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과 정치제1절. 현대사회의 정치화와 인간생활1. 인간과 정치(1) 인간의 소망- 자유로운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구속, 얽매이는 몸이 되었을까?-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 사회환경 등 총체적으로 인간 환경 속에, 그리고 인간 자신의 마음속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생활해 가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운 삶의 영위를 위하여 자연과의 싸움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면에서의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2) 인간의 세 가지 선한 싸움- 버트랜드 럿셀경인간이라는 존재는 본래 무엇이든지 상대하여 싸우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러한 싸움에서 어떤 사람은 승리하고 어떤 사람은 패하게 된다. ..인간들이 행하는 싸움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1)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 (2)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 (3) 인간의 그 자신과의 싸움. 이들 세 가지 종류의 싸움은 그 성질에 있어서 서로 다르며, 또한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그 상대적인 중요성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자연과의 싸움은 자연과학이나 기술에 의해서 행하여지고,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은 정치나 전쟁에 의해서 행하여진다. 개인의 영혼 속에서 행해지는 싸움은 여태까지는 종교에 의해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제는 정신분석의 방법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다룰 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써 온갖 필요한 것들이 과연 해결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3) 정치현상의 발생과 1) 정치현상이 발생하게 된 원인- 개인이나 집단이 추구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가치의 희소성 때문에-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태어나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제각기 자기의 목적이나 욕구에 따라서 행동을 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경합관계가 발생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즉, 인간이 한정된 희소 자원의 획득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는 곳에서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은 불가피- 예)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중에서 특히 정치적인 일과 역할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충원해 가는 기능② 이익표출(표명)기능 : 요구되어지는 가치, 즉 이익을 표출시켜 명확하게 기능으로서 투입기능 중 매우 중요시되는 것. 돌발적, 유동적인 무정형의 그룹 등이 이러한 기능 수행③ 이익집약화기능 : 명확히 표출된 이익을 집약시키는 기능. 정당이 중요 기구④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의 기능 : 정치적 내용을 가진 정보의 전달기능2) 배출기능① 규칙작성기능 : 입법기능에 해당② 규칙적용기능 : 행정기능에 해당③ 규칙판정기능 : 사법기능에 해당* 1980년에 발간한 현대비교정치론에서 알몬드는 정치체계의 기능으로 ① 정치사회화, ② 정치적 충원 및 ③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을 들고, 정치과정의 기능으로 ④ 이익표출, ⑤ 이익집약, ⑥ 정책 결정 및 ⑦ 정책집행과 조정을 제시했다.* 정책결정 : 주요한 정치적 요구가 권위적인 결정이나 정책으로 전환되는 것* 정책집행 : 정치체계의 전환과정에서 마지막 단계가 정책집행이며, 이를 담당하는 주요기관은 행정부이다. -> 현대국가가 행정국가 또는 관료국가화하는 경향을 나타내면서 정책결정과 정책집행의 구분은 더욱 모호해졌고, 비대화된 관료집단의 통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일반적으로 현대사회에서는 이익표출의 기능은 압력단체가 수행하고, 이익집약의 기능은 정당이 담당하며 정책결정과 집행의 기능은 정부(입법부와 집행부)가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스턴과 알몬드 이론의 특징① 사회를 여러 집단의 다원적 이익의 복합체로 보는 다원주의적 사회관에 입각하여 정치과정을 여러 정치집단간의 경합 또는 균형과정으로 보고 있음② 이들이 제시한 정치체계의 전환과정인 이익의 표출, 집약과 정책의 결정, 집행은 서구적인 정치체계의 정치과정에서 추출해 낸 것이다.③ 이들 이론의 장점은 정치현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상이한 정치체계를 비교할 수 있다는데 있다.4. 그 밖의 연구방법- 라스키 : 역사적 연구방법에 의거하여 정치현상을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 언제나 정치현상 인간-> 즉, 권력 추구자가 개인의 사적동기를 국가·계급·혁명운동과 같은 공적 목표로 전위시켜 공공의 이름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정치적 인간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즉 사적동기를 공적인 목적에로 전위시켜, 공적 이익의 이름으로써 합리화시키는 것이다.④ 최소한도의 기능과 자질의 구비 : 정치적 인간은 정치적 투쟁에 필요한 기능과 자질을 구비해야 한다. 존경욕망, 가치박탈, 정당화 등의 요건을 갖춘 정치적 인격 중에서 권력조작의 기술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사람을 라스웰은 정치가라고 부른다.(3) 라스웰의 정치적 인격① 선동가형(극화적 성격) : 다른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정서적 반응을 요구, 자기과시성·경박성·배타성·의분성 등의 경향을 짙게 보이며 여러 가지 공작을 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에 급급하는 타입② 행정가형(강박적 성격) : 어떠한 일이라도 하나씩하나씩 면밀하게 결말을 지으며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격은 신기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도 언제나 일편단심으로 대함③ 이론가형(냉철한 성격) : 생생한 정서적 감동이 결여되고 있기 때문에 냉혹하고 무자비한 파괴적 행위에 유혹당하기가 쉽다. 표면상으로는 강박적 성격과 흡사하지만, 완전히 자각할 수 있는 모든 정념과 감동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3. 정치적 성격형(1) 보수형과 급진형(2) 권위주의적 성격형(3) 민주주의 인간(4) 선동형과 협상형- 달에 의하면 선동형은 대중에 대한 호소와 일반적인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협상형은 분쟁에 임하여 정당하다거나 완벽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추구한다.(협상형은 기회주의자 또는 실용주의자)- 바버: 실용주의적 정치가를 여러 가지 형태로 분류활동높음낮음즐김높음ⅠⅡ낮음ⅢⅣⅠ: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정치가Ⅱ: 대체로 입헌군주형으로서 군림하기는 좋아하나 지배를 즐기지는 아니한다.Ⅲ: 광고형. 열심히 적극적으로 일하지만, 일 자체를 별로 즐기지는 않는 젊은 변호사들이 여기에 속한다합법화의 단계 : 이 단계의 정당은 선거권의 확대와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절대군주에 대항할 수 있는 중요한 집단으로 인식된다. 