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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현대사] 제5공화국의 민족민주운동
    제5공화국의 민족민주운동5공화국 권력의 체제정비 과정 동안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족민주세력은 1982~1983년에 들어 질적으로 더욱 심화된 형태로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리적 수단에만 의존한 5공화국 권력의 체제 정비는 정권의 안정을 자연스럽게 확보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과 도덕적 바탕을 거의 결여하고 있었다. 강제만이 있을 뿐 동의는 거의 얻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비록 민족민주세력은 위축되어 있었지만, 광주민중항쟁을 시발점으로 하여 민중의 정치적 각성과 조직화된 힘이 사회 곳곳에서 분출되기 시작했다.1.유화 국면1983년 말에서부터 1985년 중반에 이르는 시기는 체제정비를 마친 권력이 탄압을 일정 정도 완화시켜 이른바 유화 국면이 전개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독재 권력의 ‘유화’보다 이를 계기로 복구된 민족 민주 세력의 ‘강화’가 더 두드러졌던 특징을 보이고 있다.유화 국면을 계기로 민족민주세력은 단기간에 모든 영역에서 급속히 복구 성장하였다. 5공화국 권력은 1985년 중반 이후 다시 탄압의 고삐를 조였으나 이미 강화된 민족민주세력의 역량은 권력이 일방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던 것이다. 따라서 체제 정비의 과정이 민족 민주 세력의 일방적 수세기가 한다면, 이 시기는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민족 민주 세력의 노력과 투쟁의 시기라 할 수 있다.2.학생운동1983년 12월 제적 학생 복교 조치 및 해직 교수의 복직을 허용하는 ‘학원 자율화’ 조치가 취해지고, 이어 학내에 투입된 경찰도 철수하게 되었다. 이미 1982~1983년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복구되고 있던 학생운동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1984년 상반기의 학생운동은 복교대책운동으로 출발하여 학원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무렵 강제 징집되어 의문사한 학생들에 관한 조사 보고와 항의 집회도 전개되었다.상대적으로 상반기에 학내 투쟁에 치중하였던 학생운동은 1984년 하반기에 들어 각 학교에서 학생회를 구성하고 전국적으로는‘청계피복노조 복구대회’를 계기로 시도된 민중 지원 노학 연대 투쟁의 양상이었다. 다른 측면은 사회 민주화 투쟁을 위한 연대 조직을 구성하고 그 투쟁을 강화시켰던 시도로, 11월 13일에 ‘민주화투쟁학생연합’(민투학련)이 결성되고 이들의 주도로 11월 14일에 민정당사 점거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어 12월 14일에는 다가오는 선거에 대비하여 ‘민주총선쟁취학생연합’이 발족되었다.1984년 하반기의 사회 민주화 투쟁의 추세는 1985년 상반기에 더욱 강화되었다. 4월 17일에 전국적인 연대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이 결성되어 이후 5월 투쟁과 5월 23일 미문화원 점거 농성을 주도하였다. 전 해 11월의 민정당사 점거 사건과 더불어,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유혈적 진압을 통하여 등장한 5공화국 권력과 이들을 지원한 미국에 대한 학생들의 정면 도전이라 할 수 있다.이 시기 학생운동은 기존의 운동론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운동의 과학적 체계화를 본격화하였으며, 사회변혁운동의 사상으로 ‘자주·민주·통일’ 이념의 확립과정을 통해 본격적인 대중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3.노동운동광주민중항쟁 이후 대중역량의 근거지가 파괴되어 소그룹운동에 주력했던 노동운동은 1983년부터 다시 활성화되어 활발한 투쟁을 벌이게 된다. 이러한 운동의 회복은 1980년 이후 운동역량의 잠재적 확산, 전체 민중의식의 고양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1983년 말부터의 유화국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유화국면을 맞아 노동운동에서는 과거의 선도적이었던 민주 노동 운동이 부활하는 한편, 자연 발생적인 노동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우선 과거 선도적인 노동운동의 부활은 1983년 말 블랙리스트 철폐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고, 1984년 3월 10일에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와 함께 ‘청계피복노조복구대회’가 많은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어 노학연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이 