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위기의 원인Ⅰ. 서 론1997년 한국에서 발생한 경제 위기는 경기 침체, 경상 수지 적자 등 실물 경제의 악화뿐만 아니라 동남아 외환 위기, 국제 금융 자본의 신흥 시장 이탈 등 대외적 환경 요인, 그리고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부족과 국민의 거품 소비 등 총체적인 요인의 결정체였다. 그리고 필자의 생각에는 더 나아가서 한국의 경제 발전 전략 측면과 정치, 역사, 문화적 측면 등에 경제 위기를 초래하게 된 근본적인 요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본론에서는 이와 같은 경제 위기의 원인을 교재에 기초하고 또 필자의 생각이나 참고문헌 등을 참고하여 현상적요인, 구조적요인 별로 나누어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 론1. 현상적인 원인경제 위기의 현상적인 원인은 대내적인 원인과 정책 당국이 통제할 수 없는 대외적인 원인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1) 대내적인 원인한국의 외환 위기의 발생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지적되고 있으나 대내적인 원인은 교재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① 국내 기초 경제 여건의 악화한국의 경우 외환 위기가 발생하기 이전에 경제 성장률이 둔화하였고 대기업의 부도율이 증가하였으며) 교역 조건은 악화되었다. 또한 세계 반도체 시장의 가격 폭락으로 인한 경상 수지 적자폭의 확대, 금융 기관의 부실 채권 누증 등으로 인한 기초 경제 여건 악화 등의 조짐이 나타났다. 적절한 금융 감독 기능이 없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부도와 금융 기관의 부실화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원리금 상환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켜 경쟁적으로 투자 자본을 회수하게 만들었다.② 대기업의 연쇄 도산과 금융 기관 부실한국 정부는 금융 기관의 부채에 대해 암묵적으로 보증을 해 주었고, 이로 인해 국내의 투자가들은 부실 금융 기관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자금을 공급하게 되었다. 국내 금융 기관은 책임 경영이 정착되지 못하여 엄격한 투자 심사를 간과한 채 대출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부실 대출은 급증하였다. 또한 대기업도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과 정치 권력의본 바와 같이 종금사가 단기로 조달한 외채를 중장기로 운용함으로써 만기 불일치를 초래하였고, 이에 따라 신용도 하락과 동시에 급증하기 시작한 단기 외채의 상환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금융 기관들이 단기로 차입한 외자를 국내 기업의 장기 설비 투자 및 동남아 개도국의 장기 고수익 채권에 투자함으로써 만기 불일치가 심각해졌다. 정부는 이에 금융 기관의 외자 조달 및 운용상의 정보를 신속히 파악하여 만기가 지나치게 불일치하여 유동성 위기가 초래하지 않도록 감독하지 못했다. 또한 금융 기관의 경영 성과에 대한 불투명한 회계 및 공시 제도로 경영 부실을 조기에 시정할 수 없었던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의 금융 기관은 대손 충당금 및 유가 증권 평가손과 관련된 금융 기관의 회계 처리, 공시 제도, 부실 채권의 분류 기준도 불투명하여 국내 은행의 건전성이 과대평가 되었고, 채무 상환 능력에 대한 왜곡이 초래되어 부실 여신이 추가적으로 누적되었다.④ 지나치게 높은 단기 외채, 환율 정책 실패다음으로 한국은 외채 수준, 특히 단기 외채 수준이 매우 높았고, 환율이 고평가 되어 있어서 국제 환 투기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해외 기관 투자가들은 한국의 주식 시장에서 포트폴리오 투자 자금을 급격히 회수해 감으로써 외환 위기를 촉발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한편 한국에서는 단기 자본 유입이 1994년이래 빠르게 진행되어 경상 수지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 유입에 따른 자본 수지 흑자 원화 가치가 고평가 됨 으로써 국내 기업의 경쟁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1990년대 초부터 한국의 외환 당국은 원화 강세 정책을 추구해 왔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내 물가 안정을 달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화 약세에 따른 단순한 가격 경쟁력을 제거함으로써 고부가가치 상품의 수출 비중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경상 수지가 점차 악화되어 원화의 평가 절하가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원화는 고평가 되었다. 또한 1990년대 초부터 취해진위기는 국제 투자가들 사이에 아시아 지역 전체에 대한 투자 비중을 감소시켰다. 한국도 이에 영향을 받아 국제 투자가들의 투자와 은행 대출이 감소하게 되었는데 에서 보듯이 통화 위기 전인 1997년 9월의 포트폴리오 비율이 0.3%로 5월의 0.6%에 비해 크게 감소하였다국 가연 도홍 콩싱가포르대 만인도네시아한 국태 국1997년 5월 말3.21.31.20.70.60.41997년 9월 말1.70.50.70.30.30.2 아시아의 주식 보유 비율 : MSCI 신흥 시장 지수(단위:%)자료 : Morgan stanley capital international또한, 국제 신용 평가 기관들이 단기간 내에 한국에 대한 신용 등급을 과도하게 하락시킴으로써 국제 자본의 한국으로부터의 이탈은 가속화되었다. 