정치적 필요수단으로서의 정당의 기능 강조된다(필수불가결한 수단으로 정당)④ 헌법적 융합의 단계 : 정당이 불가피한 수단이라는 법률상의 인정은 정당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을 의미했다. 이로써 대중정당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고 각국의 헌법에서 정당조직의 정당성이 승인되게 됨(2) 정당의 분립근거1) 사회적, 경제적 이해의 차이- 정당은 그 지지층의 사회적 경제적 이해의 차이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분립된다는 견해- 카알벡커 교수의 보수당과 자유당2) 기질 내지 심리적 경향의 차이- 정당은 그 지지층의 기질·심리적 경향의 차이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분리된다는 견해- 미국의 로웰은 정당분립의 기준으로서 현재의 상태가 만족인가 불만족인가, 개혁에 대해서 낙관적인가 비관적인가로 구분① 자유당 : 현 상태에 만족, 개혁에 대해서 낙관적② 혁신당 : 현 상태에 불만족, 개혁에 대해서 낙관적③ 보수당 : 현 상태에 만족, 개혁에 대해서 비관적④ 반동당 : 현 상태에 불만족, 개혁에 대해서 비관적-> ㉠ 혁신당과 반동당의 세력이 약하고, 자유당과 보수당의 세력이 비등하게 강화될 때에는 정치는 안정, 이와 정반대일 때에는 정치는 불안정㉡ 보수당과 반동당의 세력이 약하고, 자유당과 혁신당의 세력이 비등하게 강화될 때에는 정치는 진보적, 이와 정반대일 때에는 정치는 퇴보적- 로메르 : 인간의 성장단계의 기질의 차이와 심리에 근거하여 정당을 분류하고, 그러한 정당이 추구하는 국가의 성격을 규정① 급진당(우상국가) : 급진성을 갖는 소년기② 자유당(개인주의국가) :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는 청년기③ 보수당(민족국가) : 보수적인 성향을 갖는 장년기④ 전제당(형식주의) : 복고적이며 전제적 성향을 갖는 노년기(3) 정치적 환경과 정당의 발달1) 의회의 발달 : 의회에서의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치가가 행정권을 담당하는 의원내각제가 보편적인 정치형태가 되자, 의회 영국에 있어서의 의회중심의 정치(의회제 민주주주의 이론) 제시③ 몽테스키외 - 3권 분립제- 권력을 장악한 자는 그것을 남용하게 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국가의 권력은 분립되어야 한다고 주장- 삼권분립제가 채택되어질 경우 삼권의 분립과 상호견제로써 민중의 자유가 보장되어 전제정치의 출현이 저지되리라고 본다- 입법·행정·사법권으로 분류 : 삼권의 대등한 관계에 의한 견제와 균형2. 권력분립론의 실제- 이론적으로 말하면 삼권중에서도 입법부가 우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 행정부도 사법부도 모두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에 복종해야 한다.- 소극국가로부터 적극국가로 전화되어 가는 오늘날 행정부가 강화되는 경향이 뚜렷 → 실제상의 필요성은 이론의 제약을 넘어 행정부의 예외적인 강화가 널리 인정되고 있는 실정- 사법부에다 위헌심사권이 인정되고 있는 경우에는 사법부는 소속적이긴 하지만 다른 2부보다 상위에 있게 된다.* 권력의 기능적 배분제 3 절 의회제민주정치형* 의회제민주정치- Dicey : 의회는 남자아이를 여자아이로 변하게 하는 일 이외에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버크 : 의회는 서로 대립하는 이해를 대변하는 사절들의 회의의 장이 아니라 이해를 같이하는 전국민의 심의기관입니다. 여러분들은 실제로는 한 사람의 의원을 선거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일단 선출되고 나면 그는 브리스톨 구의 의원이 아니라 영국의회의 의원으로 되는 것입니다.1. 의회주의의 원리- 의회제도의 3요소 : 대표성, 공개성, 토의성2. 의회정치의 발전과정(1) 제 1 단계 : 참여의회의 시기- 귀족과 시민이 그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신장시켜 나라의 의회에 참여- 군주의 과세와 입법상의 주요문제 심의 위해 귀족과 시민이 참여할 수 있었으나, 의회는 군주의 의사대로 운영됨- 형식상으로는 국민대표의 참여의회의 형태를 보였지만 실제로는 군주정부의 하나의 부속기관에 불과한 것, 즉 군주의 자문기관에 불과(2) 제 2 단계 : 입헌의회의 시기- 시민혁명을 통한 입헌정치의 실험을 본 시기- 정부의 단?
화담 서경덕의 생애와 그 사상에 대하여...● 목 차Ⅰ. 서 론 - 들어가는 말.Ⅱ. 본 론1. 생애2. 업적 및 사상3. 영향 및 평가Ⅲ. 결 론 - 서경덕의 사상을 조사하고 나서..※ 참고문헌Ⅰ. 서론 - 들어가는 말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운 한국윤리의 사상가들은 수없이 많다. 그 중 성리학의 중심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자료가 많아 그들의 사상을 알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뒤편 세상과는 동떨어져 자연을 벗삼아 살아오거나, 주류에 밀린 사람들에 대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고, 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지 못한 편이다. 나는 수업 시간을 통해 많이 들어오고, 배워온, 성리학의 대가 이이나 이황 등 여러 사상가들보다는 보다 내 흥미를 끌고, 더 알아보고 싶은 서경덕이라는 학자를 선택하게 되었다.내가 알고 있는 서경덕은 황진이가 사모하여 스승으로 모셨다는 일화밖에 알지 못한다. 그리고 철학자, 성리학자 서경덕보다는 황진이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우리에겐 더 친숙해져 있다. 성리학자들이 무수히 많은 대다가 대표적인 인물만을 배워온 우리에겐 아무래도 서경덕이란 인물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좀더 고찰 해보고자 하여 서경덕을 택하게 된 것이다.Ⅱ. 본론1. 생애화담 서경덕은 조선조 성종 20년 음력 2월 17일, 지금의 개성인 송도의 화정리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可久이며 화담은 號이다. 어머니는 한씨 집안 사람이며 공자묘로 자신이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서 화담을 낳았다고 한다. 부친은 서호번으로 수의부위(修義副尉)라고 하는 하급 무관이었으며 조부 서순경도 부사용(副司勇)이사라는 무관이었으니 화담은 군인집안에 출생한 셈이다.화담의 어린 시절은 같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한참 부모님의 귀여움을 받으며 앙탈부릴 나이에도 불구하고 투정한 번 제대로 부리지 않고 양순했으며 예의가 반듯했다. 이런 일화도 전한다. 봄철이라 따뜻한 봄기운을 받고 봄나물이 푸릇푸릇 올라올 때 양반이었지만 가난했던 화담도 여느 집 공교롭게도, 120명이 추천되어 28명이 다음해에 시험에 통과했는데 그 해 일어난 기묘사화로 이들 대부분이 화를 입었다.화담의 나이 43세 때에 모친의 간곡한 부탁으로 소과시를 보게 되었다. 시험 자체야 화담에게 어렵진 않았지만 나이 40이 넘은 그로서는 어린 소년들도 보는 이 시험에 응시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그의 인격수양 상태로 봐서 이런 세속적인 자존심에 관한 나의 생각이 어리석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효성 지극한 화담으로서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소과시 명경과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서생원이 된 것이다. 그 후 정해진 교육과정에 따라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지만 얼마 안가 자퇴하고 만다. 이 당시 성균관의 분위기는 학문을 할 곳이 못되었다. 계속된 사화로 학문을 멀리하려는 풍조가 돌았고 출세욕에 눈이 어두운 학생들은 학자로서의 자질을 닦을 생각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 했다. 나라가 어지러워도 학생들은 전혀 나서려 하지 않고 무사안일로 지낼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화담은 결국 자퇴를 하고 만 것이다.