서 관왕묘에 걸도록 했으며, 관묘의 성립과 관제 경전의 유포가 진행되었다. 성리학의 수호에 적극적이었던 정조도 관왕묘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1785년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정조는 관왕묘 제사를 중사로 승격시키는 한편 1786년에는 관왕묘의 행례에 쓰일 『관묘악장(關廟樂章)』을 직접 짓기도 했다.관왕묘 의례가 국가적 의례에 정식으로 수용되면서 관제 신앙은 더욱 활발해질 수 있었다. 1795년에는 관제 신앙의 이념을 정리한 『경신록(敬信錄)』이 목판으로 간행되었고, 1년 뒤에는 언해본이 간행되었다. 언해본 간행은 관제 신앙의 대중적 확산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으며, 결국 1840년대에 이르러 관제 신앙은 조선의 민간 종교로 크게 확산되었다. 1848년에 실학자 최성환은 철종의 지시로 한문본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을 간행했고, 4년 뒤에 이를 언해한 『태상감응도설언해(太上感應篇圖說諺解)』를 편찬했다. 이후 최성환은 1856년에는 조선의 대표적인 민간 도교서인 『각세신편팔감(覺世新編八鑑)』을 편찬했는데 이는 중국의 서적이 아니라 조선의 민간 도교에서 자체적으로 낸 서적이었기에 이 당시 조선이 독자적으로 관제 신앙과 관적인 신앙의 형태가 이 미륵 신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내세와 미래세에 대한 이상향적 이념이 표출된 신앙의 희망이라는 면에서 삼국시대 이래로 오늘날까지 지명, 사찰의 이름 등에 도솔, 미륵 등이 자주 쓰인 것도 미륵 신앙에 얽힌 설화가 민간에 끼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신라 시대의 여러 화랑과 미륵 신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신라의 미륵 신앙 수용의 한 특징이었으며, 신라는 미륵 신앙의 이상 세계를 사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미래에 구세주인 미륵보살이 출현하는 이상향적 이념을 제시하고 있는 미륵 신앙은 역사적으로 하층민의 희망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미륵 신앙을 이용해 스스로를 미륵보살이라고 자칭하고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행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무고한 대중을 괴롭힌 후삼국시대의 궁예처럼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들도 여럿 등장했다. 고려 말기 우왕 대에 등장했던 이금(伊金) 역시 그런 자들 중 하나였는데 나무에서 곡식을 열리게 할 수 있다는 말 등으로 백성들을 현혹했으나 민중들을 우롱한 끝에 처형되었다. 여말선초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미륵 신앙은 하층민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그리고 역시나 조선 시대에도 백성들을 현혹한 이가 등장했는데 숙종 대인 1688년 요승 여환(呂還)이 자신의 아내 원향(遠香)과 함께 불순한 뜻을 가지고 있던 아전 정원태(鄭元泰), 무녀 계화(戒化) 등을 끌여들여 세력을 규합한 끝에 양주군 청송면에서 석가불의 기운이 다하고 미륵불이 장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려 미륵 신앙을 전파한 적이 있었다. 여환을 숭배하는 미륵불의 추종자들은 점차 강원도와 황해도 등지까지 세력을 넓혀갔는데 여환은 세력이 점차 커지자 자신의 부인 원향을 용녀부인이라고 칭하면서 7월 경에 큰 비가 와서 도성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면서 추종자들에게 장검과 갑옷을 준비시켰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폭우로 도성이 무너질 때를 틈타서 도성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일이 되어도 하늘은 맑기만 하였고다.
    인문/어학| 2021.07.26| 11페이지| 2,000원| 조회(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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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한국 사상계
    19세기 한국 사상계역사문화학부 사학과 이@@목차Ⅰ. 서론1. 국내 정세1.1 성리학의 한계1.2 서학의 전래와 탄압2. 국제 정세2.1 청나라2.2 일본2.3 프랑스·러시아Ⅱ. 본론1. 민간 사상1.1 관제 신앙1.2 옥황상제 신앙1.3 미륵 신앙1.4 정감록Ⅲ. 결론참고문헌Ⅰ. 서론비교적 평화로웠던 유럽과 다르게 19세기의 아시아는 격동의 연속이었다. 역사 깊은 전통과 체제가 산업혁명으로 성장한 서양 열강에 의해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고,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부정부패의 만연화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와 대의명분론 등에 매몰된 성리한의 한계, 서학의 전래와 탄압 등을 통해 결과적으로 기존의 체제 구성원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체제의 가장 밑에 위치한 백성들은 체제에 대한 불만을 농민운동과 반란으로 표출했고, 이 과정에서 19세기의 사상 역시 백성들의 요구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해 다양한 양상을 취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19세기에 한국 사상계가 처했던 상황과 시대의 흐름에 부응해 등장한 여러 민간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1. 국내 정세1.1 성리학의 한계본래 성리학은 주희(朱子)가 도교와 불교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사상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과 환생 등으로 구성된 내세관을 부정한 이래로 이들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것이 나라를 망친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초기 성리학은 내세보다 현세에 치중한 세속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고, 그 교조인 주희는 당대인들에게 조상의 영혼을 모시지 않는다고 해서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조선의 성리학도 이후 이황과 율곡의 대에 이르러 전성기에 이르렀지만 큰 사회적 변화를 동반한 양란 이후 김존해(金尊楷), 심당길(沈當吉), 이삼평(李參平) 같은 기술자들은 일본으로 납치되고 실용적인 학자들이 전란으로 목숨을 잃으면서 성리학을 제외한 여러 학문의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성리학은 현실에 대한 인식보다는 이민족과 중 변화를 추구했던 중인과 평민 계층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기에 빠른 속도로 그 교세가 확장될 수 있었다. 18세기 이후 서학은 실학과 함께 전통 사회의 유교적 가치를 고집하는 학자들과 위정자들의 학문적인 반격은 물론 정치적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첫 번째 갈등은 1791년에 전라도 진산(珍山)의 권상연(權尙然), 윤지충(尹持忠) 등이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사른 진산 사건이었다.진산 사건 이전에 조선 천주교 성립에 큰 역할을 했던 1785년에 역관 김범우가 천주교 모임을 열었다가 적발당한 추조 적발 사건이 있었으나 유교적 규범에 대한 도전은 없었기에 주모자인 김범우만 처벌받았다. 하지만 진산 사건의 권상연과 윤지충은 즉시 압송되어 감사 정민시(鄭民始)의 집요한 추궁 끝에 자신들이 천주교 교리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웠음을 고백했다. 결국 이들은 정조의 지시에 따라 사형되었고, 권상연과 윤지충은 남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조정의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정조가 등용했던 남인 세력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결국 이 진산 사건이 계기가 되어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났으며, 정조는 다른 박해에 비해서는 일정 기준 하에 비교적 관대하게 처리했다.새롭게 즉위한 순조(純祖)와 그 주변에서 득세하기 시작한 서인의 벽파(僻派)는 반 천주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천주교 신앙이 중인과 평민 계층으로 급속하게 전파되면서 전통적인 생활과 유교적 규범에 큰 혼란이 초래되기 시작했다. 진산 사건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유교적 규범에 대한 도전으로 결국 순조의 치세가 시작된 1801년부터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신유박해는 노론의 벽파가 남인의 시파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신유박해 끝에 천주교를 신봉하던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등의 진보적 성향의 남인 계열 지식인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1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고, 수 백 명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 결국 순식간에 지도부가 사라진 조선 천하고 말았고 근대화를 위한 문화적, 사상적으로 자생할 수 있는 기반으로 기대를 받았던 실학마저 점점 쇠퇴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2. 국제 정세2.1 청나라840년 발발한 제1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을 통해 영국에게 광주를 포함한 5개 항구를 개항하고, 홍콩(香港) 섬의 할양과 무역 독점권을 넘겨주었다. 이는 서양 열강에게 최초로 무력에 의한 개항이었던 남경조약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큰 가시적인 효과를 얻지 못했다. 영국의 주된 상품이었던 면제품은 중국인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고, 면제품 수출로 인한 이익보다 아편 수출로 인한 이익이 많은 상황에서 중국인들이 자체적으로 아편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 적자는 점점 커져갔다. 반면 중국의 차에 대한 영국의 수입량은 급증하면서 제1차 아편 전쟁 이전과 비교해 무역의 구조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진 영국은 미국,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에 남경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다. 청나라는 서양 열강 요구를 거절했고, 영국은 마침 광저우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영국인 소유의 해적선 애로호(Arrow)가 제압되는 과정에서 영국 국기가 훼손되었다는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1856년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이 과정에서 영국과 함께 남경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던 프랑스는 같은 해에 자국 선교사가 청나라에 의해 처형된 것을 빌미로 영국에 이어서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청나라는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배상제회(拜上帝會)가 가난한 빈민들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남경조약으로 인해 청나라 내의 교역로 변동으로 인한 상업 종사자들이 대거 실직하고, 여러 사회적 요인으로 들끓기 시작했던 도적들을 흡수한 끝에 1850년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과 비슷한 시기에 화북 지역에서 발생한 유민과 도적들의 반란인 염군의 난(捻軍之亂)을 진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태평천국은 초기에 남경을 점령한 이후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을국이 일본의 개항을 목적으로 군함을 파견했다는 정보를 통해 페리 제독의 함대가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군함의 명칭과 배수량, 함포의 수와 승무원은 물론이고 지휘관인 페리 제독의 신상 정보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페리 제독은 일본에 도착한 이후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는 한편 일본과 인접한 류큐(琉球) 왕국을 점령할 생각으로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에도 막부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페리 제독으로 하여금 1년 뒤에 다시 방문하도록 했지만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페리 제독은 7개월 만에 기존의 4척에서 5척을 더해 모두 9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와 개항을 요구했다. 