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책과 정계비1.고려의 北進 政策(1)통일신라의 北境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자가 멸망한후 당 고종은 신라왕을 계림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餘隆으로 웅진도독을 삼아 유인원 입회하에 화친의 맹약을 맺게 하였다. 이는 당태종의 세계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백제의 옛땅에 괴뢰정권을 세워서 신라를 측면으로 견제하여 한반도에 대한 당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이를 알면서도 고구려의 멸망전까지는 모르는척했다. 고구려멸망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당의 세력권을 넓혀 신라를 위협하였다. 이는 고구려 유민을 이용하여 신라와 한판 싸움을 벌이기 위함이었다. 문무왕 11년 당군과 신라의 싸움은 시작되어 신라는 당군을 대파하고 백제의 영역을 대부분을 영역을 확보하였다.이에 당군은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17년에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지방의 신성으로 옮기고 한반도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이 결과 나당관계는 악화되었으나, 사과의 뜻을 가진 신라의 사절파견 등으로 국교는 곧 회복되고 신문왕때부터는 사절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성덕왕 34년에는 당 현종이 신라의 패수 이남의 소유를 공인하였다.이때 통일 정부로서의 신라의 북쪽 국경은 대동강 어구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39도선이었다. 신라의 지배층 자체가 경주지역 중심의 보수적인 귀족들이었고, 수동인 금성이 한반도의 동남단에 편재하고 있어, 대동강 이북으로의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하여 멸망의 그날까지 더 이상의 북진은 시도된 바가 없고, 다만 대동강 이남의 땅을 계속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패강진을 두었을 뿐이다.(2)고려 태조의 북진정책진성여왕의 탁정과 오랜 기근으로 전국에서는 군웅들이 일어나 진성여왕 5년에 견훤은 완산주에서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궁예도 이를 답습해 효공왕 5년에 송악에서 자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다. 그후 궁예의 실정으로 신숭겸등의 추대를 받은 왕건이 일어나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건 또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하여 고려라 하고 고구려 고토 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수립하였다. 태조는 고구려 재건의 일환으로 북진정책을 시도하였으나 서북방면의 경계를 대동강선에서 200여리 북상한 청천강선까지 확대하는 것으로 그쳤다. 왕건은 서경을 중요시 여겨 서경천도를 시도 하였지만 서경을 수도로 하기에는 여진족과 대치하고 있는 경계선에서 너무 가깝고 청천강 국경이 돌파당하면 서경까지 적의 진격을 저지할 만한 지리적인 방어선이 없었기 때문에 서경천도는 유보되었던 것이다.이런 태조의 서경천도론을 계승한 3대 정종은 즉위시 서경 군벌인 왕식렴의 도움으로 왕규의 변란을 진압하였으며, 2년에 북방민족인 거란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사를 설치하고 광군 30만을 양성하는 한편 서경에 왕성을 쌓고 서경천도를 계획하다가 재위 4년만에 죽음으로서 부왕인 태조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한편 동북면 방면을 보면 신라의 통일기 전후에서 말기까지의 경계는 오늘날의 원산만 부근이었다.(3)강동 6주와 천리장성성종12년 요의 동경 유수 소손녕은 신라에서 일어난 고려가 요가 점유한 옛 고구려 땅을 침식하고 인접한 요를 젖혀두고 바다 건너 송과 교류하는 것을 이유로 하여 1차 침입을 단행하였다. 이때 중군사 서희는 요의 침입이 영토적인 야망이 아니고 고려를 친요 노선으로 돌리는데 있음을 간파하고, 소손녕과 담판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영유하여야한다고 주장하여 회담에서 기선을 제압했다. 이에 소손녕은 송과의 단교와 요의 연호 사용을 조건으로 압록강 이동의 여진 땅 280여리를 고려가 영유하는 것을 인정하고 철병하였다. 