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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 인구 집중도 분석
    과 목 명 : 도시지리학제 목 : 도시 인구 집중도 분석人口規模別 都市人口變化 : 1995 / 200019952000인구규모도시수도시인구구성비(%)인구규모도시수도시인구구성비(%)100만이상50~100만25~50만10~25만5~10만3~5만2~3만*************,709,7014,717,1412,882,1453,689,9411,939,6071,086,917923,75058.7912.767.0610.715.043.142.5100만이상50~100만25~50만10~25만5~10만3~5만2~3만71017369152122,949,5706,744,9305,565,1675,592,046694,672527,477494,91053.9415.8413.0713.131.631.231.16합 계13836,949,202100합 계11542,568,772100(단위 : 인구 2만 이상 시?읍)1> 도시수가 줄다!!1995년도와 2000년도의 인구변천표를 보면 눈에 뛰는 것이 도시수가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그 변화폭은 다음과 같다.인구규모100만이상50~100만25~50만10~25만5~10만3~5만2~3만도시수 변화수치+1+3+9+14-19-14-17위의 표와 같이 10만 이상의 시급 도시는 증가한데 비하여 10만 이하의 읍급도시는 큰 폭으로 줄었다.증가 도시수 : 1+3+9+14 = 27감소 도시수 : 19+14+17 = 50이와 같이 인구 10만 이하의 도시들의 수가 대폭 감소한 이유는 무엇일까? 1995년도 읍급 도시 상당수가 10만 이상의 “시”로 승격되었다는 것이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95년도의 읍급 도시들 중 인구규모가 한 단계씩 높아진 수를 제하고라도 나머지 23개의 도시는 오히려 인구 2만 이하로 떨어지는 추세를 보인다. 그렇다면 이곳은 도시로의 인구집중을 뜻하는 것인가?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인구집중도를 분석해보자.2>도시 인구집중도 분석1. 집중도 지수의 의미도시간의 절대 인구의 집중과 분산정도를 파악하는 집중도지수는 도시체계 내에서 도시개개의 도시들의 독특한 인구 규모 즉 절대값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자동적으로 제한되는 단점을 극복한 좋은 분석방법이라 하겠다.2. 집중도 지수의 분석 방법1) 각 도시간 인구의 차이의 절대값을 구하고 이 값의 평균값(D)을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구한다.????????공식 ①※ ?N = 도시의 수?X= 각 도시의 인구 규모2) 인구 집중 지수(C)를 구하기 위하여 전 도시(N) 인구의 평균(M)에 2를 곱한 수로 D 값을 나누어줌으로서 집중 지수 C를 구한다.???????공식 ②위의 두 공식에 의하여 구해진 인구 집중 지수의 값은 0과 1 범위 내에 있다. 도시체계 내에서 도시간의 인구가 완전 분산이면 0, 어느 한 도시에 완전 집중이면 1의 값을 가진다.3. 우리나라 도시체계의 都市人口分布關係( 도시인구 분포관계 )1) 도시수를 일치시키지 않고 도시간 인구 집중도를 분석한 경우연도도시간 인구 차이의 합D각 도시인구의 합NMC1*************024596957.113*************8.10.**************************7.*************5722.70.708*************845329641062.03*************67.20.7277*************25329683512.238*************2.60.65**************************.44*************16.30.6667 都市間人口集中度分析表 (도시수를 일치시키지 않은 경우)위의 표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인구 집중도 분석 그래프 과 을 참고하여 분석을 해 보면 시기별 도시간 인구 집중지수의 값은 1972년도에 0.7062, 1980년에 0.7084, 1990년에는 0.7277로 나타나 1990년도까지는 우리나라의 도시체계는 도시간의 인구 분산보다는 집중도가 높고 또한 특정도시로 인구가 보다 집중하는 경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995년도에 0.6523, 2000년에는 0.6667로 1995년도에 인구 집중 도시의 개수는 73로 일치하지만 각 도시의 인구평균의 증가량이 1980년에서 1990년까지는 11,333,747명, 1990년에서 1995년도까지의 도시의 인구평균의 증가량은 6,093,711명으로 1980년에서 1990년 사이에 인구가 많이 증가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도시간 인구평균값의 증가량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므로 인구집중도가 다소 낮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1990년에서 2000까지는 다시 인구 집중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이 기간동안에 도시의수도 증가하고, 도시수의 증가와 함께 도시의 인구수도 함께 증가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이때 기억해야 할 것은 집중지수의 계산값은 도시체계에 포함된 도시수가 증가할수록 집중지수의 값도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집중지수를 시계열적 비교연구에 사용할 경우엔 계산에 포함된 도시의 수를 일치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집중지수의 값은 상당히 과장되어 비교된다.2) 도시의 수를 일치시키고 도시 간 인구 집중도를 분석한 경우연도도시간 인구 차이의 합D각 도시인구의 합NMC*************45329641062.03*************67.20.7277*************25329683512.238*************2.60.65*************3795329691782.