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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속 화폐의 발전
    금속 화폐의 발전목차1. 금속 화폐의 정의1) 금속 화폐란?2) 조선 시대 이전의 금속 화폐① 건원중보에 관하여② 은병에 관하여2. 금속 화폐 유통의 추진 배경과 그 영향1) 금속 화폐 유통의 배경2) 17세기 전반 동전 유통의 시작3) 17세기 후반 숙종 시기의 동전 유통 정책4) 18세기 초반 영조 시기의 동전 유통 정책5) 18세기 초반 - 19세기 중엽 동전 유통의 확대3. 민간의 금속 화폐 이용1) 민간의 금속 화폐 이용 사례4. 금속 화폐의 한계와 의의1) 금속 화폐의 한계① 전황에 관하여② 갑리에 관하여2) 금속 화폐의 의의5. 참고 문헌본문1. 금속 화폐의 정의1) 금속 화폐란?금속 화폐란 귀금속 자체 혹은 귀금속으로 주조된 화폐로 전자의 경우를 청량화폐(秤量貨幣), 후자의 경우를 주조화폐(鑄造貨幣)라고 한다. 물물교환 경제에서 화폐로 사용된 가축, 곡물, 고재, 피혁 등과 같은 물품 화폐와 비교하여 금속 화폐는 소액 거래를 위한 세분화가 가능하며, 주조 기술의 발달에 따른 표준화가 가능하고, 강한 내구성과 편리한 휴대 등의 특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귀금속을 화폐로 사용하는 만큼 주조와 유통에 따른 비용이 발생하게 되며, 귀금속의 채광량과 제련 기술 등의 요인으로 인해 화폐의 공급에 제한이 생길 수 있다는 단점 또한 가지고 있다.2) 조선 시대 이전의 금속 화폐한국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금속화폐는 기원전 6세기의 명도전(明刀錢)으로 이는 중국 북쪽에 있던 연(燕)나라에서 만든 금속 화폐로, 연나라와의 교역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문헌 기록에 따르면, 고려 성종 15년(996)에 최초로 추포(품질 나쁜 베)의 사용을 금지하고 철전(鐵錢)을 유통시키고자 건원중보(乾元重寶)를 발행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철전의 유통을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에 베와 곡물을 계속 사용하도록 정책을 바꿔야 했다. 그러다가 고려 숙종 2년(1097)에 주전도감을 설치하면서 금속 화폐가 다시 등장하였는데, 이때는 은을 원료로 병처럼 생긴 은병을 주조 금속 화폐 유통의 추진 배경과 그 영향1) 금속 화폐 유통의 배경금속 화폐의 유통에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군의 상업 활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명군의 참전으로 금속 화폐인 전화가 일반적인 교환 수단과 가치저장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는 17세기 서울의 상업에 큰 영향을 끼쳐 이후 조선의 경제가 청나라의 은경제권에 편입됨으로써 대외 교역의 활성화에 기반한 유통 경제가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은화 유통 경제는 전쟁 상황에서의 한 단면으로 전쟁이 끝난 뒤, 은화 공급이 중단되자 은화 부족으로 다시 16세기로의 회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은화는 청과의 무역에서 일반적인 지불 수단과 구매 수단으로의 기능을 했지만 국내 유통에서의 가치척도와 일반적인 교환 수단, 가치저장 수단으로서의 기능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은화 유통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차원에서 나타난 것이었고, 서울에서는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필요와 조세의 금납화로 교환의 매개로써 이미 은화의 유통이 매우 보편화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금속 화폐의 유통의 경제적 토대가 정착될 수 있었고, 이러한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인조 때 동전을 주조하여 개성을 중심으로 통용시켜 쓰임새를 확인하고 효종 때부터 널리 유통되기 시작했다. 숙종 4년(1678)에는 상평통보라는 동전을 주조한 이후 계속하여 막대한 화폐를 주조하였는데 17세기 말에는 이미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여 상평통보의 유통이 더욱 확대되었다. 그 후 화폐는 교환 수단이자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2) 17세기 전반 동전 유통의 시작선조 31년(1598) 4월과 선조 36년(1603) 6월에 우의정 유영경 등이 동전의 주조, 유통 문제를 건의했으나 한갓 논의에 그쳤을 뿐 실현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17세기 전반기에 최초로 동전을 주조, 발행한 것은 인조 3년(1625)이었다. 그 해 1651) 5월에 다시 동전의 주조 발행 방침을 결정하게 되었다. 즉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군기 제조를 중지하고 동전을 주조하고 발행하도록 하였다. 북벌 정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군비를 강화하고 있던 당시에 군영으로 하여금 군기 제조를 중지하고 동전을 주조 발행하게 했다는 사실은 정부가 얼마나 동전 유통 정책을 중요시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한편 정부는 효종 2년(1651) 7월에 민간인에게 주전을 허가하였다. 민간인에 주전을 허가해주자는 문제는 인조 1년(1623) 이래 종종 논의되어 오다가 인조 13년(1635)에는 그것을 허가한 선례가 있었다. 효종 4년(1635) 1월에 황해도, 평안도에 이어서 서울에 동전을 유통하기로 결정하고, 뒤이어 영의정 김육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영남의 지방 관청에 동전을 주조하고 유통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것은 이미 주전을 민간인에게 허가해준 상황에 지방 관청으로 하여금 동전을 주조하고 유통하도록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 하게 취해진 조치였던 것 같다.3) 17세기 후반 숙종 시기의 동전 유통 정책숙종 4년(1678) 정월 조정은 호조, 진휼청, 상평청 등 중앙 7개 아문에서 일제히 동전을 주조하여 전국에 유통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이 때 주조된 동전이 엽전으로 불리는 상평통보였다. 그리고 그 해 3월에는 행전절목을 마련하고 4월부터 정식으로 동전을 법화로 사용할 것은 결정하였으며, 6월에는 평안도와 전라도의 감영 ? 병영에서도 주전하도록 하였다. 이때의 행전절목(行錢節目)은 효종 연간에 시행하였던 행전책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그 주요 원칙은 동전가치를 은가를 기준으로 정하여 동전 4냥을 은 1냥으로 결정한다는 것이었다.이 같은 동전 유통 원칙은 기존의 고식적인 화폐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은전상준의 원칙과 어용상인 중심의 행전책은 동전 유통을 추포에 기반을 둔 지방 장시망과 연계시키기보다는 주로 특권 상업이 발달한 은화 통용 지역에 한정하고 은가를 기준으로 동전가치를 정해 주전 이익을 보장받기 유통의 발달은 농민층과 화폐 경제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어 농민층은 화폐를 얻기 위한 상품 생산과 교환 관계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일부 역농층(力農層)이나 지주층에게는 상업적 농업을 통한 이윤 축적의 좋은 계기가 되었지만, 경영 조건이 열악한 많은 농민층에게는 오히려 몰락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화폐 경제가 확립되면서 농민층은 농업 생산 재료나 생활필수품을 구하기 위해, 또 조세 납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전 마련을 위한 교환 시장에 편입되었다. 