고려는 소유권을 인정 받은 압록강 이동의 여진부락을 소탕하고 이곳에 강동 6주를 설치하였다.이로서 북 기마 민족의 주침입로인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서해안의 국방력이 강화되었으며 통일신라 이후 북쪽 국경선이 처음으로 압록강 하류에 이르렀다. 그리고 동해안에 흩어져 부족 단위로 살고 있던 여진족이 활발히 움직이자 이에 위협을 느낀 정종은 동북로 병마사 김령기에게 명하여 장주,정주에 성을 쌓고, 다시 정평군 신상면에서 동해로 들어가는 금진강 어구의 원흥진에 성을 쌓았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부족간에 이합집산이 빈번한 여진족에 대해 문종9년에 선덕진을 구축함으로써 장성은 다시 북상하여 함흥 남쪽 9Km에 있는 도련포까지 연장되었다. 거란과 여진족 등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대비해 압록강 어구에서 함흥만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은 13세기 몽골족의 침입이 있기까지 우리의 국경선 역할을 하였다.(4)고려말의 국경몽고 침입으로 인해 철령 이북의 땅이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북쪽 국경선은 고려 건국 이전으로 크게 후퇴하고 있으며, 삼별초를 진압한 몽골은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 위하여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몽골이 직할 통치하였다. 원종 11년에 설치된 동녕부는 외교적인 교섭 끝에 설치21년만인 충렬왕 16년에 고려에 반환되고, 원종 14년에 제주도에 둔 탐라 총관부도 일본원정을 포기한 원으로부터 돌려 받았다. 그러나 철령 이북의 화주에 둔 쌍성 총관부는 공민왕의 무력에 의한 수복 때까지 100년 간 존속하였다. 공민왕 말년인 1370년 경의 고려의 국경은 천리장성을 넘어 훨씬 북쪽으로 옮겨갔다. 고려태조가 신라를 계승하였을 때의 국경은 39도선이었으며, 고려 건국이념의 하나가 고구려고토 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이었는데, 500년후 조선왕조에 국권을 넘길때의 경계가 그보다 북상한 41도선이었다.2.조선의 북진정책(1)4군과 6진태종때 우디거족이 우량하족과 연합하여 경원부에 침입하여 병마사를 죽이자, 길주도 안무절제사 조연은 두문에서 우량하족을 대파하고 그 추장을 죽였다.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벙이 계속되고 방어하기 어려워 공주에 있던 목조의 무덤을 함주로 옮기고, 두만강 하류에 있던 경원부를 오늘날의 청진 남쪽인 해안도시 경성으로 후퇴시켰다. 이결과 이북은 여진족이 차지하게 되고 계속해 여진족의 내침이 끊이지 않자, 세종 4년에는 여진 방어의 중심 기지인 경흥부를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여야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세종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짓는 적극적인 방어정책을 추구하였다. 세종 15년에 여진 부족간에 내분이 발생하자, 김종서를 함길도도절제사에 임명하여 두만강 유역을 경략케하였다. 김종서는 6진을 설치하고, 두만강 하류인 경원부 훈융에서 화령부의 독산연대에 이르기까지 두만강 남안을 따라 장성을 쌓아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로서 무산을 제외한 두만강 이남의 땅이 전부 우리영토가 되었으며, 발해 멸망 이후 북쪽 국경이 처음으로 두만강에 이르렀다.압록강 하류는 고려말에 창성에서 강계를 연결하는 선까지 고려의 영역에 편입시켰으나, 41도선 입구은 여전히 여진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공양왕 3년에 개마고원의 중심지인 갑산에 갑산 만호부를 설치하면서 이곳으로의 진출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왕조에 들어와 태종 13년에 갑주만호부를 갑산군으로, 16년에는 갑산군의 일부를 나누어 지금의 중강진 부근에 여연군을 설치하고 이를 함길도에서 평안도로 이관시키는등 이지역의 경영에 큰 진전을 보게되었다. 이로써 갑산 서쪽의 압록강 이남의 땅은 조선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세종대에 들면서 압록강 이서에서 요동에 걸쳐 살고 있던 여진족의 침략이 빈번하였다. 