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흐름1. 기독교 윤리 태동의 과정1) 초대교회와 고전적 기독교 윤리 ? 바울, 어거스틴초대교회는 기본적으로 바울의 윤리를 모범으로 삼았다. 바울은 구원을 도덕적 삶의 기초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도덕적 삶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이를 이루기 위한 도덕적 삶의 방식을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울의 윤리는 지극히 구원론 적이고, 기독론적이면서 성령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윤리는 당시 제국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제국의 뒤편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화와 철학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어거스틴에 따르면 악이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선한 것의 결핍이었다. 인간의 도덕적 문제 역시 인간의 의지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결핍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윤리적 삶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때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동화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식대로 행하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이렇게 이루어진 삶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윤리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국가교회 체제였기에 이러한 그의 생각이 기독교 윤리로써 따로 다루어지지는 않았다.2) 중세 기독교 제국의 윤리와 르네상스 이후의 시대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이성적인 신법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기에 죄란 이성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성을 통해 어느 정도의 윤리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진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신학적인 덕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초자연적인 은사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세는 기독교의 치세가 가장 컸던 때로 교리가 윤리가 되는 시대였기에, 이러한 그의 주장인 기독교 윤리로 발전하지는 못했다.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유럽 사회는 인본주의와 인문주의, 그리고 순수 기독교가 발전함에 따라 기존에 정체되어 있었던 중세 유럽을 벗어나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이후 계몽주의까지 발흥하게 되면서 신학과 그의 종이었던 스콜라의 형이상학에 대신해서 이성이나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종교가 아닌 이성이라는 새로운 영토를 발견해 낸 시기이지만, 칸트 이전의 시기까지는 도그마가 곧 윤리인 시대를 유지하고 있었다.3) 현대성과 자유주의 신학의 발흥칸트가 등장하면서부터 당대 시대를 이끌던 성서 주석과 교리신학은 이성으로 완전히 교체되었다. 기존에 기독교라는 거대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교회라는 틀을 벗어난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에 기독교 윤리라는 개념이 대두됨과 함께 이성이 모든 것들의 판단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교리적인 확증과 도덕적인 소유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이냐는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칸트가 등장한 시기 기독교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학의 조류를 이끈 이들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츨, 트뢸치, 하르낙과 같은 인물이었다. 이들은 교리와 윤리를 구분했으며, 자율적인 이성의 원칙을 중신하면서 이후의 기독교가 고전적인 기독교 언어 및 교리와 결별하도록 하는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II.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1) 월터 라우셴부시라우셴부시는 사회적 위기의 원천을 자연과 인간으로 보았지만, 그가 더 두렵게 본 것은 자연보다는 인간이 만든 위기였다. 그는 인간의 파괴적이고 남을 괴롭히는 행위를 두렵게 생각했다. 인간의 역사를 착취의 사회적 단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으로 보면서 당시에 만연한 사회적 비극을 역설하기도 하였다.그에 따르면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산업화된 현대적 삶이 사회에 촉발했던 파괴적인 힘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의 대응책은 사회에 정의와 물질적인 평등을 가져오기 위해 사회적인 연대를 창조하고 또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기독교적 사랑의 회복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찬송과 기도는 무엇보다 그와 같은 정서들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 운동은 이후 사회복음 운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그는 기독교 윤리학의 과제를 `사회적 질서의 기독교화`로 보았다. 그의 사회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바른 방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춘 그의 생각은 좋았지만,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구속의 성장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교회를 내던져버리는 등, 성서 주석의 전통을 낡고 오래된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기독교를 단지 사회적 진보의 과제만을 위해 활용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2) 리처드 니버리처드 니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이 문화 안에서의 생활과 온전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혁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변혁은 인간이 어떤 신조나 도덕적 교훈을 다른 것들로 대체시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인격적 대답과 책임 관계에서 되어지는 것이었다. 