1997년 12월 11일 S&P사는 한국의 신용 등급을 3단계 내렸고, Moody's는 2단계, Fitch IBCA는 4단계를 내렸다. 또한 12월 21일 Moody's가 한국의 국가 신용 등급을 투자 부적격 등급으로 2단계 하락시켰고, 12월23일에는 S&P와 Fitch IBCA도 각각 무려 4단계, 6단계씩 하락시켰다.2. 근본적ㆍ구조적 원인세계 경제 규모가 11위인 한국에 경제 위기가 초래된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을 파악하려면 한국 경제가 1960년대 이후 추구해 온 경제 발전 모형 측면과 정치적ㆍ역사적인 측면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1) 경제 발전 전략 측면한국 경제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 정부가 그 동안 경제 성장 전략으로 일본의 발전 전략인 정부 주도형의 수출 지향형 공업화 전략을 채택한 것을 들 수 있다.)한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일본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여 섬유, 조선, 철강 등에 투자하였고 그 후 화학과 반도체 산업에 투자하여 상당한 경제 발전의 성과를 달성하였으나, 이들 산업에 시장 금리보다 낮은 금리의 은행 대출금과 정부 보조금이 사용됨으로써 은행에게 마이너스의 수익을 발생시켜 은행의 부실화를 초래하게 되 있다면, 즉 생산 요소의 생산성이 증가한다면 당연히 경제는 크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김광석, 홍성덕(1997)의 연구에 따르면, 1985~1995년 기간에 한국 경제의 실질 국민 소득 성장률은 평균 8.81%인데, 이 가운데 총요소 투입의 성장 기여도는 54%이고, 총요소 생산성의 기여도는 46%로 분석하였다. 실질 국민 소득의 성장에 54%를 기여한 총요소 투입 가운데 노동 투입의 증가는 실질 국민 소득의 증가에 2.77% 기여했는데 1.99% 기여한 자본 투입의 기여도보다 훨씬 높았다.구 분일인당 소득증가율일인당 실물자본일인당 교육총요소 생산성한 국싱가포르대 만미 국6.06.05.60.93.32.32.30.30.60.60.5-0.02.13.12.80.7 실질 국민 소득 성장에 대한 요인별 성장률 기여(단위:%)자료 : 김광석, 홍성덕(1997), p123구 분1963~721972~791979~851985~95국민 소득총요소 투입자 본토 지총요소 생산성개선된 자원 배분규모의 경제오염 감소불규칙적 요인기술 진보 및 기타8.254.200.690.004.050.171.150.001.541.198.314.831.430.003.480.881.470.00-0.041.175.293.781.360.001.510.450.91-0.02-1.341.518.814.761.990.004.050.411.85-0.050.071.77 일인당 실질 국민 소득 성장에 대한 요인별 성장 기여도(단위:%)자료 : Collins and Bosworth(1996) pp157~159다음으로 요소 단위당 산출량의 결정 요인들 가운데 규모의 경제가 1.85%로 경제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고, 기술 진보 및 기타는 1.77%성장에 깅하였으나 가동률 변동이나 오염 감소 등은 성장에 미미하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 경제의 생산성 증가가 기술 진보보다는 양적인 확대에 따른 규모의 경제 효과에 크게 의존하여 왔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Collins and Bosworth(19한 경제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것은 곧 안보에 위험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미국이나 일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1989년 이전에는 서울은 언제든 워싱턴과 도쿄 양측이 개입해서 도와 주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초의 경제 위기 때를 가장 좋은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은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기구를 통하여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다자주의 즉 다자간 공동 정책에 의존하는 것을 훨씬 선호하고 있다. 이것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정치 경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한국은 반세기의 식민지와 6ㆍ25 전쟁을 통해 완전한 빈곤을 경험하였고 중국과 소련, 일본과 미국 등 열강들 사이의 냉전 대립의 중앙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이러한 지정학적인 위치를 경제적으로 활용하면서 1950년대에 엄청난 양의 해외 원조를 얻을 수 있었고 그후에도 해외에서 상당한 액수의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한국이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어려운 경제 여건을 지탱할 수 있었던 요체는 금융 정책이었다. 정부는 은행을 통하여 국내 자본은 물론 해외 자본 대부분을 저금리로 수출 산업과 수출 기업에 할당하였다. 한국에서 중화학 공업 발전 전략은 안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화학 공업의 발전은 안보를 증진시키기 때문에 수년 동안 미국이 만족해하는 전략이었고 한국을 수출 지향 발전 모델로 만들었던 것이다.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현대와 삼성 같은 거대한 재벌이 탄생되었으며 이들 기업들은 엄청난 양의 정치 자금 상납을 통해 집권당의 후견자가 되어 왔다. 재벌에게 있어서 이것이야말로 과도한 부채나 부실 투자 등으로 인한 기업 부도를 막는 최선의 보험 수단이었다. 기업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기업 부도시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망할 수 없다는 대마불사의 사고는 기업 부도를 막는 이차적인 보험 수단이었다.대기업들은 항상 엄청난 차입에 의존했고 따라서 부채-자기 자본 비율이 매우 높았으며 반면에 수익률은 중소 기업보다 낮았기 때문다.
