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代 士大夫論Ⅰ. 머리말근대 이전의 중국은 강력한 군주를 정점에 둔 국가구조를 대체적으로 유지하여 왔고, 이러한 집권적 체제에 참여하는 관료가 지배역할의 분담과 특권의 향유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지배층을 구성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관료를 비롯한 지배층은 기본적으로 토지라는 당시의 주된 생산수단을 소유한 이들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지식인과 교양인으로 문화의 담당자로서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대한 책임자로서 자부할 수 있었다.이와 같은 중국 특유의 지배층을 범주화하고자 할 때, 선진 문헌에서부터 주로 관료를 가리키면서도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가진 지식인·교양인 역시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 사대부(士大夫)란 말이 유용한 개념으로 생각되어 왔다.그런데 이러한 지식과 교양을 중시하고, 이에 의거하여 관료를 선발한다는 이상이 보다 철저한 제도적 보상을 받게 되는 데에는 과거제도의 정착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과거는 관료의 자격요건을 지식과 교양에서 찾았고 이후 국가권력의 후원 아래에서 지식과 교양을 갖춘 많은 관료와 또 훨씬 더 많은 관료 지원자들이 생겨나 당시 지배층의 중추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지배층을 특별히 사대부 라고 부름으로써 그 이전의 경우와 구분하려는 시도가 일찍부터 있었다. 이 같은 사대부는 앞서 전술한 통시대적(通時代的)인 광의의 사대부와 분명하게 다른 개념으로 과거제도의 성격과 직접적으로 맞물려있는 협의의 사대부를 의미한다.이처럼 개념상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협의의 사대부 개념을 설정하는 까닭은 이른바 당송변혁기(唐宋變革期)를 거친 뒤 나타나는 새로운 시대의 지배층을 분명히 하고자 함이니, 사대부 라는 지배층이 송(宋) 이후의 역사상(歷史象)을 포착하는 매개념(媒槪念)으로 설정된 셈이다. 지금은 송대(宋代) 사대부(士大夫) 란 표현이 상당히 일반화되었다.이제 여기에서는 송대 사대부의 존재형태를 통하여 이 시기의 지배층의 성격에 접근하고자 하며, 궁극적으로는 당송변혁기를 거친 뒤 나타나는 새로운 지배층의 실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따라서를 보일 뿐이다. 그러나 관료 선발에서 학교를 중시하는 경향이 송대 학교제도의 전국적인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 결과 지식인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다.그런데 송대의 과거제도가 기친 사회적 영향을 생각한다면, 이 시기에 전시는 물로노 해시에 이르기까지 봉미법(封彌法)과 등록법(謄錄法)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을 또한 주목하여야 마땅하다. 봉미법과 등록법은 응시자를 익명화시키는 제도인데, 이를 통해 과거의 합격 여부에 응시자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과거제도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은 별두시(別頭試)라는 특별시험을 만든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따라서 송대에는 신분·지위에 관계없이 과거를 통하여 관료로 될 수 있는 길이 폭넓게 열려져 있었고, 사회적으로 과거에 의한 계층이동의 바람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고 보아도 좋겠다.이러한 지식인의 증가는 또한 학교의 제도적인 정비와 관련이 있다. 중앙의 최고 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일반민에게까지 개방되었으며, 지방에도 많은 관학이 세워졌다. 특히 지방의 주학(州學), 현학(縣學)과 같은 지방의 관학은 지식인의 존재를 지방으로까지 넓혔으리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그 결과 이전에는 지식과 교양을 갖추기 어려웠던 일반인들 특히 지방의 일반민들에게까지 그것이 보급되었다.이처럼 송대에는 과거응시자를 비롯하여 학교의 재학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식인의 확산이 있었던 셈인데, 과거의 제도적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것을 통하여 관료가 될 수 있는 길은 매우 좁았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제도 자체만으로써 지식인들의 확산을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려움이 있다.