*************6564.10.6215都市間人口集中度分析表 (도시수를 일치시킨 경우)위의 표의 내용을 그래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인구 집중도 분석 그래프 와 를 참고하여 인구 집중도를 분석을 해 보면 의 내용 즉, 도시의 수를 일치시키지 않고 인구집중도를 분석한 경우와 비교를 해 볼 때 계산된 집중지수의 값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도시의 수를 일치시켰을 때는 그렇지 않을 때보다 1980년을 기점으로 해서 1990년도부터 2000년도까지 인구 집중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이후로 이렇게 인구 집중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은 인구의 증가와 함께 도 큰 도시로 인구가 분산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3) 1990년도 권역별 도시 인구 집중도 분석(1990년도)권역도시간 인구 차이의 합N²D각 도시인구의 합NMC수도권*************271024.*************1680.90.7830중부권4*************907.52*************7.60.5011서남권5*************503.13*************0.10.5050동남권*************12013.*************367.30.7078 1990년도 圈域別 都市間人口集中度分析表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수도권, 중부권, 서남권, 동남권의 지역간 도시체계의 성격은 각기 다른 차이가 있다. 위의 표의 경우 도시의 수를 일치시키지 않아 다소 과장된 결과가 되었을지는 모르나 대략적으로나마 우리나라의 권역별 도시간 인구집중도를 분석 하고자 한다.1990년도의 경우 도시간의 인구 집중도는 수도권이 0.7830으로 가장 높게 나타나 우리나라의 도시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으며 인구도 역시 수도권에 밀집에 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동남권이 0.7078로 높게 나타났는데 임해 공업단지와 부산, 경남권이 공업도시로 발전을 하였고, 부산을 중심으로 마산, 창원 등 도시가 수도권에 비해 2개의 도시가 더 많이 분포되어 있고, 인구도 수도권 다음으로 많이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서남권, 중부권이 각각 0.5050, 0.5011로 비슷한 인구 집중도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주로 수도권과 동남권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2000년도 권역별 도시 인구 집중도 분석(2000년도)권역도시간 인구차이의 합N²D각 도시인구의 합NMC수도권702*************97*************0349.20.685059서남권*************4237.04*************2.90.4460중부권719*************2.2*************950.4705동본 1990년의 권역별 도시간 인구집중도와 마찬가지로 도시의 수를 일치시키지 않아 결과가 다소 과장되어 도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2000년도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략적으로 우리나라 권역별 도시간 인구집중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000년도의 인구집중도는 전체적으로 1990년도에 비해서 낮아졌다. 그것은 도시의 수가 많아지고,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큰 도시가 몇 개 발달을 하면서 특정한 도시에 대한 인구집중도가 낮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도로 넘어오는 시기에 도시간의 인구분산도가 점차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과 동일하다. 1990년도와 몇 가지 비교를 통해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5) 권역별 인구집중도의 1990년과 2000년의 비교분석권역도시간 인구차이의 합N²D각 도시 인구의 합NMC연도19*************019*************0900019*************0수도권*************84*************024.*************61*************811680.9820349.20.78300.685059서남권4*************4*************.*************24*************487.6307471.90.50110.4460중부권5*************52225289229503.1248982.23*************1517227240.12645950.50500.4705동남권*************20654484529612013.5617997.**************************.3511157.30.70780.6045 1990년과 2000년도의 권역별 도시간 인구집중도 분석표(1) 도시의 개수의 변화표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의 수가 1990년도에 수도권이 20개이던 것이 2000년도에 25개로 증가하였고 중부권은 15개에서 17개로, 동남권에서는 도시의 수가 22개에서 23개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들 권역과는 반대로 다.