화담이 56세 되던 해에 후릉 참봉직을 제수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동안 재야에 숨어 있는 인재로 인정되고, 학문과 덕행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과거를 거치지 않은 그에게 참봉직이 제수된 것이다. 종 9품의 낮은 관직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아무리 하찮은 관직이라도 연줄만 닿으면 얻으려고 발버둥치던 그런 시대 상황이었다. 그러나 화담은 관직이라고 하는 족쇄에 매이는 게 싫었다.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성격이니 어쩌겠는가? 결국 후릉 참봉직마저도 거절하고 말았다.성균관을 자퇴한 후 화담은 후학양성에 본격적으로 매진한다. 유학자에게는 크게 두 가지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관직에 나아가 백성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육에 종사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것이다. 퇴계나 율곡이 전자에 해당된다면 남명이나 화담은 후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화담은 우선 조그마한 초가집을 마련하여 서재 겸 교육 장소로 삼았기론적 철학은 한국 유학의 수준을 격상시켰다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이 직접 계승되지 못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조선 사회의 사상적 정치적 성격을 살피는 데 있어서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서경덕이 정주학파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재의 '기철학'에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많은 독서와 깊은 사색을 통해 옛 성현들이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점들에 대한 짧은 논설들을 남기고 있다. 서경덕은 생활 주변의 사물 현상을 주의 깊게 응시하고 그 이치를 추구하는 관찰의 태도로써 학문의 출발로 삼았다. 그에게 있어 독서란 관찰과 사색을 통하여 얻은 지식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책에서도 설명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줄기찬 사색을 통하여 의미를 추리하여 갔다. 그의 사색의 소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현상까지도 포괄하고 있는데, 그는 그것들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현대적으로 표현해 자연과학적이라 할 수도 있을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자연현상에 대한 비범한 관찰력은 그 근본 이치를 해명함에 있어서 과학적 태도에서 철학적 사유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경덕의 이러한 측면은 자연적인 사물의 '스스로 그러함'(自然)에서까지도 도덕적인 교훈을 읽어내려는 이황의 학문 방법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이황의 시도가 인간성 계발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 해도, 그가 바라보는 인간이 왕과 사대부가 중심이 되는 신분 질서 아래서만 유의미한 개념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시도는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황의 도덕적 질서 유지라는 목표는 신분 질서의 유지라는 더 큰 목표의 하위 목표로서만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경덕이 이황과는 달리 정치적인 맥락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건 서경덕은 이황과는 다른 방식으로 학문에 임했다고 여겨진다.서경덕 철학의 중심에는 '기'가 놓여 있다. 서경덕은 자기 주위의 가신의 기 이론을 설명하는데 부합되는 논증 자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성리학에 관한 일반 이해에서 도나 태극 같은 개념은 기로 이해될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로 해석되는 범주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서경덕은 어느 성리학자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부연 적인 해석에 머무는 학문 태도를 넘어서서 경전상의 문구를 자신의 철학적 관점에 부합되는 한에서 적절히 설명의 방증으로 구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었다.이러한 서경덕의 생각은 기의 외부에 따로 이가 존재한다는 입장에서 벗어난 것이다. 비록 서경덕이 이 개념을 분명하게 제시했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황에게서와 같이 기보다 우월한 원리로서의 이를 상정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당시 조선조의 학계는 일반적으로 정주학 중심의 성리학이 학습되던 터이고, 이기론은 형이상학 체계에서 이른바 이선기후론이나 이에 따른 이수기졸의 관념이 정설로 간주되던 무렵이었다. 하지만 서경덕은 이런 정통설을 부정하고 이른바 기외무리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기일원론의 세계관 인식에서 이미 기는 무외무궁한 시공간적 근원에서 비롯하며 이른바 선천 태허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모두 기의 세계라고 상정하였다. 이같은 기일원론적 형이상학적 인식은 주자학적인 이선기후설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덕은 기일원론의 철학을 전개함에 있어 이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는 않다. 그가 부정한 것은 이가 형이상학적 실재로서 기에 앞서 존재한다는 이의 독립성을 부정한 것일 뿐이다. 그는 논증하기를 기란 시원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이 또한 본래 시원이 없는 것인데, 만일 이가 기에 앞서 실재하는 것이라면 결국 기는 시원이 있다는 모순된 논리를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의 주재이지만, 주재라 함은 외부로부터 와서 다스린다는 것이 아니다. 주재란 기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기의 작용이 그러한 까닭의 바름을 잃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란 기의 작용이 항상 작용의 구실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법칙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만물이 나왔고 만물 역시 기로 이루어졌다. 동일한 기로 이루어진 태허를 선천(先天)이라 하고 만물을 후천(後天)이라 불렀다.그렇다면 리(理)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하나의 법칙이다. 기가 이루는 자체의 법칙을 가리킨다. 기(氣)밖에 따로 특별한 이(理)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가 작용하면서 그렇게 되는 까닭, 법칙인 것이다. 만물은 변화한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은 늙게 되며,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피었다가는 금세 시든다. 심지어 물질이 아닌 마음조차도 시시각각 변화한다. 화담은 이러한 만물변화의 이치를 복(復)에서 찾았다. 그가 말하길 "사람이 능히 복(復)을 알면, 도는 멀지 않다.(人能知復道非遠)"이라고 했다. 복에 의해 음양의 기가 변화하고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순수 음(陰)의 상태에서 최초 하나의 양기(陽氣)가 다시 돌아온다고 할 때 거기서 복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그렇다면 왜 복의 현상이 나타나는가? 