서론현제 우리 사회에서는 일제 식민지 시기를 바라보는 상반된 두 시각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도 자본주의가 이식되었고 이로 인해 지금의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의 자본주의는 일제에 의해 이식된 것이 아니라 조선말부터 장기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내재적 발전론이다. 이 문제를 단순화 객관화 시켜보기 위해 다소 억지스러운 예를 하나 들어볼까 한다. 어느 학생이일제 식민지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한 현대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반된 두 주장을 해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필자는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내용과 문제점을 살펴보고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역사인식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식민지 근대화론의 등장박정희 정부 이후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한 한국은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냄으로써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자본주의 성장은 놀라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제 3세계 국가들은 한국을 학습모델로 삼아 국가 발전을 모색하였으며 선진국을 또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 맞춰 일부 연구자들은 한국이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관련된 연구는 주로 1960년대 이후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와 좀 더 과거로 눈길을 돌려 조선 후기와 일제 식민지 지배시기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후자가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칭되는 것으로 한국 사회는 식민지 지배를 통해 비로소 자본제 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식민지 근대화론이 학계 차원에서 관심을 모은 것은 경도대학의 중촌철 교수 활약이 크다. 그는 한국자본주의에 대해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일이 현대의 세계사 인식에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생각하고, 한국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시점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후 자신의 논문을 통해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4개국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달성한 급으로써 그 나름데로 발전하였다고 강조한다. 그는 한국의 경제 발전이 자생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독립운동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그리고 1960년대 이후의 한국의 경제발전이 세계자본주의체계 속에서 이루어졌고 그 배경이 되는 일제 강점기의 공업화도 일본 경제권에 깊숙이 포섭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한다.식민지 근대론 내용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측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식민지 공업화’ 분야이다. 식민지 시기의 조선의 국내 총생산량은 1912~27년간에는 연평균5.32% 1927~37년간에는 4.15%씩 성장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세계자본주의 제국의 성장률 보다는 훨씬 높다. 또 1920년대 내내 2~3억원대의 공업 생산액이 1939년에는 20억운을 넘어섰고, 1920년대 초 1천 개를 넘기 시작한 회사수는 1929년 2449개 1939년 5628개로 늘었으며, 시장거래액은 1930년에 1억7천만 원에 불과하던 것이 1940년대에는 5억9천만원에 이르렀다. 인력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도 1933년의 노동자수가 21만 4천명에서 2만8천명으로 증가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에 있던 일본인 기술자의 2배에 달한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직후부터 식민지화 기초공사로서 교통통신금융 등에서 사회 간전자본을 확충하였을 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조세징수기구를 마련하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등기제도의 도입과 토지의 면적의 정확한 실측을 이루는 등의 제도적 정비를 이루었다. 