시기에는 자연 발생적 노동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5월에 대구이후 신규 노조의 설립을 방해하는 한편 노동운동을 다시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1984년 하반기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탄압에 대한 반대와 노동 악법 개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1985년에 들어 노동운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상반기의 노동쟁의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120% 증가하였다. 동시에 과거와는 달리 대우 자동차 파업과 같은 대규모 사업장에서의 노동운동과 구로 동맹 파업과 같은 대규모 연대 파업도 전개되었다. 특히 구로 동맹 파업은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넘는 연대 투쟁과, 이를 통하여 정치 권력을 상대로 노동운동 탄압 금지, 집시법 철폐, 언론 기본법 철폐 등을 요구하는 정치 투쟁적 양상까지 보여주며 1980년대 노동운동상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 투쟁은 노동조합주의를 극복한 연대투쟁이었다는 점, 한국전쟁 후 최초의 대규모 노동자 정치투쟁이었다는 점, 현장 대중의 조직적 투쟁이었다는 점 등에서 기존의 노동운동과 구별되는데, 이 투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은 변혁적 성격을 갖는 사회변혁운동으로 전개된다. 대우 자동차 파업과 구로 동맹 파업은 1985년 9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결성으로 이어진다.4.농민운동1980년대 농민운동은 조직과 이론의 양측면에서 질적 발전을 거듭하여, 1970년대 농민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1980년대 농민운동의 정형들을 창조해냈다. 이 시기의 농민운동은 중앙 및 도단위 중심의 운동과 소수활동가 중심의 투쟁에서 군단위 조직 중심의 운동과 빈·소농 중심의 투쟁으로 발전되었다. 또한 종교단체 중심의 경제투쟁이라는 틀을 뛰어넘어 권력의 탄압에 대항하면서 농민대중이 조직과 투쟁의 주체로서 국건히 서기 위한 자주성의 문제가 강조되고 있다. 이 시기에는 농민운동의 전술이 다양화되고 있는데, 종래 종교단체와 관련하여 청원적 형태의 기도회가 주종을 이루던 것이 가두투쟁과 거부전술을 병행하여 커다란 효과를 거두었다.농민운동은 1980년을 거치면서 기존의 도(道) 중심, 소수활동가 중심의 운동에서 점차 농민대중과의 실질적인 접촉을 통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군단위의 조직들이 전국적 조직으로 연합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이미 1960년대 종속적 경제 개발 과정에서부터 소외되어 왔던 농민들은 80년대에 들어 개방 경제의 일환으로 개방 농정이 추진되면서 더욱 심각한 피해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운동은 미국의 압력으로 농축산물수입이 확대되면서 소값을 비롯해 고추·마늘 등의 농축산물 가격이 폭락하자 대중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농민의 피해는 결국 1985년에 소몰이 투쟁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외국 소 과다 도입으로 인한 소값 폭락에 항의하는 농민들이 소와 경운기를 앞세워 곳곳에서 시위를 전개했던 것이다.5.반미운동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미국의 실체를 인식하게 된 민족민주운동세력은 1980년 광주미문화원 방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을 통해서 미국에 광주민중항쟁 진압의 책임을 묻는 등 그동안 금기시되던 반미구호를 내걸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미의식의 표출은 비록 개인적이거나 소수에 의한 것이었으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면서 이후 ‘민족자주화운동’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85년 학생들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은 반미의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 ‘전국 반외세반독제 애국학생투쟁연합’의 건국대 농성은 학생들의 높은 결의 수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이것의 반성을 통해서 운동의 대중성에 대한 각성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1980년대 학생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학생운동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미운동은 독재지원세력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해 점차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투쟁과 반공·안보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제기로까지 발전했으며, 점차 학생층을 넘어 민족민주운동 전반으로 확산되었다.6.