다시 말해 복의 현상이 나타나게 하는 원인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화담에 의하면 그것은 천지(天地)의 마음이라고 하였다.서경덕의 기 개념이 갖는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는 우주 전체에 충만해 있어 빈 틈이 없다. 둘째, 기는 양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하도 커서 바깥이 없다. 셋째, 기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다.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작도 없고 또한 끝도 없다. 넷째, 기는 초감각적인 그 무엇이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소리도 냄새도 없다. 다섯째, 공기도 기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부채질을 했을 때 바람이 일어나는데, 바람의 선행적 존재가 곧 기이다. 다섯째, 만물의 질료이다. 기가 모이면 만물이 되고 흩어지면 만물은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 여섯째, 기의 움직임은 외재적인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2) 화담집 - '주기론'을 통해 본 동양의 경험적 과학관여기서는 그의 화담집의 주기론을 통해서 동양의 경험적 과학관을 보겠다.화담있다.
토네이도(Tornado;회오리바람) 란 무엇인가?● 목 차Ⅰ. 서 론 - 토네이도란?Ⅱ. 본 론1. 토네이도의 경로의 길이와 이동방향2. 토네이도의 생성3. 토네이도의 규모와 발생지역4. 한국의 토네이도5. 토네이도의 파괴력과 1999년 피해 사례6. 토네이도 앨리와 라니냐 현상과의 관계(특성)7. 태양의 회오리 바람8. 토네이도의 피해를 막기 위한 인간의 노력Ⅲ. 결 론※ 참고문헌Ⅰ. 서론 - 토네이도란?그림 토네이도흔히들 말하는 토네이도는 미국 중남부에서 주로 발생하는 저기압 중심부를 향해 아주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반시계 방향의 강한 소용돌이 바람을 말한다. 이 안에서 공기는 거의 연직축 둘레로 회전하는데, 토네이도는 적란운의 하층으로부터 깔대기 구름이 만들어지며, 매우 강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이동한다. 멀리서 보면 회색 깔때기나 적란운의 바닥에서 아래로 코끼리의 코가 내밀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 매달린 구름이 땅에 닿으면 다량의 먼지와 부스러기가 최하 수백 m를 빙글빙글 돈다. 이 토네이도는 외부의 풍속이 내부보다 훨씬 강하여 물체를 튕겨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내부는 기압이 낮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온 물체를 위로 날려버리는 특징으로 인하여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토네이도와 관련된 바람은 매우 강해서 이를 견뎌 낸 보통 풍속계가 없으므로 직접적으로 측정된 경우가 거의 없다. 건물에 미친 피해와 비행체들에 미친 충격력으로 미루어, 속력은 일반적으로 40m/sec와 140m/sec 사이의 범위에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는 음속에 가까운 속도이며 지상에서는 가장 빠른 바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바람은 매우 강한 기압경도를 필요로 한다. 한 토네이도의 안팎 사이의 기압 강하는 보통 25hPa 정도이나, 200hPa 이상의 강하가 관측된 적도 있다.이러한 토네이도는 모든 폭풍 중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것으로 스페인어에서 뇌우의 의미를 뜻하는 트로나다(Tronada)를 어원으로 한 이동성 선형풍(旋衡風)) 태풍의 중심 부근 또는 토네이도(torn기단이 만나 서로 맞부딪치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온대 저기압의 불안정 또는 강한 한랭전선과 관련하여 발생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이론에 의하면 속도가 빠른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보통 때처럼 밑으로 들어가지 않고 습기찬 열대의 공기 위를 빠져나가면 그 결과 심한 불안정이 생긴다. 따뜻한 공기는 갑자기 상승하기 시작하고 때로는 연직으로 시속 300km에까지 이르며, 옆으로 흘러드는 공기는 이 상승기류를 회전시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또한 비와 우박, 끊임없는 번개를 수반하여 보통 시속 70km의 속도로 이동하며 보통 몇 분 동안밖에 계속되지 않지만 그 수 분 동안에 엄청나게 큰 파괴력을 발휘한다. 토네이도의 깔대기 모양의 구름은 토네이도 주위로부터 유입하는 공기가 급속히 냉각되어 상승하기에 단열, 냉각되어 응결된 물방울들이 구름으로 바뀌게 되며 기류의 모양에 따라 깔대기 모양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러한 토네이도의 형성 메커니즘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예외 없이, 1988년 일본 삿포로 부근에서 발생한 토네이도의 경우와 같이, 잘 발달된 적란운과 더불어 생긴다. 적란운 속의 상승류는 공기를 뽑아 내어 상당한 곡률과 전단(수평 방향의 바람 변화)을 가지는 센 수평 바람을 제공한다. 현실적 소규모 토네이도 깔때기는 이 중간 규모 구풍 흐름이 불안정해져서 더 작지만 더 강한 소용돌이를 형성할 때 생길 수 있다. 일단 생기고 나면, 불안정도가 줄어들고 마찰로 이것이 소멸될 때까지, 강한 대류가 이 소용돌이를 유지한다. 토네이도는 때때로 더운 바다 위에 생긴다. 공기의 습도가 매우 높아 깔때기들이 물방울들로 가득 채워지므로, 어떻게 보면 구름 바닥에서 퍼부어지는 물줄기처럼 보인다.중위도의 토네이도와는 달리, 매우 뜨거운 날, 특히 사막 위에 흔히 생기는 소용돌이는 회오리바람이다. 보통 여기에는 구름이 없으며, 회전하고 있는 먼지나 모래의 기둥에 불과하다, 이들은 지표 부근의 강한 대류에 의하여 형성되는데, 지형 때문에 생긴 불규칙한 바람 하강을 일으킨다. 기압하강은 어떤 경우에는 200∼250hPa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소용돌이에 들어오는 공기를 포화에 이르게 함으로서 깔때기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면에서의 토네이도를 용오름(waterspout)이라고 부리는데, 대부분은 극단적인 강도에 이르지는 않는다. 토네이도 소용돌이는 보통 지름이 수백 m에 불과한데, 중심 부근의 더 제한된 띠에서 풍속은 50∼100{ ms}^{-1 }에 이를 수 있다. 가장 빠른 토네이도는 때때로 주 토네이도 축에 대해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다중소용돌이로 분리될 수도 있는데, 각각은 원형 경로를 따르고 전체 토네이도 체계는 복합형태의 파괴를 가져오며, 회전속도와 이동속도가 결합된 오른쪽 경계에서(북반구의 경우) 최대풍속이 나타난다. 파괴는 강풍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소용돌이 경로 근처의 건물들은 건물 밖의 기압감소 때문에 밖으로 무너질 수 도 있다.강한 토네이도에 대한 에너지 공급원들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근래에 번개와 다른 전기적 방전에 의한 열에너지의 방출이 추가로 필요한 에너지 원천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토네이도는 보통 집단으로 발생하며 하층제트로 규정된 속도로 비교적 직선 경로(전형적으로 폭 100m에서 2km까지, 길이 10∼100km)로 이동한다.3. 토네이도의 규모와 발생지역토네이도의 규모를 알기 쉽게 우리가 잘 아는 태풍과 비교를 해 보자. 태풍은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는 것으로 저기압 중심부의 풍속이 약 33m/sec이상의 경우를 말하며 그 규모는 평균 300∼400km정도로 가끔 1000km에 달하는 것도 있다. 토네이도의 지름은 200m정도이며, 회오리가 일으키는 소용돌이의 최대 속도는 정확하게 측정되지 못하고 있다. 