이 때 농민층은 시장 가격의 계절적, 지역적 변동에 의해 농업 생산물은 싸게 팔고 필요한 물건은 비싸게 사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실태였고, 많은 경우 자신의 필요 생산물까지 값싸게 팔아야 하는 이른바 궁박판매(窮迫販?)에 의해 파산하고 몰락하였다.뿐만 아니라 화폐 경제의 확립은 농민층을 전반적으로 고리대 수탈로 몰아넣었다. 화폐 유통은 양반 귀족과 지주들의 재부 축적 욕심과 사치 생활을 유인하여 이들은 동전을 집적하고 이를 고리대로 활용하였다. 고리대는 오래된 봉건 지배층의 농민 수탈 방법이지만 특히 이 시기에는 화폐 유통을 계기로 급속히 확대되었고, 그 수탈 또한 극히 가혹하였다. 양반 지주나 토호들은 필요한 동전을 마련하지 못한 농민이나 식량이 궁한 농민에게 춘궁기에 연 50~100%의 이자로 동전을 빌려주고 곡가가 하락하는 추수기에 동전을 곡식으로 환산하여 원금과 이자를 반환하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원금의 5, 6배나 되는 이익을 보았고, 이를 갚지 못한 농민층은 결국 토지를 빼앗기고 몰락하였다. 이를 흔히 갑리(甲利)라고 하는데, 이는 화폐를 이용한 민간 고리대 곧 사채로서, 당시 중앙 및 지방의 관청에서는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방편이나 축재 수단으로서 공공연하게 화폐를 퇴장시키고 이를 고리대로 사용하였다.18세기 초부터 대두한 전황은 다음과 같은 사회 경제적 변동을 동반하며 정착한 초기 동전 유통의 성과와 한계를 반영한 현상이었다. 전황은 시중에 동전 유통량이 부족하여 화폐 가치가 동전 1문의 무게를 2전 5푼에서 1전 2푼으로 줄이게 되었고, 일부 논자들은 당오전(當五錢), 당십전(當十錢), 당백전(當百錢) 등 고액전의 유통을 주장하기도 하였다.주전 사업의 재개로 비등하였던 전황 현상은 약간 진정되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전황은 화폐 경제의 발달과 봉건적 유통 경제의 해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현상이었기 때문에 동전 발행의 증대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조선 조정의 주전 사업은 단지 전황 대책의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동전 무게를 감량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주전 이익을 통해 재정을 충당하고자 하는 성격도 강하였다. 따라서 전황은 상품 화폐 경제가 더욱 발달하고 전통적 경제 구조의 해체가 가속화될수록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5) 18세기 초반 - 19세기 중엽 동전 유통의 확대18세기 전반 동전 유통에 기초하여 확립된 화폐 경제는 18세기 후반 -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였다. 동전의 유통 영역과 가치 법칙의 작용 범위가 한층 확대되어 상품 거래는 물론 노동력에 대한 대가 또한 대부분 화폐 가치로 환산되고 지불되었다. 이 시기 동전은 가치 척도, 교환 수단일 뿐 아니라 지불 수단, 축장 수단으로서도 독점적인 지위를 점하였다. 더욱이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때에는 화폐 지대의 발생과 함께 각종 조세에서의 동전 수취가 매년 수백만 냥에 이를 만큼 중대하여 농민층은 더욱 깊숙이 화폐 경제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여러 조건과 관련하여 동전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18세기 전반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대하였고, 이와 상호 인과관계를 가지면서 동전 유통량도 크게 늘어났다.영조의 통치 시기에 지속적으로 추진된 주전 사업은 정조의 통치 시기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주전 관리 체계에 대한 합리화와 통제도 모색되었다. 그 일환으로 주전 사업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기 위한 호조전관제(戶曹專管制)와 동전의 원료 난을 해소하고 동전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연례주전제(年例鑄錢制)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들.
    인문/어학| 2021.07.26| 10페이지| 2,000원| 조회(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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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송 시기 대몽항쟁사
    남송 시기 대몽항쟁사목 차Ⅰ. 머리말Ⅱ. 금(金)의 멸망과 새로운 정국1. 금 선종(宣宗)의 개봉(開封) 천도2. 오고타이(高潤台, Ogotai) 칸의 즉위와 완완진화상(完顔陳和尙)의 활약3. 채주(蔡州)로의 피난과 금(金)의 멸망Ⅲ. 명장 맹공(孟珙)의 분투와 몽케(蒙哥) 칸의 죽음1. 몽골 제국과의 첫 접전과 단평입락(端平入洛)2. 오고타이(高潤台, Ogotai) 칸의 남송 정벌과 맹공(孟珙)의 활약3. 남송의 사천성(四川省) 방어체계와 구유크(貴由, Guyuk) 칸의 즉위4. 몽케(蒙哥) 칸의 즉위와 남송 정벌5. 쿠빌라이(忽必烈, Khubilai)의 악주(鄂州) 포위전Ⅳ. 가사도(賈似道)의 집권과 양양(襄陽) 공방전1. 가사도(賈似道)의 집권과 쿠빌라이(忽必烈, Khubilai) 칸의 즉위2. 쿠빌라이(忽必烈, Khubilai) 칸의 남송(南宋) 정벌 계획3. 몽골 제국의 양양(襄陽) 포위와 남송(南宋)의 양양(襄陽) 지원4. 번성(樊城)의 함락과 여문환(呂文煥)의 투항Ⅴ. 맺음말Ⅵ. 참고Ⅰ. 머리말유라시아 대륙은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초원지대에서 등장한 한 국가에 의해 급격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바로 초원지대의 그저 그런 유목민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몽골족(蒙古族) 때문이다. 몽골족은 때마침 등장한 예수게이(也速該)와 테무친(鐵木眞)이라는 영웅의 등장으로 지금까지의 초원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하나로 통합시켰다. 테무친은 1206년 오논(Onan) 강 근처에서 몽골족을 형성하는 주요 부족들의 족장이 모인 회합, 쿠릴타이(Khuriltai)를 소집해 몽골 제국(蒙古帝國)의 건국을 선포했다. 몽골 제국은 이후 사방으로 군사 활동을 시작하는데 가장 먼저 남쪽에 위치한 서하(西夏)를 시작으로 철천지원수였던 금(金), 테무친에게 패배한 나이만족(乃蠻族, Naiman)의 왕자 쿠츨루크(克出魯克, Kuchluk)가 장악한 서요(西遼, Karakitai) 등이 그 희생물이었다. 유라시아 대부분을 정복하는 대제국의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몽골 제국의 군사력은지나 사천성(四川省)을 넘어 금나라 남쪽 방면으로,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본대가 황하(?河)를 건너 북쪽 방면으로 향해 금의 황하 이북의 영토를 모두 점령하고 남쪽과 북쪽으로 포위하면서 금은 위기에 봉착했다. 거기다 완안진화상이 지휘하는 15만의 금군이 개봉 남서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툴루이의 별동대에 패배하고 균주성(均州城)으로 퇴각하면서 금의 수도 개봉은 완벽히 포위되었다. 