통일전선운동1980년대 운동이 지니는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는 노동자, 농민이 변혁의 중심세력이자 주도세력으로 성장하고, 각 부문운동과 지역운동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운동들을 하나의 통일된 대오로 세워나가고자 하는 통일전선운동이 본 궤도에 올랐다는 점이운동과 계급적 대중노선의 강화·발전 및 민중세력의 독자성의 확대를 그 특징으로 하면서 발전해왔다.1984년 6월에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결성되었고, 이어 10월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민민협은 초보적이었지만 각 부문 운동의 연대를 모색하였고, 국민회의는 좀더 명망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국민적 대중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조직화와 더불어 지역권 운동체들도 등장했는데 이것은 운동의 전국적 확산 및 민중운동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1985년 9월에는 민민협과 국민회의가 통합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었는데, 구로동맹파업 지지투쟁, 민주헌법쟁취투쟁, 고문살인은폐조작 규탄투쟁 및 국본 결성과 그 활동 등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1960·70년대 각 지역, 부분의 고립분산적인 활동을 극복하고 집단적 규율과 전국적 연대운동의 경험을 축적하여 운동의 통일성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였다. 나아가 1987년 6월 민중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일전선체로서의 자신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부족했고, 성장하는 민중운동의 성과를 조직적으로 수렴하지 못했으며, 사무처의 강력한 집행력을 기초로 단일지도체제 구축을 과제로 삼아 소시기 실천에는 기동성을 갖고 행동했으나 장기적인 면에서는 민중과 유리된 선진활동가들의 조직운영이라는 한계를 동시에 내포했다.이처럼 5공화국의 민족민주운동은 1970년대 민중운동을 계승하면서,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을 통해 자주·민주·통일을 추구하는 민족민주운동으로 성장해 나갔다.***** 참고문헌 *****1. 김인걸 외, 1998,「제7장 5.민족민주운동의 고양」,『한국현대사 강의』, 돌베개.2. 임영태, 1998,「제5공화국 광주항쟁과 민주민중운동의 발전」,『대한민국 50년사 2』, 도서출판 들녘.3. 정해구, 1992,「제4부 제3장 민족민주운동의 고양과 5공화국의 몰락」,『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 풀빛.
    인문/어학| 2003.05.20| 4페이지| 1,000원| 조회(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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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관람후기
    미륵사지유물전시관2002. 10. 18.사학과에 들어와서 가장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대사이다. 고대는 비단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의 역사에서도 베일에 싸여 신비로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남아있는 유물들도 그렇게 많지도 않고 온전히 보전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확실치 않은, 아직도 많은 연구를 해야 하고 수많은 학설들을 내뿜을 수 있는 고대사는 적어도 내게는 많은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킨다.한국의 고대사에서 내가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는 백제이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문화적으로 뛰어났던 나라라고 나는 감히 평가한다. 백제의 문화 속에 담긴 유려한 솜씨는 나를 충분히 매혹시키고도 남는 것이다.나와 마찬가지로 백제에 대한 관심을 가진 친구와 함께 전북 익산을 다녀왔다. 익산은 백제 무왕(武王)1)이 수도로 삼으려고 했었다는 說까지 담고 있는 백제 역사에서, 특히 무왕에 관련해서는 굉장히 중요한 곳이다. 이런 중요한 곳을 직접 발로 밟고 보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익산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미륵사지2)이다. 