    교육학| 2004.12.30| 11페이지| 2,000원| 조회(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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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모형
    (교육과정 발표문)10. 교 수 모 형교수모형이란 우리가 이제껏 배운 것과 같은 교육과정의 모든 원리들이 한꺼번에 녹아서 교사의 교수행동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모양이라 할 수 있다. 즉, 교수과정의 가장 구체적이고 궁극적인 시금석이다. 교육과정의 두 가지 기본 모형인 목표모형과 내용모형 각각에 따른 다음의 두 모형, 글레이저 모형과 브루너의 지식구조모형을 살펴보자.Ⅰ. 글레이저 모형글레이저에 의하면 교수라는 것은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으며, 이 체제는 1)교수목표 2)출발점 행동 3)교수절차 4)성취도 평가 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구성요소는 피드백고리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한 구성부분에서 얻어진 정보는 다음 구성부분에 연결되는 것과 동시에 그 이전 부분을 수정하는데 쓰인다.각 구성요소에 대해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교수목표는 가장 먼저 결정되어야 하고 교수전체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뜻에서 가장 중요하다. ‘하나의 교수과정이 끝났을 때 학생이 할 수 있는 행동’ 즉, 성취도 평가 단계에서 평가되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리고 교수목표는 그 이후 교수활동의 여러 단계를 확실하게 이끌 수 있어야 하므로 ‘명확하고 상세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보통 메이거의 ‘행동적 수업 목표’를 받아들인다.둘째로 출발점 행동이란 학습을 시작하기 이전에 학습자가 이미 갖추고 있어야 할 여러 가지 행동특성을 말한다. 이와 대비하여 ‘교수목표’를 도착점 행동이라 한다. 예를 들어 ‘시계를 보고 1분 오차범위 내에서 시간을 읽을 줄 안다.’가 도착점 행동이라면 출발점 행동은 1.시계의 두 바늘 중에 큰 것, 작은 것을 분간할 줄 안다. 2.큰바늘과 작은 바늘이 각각 무엇을 표시하는지 안다. 3.1에서 60까지의 수를 분간하고 쓰고 말할 수 있다. 등이다. 위와 같이 위계상 아랫단계의 요소가 그 바로 윗단계의 요소를 학습하는 데에 필요한 ‘선행 학습’이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때 ‘출발점 행동’은 블룸이나 가네의 아이디어를 기초로 하여 성립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도 있다. 출발점 행동은 도착점 행동을 하기 전에 갖추어야 할 선행학습이 아니라 도착점 행동의 한 부분이며, 또 그 일의 한 부분으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다음으로 교수절차는 학생들의 출발점 행동을 교수목표(도착점 행동)로 이끄는 일이다. 글레이저의 모형에 가장 중요한 시사를 주는 것은 블룸의 ‘완전학습’ 아이디어다. 블룸은 완전학습을 위한 교수 전략으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시한다. 1>출발점 행동 또는 선행학습을 갖추었는가 2>학습자가 학습과제를 학습하는 조건 결정면에 있어서의 정의적 특성은 비교적 고르게 안배되었는가 3>수업의 질은 높은가가 그것이다.Ⅱ. 브루너의 지식 구조 모형브루너는 지식 구조 모형 수업에 비추어 ‘지식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지식의 구조는 1)표현 방식 2)경제성 3)생성력의 세 가지 특징으로 기술 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표현 방식은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 데에 거쳐야 할 일련의 동작으로 표현되는 작동적 표현(예;시소를 탈 때 상대방을 고려하여 자리를 잡을 줄 안다.), 개념을 대체적으로 전달하는 영상, 도해로 표현하는 영상적 표현(예;천칭의 모형을 다루거나 그림을 통하여 천칭의 원리를 ‘이해’한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규칙에 지배되는 상징체계로서의 상징적 또는 논리적 명제로 표현하는 상징적 표현(예;천칭의 원리는 나타내는 언어나 수학공식을 사용할 수 있다.)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작동적 표현이나 영상적 표현은 상징적으로 표현된 지식을 이해하는 보조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특정한 발달 단계의 아동이 상징의 의미를 이해 할만한 지적 능력이 없다면, 작동적, 영상적 표현을 사용하여 가르쳐야 한다. 물론 이는 나선형 교육과정의 중요한 형태는 아니다.다음으로 경제성은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어야 할 정보의 양이 적은 상태를 말하고 생성력은 한가지를 알면 그와 관련된 ‘다른 것’을 만들 수 있는 힘을 뜻한다. 이 두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상징적 표현이다. 브루너가 든 세가지 표현방식은 그것이 적용될 수 있는 경우에 한하여 지식을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Ⅲ. 두 모형의 차이점목표모형과 내용모형은 필시 달랐으므로 교수모형에서도 이 차이는 드러난다.1>교육내용 : 목표모형을 나타내는 대표적 모형인 글레이즈의 모형을 살펴보면 어디에도 교육내용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교육내용’은 글레이즈 모형의 ‘교수목표’ 속에 들어있다. 곧 교수목표는 ‘교육내용’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며 따라서 ‘교육내용’은 ‘행동’으로 표현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목표모형 자체가 애당초 교육내용에 대한 관심을 교육과정에서 제외하려는 데에 의도가 있었으므로 글레이즈 모형도 이러이러한 ‘교육내용’을 어떠한 방법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언급보다는 교수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술적(technological) 개념을 강조한 모형이다. 