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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인의 감자를 읽고 작가의 평가와 소설의 평가
    김동인의 감자는 환경적 요인이 인간 내면의 도덕적 본질을 타락시켜 간다는 작자 정신과 자연주의적인 색채가 가장 잘 드러난 소설이다. 그러나 기존의 도덕성을 내던진 인간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는 데 그쳐, 일제 강점기 민족적 빈곤과 비극의 원인에 대한 구체적 모색에는 미흡하다는 한계를 보인다.즉 지나친 이광수 비판에의 집착, 유아독존적인 성격과 예술 지상주의적 문학관이 빚어낸 그 한계점도 있으나 무엇보다도 문학에 있어 교훈주의의 청산과 한국근대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김동인의 문학사적 위치는 중요하다.이 글에서는 김동인의 ‘감자’를 역사전기와 사회문화비평을 통해 ‘감자’의 안과 밖을 관련시켜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감자’는 칠성문 밖의 빈민굴을 무대로 먹을 것이 없어 감자를 훔친 것이 빌미가 되어, 젊고 건강한 여자가 왕서방과 얽히게 되고, 결국은 그에게 참살 당하는 사건을 다루었다.시기적으로 볼 때, 일제 강점기에 해당하며 문예 사조로 볼 때는 프로문학이 문단을 휩쓸던 시기였으나 ‘감자’에는 계급의식이나 민족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복녀의 가난은 어떤 계급이나 부유한 개인의 횡포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복녀 스스로의 책임이다. 자신의 나태함이 빚은 당연한 결과가 그의 가난이며, 그 결과가 복녀의 가난으로 귀결된다. 민족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는 횡포를 자행하는 일본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다. 복녀의 가난은 일제시대의 것이니까 일본의 횡포와 연결시키면 편리했을 텐데,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 유일한 외국인은 한국에서 지배권을 상실한 청나라의 유민인 왕서방뿐이다. 또한 성격 면에서도 왕서방보다는 복녀가 강자이다. 그녀는 왕서방 앞에서는 기세가 등등하며 낫을 들고 먼저 덤비는 것도 그녀다. 결국 이 무력한 외국인은 정당방위를 하다가 과실로 복녀를 죽인 것뿐이다. 결과적으로는 ‘목으로 피를 쏟으면서 꼬꾸라진’ 것은 복녀지만, 살의는 복녀 쪽에 먼저 있었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계급의식이나 민족주의와 결부될 요소가 거의 없다. 이를 통해 김동인이 이데올로기와 문학의 결부를 의식적으로 거부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김동인의 삶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될 듯하다.그의 민족의식이 희박했다는 것은 김동인이 일본 유학을 하던 중에 그리고 3.1운동 때 귀국했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감옥에 갇혔을 때 동인은 시원한 공기만 마실 수 있다면, 처자도 조국도 팔 수 있을 것 같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했다는 점과 그의 친일 행각에는 춘원과 같은 갈등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볼 때 알 수 있다.또한 이 소설에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은 가난이라는 물질적 조건이 한 여자의 세계에 미치는 환경결정론이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다 선비의 후예인 그의 집안에는 딴 농민보다는 좀 ‘똑똑하고 엄한 가율’이 있었다. 하지만 복녀는 가난 때문에 80원에 팔려서 20세나 연상의 홀아비에게 시집을 간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비극은 시작된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복녀와는 달리 ‘도덕에 대한 인식’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는 게으르고 파렴치한 인간이었다. 결국 그녀는 농민에서 소작인, 소작인에서 막벌이꾼, 막벌이꾼에서 막간살이로 계속 몰락의 과정을 밟아가다가 결국 칠성문 밖의 빈민굴 주민으로 떨어진다. 도둑질과 매음이 판치는 그 곳에서 처음에는 도덕 때문에 굶기를 밥 먹듯 하였으나 기자묘의 송충이 잡이 사건으로 복녀는 ‘도덕에 대한 인식’을 물질적 보상과 생리적 쾌감을 맞바꾼다. ‘도덕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자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그녀는 나날이 파렴치의 도를 더해가며 복녀의 육체는 완전한 상품으로 전락한다. 결국 ‘감자’는 물질적 조건이 정신적 가치를 말살하는 과정에 대한 냉정한 보고서이다.