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북진책과 정계비
- 최초 등록일
- 2002.12.27
- 최종 저작일
-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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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고려의 北進 政策
(1)통일신라의 北境
(2)고려 태조의 북진정책
(3)강동 6주와 천리장성
(4)고려말의 국경
2.조선의 북진정책
(1)4군과 6진
(2)백두산 정계비
(3)간도협약
본문내용
(1)통일신라의 北境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자가 멸망한후 당 고종은 신라왕을 계림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伕餘隆으로 웅진도독을 삼아 유인원 입회하에 화친의 맹약을 맺게 하였다. 이는 당태종의 세계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백제의 옛땅에 괴뢰정권을 세워서 신라를 측면으로 견제하여 한반도에 대한 당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이를 알면서도 고구려의 멸망전까지는 모르는척했다. 고구려멸망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당의 세력권을 넓혀 신라를 위협하였다. 이는 고구려 유민을 이용하여 신라와 한판 싸움을 벌이기 위함이었다. 문무왕 11년 당군과 신라의 싸움은 시작되어 신라는 당군을 대파하고 백제의 영역을 대부분을 영역을 확보하였다.이에 당군은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17년에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지방의 신성으로 옮기고 한반도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이 결과 나당관계는 악화되었으나, 사과의 뜻을 가진 신라의 사절파견 등으로 국교는 곧 회복되고 신문왕때부터는 사절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성덕왕 34년에는 당 현종이 신라의 패수 이남의 소유를 공인하였다.이때 통일 정부로서의 신라의 북쪽 국경은 대동강 어구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39도선이었다. 신라의 지배층 자체가 경주지역 중심의 보수적인 귀족들이었고, 수동인 금성이 한반도의 동남단에 편재하고 있어, 대동강 이북으로의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하여 멸망의 그날까지 더 이상의 북진은 시도된 바가 없고, 다만 대동강 이남의 땅을 계속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패강진을 두었을 뿐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