이에 반해 내용모형에 입각하여 보면 ‘교수모형’은 교육내용으로서 ‘지식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식의 구조는 그 지식에 관한 사고의 과정이므로 교수모형은 교육내용에 관한 사고의 과정 (즉,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을 교수의 목적을 위하여 체계화한 것이다.2>명백하고 체계적인 제시 : 글레이즈 모형은 교수 목표가 그 이후 교수활동의 여러 단계를 확실하게 이끌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명확하고 상세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용모형에 입각한 교수모형은 비록 명백하게 체계화하여 제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교사가 특정 내용에 대한 지식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킨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모형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학| 2004.12.30| 2페이지| 1,000원| 조회(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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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사] 중국고대황제권의 성격 평가C아쉬워요
    中國 古代 皇帝權의 성격1. 들어가며‘자리가 인간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선하고 아무 욕심 없는 사람도 일정 권력이 주어지는 자리에 가게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통감하게 되는 것이 ‘대통령’선거이다. 국민들은 대통령 후보 때의 모습과 ‘대통령’이 된 후의 의사결정이나 행동이 많이 달라지는 것을 응당 그런 것이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해보겠다’며 나라의 안위와 발전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막상 ‘대통령’자리에 가게 되면, 권력의 노예가 되어 ‘대의’를 위한 행보보다는 ‘어떻게 이 권력을 더 누릴 수 있을까’고민한다.하물며,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초월적 절대권력의 자리는 오죽 했을?. 권력의 정점에 서서 나라의 모든 일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皇帝’가 그 권력을 바르게 쓰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실제로 역사 속에는, 극악무도한 폭군, 무능한 군주, 백성의 생활을 희생시키며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황제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황제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하고 결국 ‘황제 지배체제’에 대한 회의도 들만하다. 하지만 역대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신랄한 현실 비판이나 폭군의 放伐과 革命의 정당성 주장도 실제 황제지배체제의 當爲的 理想을 요구하는 성격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황제 지배체제의 안정 및 유지 발전에 최대의 노력을 쏟은 것이 당연하다면, 중국 사회의 변화에 상응하여 황제 지배체제의 구체적인 내용과 성격은 물론 그 체제의 핵심이자 정점에 위치한 황제권 또한 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권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으로 행사되는가를 주목하고, 그 형식의 논리적 근거 및 역사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어떤 논리와 형식으로 관철되었는지 알아보고 더불어 절대적인 권한, 신과 같은 권위를 가진 자로써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역대 황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황제지배체제가 2000년간 중국을 지배해 왔는지 알아보자.2. 私 - 公 - 官 - 爵한 사회의 私는 한정되어 있다.그래서 모두들 좀 더 많은 私를 갖길 원하지만, 이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구성원 중 어느 한 집단이 절대적인 자신의 권력을 이용,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를 취한다면 그들 권력의 정당성은 심각한 도전을 받을 것이다.모든 국가권력은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의 이해를 위하여 봉사하지만 동시에 전체 성원의 권익을 일정한 범위에서 보장하는 공공적 기능을 수행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황제의 私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의 통치가 공적기능을 수행하면서, 그 기능의 일부로 그의 私가 관철되는 방식이 보다 명분이 있으면서 실리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公의 형식이다. 皇帝는 개인 또는 私家간의 무제약적인 경쟁을 규제하기 위해, 법치?관료제도등 ‘질서’의 확립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 자신의 安危와 權威를, 국가의 공공적 제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경비로 부과되는 백성의 의무 속에 황제의 경제적 이익을 각각 용해시켰다.