균주성으로 퇴각한 완안진화상은 계속해서 몽골 제국에 저항하다가 1232년에 성을 함락당하고 자진해서 출두해 처형되었다. 수도 개봉의 금군 또한, 대포 진천뢰(震天雷)를 앞세워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1233년 5월 개봉을 함락당했다.3. 채주(蔡州)로의 피난과 금(金)의 멸망애종은 간신히 개봉을 탈출해 하남성 남쪽에 위치한 채주(蔡州)로 도망쳤고 이때 금과 몽골 제국은 모두 남송에 사자를 파견해 지원을 요청했는데 몽골 제국은 이미 1232년 양양(襄陽)에 주둔하고 있던 경호제치사(京湖制置使) 사숭지(史嵩之)에게 사자를 보내 남송이 군량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금의 채주를 함께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사숭지는 몽골 제국의 이 제안을 즉시 조정에 보고했고 남송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쟁론(爭論)이 벌어졌다. 일부 신하들의 과거 북송 시기 금과 연합해 요(遼)를 멸망시켰다가, 금의 공격으로 화북을 상실했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몽골 제국과 연합해 금을 멸망시켜 북송의 옛 원수를 갚자는 대다수 신하들의 주장으로 남송 조정은 개봉이 함락당한 지 한 달 후인 1233년 6월에 몽골 제국에 사자를 보내 제안을 받아들여 맹약(盟約)을 맺었다. 금의 사자 완안아호대(完顔阿虎帶)는 1233년 8월에서야 남송의 수도 임안에 도착해 남송과 몽골 제국의 맹약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몽골은 40개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서하에 이르렀습니다. 서하를 멸망시키고 나서는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가 망한다면 그 다음은 반드시 남송일 것입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것(脣亡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출병론자들은 몽골 제국의 군대는 북쪽의 초원으로 돌아갔고 하남 일대에는 아무런 군대도 배치되어 있지 않다는 정보에 따라 화북(華北)으로 진군해 옛 북송의 영토를 수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종은 자신의 치세 동안 옛 북송의 수도인 변경(?京, 금의 개봉)과 하남 일대를 회복하는 대업을 이루고 싶어 출병론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1234년 6월 이종의 명령에 따라 맹공이 지휘하는 20만의 군대가 하남 일대를 수복하기 위해 출병했는데 몽골 제국은 이와 같은 정보를 입수하기 무섭게 증원군을 동관(潼關)으로 모으고 하남 일대를 주시하는 등 남송의 공격에 대비했다. 맹공이 이끄는 남송군은 계속된 전란과 몽골 제국의 가혹한 약탈로 무인지경이 되어버린 하남 일대에 도착해 옛 북송의 수도인 변경과 낙양(洛陽)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변경에 도착한 전자재(全子才)의 선발대는 변경에 입성한 다음 낙양과 동관을 공격하지도 않고 그저 본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남송군은 갑작스러운 출병이었기 때문에 20만의 군대를 책임질 군량을 현지에서 보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폐해진 하남 일대에서 군량을 보급할 수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몽골 제국군이 반격이 시작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하남 일대를 다시 몽골 제국에게 내준 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종의 명령에 따라 기세 좋게 출발한 지 2개월 만의 일로 남송에서는 이때의 군사 활동을 단평입락(端平入洛)이라고 일컬었다.2. 오고타이(高潤台, Ogotai) 칸의 남송 정벌과 맹공(孟珙)의 활약결국, 남송과 몽골 제국의 첫 번째 대결에서 완승한 몽골 제국의 오고타이(高潤台, Ogotai) 칸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1235년 2월 수도 카라코룸(哈喇和林, Karakorum)의 축성이 끝난 직후 쿠릴타이(Khuriltai)를 소집해 남송 공격에 대해 논의했다. 그 이후 몽골 제국의 주력군이 남송을 정벌하기 위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남송 정벌군의 편제는 크게 서로군(西路軍), 중로군(中 몽골 제국을 막아낼 수 있는 기반을 형성했다. 그가 축성한 산성은 합주의 조어성(釣魚城)을 비롯해 10개가 넘었는데 주의 중심지를 이 산성으로 옮기고 각지의 산성과 둔전을 연결해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방어체계를 수립했다. 반면 남송이 착실히 사천성의 방어체계를 강화하고 있을 때 몽골 제국은 후계자 쟁탈에서 비롯된 혼란기를 겪고 있었는데 이 혼란 끝에 1246년 오고타이의 장남 구유크(貴由, Guyuk)가 몽골 제국의 새로운 칸으로 즉위했다. 이후 구유크 칸은 오고타이 계만이 칸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는 등의 급진적인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해 귀족들의 지지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가 칸으로 즉위한 지 2년 만에 사망했다.4. 몽케(蒙哥) 칸의 즉위와 남송 정벌이후 툴루이 가문의 몽케(蒙哥)가 구유크 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칭기즈 칸의 장남인 주치 가문의 바투와 정치적 동맹 관계를 맺어 쿠릴타이를 통해 1251년 칸으로 즉위했다. 칸으로 즉위한 몽케 칸은 반대파를 제압하고 제국 내부의 정비를 마친 후 동생 쿠빌라이(忽必烈, Khubilai)에게 중국 방면을 담당해 남송을 공격하도록 지시하고 또 다른 동생 훌라구(旭烈兀, Hulagu)에게는 중동(中東, Middle East)을 담당해 아바스 왕조(Abbasid dynasty)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중국 방면을 담당하게 된 쿠빌라이는 고비사막(戈壁沙漠, Gobi Des) 남쪽에 위치한 금연천(金蓮川)을 근거지로 삼아 남송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그 주변국을 복속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우선 당시 운남성에 존재하던 후대리국(後大理國)을 침공해 1254년에 멸망시키고 1239년 오고타이 칸의 차남 쿠텐이 점령하려고 시도했던 티베트(土伯特, Tibet)와 함께 베트남(越南, Vietnam)을 공격했다. 이때 그는 유학자 왕악(王?)을 몽골로 초청하고 성리학자 왕순(王恂)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기는 등 친중국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후 제국 내부의 일을 마무리하고 쿠빌라이가 독립적인 세력이 되려는 움직임을 포착한 몽케 를 우승상겸추밀사(右丞相兼樞密使)로 삼아 구원군을 총괄하도록 하고, 평민 출신의 장군 여문덕(呂文德)을 경서호북안무제치사(京西湖北安撫制置使)로 삼아 사천성의 군대를, 또 다른 장군 상사벽(向士壁)에게는 호남성의 군대를 이끌고 신속히 악주를 구원하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악주를 구원하기 위한 남송군이 도착하자 쿠빌라이는 곧 있을 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더 많은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한편 운남성을 통해 남송의 남쪽 방면을 공격하던 별동대를 지휘하는 우량카다이를 고립시키지 않고 합류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남송군이 양자강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태세를 갖추었다. 