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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재개발의 추억
    재개발의 추억
    재개발의 추억한가로운 오후였다. 계절은 후덥지근하던 여름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다. 준희는 창문을 반쯤 열어둔 채 책상정리에 한창이었다. 머지않아 이 아파트를 떠나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갈 예정이었다. 첫 이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짐 싸기란 보통이 아닌 일이다. 책장에 꽂힌 먼지 쌓인 책들은 뒤적거리면서 준희는 뭘 싸들고 갈지 고민을 했다. 이걸 가져갈까? 저걸 가져갈까? 그러다 우연히 책상 서랍 가장 안쪽에 박혀 있던 박스를 발견했다. 그 박스 안에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로 가득했다. 편지뿐만 아니라 한참 유행이 지나 이제 옛 물건이 돼 버린 교환일기도 있었다. 추억에 잠겨 이것저것 읽어보던 준희는 기억 한편으로 완전히 잊고 있었던 추억을 기억해냈다. 낡고 낡은 교환 일기장에는 옛 친구들과 함께 약속했던 이야기가 쓰여 있다.준희가 어렸을 때 살던 아파트는 높은 산 중턱에 있던 아파트였다. 삐까뻔쩍하고 잘 빠진 새 아파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 때는 서울에 몇 안 되는 아파트로 이름 높았던 아파트였다. 그만큼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아파트였다. 그러나 그렇게 휘황찬란했던 아파트도 준희가 살던 90년대에는 낡아 빠진 서울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재개발이니 뭐니 한창 말이 많던 시기였다. 그러나 준희와 그 또래의 친구들은 그러한 어른들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녹음이 푸르고 주변이 온통 아이들의 놀거리였던 그 아파트에서 준희와 친구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놀았다. 당시는 1999년도였다. 세계멸망이니 뭐니 말이 많던 때라 타임캡슐이 유행이었다. 아마 준희와 친구들도 유행을 따라 타임캡슐을 묻었으리라.준희는 편지를 읽으며 떠오르는 아련한 추억에 사로잡혔다. 어린 시절 그 곳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타임캡슐을 묻을 당시가 2000년을 바로 앞둔 1999년 말이었고 준희와 친구들은 10살이었다. 나중에 커서 성인이 되면 열어보자고 했는데 가만 보니 올해가 2009년이고 준희 나이가 딱 20살이다. 다행히 올 연말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준희는 편지를 보며 올 연말에는 어린 시절 살았던 아파트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과연 친구들이 몇 명이나 올까? 아마 아무도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고 보니 내가 타임캡슐에 뭘 넣었더라? 그것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준희는 오래된 기억 속에 희미하게 묻혀있던 낡은 아파트를 떠올린다. 낡았지만 결코 싫어하지 않았던 추억이 가득했던 아파트. 지금 그 곳은 어떻게 됐을까?2011년을 마무리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바쁘게 붐비고 있었다. 준희는 그 사람들을 지나쳐 옛 아파트로 가는 작은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마을버스의 겉모습은 예전의 그것과 별 다를 것이 없었지만 속은 달랐다. 항상 아파트 주민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사람들로 미어터졌던 과거의 모습과 달리 버스 안은 너무나 한적했다. 준희가 찾아가고자 하는 아파트는 사실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준희도 그 사실을 아파트를 찾아갈 마음을 먹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아파트는 재개발 대상이었다. 준희는 오래되어 흐릿해진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렸다. 아파트를 떠나오기 전 아파트 단지 앞은 늘 붉은 글씨의 현수막으로 가득했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집값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도 어렴풋이 떠오른다.‘새로운 아파트가 지어질 줄 알았는데...’준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파트는 재개발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장소에 새로운 아파트가 지어지진 않았다. 아파트는 재개발 대상이었지만 지대가 높았던 탓에 주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그 때문에 철거가 된 후 새로이 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재개발되면서 자신은 다른 곳으로 아예 이사 왔지만 다른 친구들은 다시 재개발 된 아파트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다. 그렇다면 오늘 올 친구들이 정말 자기 밖에 없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도 옛날 기억이나 떠올릴 겸 가보자고 마음먹은 터였다. 그러나 텅텅 빈 마을버스를 보니 괜히 착잡해 진다. 아파트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그 노선을 달리는 마을버스도 당연히 텅텅 빌 수밖에 없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가 가면서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준희는 까닭 모를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다.조그만 마을버스는 한참을 탈탈거리면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갔다. 겨우 종점에 도착하자 준희는 자신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되었다. 이미 예상은 했었지만 아파트의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도 없을만큼 깔끔한 공원이었다. 여기에 예전에 아파트가 서 있었다고 그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그나마 큰 길이었던 도로가 변하지 않아 그 길을 따라서 여기엔 뭐가 있었겠거니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아마도 여기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던 가게가 있던 곳일 것이다. 친구들끼리 몰려가 여름이면 아이스크림을 사 먹던 그 곳. 그 곳의 인상 좋던 아주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타임캡슐을 묻은 곳은 놀이터에 있던 큰 느티나무 밑이었다. 