페리 제독의 함대는 막부의 수도 인근의 에도 만 입구에 버티고 있었는데 에도 만을 통한 해상 운반이 봉쇄된 상태에서 9척의 군함을 상대로 승산이 보이지 않았던 에도 막부는 어쩔 수 없이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미국의 개항 요구를 수용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約)을 통해 일본은 2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미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 당시 미국은 동아시아 무역을 위한 항로와 중간 기점 확보의 필요성이 다급했기에 어디까지나 일본의 개항에만 집중하고 무리한 통상까지는 요구하지 않았으나 미일화친조약에서 4년 뒤인 1858년에 체결된 미일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約)은 일본의 관세 자주권을 상실시키고, 미국의 치외법권 인정, 최혜국 대우 등 일본에게 불리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체결 과정에서 당시 막부의 권력을 장악했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덴노의 승인도 없이 가나가와(神奈川)에서 조약을 체결하면서 막부의 이러한 결정에 고메이(孝明) 덴노와 덴노를 따르는 지지 세력이 크게 반발하는 결과를 반발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에도 막부의 권위를 저하시켰고 존왕양이를 기치로 내세운 반 막부 세력의 결집을 초래했는데 이에 이이 나오스케는 고메이 덴노가 자신을 거치지 않고 개항에 반대하는 다이묘에게 칙서를 내린 것을 문제 삼아 1858년부다. 이에 조선 조정은 프랑스군의 요청에 따라 그들을 위한 식량을 전달했고, 결국 세실 제독과 프랑스 함대는 영국의 함선에 의해 구출되어 청나라 상해에서 함선 3척을 빌린 끝에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처럼 일본의 개항보다 이른 시기에 조선을 개항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시도는 무산되었고,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한 진출과 1856년에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 전쟁에 동참하면서 한동안은 조선에 대한 진출을 포기하게 되었다.러시아러시아는 일찍이 19세기 초부터 영국과 중앙아시아와 아시아의 식민지 확보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지속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지니고 있던 때에 하와이로의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었고, 알래스카를 미국에게 판매한 것도 영국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청나라까지 그 손길을 미치게 되었는데 청나라가 내부의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 같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과 프랑스 두 열강과의 제2차 아편 전쟁으로 궁지에 몰리자 러시아는 1860년에 이들의 사이를 중재하면서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그 결과 러시아는 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조선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이후 러시아는 1864년에 함경북도 경흥(慶興)까지 접근해서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이를 거부했으나 1년 뒤인 1865년에 러시아는 다시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이번에도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다른 서양 열강들과 다르게 육지를 통한 통상 요구를 지속해오는 러시아에 대한 부담을 느낀 끝에 조선 영토 내의 천주교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천주교 선교사들은 흥선대원군의 제안을 거절했고, 흥선대원군의 이러한 시도는 정치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천주교 박해로 노선을 변경하게 되었다.Ⅱ. 본론1. 민간 사상1.1 관제 신앙관우(關羽)를 신으로 숭배하는 도교적 관제 신앙은 임진왜란에서 명나라가 참전한 이후 민되었다.
    인문/어학| 2021.07.26| 12페이지| 2,000원| 조회(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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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학의 전래
    서학의 전래 : 서양문물과 천주교사학과 이@@목차Ⅰ. 머리말Ⅱ. 서학의 전래1. 서학과의 첫 접촉2. 지식인의 반응과 연구3. 실학과 북학파의 등장4. 천주교와 진산 사건5. 서학과 천주교의 몰락Ⅲ. 결론※ 참고문헌Ⅰ. 머리말16세기 후반 명나라에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로 인해 시작된 서학은 천주교 선교사들을 통한 서양의 문물과 학술서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마테오 리치부터 시작된 서학의 움직임은 아담 샬(Adam Schall)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의 등장으로 연결되었다. 예수회에 소속된 선교사들의 움직임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이후에도 계속되어 마테오 리치로부터 이어진 천주교 신앙을 효율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서양의 여러 일면이 담긴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서양의 학술과 문물을 서학이라는 용어로 소개했다. 조선 역시나 명말청초 시기에 한역 서학 서적들이 유입되면서 서학을 서양의 학문으로 인식하게 되었다.서학은 양란 이후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계층의 분화와 양란을 통한 새로운 문화의 유입, 외세와의 충돌로 인한 가치관 변화에 시달리던 조선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정치로부터 멀어져 있었기에 학술적으로 성리학적 사고관을 반성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일부 지식인들, 양란에서의 의병 활동으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광작과 도매업으로 새롭게 부를 축적하면서 새로운 경제, 사회 계층으로 성작하기 시작한 중인과 평민 계층은 17세기 이후 무너지기 시작한 양반 중심의 신분 사회 속에서 서학이 제시한 새로운 길에 주목했다. 일부 중인들 그중에서도 역관들은 연행사의 형태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자신들의 식견을 넓히는 것은 물론이고 연행과 관련된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적인 영향력 역시 증대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중인 계층의 서학과 천주교 전파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조선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영세 신자가 된 이승훈에게 대세를 받은 권철신과 이벽 등이 주로 중인 계층과 교류하면서 그들에로 번역된 한역 서학서와 서양의 여러 문물을 가지고 귀국해 서양과 서양의 문물에 대한 이해심을 키워나갔다. 또한 이 시기에 1627년(인조 5년)에 표류한 얀 벨테브레(Jan Weltevree)와 1653년(효종 4년)에 표류한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등의 서양인이 표류해 서양식 대포의 제조나 대포 개량 등을 관련해 이들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서양에 대한 지식과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중국으로의 부경사행과 서양인의 표류로 인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에 대한 학문적, 사상적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1646년(인조 24년)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을 다녀왔던 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 김육(金堉)이 채용하자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이후 조선은 청나라 흠천감 관원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시헌력의 내용을 연구한 끝에 1653년(효종 4년)에 시헌력을 시행했다. 정두원과 김육을 비롯한 조선의 관료들이 서양의 천문과 역법 등에 큰 관심을 가진 이유는 농업 국가인 조선에 있어서 천문과 역법이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고, 이는 곧 자연스럽게 조선의 군주인 왕이 책임질 필요가 있는 대사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수시력(授時曆)은 실정에 맞지 않아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있었는데 이러한 현실을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중국으로의 사행 이전부터 서양의 천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던 이이명(李?命) 같은 경우에는 1720년(숙종 46년)에 청나라에 숙종의 사망을 알리기 위한 고부주청사(告訃奏請使)로 북경을 방문하면서 흠천감에서 흠천감 감정(監正)인 독일인 신부 퀴글러(Kogler)와 포르투갈인 신부 수아레즈(Saurez)와 만남을 가져 서양의 천문과 지리, 천주교에 관한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듣는 등 학문적인 교류와 함께 지도와 천문도, 여러 한역 서학서를 선물로 받아 귀국하기도 했다.황도남북양총성도(黃道南北兩總星圖), 안국빈(安國賓), 433.4cm × 168cm,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소장이이명 이후 174를 들여온 이이명의 경우는 고부주청사로 북경으로 가기 전에 여러 한역 서학서를 접해 나름대로 서양의 문물과 천주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한 이후 흠천감을 방문해 천주교 선교사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가진 것이었다. 한역 서학서와 서양의 발전된 문물이 축적되면서 이에 관심을 가지는 지식인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고, 그 이해와 깊이의 부분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18세기의 안정복(安鼎福)은 여러 한역 서학서들이 선조 말부터 조선에 들어왔으며, 이를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인 것처럼 많은 선비들의 서재에 갖추어 두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실학자 정약용(丁若鏞)도 서학서를 구해서 직접 읽어보는 일이 자신의 청년 시절에 일종의 유행 중 하나였다고 회상할 정도로 당대 지식인 계층 사이에서는 한역 서학서와 서양의 문물에 대한 관심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고, 이러한 추세는 이익(李瀷)의 시대에 접어들어 본격적인 조선 서학이 시작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대학자 이이(李珥)의 경세(經世) 정신을 계승한 이익은 당대의 해이해진 정치적 기강의 문란함과 피폐한 농촌사회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실학 정신은 자연스럽게 서학에도 미치게 되었고, 그 결과 조선 서학의 본격적인 학문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관직을 사퇴하고 저술에 힘쓰던 이익은 『주제군징(主劑軍徵)』, 『천주실의(天主實義)』, 『천문략(天文略)』 등 여러 한역 서학서를 구해 연구했다.