즉 우리의 윤리 행위는 무엇을 행할 의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분에게 응답하는 의무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응답한다는 것은 옳거나 잘못된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적절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포함된 것으로 발견되는 이야기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런 방식으로 책임지는 자아는 기독교 윤리학의 핵심적인 용어가 된다.이렇듯 니버는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깊게 형성하는 여러 맥락의 힘에 기독교인들을 적용함으로 타인들을 향해 기독교인들을 개방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있어 그의 윤리 체계는 인격적인 체계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심취한 나머지 자연과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인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식에 특별히 강한 감각을 지닌 모범적인 인간으로 표현하는 등 그의 신성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3) 라인인홀드 니버니버는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을 기독교인들의 규범으로 이해했으나 십자가에서 제시된 사랑의 정치적인 삶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현실의 제 문제들에 대하여 무관심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해답을 제시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의 문제들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해답을 주려 할 때, 기독교 현실주의가 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가 보기에 개인 및 집단 인간에 대하여 `인간의 죄성`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채, `낙관주의적인 인간관`에 근거를 두고 있는 제 주장들은 사회문제를 올바로 파악하지도 못하며, 정치, 경제 등 사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적합한 해답을 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사회문제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인간의 죄성을 깊이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판넨베르크의 성령론판넨베르크의 성령론은 크게 4가지로 나뉘는데, 창조의 영과 삼위일체론 그리고 장의 개념으로서의 성령 이해와 종말론 속 성령이 그것이다.1) 주요 내용 정리1. 창조의 영판넨베르크는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라고 여겨질 때 바르게 이해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현대의 자연과학과 성경적 주제들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였고, 이러한 시도는 결국 그의 성령 개념이 세계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의 대화를 위한 가장 포괄적인 신학적 틀을 제공하게 하였다.그의 체계는 만유가 신의 안에 속하며, 신은 만유에 내재하는 동시에 만유에서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만유재신론과 비슷하다 볼 수 있으나, 그에게 있어 창조 자체는 비 필연적인 사건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신론이 그것과 같다고는 볼 수 없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온전히 현실화하기 위해 이 세계를 창조해야만 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내재하신다는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2. 삼위일체론판넨베르크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성령론에 주목하면서, 성령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하나님과의 교제에 참여하게 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삼위일체론의 구도 속에서 성령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3. 장의 개념으로서 성령 이해성령과 장에 대한 관계는 판넨베르크의 신학에 있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에 대한 이해에 앞서 성령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이해를 살펴보면, 그는 성령을 모든 피조물이 생명과 운동과 활동의 은혜를 입고 있는, 생명을 부여하는 원리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판덴베르크는 성령을 초월적인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에 능동적으로 임재하시는 원리로 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장이론은 성령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마당이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판넨베르크는 몇몇 신학자들이 구약의 `하나님의 영`을 호흡과 바람으로 은유적 해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창조에 널리 퍼져있는 능력의 최상의 장으로서, 각각의 유한한 사건이나 존재는 장의 특별한 현현으로 간주 되기에 그들은 그 힘에 반응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장이론이 성령의 인격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물리적 힘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노력에 무색하게도 성령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장의 유일한 현현이라고 하여 성령의 인격성을 모호한 형태로 이끌고 말았다.4. 