그러나 이젠 놀이터가 어디 있었는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아무래도 오늘 타임캡슐 찾는 것은 어렵겠다고 생각하면서 준희는 계속 길을 걸었다. 아파트는 예전부터 높은 곳에 있었다. 고지대에 위치해서 산자락에 둘러싸인 아파트였다. 아파트 단지 가장 높은 곳에 서면 멀리 63빌딩도 보였다. 친구들끼리 63빌딩을 누가 더 빨리 찾나 놀이도 했었다. 지금도 63빌딩이 보이려나? 준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지금은 공원이 된 옛 아파트 부지 가장 높은 곳까지 올랐다. 그 곳에서 준희는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친구 민지였다.민지는 같이 다니던 친구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워낙 살갑고 잘 웃어서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친구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던 유일한 비디오가게의 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방과 후에는 늘 모여 그 친구네 집에서 넘쳐나는 비디오 중 뭘 볼까 하며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 비디오 가게 집 딸 민지였다.우리는 서로 어색한 인사를 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우리는 둘 다 훌쩍 커버렸지만 그래도 서로가 어린 시절 그 때 그 친구라는 막연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 많은 서울에서도 기묘하게 고지대인 이 곳 공원에는 인적마저 드물었다. 이 인적 드문 곳을 찾아와 풍경을 보며 감상이나 취하고 있을 이는 어른이 되면 다시 와서 타임캡슐을 꺼내보자고 약속한 우리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준희는 민지에게 잘 지내냐고 물었다.“뭐 그냥 그렇지.”민지가 대답했다. 그 대답 속엔 친구를 만난 즐거움보다 인생의 무게 같은 것이 묻어났다. 아직 갓 스무 살의 대답치고는 너무 무거운 대답이었다. 준희는 재개발이 결정 났던 시기 동네 분위기를 떠올렸다. 어렴풋이 나는 기억 속에서 민지네 아버지는 플랜카드를 들고 재개발을 반대하는 편에 서 있었다.당시 재개발이 진행될 때 준희와 친구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월드컵으로 대한민국이 붉은 물결로 뒤덮일 무렵이었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재개발을 반대하던 주민들이 붉은 띠를 두르고 플랜카드를 내걸었다. 재개발이 결정되자 환호했던 주민도 있었지만 반대했던 주민도 있었다. 준희는 한창 동네가 시끄러웠던 그 시절 플랜카드를 두른 사람들이 왜 재개발에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재개발이 되면 지금 땅 값보다 훨씬 가격을 배로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어차피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생각이 있었던 차에 잘되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래서인지 준희는 그러한 격렬한 반대를 더욱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돈도 더 받는다는데 왜 저러지? 어렸던 준희는 고작 그 정도 생각뿐이었다.머리가 조금은 큰 지금에는 재개발에 반대하는 측도 분명히 존재하는구나를 대강 알게 되었지만 아직도 그것이 왜 그런가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렴풋하게 그러한 문제가 경제적인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민지는 준희에게 왜 이곳에 왔냐고 물었다. 준희는 타임캡슐 이야기를 했다.“너도 기억하고 있었네?”
    독후감/창작| 2015.04.09| 5페이지| 1,000원| 조회(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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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기술도입의 수준과 동아시아에서의 군사혁명 효과(명조와 조선)
    기술도입의 수준과 동아시아에서의 군사혁명 효과(명조와 조선)
    기술도입의 수준과 동아시아에서의군사혁명 효과 : 명조와 조선서론 : 화약무기와 군사혁명의 ‘신화’일반적으로 유럽 내부에서의 화약무기 도입이 가져온 여러 가지 변화상 중 가장 의미있는 현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기사군 중심의 중세적 군대가 다수의 보병 중심으로 편제된 근세적 군대로 재편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과서적인 기술에 대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 점을 들어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실제로 화약무기의 도입이 대규모 보병군으로의 군 구조 재편을 불러온 결정적인 소인이었는가? 인과관계(혹은 선후관계)가 잘못 파악되었거나, 무기체계 면에서 화약무기 외의 다른 시도가 화약무기 이전에 작용하지 않았는가? 또한 중근세 이전이나 유럽 이외에서 화약무기의 도입이 아니더라도 유사한 성격의 ‘변환(Transformation)’은 일어나지 않았는가? 둘째, 비유럽의 화약무기 변환은 동시기의 유럽에 비해 결정적이지 못했으며, 기술도입과 적응의 수준 면에서 볼 때 미흡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인가? 셋째, 화약무기의 도입은 대규모 보병군으로의 전환을 단기간 내에 이끌어낼 정도로 ‘저렴’한 것이었는가? 과연 화약무기의 도입이 중세적 군대, 혹은 유럽외적 사례를 함께 논의한다면 근세 화약무기 도입 이전의 전단계적 군대에 비해 비용부담이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병원 양성에도 국체 차원에서의 공력이 경감되는 효과를 가져왔는가? 세 개의 의문점을 종합하자면, ‘화약무기의 도입’에 의한 ‘군사체계의 단기적 변환’이라고 하는 현상은, ‘현저히 높은 기술수준’을 가진 ‘군사혁명 이후’의 유럽 군사체계의 우수성을 따라잡기 위해 非유럽세계 전반에도 ‘예정’되어 있었던 ‘국제표준’이었던 것인가?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목적은 단순히 개개의 시간대와 지역이 갖는 역사적 맥락을 감안해 기술적 발전상과 군사체계의 변환을 조망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위 ‘군사혁명이론’의 논리구조로 분석되는 ‘우월한’ 기술들이 중근세시기에 어떤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유럽을 포함한 전 세이 목격된다. 선덕(宣德) 9년(AD 1433, 세종 15년) 음력 3월 14일(양력 4월 12일) 작전계획과 관련된 정의(廷議) 중 세종이 직접 출정부대에 화포를 더 지급할 것인지의 여부를 하문한 것 이함장, 이효장 著,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譯(1989),『西征錄』, pp.51; 본서의 찬술연대는 불명이므로 현대어역된 연도로 표기하였다.