이익은 과학, 역사, 천문, 지리, 세계지도 등 다양한 분야의 한역 서학서를 연구함은 물론 천주실의 같은 종교 서적까지 관심을 보였고 자신이 저술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서학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파악한 것을 메모하는 식의 문장으로 기록했는데 덴마크의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Tycho Brahe)의 천문학을 골자로 하는 천주교적 서양 천문학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지구 중심의 천동설 우주체계에 대한 이해도를 드러내었다. 또한 시헌력의 선진성을 인 방식으로 검토하면서 천주교의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영혼론을 과감하게 비판했다.홍대용(洪大容) 초상, 엄성(嚴誠), 천안박물관 소장이처럼 당대의 일부 지식인들은 서학을 배척하기 이전에 서학을 연구해 서학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배척을 주장했는데 그중에서도 신후담의 서학 연구는 올바른 학문인 정학(正學)을 보존하고, 올바르지 않은 학문인 사학(邪學)의 배척을 전제로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안정복과 신후담 두 명 모두 이익의 제자이자 근기학파(近畿學派)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는데 이 둘처럼 서학을 배척하기 위해 서학을 연구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과 다른 학통에서는 서학의 가치를 파악하는 또 다른 연구의 흐름을 주도한 이들도 존재했다. 이들은 북학파(北學派)로 불리는 이들로 그 중 한 명인 홍양호(洪良浩)는 북경에 두 차례나 사행하면서 청나라의 학자들과 여러 주제로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 중에는 청나라와 서양의 학술에 관한 것도 있었다. 홍양호와 마찬가지로 세 차례나 북경을 방문했던 홍대용(洪大容)은 북경에 위치한 천주당과 흠천감을 방문하고 당시 흠천감 감정인 독일인 신부 페르디난드 할러슈타인(Ferdinand Hallerstein)와 서학과 관련된 토론을 하기도 했다. 홍대용의 관심은 주로 서양의 발전된 문물, 기술과 과학적인 분야에 집중되었는데 홍대용은 자신의 저작 『주해수용(籌解需用)』을 통해 서양의 수학을 소개하고자 했다.또한 홍대용은 귀국한 이후에 자택에 자명종과 혼천의를 설치하고, 서양의 천문과 시간에 대해 연구했으며, 서양의 천문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지동설을 주장했다. 홍대용은 세 차례의 북경행을 통해 청나라와 서양의 선진성과 서학의 실용성을 누구보다 깊게 이해했고, 나아가 청나라의 학문을 연구할 필요성에 주목하면서 북학(北學)을 주장하게 되었다. 북학파의 등장과 맞물려 선조와 영조의 시기를 지나 정조 대에 접어들면서 서학은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정조 대의 서학을 실정에 맞게 적용해보려는 지식인 계층의 노력은 서양 기술과 과학의 신에 기원을 둔 구체적인 방법론이었다. 이익 이후 꾸준히 지속된 연구로 인해 그동안 축적된 서학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서학을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서학의 정식적인 부분인 천주교의 종교적, 윤리적인 가치관에 대한 수용도 동반되기 시작했다. 이익의 문하인 남인(南人) 계열에서도 권철신(權哲身), 이벽(李檗), 이승훈(李承薰), 정약전(丁若銓) 등은 사적으로 천주교와 관련된 한역 서학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1770년대부터 집단으로 모여서 서학서의 내용을 주제로 하는 여러 토론을 거치면서 천주교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교환하는 한편 조선 천주교의 기반을 쌓기 시작했다. 특히 이승훈은 연행으로 북경에 도착한 이후 천주당을 방문해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조선 최초의 천주교 교인이 되었는데 그는 귀국한 이후 1784년(정조 8년)에 한성에서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훈은 주로 중인 계급과의 교류와 협력을 중요시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결국 조선의 천주교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이승훈의 이러한 행동은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전수받은 이들로 인해 천주교의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내포(內浦)에서 이존창(李存昌)이, 전주에서 유항검(柳恒儉), 윤지충(尹持忠) 등이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게 되었고, 이들의 천주교 신앙은 처음에는 유학을 보완할 수 있는 내용만 취하는 보유론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나 계속되는 조정의 탄압과 전통 사회로 인한 수난을 겪으면서 점점 보유론적인 성향을 탈피하고 본래의 천주교 신앙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 조선 천주교회는 계속해서 교세를 확장하면서 청나라에서 온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이할 정도였다. 이들은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정약종이 저술한 『주교요지(主敎要旨)』 같은 천주교의 교리를 알기 쉽게 요약한 교리서를 간행하면서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고 있던 전통 사회에서 서양의 이질적인 종교인 천주교.
    인문/어학| 2021.07.26| 11페이지| 2,000원| 조회(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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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레퓌스 사건과 프랑스의 유대인 인권
    드레퓌스 사건과 프랑스의 유대인 인권역사문화학부 사학과 이@@목차Ⅰ. 서론Ⅱ. 본론1. 사회적 배경2. 드레퓌스 사건3. 사건 이후의 반유대주의Ⅲ. 결론참고문헌Ⅰ. 서론20세기 서양 사회에서 인권과 관련이 있는 국가는 여럿이 있지만 그중에서 프랑스를 제외하고 인권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 자체는 19세기 말에 발생했지만 1894년부터 1906년 최고재판소에 의해 드레퓌스의 무죄가 선고되기까지 계속되었고, 그 여파는 20세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본고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여러 차례 혁명을 겪었으며, 자유, 평등, 우애를 주장했던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나서서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고,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킨 간첩 조작 사건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발생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또한, 점점 드레퓌스의 무죄 증명과 석방이라는 개인 차원을 넘어 정치적인 문제로 확대된 드레퓌스 사건의 대략적인 전개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이후 드레퓌스 사건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드레퓌스 사건에 유대인 비밀결사의 배후 조종이 있었다는 식의 유대인 음모론이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과정과 그 결과 벨 디브 대규모 체포 사건으로 약 1만 3천 명의 유대인이 검거되어 학살당하기까지의 일련적인 흐름 속에서 20세기의 프랑스 사회를 개인과 집단을 모두 포함하는 인권의 관점으로 평가하고자 한다.Ⅱ. 본론1. 사회적 배경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한 1894년의 프랑스 제3공화국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은 복잡한 편이었다. 1866년 보-오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패배시키고 독일 통일의 기치를 내걸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을 상대로 1870년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는 참패를 당했다. 보-불 전쟁의 결과 프랑스는 프랑크푸르트 조약(Treaty of Frankfurt)을 통해 50억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메스(Metz)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불하기로 한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마련한 끝에 전쟁 이후 1년 8개월 만에 지불했다. 이는 당초 프랑스가 모든 배상금을 지불하기까지 적어도 5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짐작했던 비스마르크의 예상을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하지만 50억 프랑은 당시 프랑스 GNP의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고, 50억 프랑을 무리하게 지불한 것과 당시 프랑스 주류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해충에 의해 프랑스 포도원의 4분의 3이 파괴되면서 프랑스의 주요 산업이었던 주류 생산에 적신호가 들어온 것, 철과 석탄이 풍부했던 알자스-로렌 지방의 상실과 여러 국제적인 요인이 맞물려 1873년 프랑스는 대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패전으로 인한 혼란과 거기에서 비롯된 경제적인 불황으로 프랑스는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애국주의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프랑스 군부는 강력한 군사력을 재건하기 위한 정책에 몰두했고,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2제국은 자연스럽게 다시 있을 전쟁에 앞서 치열한 첩보전 단계에 돌입했다.1890년대에 들어서 프랑스 내부에서는 《라 리브르 파롤(La Libre Parole)》을 시작으로 《라 파트리(La Patrie)》, 《레클레르(L’Eclair)》 같은 반유대주의 성향의 신문들이 창간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프랑스 사회 내부에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하는 반유대주의 정서에 기반한 인종차별적인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으며, 몇 차례 진행된 혁명의 영향으로 깊게 뿌리내린 민주주의와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는 풍조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1892년 파나마 스캔들(Panama Scandals)이 터지면서 반유대주의가 큰 힘을 얻기 시작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1880년에 남미의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파나마 운하 수주권을 따내고 공사에 돌입했었다.하지만 현지의 말라리아로 공사에 투입된 수많은 인부의 사망으로 사실상 공사는 실패하게 되었는데 이미 상당한 금액을 투자했 프랑스는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간첩으로 조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894년 9월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한 편지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발견되었다.