종말론 속 성령판넨베르크는 역사로서의 계시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보편사적 역사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정한 시기나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판넨베르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역사의 종말이 이미 실현되었고,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의 종말을 통해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영원은 미래를 통해 시간 속으로 들어온다`라는 그의 말과 같이 과거이자 현재이고, 또 미래인 하나님이 성령을 매개로 피조물의 시간에 내재하시며, 그의 사랑을 실천하신다는 판넨베르크의 미래적 소망의 신학을 보여주기도 한다.2) 의의와 적용점 등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Wolfhart Pannenberg)는 칼 바르트 (Karl Barth), 위르겐 몰트만 (Jurgen Moltmann) 등과 더불어 현대신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을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 인정하고 이를 합리적인 차원에서 변증하려는 공적 성격을 지닌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는 신앙과 신학이 개인화되고 사적 영역에 머무르는 것을 방지하고 신학과 다른 학문, 특히 현대 학문의 총아로 인정받는 자연과학과의 대화를 진지하게 시도하였다.그의 하나님 이해와 신학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것은 보편성의 개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창조를 삼위일체론적 이해에 근거하여, 보다 보편적 특성을 가진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 있어서 그의 신학은 일관적이며 합리적이고 더 나아가서 신학이 다른 학문과 대화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창조 이해가 상당히 보수적인 견해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문, 특히 자연 과학과의 대화라는 관점에서 그가 진화론을 수용하고 이를 자신의 창조론의 일부로 삼은 것은 비성경적인 견해에 근거한 것이라고 평가되어야 한다.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그의 성령론은 성령의 신성과 사역을 논의하는 토대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성령 이해에 있어서 판넨베르크의 가장 두드러진 공헌은 사실상 역장 이론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 이론은 성령의 사역에 나타난 보편성을 효율적으로 드러내므로 그의 성령 이해는 ‘보편성의 영’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역장으로서 성령 이해는 사실상 인격자이신 참된 하나님이신 성령의 성경적 이해와 오히려 상충 되는 단점 또는 모호함을 함께 지니고 있다.그가 이렇듯 보편성을 강조한 이유는 과거 교회가 가졌던 권위주의적인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능한 한 기독교 신앙의 어려운 문제들을 독자적이고 성숙한 차원에서 판단할 수 있길 바랬다. 공동체의 성원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점들과 현대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요 문제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더 그들이 설교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는 기독교 선교도 똑같이 권위주의적 전통의 흔적이 제거되어야만 오늘날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과거에 많은 선교사가 행한 권위주의적 방법 때문에 많은 사회에서 기독교 선교를 거부하는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면서, 기독교 공동체가 선교지의 사회에서 인간 존엄의 진보적 모범이 되고, 또 그것에 동의하는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보았다.이처럼 그의 신학은 추락하는 기독교를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에서 행해진 방법론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이어가기를 바라신 완전한 순종을 외면하도록 만들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기존 정통주의 신학과는 달리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이성에 호소하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하고 있었기에 많은 부분에서 정통주의 신학과는 다른 양상의 결과들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슐라이허마허와 칼 바르트를 거치면서 인본주의 신학 방법으로 자리 잡게 되는 등 이후의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들어가는 말터툴리아누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키프리아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줄만큼 서방신학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동, 서방 교회를 가리지 않고 인정받는 인물이다. 또한, 마틴 루터나 칼빈 역시 유아세례나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신앙 등의 이해에서 1250년 전의 인물이었던 키프리아누스의 생각에 빚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렇듯 위대한 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키프리아누스는 처음부터 타고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3세기 초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유복하니만큼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이교의 가정이었기에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은 245년 혹은 248년 정도의 시기로 추정된다. 