이나, 선덕 11년(AD 1435, 세종 17년) 4월 8일(양력 5월 14일) 우랑카이 부(部)의 불온한 행동에 대해 방위태세를 증강하기 위해 평안도-함길도 방어에 소요되는 화포-화전의 보급 추진수를 우선적으로 논의한 것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9, pp.155등의 사례를 통해 조선 초 전술운용에서 화약무기체계가 일정 수준의 위상을 점하고 있었음을 평가해볼 수 있다.그러나 광역행정단위인 각 도(道)에 배치한 화포-화전의 수량이 실수요와 예비량을 감안해도 많지 않은 편이고 각각 평안도 강계-영변에 각 2백, 창성-자성-벽동-이산-여연 각 1백 개, 함길도 부거 2백, 회령-경원 각 1백 50, 영북-갑산 각 1백, 경성 50개로 배정되었다., 정통 2년(AD 1437, 세종 19년) 7월 18일(양력 8월 28일) 하교에서 세종이 언급한 것처럼 보병대 일부에 의해 궁시를 보조하는 화기로 소수 활용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9, pp.285되거나, 6월 27일(양력 8월 7일) 하교에서처럼 기병의 호신용으로 활용되는 등 원문에는 세총통(細銃筒)을 쓰도록 지시하고 있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9, pp.268어디까지나 궁시를 중심으로 한 총합화력의 일부로 분산되어 활용되었다는 점은 이후의 조총 활용과는 확실히 대별되는 점이라 하겠다.한편 임란 중 비슷한 오더-믹스(Ordre-Mix)적 체계 내부에서 활용된 화기이기는 하지만, 좀 더 많은 숫자가 회전장에서 보다 직접적이고 비중이 큰 화력수단으로 활용된 조총(鳥銃, 鐵砲)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일본군 일본군은 다수의 조총(철포)을 총합화력의 핵심수단으로 집중운용했으며, 편성자 각 군영에 필요한 무기체계의 획득과정 역시 변모하게 되었다. 삼수제는 포수(砲手, 조총 운용), 사수(射手, 궁시 운용), 살수(殺手, 장창 운용)라는 무기체계별로 분립된 병종을 통합하여 운용하도록 편성된 전술체계로, 일정 훈련수준에 도달한 다수의 보병 중심의 편제로써 상기의 ‘군사혁명’ 이론에서 설명되는 여기에서 ‘군사혁명 이론’이라고 지칭되는 의론의 내역은 주로 파커의 논지에 가깝다.15~16세기 군사변환의 결과물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이전의 점병제(占兵制) 형식의 반(半) 개병제(皆兵制) 체계에서도 각개 기본병장(兵裝)은 개인적으로 준비되고, 세밀한 공정을 요하며 단가가 높은 화약무기는 중앙의 군기시(軍器寺)에서 제작 지급되었었는데, 임란중 변환을 거친 병제에서 조총이 주 화력수단의 하나로 부상함에 따라 이 역시도 국가차원에서 조달해야 할 무기체계가 되었다. 천총 원년(AD 1627, 명 천계 7년, 인조 5년) 『仁祖實錄』의 기사에서는 ‘조총과 화약, 납탄은 관으로부터 지급하며, 군병들은 사사로이 활과 화살(弓箭)을 휴대한다’ 『仁祖實錄』권 16 인조 5년 4월 병진조고 기록되어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산술적으로 판단한다면 조총의 무장비율이 지속적으로 높아진 양란 이후의 조선정부에서 그 획득을 위한 재정부담 역시 확대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유형원의『반계수록』에 따르면 조총 1정의 가미(價米), 즉 재정지출상의 최종 획득가격은 米 5곡(斛), 3석(石) 5두(斗)로 추산되고 있다. 유형원,『磻溪隧錄』권 21 兵制 pp.403이는 물론 실제의 ‘시장가격’과 일치하거나 혹은 공정에 드는 모든 비용을 반영한 수치로 볼 수는 없으나, 대동미(大同米) 과액 중 포함되어 징수되는 세액에서 어느 정도가 조총의 획득에 투여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법정가격’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척도는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임란 이후 米로 징수된 세액으로 조총을 화적(시중에서 구매)하거나 공장(工匠)에게 생산을 위탁하는 형식으로 조총의 획득과정이 구성되었기向의 ‘수렴진화’로만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적응과 변용 : 사르후 전역에서의 명군의 화기운용 양상두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과연 비유럽의 화약무기 변환은 동시기의 유럽에 비해 결정적이지 못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수용주체에 의해 진척되었다고 하더라도 유럽 무기-전술체계에 비하면 기술도입과 적응의 수준 면에서 볼 때 미흡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유럽에서의 화약무기 장기변환이 본궤에 오르기 시작한 16~17세기에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전투의 양상을 분석하고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천명(天命) 4년(AD 1619, 명 만력 47년) 음력 3월, 명의 원정군과 이를 영격한 후금군 사이에 벌어진 사르후 전역(Campaign)은 가장 적실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이하에서는『만주실록』의 사르후 전역에 대한 기술을 중심으로 분석을 시도하려 한다.주지하는 대로 『만주실록』은 청 태종(太宗, 홍타이지) 재위기인 천총(天聰) 9년(AD 1635, 명 숭정 8년) 완성된 태조(太祖, 누르하치)의 사록이다. 『만문노당』과 함께 청 초의 역사기록으로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찬술을 주도한 태종에 의해 자신의 행적이 윤색된 바 없지 않으나 당대사료로서의 가치는 현재까지도 의연하다. 태조 시기의 사적을 다루고 있는 만큼, 사르후 전역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한 기술이 이루어지고 있다.본격적인 전투양상을 다루기 전에, 논의의 편의를 위해 명-후금 양군의 편성을 간략히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부대구분장령병력통수경략 양호(楊鎬)수천(千)좌익북로군총병(總兵) 마림(馬林)부장(副將) 마암(麻岩)1만감군도(監軍道) 반종안(潘宗顔)1만유격(遊擊) 구영징(永澄)여허(葉赫)의 원군 긴타이시(錦台什)1만좌익중로군총병 두송(杜松)총병 왕선(王宣, 보정총병)총병 조몽린(趙夢麟)감군도 장전(張銓, 광녕 분순도)3만유격 공념수(念遂)유격 이희필(李希泌)1만우익중로군총병 이여백(李如柏, 요동총병)총병 하세현(賀世賢)감군 염명태(閻鳴泰)2만우익남로군총병 유정(劉綎) 위한 명조의 ‘화약무기’ 군사변환은 실패였다고 단락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설사 명조가 화약무기 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하더라도, 그 기술수준이 낮고 운용의 ‘소프트웨어(전술)’ 개발이 미진했기 때문에 ‘유럽의 성과’를 체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1619년 요동전역의 실패를 낳은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기병 위주로 편제된 만주인의 군대가 기병 위주의 전술로 사르후에서 승리를 거두고, 최종적으로는 입관 후 청조를 개창함에 따라 ‘비유럽에 한정되어 나타난 특이현상’으로서의 기병 우위 전술환경이 연명(延命)할 수 있도록 한 것일까? 