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는 이 편지를 확인한 결과 프랑스 육군의 기밀문서가 포함되어 있었고, 독일 대사관의 막시밀리안 폰 슈바르츠코펜(Maximilian von Schwartzkoppen) 대령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참모본부는 편지에 적힌 편지 작성자의 코드네임 D에서 착안해 독자적인 조사 끝에 알자스 지방 출신의 유대계 육군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를 의심했다.1894년 12월 파리 근교의 한 건물에서 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드레퓌스의 변호인은 드레퓌스를 유죄라고 주장하는 증거가 미약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공개 재판을 요청했으나 기각당했고, 드레퓌스는 자신의 진술 차례가 오자 자신이 편지에서 발견된 기밀문서에 언급된 내용을 통보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직책과 보직상 기밀문서에 포함된 마다가스카르 섬에 대한 원정과 그 지원 부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침착하게 진술했다. 하지만 뒤이어서 진술하게 된 드레퓌스의 동료들은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계속했고, 드레퓌스의 필적과 편지의 필적이 명백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재판정에서는 도리어 그가 기밀문서를 작성할 때 자신의 필적이 아니라 남의 필적으로 가장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렸다.결국 희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는 유대인과 그저 이름에 D가 첫 글자로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확정되었다. 재판관들이 드레퓌스에 대한 판결을 의논하기에 앞서 각 재판관들은 상층부의 외압을 받은 상태였고, 최후변론에도 불구하고 재판관들은 만장일치로 반역죄를 물어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와 같은 재판 결과에 드레퓌스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부인의 위로로 간신히 포기했다. 결국 1895년 1월 5일 드레퓌스는 포병연대원들령의 필적이 기밀문서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점을 발견했다.피카르는 이와 같은 사항을 참모본부에 보고하고,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했다. 하지만 참모본부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금 꺼내는 것을 원치 않았고, 피카르를 식민지로 좌천시켰다. 이 과정에서 진범으로 지목된 에스테라지는 그를 체포하라는 여론에 의해 참모본부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몇 달 뒤에 영국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피카르는 좌천되어 식민지로 향하기 전에 지인을 통해 자신이 알아낸 정보들을 유포했고, 여기에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가 한 신문사를 통해 드레퓌스의 죄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으며,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 증거를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속임수를 사용한 끝에 다시금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논의를 부추겼다.이로 인해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반대하는 왕당파와 귀족들, 군부와 가톨릭계, 그리고 이들의 영향 하에 놓인 극우 신문들, 재심을 찬성하는 공화파와 지식인들과 법률가들, 진보 성향의 정치인들과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소수의 신문들이 팽팽하게 맞섰다. 라 리브르 파롤 지로 대표되는 반유대주의 신문들이 드레퓌스에 대한 편파적인 보도를 남발하는 동안 중도 우파 성향의 《르 피가로(Le Figaro)》 지가 에스테라지를 진범으로 주목했다. 하지만 군부와 가톨릭을 위시로 하는 우파는 격렬한 반대와 함께 드레퓌스 사건의 판결이 바뀐다는 것은 이미 판결을 내린 국가와 군부의 위신이 걸린 일이라는 명분하에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결국 이와 같은 흐름에 에스테라지는 순식간에 드레퓌스의 배후에 있는 유대인 비밀결사에 대항한 영웅으로 여겨졌고, 식민지로 좌천당했던 피카르는 군사기밀을 유출한 죄로 체포되었다. 이후 에스테라지의 필적과 기밀순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한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가 다시금 에스테라지를 고발했음에도 프랑스 제3공화국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둘러대었다. 재심 찬성파의 열세가 뚜렷한 상황에서 1898년 1월 13일에 《벌어졌다.군부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에밀 졸라를 군사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했으나 졸라는 체포되기 전에 런던으로 망명했다. 졸라가 영국으로 망명한 이후 영국을 포함해서 유럽 각국에서 졸라를 옹호하는 여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드레퓌스 사건의 모의자 중 한 명인 위베르 앙리 중령이 면도칼로 자살하고, 에스테라지가 영국으로 도망치면서 재심 찬성파가 다시금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군부와 가톨릭계는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요구하는 재심 찬성파의 요구를 버티지 못하고 1899년 6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이 프랑스 고등법원에 의해 진행되었다. 고등법원은 우선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했다.드레퓌스는 악마섬에서 돌아와 브르타뉴의 도시 렌의 군사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5년 동안 외부와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못한 드레퓌스는 재판에 참석했으나 참모본부의 장교들 중에 증인으로 참석한 이들은 증거를 날조하고,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위증으로 일관했다. 이에 법원은 재판관 7명 중에서 2명만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했고, 결국 종신형에서 10년형을 선고했다. 이에 프랑스 국내는 물론이고 유럽 각국의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는 이와 같은 판결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항의가 계속되었고, 프랑스의 국기를 공개적으로 불태우기까지 했다. 또한, 런던에 망명하고 있었던 졸라는 자신에 대한 혐의가 풀리자 즉시 귀국하여 다시금 재판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군부는 드레퓌스에게 유죄 판결을 인정하는 대가로 즉각적인 사면을 제안했다. 재심 찬성파들은 이와 같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드레퓌스는 5년 동안의 수감 생활로 말라리아에 걸려 한계에 몰려있었다.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고, 머리는 하얗게 세어버린 상태의 드레퓌스가 군부의 제안을 승낙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재심 찬성파는 갑작스러운 드레퓌스의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군 경력을 희생하고 그의 명예를 위해 노했다.
    인문/어학| 2021.07.26| 6페이지| 2,500원| 조회(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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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와 독일의 과거 청산
    프랑스와 독일의 과거 청산역사문화학부 사학과 이@@서론2차 세계대전의 전체 사상자는 7~8천만 명으로 이중에서 5천만 명 이상은 민간인이 대상이었다. 개중 대부분의 전쟁범죄는 추축국에 의해 자행되었지만 연합국의 전쟁범죄 역시 존재했으며, 그 심각성은 아주 중대한 것이었다. 이 끔찍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결된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각자 나치 독일에 협력한 친독 세력과 나치 독일에 대한 과거 청산 움직임이 있었다. 그 전개 양상은 두 나라가 처한 상황과 승자와 패자의 지위에 따른 차이로 말미암아 큰 차이를 보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 청산이 벌어진 나라는 프랑스와 독일 말고도 존재하지만 본고에서는 어디까지나 두 나라의 사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본론1. 프랑스의 과거 청산1940년 6월 13일 나치 독일에 의해 파리가 함락당한 프랑스는 폴 레노(Paul Reynaud) 총리가 나치 독일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휴전을 통해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주화파들의 압력으로 물러나고 레노 총리에 의해 부총리에 임명되었던 필리프 페탱(Philippe Petain)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페탱이 프랑스의 새로운 국가수반이 되었다. 페탱은 독일에 정전협정을 호소한 끝에 6월 22일 콩피에뉴(Compiegne) 숲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휴전 협정 제3조에서는 프랑스 정부가 원할 시 파리를 다시금 수도로 삼을 수 있다고 명시되었으나 페탱은 이를 거절하고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비시(Vichy)를 임시 수도로 선택했고, 휴전 협정 결과 프랑스는 국토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고, 독일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른바 비시 프랑스(Vichy France)의 탄생이었다. 이후 비시 프랑스는 페탱을 위시한 일부 매국노를 제외하고 폴 레노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주요 관료들과 도지사 등 고위 관료 약 2,800명을 체포해 독일 내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고, 185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군 포로들은 석방되지 못한 채 독일의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 등에 동원되었다대표되는 친독 세력에 대한 처벌과 숙청이 전개되었다. 친독 매국노들에 대한 숙청은 길거리나 숲 속에서 약식 처형 혹은 공개 삭발식 등의 초법적인 양상을 띠었고, 때로는 최소한의 형식을 갖춰서 부역자 재판소 혹은 최고 재판소에서 사법처리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나치 독일과 비시 프랑스에 우호적이었던 신문들은 폐간되고, 친독 성향의 예술가들 역시 작품 활동을 금지당했다. 또한, 1940년 7월 10일 국회 투표에서 찬성 569표, 반대 80표, 기권 17표로 비시 프랑스의 성립에 기여하고,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했던 상원과 하원의 의원들 역시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친독 세력에 대한 숙청을 둘러싸고 프랑수아 모리아크(Francois Mauriac)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두 레지스탕스 작가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통해 우리는 프랑스 해방 직후 친독 세력의 처분에 대한 여론을 부분적이나마 살필 수 있다. 