남송군은 쿠빌라이의 중로군이 양자강에 딱 버티고 있어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해 양군 사이의 대치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우량카다이의 별동대가 호남성의 담주(潭州)를 돌파하지 못해 합류가 생각보다 늦어지면서 대치 상황이 4개월 동안 계속되자 쿠빌라이는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을 접고 우량카다이의 별동대와 합류해 북쪽으로 후퇴하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악주 구원군을 총괄하는 가사도가 쿠빌라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조정의 허락을 얻지도 않고 단독으로 남송이 몽골 제국에 칭신(稱臣)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칠 테니 군대를 물려달라는 밀서를 보낸 것이다. 당시 막냇동생 아리크부카(阿里不哥, Arikbukha)가 쿠빌라이보다 먼저 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를 소집하려 하는 상황에서 쿠빌라이에게는 가사도의 밀약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쿠빌라이는 가사도와의 밀약을 통해 군대를 북쪽으로 후퇴시켰고 우량카다이의 별동대도 양자강을 건너 북쪽으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쿠빌라이가 지휘하는 중로군의 후미를 습격해 약간의 피해를 입히고 170개의 몽골 제국군의 수급(首級)을 챙긴 가사도는 조정에 자신이 악주에서 쿠빌라이를 격퇴하고 양자강 일대의 몽골 제국군을 후퇴시켰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Ⅳ. 가사도(賈似道)의 집권과 양양(襄陽) 공방전1. 가사도(賈似道)의 집권과 쿠빌라이(忽必烈, K
    인문/어학| 2021.07.26| 10페이지| 2,500원| 조회(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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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망의 신나라와 고구려
    왕망의 신나라와 고구려담당교수 : 김@@학과 : 사학과이름 : 이@@왕망의 신나라와 고구려목차Ⅰ. 머리말Ⅱ. 전한(西漢) 말의 상황과 왕망(王莽)Ⅲ. 왕망(王莽)의 등장Ⅳ. 왕망(王莽)의 개혁과 실패Ⅴ. 왕망(王莽)과 고구려Ⅵ. 맺음말Ⅶ. 참고문헌1. 머리말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의 멸망 이후 한(漢) 고조(高祖)가 세운 한은 오늘날 중국의 원형으로 불릴 만큼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한 무제(武帝)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며 정치· 경제 · 대외적으로 많은 개혁을 시시하였다. 하지만 말기에 이르러 판단력이 흐려진 무제는 적장자인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를 비롯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무제 사후 8세의 어린 나이에 소제(昭帝)가 즉위하게 되고, 강력한 황제권이 유지되지 못함에 따라 국가 내부에 분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결국 8년에 외척인 왕망(王莽)이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2세에 즉위한 유자영(孺子?)으로부터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황위를 찬탈해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신(新)을 건국하였다. 왕망이 즉위하였을 당시의 한은 왕조 말기 현상을 하나씩 드러내고 있었다. 곧, 나라의 경제는 호족과 거상 등에 집중되어 정체상태에 빠졌고, 백성들은 빈곤과 고통에 시달려 있었으므로 사회의 불안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왕망은 유교적 이상사회에 입각한 정치, 사회, 경제의 각 분야에서의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왕망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고, 그가 건국한 신나라도 1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글에서는 전한(西漢) 말의 상황과 그 시기에 등장한 왕망, 그리고 왕망이 실시한 개혁과 고구려에 대한 외교적 정책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Ⅱ. 전한(西漢) 말의 상황과 왕망(王莽)전한 말, 나라의 경제의 파탄은 황제의 사치, 대토지 소유과 가혹한 국가 부담 등에 의한 소농민층의 몰락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전한 말기에 사회적 모순을 심화시킨 것은 황실과 제후, 그와 관거슬리는 세력들은 거칠 것 없이 처단할 정도로 그 정치적 위세도 대단했다.전한 말기에는 외척의 등장과 이들의 지위가 공고해지면서 큰 문제가 되었다. 전한 초기부터 황후나 황태후의 친가, 즉 외척들은 하사받은 식읍과 지위를 세습하였으며, 관료들로부터 뇌물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들은 신분적 배경을 이용해 여러 세대에 걸쳐 재화를 축적하고 주변 토지를 겸병하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이들은 다수의 고관들을 배출하여 당대에 그 위세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정치권력까지 휘두르기 일쑤였다. 특히나 외척들중 왕씨(王氏) 의 전횡이 극심했는데 성제(成帝)의 외삼촌인 왕봉(王鳳)이 대권을 잡자 이들의 일족 중에 고위직을 차지한 자가 모두 합해 25명이나 되었고 다른 관직도 왕씨가 독점하고 뇌물을 받아 조정의 기강을 흐트렸다. 심지어 왕봉은 무엄하게도 황제의 궁을 빌리기도 했고, 자신의 집을 붉은 색으로 칠하고 토산점대(土山漸臺)를 세웠다. 당대에 거처에 붉은 색을 칠하거나 누대를 세우는 것은 황제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이는 다른 조정 신하들의 큰 지탄을 받았다. 이에 당대의 석학이자 종실이었던 유향(劉向)이 왕씨의 위세가 한 황실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보고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으나 성제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와 같은 황제 및 외척의 무절제 이외에도, 농민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가혹한 조세, 관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농민들은 노비가 되어 호족 대지주에 예속되거나, 타향으로 도망가는 방법으로 조세의 부잠으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관료계에 진출한 호족 집단들의 대토지 소유도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점차 대토지를 경영하거나, 관영사업을 추진해가는 과정에서 막대한 재부를 축적했고,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고리대 사업에도 손을 뻗쳤다.