마셜 호지슨이 여러 ‘화약제국’에 대해 유사한 논지를 취하고 있다.또한 이런 실패상에 대해 ‘화약무기’ 군사변환 자체의 실패라기보다는, 당시 요동방어체계와 전국적인 병제(軍戶制)의 이완으로 인해 동원할 수 있는 병원(兵員)의 질이 낮아졌고 동기 도한 보장할 수 없었던 ‘무기 외적’ 체제의 문제였다고만 회호(回護)하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여기서 다시 사르후 전역의 각 전투양상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논점을 도출할 수 있다. 우선 3월 2일에 있었던 3-4-5차 전투 중 4차에 해당하는 좌익북로군 마림과의 접촉 및 교전에 앞서 이 시점에서 후금군은 아직 공념수의 좌익중로군 후위대와 교전하기 전이었다.해당 제대의 배진(配陣) 상태를 후금측이 정찰한 내용을 『만주실록』에서 추출해 보자.明國左翼北路總兵馬林兵, 是夜至間崖安營, 鑿壕擊鼓傳鈴周轉巡邏. 我兵見之, 遂星夜來報大王, 次日大王領兵三百餘先. 馬林方起營, 見大王兵至 遂停兵布陣四面 而立營鑿壕三道 壕外列大砲 砲手皆步立 大砲之外又密布騎兵一層 前列砲 其餘兵皆下馬於三層壕內布陣.명국 좌익북로군 총병 마림의 부대가, 그날 밤 상간애에 이르러 진을 치고, 참호를 파고 북을 치고 방울을 울리며 주변을 돌면서 순라하게 했다. 아군(후금군) 병사가 그것을 보고, 밤이 지나 와서 대왕(다이샨)에게 보고하니, 다음날 대왕이 3백여 병사를 이끌고 먼저 갔다. 마림이 이때 진영을 일으켜 가다가, 대왕의 병사가 이른314
    인문/어학| 2015.04.09| 14페이지| 1,000원| 조회(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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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서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카우리
    서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카우리
    서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카우리Ⅰ. 서론대서양 노예무역은 15세기, 16세기에 소규모로 이루어지다가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증가세를 보였다. 이는 18세기에 절정에 달하여 19세기에 대부분 폐지되기 전까지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그 규모에 대해서는 약 1,100만 명이 아프리카를 떠나 약 950만 명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경철, 《대항해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p. 311.물론 이전에도 아프리카 내부에는 노예제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예무역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아프리카 내륙 북부 지역이나 지중해 방면, 또는 인도양 방면으로의 원거리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Ibid., p. 307.하지만 대서양 노예무역은 이전과는 달리 해로를 이용한 상업 교역망의 건설이 더욱 활발해졌다는 점, 계속된 무역 규모의 확장을 요구했다는 점 등에서 다른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이는 노예무역 과정에서 아프리카의 경제 분야에 여러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카우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폐의 기능을 주로 담당하는 카우리는 노예무역 시기에 다량이 수입되었다. 그리고 이 카우리는 아프리카 경제 내에서 유통되면서 경제적인영향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본 보고서에서는 그러한 카우리가 왜 아프리카에서 화폐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니며 이것이 특히 노예무역 시기 어떻게 유입되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는 어떻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공간적 배경으로는 상당수의 노예무역이 이루어졌던 서아프리카 지역에 집중할 것이다.Ⅱ. 본론1. 다양한 화폐들근대적 국가의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 사회에서의 화폐가 모두 그렇듯,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의 화폐 또한 그 종류나 기준이 일관적이지 않고 다양하게 유통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대서양 노예무역 당시에도 나타났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교역에 있어 상품 간 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일정 부분의 간극은 화폐로 채워졌다. 따라서 다양한 종이지리아 크로스리버 지역에서는 주로 구리 막대를 이용했는데, 사실 구리 막대는 쪼개서 선으로, 다시 선을 녹여서 막대로 합쳐 사용할 수도 있었다. 니제르 삼각주 지역에서는 16세기에 마닐라로 불리는 일종의 놋쇠 팔찌 형태로 구리를 유통시키기도 했다. 대서양 노예무역 시기엔 매년 100톤 가량이 수입되었으며 카우리처럼 사용 범위가 내륙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구리 가격이 상승하자 그 사용 지역은 축소되었다. Hogendorn, J. S. and Gemery, H. A., , African Studies Program at the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African Economic History》, No. 17, 1988, pp. 130-131.철은 대부분 상품의 하나로 들어오긴 했지만 일부는 화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어퍼기니 해안에서는 짧은 막대로 나누어 적은 가치의 화폐로 이용되었다. 세네감비아의 국제 교역 과정에서 철 막대가 자주 이용되었으나 이는 거래의 단위로 이용된 것으로 국내 통화로 이용되지는 않았다. Ibid., p. 131.천은 대부분 국내에서 제조되는 화폐였기에 노예무역과 밀접한 관련은 없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세네갈 지역의 기니 천 화폐는 무역 과정에서 유입된 것이다. 다크 인디고 블루 색으로 염색된 이 천 화폐는 18세기 후반 당시 가뭄으로 인해 국내 천 생산 산업이 타격을 입게 되었을 때 유입되었다. Ibid., pp. 131-132.