우량하족이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 건립한 건주본위의 추장 이만주가 명의 요동지역을 공략하고,세종15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여연군에 침입하였다. 이를 계기로 최윤덕이르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하여 이를 정벌케여 큰 승리를 거두웠다. 이후 이지역의 방어를 목적으로 4군을 두어 압록강 하류에서 상류에 걸친 전지역에서 국경선은 압록강으로 일단락된다. 그러나 4군이 설치된 지역은 험준하고, 생업이 어렵고, 여진족과의 충돌이 끊이지 않자 세조 5년 전부폐지하였다.(2)백두산 정계비세종때에 김종서의 경략으로 두만강 남쪽에 6진을 개설하면서 두만강이 국경이 되었으나, 차유령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두만강 상류지역은 계속하여 여진족의 땅으로 존속하여오다가 현종15년 동양북여진이 있었던 이곳에 무산진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두만강 이남의 모든 영역이 우리국토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조선과 청의 국경은 압록,두만강의 양강으로 이루어졌으나, 고산준령으로 인적이 적은 백두산 부근의 경계를 확실히 하지 않았다. 청은 조선과의 국경상에서 빚어질 분쟁을 방지하기 위하여 백두산 부근에 완충지대를 설정하였으나, 국경지대에 거주한 조선인들이 강을 건너 공지에 잠입하여 개간하거나 또는 청에서 가장 영약으로 치는 장백산 산삼을 채집하기도 하였다. 숙종36년 평안도 위원지방의 삼을 캐는 사람인 이만지등이 압록강을 건너 인삼을 채집하다가 그곳의 청나라 사람 5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백두산지구의 귀속을 문제삼고자 하던 청은 이 사건을 구실로하여 숙종 38년에 목극등등을 시켜 국경을 실지 답사케하고 경계를 정하게하였다. 원래는 천지에 정계비를 세울 예정이었으나 목극등의 일방적 지휘에 따라 동남쪽으로 4Km정도 내려온 해발 2,200m의 고지 분수령 위에다 정계비를 세웠다.
해외로 나간 우리 꽃서론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숲이란 막연히 환경에 도움을 주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 숲을구성하는 풀이나 나무는 쓸모와 연관이 되어 생각한다. 목재로 쓰는 굵은 나무는 산의 주인이 되지만 그 아래에서 함게 자라가는 갖가지 나무들은 이름모를 잡목이 되어 버리고, 먹을 수 있는 진달래는 참꽃이 되지만, 더욱 예쁘게 생겼어도 먹을 수 없는 철쭉은 개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식물을 구체적인 자산으로 그리고 미래를 위해, 지속적인 이용을 위해 우리가 보전해야 하는 가치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이는 드물고, 따라서 이러한 식물자산을 보다 구체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국가나 민간 주체도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다. 선진국들은 전혀 다르다. 이미 오래전부터 식물을 자원으로 인식하여 이를 대상으로 탐색하고 이용하며 구체적인 수익창출과 연계해왔다. 튤립을 비롯한 많은 원예품종, 과수 등이 새롭게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야생의 식물자원을 다소 개량한 결과이며, 이로 인한 엄청난 부가가치는 자원을 방치한 원산지 국가가 아니라, 이를 탐색하여 가져가 상품화한 국가에 돌아가 버렸다.본론우리나라 유전자원의 해외유출이 심각한 상태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중 대중적인 것으로 '미스김 라일락'이 유명하다. 이 식물은 라일락의 일종인데 다름 아닌 우리나라 자생식물인 털개회나무를 말한다. '미스김 라일락'은 가격이 30$로 다른것의 거의 두배나 되는 가격임에도 가장인기 있는 소형 라일락이다. '미스김 라일락'이 인기가 있는이유는 향기와 꽃이 좋고 키가 작아 가정용정원에 적합하고 꽃색깔이 변해서 흥미를 자아내며 병충해에 강하다는 이유이다. 1947년 미국인인 미더가 북한산에서 씨앗을 받아간 것 중에서 육성해낸 품종 중의 하나다. 그런데 그 후 이 '미스김 라일락'은 선풍적 인기를 일으키면서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점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품종은 전 세계에 수출되었는데 물론 우리나라에도 1970년대에 수입되어 널리 심어져 있다. 결국 우리나라 유전자원이 해외에서 개량되고 품종등록이 되어 이를 역수입한 결과가 된 셈이다. 