귀족과 관료·호족 등 소수 집단에 대한 토지집중의 심화는 40여 년 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조정에서는 외척 및 총신들이 부정·부패, 정치적 특권과 경제력의 집중에 의거해 노비를元皇后) 왕씨(王氏)가 이런 왕망과 그의 어머니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왕망과 그의 어머니를 동궁에 데려왔다. 이에 왕망은 절개를 굽히고 공손하고 검박하게 행동했으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 어머니와 과부 형수를 섬기는 것에 있어서 늘 공손하고 주도면밀하였다. 또한 밖으로는 당대의 영민한 인물들과 사귀고, 안으로는 조정에서 권세를 부리는 여러 숙부들을 섬기면서 예의를 지켜왔다. 왕망의 백부이자 대장군이었던 권력자 왕봉이 병석에 있을 때 왕망은 다른 왕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병문안을 정성스럽게 했는데 병문안을 하면서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고, 스스로 직접 약을 달이고 맛을 볼 정도였다고 한다.이와 같은 왕망의 태도에 왕봉은 크게 감동해 자신이 죽기 전에 누이 효원황후와 조카 성제에게 왕망을 잘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왕봉이 죽자 왕망은 사성교위(射聲校尉)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의 명사들과 그의 숙부 성도후(成都侯) 왕상(王商), 태후 등은 모두 왕망의 올바른 행각을 성제에게 고했고, 이야기를 들은 성제도 결국 왕망이 어진 이임을 인정했다. 기원전 16년에 왕망은 신도후(新都侯)로 봉해지고 기도위(騎都尉), 광록대부(光祿大夫), 시중(侍中)의 관직에 올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더욱 검소하게 살면서 의복과 물건을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명사들을 문하에 두어 많은 권문세가들과 사귀었다. 이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서 높은 벼슬아치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그를 추천하였다. 기원전 8년에는 대사마로 있던 왕망의 숙부로 왕봉 사부 정권을 장악한 곡양후(曲陽侯) 왕근(王根)이 병환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자 이에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시중 순우장(淳于長)이 마땅히 왕근의 뒤를 이어야 했으나, 왕망은 이를 시기하여 오히려 순우장이 성제의 황후였던 허씨의 언니와 간통하였고 허씨를 희롱하였으며, 궁중의 물품을 횡령했다고 무고하여 결국 순우장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하지만 성제는 이러한 왕망을 오히 귀찮게 여기자 대신들에게 “태후께서 춘추가 높으시니 작은 일까지 걱정하시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보오.”라고 하였다. 이에 태황태후도 스스로 안한공 왕망과 네 명의 대신들이 정사를 의논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왕망은 평제의 외척인 위씨 일가가 권력을 얻을 것을 걱정하여 그들을 수도로 오지 못하게 금지했다가 나중에 위씨 일가를 멸족했는데 오직 평제의 어머니였던 위씨만이 목숨을 건졌다. 또 자신의 장녀를 평제에게 시집보내 스스로 황제의 장인이 되어 더욱 권력을 튼튼히 다졌다. 이후 왕망은 종실과 대공신들의 후대를 높은 자리에 임명하고, 2년에는 전국에 심각한 가뭄이 들자 왕망은 돈 백만 냥과 땅 30경을 빈민들에게 주어 민심을 얻고 4년에는 8천명, 이듬해에는 무려 48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고 청했다.이에 왕망은 앞에서는 이를 다 사절했지만, 뒤에서는 오히려 사람을 시켜 자신의 공덕을 칭송하고, 태평성대를 가장하게 하여 “지금은 관청에 송사가 없고, 고을에 도적이 없고, 들에 빈민들이 없으며, 길가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가져가지 않는 태평성대”라고 조작하도록 꾸몄다. 그런데 이 해에 평제가 자신의 외가가 박살난 것을 알게 되어 불만을 가지자 12월, 왕망은 이를 두려워하여 평제를 독살하게 되었다. 이후 다시금 당시 겨우 2세에 지나지 않던 선제의 현손 유영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유자영(孺子?)이라 부르고 자신이 섭정을 하면서 섭황제를 칭했다. 이미 이때부터 전한은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으며, 왕망은 선양이라는 방법으로 결국 8년 11월에 황제로 즉위하여 신나라를 세우고, 수도 장안을 상안으로 고쳐 전한을 멸했다. 그는 일명 가짜 선양의 시조가 됐는데 이러한 선양 방식은 무려 천 년 가까이 지속되어 북송 대에 이르러서야 이민족에 의한 정복왕조에 의해 끝났다.Ⅳ. 왕망(王莽)의 개혁과 실패신나라의 황제가 된 왕망은 급진적인 성격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의 개혁 정책은 유교의 복고주의에 이념적인 토대를 두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왕전제(王田 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왕망은 총 네 차례의 개혁을 통해 동전보다 지폐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도량형의 통일, 관제의 개혁, 지명의 개칭, 행정구역의 개편 등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오히려 물가가 폭등하고 제도가 복잡하게 되어 기존 제도보다 훨씬 못하고 오히려 사회의 혼란을 야기했다.그리고 무엇보다 왕장이 추진한 급진적 개혁에 대한 귀족 세력을 비롯한 기득권의 반발은 즉각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왕망의 신나라는 왕망이 주장하는 유교적 복고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조정의 부패가 한 대와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전 전한의 황제들과 다르게 흉노와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 평화를 지속하던 것을 무시하고 패권주의적인 외교 정책을 강행했는데, 왕망의 재위 기간 동안 신나라 주변의 민족들은 모두 신나라의 적이 되었다. 9년에 왕망은 흉노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의 책봉 인장을 흉노선우새(匈奴單于璽)에서 신흉노선우장(新匈奴單于章)으로 낮추게 하고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흉노의 선우는 진노하여 이듬해에 삭방(朔方)에 침입했다. 왕망은 이에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4년 동안 흉노를 공격했으나, 결국 얻은 것도 없이 철수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 구정왕(句町王)의 작위를 후작으로 낮추었는데 구정왕이 이를 무시하자 왕망은 구정왕에게 사람을 보내 만날 것을 제안했다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구정왕을 암살했다. 그리고 이때를 틈타서 20만의 군사를 보내 구정을 공격했지만, 전염병으로 태반의 군사를 잃고 말았다. 이에 반발한 서남 지역의 이민족들이 대거 왕망에게 저항하였다.또한, 서역의 여러 왕들을 후작으로 낮추고 그들을 모욕했다. 이에 언기(焉耆)가 가장 먼저 반란을 일으켰고, 13년에 서역 도호 단흠(但欽)을 죽이고 흉노에 투항하였다. 이듬해 왕망은 서역에 군대를 파견해 언기를 습격하고 구자(龜玆)를 보호하게 했지만, 이 싸움에서 대패했다. 이로 인해 신나라는 였다.