또한 인프라스트럭처의 건설이 충실하여 화물수송량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45%의 곡물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종래 군수공업만 발달하였다고 비판하던 공업화도 사실은 생산력 확충 부문이 주 내용이었고, 일본과의 관계에서 분업체제와 자본 및 기술 공급을 통해 일본 경제권에 깊숙이 포섭되었으며, 그 결과 무역 및 공업생산자수가 급격히 증가되었다. 이런 개발로 비록 식민자본주의이긴 하지만 조선의 경제구조를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변화시켰다. 정리하면 한국사회는 식민지 지배를 통다. 그러나 그 시기에 유출된 자금은 최소한 303억 엔 이상이며, 이는 같은 기간 국내총생산액인 550억엔의 55%에 달한다. 또한 일제는 식민지 기간 동안 한국을 식량공업원료 공급지로 재편성하여 일본경제의 발전과 침략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한국의 각종 물자를 수탈해갔다. 특히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전쟁을 확대시키면서 한국을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공급지로 만들었다. 일제하의 인력수탈도 빠질 수 없다. 일제는 석탄공산, 금속광산, 군수공장 인력 등 총 150만 명응 일본, 사할린 등지에 강제동원 시켰다. 그에 따를 임금 수탈액은 약13억엔으로 추산된다. 전쟁지로 직접 동원된 조선인은 자료상으로 약60만 명이 확인된다. 그 중 사망자 소는 약 2만 명 이상, 부상자수는 약 8만 4천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이를 보면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주장하는 일본의 시혜론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비약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알수 있다. 이에 대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제 시대의 경제상은 수탈이란 용어만으로 설명 될 수 없으며 분명히 발전, 특히 공업 부문에서는 발전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공업이 발전했음을 인정하더라도 이는 현재와 같은 한국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해방 후 일분이 남기고 간 중공업 부분과 원자재 및 발전 부분은 거의 북한에 남겨졌고 이마저도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었다. 일제시대에 발전 추세에 있었던 경공업분분의 전시경제체제하에서 상당부분 파괴되었으므로, 해방 이후 경공업 발전은 거의 전적으로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의 대기업 가운데 90%가 해방 후에 비로서 체계적인 기업 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 증거가 된다. 농업 부분에서의 니농과 식민지 공업화 정책으로 이른바 자야 임노동자 층이 확대 재생산 되었다고 하나 이점 또한 동의 할 수 없다. 일제하에서의 노동경험이 과연 고급기술인지의 여부도 확실하지 않으며 주종환 교수가 언급했듯이 식민지 시대의 전쟁을 수행수가 밝힌 자료에의하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서기 1916년에는 자작농 비율이 20.1% 자소작농 비율이 40.6% 소작농이 36.8 지주가 2.5%였다. 이로 보아 소작농 비율이 36.8%인데 비해 자작농과 자소작농을 합친 비율이 60.7%나 되어 농촌중간 자소작농이26%, 소작농이54.2% 지주가 3.7%로 변했다. 자작농과 자소작농을 합친 비율이 60.7%에서 42.7%로 감소한데 비해 소작농이 36.8%에서 54.2%로 크게 증가하고, 지주도 2.5%에서 3.7%로 크게 증가한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숫자적인 성장을 논거로 삼아 식민지 시대의 경제가 성장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근대화되었다는 것을 경제적인 부분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설사 수치적 근거로 식민통치를 정당화 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숫자만으로 설명 불가능한 것이 너무나 많다. 식민지 시기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울분과 정식적 피해는 수치화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수치와 통계들도 정확한 것이라고 말할수 없다. 거의 대부분이 일본 측이 소유하고 있는 자료에 근거한것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 내 보수주의자에 의해 이용될 위험성도 가지고 있다. 군국주의자들의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은 일본사회의 보수화를 촉진하는 구실을 하고 있으며,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기 까지 한다. 즉 민족사를 왜곡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내재적 발전론의 내용내재적 발전론은 개항과 식민지시기를 거치며 외래로부터 유입된 자본에 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자주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시각이다. 그 근거로 조선 후기의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른 부농의 성장, 그로 인해 발생한 농민층의 분하, 도시 상공업의 발달, 도시 임노동자의 층의 등장, 사상의 발달 등을 든다. 우선 중세사회의 농업 분야에서 이룩된 성과를 알아보면 농업분야의 발전에 기초가 된 것은 이앙법의 전면적 보급이라 할 수 있다. 