모리아크는 군중들에게 평정과 용서, 화해를 촉구했고, 카뮈는 모리아크에게 혁명의 단점만 부각한다는 비판과 함께 프랑스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여전히 활력 있는 일부분을 파괴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친독 세력에 대한 두 작가의 주장과 주장의 개연성과 별개로 해방 직후의 여론은 알베르 카뮈의 주장과 비슷했다. 당시 여론은 완전하고 신속한 숙청을 요구했다. 카뮈가 편집장으로 있었던 《콩바(Combat)》 지는 물론이고 프랑스 공산당의 중앙일간지 《뤼마니테(L'Humanite)》 지와 사회당의 중앙일간지 《르 포퓔레르(Le Populaire)》 지는 친독 세력에 대한 강력한 숙청을 촉구했고, 특히 르 포퓔레르 지는 여론이라는 제목으로 프랑스 제4공화국의 미적지근한 숙청에 분개하는 전국 독자들의 편지를 게재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공산당과 사회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가톨릭계 언론 《기독교인의 증언(Temoignage chretien)》 지는 강력한 숙청 조치를 초구하면서 이러한 조치 이후에야 과거를 잊을 수 있다고 했고, 《에스프리(Esp 처벌에 반대하는 여론이 절반 이상이었던 것에 반해 페탱이 체포된 1945년 4월에 가서는 처벌에 찬성하는 여론이 69%로 반전되었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친독 세력 숙청이란 주제에서 페탱의 재판이란 쟁점을 제외하고는 여론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상태였다. 프랑스 제4공화국은 페탱을 국가 반역죄(헌법 제75조), 의회 제도를 농락하고 히틀러에게 협조한 간첩죄(헌법 제87조)로 기소했다.페탱은 프랑스에 돌아온 이후로 헌병들의 경례를 받지 못하거나 프랑스군 장군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음에도 거절을 당하고, 시민들이 그가 탄 객차에 돌을 던지는 일을 겪으면서 큰 충격의 연속이었다.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이후에야 열린 자신의 전범 재판에서 페탱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라도 조국에 남아 국가와 민족을 보전하고 국민을 전쟁의 참화에서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고 항변했고, 자신의 육군 원수복을 입고 당당하게 행동했다. 페탱이 이러한 태도로 방청객들에게 경계를 하자 그의 입장 전까지 페탱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던 방청객들도 모두 일어서서 답례를 했다는 일화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살필 수 있다. 비시 프랑스에 맞서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은 이 소식을 듣고 페탱의 영락한 모습에 한탄했지만 제3공화국을 앞장서서 붕괴시킨 비시 프랑스의 지도자였던 페탱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탱의 처벌에 관해서 배심원들은 유죄는 찬성하지만 사형에는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하지만 이러한 동정적인 분위기는 동생을 아우슈비츠에서 잃은 유대계 사회주의자 레옹 블룸(Leon Blum)을 비롯한 페탱에 의해 탄압받은 이들의 증언이 더해지면서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결국 당초 재판장이 제안한 5년형은 배심원들에 의해 기각되었고, 표결한 끝에 찬성 14표 반대 13의 간발의 차이로 페탱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즉각 사형이라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페탱을 진짜로 사형시키기에는 프랑스 제4공화국의 정치적 부담이 컸기에 드골의 주장에 따라 한때의 구국. 점점 숙청보다는 관용을, 정의 실현보다는 국민의 화합을 강조하고 이 연장선상에서 여러 사면법들이 제정되면서 숙청의 대상이 되었던 친독 세력의 반발 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은 해방 직후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잔학 행위가 폭로되기도 했고, 공개삭발식의 희생양이 된 여성의 회고담 같은 직접적인 증언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독 세력의 숙청에 앞장선 좌익 레지스탕스들과 자유 프랑스의 인사들은 개개인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고통스러운 일일지 몰라도 숙청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문제의 소지가 있기는 했지만 넓은 틀에서 보면 공정한 편이었으며,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2. 독일의 과거 청산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1945년 11월 시작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Nuremberg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을 통해 나치당의 핵심 인물이었던 24명의 피고인 중 22명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자살한 1명과 건강 악화로 연기된 1명을 제외하고 22명에 대한 판결은 교수형 12명, 종신형 3명, 10년 징역형 1명, 15년 징역형 1명, 20년 징역형 2명, 무죄 3명이었다. 또한 나치당의 핵심 인사들과 함께 기소되었던 나치당, SS(Schutzstaffel), 게슈타포 등의 세 집단은 범죄조직으로 인정되었고, 이와 같은 결과에 한때 나치 독일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Hermann Goring)이 자살했다. 괴링의 자살 이후 나머지 사형수들은 자살할 틈도 없이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처벌된 이들의 시체는 화장되어 처분해버렸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역사상 처음으로 반인도적인 죄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고 전쟁 범죄의 책임을 국가가 아닌 일개 개인들에게 요구한 끝에 국제법 발전의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의 핵심 인물들을 대상으로 나치 독일이 저지른 침략, 포로 학대, 민간인 살해, 유대인 학살 등을 기소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끔찍한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다.뉘른베르크 처럼 독일인들에게 뉘른베르크 재판은 승자의 재판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나치당의 핵심 인물에 한정된 처벌은 나치 청산의 열기를 빠르게 식게 만들었다. 일례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뉘른베르크 재판 직후에 히틀러 치하에서 2인자로 있었던 괴링과 나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재판이 정당하다고 응답한 이들이 78%, 부당하다고 응답한 이들은 4~6%에 불과했다. 하지만 약 4년 뒤인 1950년 가을에 진행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부당하다고 응답한 이들이 30%, 정당하다고 응답한 이들이 38%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 12년 동안 법치를 파괴한 나치당 핵심 인물들을 법정에서 단죄하여 법치를 회복시켜주고, 제2차 세계대전이 정의를 위한 전쟁이었음을 확인시키는 과정을 통해 연합군의 정당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연합국 측에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뉘른베르크 재판 직후 우호적이었던 독일인들의 반응은 나치당의 핵심 인물들이 처벌되고, 나머지 독일인은 범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른바 집단적 책임을 면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요컨대 독일인들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 의식보다는 전쟁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질 수밖에 없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의 이러한 기대 심리와 관점에 따라 재판 직후 우호적이었던 반응은 흐려지기 시작했고, 뉘른베르크 후속 재판에 가서는 신문에 보도되는 일조차 줄어들 정도였다. 결국 독일인들에게 재판을 통해 교훈을 주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던 연합국의 시도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심지어 1946년 가을의 뉘른베르크 후속재판에 대해서 독일인 전범들에 대한 공개적인 옹호가 있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종교계, 법정치가, 관료, 법률가, 예비역 장성들이 주축이 되어 구체적으로 전범에 대한 사면과 재판 종결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이들은 피고들이 국가의 명령에 충실하게 봉사하거나 상부로부터의 지시를 뿌리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독일인들의 사면과 용서에 대한 요구는 집단
    인문/어학| 2021.07.26| 6페이지| 2,000원| 조회(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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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의 숙적, 늑대
    인간의 숙적, 늑대역사문화학부 사학과 이@@서론곰, 몰락한 왕의 역사에서 다뤄진 곰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관련되어 몰락한 또 다른 동물이 있습니다. 그 동물은 바로 늑대로 책에서 다뤄진 곰 이상으로 늑대와 인간은 서로가 살아가는 활동 영역이 상당히 겹치는 편인데다가 사냥 방법 또한 집단으로 몰려다니면서 끝까지 사냥감을 추격하는 지구전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동물은 곰이었지만 그 곰 다음으로 인간들을 곤란하게 하고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인 것은 늑대였습니다. 늑대들은 인간들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때로는 당대의 대도시인 파리를 벌벌 떨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에 맞서 인간들 역시나 늑대들이 숨을 수 있는 숲을 벌목하거나 늑대의 아종이라고 볼 수 있는 개를 데리고 늑대에 맞서면서 수십 세기에 걸친 생존 경쟁을 벌였습니다. 본고에서는 유럽에서 늑대가 어떻게 몰락했는지, 신화와 민담에서 다뤄지는 늑대의 이미지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늑대는 인간과의 생존 경쟁에서 패배하기까지 어떻게 인간들을 공격했는지를 다루고자 합니다.본론1. 신화의 늑대늑대는 일찍이 오래전부터 인간의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곰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늑대와의 생존 경쟁에서 절대적인 우위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인간들은 도리어 늑대에 의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늑대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러 문화에서 늑대에 대한 전사들의 인식은 늑대인간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면서 늑대를 인식한 신화적 개념의 토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늑대는 곰과 마찬가지로 고대 게르만과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늑대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늑대의 힘을 빌리는 샤머니즘 의식의 주된 대상이었으며, 로마의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 형제에게 젖을 먹여 키운 동물도 암컷 늑대였습니다. 