미륵사지는 미륵사상(彌勒思想) 을 배경으로 하여 창건된 절로, 무왕은 미륵신앙(彌勒信仰)3)을 통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정치적 권위를 한층 높이려고 하였던 것이다.미륵사지는 철저히 훼손되어 반파된 상태의 석탑과 당간지주4)만이 남아있어 옛 백제의 무성했던 미륵신앙의 대도량이었음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그나마 1980년부터 문화재 관리국에서 발굴조사를 계속 하고 있어서 미륵사의 위엄이 다소나마 밝혀지고 있고, 현재는 미륵사지 서탑(西塔)5)이 복원정비중이라 반파된 모습도 볼 수 없다.미륵사지에 가서 미륵사 석탑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미륵사 석탑은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으로 우리 나라 석탑 발견의 시원으로 여겨지는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공예사” 수업에 관계한 것이므로 미륵사 석탑이나 가람배치6)는 생략하고 미륵사터에서 발견된 유물을 전시해 놓은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의 관람 내용을 주로 하여 서술하도록 하겠다.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은 1997년 개관이래,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 보존하고 문화의 보고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현재 소장유물은 19,000여 점에 이르고 있고 기능·종류별로 전시하고 있다.전시관은 대표적으로 유물 전시실 2 실과 불교미술실, 그리고 영상실이 있다. 그러나 내가 방문했던 시기에는 영상실에서 상영하는 영상물이 없어 보지 못했다.전시관의 관장님이 그동안 다녀보았던 다른 전시관의 관장님들에 비해 매우 친절했다. 그 때 관람자가 나와 내 친구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써주실 수 있었으리라. 관장님께서는 미륵사지에 대한 개략적 설명과 무왕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주셨고, 전시실을 보기 전에 미륵사지 발굴 종합과정 영상물을 보고 들어가는 것이 이해하기 훨씬 좋을 것이라는 조언도 해주셨다. 관장님의 조언에 따라 영상물을 보고 벽면에 붙여놓은 미륵사지의 창건과 그 변천 과정들을 보니 미륵사지에 대한 윤곽이 조금씩 잡히는 듯 싶었다. 그리고 나서 미륵사지를 축소해놓은 모형을 보았는데, 정말 크고 웅장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실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얼마나 귀중한 역사적 유적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유물전시실은 유리, 옥, 청동, 목제, 기와, 치미7), 토기 등을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능별·종류별로 전시하여 미륵사 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미륵사의 생활문화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로서 자기류와 토제품, 불교장신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그러나 솔직히 유리나 옥 등으로 만든 장신구 등은 다른 전시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그다지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토기류는 전시관·박물관에서 내가 가장 지루해하는 것들 중 하나인데, 토기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일까, 아무리 보아도 그게 그거 같고 이것이 어느 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저 아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익산까지 간걸까 의아해 하겠지만, 내가 전시관·박물관 등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기와종류이다. 기와라는 것이 특정한 양식의 흐름이나 커다란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와에 명문이 새겨진 것이라던가 막새8)의 다양한 무늬를 보는 것이 내게는 하나의 작은 즐거움이다.암·수키와와 막새, 그리고 이번에 처음 알게 된 녹유연목와, 박공막새, 착고와 등 각종 기와류가 전시되어 있었다. 녹유연목와는 백제시대의 것으로 유약을 발라 녹색으로 구워내어 지붕 써까래 끝에 부착시켰던 기와인데 가운데 못 구멍이 있다. 착고와는 용마루에 사용되었으며, 박공막새는 지붕 양쪽 박공에 사용된 기와라고 한다.기와에는 글씨가 써있는 것도 있었는데, 이런 것을 명문와라고 한다. 미륵사터에서도 명문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삼국유사 기록에 나타나듯 이곳이 미륵사임을 증명하는 귀중한 유물이다.지붕에 사용되는 기와중에 치미라는 것이 있다. 