기상학자들은 아마도 풍속은 100∼200m/sec정도, 시속은 600km 정도는 될 것이고 어쩌면 음속에 가까운 시속 1000∼1100km 까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상에서 가장 빠른 바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회오리가 지나간 자간 750개의 토네이도 발생하는데, 이의 60%가 4, 5, 6월에 발생한다. 평균적으로 이들에 의한 사망자 100여명, 부상자 1,800여명이고, 사망과 파괴의 대부분이 지속적인 성숙 토네이도에 의해 야기되는데, 이들은 전체 토네이도의 1.5%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가장 강력한 것으로 기록된 토네이도는 1925년 3월 18일 미주리, 일리노이, 인디애나에서 3시간에 200km를 이동하며 사망자 689명을 기록하였다.토네이도는 영국에서도 낯선 것은 아니다. 1960∼82년 사이에 토네이도 발생일은 연간 14일 있었다. 대부분은 약한 것들이나, 1981년 11월 23일에 한랭전선 전면에서 남서기류가 있는 동안에 102개의 토네이도가 기록되었다. 찬공기가 비교적 따뜻한 바다를 이동하는 9월에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토네이도의 발생 지역은 열대나 한대지방에는 적고 연평균 기온 10∼20℃ 사이의 지역에 가장 빈번하다. 그 중에서도 미국, 유럽,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1968년∼1972년 사이에 3,660개가 발생하여 연평균 732개, 일본에서는 1968년∼1972년 사이에 87개 발생하여 연평균 17개, 영국에서는 1963년∼1966년 사이에 78개 발생하여 연평균 19개, 소련에서는 1901년∼1965년 사이에 23개, 오스트레일리아의 뉴사우스드웨일즈주에서 1910년∼1669년 사이에 173개의 토네이도의 발생이 보고되어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토네이도가 많이 발생하는 나라이다. 미국에서는 중서부와 남동부의 .연안 여러 주에서 발생하는데 텍사스 플로리다, 캔자스, 조지아주가 그 중심이다) 1972년 1년간 미국에서 발생한 토네이도의 총수는 7433개였고, 그 중 텍사스 144개, 플로리다 80개, 캔자스 45개, 조지아 42개이다.. 따라서, 토네이도에 의한 피해도 가장 큰 지역이다.인도의 토네이도는 갠지스강 유역, 특히 하류 지방에 많다. 1963년 4월 19일 아삼 지방에 발생한 토네이도는 33개의 부락을 촌락을 이동하면서 목재, 나무, 가축, 가구, 가옥, 수레 등에 많은 피해를 주나 피해폭은 넓지 않다. 토네이도-회오리에 의해 인간이 하늘 높이 떠올려진 예까지 있다. 1947년에 텍사스에서 두 사람이 회오리에 의해 60m나 하늘을 날고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지상에 내려진 일이 있었다.※ 참고로 Fujita-Pearson Tornado Intensity Scale을 소개하면...분류풍속손상정도발생률(92년)F072MPH가벼움54%F173-112MPH중간32%F2113-157MPH상당함10%F3158-206MPH심함3%F4207-260MPH황폐1%F5260-319MPH믿을수없음1%F6319-379MPHout of this world??'죽음의 회오리바람'으로 일컫을 수 있을 만한 규모의 토네이도가 미국 중부지역 주민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5월 3일 오후(현지 시간) 미 오클라호마주를 비롯해 캔자스·텍사스주를 덮친 토네이도는 가장 위력이 센 F5급으로 이 지역의 일부 타운을 지도에서 사라지게 할 정도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번 토네이도는 지난 3일부터 사흘 간 사망자가 7일 현재까지 51명으로 집계됐다.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려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실종자까지 합치면 희생자는 최악의 경우 100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부상자는 1000여명. 주택, 교회, 도서관, 상가 등 5000여 채의 건물이 파손되면서 5억∼1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피해와 주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긴 채 소멸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4일 오클라호마주와 캔자스주 등 토네이도가 할퀴고 간 중서부 일대를 재해 지역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사실 미국에서는 연초부터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는 토네이도가 발생하리라는 조짐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1월은 토네이도가 극성을 부리는 봄이나 여름에 비해 적게 발생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지난 1월 발생한 토네이도 수는 74년 4월 3일 오하이오주 등 13개 주를 강타해 330명의 목숨을 앗아간 토네이도의 전조였던 그 해 1월 발.
제목 : 조선 시대 선비들은 어떻게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를 뒷받침 할 수 있었는가?과 목 명:교육사상사교 수 명:유은선 교수님학 과:사회교육학과학 번:2001028035성 명:채 소 영제 출 일:2002, 7, 16일☆ 목차 ☆Ⅰ. 서론 : 문제 제기Ⅱ. 본론 : 선비에 대하여1. 선비의 의미(정의)2. 선비에 대한 간략한 역사3. 선비의 직분과 기능4. 선비의 지절(志節)과 도덕의 용기5. 생활 양식과 활동6. 선비의 정신세계7. 선비정신의 현대적 의의Ⅲ. 결론 : 나의 견해※ 참고 문헌 및 사이트Ⅰ. 서론 : 문제 제기◎ 조선 시대 선비들은 어떻게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를 뒷받침 할 수 있었는가?조선 시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그 왕권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업시간에 배운 바에 의하면 선비들의 정신을 가장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초점을 두고서 선비가 그 오랜 역사를 뒷받침 할 수 있었던 근거와 정신에 대해서 알아보고, 더 자세히 그들의 삶과 생애를 알아보며, 어지러운 이 세상에 던져주는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 : 선비에 대해서1.선비의 의미넓은 의미에서 선비란 지성인이다. 일반적으로 지성인하면,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첫째,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행위를 자제하며, 인격을 도야하고 지절을 숭상하여 고고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둘째, 깊고 넓은 학문을 닦아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도리를 터득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하여 리(理)와 그러함과 그러하지 않음과 사(事)의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진리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셋째, 인류문화에 대해 창조적 충동을 느껴 포부와 경륜을 품고, 실지로 천하사(天下事)를 맡았을 때 이를 능히 수행할 수 있는 경세관(經世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인격만 갖추고 학문과 경륜이 없으면 낡은 사상이나 풍습에 젖어 고집이 세고 변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을 사로 자각하고, 관직은 유교이념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공자는 '도에 뜻을 두어 거친 옷이나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격'을 선비의 참모습이라고 강조하였다.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유교문화의 유입으로 선비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한 이해가 조성되었고, 고려 말기인 충렬왕 때 안향과 백이정에 의해 원나라에서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학풍, 도학이 형성되었다. 