이러한 公의 논리적 전개는, 관료는 법에 규정된 녹봉에 만족하며 법규에 따른 업무의 수행에 열중할 뿐 일체의 私를 배제한다는 ‘官’의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 정점에 위치한 ‘聖人’황제 역시 그 원리에 철저하게 종속된다면, 황제는 비록 절대권력을 행사할지라도 그 기능은 ‘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의 ‘私’를 관철할 길이 없게 된다. 황제가 철저한 私의 포기를 요구하는 官의 원리에만 자신의 지위를 종속시키는 것으로 만족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官의 원리를 포기하지 않고 君臣 모두의 官을 일정하게 보장할 수 있는 爵이 도출되었다.官의 원리가 제약한 황제의 私신장을 위해 官만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방편으로 관료와 황제의 개인적 친분관계의 형성, 측근 비서조직(內朝)에 의한 공식전문기구(外朝)의 견제정책을 폈다.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결국 ‘官’의 원리 안에서 ‘私’의 제한된 추구에 불과하며, 황제의 私를 최대한으로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지위와 특권을 가진 내부에서 分與 할 수 있는 家의 원리를 관철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爵制가 나타났는데, 爵制는 신분에 따라 私를 보장하는 것으로서 황제가 爵의 정점에 위치함으로써 공적이고 합법적인 私를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것은 결국 황제와 관료가 상호 상대의 私를 승인한 것이었다. 즉 황제 私의 확대과정은 官人 私의 확대과정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양자가 서로 주장하는 公이란 많은 경우 상대의 私를 억제 자신의 私를 확대하는 것에 불과하였다.그러므로 황제권의 성격은 결국 官人으로 대표되는 지배층과 皇帝간의 私를 둘러싼 拮抗관계에서 고찰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3. 황제 私와 관인 私의 拮抗황제와 관료가 상대의 私를 억제해 가는 길항작용은 관인층의 사회적 성격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다. 전국시대의 관료는 그들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탁되었고, 그의 입신양명은 군주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중앙집권적 군주체제 확립에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관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모습은 秦代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공신이나 종실에게도 특권적 신분이나 권력이 分與되지 않았다. 진시황의 철저한 법치와 강력한 집권체제의 확립, 독재는 가장 官的인 황제체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독재는 중국의 황제 지배 체제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아니지만 진시황은 그가 모든 것을 친람, 결재할 정도로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는 독재라고 할 수 있다. 탁월한 官的 능력을 가진 진시황이 죽고 나자 그의 제국이 와해된 것은 官的인 황제정치는 탁월한 官的능력을 가진 황제만이 유지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그러나 漢初의 상황은 달랐다. 공신 집단은 대대적으로 봉건되었고, 그들은 황제의 절대권을 위협하는 분권세력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제어하는 데 있어 황제들은 열후들을 황제의 陵을 모시는 은총을 베푼다는 명분으로 황제의 陵이 있는 곳으로 遷徙시키기도 하고, 刺史로 하여금 왕국감시의 임무를 부여하는 등, 禮的인 형식을 거쳐 法治로 최종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 때의 관료는 황제의 신임과 은총에 의해서 그 영달과 실각이 좌우되는, 따라서 독자적인 기반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官的 원리로 황제와 관료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後漢代에 들어 이들이 호족, 문벌을 형성하게 되면서 더 이상 官的원리로 지탱해 나갈 수 없었다. 이 때부터 賜爵이 빈번하였던 것 역시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관료의 私의 확대는 황제의 私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後漢이 무너지고 호족관료들이 문벌귀족을 형성하게 되었다.이러한 문벌귀족이 사회를 주도해 나감으로써 황제권이 약화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황제권이 유일한 公의 구심점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에 황제는 公과 官의 기능의 회복에서 황제권의 회복을 길을 찾았다. 唐末까지도 과거출신의 관료조차 士族의 비율이 60% 이상을 점하고 있었으나 점차 문벌보다는 관료의 성격이 강화되면서 황제권의 우위가 확립되기 시작한 것이었다.‘爵’의 원리에 따라 상호 ‘私’를 일정한 범위 내에서 ‘公’의 형식으로 승인한 황제와 관료지배층은 각기 보다 많은 ‘사’의 확보를 원하면서 서로 길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사’의 속성)때문에 상호 ‘사’의 확대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상대의 ‘사’를 억제하지 않을 수 없는 일견 모순된 길항관계가 황제와 관료 간에 형성된 것이다.위에서 기술한 길항작용과 관련한 사회지배층의 사회적 성격에 따라, 표면상 황제 ‘사’의 확대로 보이는 상황이 오히려 황제권의 상대적 약화를 의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황제권은 공적 기능이 관의 원리에 의해 선발되는 관료에 의해 수행되는 비중이 높을수록 강해진다. 