금은 천과 마찬가지로 서아프리카에서 다량 생산되었기 때문에 노예무역을 통해 수요를 충족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노예무역이 정점에 달하게 되면서 노예매매 과정에서 금이 지불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금은 역설적으로 위다와 골드 코스트 지역에 많이 유입되었다. 이렇게 금과 바꾼 노예는 브라질 등 아메리카의 광산 지역에서 또다시 금을 생산했다. Ibid., p. 132.유럽, 아메리카 등지에서 주조된 동전 또한 노예무역을 통해 낮았다. 그리고 저가 거래에서 널리 이용될 정도로 그 공급이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Ibid., p. 129.반면 카우리는 단위당 가격이 매우 낮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정한 상품과 교환하기 위해서는 대개 매우 많은 카우리가 필요했다. 물론 이로 인해 다량의 카우리를 운반하는 데 따른 어려움, 셈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판단 착오가 카우리의 단점이 되었다. 주경철, op. cit., p. 279.하지만 카우리는 소규모의 시장 거래가 주를 이루는 아프리카의 경제생활에서 훌륭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대개 규모가 작은 교환에서는 오히려 낮은 가치의 카우리가 더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카우리는 작고 형태가 단일하며 상대적으로 희귀하다. 그리고 모조도 거의 불가능하다 Ibid., p. 276.는 기본적인 화폐의 특징도 훌륭하게 갖추고 있다. 또한 카우리의 공급이 대부분 장거리 교역망을 거쳐야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화폐 공급량의 급변에 따른 극심한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의 위험 부담도 경감시킬 수 있었다. Hogendorn, J. S. and Gemery, H. A., op. cit., p. 129.이러한 카우리는 노예무역 과정에서 서아프리카로 다른 그 어떤 화폐보다도 많이 유입되었다. 기본적으로 앞에서 제시되었듯이 아프리카 경제 내에서 카우리가 화폐로 가지는 기능의 강점이 카우리에 대한 높은 수요를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유럽 상인들에 의해 대규모의 카우리 공급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높은 수요와 공급은 노예무역 시기와 맞물려 교역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다. 노예무역 시기 아프리카인 노예를 원하는 유럽인들은 수많은 카우리를 싣고 와 지불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카우리는 서아프리카로 대규모 유입이 가능했다.3. 카우리와 노예무역노예무역은 이른바 사업, 관리상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계속해서 발달해 나갔다. 전문 중개인이 증가하고 기존 거래 시스템이 발전함으로써 대서양 장거리 교역 네트워크의 구반면 아프리카 상인 측에서는 초기 소규모 해안 조직을 통해 노예를 공급하던 구조에서 군사적 왕조나 내륙의 정치 조직과 결부되어 지역 독점 체제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노예의 공급을 통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규 노예상인의 유입과 경쟁의 확산, 그리고 그에 따른 숱한 전쟁과 정치의 불안정성은 오히려 노예의 공급을 더욱 증가시켰다. 유럽에서 유입된 무기의 사용 또한 그 실제적 효과는 적었지만 노예 확보 기술의 전문화를 부추겼다. Hogendorn, J. S. and Gemery, H. A., , Cambridge University Press, 《The Journal of African History》, Vol. 15, No. 2, 1974, pp. 240-243.이러한 노예무역 기술상의 발달과 더불어 17세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아프리카 노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많은 노예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아프리카 또한 유럽 상품과 교환 가능한 상품이 제한되어 있었고, 최대한의 노예를 공급하고자 했다. 그 결과, 18세기에는 서아프리카의 수출품목 중 노예를 제외한 상품의 비중이 15에서 20퍼센트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Hogendorn, J. S. and Gemery, H. A., , African Studies Program at the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African Economic History》, No. 17, 1988, p. 133.노예무역의 가치는 커졌다.따라서 이러한 노예무역을 위해서는 카우리의 수급이 필수적이었다. 카우리의 주요 생산지는 몰디브였기 때문에 이곳에서부터 카우리를 구입해 아프리카까지 도달해야만 했다. 직접 몰디브에서 구매하기도 했고, 실론 등지에서 중간지에서 구매하기도 했다. 이렇게 구입한 카우리는 선박에 실려 유럽 시장까지 도달했다. 초반에 이를 주도한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카우리 무역에 활발히 참여했다. 이후에는 영국과 프랑 〈The Cowrie Currencies of West Africa. Part Ⅱ〉, Cambridge University Press, 《The Journalof African History》, Vol. 11, No. 3, 1970, p. 348.이처럼 서아프리카에서의 카우리 수요는 노예의 수출을 통해서 충당되었다. 그리고 그 규모는 노예무역의 양상이 더 확대되면서 더불어 비례적으로 함께 커졌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노예 가격의 상승으로 인해 카우리의 가격 또한 이전 세기의 약 4배 정도로 상승했다. Ibid., p. 348.그래서 18세기에 이르면 매년 평균적으로 160톤에 해당하는 카우리가 서아프리카로 유입되기에 이른다. Hogendorn, J. S. and Gemery, H. A., op. cit., p. 129.이렇게 대량으로 수입된 카우리는 서아프리카의 해안 지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주변으로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그에 따른 영향은 카우리가 아프리카 지역 간 경제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매개체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4. 카우리와 아프리카 경제노예무역 시기 서아프리카에 유입된 카우리는 워낙 그 양이 막대했기 때문에 서아프리카 경제 내에서 누군가 이를 축적해 두거나, 장신구 등 화폐기능 이외로 활용하거나, 분실되거나 파손되어 소실되어도 유통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더욱이 카우리가 유독 서아프리카에서 원하던 화폐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카우리는 대부분 서아프리카인들 이외에 원하는 이가 없었고, 당연히 유럽인들은 자신의 물품을 카우리로 지급받지 않았다. 이는 카우리가 다른 수입품을 사는 데 재활용되지 않고 서아프리카 내부 경제에 머물러 유통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준다. Johnson, Marion, op. cit., p. 348.하지만 이는 오히려 서아프리카에서 카우리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그 내부 경제를 확장시켜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만들었다.우선 주변 지역과의 경제적 통합에서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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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근대 초 비서구 문명권의 발전과 유럽 팽창의 ‘상대화’(군사혁명,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중심으로)