도학이 정립되면서 선비의 자각도 심화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유교가 통치이념이 되면서 선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립하였다. 고려말 충의를 지킨 정몽주를 숭상하고, 절의를 굽히지 않은 길재의 학풍을 이으면서 선비정신을 강화하였다.이러한 흐름 속에서 선비는 사회의 지도적 계층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에 따라 선비의 생활도 매우 엄격한 틀에 의해 정형화되었다. 선비는 관직에 나아가거나 자연에 은둔해 살더라도 유학의 도를 강론하고 실천함은 물론 그것을 통해 일반 대중들을 교화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안게 된 것이다.동방의 주자라 불리는 퇴계 이황은 선비를 가리켜 '세력과 지위에 굽히지 않는 존재'라 하였다. 또 그는 "저들이(세속적 권세를 쫓는 무리) 부유함으로 한다면 나는 인(仁)으로 하며, 저들이 벼슬로 한다면 나는 의(義)로써 한다"고 선비의 할 바를 일러주었다.무릇 선비정신이라 함은 이기적이지 않고 탐욕에 현혹되지 않으며, 도와 예를 바탕으로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그 강인성은 변하지 않고 굽히지 않는 의리로 표현된다. 조광조의 말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해 도모하며, 일에 대해서는 과감히 실행하고 어려움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바른 선비의 마음가짐이다.비록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나아가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선비의 모습에는 시대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선비는 언제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지성으로 책임을 다했다. 선비는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적 지도자요, 지성인이라 할 수 있다.) 자료출처 으로 그를 승복시킬 수 있단 말인가?물론 후세의 역사기록권(歷史記錄權)이 이를 보완, 무형의 힘이 되어 현실악을 제지한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선비들의 도덕적 용기가 없는 한 어려운 노릇이다. 왜냐하면 선비들이 도덕적 용기를 가졌다면 현실정치에서 이미 권력과 맞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니까 말이다.그러기에 현실적으로 당장 힘을 가진 위정자와 힘을 못 가진 선비들 사이에는 역사상으로 견제. 조화되기보다는 충돌하고 제압되는 예가 많았다. 이에 이상 편에서는 자보다는 현실을 따르는 자가 많아지고, 심하면 현실비판과 역사심판까지도 제왕 쪽이 탈취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말하자면 레퍼리 없는 게임을 자행학, 그것이 민망하면 레퍼리를 매수해서 변칙, 반칙을 오히려 정당화한 때도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회상할 때, 선비가 점하는 직분은 그런 대로 쉬운 일이라 하겠으나, 그가 담당해야 할 기능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선비들 중에는 정작 중요한 기증을 포기하고 직분만을 일삼는 자가 있다. 이를 좋게 말해서 은자(隱者)라고 하기도 하나, 사회의 은혜를 입어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사는 한, 이것은 도피 행위임에 틀림없다.3.선비의 지절(志節)과 도덕의 용기그러므로 예로부터 선비의 이 비판기능을 보강하고 어떤 방해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갖기 위하여 지절을 숭상하였고,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으뜸가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생명 있는 자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선비가 나약해지는 근본원인이 여기에 있다. 다음은 일반사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물욕에 빠져들어 그를 추구하느라, 자존도 염치도 다 버리고 권세에 아부하는 일이다. 여기서 문제는 인생의 가치와 의의를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부귀와 영화는 누구나 원하는 대상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것만을 최고 가치로 설정한다면 그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는 맹목과 광분에 흘러들어, 결국 사람들은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만다. 즉 인간상실을 초래한다는 말이다.정치권력도 마의 용기에서 솟아 나온다.(1)선비는 인생의 꽃 , 민족의 원기역사상 고난을 겪지 않은 충신이 없고, 호강을 누리지 않은 간신이 없다는 말처럼 , 이상편에 서는 자는 고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지조를 굽히지 않고, 그 어려운 고난의 길을 가는 선비가 있었기에 역사심판의 大義는 어느 한시도 끊어진 일이 없다.한 때 힘에 의해 모든 것이 억압되고 시비가 조작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꼭 되 밝혀져 끝내는 그 권력도 역사 앞에 무릎을 끊고 말았다.그리고 역사상 한 시대가 망한 뒤에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은 정권이 무너지면 벼슬아치는 따라서 흩어지지만 끝까지 남아 역사문화를 지키고 새로운 민족의 활로를 열어 준 이는 선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황이주는 명이대방록에서 일개 나라(정권)가 무너진 것은 망했다고 하지 않고, 도의가 땅에 떨어졌을 때 비로소 천하가 망했다고 한다 하였다. 힘으로 버티는 정권은 오래 가지 못하고 정신으로 지키는 나라는 비록 물질적으로 약할지라도 갈수록 힘이 생겨 오래 견디는 법이다.그러므로 이것이 진실한 내 힘이다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백성들의 자유의지로부터 나오는 신뢰요, 민족의 진정한 생명은 유한한 개개인의 생명이 아니라 역사문화의 전통으로 구축된 도의정신이다. 이 두 가지는 선비들에 의해 교화되고 창진(創進)된다. 선비야말로 민족의 생명을 고취하고 정신을 진분(振奮)케 하는 원기(元氣)요, 민족을 영원히 지켜 줄 최후의 보루(堡壘)인 것이다.끝으로 묵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 나라에 들어가 봐서, 선지다운 선비가 없거든 그 나라는 이미 망한 것과 다름없는 텅 빈 나라로 간주해도 좋다"는 것이다. 맹자도 " 선비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왕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을 초래한다"고 하였다.제왕은 한 국가 안의 존재니까, 기껏해야 한 정권이 무너지는 데 그치지만, 선비는 국외자로서 민족 전체, 인류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민족을 망치고 천하를 어지럽히는 더 큰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선 심판자의 위치에 나가는 선비는 무엇보다도 물질과 권력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된다. 만일 선비가 세속적 부귀에 유혹된다면 그 역시 편협심과 근시안이 되어 공정을 잃게 된다. 심판이 공정을 잃었을 때 그 때문에 오는 혼란은 그 무엇보다도 큰 것이다.인간들이 공동으로 걸어가는 대도의 교통을 맡은 자가 규칙대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처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그러기에 선비가 그의 직분과 기능을 잃은 것은 일국의 제왕이 그 직능을 잃은 것보다 결과는 더 무서운 것이라고 한다. 