송대에는 급격히 늘어난 과거 지향의 지식인들은 해시단계에서부터 높은 경쟁률을 통과하여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다수의 탈락자들이 크고 작은 소요와 저항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합격자의 수를 응시자의 증가에 맞추어 늘리지 못하고 있었던 권력이 그만큼 불 이제 그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물론 지식과 교양이라는 사대부의 주체적 능력을 중시하여 송대의 사대부가 과거에 의하여 관료로 되는 것이 기대되는 지식인들을 총칭한다고 보는 견해나 국가권력의 포섭을 강조하여 송대 사대부란 과거의 마지막 관문까지 통과하여 관료로 된 이들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두 가지 측면에 대한 고려가 함께 갖춰져야만 비로소 송대 특유의 사대부가 개념화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본고는 과거를 지향하는 지식인들 중 국가에 의해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받은 지식인들을 이 시기의 특유의 지배층인 사대부라고 개념화하고자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송대의 지배층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특징이 바로 지식과 교양을 가짐으로써 여러 가지 제도적 특원을 얻은 사대부가 확산되고 있었다는 점이라 하겠으니, 이와 같은 지배층의 변화에서 직접적인 계기는 우선 특원을 부여하는 국가권력의 존재에서 찾아질 수 있다. 결국 송대 사대부의 존립과 확산은 스스로 지식과 교양을 보급시키면서 자기 확대를 해 나간 지식인을 국가권력이라는 매개 혹은 외피에 의해 사대부로 변화시키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2. 사대부의 활동이제 송대 특유의 지배층이 실제로 어떠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가를 알아봄으로써 그 존재 형태에 대한 이해를 넓히도록 하자. 그런데 이와 같은 활동을 살펴보기 위하여서는 먼저 그것의 기반이 문제가 될 것이다. 결국 사대부의 존립 기반이기도 하니, 앞서 서술했듯이 사대부가 국가권력의 외피를 가짐으로써 특권적 지배층이 되었던 만큼 그 활동에서도 국가권력이라는 기반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사대부의 주체적인 지식과 교양 습득 능력 또한 이들의 활동 기반으로 고려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응시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교양을 습득하기 위하여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부를 필요로 하였을테니, 사대부의 활동에서 경제적 기반이 가지는 중요성은국가권력에 못지않다. 그리고 사대부의 활동에서 기반되는 경제적 능력이란 결국 활동하였을테니, 형세호 역시 그 한 예라고 하겠다.이상과 같은 이해에 입각하여 사대부의 활동을 고찰할 때, 이들은 특권을 지닌 지주로서 파악되며 그 활동은 지역사회 안에서의 그것으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따라서 사대부의 활동에서 이들이 실제 살고 있는 지역사회라고 하는 것이 문제되는데, 지주로서 활동하는 사대부에 주목하는 본고가 일단 농업생산이 직접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행정적 편제의 기본단위인 촌(村)을 지역사회의 기초적인 형태로 상정해 두어도 근 무리가 없을 듯하다.지주로서의 사대부는 국가권력이 부여한 특권을 배경으로하여 일면 불법적인 수탈도 일삼았을 것이다 아울러 국가권력의 기능을 보완해 가면서 지역사회의 농업생산을 주체적으로 지도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이 중 후자의 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송대 사대부들이 가지는 지배층으로서의 존재형태를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앞서 설명한 것처럼 송대에는 과거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이 엄청 불어났고 그 결과 이들의 일부가 국가에 의해 특권을 받은 사대부로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많은 관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얼마간의 특권을 받고 지역사회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지식인으로서의 지주가 증가하였음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지역사회와 밍버한 관계를 지니면서 황동하였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대부와 지역사회의 관계는 관료들의 경우에서도 없지 않다.촌과 같은 지역사회에서 농업생산이 직접 이루어지고 있엇음을 생각할 때, 지주로서의 사대부와 지역사회의 관계에는 이처럼 농업생산이라는 과제가 중요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본적으로 지주로서의 농업생산에 대한 관심은 사대부가 가진 지식, 교양능력이 결합되어 농업관계 서적의 간행과 보급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그렇다면 사대부들의 이와 같은 관심이 구체적인 지역사회에서 실제로 어떠한 활동으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강남의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사대부의 실제적인 활동을 알아보자.중국사에서 수리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송대의 사대부니었나 생각된다.Ⅲ. 송대사대부의 기원1. 