많은 연구자들은 김동인이 다양한 경향, 다양한 제재, 다양한 사조를 드러낸 작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김동인의 다양한 성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특히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감자’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는 김동인의 체험에나 가치관에서 비롯된 의식은 어떠한 식으로 작품에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의식을 반영한 작품 속 인물들에 대한 태도, 주인공 복녀와 그녀의 죽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감자’는 환경, 본능 따위로 파멸해 가는 한 여인의 허무한 삶으로 끝맺음으로써 그의 허무주의적 운명관을 드러낸다. 복녀의 죽음은 어딘가 성급하게 느껴지는 허무함이 있다. 주인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망설이다 뜻밖의 결말을 맺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 여인의 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상품일 뿐이었다.또한 ‘감자’는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특히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작중인물들 모두는 인간다운 정신이나 도덕을 갖지 못한, 동물적 본능에만 지배되는 인간들이다. 게으르고 무능한 남편, 성욕에만 사로잡힌 왕서방과 동네 거지들,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변해간 복녀까지. 바람직해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작가는 작중 인물들의 추악함을 단지 드러내 보일 뿐이다. 인물상들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김동인의 자기 우월적인 입장에서 인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는 문제다.유아독존적인 김동인의 성격은 복녀로 그려낸 여성상에서도 드러난다. 첫사랑의 실패와 아내의 가출 등의 경험에서 비롯된 그의 여성 편력은, 여자란 영혼이 없는 동물이란 사상과 매춘부 아닌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그의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감자’의 복녀는 환경에 수동적인 인물로 그 환경 속에서 점점 도덕적으로 타락해간다. 가난이라는 환경이 원인을 제공했지만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그녀의 운명은 그녀 자신이 자초한 결과로도 비춰질 수 있다. 김동인의 경험에서 빚어진 부정적인 여성상이 복녀로 다시 드러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작가는 자기 시대의 사회적 현실과 거기에 대처해서 사는 사람들의 생활현장을 자기 작품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은 그 사회 및 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소설은 작가 자신이 몸담아 사는 현실의 모습을 하나의 완결된 사건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장르이므로 작품과 사회와의 연관관계가 더욱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복녀의 아버지는 원래 그 시대의 상당한 농민으로서 넉넉한 가정살림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집을 떠나 평양 성안으로 막벌이로 들어와 남의 행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도시의 성장과 도시 인구 집중화로 인해 소작농으로 전락한 소작농들이 결국 도시의 한 구석에 빈민굴을 형성하여 살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현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열강들의 침투로 인한 근대화는 도시의 성장을 가져왔지만, 이러한 풍요의 뒤에는 일반 소작농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이 숨어 있었으니 풍요와 빈민굴이 도시 속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8.11.02| 3페이지| 1,500원| 조회(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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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단위계와 CGS단위계의 비교분석