그는 세례 후에 집사와 장로의 시기를 거쳤기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세례 후,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의 일부를 나누어 주었고 엄격한 참회와 성서 및 초기 기독교 저작, 특히 터툴리아누스를 공부했다. 그리고 회심 후에 곧바로 우상숭배의 덧없음과 유대인 반박을 논한 『Epistola ad donatum de Gratia』를 쓰기도 했다.키프리아누스는 데키우스 박해(250-251)때 도망하여 목숨은 구했으나, 소유는 모두 몰수당했다. 교회 내 반대자들은 그를 겁쟁이요, 신앙이 없는 이라고 불신했고, 로마에 고소했다. 이에 키프리아누스는 자신의 피신은 계시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 답했으나. 발레리아누스의 박해시인 258년 9월 13일 결국 체포되어 카르타고에서 참수 되었다.비록 비굴하게 살아남은 자라는 오명을 쓰긴 했지만, 그가 뛰어난 신학자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가 그를 성인으로서 공경하고 있음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당시의 시대상과 더불어 도대체 어떠한 사상과 신학이 그를 이처럼 부정할 수 없는 신학자로서 우뚝 설 수 있게 하였는지 알아보려 한다.키프리아누스의 교회일치를 위한 투쟁1) 교회 분열의 움직임키프리아누스는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피신하였지만,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를 보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교구에 대한 사역을 계속 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피신에 대해 끝없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에 그는 결국 251년 교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와 보니 박해의 여파로 많은 교구의 신자들이 배교했음과 더불어 사제 노바티아누스가 이끄는 교회가 그렇게 배교한 이들에게 아무런 회개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에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면서, 그들에게는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배교자 입교 문제와 관련하여 키프리아누스의 입장은 배교자들에게 일정한 참회 예식을 거친 후에야 그들을 용서 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해기간 중에 자신의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은 고백자들과, 펠리치시무스 부제, 그리고 키프리아누스의 주교선출 경쟁자였던 노바투스가 이러한 의견에 반발하며 그에게 대적하였고, 이는 카르타고 교회가 분열의 전조를 보이도록 하였다.로마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로마의 주교였던 파비아누스가 순교하자 그의 뒤를 이어 코르넬리우스가 주교로 선출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노바티아누스가 스스로를 로마교회의 책임자로 자칭하면서 분열을 일으켰다. 노바티아누스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배교자 처리 문제에 있어 갑작스럽게 강경노선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에 대한 코르넬리우스 주교의 관용정책에 반하는 것임과 동시에 당시 로마에 배교자의 처우를 강경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이와 같은 상황의 심각성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키프리아누스를 공격하던 카르타고의 노바투스가 로마로 건너가 노바티아누스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감독선출에 패배했던 두 인물은 교회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신들의 만족과 권력 장악을 위해 가장 민감했던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그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이후 그는 대회를 소집하였고 60여명의 감독들이 회의한 결과 카르타고의 감독의견이 받아들여진다. 키프리아누스는 하나인 교회는 평화와 사랑으로 묶인 공동체 이며, 그렇기에 각각의 교회 안에 형제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전체가 하나인 주의 교회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는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것이라는 사도바울의 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키프리아누스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는 통로로서 교회를 바라보는데, 이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그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배교자 문제가 해결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리카 지역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키프리아누스는 이를 해결하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박해의 빌미를 제공할 뿐이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하여 전염병을 내렸다 말하며 그를 공격했다. 키프리아누스는 이에 반박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를 돌보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와 같은 내용은 그가 쓴 『데메트리아누스에게』와 『죽음에 관하여』에서 잘 드러난다.2) 보편적 교회 일치의 강조키프리아누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도나투스에게 보낸 편지』를 포함해 『죽음에 관하여』, 『기도에 관하여』와 같은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중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저술은 『보편적 교회의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라고 할 수 있다. 이 저서에서 그는 노아의 방주 밖에 있었던 자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 밖에 머무르는 자들 또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음`을 고백하며 신자들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서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 하고 있음도 살펴볼 수 있다.