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석보
- 최초 등록일
- 2007.12.16
- 최종 저작일
- 2007.11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4,000원
소개글
이 자료는 월인석보입니다.
월인석보의 국문학적인 특징과, 제작 연도, 수록된 내용이 간략하게 1장정도 서술이 되어있으며 원문, 언해문, 한글해석문, 문법사항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잘 된 자료라고 칭찬해주셨으니 품질은 걱정하지 말고 쓰세요.
국문학 전공하는 친구들에게 도움이되는 발표문입니다
목차
월인석보에 대한 설명
원문(언해문)-한글해석-단어 뜻과 용례-관련된 관문법사항 해설
본문내용
월 인 석 보
1. 창작
1457년(세조 3년)에 왕세자였던 도원군(桃源君)이 죽자 임금은 이를 애통히 여겨 부왕과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근 2년 동안에 걸쳐 증보(增補) 수정하여 간행하였다. 세조의 명으로 당시 편찬에 종사한 사람은 신미(信眉)·수미(守眉)·설준(雪竣)·홍준(弘濬)·효운(曉雲)·지해(智海)·해초(海超)·사지(斯智)·학열(學悅)·학조(學祖) 등의 고승과 유학자인 김수온(金守溫) 등 11명으로, 이들은 당대의 불학(佛學)을 대표하는 선지식(善知識)들이었다. 내용은 《월인천강지곡》의 각절(各節)은 본문이 되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의 《석보상절》은 주석(註釋)같이 하여 엮어졌다. 원본이 완전히 전하지 않아 당초 몇 권으로 되어 있었는지 명확하지 못하나, 1995년 말에 권25가 발견됨으로써 월인석보는 총 25권임이 밝혀졌다.
2. 편찬 동기
편찬 동기는 1457년(세조 3년)에 왕세자였던 도원군이 죽자 임금은 이를 애통히 여겨 부왕과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근 2년 동안에 걸쳐 증보(增補) 수정하여 간행하였다고 되어있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 회한과 무상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3. 표기상의 특징
① 월인천강지곡과 비교하면 동국정운식의 한글 한자음의 위치가 바뀌었다. 월인천강지곡에서는 한글 음을 큰 글자로 내세우고 해당 한자는 작은 글자로 오른쪽에 박았는데 월인석보의 월인천강지곡 부분에서는 한자를 큰 글자로 내세우고 한글 음을 작은 글자로 오른쪽에 새겼다.
②받침 없는 한자음에 대하여 불청불탁의 후음 ‘ㅇ’를 달았다. 월인천강지곡에서는 ‘在’로 표기하였는데 월인석보에서는 ‘在’로 바뀌었다.
③ 협주의 추가, 어구의 수정 등 부분적인 손질이 있음.
참고 자료
문서내 삽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