이앙법에 의해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점차 공장제수공업으로의 전환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자가 소비의 목적을 벗어나 상품생산의 성격을 띄고 발전하면서 상업자본과 결합하게 되었고 그 경영방식 또한 임노동에 기초하게 되었다. 관의 철저한 통제 하에 있던 광업도 수공업과 마찬가지로 통제가 불가능해지자 운영방식이 크게 바뀌었고, 동시에 민간광업에서도 커다란 진전이 이루어졌다. 이시기에는 농토에서 떨어져 나온 유리민들이 광산에서 임노동자로 고용되면서 광산주들은 경영규모를 확대하고 있었다. 이때 자본주들은 물주라고 불렀는데, 그와는 별도로 경영을 맡고 있던 덕대가 노동과정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광업 분야에서도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대ㅏ. 이처럼 농업 수공업 광업 등의 분야에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시장의 발달과 화폐의 전국적 유통을 토대로 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이 주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에 의한 농업과 수공업의 분리, 농업 내부에서의 상품생산의 출현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금속 화폐은 전국적 유통은 대동법의 실시와 같은 부세제도의 변화 등과 관련하여 조세 전반의 금납화를 가능하게 하였고 이는 기존 현물경제체제의 해체에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상업자본화폐자본의 축적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인 상권이 형성되면서 사상층이 등장하여 유통분야에 있어 질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들 사상층은 기존의 유통구조를 전면적으로 재편해갔으며, 축적된 상업자본을 통해 기존의 중세적 산업구조를 크게 바꾸어 갔던 것이다.내재적 발전론의 비판내재적 발전론은 수탈만을 강조하는 수탈론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에 그 문제점이 있다.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식민지기와 해방 후의 연속적인 시간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문제를 대부분 식민지 지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또한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제기하는 합리적인 문제제기조차 된다.
한국 농업의 위기현상과 새로운 농정의 방향1. 문제의 인식과 출발오늘날 한국농업의 현실은 농업위기, 산업으로서의 농업의 총체적 붕괴의 위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외국 농산물 수입의 급증에 따른 농업경영의 불안정과 파탄이 심화되는 속에서 생산의 주체인 농업노동력의 격감과 노령화, 농경지의 농외전용에 따른 감소, 휴경지의 증가와 경지 이용률의 저하 등으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정체하고 식량자급률이 급격히 저하하였으며, 농공간의 불균등 발전과 도농간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격차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 농업은 산업으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으로 되고 있으며, 농민은 농업활동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농촌은 이제 삶의 공간으로서 매력을 상실하고 있다.더구나 농민들을 비롯한 온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4년에 정부는 UR 농산물 협정에 서명했고, 그 동안 수입개방으로부터 지키려고 했던 우리 농업의 주종 생산물인 쌀을 비롯해 보리, 감자, 고추, 마늘 등 마지막 남아 있던 주요 농산물 전부가 이제 수입개방의 일정에 오르게 되었다. UR 농산물 협정의 타결은 지금이라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없는 한, 한국의 농업위기를 한층 심화시키게 될 것이다.한국농업의 위기가 이미 심화되고 있던 지난 1980년대에도 정부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이에 대한 농정대안을 제시해 온 바 있다. 그리고 최근 UR 농산물협상의 타결을 전후해서는 한국농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산 정책 대안들이 정부, 농협, 농민단체 기타 여러 기관과 개인들에 의해 다양하게 제시된 바 있다. 특히 UR 농산물협상에 대응하는 국민적인 공동전선이 전개되는 가운데 우리 농업의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농업을 살려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부는 오히려 UR 협정에 앞장섰고 농산물 수입개방의 당위성을 주장했다.우리 농업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그리고 UR/WTO 출범 이후 더욱 어려운 처 내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농기계 도입에 따른 높은 고정비용 부담과 가족 노동력의 실업문제가 농업경영을 압박하는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농업기계화의 진전이 생산력 위기를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영세농경제의 위기를 한층 증폭시키는 계기로 되고 있는 것이다. 