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조선후기 개화와 위정척사
- 최초 등록일
- 2003.06.07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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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1. 시대적 배경
ⅰ) 강화도 조약과 개항
ⅱ) 각국과의 조약 체결
2. 개항사상과 위정척사의 의미
ⅰ) 개항사상의 의미
ⅱ) 위정척사사상의 의미
Ⅱ. 본론
1. 개화운동
ⅰ) 개화사상의 형성과 발전
ⅱ) 개화정책과 운동
ⅲ) 개화파와 개화정책의 평가
2. 척사운동
ⅰ) 위정척사운동의 시작과 전개
3. 임오군란
ⅰ) 발단
ⅱ) 경과
ⅲ) 결과
4. 갑신정변
ⅰ) 발단
ⅱ) 중심인물
ⅲ) 경과
Ⅲ. 결론
1. 실패원인
ⅰ) 임오군란
ⅱ) 갑신정변
2. 영향
ⅰ) 척사와 임오군란
ⅱ) 개화와 갑신정변
3. 의의
ⅰ) 임오군란의 의의
ⅱ) 갑신정변의 한계와 의의
본문내용
1. 시대적 배경
ⅰ) 강화도 조약과 개항
① 강화도 조약 체결의 배경 :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맞서 개화론 박규수(양반) : 박지원의 손자로 북학파의 사상을 이어받아 개화사상을 형성하는 데 다리 역할을 하였다.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갑신정변의 중심 인물들을 자기 집에서 가르치며 개화사상을 고취시켰다.
오경석(역관) : 역관으로 중국을 오가며 중국에서 가져온 개화 관련 책들을 개화파에게 전해 주어 개화사상이 형성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유홍기(한의사) : 오경석의 책에 영향을 받아 그의 집을 드나드는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침.
자들은 부국강병을 위해서 개화사상을 도입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대외통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즈음 조선 조정 내에서의 권력투쟁으로 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자 이러한 국내의 정황을 탐문한 일본은 75년 통교교섭을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왔으나 교섭은 성립되지 않았다. 이에 일본 정부는 측량을 빙자하여 군함 운요호[雲揚號] 운요호 사건 (1875) : 1875년(고종 12) 9월 일본 군함 운요호의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조선군과 일본군의 충돌사건이다. 조선측의 대일문호개방(對日門戶開放)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일본은 열강세력에 앞서 조선에의 진출을 시도한 계획이 지연됨에 따라,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군함 30척을 조선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무력위협정책의 일환으로 운요호를 조선연해에 파견, 8월 21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담수(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초지진 포대에서는 포격을 가하고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여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그들에 비해 떨어지던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고 그들의 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방화,약탈을 자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첨사(僉使) 이민덕(李敏德) 이하 400~500명에 이르는 수비병은 모두 패퇴하였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그 밖에도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였으나 일본측은 2명의 경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측에 씌워 전권대사를 파견해서 힐문함과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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