    근대 초 비서구 문명권의 발전과 유럽 팽창의 ‘상대화’(군사혁명,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중심으로)
    근대 초 비서구 문명권의 발전과 유럽 팽창의 ‘상대화’- 군사혁명,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중심으로 -들어가며1. 종교개혁과 전도: 예수회·낙쉬반디야·겔룩파2. 비서구 지역의 ‘군사혁명’과 ‘과학혁명’ 수용: 환경에 대한 적응3. 변화의 유사성과 차별성나가며들어가며15~18세기 유럽의 해양 팽창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기본 틀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물질적인 면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생태적 환경 및 생각하는 틀까지 해양 팽창의 결과 크게 변화하였으며, 이러한 변화를 초래한 유럽의 팽창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하지만 유럽의 팽창에만 주목하다보면 15~18세기 세계사적 관점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사건은 유럽 세력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일으킨 사건들만으로 국한되며,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기본 틀의 형성이 유럽인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오인할 우려가 있다. 근대 초 유럽의 팽창을 ‘세계의 팽창’이라는 보다 큰 차원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주경철, 『대항해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2~4쪽.당시 팽창하고 있었던 세력은 유럽인들만이 아니며, 여타 문명권의 팽창 결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유럽의 팽창과 다른 지역들의 발전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도 존재한다.그러므로 근대 세계가 성립된 과정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유럽인들의 팽창 과정을 역사적으로,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서구 지역의 팽창 사례와 유럽의 팽창을 비교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유럽의 팽창을 ‘상대화’하여 객관적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이미 캘리포니아 학파에 의하여 중국 및 여타 지역의 경제발전에 주목하여 유럽의 경제발전을 상대화하고 유럽만이 경제적 도약을 이룩한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바 있다. 강진아, 「16-19세기 중국경제와 세계체제: “19세기 분기론”과 “유럽중심론”」, 『梨花史學硏究』31, 2정치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S. A. M. Adshead, op. cit., pp. 157~158.낙쉬반디야 교단은 정치적 행동주의, 이슬람교의 전파, 이슬람교 내의 다수 종파인 순니파(Sunnism)에 대한 충성, 그리고 샤리아(sharia) 성법의 엄격한 준수 등을 특징으로 삼는 개혁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정치적 권력에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음은 “군주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통제함으로써 무슬림들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호자 아흐라르의 말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낙쉬반디야는 수피 교단으로서의 특성상 예수회와는 달리 전체적 조직이 없었으며, 다만 스승(shaykh)-제자 관계만이 존재했지만, 같은 이념을 공유하고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있었으며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Joseph F. Fletcher, "The Naqshbandiyya in northwest China," Studies on Chinese and Islamic Inner Asia, Aldershot, Great Britain ; Brookfield, VT : Variorum, 1995, pp. 5~6; "Central Asian sufism and Ma Ming-hsin's New Teaching," Proceeding of the Fourth East Asian Altaistic Conference, ed. Ch'en Chieh-hsien, Taipei: National Taiwan University, 1975, p. 90.낙쉬반디야를 비롯한 여러 수피 교단들은 아프리카,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등 가톨릭 선교사들도 역시 진출했던 문화권으로 나아갔고,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불신자들(infidels)’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낙쉬반디야는 중앙아시아 유목 사회에서 아직까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던 지역에 적극적으로 이슬람을 전파, 유목민들을 개종시키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Joseph F. Fletche어 널리 전파하고자 하는 열망은 유럽만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동시에 존재했던 현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낙쉬반디야와 겔룩파는 지역에 따라서는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기독교보다 성공적으로 개종자를 이끌어 내었으며, 중국 내부에서 입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겔룩파는 청조와 조화롭게 공존하였으나, 낙쉬반디야의 경우는 전파 과정에서 중국인들과 치열하게 충돌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는 예수회의 전례 논쟁을 상기시킨다.2. 