이 당시 늑대는 딱따구리와 함께 전쟁의 신 마르스(Mars)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졌기에 늑대가 두 형제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는 까닭은 짐작건대 배가 고픈데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 그렇지 않았나 싶지만 제가 보기에는 배고픈 것보다 제 성질이기지 못하는 게 먼저인 것 같습디다. 까닭은, 먹을 것을 찾았으면 한 마리 잡아먹으면 그뿐일 텐데, 그게 아니고 걸리는 소는 모두 갈기갈기 찢어 해변에다 패대기를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리던 우리 동아리 중 몇 명이 놈의 이빨에 찢겨 죽거나 부상을 입었을 정도입니다.”헤르마누비스의 조각상늑대와 관련된 다른 이야기로는 본래 아르카디아의 왕이었으나 사람을 죽인 다음 그 고기를 제우스(Zeus)에게 바쳤다가 분노한 제우스의 저주로 최초의 늑대인간이 되어버린 리카온(Lycaon)의 이야기, 앞서 언급된 펠레우스를 공격한 켄타우로스 중 한 명이 악행을 벌일 때 늑대 가죽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는 이야기 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만이 아니라 이집트 신화에서도 늑대에 대한 숭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 존재하는 신인 아누비스(Anubis)와 웨프와웨트(Wepwawet) 두 신의 얼굴은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리스인들은 얼굴이 유사한 이 두 신을 섬기는 도시를 늑대의 도시라는 의미의 리코폴리스(Lycopolis)라고 부른데서 아누비스 신 역시나 늑대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누비스 신은 이후 이집트가 디아도코이(Diadochi) 시기를 거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dynasty)의 영토가 되면서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가 아누비스가 융합되어 헤르마누비스(Hermanubis)라는 늑대 머리를 한 신으로 재탄생하기도 했습니다.그리고 비단 로마 시대에 늑대가 긍정적으로만 묘사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 로마의 희극작가인 플라우투스(Plautus)는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다.” 라는 뜻의 호모 호미니 루푸스(Homo homini lupus)라는 말을 자신의 희극에서 사용했는데 사람들이 마치 자연 속에서 경쟁하는 늑대처럼 잔인하게 행동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훗날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 되는 세네카(Seneca간을 공격하는 편이었기에 인간과 인간이 기르는 가축에게 있어서 늑대는 곰보다 더한 경쟁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인간이 강력한 투사 무기와 총과 화약이 발달하면서 늑대와의 생존 경쟁에서 엄청난 우위를 확보하기 전까지 인간에 대한 늑대의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늑대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자는 지능이 높은 늑대의 특성상 여성 혹은 아이로 그마저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경우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늑대의 과도한 공격성은 평균적인 늑대에게 있어서는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늑대의 활동 영역이 인간들의 활동 영역과 겹치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공격적인 성향이 강해지며, 인간과 자주 조우한 늑대는 습관화의 요인으로 인간에 대한 겁을 상실하고 인간에게 대담하게 접근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오늘날 미국의 늑대 보호 구역 내의 늑대들이 야생 늑대에 비해 인간에게 대담하게 접근해오는 것으로 이를 입증할 수 있으며, 평균적인 늑대는 인간에 대한 과도한 공격성을 보이지 않지만 인간이 늑대의 위협에서 시달린 이유는 평균적이지 않는 늑대들, 그리고 이 늑대들의 공격이 광견병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연속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늑대들이 피해자들을 죽이지 않더라도 영구적인 피해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후술할 늑대인간 역시나 광견병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광견병에 걸린 늑대들은 확실하게 평균적인 늑대의 틀에서 벗어나 주로 봄과 겨울의 시기에 무리지어 다니면서 여성과 아이만이 아니라 건장한 남성에게도 덤벼들 정도였습니다.파리 시 전경 지도 2) 파리의 늑대늑대가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보편적인 사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늑대가 인간들을 공포에 떨게 한 사례는 여럿이 존재합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날 파리의 늑대(Wolves of Paris)라고 불리는 1450년대 파리와 그 인근 지역을 공포에 떨게 만든 늑대 무리입니다. 털에 붉은 빛을 띄던 우두머리 늑대의 이름은 쿠르토(Courtaud)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쿠르토는 자신의먹이가 없어 굶주려 있던 늑대들이 모여들고 대 혈투가 시작됐다. 마침내 쿠르토가 혼자 남자 부아셀리에가 일대일 대결을 자처했다. 부아셀리에의 창이 쿠르토의 가슴을 뚫었다. 그러자 녀석은 온 힘을 다해 부아셀리에를 쓰러뜨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로 목을 물어뜯었다. 둘은 쓰러져 함께 최후를 맞았다.”쿠르토와 늑대 무리들이 어떻게 파리 시내로 침입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부분이 존재합니다만 확실한 것은 당대 파리는 중세 유럽의 대도시 중 하나였고, 프랑스 왕국은 얼마 안되는 상비군을 유지했던 국가라는 것입니다. 그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늑대 무리에게 큰 피해와 혼란을 겪었다는 것에서 파리가 아닌 다른 도시들이 겪었을 혼란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3) 제보당의 괴수파리의 늑대들보다 불분명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이 늑대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제보당의 괴수(Beast of Gevaudan), 제보당의 늑대로 불리는 사건으로 파리의 늑대 사건 이후로 3세기 뒤인 1764년부터 1767년까지 3년 동안 벌어진 프랑스의 제보당(Gevaudan) 지역에서 벌어진 참극입니다. 이 참극의 주인공이 도대체 어떤 동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이설이 존재하고 그 피해의 규모도 정확하지 않지만 60명~100명에서 최대 113명으로 추정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제보당의 괴수는 주로 노인, 여성, 아이들을 공격했으며, 사살된 제보당의 괴수를 해부한 이후 배에서 6세 가량의 아이 것으로 추정되는 뼈가 발견되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제보당의 괴수는 가축보다 인간을 목표로 삼는 것에 더 집중했고, 한 마리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는데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늑대보다 큰 몸집에 날카로운 발톱을 지녔다. 입은 사자의 입만 하고 예리한 이빨이 달려 있다. 붉은색 털에 머리가 크다.”여성을 공격하는 제보당의 괴수제보당의 괴수로 인해 제보당 지역 주민들의 공포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프랑스가 짐승도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는 악취가 너무 심해서 보관하지 않고 그대로 처분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결국 이 제보당의 괴수가 정확히 어떤 동물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일관적으로 증언에서 묘사되는 것은 늑대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거나 늑대보다 큰 덩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 등으로 봤을 때 오늘날에 가장 유력한 가설로는 거대한 늑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늑대라는 것도 장 카스텔이 루이 15세에게 바친 박제가 폐기처분 당하면서 확실한 증거가 남지 않아서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늑대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가 제보당의 괴수 사건에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3. 민담 속의 늑대1) 늑대인간본래 유럽에서 늑대인간은 동유럽의 슬라브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파리의 늑대와 제보당의 괴수 사건 같은 경우처럼 유럽 국가 중에서도 프랑스는 늑대에 의한 피해가 심각한 편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까지 일찍이 봉쇄된 지형이라 늑대 사냥이 수월했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제외한 유럽 곳곳에서 늑대에 의한 피해는 상당했고, 한 해에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50여 명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희생당한 피해자들은 역시나 노인과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늑대의 피해로 유럽 사람들은 늑대인간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당대의 유럽인들은 광견병에 걸린 미친 늑대에게 물린 사람은 늑대인간으로 변한다고 믿고 있었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스키타이의 먼 북동쪽에 사는 네우로이족(Neuri)이라는 족속들이 정해진 날에 늑대로 변신한다고 기록하여 이러한 사람들의 의심을 부채질했습니다. 또한 아일랜드에서는 성 패트릭(Saint Pactrik)을 분노하게 한 일가족 전체가 저주로 인해 7년마다 한 번씩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13세기에 이르러서도 당시 잉글랜드를 지배한 존 왕이 늑대인간이라는 소문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1589년 페터 슈투프의 참수형 그림그리고 중세 말기에 해당하는 1414년에 헝가리 교회가다.
    인문/어학| 2021.07.26| 7페이지| 2,000원| 조회(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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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도사와 선교사