치미는 사찰이나 궁궐의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 놓이는 장식기와로 재앙을 피하기 위한 벽사적 의미도 있다. 날짐승의 꼬리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늘의 신과 지상의 인간을 연결하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한다. 전시관의 치미는 백제의 것으로 동원승방지에서 출토되어 복원된 것이라 한다. 높이가 99cm, 길이가 85cm, 뒤 깃의 길이가 53cm로 부여 부소산성9)에서 출토된 백제치미보다 조금 크다고 한다.나름대로 기와쪽에 관심도 있고 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전시된 기와의 여러 종류를 보고 스스로의 무지함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러나 이를 계기로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는 자부심도 생기게 되었다.불교미술실은 석등과 목탑의 모형을 전시하고, 이형 기와나 토제품, 그리고 미륵사에 관한 기록이 있는 문헌을 보여주었다. 실물크기로 만들어놓은 석등과 목탑을 축소한 모형을 보니 처음 미륵사지 축소 모형을 보았을 때처럼 당시의 웅장했던 절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이 불교미술실은 매우 특이한 형태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무엇에 사용되었던 물건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흙으로 만든 동물모양이라던가 사람의 얼굴, 또 얼굴무늬가 들어간 막새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자라모양과 말모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당시 민간신앙에 자라를 건물에 붙이고 말모양을 땅에 묻으면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미륵사지에서도 그런 용도로 쓰인 것이 아닐까.사실, “한국공예사” 레포트를 쓰려는 목적으로 유물전시관 관람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랄까, 그런 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익산까지 내려간 것이고, 관람을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할 것들도 있고 배운 것도 많이 있었기에 이렇게 레포트를 쓰게 되었다. 원래는 아는 선배가 근무하는 덕수궁 유물전시관을 가려고 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백제, 그리고 그 숨결이 가득 담겨있는 미륵사지를 보고 나니 그 감흥을 글로 적어 남겨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비단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뿐 아니라 익산에서 볼 수 있었던 많은 백제의 흔적들 –왕궁리 오층석탑10), 동고도리 석불11), 쌍릉12)… -은 내가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 어떤 방법으로 공부를 해야 할것이며, 어떤 마음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할지 생각하게 만들어준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흔히들 쉽게 이야기하는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솜씨에 감동하고, 그 안에 담긴 지혜가 놀라웠다’는 느낌도 없진 않았지만, 그런 어떻게 보면 진부한 감상을 뛰어넘어 “백제다운”느낌으로 익산을 두루 돌아보고 올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매우 만족할 만한 것이다.PAGE PAGE 4
    독후감/창작| 2003.05.20| 4페이지| 1,000원| 조회(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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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보화] 인터넷 중독 ppt 평가B괜찮아요
    인터넷 중독현대인과 정보화 사회 멋지구리조1980년대-개인용 컴퓨터 보급 1990년대- www 서비스 등장으로 인터넷의 급속한 확산 - 정부의 지원;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긍정적 결과-원활한 정보교환 -정보화 사회 구축 부정적 결과-인터넷 중독인터넷의 보급인터넷 사용 유무인터넷 사용 횟수인터넷 사용 시간인터넷 중독(Internet Addiction)정보이용자가 지나치게 컴퓨터에 접속하여 일상 생활에 심각한 사회적, 정신적, 육체적 및 금전적 지장을 받고 있는 상태인터넷 중독 자가진단미국 피츠버그대학교 킴벌리 영 교수 문항 예 1. 애초 마음 먹었던 것보다 인터넷을 오래한다. 2. 인터넷을 하느라 집안일을 팽개쳐둔다. 3. 가족, 친구와 어울리는 것보다 인터넷이 더 즐겁다. 