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군병들이 제비뽑은 예수님의 옷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무리한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그에게 있어 교회의 통일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그는 교회의 통일성을 감독과 연결시켜 `감독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과 교회가 감독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감독 없이는 교회도 없다는 것으로, 후대 로마 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키프리아누스가 이와 같이 감독에 대해 강조한 이유는, 박해로 인해 교회의 체계가 흔들리자, 평신도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분리주의적 이단으로 빠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키프리아누스는 모든 감독들의 동등성을 강조한 연방 감독제를 강조했지만, 로마 감독의 수위권을 인정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가 주변의 위협으로 인해 교회의 통일성이 파괴되는 것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기에 교회가 나뉠 수도 있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러한 그의 강직한 태도는 `이단들에게는 교회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고,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성령도 없다. 왜냐하면 성령도 하나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세례 또한 이단들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례는 교회로부터도, 성령으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그의 말에서 더욱 잘 드러나며, 그가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워왔는지도 알 수 있게 한다.
칼빈의 구원론 비평한국은 칼빈 신학을 따르는 장로교회와 웨슬리 신학을 따르는(감리, 성결, 나사렛, 구세군) 교회들이 주류를 이루며 발전해가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과 웨슬리 신학을 서로 비교하며 이해, 비평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에 다음에서는 몇 가지 주제에서 웨슬리와 칼빈의 차이를 이해하고, 웨슬리를 중심으로 칼빈의 신학을 비평해보려 한다.구원의 대상 : 이중예정 vs 선행 은총칼빈이 이해한 하나님의 구속은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권에 귀속되는 사건이다. 즉, 칼뱅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인 이중예정설은 인간 구원의 출발임과 동시에 완성이다. 칭의도 하나님의 선택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칼뱅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뱅에게서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선택, 혹은 이중예정으로 환원된다고 말할 수 있다.이렇듯 칼빈이 강조하는 `예정`은 성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지만, 칼빈과 같이 해석하면 절대적 예정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있다. 칼빈이 말하는 이중 예정은 `개인`에 대한 예정으로서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창세 전에 예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와 달리 예정을 `구원의 방법`을 미리 정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시키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웨슬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 믿음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데, 인간은 이를 선행은총에 의해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이 예정된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값없이 주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인간이 거부할 수 없다고 하는데 반해 웨슬리는 때때로 거부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은혜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음을 더 강조한다. 칼빈에게는 구원과 멸망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만, 웨슬리에게는 인간 자신에게 있게 된다.2. 계약신학과 세대사상 : 동시에 공존하는, 상대적 충분성 vs 절대적 충족성계약신학은 성경의 구속사를 계약의 역사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행위 계약과 은혜 계약으로 성경을 크게 나누어 전망한다는 것이다. 각각의 세대는 각각의 세대에 맞는 구원의 방식을 소유하고 있다. 에덴동산의 행위 계약 시대의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고 아담의 타락 이후에 펼쳐진 은혜 계약의 시대에는 원 복음(창 3:15)이 주어졌고, 아브라함에서 모세의 시대에는 할례가 주어졌으며 모세부터 예수의 시대에는 율법이 주어졌고 예수 이후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어졌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모든 세대는 각각의 나름대로 실제적인 구속론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 구속론적 메커니즘에 대한 해석에서 칼뱅과 웨슬리의 차이가 나타난다.먼저 칼뱅은 절대적인 충족성의 관점에서 계약신학을 이해했다. 이는 아담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세대가 복음과 구원의 약속을 등가적으로 소지하고 있다는 견해로, 개혁주의 신학이 표방하는 계약신학의 이해다. 이러한 이해는 칼뱅의 예정론과 선택된 자의 구원 이해를 해명하는 것에 매우 적합하다. 