즉 노동력 유출에 의하여 파괴되어 가는 농업생산력을 유지·회복하기 위해 도입된 새로운 생산제력과 영세농경제와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아가 국민경제의 불균형 발전과 부의 편중현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2식량자급률 하락과 농산물 수입급증이러한 농업생산력의 위기와 왜곡된 발전의 결과는 국내농업의 식량자급력의 현저한 저하로 귀결되고 있다. 이것은 국민에게 값싸고 안전한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한다는 기초산업으로써 농업의 역할이 부정·상실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우리 나라의 양곡자급률은 1975년 75%였던 것이 매년 감소하여 1992년에는 35.2%로 감소하게 되었다. 밀과 옥수수는 거의 전량을 수입 해다 먹으며 콩의 경우에도 1978년의 자급률이 59.8%였던 것이 1992년에는 12.2%로 저하했다. 양곡 도입량은 1992년 1299만 톤으로서 매년 거의 20억 달러 어치에 달한다. 농산물수입의 대종을 차지하는 곡물수입은 곡물생산을 위축시키는 한편 농업생산의 대체성에 따라 상업적 농산물의 과잉생산을 초래한다. 상업적 농산물 생산이 늘어나자 이들 작물의 과잉공급으로 가격이 폭락되는 사태가 빈발했다.국내농업의 식량자급력이 급격히 저하한 반면 최근에는 외국 농산물의 수입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이러한 외국의 값싼 농산물의 대량 수입의 영향으로 다시 국내 농업생산이 더욱 위축되는 악순환이 심화되고 있다. 농산물 수입은 특히 1980년대 후반 이후 급증하여 1985년 17.9억 불로 증대하였다.국내 식량자급력의 급격한 저하와 식량수입의 급증은 세계 식량시장구조가 지닌 독과점적 성격과 불안정성에 비추어 식량안보 문제를 심각히 제기하는 것인 동시에 수입식품의 급증에 따라 국민건강을 위협 가족 노동력의 적당한 취업기회마저 제한된 채 부채에 의존하거나 과소소비, 이전소득 등에 지탱하지 않으면 농가생활의 유지조차 곤란하게 되고 있다. 또 노령농가의 증가, 가족 구성원의 부분이농 등에 의한 농가의 해체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또 겸업농의 비율도 1980년 24%에서 1992년에는 37.5%로 상승했고, 겸업농가 중 2종 겸업농의 비중이 1980년 42.5%에서 1992년에 59.0%로 상승하였다. 겸업화의 내용은 대부분 피용겸업이다. 농가소득에 대한 피용겸업수입의 비율은 1982년 11.7%에서 91년 23.6%로 크게 높아졌다. 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농가의 경제적 위치와 경제력은 계속 낙후되고 있다.5 자작농적 토지소유의 붕괴와 농지문제의 혼란오늘날 농업위기의 또 하나의 현상은 그 동안 영세농경제를 지탱해온 농지제도인 자작농적 토지소유가 붕괴되고 농지문제가 심화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농지문제는 농지의 농외전용이 급증하여 농지면적이 격감하고, 농지가격이 농업수익지가를 훨씬 초과하여 상승하여 농지에 대한 자산적 소유경향이 심화되고 있으며, 비농민에 의한 농지소유가 급증하여 농지에 대한 농민적 소유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으며 농지임대차가 급격히 증가하고, 농업기계화라는 새로운 농업생산력의 전개와 분산적 영세소유제가 조화되지 않고, 농지의 이용이 조방화·유휴화되는 등 농지의 소유와 이용에서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한국농업에서 토지문제의 핵심은 농지개혁이래 한국농업의 기본적인 토지소유 형태였던 자작농적 토지소유가 영세농경제의 내적 제변화와 한국자본주의의 자작농적 영세농경제에 대한 규정력에 의해, 즉 자작농적 토지소유를 둘러싼 내외의 제모순에 의해 결정적으로 해체되고 있는 점이다.1970년대 전반에 일시 후퇴하였던 농지임대차 관계는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빠른 속도로 확대되기 시작하여 1985년에는 임차지율이 30.5%, 임차농가율이 64.7%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농지임대차 관계는 계속 확대되어 1990년에는 임차지 면적이 788천적위기의 제모순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국내농업에 대한 지배를 한층 강화하게 되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농산물 수입의 확대, 양곡을 비롯한 가격지지 정책의 후퇴, 농외소득 증대 등으로 표현된 농경전환론 으로 포장된 저임금·저농산물 가격체제의 지속·강화책으로 나타났다.국내농업에 대한 자본의 지배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한층 가중되었다. 외국농산물 수입에 기초한 저농산물 가격정책, 농약·비닐 등 농업용 생산자재의 사용증가와 독점적 고가격공급, 농업금융에 의한 이자수탈, 농촌공업화 정책에 의한 농업노동력과 토지의 지배 등이 그 주요 내용들이다.1980년대에 들어와 물가안정을 위해 쌀수매가가 동결되거나 형식적 인상에 그치고 농가구입 가격의 상승에도 못 미침으로서 농가경제는 한층 악화되었다. 또 곡물 생산의 수익성이 크게 떨어지자 이에 대한 대체작물로 밭에는 고추와 채소, 겨울 논에는 마늘·양파가 대량으로 재배되어 가격폭락 사태가 발생했다. 이와 같은 저농산물 가격체제의 전면적인 강화에 의한 농업수익의 저하가 바로 이시기 농가부채 누증의 주요원인이기도 하였다. 또 농업자재시장에 대한 독점자본의 재배 또한 농가경제 피해의 주요한 원인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 노동력 부족에 따른 농기계 보급의 확대, 농업용 자재와 시설의 증투 등에 따라 농업경영비의 지출이 크게 늘어났다.이 시기 저농산물 가격체제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고 농업위기를 결정적으로 심화시킨 것은 무엇보다 외국농산물 수입이다. 