    SI단위계와 CGS단위계의 비교 분석SI란 현재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여 국제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위계이다. 이는 "미터계"(또는 "미터법")라고 부르고 사용하여 오던 단위계가 현대화된 것이다.SI의 특징으로는 첫째로 각 속성(또는 물리량)에 대하여 한 가지 단위만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로서, 길이에 대하여는 미터만 사용하고 , 전체적으로 볼 때 단위의 수가 대폭 감소하였다. 두 번째로는 모든 활동분야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과학이나 기술 또는 상업 등 모든 분야에 적용이 된다는 말이다. 이는 전 세계가 같은 방법으로 사용함으로써 상호 교류나 이해를 쉽게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일관성 있는 체계를 들 수 있다. 몇가지 기본단위를 바탕으로 이들의 곱이나 비의 형식으로 모든 물리량을 나타내는 일관성 있는 체계를 형성, 다른 체계와의 혼합에서 오는 인자들이 없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배우기와 사용하기가 쉽다. 한마디로, SI는 그 명칭이 뜻하는대로 "국제" 단위계이다.CGS 단위란 기본이 되는 길이 ?질량 ?시간의 단위로서 센티미터(cm) ?그램(g) ?초(s)를 채택하고 이를 기준 삼아 다른 물리량의 단위를 정한 단위계이다. CGS 단위계는 위의 3가지 단위의 양에 기초하였으며, 그리고 전기와 자기분야에서 단위는 이들 세 개의 기본단위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는 다른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몇 가지의 다른 체계가 이루어졌다. 예를들면 CGS 전자기계, CGS 가우스계가 이들이다. 이들 세 개의 단위계에서는 양의 체계와 그에 대응하는 방정식의 체계가 SI단위를 사용한 체계와 다르다.SI단위의 구조는 기본단위 유도단위 2가지 부류의 단위로 형성 되어 있다. 첫 번째는 “기본단위“이다. 관례상 독립된 차원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명확하게 정의된 단위들을 선택하여 SI의 바탕을 형성한다. 그 단위로는 미터, 킬로그램, 초, 암페어, 켈빈, 몰, 칸델라의 7개 단위가 있다. 두 번째는 ”유도단위“이다. 관련된 양들을 연결시키는 대수적 관계에 따라서 기본단위들의 조합 또는 기본단위와 다른 유도단위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고, 평면각과 입체각을 나타내는 라디안과 스테라디안도 이에 포함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와같이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은 어느 정도 임의적이며, 국제 관계, 교육 및 과학적 연구활동 등에 있어서 실용적이며 범세계적인 단일체계의 이점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위의 두 부류의 SI 단위들이 문자 그대로 "일관성"있는 단위의 집합을 형성한다.CGS 단위의 구조는 에르그(erg) , 다인(dyn) , 포아즈(P), 스토크스(St) , 가우스(G) ,에르스텟(Oe) , 맥스웰(Mx) , 스틸브(Sb) , 포트(ph) , 갈(Gal) 이렇게 10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SI단위와 CGS단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량SICGS길이mcm질량kgg시간ss가속도m/s2Gal힘Ndyn응력,압력Padyn/cm2에너지Jerg일율Werg/s온도K℃점도Pa?sP동점도m2/sSt자속WbMx자속 밀도TGs자계의 세기A/mOe*SI 기본단위SI의 가장 기본이 되는 7개의 단위로서 독립적인 차원을 갖도록 정의되어 있음현재는 이들중 질량의 단위인 킬로그램(kg)만 인공적으로 만든 국제원기에 의하여정의 되어 있고, 나머지 6개는 모두 물리적인 실험에 의하여 정의되어 있음· 이들 정의들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바뀌어 왔고, CGPM에 의해서 결정됨*SI 유도단위· 기본단위를 물리법칙에 의해 대수적인 관계식으로 결합하여 나타내는 것· 유도단위의 표현에는 기본단위 외의 다른 인자가 나타나지 않음→ SI 단위가 일관성을 갖게 되고, 또한 계산할 때 다른 환산인자를 필요로 하지않음. 이 유도단위 중에서 21개는 편의상 특별한 명칭과 기호가 주어졌음· 경우에 따라 많은 유도단위가 만들어질 수 있으며 이들은 기본단위로만 표현된 경우,그리고 특별한 명칭을 가진 유도단위를 사용한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1) 라디안 (rad)"라디안(radian)은 한 원의 원둘레에서 그 원의 반지름과 같은 길이의 호를 자르는 두 반지름 사이의 평면각이다." 즉, 원의 반지름과 같은 길이의 원 둘레에 대한 중심각이다.→예를 들어, 직각은 π/2 rad가 된다.2) 스테라디안 (sr)"스테라디안(steradian)은 한 공의 표면에서 그 공의 반지름의 제곱과 같은 넓이의 표면을 자르고 그 꼭지점이 공의 중심에 있는 입체각이다.즉, 공의 반경의 제곱과 같은 넓이를 가진 공의 표면에 대한 중심 입체각이다.→ 공의 전 표면적은 반지름의 제곱의 4π배이므로 전체 공의 입체각은 4π sr이된다.- 무차원 (1) 유도단위로 보기로 결정 (CIPM/1980, CGPM/1995)- 라디안과 스테라디안은 유도단위의 표현에 사용할 수도 있고, 생략할 수도 있음.