    인문/어학| 2021.07.26| 7페이지| 2,500원| 조회(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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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관과 연행사
    조선 시대의 역관(譯官)과 연행사(燕行使)이@@강@@- 목차 -머리말1. 역관(譯官)1) 역관 개요2) 역관이 본 시험3) 필수 언어4) 팔포무역(八包貿易)5) 대표적인 역관6) 역관 이야기2. 연행사(燕行使)1) 연행사 개요2) 연행사의 종류3) 연행사의 구성4) 연행사의 경로5) 대표적인 연행사6) 황재(黃梓)의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맺음말※ 참고문헌머리말명대의 조천사(朝天使)에 비해서 조선이 청에게 당한 수모로 인해 청대의 연행사(燕行使)는 다녀온다고 해서 가문의 자랑이 될 수는 없었으나 연행사는 통신사(通信使)와 함께 조선에게 있어서 얼마 되지 않는 해외에서 해외의 문물과 문화를 접할 중요한 창구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에 연행사와 통신사가 외국을 다녀오는데 걸리는 기간은 6개월에서 길게는 12개월이 걸렸다. 이처럼 교통이 어려운 상황에서 역관(譯官)들은 변화하는 세계를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어려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때문에 조선 역사의 많은 신문물이 역관들을 통해 전해질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역관들은 자신들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문물과 사상을 들여오는 것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급변하는 조선 후기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을 뜰 수 있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 역관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선발되었고, 어떠한 언어들을 배우면서 어떤 시험을 봤는지 알아보고 대표적인 역관들은 어떤 이들이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또한, 정례사행인 절행(節行)과 임시사행인 별행(別行)으로 구분되는 연행사의 종류,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 등의 삼사가 주축이 된 연행사의 구성 인원과 규모, 평양과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지나 북경까지에 해당하는 연행사의 경로, 그리고 대표적인 연행사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행사들이 남긴 기록물인 연행록 가운데서 황재(黃梓)가 쓴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과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황재의 연행록은하는 훈도와 별차가 동료 역관이었기 때문에 쉽게 연결시켜줄 수 있어서 중계무역을 통해서도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별포(別包)라 해서 내의원이나 상의원, 서울과 지방의 각 아문과 군문의 무역을 대행하기 위한 자금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포외별송(包外別送)이라고도 하며, 원래는 각 군문과 아문이 은화를 빌려주는 무역 방식이었으나, 역관에게 무역의 권리를 빌려주는 방편으로 활용되기도 해서 역관들은 이를 칭탁하는 수법으로 규정된 8포를 초과해서 무역을 했다. 하지만 별포무역을 통해 자금을 많이 가져갈 수 있었지만 자금력에서는 사상인들에게 밀렸고, 이에 1797년(정조 21)에 사행의 팔포에 홍삼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고 『삼포절목(蔘包節目)』을 반포했다. 여기서 삼포는 사행원 역관이 채워갈 수 있는 홍삼을 의미하며 이 홍삼을 포삼이라 구별했고, 포삼 1근에 정해진 세액을 징수하는게 포삼제였다.그러나 17세기 말부터 서울상인, 개성상인, 의주상인 등 사상인(私商人)들이 여마제(餘馬制)와 연복제(延卜制) 그리고 사행 역관에 부탁하거나 지방의 관아 무역을 대행하면서 국경에서 무역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18세기 이후 사상인들이 역관과 경쟁하며 서서히 대청무역의 주도권을 잡아갔다. 이에 역관들은 사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상인들의 대청무역을 막으려했으나 쉽지 않았고, 사상인들은 밀무역을 통해 더 번창해갔으며 일부는 지방관원들의 비호를 받으며 비합법적인 국경무역을 행하기도 했다.5) 대표적인 역관대표적인 역관 가문은 허생전(許生傳)의 변부자의 모티브가 된 변계영(卞繼永), 변응성(卞應星) 등을 배출한 밀양 변씨, 청나라와의 국경선을 확정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운 것에 공이 크고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저술한 김지남(金指南)과 김경문(金慶門) 부자를 배출한 우봉 김씨, 역관 장현(張炫)과 장현의 동생이자 희빈 장씨의 아버지인 장형(張烱) 등을 배출한 인동 장씨 등이 있다.(1) 설장수(?長壽) - 1341(충혜왕 복위 2년) ~ 1399(정종 이 여인을 보고 연유를 묻자 여자가 말했다. “저는 본래 남쪽 절강이 고향입니다. 서울(경사(京師))에서 벼슬을 하던 부모님이 불행히도 모두 돌아가셨는데, 객사에 모셔 둔 부모님의 영구를 고향으로 이장할 돈이 없어 부득이 제 몸을 팔러 나온 것입니다.”말을 마치고는 목메어 울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순언이 불쌍히 여겨 장사 지낼 비용을 물으니 300금이면 된다고 하므로 전대를 털어주고 끝내 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순언의 성명을 묻는 여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여인이”대인께서 성명을 말씀해주지 않는다면 첩 또한 이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홍 역관이요”라고 알려주고 나오자 일행들이 그의 오활함에 비웃었다. 훗날 이 여인은 예부시랑 석성의 계실이 되었고, 석성은 순언의 의로움을 높이 사서 조선 사신을 볼때마다 홍 역관이 왔는지 꼭 물었다고 한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선조 조 고사본말홍순언은 환국한 뒤 공금횡령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종계변무 때문에 전후 10여명의 사신을 보냈으나 아무도 정정 약속을 받아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임금(선조)이 노하여 교지를 내렸다. “이것은 역관의 죄로다. 이번에 가서 또 시정 약속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기필코 수석 통역관의 목을 베리라.” 그러자 어떤 역관도 선뜻 가겠다고 나서질 못했다. 이에 역관들이 모여 “홍순언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이 없으니, 우리가 빚진 돈을 갚아주고 그를 보내는 게 어떻겠소? 만일 그 일을 허락을 받고 돌아온다면 그에게는 행복이 보장될 것이고, 죽는다 하더라도 한이 될 일은 없을 것이오”라고 의견을 취합하여 함께 가서 그 뜻을 알리니 순언이 당장에 허락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던 홍순언은 선조 17년(1584)에 황정욱을 수행하여 북경에 이르렀는데, 조양문 밖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때 한 기병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역관이 누구시냐?”고 묻고는 “예부의 석시랑이 공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파견된 것은 역시 삼절겸연공사인데 대부분 동지사로 기록되어 있다. 동지사는 매년 음력 10월 말이나 11월 초순에 출발해 그해 12월 안에 북경에 도착해서 40~60일 동안 머무른 뒤 2월 중에 출발해 3월 말이나 4월 초순에 귀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연행이 결정되고 날짜가 정해지면 사신 일행은 궁궐에 들어가 국왕을 배알한 다음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던 반송정(盤松亭)에서 전별식을 가졌다. 