당시로서는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또한 구상나무는 이미 1910년대에 미국에서채집되어서 유럽으로전파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병충해에 강하고 튼튼해서 비싼가격임에도 불고하고 인기가 굉장히 좋다. 외국에 알려진 가장 대중적인 나무이며, 특히 크리스마스 트리로 각광받는 품종이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러한 사례는 매우 많다. 8월 22일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에는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려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원예학회에서 실시한 우수 품종 콘테스트에 관한 내용이다. 이 대회는 24년 전부터 열리고 있는 전통이 오래된 행사로 지금까지 83개 금메달 수상작을 배출하고 있다. 금년에는 6개의 금메달 수상작을 선정 발표했다. 심사의 기준은 아름답고 강인하며 잘 자라는 품종이다. 그런데 이번에 선정된 수상작 중에는 동백나무의 한 품종이 포함되어 있다.이 동백나무 품종은 꽃이 크고, 밝은 홍색을 띠며, 꽃잎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황색의 꽃술을 가지고 있어서 선정되었다. 이것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이 품종의 이름이 '코리안 파이어' 즉 '한국의 불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품종의 원산지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한국이 원산지임에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동백나무는 동백나무의 최북단 서식지에 있기 때문에 혹한에 강해서 필라델피아의 추위에도 잘견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 역시 '미스김 라일락'의 경우처럼 유전자원이 유출된경우이다. 나리의 경우도 마찬 가지이다. 우리나라에는 여러가지 희귀한 나리가 많이 있다. 곰팡이균에 강한 내성이 있고 다양한 색깔을 내는 날개하늘나리, 분홍색의 원종인 솔나리, 주홍색, 빨강색, 노란색의 원종인 하늘나리, 우리나라에서 도 희귀종인 섬말나리, 털중나리등 해외에서는 볼수 없는 희귀종이었으나 색깔의 희귀성으로 인하여 해외로 유출되어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어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 외에도 해외에서는 노각나무, 전나무(korea pine), 금낭화, 조록싸리, 단풍나무, 산딸나무등 한국의 혹한과 병충해에 강한 나무로 접을 붙여서 새로운 신품종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국산과 접을 붙였을 경우 성공확률은 95~98%인반면에 네덜란드산과 접을 붙이면 50%밖에 안되기 때문에 한국산이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탄금대를 다녀와서'탄금대는 원래 대문산 혹은 견문산으로 불리던 작은 산으로 그 밑에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되는 곳이며 산세가 평탄하면서도 남한강 쪽으로 나 있는 기암절벽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경치가 탁월한 국민관광지이다.1400여년전 신라 진흥왕 때에 가야국의 악성 우륵이 이곳에 와 풍치를 상미하며 항상 산상대석에 앉아서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해서 지금까지 탄금대라 불리고 있다.임진 왜란 때에는 신입장군이 배수진으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최후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산 정상 부위까지 포장이 잘 되어 있고 역사적 뒷이야기 이외에 넓은 야외음악당과 충주문화원,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 노래비,충혼탑,궁도장,신립장군의 애환이 담긴 열두대와 순절비, 탄금대토성, 대흥사등이 자리 잡고 있다.열두대탄금대 뒷편, 남한강 쪽에 있는 기암 절벽을 열두대라 부른다.임진왜란 때 문경새재에 진을 치고 있던 신립장군은 아군의 나약함을 보고 이곳 탄금대에 배수진을 침으로서 죽기로 싸울 결심을 하였으나, 왜적의 신식무기와 전술착오로 패배의 한을 남겼다.이 때 장군은 활을 빠르고 많이 쐈기 때문에 그 활의 열기를 식히고자 이 암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해서 열두대라 한다.