그러나 칼뱅은 이러한 입장 속에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기독론적 해석에 너무나도 신중했기에, 구약 본문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반면에 웨슬리는 신학이 표방하는 계약신학의 이해 방식은 `동시에 공존하지만, 상대적으로 충분한 것으로` 각각의 세대에 주어진 구속의 은총을 이해한다.이러한 그의 이해 방식은 세대마다 가지고 있는 구원의 그림자가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 완성된다는 코케이우스의 상대적인 충족성과, 칼뱅의 절대적인 충족성을 종합한 해석이다. 즉, 모든 세대의 구원은 실재적으로 동질적이지만 동시에 각각의 세대의 구속에 대한 구원 경륜은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3. 구원을 위한 하나님 은혜의 사역 : 복음적 신인 협동설 vs 신 단동설칼빈은 완전타락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범죄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뱅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영원한 축복을 받기에 필요한 신앙과 본래의 완전한 모습인 초자연적 은사는 잃어버렸지만. 지성과 의지라는 자연적인 은사는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하였어도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심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인간은 선을 선택할 가능성을 상실했고, 인간의 모든 욕망은 계속해서 악을 택하고 행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다.이제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밖에 없다. 창조와 섭리에서 절대적 주권자인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절대적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은 인간이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가와 상관없이 나타난다. 인간의 죄와 죄책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공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한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께 은총을 부여받은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그 은혜의 불가항력성은 인간의 무능력성과 함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는 논리로 귀결되는데, 이것을 ‘신 단동설’이라고 한다.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칙에서 웨슬리는 칼뱅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어지며, 선행은총이 완전 타락한 인간을 어느 정도 회복하여 응답능력을 가진 책임적인 존재가 되게 하였다는 점에서는 칼뱅과 거리를 둔다.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 안에서 자유한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유한 것이다.’ 은혜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유롭다는 점은 칼뱅주의의 견해와 다르다.웨슬리에 따르면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루기 위한 이론을 ‘복음적 신인협동설’ 이라고 한다. 복음적 신인협동설은 결코 인간의 공로사상이 아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 회개하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음은, 그 모든 것이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웨슬리의 복음적인 신인협동설은 반펠라기우스주의처럼 자연적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고 협동할 수 있다는 주장과는 매우 괴리가 있다. 웨슬리의 협동설은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에서 수동적으로 협력하는 협동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웨슬리의 신입협동설은 “정숙주의”와 “공로사상”과 명확한 차이를 보이며,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13)고 명하신 성경의 구원론에 충실한 사상이다.4. 성화에 대한 해석 : 점진적 성화 vs 완전 성화칼뱅에 따르면 순간적이며 완결된 사건인 칭의와 동시에 중생, 즉 성화는 시작한다. 이 점에서 성화는 순간적 또는 결정적이며 또한 점진적이다. 순간적 성화는 칭의와 함께 즉각적으로 성도의 신분이 변하므로 이를 ‘신분적인 성화’라고도 한다. 즉각적 변화를 통하여 성화는 시작하지만, 거기서부터 성도는 점차적으로 성장해 가야 한다. 신자는 성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완전 성화는 불가능하며, 죽음 이후에야 가능하다.이렇게 점진적 성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신자 안에 아직도 죄가 남아 있으며, 일생동안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며, 이것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두 본성의 교리’를 칼뱅이 받아들인 결과이다. 거듭난 신자는 옛 본성과 함께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새 본성을 가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다. 그는 진정으로 새로운 존재이지만 아직 완전히 새로운 존재는 아니다. 죄 없는 새로운 성질과 부패한 옛 본성이 죽을 때까지 공존한다. 따라서 성화는 사망에 이르러서야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요약하면 신자는 더 이상 옛사람은 아니고 점진적으로 성장해가는 새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이 과정은 계속되어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간다.완전성화는 웨슬리신학의 핵심이 되는 진리이다. 칼빈은 현세에서 완전성화는 불가능하며 사후에야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나, 웨슬리는 이 땅에서 신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가능하다고 보았다. 중생한 신자가 아직도 남아 있는 죄성을 깊이 자각하고 주님 앞에 내어놓을 때 신자는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벗어나 정결함을 얻고 사랑의 충만을 얻게 된다. 이것은 중생과는 구분되는 두 번째 은혜요, 변화이며,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자는 이를 경험할 수 있다. 이렇듯 칭의 후에 두 번째 은혜에 의하여, 죄성이 변화되고, 그 빈 마음속에 성령에 의하여 사랑의 충만을 얻게 되며, 이런 변화는 현세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칼뱅과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성화가 인간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은 둘 다 인정한다.