부연사신들의 행차는 조선에서부터 매우 떠들썩하게 진행되었다. 중도에 전송 나온 지방관들의 술자리가 줄을 이었고, 색향(色鄕) 평양에서는 기생(妓生)과 동침하는 별부(別付)까지 행해졌다.3) 연행사의 구성당시 연행에 소용되는 경비는 여러 관청에서 분담했는데, 호조(戶曹)는 의복비를, 선혜청(宣惠廳)에서는 노자(路資)를 지급했고, 사행로 주변의 관아에서도 일부 보탰다. 사행 경비 중에 청나라 지방관이나 예부 관리들에게 안겨 줄 인정가물(人情價物)이 가장 많았다. 연행 초기에는 부채, 종이, 포목 등과 같은 물품을 주었지만 그들이 다량의 은자(銀子)를 요구하는 바람에 부담은 가중되었다. 그 때문에 조정에서는 비상수단으로 역관들에게 무역 특권을 허용해 사행 경비를 자체 조달하게 했다. 연행단의 공식 인원은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삼사를 필두로 종사관(從事官)에 역관(譯官) 열아홉 명, 의원 한 명, 제술관(製述官) 혹은 사자관(寫字官) 한 명, 화원畵員 한 명, 군관 일곱 명, 만상군관(灣上軍官) 두 명, 우어별차(偶語別差 )한 명 등 총 35명이었다. 그 외에도 사신들의 말을 몰고 가는 견마잡이를 비롯해 짐말을 모는 마부와 하인 등을 포함하면 300명에서 500명 정도의 인원이 사행에 참여했다. 주요 교통수단이던 말은 중국에 전달할 물품과 소요 물품을 실어야 했으므로 200여 필 이상 동원되었다. 정사는 사행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는데 관직과 품계에 따라 사행의 등급이 결정되었다. 부사는 정사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서장관은 사신단 일행을 감독, 관리하·반정균(潘庭筠)·육비(陸飛) 등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북경 방문은 『연기(燕記)』 속에 상세히 남아 있다. 그의 연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다.특히, 이 기록 가운데 『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인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 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과학사상을 담은 『의산문답(醫山問答)』 역시 북경 여행을 배경으로 쓰였다.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숨어 사는 실옹(實翁)과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 사이에 대화체로 쓰인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전설·생명관·우주무한론으로 전개되는 홍대용의 자연사상은 상대주의의 입장으로 일관된 것으로, 이와 같은 상대주의는 그의 사회사상에 연장, 발전된다.첫째, 그는 중국과 조선 또는 서양까지를 상대화하여 어느 쪽이 화(華)이고, 어느 쪽이 이(夷)일 수 없다고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한다. 둘째,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한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과거의 인본적(人本的)인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것으로 상대화하였다. 셋째, 그는 당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그의 과학사상과 그에 바탕을 둔 사회사상 등은 상당한 독창성을 보이고 있지만, 서양 과학과 도교적인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서양 과학의 근본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관측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서를 썼으며, 여러 가지 천문다.
    인문/어학| 2021.07.26| 24페이지| 3,000원| 조회(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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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외 반려동물 관련 산업 분석1. 국내 반려동물산업(1) 반려동물 사료 및 간식2018년 통계청의 인구총조사에 의하면 반려견 양육 가구는 약 454만 가구, 반려묘 양육 가구는 약 112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4분의 1이 넘는 수준으로 네 집 가운데 한 집은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시대입니다. 반려동물을 양육하는 가구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국내 반려동물의 사료 시장의 증가를 의미하며, 2015년에 4,800억 규모였던 반려견 사료 시장은 2018년 5,500억 규모로 성장했고, 반려묘 사료 시장은 2015년 1,200억 규모에서 2018년 3,000억 규모까지 3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성장했습니다. 그 결과 2020년 국내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 규모는 약 1조 규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또한, 반려동물 양육 가구가 증가하면서 특정 사료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거나 사료의 영양을 꼼꼼히 따지는 사료에 각별히 신경 쓰는 소비자들도 덩달아 증가했으며, 동물병원 수의사와의 상의를 통해 간식 하나를 고를 때에도 건강 보조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내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 가능성에 대해 글로벌 기업 중 세계 사료 시장 점유율 1위에 달하는 로얄캐닌은 2017년 전라북도 김제에 960억 규모의 투자를 통해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선점을 위한 생산기지 확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1968년 프랑스의 수의사 장 카타리가 자신이 키우던 셰퍼드 품종의 피부질환이 사료를 바꾸고 나서 치료된 경험을 바탕으로 설립한 로얄캐닌은 오늘날 세계의 160개국에 진출했으며, 반려동물의 품종, 나이, 라이프스타일, 건강 상태 등에 따른 약 200종의 사료 제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글로벌 기업의 수입 사료가 대다수를 차지한 국내 사료 시장에서 하림 그룹의 반려동물 식품업체 하림펫푸드 같은 국내 업체도 출범 4년만인 2021년에 한 해 매출 약 198억 규모를 달성하는 등 국내 사료 시장에서 큰 반려동물의 진료비 표준화는 시장 논리에 맞지 않으며, 일본처럼 반려동물 보험 보험사와 동물병원이 제휴해 보험상품을 개발하는 방안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응해 반려동물의 질병 항목에 대한 표준화 작업 시행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3) 반려동물 장묘국내의 반려동물 장묘와 관련된 합법 장묘업체는 ‘동물보호 관리시스템’에서 확인 가능한 총합 55곳이 존재하며, 지역별로 강원도 2곳, 경기도 21곳, 경상남도 8곳, 경상북도 5곳, 전라북도 2곳, 충청남도 4곳, 충청북도 5곳, 광주 1곳, 대구 1곳, 부산 2곳, 세종 1곳, 울산 1곳, 인천 2곳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단일 지역별로 경기도 광주시가 6곳으로 제일 많았으며, 그 다음으로는 경기도 김포시가 5곳, 경상남도 김해시가 4곳으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해당 장묘업체들의 장묘 가능한 반려동물 종류와 크기까지는 알 수 없지만 지역별 분포를 봤을 때 20호 이상의 인구 밀집 지역 혹은 다수가 집합하는 시설 및 장소로부터 300m 이상의 거리에서 영업 가능한 특성상 과도한 인구 밀집으로 장묘업체의 영업이 불가능한 서울, 도서 지역인 제주도, 광역시 중 유일하게 약 150만의 인구에도 불구하고 장묘업체가 없는 대전, 전라북도의 2곳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전라남도처럼 아예 장묘업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타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지역도 존재했습니다.