또 다른 이야기로는 12번의 싸움 끝에 승산이 없자 이 곳 열두대에서 투신자결했다고 해서 열두대라는 이야기도 있다.이 곳 바위에 올라 서면 전망이 아주 좋다.탁 트인 전망에 절벽 아래로 남한강을 갈라 놓은 무인도인 "용섬"과 좌측으로는 달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 그 강물을 따라 멀리 내다 보면 국보 6호인 중앙탑이 아스라히 보이며 우측으로는 옛날 충주 비료 공장을 개조한 목행동 새한미디어 공장이 눈에 들어 온다. 탄금대 토성탄금대 토성은 대문산(탄금대)에서 가장 동북쪽으로 치우치고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강물을 바라보고 대문산 전체를 감제할 수 있는 곳이다.이성은 흙으로 쌓았지만 많은 강돌을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축성할 때 가까운 강의 돌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보여진다.전체 둘레는 약 400m이나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120여m이며 삼국시대 토기 편들도 볼 수 있다.이 성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는 없으나 신라 진흥왕이 낭성에 들러 우륵과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케 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혹 낭성이 이곳을 의미하는 것인가 추측할 뿐이다.충혼탑감자꽃 노래비 옆 잘 다듬어진 잔디 밭에 충혼탑이 우뚝 솟아 있다.이 탑에 봉안된 영령들은 해방 후 특히 6.25사변 때 국가의 방패가 되었던 충주지방의 전몰군경들이다. 충혼탑은 충주 상이군용사분회와 대한제대장병보도분회에서 호국영령들의 애국충정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1956년 9월 유서 깊은 전적지인 이 곳 탄금대에 건립했다.특히 충혼탑이라는 글씨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친필이며 매년 현충일에 이 곳에서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탄금대 비높이183cm, 폭66cm, 두께 34cm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로 기미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육당 최남선이 비문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비문의 내용은 충주의 연혁과 남산성에서 몽고군과 싸운 승장 김윤후 장군의 행적과 악성 우륵, 임진왜란 때 원통하게 자결한 신입장군의 충절심을 기린 내용을 담고 있다.탄금대에 진입하자마자 넓은 야외음악당과 충주문화원이 나옵니다.이 곳은 충주지역 민속제인 우륵문화재 행사가 매년 열리는 장소이기도 합니다.아담한 산위로 굽이굽이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하나 둘씩 탄금대 볼거리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솔솔 푸른솔"을 보고..소나무는 우리 산의 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며 친근한 나무로 그 활용도 또한 많아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일상적 사용의 예로는 화력이 좋아서 땔감으로 쓰였으며, 뒤틀림이 적고 습기에 강하여 옷장 같은 가구에 사용하였고, 집을 짓는 건축재료로서는 으뜸으로 사용되었다. 그뿐아니라 식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보릿고개때에 속껍질을 먹으면 훌륭한 끼니거리였고, 갈증날때는 상쾌한맛의 솔잎을 먹었으며, 송화가루를 이용한 송화다식, 솔잎을 발효시켜 효소로만든 음료등이있다. 이뿐아니라 '복령'이라 하여 소나무가 죽어 뿌리 부분에 모인 균사덩어리는 훌륭한 한약재로 쓰인다. 이는 살아서 뿐 아니라 죽어서까지도 인간생활에 도움을 주는 소나무의 다양한 쓰임새를 말해준다. 소나무는 인간뿐 아니라 여러 동물들에게도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고 있는데 대표적인 서식 동물로는 청설모, 두리미, 왜가리, 하늘다람쥐, 까막 딱따구리, 찌르레기, 꾀꼬리, 딱새등이 있다. 또한 식물들에게도 좋은 서식처를 제공하는데 소나무밑에만 자라고 있는 송이 버섯이 대표적인 예이다.