기본단위의 정의1) 길이의 단위 (m)"미터(meter)는 진공에서 빛이 1/299 792 458 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이다." (1983년 제 17차 CGPM)- 이에 따라서 빛의 속력은 정확히 299 792 458 m/s 이며, 길이의 단위가 독립적으로정의 되었을 때 처럼 오차를 포함하지 않는 상수이다.2) 질량의 단위 (kg)"킬로그램(kilogram)은 질량의 단위이며, 국제 킬로그램 원기의 질량과 같다." (1901년 제 3차 CGPM)- 여기서, 질량의 단위라고 강조한 것은 그간 흔히 중량(무게)의 뜻과 혼동되어서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를 중지시키고 질량을 뜻함을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이다.3) 시간의 단위 (s)"초(second)는 세슘 133원자 (133Cs)의 바닥 상태에 있는 두 초미세 준위 간의 전이에
    공학/기술| 2007.03.12| 4페이지| 1,000원| 조회(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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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계몽운동
    1. 애국계몽운동의 배경애국계몽운동 활동의 시대적 배경은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개강을 전후한 우리 사회는 세도정치의 문란으로 극도로 피폐해 있었고, 洋夷의 위협이 노골화되어있었다. 이 시기에는 부패한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적의가 심화되어 민란으로 폭발했고, 외세에 대한 우리의 응전으로 정아운동이 일어났다. 외세에의 문호개방은 봉건왕조체제의 와해를 초래한다는 의식에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실시됐고, 근대적 시민사회로의 개혁을 요구하는 당시 민중은 민족적 역량을 인식하고 사회적 불평등의 개혁을 통해 이를 발휘하고자 했으며, 이런 민중의 요구에 편승한 일부 지배층은 서양의 근대문화를 도입하기위해서는 문호개방이 불가피하다는 개항 당위성이 대두되어 1876년 개항조약이 체결되었다. 개항은 민중으로 하여금 근대화에의 지향 이외에도 외세로부터 국권을 지키고 민족을 보호해야할 과제를 떠받게 한 것이다. 두 번째, 개항이후 근대파는 문명개화를 내세워 모든 것을 서양문명의 척도에서 가치를 판단하려 했다. 민중은 착취의 대상일 뿐 개화의 주체는 아니라하여, 민족적 역량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민중과 유리되어, 민중 속에서 민중을 주체로 한 자주적 개화를 이루지 못하고, 개화는 곧 자주독립이라는 망상 때문에 일제의 대한침략 구실을 만들어주는 역사적 비극을 자초하였으며, 자주와 근대화라는 이반적 과제를 극복하지 못한 한계성이 있었다. 척사론도 임오군란이후 정부의 개화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자, 수정되어 동도서기론, 즉 자주적 서론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들의 척사자주의식은 민족 부재, 민권 부재의 자주요 존왕?존화적 자주였다. 개화파에서 주장한 근대화 문제나 척사파에서 내세운 자주의 문제는 그 한계성으로 인하여 외세의 침략을 끌어들이고 합리화시켜 주는 결과를 자초했으나, 척사사상은 항일의병운동과 개화사상은 애국계몽운동과 연관되어 국권회복운동의 2대 주류를 이루었다. 세 번째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봉건제도가 와해?붕괴해가던 1880년대는 민중의 근대의식이민중의 민권운동과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이 합류하여 전개된 대운동이었다. 그러나 민심의 소재를 파악 못한 지배층과 외세에 의해 실패하여 주체적 개혁의 가능성이 말살되었으나, 이를 통해 민권은 민중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는 근대시민정신과 근대민주주체가 싹텄으며 자주적 근대국가의식이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민중의식의 변화는 독립협회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네 번째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운동은 「민족」이라는 이념 하에 지식인과 일반대중, 관과 민이 회동, 민중의 힘을 집약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근대적 의미의 민주시민사회를 형성하려한 것으로써, 후대의 민권운동의 방향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민중의 실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다만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체계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운동은 민중을 의식화하고 그 힘으로 국권을 지키고 근대화를 성취하려 했다는 것과, 국권박탈후의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는데 자주민권운동의 역사적 의식을 찾을 수 있다. 