    수도사와 선교사역사문화학부 사학과 이@@목차Ⅰ. 서론Ⅱ. 본론1. 수도사1.1 도미니코회와 이단 심문관1.2 구출수도회2. 선교사2.1 바야돌리드 논쟁2.2 과라니족 선교 공동체Ⅲ. 결론참고문헌Ⅰ. 서론기독교 내부의 수도사와 선교사들은 깊은 관련이 있다. 언뜻 보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세상 일에 대해 무관심하고 선교적인 성향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기독교는 빠르게 세속화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수도사들은 근면하고 성실한 삶을 추구했고, 노동의 신성함을 추구하는 동시에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같은 수도원 운동을 통해 사회참여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그 결과 당사자인 수도사들은 결코 선호하지 않았지만 교회법의 전문가였던 이들은 이단 심문관으로 차출되어 당시 유럽 내부에 만연했던 이교 풍습과 잘못된 교리를 숭상하던 이단에 맞서 활동했다.이후 예수회를 중심으로 선교사들은 수도사들과 다르게 유럽 외부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대륙과 아시아로 파견되었다. 일각에서는 선교사들과 제국주의를 연관시키기도 하지만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적 목적으로 이용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모든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선교사들의 선교 지역과 제국주의적 침략의 대상이 된 지역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선교사들 중에는 신대륙 개척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처우를 놓고 바야돌리드 논쟁에 참가했던 이도 있었고, 토착민과 함께 식민지에 대한 탄압에 저항했던 이들도 있었다.이처럼 수도사와 선교사는 기독교를 구성하는 다른 조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진적이고 양심적으로 활동했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완전무결하다거나 잘못을 한 수도사와 선교사가 없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본고에서는 어떠한 부분에서 수도사와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기반해 양심적으로 활동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들이 근대적인 인권이란 개념에 기반해 행동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이들이 자신의 신앙에 대한 믿음에 연했던 사적 제재를 차단하기 위해 이단 심문관이 입회하지 않은 마녀 재판을 금지했으며, 협박과 고문에 의한 자백을 선호하지도 않았다.이들은 주로 보편적인 교리와 교회법으로 재판 대상의 논리를 논파해 죄를 입증한 후 교회법에 따른 판결을 내리는 것을 선호했으며, 사적 제재 혹은 교회법을 오용하는 일부 불순종자들에 의해 피해를 입을 뻔한 무고한 이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또한, 이단 심문관의 주된 심문 대상은 영지주의(Gnosticism)적 성향이 강한 알비파와 같은 이단들이었고, 교회법에 기반한 이러한 재판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었다. 특히 교회법 이하의 수준을 지닌 봉건법과 관습법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강세였던 독일 지역에 이들은 선진적인 교회법을 전파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장애인이 아닌 사람이 구걸 행위를 하면 신체의 일부를 잘라 불구로 만드는 봉건법의 판결에 대해 이단 심문관들은 죽을 때까지 땀 흘려 일하라는 창세기 3장 19절을 위배했으니 고해성사 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라는 식으로 필요 이상의 과중처벌을 방지했다.사적 제재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 재판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에 대해서는 2004년 교황청에서 발표된 「종교재판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의 기록들」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상당한 연구를 진행한 끝에 가장 혹독한 종교 재판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진 에스파냐 지역의 1540년~1700년 사이에 진행된 4만 4,674건의 재판 중 1.8%만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 대부분이 궐석 재판 형식으로 진행되어 인형이 대신 처형되었으며, 실제로 처형된 사람은 0.1%에 불과했다. 종교 재판 역사상 총 12만 5천 건의 재판 중에서도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은 99명(에스파냐 59명, 이탈리아 36명, 포르투갈 4명)에 불과했고, 근대 시대 개신교와 시민 법정에서 약 10만 건의 재판이 열려 절반에 해당하는 5만 명이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비교하면 훨씬 관용적이었다.1.2 구출 수도회11세기 이슬람화된 북아프리카 지역의 해적들이 지중해를 통해의에 기반한 구출 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그 고귀한 행동에 대해서는 올바른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당대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돌아볼 필요성이 있다. 지중해의 바다에 평화와 안전이 사라진 상황에서 북아프리카에 근거리를 둔 이슬람 해적들은 손쉽게 지중해를 건너 유럽 각지 해안을 넘보기 시작했다.이슬람 해적이 기독교 국가들을 처음으로 공격한은 것은 652년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함 이슬람 해적들이 시칠리아 섬의 대도시인 시라쿠사를 습격해 도시를 약탈하고 약 800명에 달하는 남녀를 납치해서 알렉산드리아의 노예 시장에 팔아버린 것이 수 세기 동안 유럽을 괴롭힐 해적질의 시초였다. 이들 이슬람 해적들은 배후에 위치한 국가와 이슬람교에 의해 공인받은 이들이었고, 자신들의 해적 활동을 공인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해당 지역의 총독에게 수익의 일부분을 상납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당시 군사력의 부족으로 바다의 안전까지 책임질 수 없었던 교황령과 교황은 속수무책이었고, 통일되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십자군 역시나 성지의 탈환에 집중하느라 납치당한 기독교인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언제나 이슬람 해적들의 위협에 노려지는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망루를 세우고 해적들의 등장에 신경을 곤두서면서 두려워하는 것이 전부였다. 또한 해적들 역시나 지위나 높거나 부유한 이들은 납치할 경우의 후환을 생각해서 되도록 피했고, 납치해도 별 후환이 없을 가난한 이들을 주로 납치했다.이러한 상황에서 납치된 기독교인들을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든 이들이 구출 기사단과 구출 수도회였다. 자신들이 각지에서 기부받은 돈을 들고 몸값을 치른 끝에 약 6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약 100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을 구출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몸값을 낼 수 없었던 이들만 구출했고, 이들 중에는 훗날의 명작 돈키호테의 저자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들의 선의의 활동이 하나로 신대륙의 은 채굴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수은을 은으로 정제하는 방법을 숙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건강상의 후유증을 이유로 기피했는데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에게 생산성만을 중시해 수은 정제법을 강요했고, 그 결과 많은 원주민들이 중독사했다. 문제는 이렇게 얻은 귀금속과 자원들을 유럽으로 가는 배로 나르는 과정에서도 가혹한 처우로 인해 수백 명의 원주민들이 사망하는 등 가축과 다를 바가 없는 대우에 이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바다 너머의 본국과 교황청에 보고한 것이 바로 현지에 파견된 선교사들이었다.선교사들은 정복자들에게 원주민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이들에게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가혹한 노동 환경의 개선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복자들로 대표되는 엔코미엔다 세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생각에 선교사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는 한편 원주민들은 인간 이하의 가축이며, 이들을 인간처럼 대우하는 것이 도리어 신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는 선교사들이 원주민 국가를 무너트리는 과정에서는 협력했을지라도 정복자들이 정복에 따른 정복과 경제적 이익이 목적이었다면 선교사들은 저들을 계몽시킬 생각으로 접근했던 것에서 나오는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기독교 신앙 전파의 대상이기도 한 원주민들이 정복자들에 의해 그 숫자가 급격하게 감소하자 이들은 신대륙의 각 지역을 두 발로 돌아다니면서 원주민 노예 노동의 실상을 조사하고자 했다. 이에 엔코미엔다 세력 역시지지 않고 이들을 강제로 쫓아내거나 인적이 없는 곳에서 살해하고 원주민의 공격으로 위장해 원주민의 대우 개선에 대해 반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해먹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노력 끝에 그들이 조사한 신대륙의 실상과 원주민 인구의 급격한 감소 현상에 대한 보고서가 에스파냐 왕실과 교황청으로 전달되었다.에스파냐 왕실과 교황청은 이와 같은 정복자들의 행동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선교사들의 보고서처럼 자세한 정보와 물증이 없었기에 선교사들의 보고서가 도착하자 자신들도 제대로 된 조사원을 파풍습과 인신공양 등을 제시하면서 원주민이 이와 같은 자연에 반하는 죄를 계속하는 동안은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선교사 측의 라스 카사스는 세풀베다가 근거로 제시한 식인 풍습과 인신공양에 대해 고대 로마와 켈트족, 게르만족을 사례로 들면서 과거의 유럽인들 역시 식인 풍습과 인신공양을 자행했다고 반박했다.이에 대해서 라스 카사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이 이러한 야만의 상태에서 주 예수와 사도들, 선교사들의 사랑과 희생으로 교화되었으니 원주민들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들이 그들만의 문명을 명백하게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재산권을 법과 교회의 이름으로 보호할 필요와 함께 교황과 기독교 군주라는 칭호만으로 다른 문명에 대한 정복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또한, 개종하지 않은 원주민의 생명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며, 마지막으로 무력이란 수단은 오직 기독교 전도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이들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양측의 대표자가 이후에도 몇 차례 길고 긴 토론 끝에 바야돌리드 논쟁은 종결되었다. 양측 모두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했지만 교황청에서 파견한 전권 특사는 라스 카사스의 편을 들어서 신대륙의 원주민들이 가축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했고, 이에 대한 타협안으로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을 원주민 대신 신대륙으로 보내 써먹으라는 결정을 내렸다. 교황청의 이러한 결정은 유럽 각국에 퍼졌고, 이를 두고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드 몽테뉴는 바야돌리드 논쟁에 대해서 유럽인들은 으레 남들의 죄악은 논하는 것을 즐기면서도 자신의 악은 찾지 못한다고 한탄했다.바야돌리드 논쟁을 통해 유럽은 아주 잠깐이나마 자성할 수 있었지만 신대륙 원주민의 대우는 나아졌을지언정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이 신대륙으로 끌려오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이에 일평생을 신대륙을 위해 봉사했던 라스 카사스는 유럽에서 자신의 집필 활동에 몰두하다가 원주민 노예들 못지않은 흑인 노예들의 참상을 뒤늦게 확인하고 바야돌리드 논쟁에서
    인문/어학| 2021.07.26| 7페이지| 3,000원| 조회(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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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진 시대의 역사 인식