비서구 지역의 ‘군사혁명’과 ‘과학혁명’ 수용: 환경에 대한 적응비서구 지역의 종교개혁과 전파 현상이 기본적으로 유럽인들의 영향 없이 동시대에 자체적으로 발생한 평행현상(parallelism)이라면, 군사적 변모 및 서양 과학의 수용은 그 강도는 차치하고라도 외부로부터 들어온 자극 서양 과학의 수용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적 변화 양상 면에서도 화약이 처음 발명된 곳은 중국이지만 화약무기의 전래는 유럽을 거쳐 이루어졌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지음, 승영조 옮김, 『전쟁의 역사』 1, 책세상, 1995, 366~367쪽 및 버나드 루이스 지음, 김호동 옮김, 『이슬람 1400년』, 까치, 2001, 321~322쪽 참고.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사례이다. 이를 통해 서구에서 시작된 현상이 과연 그대로 수용되었는가, 그리고 근대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데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주지하는 바와 같이 ‘군사혁명’은 근대 초에 유럽 군사력의 비약적 강화를 낳은 중장기적 변동이다. 여기에는 화약무기의 사용, 보병집단의 확대, 축성기술의 발달, 사회구조의 변화 등의 요소가 포함되며, 최근에는 문화적 요소나 보급체제의 개혁 등의 요소도 강조되고 있다. 주경철, 앞의 책, 186~188쪽.이를 통해 유럽의 군사력이 크게 강화된 것은 사실이며, 19세기에 이르면 유럽의 군사력은 점차 다른 문명권을 압도하게 된다. 조프리 파커(Geoffrey Parker) 등의 논자들은 유럽의 ‘군사혁명’이 '서구의 흥기(the rise of the We고 해서, 이것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것은 전통적 방식에 대한 개혁(철저한 조직화) 및 보조적인 병기의 도입(화승총, 야포, 공성포 등)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위력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문명권은 화약무기의 ‘선택적 도입’을 통해 확실한 성과를 얻고 있었으며, 단순히 서구의 군사혁명의 성과를 ‘전파’받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환경에 맞는 군사적 변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전력을 ‘군사혁명’을 겪고 있던 서구의 군사력과 비교했을 때, 최소한 육상 전력으로는 결코 결정적 열세에 있지 않았다. 또한 화약무기를 사용하는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와 같은 방대한 보병집단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그 변혁의 폭도 결코 경시할 수 없다.다음으로 서양 과학의 수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항해시대』에도 지적되어 있듯이, 서양 과학의 전파는 예수회의 동방 선교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이루어졌다. 예수회의 입장에서는 과학 지식이 수단이고 기독교 전도가 목적이었겠지만, 이들을 수용한 사회에서는 과학 지식의 습득에 오히려 주안점을 두었다. 주경철, 앞의 책, 464~465쪽.분명 이들을 통해 천문학, 지리학, 수학, 측량 기술 등 다양한 과학기술이 전해졌음은 사실이고, 이는 강희제를 비롯한 황제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멀리 조선에서 온 사신들까지 선교사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도록 만들었다. 조선에서 이를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강희제는 군사 원정에 선교사들을 동행시켜 위도를 측정하기도 했고, Peter C. Perdue, China Marches West :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 Cambridge, Mass. :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 185.전국의 지도인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완성시키는 데 이들의 기술을 이용하였으며, 이들과 수학을 논하기도 했다.그러나 서구에해 어떠한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 이는 힌두교도와의 대회전에서 승리한 이후 그가 스스로를 ‘성전사(Ghazi)’로 칭했다는 점, 그리고 군사적 공격(및 약탈) 대상을 결정하면서 내세운 이유로 “땅은 부유하고, 사람들은 불신자이며, 길은 짧다(Possessions plenty, the people infidels, the road short).”고 평했던 그의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Wheeler M. Thackston, op. cit., p. 394, 430. 바부르는 찬데리(Chanderi)를 점령한 후 ‘불신자’들의 두개골로 탑을 쌓았다고 기록한 뒤, 바로 세 문장 뒤에 찬데리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xii, p. 407).근현대 이란의 모태가 되는 사파비 조 이란의 창건은 사파비야(Safaviyya)라는 수피 교단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투르크멘 유목민 집단이었던 키질바쉬(Qizilbash: ‘붉은 두건’)를 주 구성원으로 하는 군사적 세력이었다. 버나드 루이스 지음, 김호동 옮김, 『이슬람 1400년』, 까치, 2001, 370~373쪽. 유목민들이 종교적으로 조직되어 군사 세력을 이루고 정복에 나서는 일 자체는 이슬람권의 역사에서 낯선 일이 아니다. 초기 이슬람의 팽창도 그러한 양상이었다. 이는 유목민이 거대한 왕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준다. 이븐 할둔 지음, 김호동 옮김, 『역사서설』, 까치, 2003, 158~159쪽. 다만 사파비 조 이란의 경우는 ‘화약제국’이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의 종교적 개혁운동과 연관된 소수파 정권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군사적 정복과 종교의 전파는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티베트 불교권에서는 ‘개혁 종교’의 전파 및 세력 확장, 종교권 내에서의 정치적 패권 다툼이 종교-군사의 밀접한 연관 속에 펼쳐졌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달라이 라마 정권의 수립에는 몽골인들의 군사력이 결정적 힘으로 작용하였고, 패권을 다투던 각 세력들은 모두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임을 자처하였다.
