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독일의 과거 청산
- 최초 등록일
- 2021.07.26
- 최종 저작일
-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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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랑스와 독일의 과거 청산"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프랑스의 과거 청산
2. 독일의 과거 청산
Ⅲ. 결론
본문내용
서론
2차 세계대전의 전체 사상자는 7~8천만 명으로 이중에서 5천만 명 이상은 민간인이 대상이었다. 개중 대부분의 전쟁범죄는 추축국에 의해 자행되었지만 연합국의 전쟁범죄 역시 존재했으며, 그 심각성은 아주 중대한 것이었다. 이 끔찍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결된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각자 나치 독일에 협력한 친독 세력과 나치 독일에 대한 과거 청산 움직임이 있었다. 그 전개 양상은 두 나라가 처한 상황과 승자와 패자의 지위에 따른 차이로 말미암아 큰 차이를 보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 청산이 벌어진 나라는 프랑스와 독일 말고도 존재하지만 본고에서는 어디까지나 두 나라의 사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본론
1. 프랑스의 과거 청산
1940년 6월 13일 나치 독일에 의해 파리가 함락당한 프랑스는 폴 레노(Paul Reynaud) 총리가 나치 독일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휴전을 통해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주화파들의 압력으로 물러나고 레노 총리에 의해 부총리에 임명되었던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페탱이 프랑스의 새로운 국가수반이 되었다. 페탱은 독일에 정전협정을 호소한 끝에 6월 22일 콩피에뉴(Compiègne) 숲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휴전 협정 제3조에서는 프랑스 정부가 원할 시 파리를 다시금 수도로 삼을 수 있다고 명시되었으나 페탱은 이를 거절하고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비시(Vichy)를 임시 수도로 선택했고, 휴전 협정 결과 프랑스는 국토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고, 독일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른바 비시 프랑스(Vichy France)의 탄생이었다. 이후 비시 프랑스는 페탱을 위시한 일부 매국노를 제외하고 폴 레노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주요 관료들과 도지사 등 고위 관료 약 2,800명을 체포해 독일 내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고, 185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군 포로들은 석방되지 못한 채 독일의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 등에 동원되었다.
참고 자료
저서
주섭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연대, 2017
논문
송충기, 「뉘른베르크 재판과 나치청산」, 『역사교육』 93호, 2005
이동기, 「‘독일배우기’와 독일 과거청산의 함의」, 『내일을 여는 역사』 52호, 2013
이용우, 「프랑스의 대독협력자 숙청에 대한 여론과 기억」, 『서양사론』 92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