2. 주후 4세기와 5세기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성례전 이해 비교분석성례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현존을 나타내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징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은혜다. 그러나 주 후 4세기와 5세기에 서방교회 또는 동방교회는 체계적인 성례전 신학을 형성해 내기 위한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그것을 하찮게 보았다기 보다, 당시 성례전은 말씀 예전과 함께 초대교회 예배에 있어 중요한 요소 차지하고 있었기에 굳이 따로 기술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성례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주로 어거스틴에 대해 살펴보면, 그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것 신비한 것들을 표징할 수 있는 자연적인 것이나, 인간의 관습을 다 성례전이라고 보았고,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명령하신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전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것들을 성례하는 매개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의 처음은 세례의 매개인 물에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중요성으로 관심이 옮겨가게 된다.성례전들 속에 담겨있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사로서 집례자 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사상과 은혜의 효력은 집례자에 의해서 반복되는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된 문구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상, 이 두 가지 이론은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이른바 성례전에 관한 사효설을 이루었다. 즉 성례전들은 그것들이 나타내는 은혜를 실제적이고 자동적이게 실현하는 표징들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내게 된다.그러나 동방은 이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당시 동방에는 아주 다양한 견해들이 유포되고 있었기에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 마니교도, 몬타누스파, 파울루스파가 행하는 세례는 전적으로 무효라고 말하며, 성례전은 그것을 집전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분파주의자들에 의해서 거행된 성례전이라도 유효하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이단들이 행하는 성례전도 효력이 있다는 서방의 입장은 성례전 자체가 끼치는 은혜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서방은 재세례와 재서품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키프리아누스와는 달리 성례전의 유효성과 실효성을 구별한다. 그는 기술적인 유효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성례전을 받은 사람이 그것과 적절하게 결부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사효론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성례가 유효하다고 해서 그것이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실효하는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교회의 세례는 교회 밖에도 존재할 수 있지만, 복된 삶의 은사는 오직 교회 안에서만 발견된다.”라는 그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세례앞에서 성례전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고찰하였으므로, 이제 각각의 성례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세례에 대해 알아보면, 키릴루스는 세례를 목욕의 개념으로 이해하며, 세례받은 자는 죄들, 즉 세례 이전에 범해진 모든 죄의 사함을 받는다고 말했다. 둘째, 세례는 성화라는 적극적인 축복을 전달해 주는데, 키릴루스는 이러한 축복을 신자의 영혼의 조명과 신성화, 성령의 내주, 새 사람을 입는 것, 영적인 거듭남과 구원, 은혜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 되는 것,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 하늘의 유업을 물려받을 권리로 묘사한다. 그러면서 그는 죄사함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허용되지만, 성령의 주입은 세례받는 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지적한다. 세 번째 내용은 세례는 신자의 영혼에 봉인을 각인한다는 것이다. 물이 몸을 깨끗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은 영혼에 인을 친다. 이러한 인침은 세례를 받는 순간에 일어나고, 그 결과로서 세례받는 사람은 성령의 임재를 느끼게 된다.서방교회에서는 옵타투스는 대홍수를 세례에 대한 모형으로 삼아서, 세례의 물에 잠긴 죄인은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씻김을 받고, 원래의 순수성으로 회복된다고 주장하였다. 사람의 창조라는 개념이 세례 속에 녹아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에 의하면, “세례는 그 죄가 행위이든 말이든 생각이든, 원래의 죄들이든 더해진 죄들이든, 알고 범한 것이든 모르고 범한 것이든, 우리의 모든 죄, 절대적으로 모든 죄를 씻어준다.” 