또한 해당 장묘업체들이 모두 장례, 화장, 봉안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구 같은 경우 유일하게 존재하는 장묘업체가 장례만 담당하고, 인천의 경우 존재하는 두 장묘업체가 장례와 봉안만 담당해 두 지역에서 반려동물의 화장을 위해서는 타 지역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된 서울을 제외하고 1곳의 장묘업체도 존재하지 않는 지역들과 함께 이러한 지역들에 추가적인 장묘업체, 그리고 기존 장묘업체의 서비스 확대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됩니다.다만 ‘동물보호 관리시스템’에 등록된 합법 장묘업체와 달리 허가 냄새를 잡는 요술배변패드 같은 상품들이 거론되었습니다. GS샵은 급성장하는 반려동물 용품 시장에서 차별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밝혔으며, 브랜드와 단독 콜라보한 상품 및 프리미엄 기획 상품 등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것이며, 반려동물의 사료와 간식부터 시작해서 위생과 이용용품, 움직이는 CCTV 로봇과 같은 동물 가전제품, 펫유모차 등 다양한 상품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2. 국외 반려동물산업(1) 반려동물 사료 및 간식국내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2019년 기준 전 세계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은 약 101조 규모로 추산되며,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은 그중에서도 2018년에서 2023년까지 약 15%의 성장률이 예상 될 정도로 반려동물 사료 시장의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북미와 유럽 지역에서는 건식 사료가 보편화되었으며, 북미에서는 약 90%가, 서유럽에선 약 65%가 반려동물의 사료를 건식 사료로 주식화했습니다. 반면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건식 사료 사용률은 약 20%으로 이는 여전히 많은 반려동물이 사람이 먹다 남은 잔반이나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시장 성장률이 높은 것은 점차 반려동물의 사료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건식 사료의 구매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외 반려동물 사료 및 간식과 관련해서는 프랑스, 호주, 쿠웨이트 등 3개국을 중심으로 조사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반려동물 사료 시장 규모는 2019년 기준 약 120만 톤 규모로 그중에서 약 33만 톤이 개와 고양이용 습식사료, 약 86만 톤은 건식 사료에 해당되었습니다. 건, 습식 사료의 재료는 약 99%가 유럽 연합 산으로 프랑스 산은 그중 약 69%를 차지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약 180만 톤 규모의 반려동물 식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웰빙 트렌드가 반영된 프리미엄화, 신체 조건에 따른품점, 호텔 서비스 및 애견 커피숍 등이 증가하면서 쿠웨이트의 반려동물 사료 시장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쿠웨이트에서는 개나 고양이 이외에도 새와 물고기 같은 다양한 반려동물의 수요가 함께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개와 고양이의 사료만이 아니라 다른 다양한 반려동물들과 관련된 사료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으며, 현재 다양한 외국 브랜드들이 진출한 상황입니다. 그중에서 현재 가장 쿠웨이트에서 시장 점유율이 높은 것은 미국의 브랜드들입니다.(2) 반려동물 보험2017년을 기준으로 국내 반려동물 보험을 다루는 보험회사가 3개에 불과하고, 가입률이 2021년 기준 약 1.6%인 것과 비교해 해외의 경우 2019년 기준을 기준으로 스웨덴이 약 40%으로 보험 가입률이 가장 높고, 영국이 약 25%, 노르웨이가 약 14%, 일본이 약 6.3%에 달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정보가 최신인 것을 감안해도 해외의 반려동물 가입률이 월등히 높지만 여러 해외 국가들에서도 모든 반려동물들이 가입하는 의무보험은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의 여러 국가들도 한국과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사뭇 달라보였습니다.2017년을 기준으로 호주의 보험사 MDiBANK는 폭넓은 보장 범위를 자랑하는 동물 보험을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보장수준에 차등을 주어 총 3가지 형태의 보장 범위로 고객의 보장 니즈와 보험료를 고려해 가입이 가능하도록 신경쓰기도 했습니다. 또한, MDiBANK는 의료비가 약 1천 호주 달러를 초과하는 반려견의 이무질 섭취, 화상과 골절, 관절형성장애, 열사병, 당뇨를 제외한 백내장, 추간판질환, 위 확장과 염전, 비강협착 등 고비용 항목들을 집중적으로 보장하는 상품을 호주 동물 업계에서 최초로 판매하기도 했습니다.미국 보험사 Allstate의 동물 보험 역시 국내의 동물 보험과 비교하면 넓은 보장 범위를 자랑했습니다. 상해와 질병 치료비를 보장하는 기본적인 것 외에도 항암치료를 포함한 암, 수술, 진단, 선천성질환, 대체는 것을 택한 주인 약 700명도 함께 매장되어 있습니다.일본의 경우 미국과 함께 반려동물에 대한 장묘 문화가 비교적 보편화된 국가로 2000년대 초반부터 반려동물 장묘업체가 급증하기 시작해 일본의 일부 행정구역에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반려동물과의 동반 장묘가 허용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고유한 종교관과 위생 관념상 사람과 동물의 유골을 함께 매장할 경우 묘지의 관리를 담당하는 지역의 사찰 혹은 지역자치단체의 승인을 필수로 하며, 그 결과 2017년을 기준으로 도쿄, 오사카, 홋카이도, 후쿠오카 등 10개의 도, 현에서 동물과 같은 묘지를 쓰는 것에 불쾌함을 느낄 다른 이용자들을 배려해 묘지의 일부 구역을 ‘반려동물 가능 구역’으로 지정해 반려동물과 주인이 함께 묻힐 묘지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기존의 방법과 다르게 반려동물과 주인의 유골을 매장한 다음 그 위에 나무를 심는 수목장도 묘비를 사용한 매장보다 가격 면에서 약 5분의 1 정도로 저렴하고, 수목장은 혼인 혹은 혈연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정한 사람과 함께 매장되기 손쉬워 큰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일부 장묘업체는 직접 반려동물 장묘업체나 묘지로 가지 않아도 2톤 트럭을 개조한 이동식 화장차가 고객의 자택에 방문해 사망한 반려동물의 유해에 대한 화장 및 장례를 진행하기도 합니다.중국의 경우 미국과 일본에 비해 늦기는 하지만 반려동물에 대한 장묘 문화가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며 2015년 기준 중국의 반려동물 규모는 1억 마리이며, 중국인 13명 중 한 명은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는 꼴이라고 합니다. 반려동물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반려동물 장묘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고, 베이징 근교에 위치한 ‘펫 헤이븐’ 같은 동물묘지 같은 경우 현재 약 4천 구 이상의 반려동물이 묻혀 있습니다. 이러한 묘지 사용을 위해서는 최소 30만원에서 최대 100만원 이상의 비용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반려동물 주인들은 합법적으로 사후 처리를 해주는 장묘업체의 부족으로 망설임 없이 선택한다고 합니다습니다.
    경영/경제| 2021.07.26| 10페이지| 3,000원| 조회(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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