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여성사-프랑스 여성 참정권 운동
- 최초 등록일
- 2012.09.18
- 최종 저작일
- 2012.03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정말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목차
Ⅰ. 시작하면서
Ⅱ. 들어가서
1. 프랑스 혁명기의 올랭프 드 구즈
2. 1848년 혁명과 잔 드로앵
3. 위베르틴 오클레르와 프랑스 제3공화국 정치
4. 마들렌 펠티에의 급진적 개인주의
5. 루이제 바이스, 투표권 획득과 그 이후
Ⅲ. 정리하면서
본문내용
Ⅰ. 시작하면서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그러니 연단에 나설 권리도 가져야 한다.”
여성은 법으로 규제 받을 수 있다. 프랑스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은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프랑스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의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갖는 주권적 주체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여성이 <인권 선언>에 포함되는 ‘인간’임에도 이러한 모순이 존재했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고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면 어째서 여성은 남성과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인가. 프랑스의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모순과 의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응전했다.
<중 략>
1904년 프리메이슨의 남녀 연합체 ‘순종’에 가입하여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들과 의견 교환을 했다. 이 시기에 펠티에는 낙태와 참정권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포함하여 여러 문제들에 관해 강연하고 글을 썼다. 1906년에 소규모 페미니스트 단체인 ‘여성 연대’의 회장직을 넘겨받게 되고 같은 해 사회주의 단체인 국제노동자연맹 프랑스 지부에도 참여했지만 여성권리를 위한 그녀의 보편주의적 주장과 엘리트주의는 단체 안에서 마찰을 빚었다. 펠티에는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여성성에 반대했고,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의 여성 배제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국제노동자연맹에서 활동으로 인해 1900년에서 1911년까지 구스타브 에르베가 이끈 좌파 혁신당의 대포자로 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고 1910년에는 사회주의자 자격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933년 낙태를 시술한다는 죄목으로 감시와 조사를 받았고 1939년 낙태를 시술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판사는 그녀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감옥이 아닌 병원 행을 선고 했다. 정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에도. 펠티에는 인생의 마지막 몇 개월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펠티에는 ‘내 가슴은 여전히 뜨겁다. 이것이 내가 고통스러운 이유이다.’라는 글의 편지를 친구에게 보내고 1939년 12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