하지만 세례가 세례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장래에 범죄 하는 것으로부터도 보호해 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유아 세례에 대해서도 동방과 서방의 의견이 달랐다. 그리스 교부들은 죄책의 의미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도 유아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나, 서방교회에서는 암브로시우스가 유아 세례는 유아들을 그들이 물려받은 죄책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열어주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제롬은 그러한 암브로시우스의 사상을 반영해서 일단 유아들이 세례를 받으면, 그들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지만, 그때까지는 유아들도 아담의 죄책을 짊어진다고 가르쳤다. 이렇듯 세례의 적극적인 효과들과 관련해서 초기에는 죄의 사함에 강조점을 두었지만, 이후에는 성령의 인침의 사건으로 보는 것과 같이 세례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견신례 또는 도유식세례 안에 포함되던 견신례는 이후로 갈수록 세례와 구별되는 성례전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동방교회에서 도유는 언제나 필수적인 절차였고, 아타나시우스와 예루살렘의 키릴루스는 사도들의 안수에 의한 성령의 수여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을 그들이 알고 있는 도유식과 결부시키지 않는다. 사도 헌장에서는 안수는 비록 주교의 도유와 결합 되어 있긴 하지만, 상당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와 테오도레투스 같은 저술가들은 안수를 언급할 때 아마도 단순히 도유식에 있어서 주교의 행위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서방교회에서 안수는 도유와 더불어 계속해서 입교 절차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옵타투스는 안수를 통상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보았고, 안수의 원형을 예수의 수세 시에 성부 하나님이 예수에게 내린 축복 속에서 발견하였다. 제롬은 안수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고 성령의 충만한 수여를 세례에 돌렸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적인 이론은 안수가 있든 없든 도유를 통해서 성령이 수여된다는 것이었고, 아우구스티누스도 주교들이 안수를 행할 때 그것은 단지 사도들의 선례를 따르는 것뿐이라고 가르쳤다.그러나 안수를 더 중시하였던 서방교회에서는 안수의 성경적 권위를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안수를 행했다고 말하고 있는 구절들 속에서 찾았고, 그 효과는 당연히 성령의 수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세례 후에 사제들에 의해서 시행되는 도유와는 구별되는 견신례는 주교의 본래적인 직무에 속하는 것으로서 주교가 보혜사 성령을 수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견신례 또는 도유식에 관한 신학과 세례에 관한 신학 간에는 상당한 정도의 혼동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견신례와 도유식이라는 두 가지 의식은 성령의 수여를 매개하고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그들에게 필요한 병기들로 무장시키고 더 큰 은혜를 나누어주는 일종의 축복으로서 이해하고 있었다.고해주 후 4세기와 5세기의 문서들 속에는 세례 이후에 범해진 죄들을 사하는 교회의 관행에 대한 언급들이 많이 나온다. 이러한 언급 중 다수는 노바티아누스파의 엄격주의를 반박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보속이 가진 회개의 효력 및 회개 이후의 죄 사함의 가능성을 놓고 노바티아누스파에 속한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으며, 서방교회에서는 암브로시우스가 세례 이후의 죄들을 사해 주기를 거부한 노바티아누스파의 가혹한 처사를 비판하였다.암브로시우스의 동시대인이었던 바르셀로나의 파키아누스는 심프로니아누스에게 보낸 서신들 속에서 상당히 유익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파키아누스는 노바티아누스파의 입장의 핵심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세례 이후에는 고해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둘째, 교회는 대 죄들을 사 할 수 없다. 셋째, 화해 이후에 죄인들을 다시 받아들이게 되면, 교회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이렇듯 세례 이후에는 죄용서가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해에 대해 언급함으로 이에 반하는 모습을 보였다.아우구스티누스는 고해를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례에 선행하는 고해가 존재하는데, 이 고해의 결과로서 온갖 종류의 죄들이 성례전을 위하여 사해진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경미한 죄들과 관련하여 기도, 금식 등등의 수단을 통해서 날마다 얻는 죄 사함이 존재한다. 셋째, 세례 이후에 범해진 진정으로 중대한 죄들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고해를 통한 권징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통해서 교회는 마치 그리스도가 나사로를 일으키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빈사 상태에 있는 죄인을 일으켜 세운다.고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에 이어서 이 시기에 존재하였던 고해의 몇 가지 특징들도 주목해 봐야 한다. 첫째, 이 시기의 고해는 그것이 이전 세기들에 있어서 소유하고 있었던 성격, 즉 오직 한 번만 행해질 뿐이고 반복될 수 없는 권징이라는 성격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둘째, 죄인들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화해라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고해는 계속해서 공식적이고 공적인 행위였다. 따라서 실제로는 고해의 가혹성과 고해를 오직 한 번만 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많은 사람은 고해성사를 그들의 임종 시까지 미룸으로써 자신의 범죄가 공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최소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