애국계몽운동은 개항을 전후하여 싹트기 시작한 민권운동과, 독립협회운동에 의해 성숙된 근대민족의식 및 자주적 국가의식의 발로로 일어난 민중 주도의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구국투쟁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19세기말 열강들의 침략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는 시점에서 생긴 우리 민족이 스스로 찾은 대책이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는 조선이라는 국가명을 가지고 있었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나라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 하지만 열강세력들은 그런 우리나라를 개항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개항하려는 목적은 단 한 가지, 자국의 이익 때문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열강의 침략과 개화라는 커다란 문제점 앞에 우리민족이 스스로 찾은 해결책이었다.2. 대표적인 단체를 통해본 우리나라의 계몽운동애국계몽운동은 자국민족의 힘이 일본제국주의의 힘보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국권회복의 장기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하여 전개한 민력양성운동이었다. 애국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전개된 애국계몽운동은 구국교육운동, 언론계몽운동, 민족산업부흥운동, 국채보상운동, 신문화운동, 국학운동, 민족종교운동, 해외독립군기지창설운동등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총괄적으로 짧은 기간에 다대한 성과를 내어 민족역량을 크게 증진시킨 것이 사실이다. 애국계몽운동이 기대한 독립전쟁의 기회는 오지 않았으나, 이때 결성한 실력이 독립운동의 가장 큰 원동력을 공급하였으며, 결국 3?1독립운동으로 폭발하여 결실을 맺었다.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전국규모의 단체는 대한자강회와 신민회였다. 이 두개의 단체는 모두 1896~1898년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계승한 개화파 계통의 단체로서, 대한자강회는 합법단체이었고 신민회는 비밀결사이었다. 당시 개화파 계통의 인사들은 을사조약에 의한 사태의 근본적인 변동에 대처하여 종래의 개화운동을 국권회복운동으로 전환시킴과 함께 먼저 합법단체로서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다가 이를 확충 개편하여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뒤이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년 후에 비밀결사로서 신민회를 조직한 것이다. 대한 자강회는 국민교육을 강화하고 국력을 배양함으로써 독립의 기초를 다진다는 취지 아래 1905년 5월 이준이 조직한 헌정연구회를 확대 개편하여 발족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를 발행하여 식산흥업의 필요성, 국가재원 증진책, 황무지개척, 일제 황무지개척의 의도, 임업의 필요성, 토지개량의 필요성, 종자개량 등에 대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계몽운동과 건의안은 일본이 고문의 참여로 배일성이 약하고, 활동범위가 법의 허용 한도 내에 있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이후 적극적인 현실참여운동을 전개하면서, 1907년 고종 황제의 퇴위와 순종 황제의 즉위를 반대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고 친일매국단체 인 일진회를 성토하였다. 그러자 통감부는 8월 27일부로 공포된 보안법 제2조의 규정을 적용하여 8월 21일 강제 해산시켰다. 1907년 11월 10일 조직된 대한협회체는 국민을 개발시키어 조선왕조 최후의 절망적 4년을 국권회복의 기초와 원동력으로 만들어 조국을 튼튼히 만들고 우리나라 근대화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구국운동단체가 되었다. 신민회의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를 공화정체로 하는 것이다. 신민회가 자주독립국의 정체를 입헌군주국으로 하지 않고 공화국으로 한다고 한 것은 사상적으로 큰 진전이었다. 신민회가 주장한 실력은 국민의 실력 즉 민력이었다. 이것은 신민회가 공화정제의 국민국가수립을 목표로 한 사실과도 관련된 것이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국민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일제의 온갖 강압을 무릅쓰고 헌신적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실천하였다. 