    인문/어학| 2015.04.09| 16페이지| 1,000원| 조회(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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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과 동북아 국제정치
    한국 전쟁과 동북아 국제정치1. 서론한국전쟁은 오늘의 우리들의 삶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1950년대 6월 25일 거대한 한 사건이 폭풍처럼 사람들 위해 다가온 이후 일반 시민과 학자들은 이 사건의 해석에 골몰하였다. 그 전쟁은 왜 도래하였고,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해답을 역사적 패턴에서 찾고자 한다.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에게 가치 있는 땅이 아닌 한반도를 두고 치열한 전쟁을 치룬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팽창과정에서 그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완충지대로 한반도를 삼았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중국에서는 자본화된 대만에 이어 한반도까지 자본주의화 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주인공인 한국내부는 여전히 분열의 양상을 띰으로써 내부적으로 통일 될 수 없었다. 지도부 사이의 갈등과 반탁과 찬탁이라는 내부분열은 결국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왔던 것이다.2.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미국은 전쟁을 유도했는가?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팽창주의의 역사적 패턴은 지속 되었다. 미국은 공산화에 대한 확대를 막기 위한 봉쇄정책을 실시하였다. 초기의 봉쇄정책은 심리적인 방향으로 경제적 지원을 통해 자본화를 유도한 것이다. 소련의 공산정책이 실효를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사적 봉쇄정책이 필요치 안았던 것이다. 마셜플랜으로 구체화 된 미국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유럽의 일부 지역과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선진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해 시도했다. 유럽에 경제적 지원을 함으로써 동유럽으로 확산되어 온 소련의 공산화를 막는 것과, 아시아의 일본의 자본화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까지 자신들의 팽창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중국에서의 혁명으로 미국의 봉쇄정책은 적극적으로 변모하였다. 즉,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지 공산주의자들이 팽창을 뜻하는 행동을 할 때는 곧장 개입해야만 하고, 그런 개입이 미국의 재정적자를 안겨준다고 해도 소련의 팽창을 더운 용인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한편, 전쟁발발의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미국의 몇 가지 행위를 통해 남친 유도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에치슨의 연설, 주한미군의 철수, 대한원조에 대한 미국인들의 부정적인 입장을 통해 알 수 있다.-소련은 한국 전쟁을 원했는가?소련은 한반도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김일성의 남침 주장에도 2차례나 거절하였던 것에서 단적으로 들어난다. 무엇보다, 소련은 한반도의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원하지 않았다. 45년 당시, 스탈린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자 했고, 기독교 세력이 강했던 평안도 지역의 공산화는 오히려 큰 문제만 일으킬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련이 한반도의 자본화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반도가 적대세력이 되지 않아야 일본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련은 한반도에 큰 관심도 없었고, 적대세력으로부터 공격받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에, 주한미군의 철수와 자국의 핵실험 성공으로 미국에 비해 군사적 우위에 있다고 판단한 소련은 김일성의 남침 주장에 허락해주게 되었다.-중국은 왜 참전했는가?한국전쟁 참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대부분이던 중국이 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을까? 중국은 내전 때 공산당을 지원해준 북한의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의 전쟁에서 질 경우 전개될 상황을 두려워했다. 특히 대만에 국민당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승리한 대가로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면 난처해질 게 뻔했다. 그러나 중국은 전쟁에서 패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미국이 북한 지역까지 점령할 경우, 대만과 한반도 양쪽에서 포위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던 것이다.3. 한국전쟁과 동북아 국제관계 속의 역사적 패턴미국의 팽창적 역사의 패턴 속에서, 한국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라는 팽창 속에 반대세력인 공산주의 진영은 일종의 ‘악’의 세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발발 하기 전,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내용을 보면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분명해 진다. 먼저, 미국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그 이유는 한반도가 독립국가가 될 경우, 식민지의 경험으로 일본과 단절할 것이며, 이로 인해 한반도는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화가 될 것임이 역력했다. 이럴 경우, 미국의 팽창주의적 성격은 일본에서만 그치고 만다. 뿐 만 아니라, 일본을 경계로 공산화(미국의 입장에선 악)가 진행될 우려도 있다. 미국은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고자 한반도를 분할하여야만 미국은 그들의 팽창을 지속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인문/어학| 2015.04.09| 2페이지| 1,000원| 조회(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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