하지만 公, 官的 황제권 역시도 가장 강력한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公, 官의 논리가 관료의 私를 배제하는 효과도 있지만 동시에 황제의 私를 제약하는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의 권력이 公과 官의 원리를 빌리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황제는 끝없이 公과 官의 원리로 관료들의 私를 억제하면서 자신의 私를 유지해 나가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권은 가장 私的일 때 가장 약화되기도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황제의 무한한 私의 추구는 公, 官의 질서를 파괴하고, 황제는 公의 구심점이라는 위치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公, 官, 私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황제권을 유지하기 힘들고, 끝없이 그것들을 조절하는 길항 작용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4. 마치며殷代에 ‘皇帝’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보여지지만 ‘余一人’과 같이 황제와 비슷한 유일한 주권자의 존재는 있었다고 추측된다. 유일한 주권자가 존재하는 사회는, 오늘날의 모두가 주권을 가지고 있는 民에 의한 지배를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와는 다르다. 여기서의 유일한 주권자는 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자이고, 최종 승자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국가의 황제라고 불리는 최종 승자는 그 자신의 私의 확대가 주요한 목적일 것이다. 황제의 사 추구는 중국사회의 발전 정도와 상황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고, 이에 있어서 황제권은 어떻게 자신을 지켜나갔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교육학| 2004.12.30| 5페이지| 1,000원| 조회(1,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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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홍콩영화가 화교권과 아시아태평양일대에 널리 수용된 이유 평가C아쉬워요
    1. 홍콩영화의 시작가. 홍콩경제의 발전鄧小平에 의해 향후 50년 동안 보장된 一國兩制의 원칙 아래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자그마한 도시국가 홍콩에는 약 700만 명 가량이 살고 있다. 면적 1097평방킬로미터의 제주도 절반 만한 크기에 불과한 자그마한 도시국가 홍콩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 이미 일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섰다.20세기 초반 내내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직할 식민지였던 홍콩은 중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였다. 중국대륙의 혼란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었고 뒤이은 國共內戰에서도 홍콩은 안전한 대피소의 역할을 담당했다.영국의 직할 식민지였던 홍콩은 영국의 자본과 기술에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이 결합되어 생산된 재화가 중국대륙과 인근 국가들로 수출되는 전형적인 식민지형 무역 전진기지로서 성장한 도시였다. 중국의 입장에서 자유무역도시 홍콩은 매우 중요한 경제적 가치를 지닌 지역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경공업분야가 홍콩경제의 주축을 이루었고 이후 홍콩은 무역, 금융, 보험과 같은 3차산업을 전담하는 길로 나아갔다. 1980년대 이후 홍콩은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 아래 비약적인 발전을 지속해 왔으며 1997년 홍콩은 반환 이후에도 경제적 번영을 지속하고 있다.나. 植民地下 영화산업의 성격 및 발전영화가 발명되었던 19세기 말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치적 권리가 포기된 식민지로서의 홍콩에서 발달한 홍콩영화는 영화라는 현대적 매체와 식민지적 성격이 결합된 독특한 매체로서 발달해 나갔다. 서구국가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홍콩에서는 영화가 上海나 北京 못지않게 일찍 도입되어 상업화의 길로 나아갔다.영화제작의 역사도 매우 빨리 시작되었다.北京보다 4년 늦게 1913년 중국영화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黎民偉가 미국인과 합작으로 홍콩 최초의 영화사로 기록되어 있는 華美影片公司를 설립하여 단편극영화 《莊子試妻》를 제작한 것이 홍콩영화사에 의해 제작된 홍콩영화 의 첫 경우였다고 전한다.초기 홍콩영화는 홍콩 자체의 내부적 역량에 의해서라기보다 중국영화의 중심지 上海의 중국영화와 홍콩의 배후지인 廣州의 영화적 상황과의 긴밀한 연관관계 아래 발전하였다. 1930년대 이후 홍콩은 배후지인 廣州 일대의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이 발전하며, 홍콩 인근 지역이 중국 전역에서 전쟁의 참화가 비교적 덜한 지역으로 부각되면서 上海의 영화산업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제작과 배급의 기반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과 뒤이은 長征, 내전을 방불케하는 국민당의 좌익 탄압과 좌익의 지하활동으로 인해 上海는 물론 중국 전역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고 치안상태가 불안정해진 것도 홍콩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영화제작을 가능하게 해 주는 도시로서 부각되도록 하였다.2. 