수많은 학교를 세워 국민들에게 철저한 애국주의와 신지식을 교육하였으며, 민족의 기둥이 될 수 있는 수십만의 애국청년을 길러 내었다. 신민회는 국민들의 학교설립을 지지하고 지존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본보기가 되는 다수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신민회 회원들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는 수십 개에서 1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대성학교는 완전한 시설을 갖춘 중학교였으며,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둔 보창학교는 강화군에만 21개 소학교 분교를 열었으며, 북부와 중부 각 지역에도 보창학교가 설립되었다. 신민회의 학교설립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신민회는 또한 민중들의 곳곳에서 자발적 애국계몽단체의 설립을 지지하였으며 그 스스로도 애국계몽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시기의 서우학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의 간부에는 신민회 회원이 참여하여 그들의 운동을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의 노선에 일치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계몽강연 및 서적·잡지 출판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계몽강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구습타파, 자발적 의무교육실시, 민족단합의식 등을 고취했다.대한매일신보 를 기관지로 이용했고, 최남선을 중심으로 1908년 11월에 창간한 의 모범농촌 등을 주도했다. 이 사업은 신민회 재원의 확보에 도움을 주었지만, 취약한 자본으로 인해 일제의 대자본에 밀려 큰 성과를 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독립군 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으며, 의병운동의 현대화를 위해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이 계획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1910년 가을에 만주 일대에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1년 봄에는 만주 봉천성 유하현에 신한민촌 을 건설해 단체 이주를 시작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4년제 본과 외에 3개월·6개월의 속성과정을 두어 애국청년과 의병들에게 현대적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한일합병을 마무리 지으려고 애국적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면서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일제의 주된 감시 대상이던 안창호를 비롯한 이갑·이동휘·신채호·조성환 등은 1909년에 이미 미국과 러시아령 연해주, 서북간도 등지로 망명했으며, 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와 회원 일부가 만주 독립군 기지로 이주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선언된 후, 신민회의 운동방향을 새로이 모색하려는 회의가 나라 안팎에서 열렸다. 비밀리에 활동하던 신민회는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조직이 드러나고 전대미문의 가혹한 탄압과 고문으로 국내에서 신민회는 1911년 9월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위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신민회는 일제의 조작사건으로 탄로 나서 일제의 탄압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었다. 하지만 신민회는 설명한 것과 같이 많은 사업을 전개하였다. 신민회의 사업은 모두 우리나라의 애국계몽운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신민회는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제를 주장하였듯이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다른 상당히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신민회는 신채호가 비판하였듯이 비밀결사이면서도 스스로 비합법적인 반일활동을 회칙으로 부정함으로써 한말 계몽운동의 일었다.
    사회과학| 2004.06.29| 5페이지| 1,000원| 조회(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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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독후감]격몽요결을 읽고...