    동진 시대의 역사 인식이@@목차1. 서론2. 본론1) 습착치2) 손성3) 습착치와 손성의 역사 인식4) 배송지5) 배송지의 역사 인식3. 결론참고문헌1. 서론위진남북조 시대는 서진 말기 황족들의 내부 권력 투쟁이었던 팔왕의 난(八王之亂)과 그 혼란을 틈타 북방 이민족이 일으킨 영가의 난(永嘉之亂)으로 한족 역사 최초로 이민족에게 화북과 중원을 상실하고 강남 지역으로 쫓겨나는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한족이 상실한 화북와 중원에는 5호(五胡)에 의해 오호십육국 시대가 도래했다. 중국 역사에서도 다른 혼란기에 못지않게 손꼽히는 혼란기였던 오호십육국 시대에 중국의 남쪽인 강남에는 멸망한 서진의 황족 사마예(司馬睿)와 호족들에 의해 동진이 건국되었다. 원제로 즉위한 사마예는 장강 이북으로 나아가 북쪽의 5호를 제압하려는 의지는 없었기에 동진은 강남에 한정된 영토만을 지배하게 되었다. 중국의 북부에 오호십육국이 자리 잡고 남부에 동진이 자리 잡고 있던 이 시기는 혼란한 시대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뛰어난 사학자들이 배출된 시기이기도 했으며, 각기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북조와 남조 간의 정통성 경쟁으로 인해 정통사상이 팽배하고 남북조 간의 정통만이 아니라 위, 촉, 오 삼국 간의 정통성 다툼과도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그렇기에 본고에서는 기존의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위진남북조 시대에서도 동진 시대의 사학자 습착치(習鑿齒, ?~384), 손성(孫盛, 302~373), 배송지(裴松之, 372~451) 등 3인의 행적과 관련해 이들이 위, 촉, 오, 그리고 진나라로 이어지는 정통과 관련된 역사 인식에 관해 탐구하고자 한다. 우선 활동 시기가 일치하는 습착치와 손성의 경우 두 사람 모두 당대의 권력자인 환온(桓溫)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의 불온한 의도에 저항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습착치는 『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 촉나라를 촉한(蜀漢)이라고 지칭하면서 최초로 촉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촉한과 함께 진나라의 정통성을 주장했으며, 손성은 『위씨춘추(魏춘추에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25∼57)부터 서진 민제(愍帝, 313∼316)까지의 약 300년을 범위로 잡아 그 정통성을 촉한과 진나라에 두면서 위, 촉, 오의 역사를 함께 다루었다. 선양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려던 당대의 권력자인 환온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습착치는 위가 후한에게서, 서진이 위에게서 선양한 것을 두고 기만 가득한 선양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렇기에 후한에서 위, 위에서 서진으로 이어지는 전례를 따라 선양을 계획한 환온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그는 후한에서 촉, 촉에서 서진으로 이어지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을 주장했다. 가장 먼저 습착치는 한 황실의 후예인 소열제(昭烈帝)가 촉한(蜀漢)을 건국했기 때문에 촉한이 존재하는 한 위가 후한에서 선양받은 것이 정통성의 부여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그렇기에 습착치는 저작의 제목을 위진춘추가 아닌 한진춘추로 했으며, 서진이 정통성을 부여받은 사정은 서진이 위로부터 선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촉한을 항복시켜 그 정통성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습착치는 환온에게 기존의 선양 논리를 통해 정권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위해 한진춘추를 저술한 것이었다. 이렇게 습착치가 저술한 한진춘추는 모두 5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일부가 망실되었고, 배송지(裴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서 상당수 인용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한진춘추의 저술 이후 습착치는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고 고향인 양양으로 돌아갔다. 때마침 양양은 366년 전진(前秦)의 부견(?堅, 337~385)이 형주를 공격하고 점령하여 전진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 부견은 습착치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습착치와 친분이 있는 승려 도안(道安)과 함께 초빙하여 우대했다. 하지만 이후 재차 동진이 양양을 탈환했고, 양양에서 머물던 습착치는 조정으로부터 새로운 국사 편찬을 담당해줄 것을 지시받았지만 384년 무렵에 사망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2) 손성(孫盛)손성(孫盛, 302~373)은 위나라에서의 산악 지방에 살던 요족(?族)이 산 아래로 내려와 난리를 부리는 등 내부로부터 점점 무너지고 있었고, 환온은 직접 성한의 수도 성도(省都)로 진군했고, 손성은 그동안 치중을 담당하여 물자를 노리는 적들을 여러 장수를 배치하여 격퇴하였다. 성한이 멸망한 이후에는 안회현후(安懷縣侯)에 봉해졌다. 성도에 입성한 손성은 촉한을 건국한 소열제의 후손 유현(劉玄, ?~?)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이후 손성은 환온을 따라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으며, 관중을 통해 낙양 땅을 밟았다. 이 시기에 그의 작위는 오창현후(吳昌縣侯)가 되었고, 장사태수(?沙太守)로 임명되었다. 환온을 따라 출세를 거듭한 그는 점차 부와 가까워져 부정을 자주 범했으며, 주변에서는 이를 알고도 손성의 명성에 감복하여 이를 따지지 않았다.손성은 노후에 『위씨춘추(魏氏春秋)』 20권, 『진양추(晋陽秋)』 32권, 『촉세보(蜀世譜)』 등의 여러 저작을 저술했다. 그 중 진양추의 내용에서 환온의 북벌 과정에서 있었던 패배를 기록하자 환온은 이에 대해 자신의 정치에 이롭지 못하다고 그 부분을 손성의 자식에게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손성은 연로하여 자신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손성의 자식들이 환온의 요구를 전하면서 무릇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헤아려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손성은 화를 내면서 전연(前燕)의 모용준(慕容儁, 319~360)에게 자신의 저작을 보내 환온이 자신의 입맛대로 진양추의 내용을 수정해도 훗날 이를 알 수 있도록 조치하고 72세의 나이에 사망했다.3) 습착치와 손성의 역사 인식습착치와 손성은 상술한 것과 같이 동진의 왕권이 약해지고 당대의 권력자인 환온이 권력을 장악하고 선양을 받아 정권을 탈취하려던 동시대의 사람이었다. 습착치와 손성 모두 당대의 권력자인 환온과의 접점이 없지 않았으나 습착치는 회계왕 사마욱에 대한 환온의 질문에 그가 의도하지 않은 대답을 하면서 그의 야망에 함께할 것을 거부하였고, 훗날 한진춘추를 저술하여 위선 가득한 그의 선양 계획을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반면 았다는 낙불사촉(樂不思蜀)의 일화 역시 그의 저작 한진춘추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습착치는 자신의 고향 양양의 인물과 풍물 등을 기록한 『양양기(襄陽記)』에서 제갈량의 남중(南中) 정벌에서 마속의 뛰어난 계책으로 제갈량의 남정 이후 남중에서는 한 번의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잘못된 기록을 전하기도 했는데 233년 남만의 우두머리 유주(劉胄, ?~233)가 반란을 일으켰고 촉나라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남만의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습착치는 도리어 촉이 아니라 진나라의 인물들에 대한 과도한 찬미를 일삼았다. 특히 사마사(司馬師, 208~255)의 동오 정벌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사마 대장군은 두 번의 실패를 모두 자신의 허물로 삼았다. 이로써 허물은 사라지고 업적은 더해졌으니 지혜로운 일이다. 만약 이때 실패를 꺼리고 남들에게 허물을 돌려 자신은 항상 공을 취하고 실패를 감추었다면 위아래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므로 일이 아주 난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군주된 자가 이러한 이치를 장악하여 국가를 다스리면 만약 실수를 행하여도 명성을 드높일 것이며, 군사에서 좌절해도 싸워서는 이길 것이다. 비록 백 번을 실패해도 괜찮을 것인데, 하물며 두 번의 패배에야 어떻겠는가.”습착치는 사마사의 동생 사마소(司馬昭, 211~265)가 제갈탄(諸葛誕, ?~258)의 난을 진압했을 때에도 그 찬양의 정도가 심해 남송(南宋)의 호삼성(胡三省, 1230~1302)이 직접 습착치가 본디 사마씨가 세운 진나라 사람이기 때문임이 분명하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이처럼 습착치는 최초로 사서를 통해 촉한정통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논지는 촉한을 정벌한 진나라에게 정통성이 있다는 논리였기에 진나라의 실질적 창건자라고 할 수 있는 사마소와 사마소 형제에 대한 지나친 찬미는 그의 오점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개인적으로 가난했던 탓에 부정에 손을 대었던 손성의 경우는 어땠을지 살펴보고자 한다.손성의 경우는 여러 저작을 남겼는데 지방의 점령에 큰 공을 세운 법정(法正, 176~220)이 원한이 있는 사람들을 사사로이 죽이는 것을 막지 못했기에 문제가 있었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손성은 위, 촉, 오의 군주들은 물론이고 인물들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편이었다. 습착치의 경우 촉한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진의 인물들을 지나치게 찬양했지만 환온에게 협력하는 것을 일찍이 거부하였고 사료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손성보다 나은 점이 있었다. 반면 손성의 경우 습착치보다 환온과 영합하여 권력을 누렸으며 부정을 저질렀다. 하지만 저작의 신뢰성이 부족하기는 하나 위, 촉, 오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편파적이었던 습착치에 비해서는 공평한 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4) 배송지(裴松之)배송지(裴松之, 372~451)는 후한 말에 삼보의 난(三輔亂)을 일으켰던 이각(李?, ?~198)을 주살한 배무(裴茂, ?~?)의 후손으로 사예(司?) 하동(河東)의 명문가 하동 배씨에서 태어났다. 배송지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는데 8살 무렵에 『논어(論語)』에 통달하여 좌중의 감탄을 일으켰고, 몸가짐과 씀씀이도 검소하여 20살 무렵에 전중장군(殿中將軍)의 관직을 받게 되었다. 33살 무렵 상서사부랑(尙書祠部郞)이 되었으며, 배송지는 사사로이 세운 비석 사실과 다른 것이 있기 마련이기에 관에 허가 없이 선조의 비석을 세우는 것을 금지할 것을 상소했다. 이후 남연(南燕)을 정벌하고 동진 내부의 세력을 제압한 상태에서 마지막 군벌인 사마휴지(司馬休之, ?~417)가 후진(後秦)으로 망명하자 당대의 권력자인 유유(劉裕, 363~422)는 북벌을 시작했는데 배송지도 이 북벌에 사주(司州)의 주부(主簿)로 동행하였다. 417년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옛 수도 장안(長安)을 수복하자 유유는 낙양(洛陽)에 위치한 서진 황제들의 능을 수리하도록 했는데 배송지는 이 시기에 사예에 기거했다.이후 송나라를 건국한 유유는 배송지에 대해 “정치가로서의 기량이 훌륭하니 벽지에 놔둘 인물이 아니다. 근시일에 불러들여서 세자의 스.
    인문/어학| 2021.07.26| 9페이지| 2,000원| 조회(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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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3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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