홍콩영화의 발전; 홍콩영화가 화교권과 아시아태평양 일대에 널리 수용된 이유가. 시대적 배경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과정에서 전쟁의 피난지 역할을 하였던 홍콩은 1950년대 초반 벌써 200만이 넘는 인구를 포함한 대도시가 되었다. 각지에서 홍콩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비좁은 땅에서 밀집하여 거주하였으며, 별다른 대중적인 오락이나 체육활동, 문화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영화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매우 높았다.산업과 상업으로서의 홍콩영화는 1949년 이후 대단한 외연의 확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륙 각지에서 전쟁을 피해 홍콩으로 왔다가 다시 홍콩을 거쳐 싱가포르와 말레이지아로 이주한 사람들의 상황도 홍콩의 중국인들과 유사하여 홍콩영화는 홍콩 뿐 아니라 싱가포르와 말레이지아의 화교사회에까지 폭넓게 보급되었다.나. 영화시스템케세이 영화사, 쇼브라더스 영화사 기존의 長城電影制片有限公司, 이밖에 소형영화사까지 합하면 1950년대 홍콩 영화사들의 수자는 3, 4백 개에 달할만큼 영화사의 수가 많았다.그리고 제작방식에서도 홍콩영화의 발전이유를 찾을 수 있다. 중국 대륙의 영화업이 대체로 자체 제작시설을 보유한 대형 영화사들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던 데 반해 홍콩의 영화업은 영화제작, 스튜디오, 현상의 세 분야가 각기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홍콩영화 특유의 기동성있고 기민한 경제적인 제작 방식은 1950년대 홍콩영화의 발달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빠른 경우는 일주일만에 영화가 완성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놀라운 경제성은 같은 영화를 다른 지역에서 만드는 것에 비해 훨씬 높은 수익성을 영화산업에 보장해 주었다.인근 지역과 전세계 화교 사회로까지 영역이 넓어져 세계적인 배급망을 갖추게 되었던 것도 홍콩의 영화가 화교권과 아시아태평양 일대에 널리 수용될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다. 영화장르적 특성무협영화를 필두로 하여 멜로드라마와 코메디가 주류를 이루었던 당시 홍콩영화는 이런 산업적 특성 외에도 대중의 취향에 적절하고 신속하게 부응하는 통속성과 기동성에서 단연 앞섰다.1950년대 홍콩의 영화산업이 개발한 영화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경우는 무협영화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廣東 지방의 민간전설에 나오는 영웅인 黃飛鴻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이었는데, 1950년대 홍콩영화 가운데 62편이 黃飛鴻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였다고 한다. 당시 黃飛鴻 역을 맡았던 關德興과 石堅은 해외의 화교 사회에서까지 높은 인기를 누렸다. 무협영화의 인기는 197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홍콩 무술영화는 단순하고 뻔히 드러나는 선악의 대립구도라는 이분법적 구성방식을 취하면서 줄거리를 최대한 단순화시켜 관객에게 불필요하게 기억과 해석상의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홍콩 무술영화의 틀은 미국의 서부영화나 영국의 007시리즈처럼 이해하는 데에 하등의 심적, 지적 부담을 지우지 않고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영웅적 주인공의 모습, 곡예를 방불케하는 그 자체로서 볼만한 무술동작, 잔인하고 인상적인 액션, 쉴새없이 움직이는 배경 등으로 홍콩과 아시아는 물론 서구의 관객들까지도 사로잡았다.무협영화 다음으로 인기가 높았던 것은 멜로드라마였다. 선한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드에 이르는 단순하고 상투적인 줄거리와 구성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항상 안정적으로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을 결론으로 하였던 홍콩의 멜로드라마는 동남아시아는 물론 아시아 전역과 나아가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외국의 관객들에게도 구미에 맞았다.라. 컬러텔레비젼 보급에 따른 홍콩영화의 성격변화1970년대 이후 홍콩영화는 큰 성격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컬러텔레비젼의 보급이었다. 컬러텔레비젼이 1970년대를 거치면서 홍콩인들의 가정에 급속도로 보급되자 廣東語 영화는 타격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廣東語 영화와 달리 北京語 영화는 1970년대에 들어와 오히려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北京語 영화는 대조적으로 제작 편수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컬러텔레비젼의 보급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北京語 영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의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우선 홍콩 내부의 주민들 가운데 北京語 사용 인구가 증가한 것도 한 요인이었지만, 臺灣과 싱가포르를 비롯하여,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서구 각국의 화교권이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번영하여 北京語 영화는 홍콩 내부는 물론이고 이미 전 세계로 확장된 배급권역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첫째 요인이었다.