    율곡과 신사임당이라는 과목에서 '격몽요결'이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과제가 있어 격몽요결을 오랜시간에 걸쳐 읽었다. 독후감을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지만 책을 읽고서 느낀점 그대로를 서술하였다. 책을 읽기 전에 율곡 이이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목적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격몽요결은 조선 중기의 학자요 정치가인 율곡 이이가 42세 때 부제학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으로 돌아왔다가 해주 석담으로 옮겨 거처하면서 어린이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지은 교양서이다. 그는 호가 율곡, 자가 숙헌이다.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진사 초시에 급제했고, 29세에 생원시,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호조좌랑으로 출사한 이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동호문답, 김시습전, 성학집요외 다수가 있다.이제 격몽요결의 내용을 살펴보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1장 입지 >에서는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는 전제하에 일반 사람도 그 본성은 성인과 한가지라 하여 처음 배우는 이는 그 본성을 되찾기 위해 뜻을 세워 성인이 될 것을 기약하라하였다. 심지(心志)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바에 구애되지 않으므로 스스로 뜻을 세워 밝게 알고, 독실하게 행한다면 어리석고, 불처함을 고칠 수 있다하였고, 입지(立志)를 하였으면 물러서지 말아야 하며 스스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여기에서 처음 배우는 이는 먼저 뜻을 세워 반드시 성인(聖人)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하라 하였는데 그러면 학문 또는 교육에서 최종적으로 이루고자 함이 성인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사람의 본성은 선다하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바탕으로 참답게 알고 실천을 통하여 그 본성(本性)을 되찾는다면, 만선(萬善)이 충분히 갖춰질 수 있다하여 어떻게 보면 성인이 되는 길을 쉽게 여겨질 만큼 본성임을 강조하여 주장하였는데 사실은 무엇보다고 어렵고 힘든게 성인(聖人)이 되는 길이 아닌가 싶다. 스스로 그러한 뜻을 세웠다고 해도 성의껏 배우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제 2장 혁구습 >에서 초학자는 학문의 뜻을 가다듬어 통렬히 절제하여 마음에 한점의 구습의 해도 없게 하여야 학문을 성취할 수 있다하였다.또한 2장에서 구습(舊習)은 마음의 해가 될 뿐이고 학문을 성취하는 데에 방해가 되므로 절제해야 한다는 내용은 지금의 학습자에게도 꼭 새겨줄 필요가 있는 중요한 점이라 생각한다. 편히 노는 것을 좋아하고 구속되기를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마음일 것이다.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하기 싫어하고 멀리하려는 습관은 버려야 마땅하고, 속된 무리에 빠졌을 경우에는 자신의 주관을 뚜렷하게 세워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글 등을 표절하여 남에게 칭찬 받기를 좋아하는 것도 구습의 조목에 들어가는데 이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예를 들면 대학교에서 흔히 과제로 주어지는 레포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얻은 자료를 그대로 편집하여 자신의 생각은 전혀 담기지 않고 겉만 번지르한 형식적인 과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제 3장 지신 >에서 학자는 성심으로 도에 향하고, 세속의 잡사로써 자기의 뜻을 흔들리지 않게 되어야 학문의 기초가 이루어진다 하여 항상 구용(九容)을 새겨 몸과 마음을 가지고, 구사(九思)를 새겨 학문의 뜻을 더하라 하였다. 예(禮)를 따라 행하여 수신하고, 일상생활에서 자기 사욕을 이겨내야 하며 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하였고,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행함과 배움을 부지런히 하고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다.그리고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앉아 있는 곳에 써두고 항상 보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한 구절과 생각에 사특함이 없을 것과 공경하지 않음이 없을 것의 두 구절은 '마땅히 벽 위에 걸어두고 잠깐이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한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중요한 구절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눈에 띄도록 하여 항상 가슴속에 두어 행할 수 있게 하도록 권하였다.< 제 4장 독서 >에서는 이치를 궁리하여 선을 밝힌 후에야 행할 도(道)가 뚜렷하다 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데 가장 먼저 할 것이 독서라 하였다. 그리고 책 한 권을 선택하면 숙독(熟讀)하여서 뜻을 모두 알아 의심없게 된 후에 다른 책을 읽어라 하였다.