하물며 관리의 잘못에 비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선비로서의 자존이 있는 것이고, 그만큼 천하생민(天下生民)에 대한 통절한 책임감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러한 자존과 사명에서 선비는 도덕의 용기를 갖는다.용기는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을 믿었을 때 솟아나는 힘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도의정신이다. 선비들의 생명을 내놓고 지키려는 도의가 서있을 때 , 그리고 그의 희생을 무릅쓸 때 사회라는 거대한 배는 풍랑(現實)에 시달려 기우뚱거리면서 형평(衡平)을 되찾으며 영원한 항해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옛날부터 선비를 고귀하게 여겨온 것은 위와 같은 근본적인 질서 기능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비가 헛된 이름만 차지하고 그 직분과 기능을 포기하면, 그것은 일 개의 필부(匹夫)만도 못한 아니 그보다도 더럽고 치사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른바 불한당(不汗黨=땀 안 흘리고 먹고사는 기생충 같은 무리)이라는 말이 있다. 민중들이 나약하고 쓸모 없는 선비., 자기 안일에만 급급한 썩은 선비, 간사한 선비를 규탄하는 무서운 소리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기생충 같이 뼈 없는 선비도 있는 것이다.다음은 예기 유행편에 기록되어 있는 선비의 몸가짐과 숭배해야 할 일 지켜야 할 지조 등이다.▶선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물로써 어진이를 맞이하고, 아침, 저녁으로 힘써 배워 사람들의 물음에 대비하고, 성실과 신의를 품고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기다리며 힘껏 능력을 발휘하여 쓰여질 것을 기다린다같다
1. 서설1948년 헌법이 제정된 이래 현재까지 우리는 9차에 걸친 헌법의 개정을 경험했다. 그러나 1960년 헌법과 현행헌법을 제외한 대부분의 헌법은 국민의 의사를 수렴하여 민주적으로 개정된 것이 아니라 집권의 연장 내지 독재의 장기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헌법사는 독재와 그에 대한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Ⅰ. 제 1 공화국1. 6·25의 경험과 그것이 한국의 헌법발전에 미친 영향1948년 헌법이 제정된 이후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대한민국의 헌법발전은 1950년부터 3년에 걸쳐 계속되었던 한국전쟁에 의하여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해방 직후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신념은 갖고 있었지만 민주주의 경험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출발하여 조금씩 자기를 잡아가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전쟁이라는 외부적 상황에 의하여 여러 가지 제한과 변형을 겪어야 했으며, 간혹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조차도 없지 않았다.그러나 한국전쟁이 대한민국의 헌법발전, 특히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하여 남긴 가장 심각하고 지속적인 상처는 남북한의 대립이었다. 남한과 북한이 이제는 서로 대립하는 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대한 민국은 이에 대비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제한도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물론 이 같은 인식은 최근의 역사적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며, 그 자체로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라에 있어서는 이러한 논거가 남용되어 민주주의를 억압할 위험이 너무도 큰 것이었으며, 그러한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국가의 안전을 위해 민주주의의 제한이 필요하다는 설득은 전쟁을 경험한 국민들에게 무엇보다도 효과적이었고,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은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것이었다.결국 민주주의의 이론과 경험으로 충분히 무장되지 못했던 국민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정부가 홍보하는 현존하는 외부(북)로부터의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를하게 대중적 인기를 갖고 있었던 이승만의 연임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헌법개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골적인 집권연장의 시도는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회의 표결에서 좌절되었다. 그런데 사사오입이라는 주장을 들고 나와 부결로 선언되었던 헌법개정안을 다시금 가결로 번복함으로써 1954년의 제 2 차 개헌에는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칭이 붙게 되었다.제 2 차 개헌의 중요한 내용으로는 ①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삼선제한을 철폐하고, ②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변경의 경우에는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③ 헌법개정의 한계에 관한 명문규정을 신설하였고, ④ 국무총리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에 관한 개별적 불신임제를 도입하였다.(국무원의 연대책임제 폐지) ⑤ 대통령의 궐위시 부통령이 그 직위를 승계 하도록 명문의 규정을 두었고, ⑥ 특별법원(군법회의)의 헌법적 근거를 신설하였으며, ⑦ 경제체제를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변화를 보였다. 그리고 ⑧ 참의원의 대법관 기타 고급공무원에 대한 인준권을 규정하였으며, ⑨ 헌법개정의 한계에 관한 명문규정을 두었다.Ⅱ. 제 2 공화국1. 4·19와 제 2 공화국 - 단명으로 끝난 불안정했던 민주주의제 1 공화국하의 헌법현실은 헌법규범을 무시한 것이었고, 그 헌법규범마저도 위헌적 헌법개정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오로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무지, 그리고 전쟁으로 인하여 야기된 불안에 편승한 것이었다.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국민이 독재를 수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기에, 정권의 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하게 되자 이른바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국민의 봉기가 있었다. 4월 19일의 학생의거를 기점으로 폭발한 국민의 분노는 결국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희망 속에 새로운 헌법과 정부를 출범시키게 되었다.하지만 제 2 공화국은 만 1년의 단명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야 했다. 애당초 제 2 공화국의 수립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컸던 반면에 안정과 단합의 요구 또한 이에리위원회를 신설하여 선거의 공정한 진행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⑥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하였고, ⑦ 지방자치단체장의 직선제를 헌법에 직접 규정하였다.3. 제 4 차 개헌제 2 공화국을 탄생시킨 제 3 차 개헌에 이어 제 4 차 개헌이 1960년에 있었다. 