    인문/어학| 2004.05.05| 4페이지| 1,000원| 조회(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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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인생 감상문 평가A좋아요
    과제 1 영화 감상문1. 격동의 중국현대사를 생각한다.영화 을 보고 감상문을 쓰라는 과제를 받았다. 사실 한 번은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던 영화라 반가운 마음에 영화를 보았다.이 영화는 시대 변화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다루고 있었다. 다름 아닌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살아온 인물을 말이다.이 영화는 학교에서만 배웠던 1940년대-1960년대의 격동의 중국현대사를 생생히 볼 수 있어 더욱 실감났었고 이 시대를 딱딱한 다큐형식으로 보는 것보다 그 속에 부귀라는 한 인간을 놓고 보니 정치가 한 인간의 삶에 어떻게 밀접하게 영향을 끼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전쟁이 있고, 혁명이 있고, 공산주의 사회가 되고, 또 문화 대혁명이 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은 마구 휩쓸려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나는 목격했다. 이를 통해 정치가 인간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닌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영화를 보는 내내 든 생각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였다. 전쟁을 하고 혁명을 하고 모택동을 숭배하는 것이 그들의 이념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했던 행동에 불과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주인공처럼 아무 것도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민중들에게는 말이다.혁명을 하니 주자파를 몰아내니 해도 정작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첫째는 죽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먹을 것 잘 먹고 살 수 있는 것이고, 셋째는 자식들 결혼시키고 손자 보는 기쁨 정도였다. '어리석은 대중'들이 이러한 삶을 살게 된 것 자체가 바로 정치적 격동이라는 큰 틀 내에 그들의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리라.2. 영화 의 줄거리인생..... 제목에서부터 영화는 넓은 서사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게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린다는 것은 지루하게 보일 법도 한데 장이모 감독은 느슨하면서 매끄럽게 잘 그려내고 있다. 내가 이제껏 본 영화 중에 최고의 영화라고 할만하다.서부귀라는 한 남자의 역경과 행복에서 풍겨지는 삶의 묘미는 누구든지 공감대를 형성하게끔 하고 있다. 결혼하고 젊은 날은 도박에 빠져서 아내와 집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던 그. 그리고 도박의 참맛을 보고 말았고 가족을 잃게 되었다.비가 온 후의 땅이 단단해진다고 했던가!! 부귀는 어느새 다시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 유경과 함께 생활한다. 그는 서서히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도박 때문에 알게된 어떤 이에게 인형극 상자를 얻게 된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상자지만 그에겐 유일한 생계수단이자 기쁨이다.인형극을 하면서 돈벌이를 하고 있는 부귀 어느덧 40년대의 중국의 움직임이 서서히 일고 있는 때 전쟁과 혁명으로 사회는 떠들썩하고 가족과 잠깐의 이별을 하게 된다.거기서 함께 인형극을 했던 친구와 혼란한 전쟁터에서 인형극을 열게 하고 그에 힘입어 3일 동안 전쟁에서 승리를 하며 역동적인 반란의 순간에도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상황의 묘미를 한껏 발휘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온 그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과 단란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인생은 그리 평탄하지 못한 법....어느 날 도박 때문에 집을 잃게 만든 그 사람은 정부에게 집을 줄 수 없다고 불을 지른 값으로 사형을 선고 받게 되고 그는 하마터면 자기가 사형당할 뻔 한 사실에 인형극을 하면서 인민 승인서를 옷에서 찾아 액자 속에 넣어 벽에 걸어 둔다. 그것은 그가 살아가면서 그들이 부르던 "성분"의 당당함을 상징하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은 혼란한 사회 와중에서 의기투합하는 모습이 많이 비쳐진다.다시 순탄한 인생길을 가는 듯하지만 .그의 아들 유경이가 트럭기사의 운전실수로 깔려 즉사하게 된다. 그렇게 잠이 많아 학교 가는 것을 말린 아내를 뿌리치고 깨워서 학교를 가게 한 그를 원망하게 되고 남편을 말리지 못한 아내는 자신의 죄라면서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그 운전을 했던 사람은 바로 자신과 함께 인형극을 하던 친구였다.누구를 원망하면 무엇할까? 인생의 관로는 벌써 정해져버렸는 것을 말이다.60년대로 접어들면서 모택동의 사회적 운동과 반사회적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딸의 혼례가 성사되어 이제 그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는가 했더니 아들을 낳으면서 딸을 다시 하늘로 보내야 했다. 남은 부귀가족은 아내와 손자 그리고 사위이다.하지만 이렇게 인생은 계속 되고 있다.3. 인생은 한 편의 그림자극인가.이 영화에 등장하는 특이한 소도구는 그림자극이다. 그림자극을 통하여 영화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부각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극중인물의 운명에 변화가 생기는 중요한 순간에 항상 그림자극이 출현한다.도박과 함께한 서부귀의 젊은 시절은 집이 넘어감과 동시에 지주의 아들로서의 삶은 끝나버리고, 그 뒤를 이어 서부귀의 삶은 그림자극으로서 대변되게 됩니다.그가 가족들과 다시 만나서 삶의 애착을 갖게 됐을 때, 그 시작을 하게 해준 그림자극, 그가 전쟁포로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다시 가족의 품으로 되돌려 준 것도 그림자극 (그의 앞길에 불운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그림자극 막을 자르는 칼이 단적으로 보여줍니다)이며, 그가 바지에 오줌을 싸면서까지 두려워했던, 자신의 모습이었을 뻔했던 용아의 모습과 맞바꾼 것이 바로 그림자극의 도구들이다. 그리고 혁명의 순종자로, 성분이 좋은 사람으로 남게 되는 도구도 혁명인증서와 그림자극,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암시한 그림자극의 막에 튀인 식초, 고춧가루, 차다.
    독후감/창작| 2003.10.18| 3페이지| 1,000원| 조회(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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