여기에서 배우는 자가 이치를 궁구하기 위해 먼저 할 것이 독서(讀書)라 하였는데 독서의 중요함은 시대가 아무리 변하더라도 고집되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교육에 있어서 그 질에 따라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의 단계가 있듯이 옛날에는 책의 내용에 따라 독서 해야하는 순서가 있었나 보다. 반드시 책을 선택했으면 숙독(熟讀)하여서 그 뜻을 모두 통달한 후에 다른 책으로 바꿔 읽어야 한다는 내용에서 책을 빨리 읽기 위해 속독법까지 익혀지고 있는 오늘날의 독서문화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제 5장 사친 >에서는 자식된 자는 어버이의 은혜를 깊이 알아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모름지기 정성과 힘을 다하여야 한다하여 그 예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부모에게 마땅히 해야할 일상생활 속의 효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사소한 것이지만 정말로 극진한 효행이 아닐 수 없다. 요즘같이 예도 따르지 못하고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크게 자리 잡게 된 사회에서 한번쯤 이러한 글을 읽어 자식의 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반성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 6장 상제 >에서 상제는 마땅히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의해서 그 예(禮)를 다하여야 한다하여 그 예를 자세히 설명하였다.상제(喪制)에 대한 가례(家禮)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 예가 엄하고 까다로운 것 같다. 가족 관계에 따라, 성별에 따라, 처신하는 방법도 따로 정해져 있고 부모의 상(喪)에는 먹는 것도 제한되어 지고, 곡(哭)을 하는 것도 정해진 시일 시간에 해야 한다. 이토록 정해진 예를 최대한으로 잘 행하여야 효성이 지극하다 여겨졌나 보다. 이러듯 극진한 예를 산 사람도 아닌 죽은 사람을 위해 몇 개월, 몇 년간 행한다는 것을 볼 때 살아 생전 다하지 못한 예를 정성으로 다하려는 선조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제 7장 제례 >에서는 가례(家禮)에 의한 제사의 마땅한 예를 설명하였고 집집마다 같지 않은 제사 지내는 법을 예로써 하나로 통일 시켜야 함을 강조하였다.무릇 제사는 사랑과 공경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하였는데 산재, 치재의 내용을 보니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제사를 받는 분에 대해 지극히 생각함이 보통의 정성으로 될 일이 아닌 듯 하다.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를 다시는 봉양할 수 없으므로, 그 다하지 못한 정성을 상사[喪]는 물론이고 제사[祭]에서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도 제사의 풍속이 예에 어긋남이 많고 집집마다 같지 않았나 보다. 이를 통일시키기 위하여 제사의 예법을 기록하고 그림으로 만들어서 까지 보여주는 율곡의 세심한 노력이 엿보인다.< 제 8장 거가 >에서는 집을 거하는 데는 삼가 예법을 지켜 집의 사람들에세 직분을 각각 나누어주어 그에 책임 지워야 하고, 집의 재물의 씀씀이에도 절도 있게 하여 절약할 줄 알아야 한다하였다. 그리고 형제로서의 도리, 부부로서의 도리, 부모로서의 도리, 하인을 거느리는 주인으로서의 도리, 군자로서의 마음가짐을 일러주었다.윗 내용의 일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형제간의 도리를 일러주는 데 있어서 그들 간의 우애는 같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여 설득력을 가진다. 고로 형제는 나[我]와 한 몸과 같으니 한 쪽만 편해서는 안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부부간의 도리에 있어서는 지아비는 화(和)하여야 하되 의(義)로써 행하며, 지어미는 순(順)하되 바름으로써 지아비의 뜻을 이어받아 서로간에 예와 공경함을 읽지 않아야 한다하였다. 그리고 여성보다 남성 중심적인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자식이 조금씩 알기 시작할 때부터 선(善)으로 인도할 것이며, 어려서 가르치지 아니하면 자라서는 그른 데 습관이 들어 가르치기 어려울 것이다 하여 어릴 적의 교육을 중시하였다. 이는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주인으로서의 도리에 있어서 보통 하인을 거느린다 하면 그저 이래저래 부려먹는 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임금이 백성에게, 주인이 하인에게 주는 것은 그 이치가 한가지라 한 것은 그야말로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주인의 수고를 대신하는 하인이므로 그 은혜를 먼저하고 위엄을 뒤로하여야 함을 일러준다. 그 시대에는 하인도 그 집의 중요한 구성원임을 알 수 있다. 군자의 마음가짐에 있어서 부귀를 가볍게 알고 가난하고 천한 것을 지켜야 함을 일렀다. 왜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그토록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공부에 힘써야 하는지 조금은 의문스럽다.
    독후감/창작| 2002.12.02| 4페이지| 1,000원| 조회(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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