그 동안 자본축적과정에선 농업생산력 발전의 상대적 정체와 농공간의 심각한 불균등 발전은 국내농산물 가격이 등귀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하였고, 이것은 국내 자본에게는 자본축적에서 중대한 부담이자 애로로 되었고, 이것이 1980년대 이후 농산물 수입개방을 주요 내용으로 개방농정의 본격화하게 된 국내적 요인이었다.이른바 개방농정으로 1980년대에 외국농산물 수입이 본격화되지만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면서 1988년 이후에는 이것이 전면화 되었다. 1989년 4월 8일에는 향후 3년간에 243개 품미치는 모든 형태의 농업지원 및 보호조치의 10년 내 완전철폐, 모든 비관세 장벽의 관세화를 요구함과 동시에 단기조치 불필요 를 주장하였다. 캐나다, 아르헨티나, 태국 등 13개국 농산물 수출국은 모든 보조금 및 정부지원 조치의 사용금지, 단기적으로 수출 및 생산보조금 동결 등의 보완조처 허용을 주장했다. EC는 농산물무역에 영향을 미치는 지원조치의 점진적 감축, 주요품목에 대한 생산 조절책 도입 및 수출보조금의 동결 등 단기조치를 주장했다. 주요 수입국인 일본과 한국은 보조금을 수출보조금과 국내보조금으로 구분하여 수출보조금의 현수준 동결 및 합의기간 내 철폐를 주장하지만 국내보조금 중 무역 왜곡을 초래하지 않는 부분은 지불을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을 고려치 않고 농업부문에도 시장 메커니즘을 적용해야한다고 주장한데 반해 EC, 일본, 한국은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을 특히 강조하였다.2) UR/WTO 이후 농업의 붕괴와 경제적 손실UR은 한편으로 수입개방, 즉 관세 인하와 현행시장 접근 및 최소시장 접근에 의한 값싼 외국 농산물의 대량유입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 농업보조금의 감축, 즉 농산물 가격지기·안정 정책의 후퇴를 통해서 일차적으로는 국내 농산물가격의 하락에 박차를 가하고, 그 결과 농업경영의 악화와 농업소득의 저위·불안정화, 농지·노동력·자본 등 농업자원의 유휴화 및 식량자급률의 저하, 이농의 급증과 농촌의 공동화 등을 가속화시킬 전망이다.수입이 개방됨에 따라 국내 농산물각격은 개방의 영향이 적은 쌀과 몇 가지 품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품목에 있어서 대폭 가격이 하락할 전망이다. 특히 개방 폭이 크거나 관세율의 인하 폭이 큰 곡물, 쇠고기, 돼지고기, 감귤 등은 피해가 크게 우려된다. 게다가 정부의 농업대책 미비로 인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국내 농산물생산이 축소되거나, 현행 또는 시장접근 물량과는 무관하게 정부의 물가안정 차원에서의 농산물수입 증대나 밀수 등 수입업자에 의한 불요불급한 농산물의 수입이 확대될 경우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0.애초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까페에 one question 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 속의 고민과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는 학생운동의 재정의(학생들이 하는 진보운동)에 의해 부문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순이나 문제점이라는 것이 비단 자본-노동 이라는 특정한 형태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부문운동을 통해서도 결국은 자본주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특정 체제의 결함을 개선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성문제 또한 우리 사회의 억압구조가 여실히 드러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고, 그 일환으로 우선 기본적으로 여성억압적인 지금 사회를 과학적으로, 그리고 맑스주의적으로 분석해놓은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내가 책을 손에 쥐게 된 이유이다.그러나 이 책은 내가 알아보고자 했던, 여성억압적인 사회구조가 탄생한 원인을 분석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맥락에서 국가가 왜 탄생했고, 어떠한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아놓았다. 물론 그 국가의 성격은 자본가 계급의 위원회 라는, 우리가 빈번히 들어왔던 말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국가에 대한 분석이 지금의 현실에 있어서도 어느정도 일치하는 유의미한 것이기에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는 부분에서 함께 다루어보려 한다.1.우리들의 머릿속에는 일부일처제와 가부장제가 사회적으로 당연한 현상이고 가족이 모여 사회가 이루어지며, 그 과정 안에서 국가가 형성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예전에는 모계사회였어. 라는 말을 얼핏 들을 수는 있지만, 단지 막연한 옛날의 일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이 또한 대부분이다. 하지만 엥겔스는 주로 모건의 연구결과에 기대어{) 제목 밑에는 루이스H.모건의 연구와 관련하여 라는 문구가 달려있다.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러한 통념을 깨버린다. 야만-미개-문명 이라는 세 단계의 분석틀과 이로쿼이 족, 그리스, 로마, 독일의 관찰사례를 통해 기존관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려버리는 것이다. 이 부분을 잘 요약해놓은 다른 책의 일부분을 다소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겠다.