결과 20~49점 : 인터넷 사용 스스로 통제 가능 50~79점 : 중독 가능성 80~100점 중독자인터넷 중독의 실태자료 인터넷 중독의 실태와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 (김선우/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2. -조사대상 : 15~39세의 인터넷 사용자 중 월평균 1회 이상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 557명인터넷 중독 경향연령대별 인터넷 중독자의 비율인터넷 중독자의 접속 장소인터넷 사용 시간인터넷 중독 사례 기사기사 1. [국민일보] 2001-11-20 (사회) 뉴스 인터넷중독 초등생 '황당한 범행' 기사 2. [조선일보] 2002-05-16 (정보통신/과학) 기획.연재 '마약같은 인터넷' 사람들이 망가진다인터넷 중독 증상통신 중독자가 호소하는 인터넷 중독증상 (이봉건, 1999) 거의 매일 빠짐없이 인터넷에 접속한다. 접속하고 나면 시간감각을 상실한다. 외출 횟수가 점차 줄어든다. . .인터넷 중독의 예방과 대응◈ 목적 없이 웹서핑 금지… ◈ 컴퓨터 공개된 공간에… ◈ 불필요한 CD는 정리… ◈ 규칙적으로 운동해야… ◈ PC방엔 친구와 함께… ◈ 대안 활동 가능한 한 많게…{nameOfApplication=Show}
    사회과학| 2003.05.20| 15페이지| 1,000원| 조회(1,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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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방법 및 공학] 발견식 교수법ppt
    넓이를 어떻게 구하지???사다리꼴 두개를 붙여서 평행사변형을 만들면 돼죠!!①②두개의 삼각형으로 나눠서 각각의 넓이를 더해요~직각삼각형을 잘라내서 옆에 붙이면 사각형이 된답니다 ^^자~ 그럼 사다리꼴 넓이 구하는 공식을 만들어 볼까요?밑변높이아랫변아랫변윗변윗변평행사변형 ÷ 2 = (밑변 X 높이) ÷ 2 = (아랫변 + 윗변) X 높이 ÷ 2243636 X 3 = 18(2 + 4) X 3 ÷ 2 = 9 9 X 2 = 18이제 공식이 맞는지 확인을 해보자구요!!!이제 우리가 만든 공식으로 사다리꼴의 넓이를 구해볼까요? 문제 들어갑니다!!!856(윗변 5 + 아랫변 8 ) X 높이 6 ÷ 2 = 13 X 6 ÷ 2 = 78 ÷ 2 = 39{nameOfApplication=Show}
    교육학| 2003.05.20| 9페이지| 1,000원| 조회(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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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현대사] 서안사변과 제2차 국공합작 평가A+최고예요
    ***** 목 차 *****Ⅰ. 머리말Ⅱ. 본문1. 西安事變2. 西安事變의 平和的인 解決과 第2次 國共合作의 成立3. 西安事變이 第2次 國共合作에 끼친 영향Ⅲ. 맺음말Ⅰ. 머리말1920년대에 중국에서 國民革命을 수행한 정치세력은 中國國民黨과 中國共産黨이었다. 5∙4운동의 소산이라 할 중국공산당(1921년 7월 창당)과 중국국민당(1919년 10월 10일 개칭∙개조)이 서로 힘을 모아 反帝 ∙ 反軍閥의 과제를 해결코자 했던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제1차 國共合作이라 한다.그런데 北伐을 통해 국민혁명의 과제를 완수할 날이 다가오면서 국민혁명을 추진해온 세력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蔣介石이 세운 南京의 國民政府는 권력기반이 취약해서 현실적으로 정권에 위협적인 여러 세력들을 제압하게 되어 점차 권위주의적 성격을 굳혀갔다. 공산당은 1931년 11월 瑞金에서 中華 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공산당은 국민정부의 안정을 위협하는 가장 큰 불안요인이었기 때문에 국민정부는 집요한 공산군 포위공격전을 준비했고 중국은 內戰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그러나 1931년 9월 18일의 滿洲事變(9∙18사변) 이래 점차 북중국(華北)으로 확산된 일본의 중국 침략은 국 ∙ 공간의 내전을 초기에는 더욱 촉진했고 결국에는 오히려 抗日을 위한 국 ∙ 공 간의 타협 곧 제2차 국공합작을 성립시켰다.西安事變은 제2차 국공합작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여기서는 서안사변의 경과와 서안사변의 처리를 둘러싼 국공양당의 대응을 중심으로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에 대한 서안사변의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Ⅱ. 본문1. 西安事變만주사변으로 자신의 근거지인 만주를 잃은 張學良의 東北軍은 서안에 주둔해 있었다. 장학량은 1936년 1월 말 東北大 학생들이 서안에 찾아온 이래 항일의 여론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고 9월에는 북중국지역에서 모여든 학생 370명을 훈련시켜 學兵隊를 조직하였다. 이에 상응해 동북군 안에서는 항일을 주장하는 여론이 강해졌다. 1936년 전반기에는 공산당과 정전을 맺고 공북군과 양호성의 서북군의 개조를 도와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이렇게 장학량이 항일에의 의지를 강화하고 있던 중 일본 관동군이 내몽고를 독립시키려는 공작의 일환으로 綏遠省을 공격하는 綏遠事件이 일어났다.