소나무는 또한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물질적인 존재 그 이상의 대상이었다. '소나무동제'등에서 볼수 있는것과같이 그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닌 마을을 지키는 성황당 나무로 생각하여 신성시 했으며 이를 통해 마을 주민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생명이 태어났을때는 금줄에 솔잎을 매달아 그 탄생을 알렸으며 죽어서는 소나무관에 묻힘으로 탄생, 생활, 죽음등 일생에 있어서 늘 함께한 존재였다. 소나무는 나무로서는 유일한 십장생이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곧은절개를 상징하여 선비들이 늘 가까이한 대상이였다.소나무의 식물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소나무의 수정은 송화가루라고 불리는 수꽃의 화분에서 시작한다. 이 송화가루는 바람에 날려서 암꽃과 수정을하고 이 수정된 것이 솔방울이다. 솔방울이 가을이 되면 수분이 빠져나가 마른 상태가 되고 여기서 솔씨가 떨어져 이 솔씨가 발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약 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이루어진다. 여기서자란 소나무는 상록수라고 불리는것처럼 항상 푸른색을 보여주는데 이는 솔잎의 수명이 2년이기 때문이다. 매년 번갈아가면서 싹이 돋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는 항상 푸른색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소나무는 생존력이 강해서 어느곳에서나 잘자라는 편인데 특히 산능선같은 곳은 활엽수가 자라지 못하는곳이어서 거의 소나무만이 서식하고 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을 보고1953년 지금으로부터 50년전에 쓰여진 책 [나무를 심은 사람]이 이제와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아 13개국어로 번역되고 영화로 제작되어 국제애니메이션 대상을 두 번씩이나 수상하고 아카데미상에서 단편상을 수상하는 등 유명해진 것은 앞서 살다간 한사람의 헌신적 이타행위가 문명의 위기에 처한 온 인류에 던지는 구원의 메시지로 부활되어 하늘의 섭리를 깨닫게 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오늘날 세계는 도시화가 만들어내는 심각한 문제로 대기 중에 탄산가스(CO2)의 증가로 지구온난화 현상을 초래하여 자연재난 식량감산 등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에 처하게된 것은 숲을 파괴하여온 결과로 인한 징벌이라 해도 심한 말이 아닐 것이다.세계에서 가장 많은 탄산가스 배출국인 미국은 1년에 13억7천만 톤(전세계의 24%)규모를 배출함으로서 지탄의 대상이 되자 지난1989년에 비영리시민운동단체인 지구 재녹화운동기구를 통해 지구 살리기에 나섰다. 탄산가스 배출의 세계 제2위는 13억 인구의 중국이고 3위는 러시아 그리고 일본 독일 순으로 문명국일수록 자연파괴의 기여도가 높다. 우리나라도 16위에 오르고있으니 남을 탓할 처지가 아니다.인류는 농경사회를 지나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소위 선진국들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여기고 삶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나무를 베어내기만 함으로서 그 피해를 당사자는 물론 전인류의 파멸이라는 위기상황을 불러왔다.이 애니메이션의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프로방스 지방의 어느 고원지대. 한 남자가 어떤 양치기 노인을 만나 음식과 잠자리를 구한다. 그날 밤 그는 노인이 도토리를 100개를 세어 따로 챙기는 것을 보게된다. 청년은 호기심에 다음날 노인을 따라나선다. 노인의 이름은 엘지아 푸비에. 55세이고 3년전부터 도토리 파종을 시작하였다. 나무의 부족으로 땅이 죽어가는 것을 알고 수천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세월이 흘러 1차대전후, 그 남자가 다시 그 지역을 찾아와보니 나무가 무성한 옥토가 되어있었다. 푸비에의 나무심는 작업은 1935년 정부의 정책으로 자리잡는다. 사람들의 분별없는 욕망으로 폐허가 된 마을들, 나무를 마구 베어 살벌한 바람만 불어대는 버림받은 땅, 이 황량한 땅이 매일 나무를 심고 가꾸는 한 양치기 노인의 외롭고 헌신적인 노력으로 숲이 다시 살아나고 맑은 강물이 가득히 흐르며 새들이 지저귀는 생명의 땅으로 되살아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