엥겔스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물질 생산과 재생산, 양자에서 찾았다. 그는 재생산과 관련된 가족 제도의 발전이 생산력 발전과 병행하여 이루어짐을 포착하면서, 여성 억압을 좀더 사회 구조적으 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엥겔스는 일부 일처제를 사유 재산 및 계급의 발생과 함께 생겨난 것, 즉 수렵·채집 사회에서 목축 사회로 이행하면서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한 남성이 자신의 확실한 상속 자에게 재산을 넘겨주기 위한 방편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일부 일처제는 자연적인 것 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최초의 가족 제도 였다.{) 정현백, 한국 여성의 현실과 페미니즘 이론 , 박정호 엮음,「지식의 세계1」, 동녘(1998)태초의 무규율 성교의 원시상태 에서는 출산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귀속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여성이 우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또한 각자의 신체에 맞는 역할분담으로 인해 가사도구는 여성이 소유하고, 생산수단은 남성이 갖게 되어 소유 라는 측면에서도(기본적으로 그 재산들은 씨족에 귀속되어 궁극적으로는 공동소유이다.) 평등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목축사회가 되면서, 동물들이 새끼치고 어쩌구 해서 불어난 재산이, 생산수단(동물도 생산수단이다!)을 소유한 남성에게 귀속되면서 경제력의 불균형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 결과는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전의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 씨족 이 점점 약해지고, 오늘날 의미에서의 가족 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성은 예전에는 공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존중받았지만, 그 뒤로는 단지 사적인 근로로만 치부되어 사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된 가사노동을 하는, 책 속의 표현에 따르자면 우두머리 하녀 로 여겨지기에 이른다.이처럼 여성이 자신의 사회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현실에 대해서, 소위 사회주의자 들이 내세우는 대안에 많은 부분 찬성한다. 부부가 법률상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을 때……부부의 진정한 사회적 평등을 수립할 필요성과 방법도 또렷이 드러날 것이다. 여성해방의 첫 번째 선결요건은 여성 전체가 공적 산업에 복귀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사회의 경제 단위로서의 개별 가족의 성질이 제거되어야 한다 {) 김세균 감수,「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6」, 박종철출판사, p.86는 원론적인 이야기나 중세 수도원과 같은 공동 편의시설들을 확보하는 건축상의 개혁을 통해 사적인 노동으로 치부되는 가사노동을 사회화시켜야 한다 고 말하는 러셀의 비교적 구체적인 이야기들에, 설령 그것이 이상적일 뿐 아니라, 많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큰 공감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물론 이같은 물적기반의 변화와 여성의 공적산업의 복귀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완전한 성평등 세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인간을 환경에 적응하는 수동적인 존재라고 보았을 때, 이처럼 사회적인 기반을 바꾸는 것이 궁극적인 변화의 단초를 마련해줄 수는 있겠지만, 인간이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 능동적인 존재라는 측면에 눈을 돌려볼 때, 지금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관념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의무 역시 병행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자본가가 단지 그 개인의 선함과 악함과는 별개로 존재 자체만으로 어쩔 수 없이 악(惡) 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 사회에서의 남성은 단지 존재 자체로 상대항인 여성에게 있어 마찬가지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엥겔스의 글이 지금의 여성억압적인 사회체제가 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현상이라는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그 어쩔 수 없음 을 역설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말 그대로 바보 다. 그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성된 현실까지 수긍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안점을 둘 필요가 있다. 과학적인 분석은 현상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 현상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문제점을 잘라낼 수 있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