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부대를 이끌고 수원성으로 가서 중국군을 돕겠다고 요청하였으나 장개석은 이를 거부하고 공산군 토벌을 요구하였다. 장개석은 長征 이후 陝西省에 근거지를 마련한 공산당과 협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적 소탕의 기회를 노려, 섬서성에의 총공격 준비를 갖추고 1936년 12월 4일 서안에 도착해 공산군 토벌 명령을 따르던가 아니면 동북군 ∙ 서북군이 각각 福建省 ∙ 安徽省으로 이동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북군 ∙ 서북군 가운데서 항일의 여론이 높아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공산군 토벌을 강요한다는 것은 장학량이나 양호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으며, 복건성 ∙ 안휘성으로 이동하라는 요구는 장개석에 의해 제거됨을 의미하였다. 딜레마에 처한 장개석과 양호성은 제6차 공산군 포위공격령이 내려진 12월 12일 새벽 장개석을 그의 숙소인 華淸池에서 체포 ∙ 연금했다. 그리고 전국에 通電하여 일체의 내전정지, 상해에서 체포된 구국연합회 지도자 7인의 즉시 석방, 민중의 애국운동의 개방, 구국회의의 소집 등 8개 항목의 주장을 제기했다.서안사변은 남경정부를 동요케 했다. 서안사변의 소식이 전해지자 남경의 국민당 요인들은 사변의 대응방안을 논의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서안에 대해 즉각적인 무력 공격을 주장하는 세력과 장개석의 안전을 위해 신중하자는 두 가지 주장이 대립되었다. 친일적인 何應欽 軍政部長 일파는 장학량 등의 토벌을 주장했고, 장개석의 안전이 확인되자 토벌령이 내려져 새로운 내전이 일어날 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宋美齡, 宋子文, 孔祥熙 등이 미국과 영국의 지지를 얻어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게 되었다.공산당은 서안사변 당일인 12월 12일에 긴급회의를 열어 장개석의 죄상을 폭로하고 그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서안에 파견부의 실권이 친일파인 하응흠에 돌아가는 사태를 고려해 장개석의 파면요구를 포기, 평화적 해결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코민테른의 영향도 있었다.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각계 대중의 반응이었다. 구국연합회는 ‘당면한 시국을 위한 긴급선언’(12. 15) 을 발표해, 장개석의 자유의 회복과 중앙정부의 지도 아래 항전을 실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장학량과 양호성의 정치주장은 올바르나 수단이 잘못되었다는 견해였다. 이 같은 입장을 표명한 것은 각계의 반응을 의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일부 소수를 제외한 대개의 국민은 이 사건으로 내전이 일어나면 일본의 침략에 유리한 정세가 되리라 우려하였다. 장개석 만이 전국의 무력을 통솔할 수 있으니 그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2. 西安事變의 平和的인 解決과 第2次 國共合作의 成立장개석은 장학량과 양호성의 8개 조건을 승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후에는 장학량과의 대화도 거절하여 장개석과의 협상은 불가능하였고, 사변이 수습될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송자문과 송미령이 장개석을 대신하여 협상에 나서고, 공산당 역시 서안사변의 평화적 해결로 태도를 전환하였으며 대중의 여론에 힘을 얻어 장학량, 양호성과 남경정부의 송자문과 송미령, 공산당의 주은래 사이에 사변의 해결을 위한 협상이 수차례 이루어졌다. 장개석이 장학량과 양호성을 정식교섭상대가 될 수 없는 부하로밖에 인정하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공산당과 남경정부간의 직접교섭이었지만 6개 항목의 협정이 성립되었고, 이로써 25일 장개석이 석방되고 서안사변은 평화적 타협으로 귀결되었다.서안사변의 평화적 해결은 전민족의 입장에서 ‘일치항일’을 희구하는 대다수 중국민중에게 안도감을 주었고, 장개석이 공산당의 협상책임자인 주은래에게 내전의 중지를 약속한 것을 계기로 내전의 기본적인 정지와 국 ∙ 공간의 지속적인 정식회담의 길을 터주었다.장개석이 남경으로 돌아온 후 약 1개월 여 간은 서안사건의 마무리 기간이었다. 국민정부는 우선 서안사변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장군사재판에서 징역 10년과 5년간 공민권 박탈을 선고하였다. 장개석이 국민정부에 특별사면을 요청하여 장학량은 사면되었으나 석방되진 않았고 장기간의 구금상태에 들어갔다. 또한 국민정부는 1937년 1월 5일 동 ∙ 서북군을 甘肅省으로 이동시키고 陝西省에 중앙군이 주둔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서북문제 처리 방침을 발표하였다. 서안에서의 내분과 약간의 저항이 있었으나 중앙군은 1937년 2월 8일 서안으로 진입하여 이를 해결했다.