제 4 차 개헌은 그 동안의 헌법개정과는 달리 집권연장 또는 권력구조의 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제 1 공화국의 말기에 발생되었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법적 제재의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헌법개정은 소급입법을 전제한 것이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고, 또한 그 실효성에 있어서도 문제가 적지 않았다.제 4 차 개헌의 중요한 내용은 ① 3·15 부정선거 관련 부정행위자 및 그 부정에 항의하는 국민에 대해 살상 기타 불법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의 근거를 마련하고, ② 1960년 4월 26일 이전에 특정 지위를 이용하여 반민주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제한을 위한 특별법 제정의 근거를 두며, ③ 1960년 4월 26일 이전에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 축재한 자의 행정상 또는 형사상 처리를 위한 특별법 제정 근거를 만들었으며, ④ 이러한 형사사건의 처리를 위한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의 설치 근거를 제공한 것이었다.Ⅲ. 제 3 공화국1. 5·16과 제 3 공화국 - 군사쿠데타와 새로운 헌법제 2 공화국의 불안정한상황은 결국 군부의 쿠데타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군사쿠데타에 의해 성립된 제 3 공화국은 무엇보다 안정을 내세우면서 제 2 공화국 헌법의 많은 부분을 수정 ·삭제한 새 헌법을 헌법개정의 형식으로 통과시켰다.이러한 새 헌법은 기본권에 대한 제한을 다시금 강화하였고, 정부형태가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뀌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민주주의도 마치 제 1 공화국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였다.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는 보장이 되었지만 국가안보를 위해 항상 제한이 가능하였으며 실제로 국민들은 많은 제한을 감수하며 살았다. 기본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제한을 도입함으로써 제 2 공화국 헌법에 비하여 기본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④ 정부형태를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환원시켰다. ⑤ 국회를 단원제로 바꾸었다. ⑥ 헌법재판소를 폐지하고 법원에 위헌법률심사권을 부여하였으며, 법관 임명 시 법관추천회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⑦ 헌법개정에 대해서 국민투표를 도입하였다.3. 제 6 차 개헌(3선 개헌)제 1 공화국이 그러했듯이 제 3 공화국도 권력의 유지, 집권의 연장을 위한 헌법개정을 시도하였다. 1969년의 제 6 차 헌법개정은 제 2 차 개헌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삼선을 허용하는 데 그 초점이 있었고, 그 밖의 규정들은 구색을 맞추는 정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제 6 차 개헌의 중요한 내용으로는 ① 대통령의 삼선제한의 철폐 외에, ② 국회의원의 겸직금지의 폭을 축소하는 것을 들 수 있다.Ⅳ. 제 4 공화국 (제 7 차 개헌)1. 10월 유신과 제 4 공화국 - 장기집권과 독재의 제도화박정희 정권의 공과 실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의 대립이 있다. 한편에서는 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제 2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였으며, 군의 정치개입이라는 나쁜 선례를 만든 독재정권이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강력한 지도력하에 경제발전의 초석을 만들어 놓았으며, 어려운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이 안정되게 만들었으며, 번영의 기틀을 잡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그러나 지금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으로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장기집권을 제도화시킨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국민의 비판의식이 높아지면서 정부-여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야당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는 등 정권의 유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렵다고 판단되자, 박정희 정권은 남북한의 대치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국가의 단합을 도모하며 평화적 통일을 위해 국론의 분열을 막고 국력의 낭비를 방지한다는 명목하에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러나 그 실질민회의를 설치하였으며, 이 기관을 통해 대통령이 간선되도록 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또한 국회에서 제안된 헌법개정안에 대한 확정권을 보유하였다. ④ 국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많이 약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제 5 차 개헌에 의해 도입되었던 정당의 의원 등에 대한 구속력은 완화되어서 정당의 추천을 받지 않은 무소속 출마자의 입후보가 인정되었다. ⑤ 대법원의 위헌법률심판권이 박탈되었으며, 헌법위원회가 구성되어 위헌법률심판, 위헌정당해산심판, 탄핵심판을 담당하게 되었다 ⑥ 부칙에 의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방의회의 구성을 연기함으로써 지방자치의 실시를 공식적으로 포기하였고, ⑦ 헌법개정절차를 이원화하여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로써 확정하도록 하였으며,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가 제안한 헌법개정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확정하도록 하였다.Ⅴ. 제 5 공화국(제 8 차 개헌)1. 10·26 사태와 제 5 공화국 - 짧았던 서울의 봄과 또 다른 독재이러한 노골화된 장기집권과 독재의 움직임은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비조직화된 비판세력들"이 일선에 나서서 저항운동을 하게끔 만들었다. 교육기회의 확대를 통하여 한국의 지식인 수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국민의 교육수준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에 이미 일방적인 정부의 홍보만으로 국민의 눈을 가리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이런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던 지식인들의 저항운동은 과거와는 달리 다수 국민들의 몰이해 대신에 이해와 존중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학생들의 시위를 중심으로 한 직접적인 정권퇴진요구도 점차 높아져 갔다. 특히 이 당시에는 한국전쟁이 종전된 지 20여 년이 경과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의 적극성이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정부가 제시하는 안보논리를 완전한 허구로 간주하였으며 무조건적이고 급속한, 그리고 완전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을 요구하였다.이러한 저항운동은 1979년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