서북지역에 대한 처리가 마무리된 뒤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두 개의 군대를 거느린 별개 정치권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만큼 양측이 합작함에 세부의 구체적 문제는 쉽게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주로 국공합작의 조직형식, 홍군의 개편, 邊區문제의 3항이 쟁점이었다.남경정부는 항일에 적극 나서되 어디까지나 국민당이 주도권을 잡는 ‘團結建國’의 방향을 추구했다. 이에 공산당은 (1937. 4. 15)에서 양보의 의의와 한계를 명확이 밝혔다. 항일과 민주주의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양보도 할 수 있고 이것은 오히려 당의 발전과 혁명에 도움이 되나, 그렇다고 해서 당조직의 독자성마저 손상해서는 안되니 비판의 자유와 홍군과 特區에 강한 지도권의 보증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이와 같이 국 ∙ 공간에 서로 갈등의 소지는 없지 않았지만, 7월 7일 蘆溝橋事件의 발생으로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개시되고 8월 13일에 일본군이 上海를 침략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장개석은 국민총동원의 필요에 쫓겨 개괄적인 합의를 서둘렀다. 홍군의 수는 3개 사단 4만5천명, 지휘체계는 국민정부로부터 각 사단에 연락참모가 파견되는 조건으로 홍군 독자의 총지휘 설치에 동의 했고, 陝甘寧邊區를 국민정부 행정원직속 행정구역으로 승인했다.이 같은 합의를 기반으로 장개석 정권은 8월 22일,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 八路軍으로 개편하도록 명령하고, 이어서 9월 23일 국공합작을 공식 선언하는 담화문을 장개석의 명의로 발표하였다.3. 서안사변이 제사변은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정책 전환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먼저 서안사변은 장개석과 국민당에 대하여 공산당과 지방 군벌을 함께 소멸시키려는 剿共의 방법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장개석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던 장학량이 초공의 압력에 공산당과 연합하여 오히려 장개석을 공격한 것은 초공을 계속할 경우 지방 군벌들의 태도를 예견케 해주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내전을 포기하고 全面抗戰으로 抗戰政策을 전환하였다.중국 공산당은 서안사변 초기에는 ‘反蔣抗日’의 지향을 나타냈으나 장개석의 정치적 위상이 매우 높아 장개석을 배제하고는 抗日民族統一戰線을 성립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서안사변의 평화적 해결로 태도를 전향하였다. 서안사변으로 중국 공산당의 항일정책은 ‘聯蔣抗日’로 전환되었다.Ⅲ. 맺음말1936년 12월 장학량과 양호성이 일으킨 서안사변은 당시 중국에서 절대 권력을 자랑하고 있던 장개석이 국금되어 생사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서안사변은 궁극적으로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으로 결론지어졌으므로 중국 현대사의 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서안사변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하나는 국민당의 정책 결정권자였던 장개석으로 하여금 중단되었던 공산당과의 협상을 재개토록 하였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서안사변은 중국 공산당이 장개석의 정치적 위상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서안사변은 항전정책의 전환과정에 있어서 동요하고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에게 중국에서의 내전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항일전은 장개석을 중심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었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2차 국공합작에 합의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참고문헌*****1. 이승우, 1993,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배경, 영남대 대학원.2.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편, 백영서, 1989, 「제2차 국공합작의 성립과정과 그 의의」,『강좌중국사 Ⅶ』, 지식산업사.3. 이춘식보문고.
    인문/어학| 2002.11.05| 5페이지| 1,000원| 조회(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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