과저제도 성립의 의의앞서 사대부가 지식인과 동시에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은 이들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송대에는 이와 같은 사대부들이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하 지배층으로서의 활동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물론 지식과 교양을 중시하는 이상을 가진 전근대 중국에서 이와 유사한 지배층이 그 이전부터 존재하엿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 살펴본 송대 사대부의 존재형태는 특별히 과거제도라는 배개가 있고서야 비로서 가능한 것이었다.과거제도의 성립은 수(隋)의 성립(581) 이후였다고 여겨지는데, 통일된 국가권력이 지식과 교양을 중시하여 이에따라 관료들을 선발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되니, 본고는 먼저 이 과거의 제도적 성립이 미친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송대 사대부로 이어질 수 있는 지배층의 변화를 찾아보려 한다.수를 이어서 당대에서도 시험에 의하여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가 있었다. 지식과 교양으로 관료를 뽑는 과거제도가 당대에 관료선발제도로서 자리잡아 갔다는 사실은 제도적 정비 외에도 과거 합격자 수, 그 합격자에 대한 관료로서의 우대, 음(蔭)을 비롯한 다른 방법에 의한 입사자들이 이시기에 그다지 출세하지 못했던 상황, 당 후반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경제적 특권이 주어진 관료의 가호(家戶)인 의관호(衣冠戶)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의관호는 당시의 과거제도 및 그 합격자가 국가권력을 매개로 하여 사회적 중요성을 더하여갔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대 특히 그 후반기의 과거제도가 관료의 충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결과 그때까지 가만의 우위를 자랑하던 이들 도한 이것을 통하여 관료가 되어가는 경향이 뚜렸해졌다.이러한 당대의 과거제도는 송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당대의 과거제도가 송대의 그것과 비교되었을 때 드러나는 차이점 또한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응시자의 익명화가 송대에 가서야 제도적으로 정착했고, 당대에서 과거의 합격여부는 응시자의 노출된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의하이다.
Ⅰ. 머리말시조의 孤山 尹善道와 가사문학의 松江 鄭澈은 한국 시가 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그리고 우리 고전문학에서 윤선도와 정철의 작품만큼 활발하게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진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윤선도와 정철이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그들은 훌륭한 시적 재능을 발휘하여 주옥같은 시작을 다수 이룸으로써 조선조 시가문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의 면모까지 지닌 역사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가진 역사적 중요도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여기에서는 윤선도와 정철의 생애와 작품을 통하여 그들의 작품세계, 문학적 특징, 문학사적 의의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본문1. 孤山 尹善道1) 생애윤선도의 字는 約而, 號는 孤山 또는 海翁이며, 1587년 전라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그의 多事多難한 생애를 몇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1) 靑少年 修學期이 시기는 孤山이 유년시절부터 그가 李爾瞻을 규탄하는 丙辰疏를 올리기 이전까지의 30세 이전을 말한다.어려서부터 그는 타고난 성품이 특이하고 총명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생김새가 고상하고 기상이 엄숙하여 보는 사람마다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8세에 종손의 승계를 위해 강원도 관찰사인 숙부 유기의 양아들로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 종손으로 자라게 되었다.17세 때에는 부인 南原尹氏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진사초시에 합격하였으며, 20세 때에는 승보시에 합격하였다. 이렇게 계속해서 합격하면서도 그는 과거를 보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나서 한 번 붓을 휘둘러 글을 쓰면 시 한편이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이 그 時才에 미칠 수 없었다.그리고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 해 겨울에는 생부 惟深이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부친이 돌아가실 때 아무런 유언이 없자, 고산이 청하여 그 庶母에게 많은 노비와 전답을 나누어주도록 주선했다. 그만큼 고산은 젊어서부터 인정이위하자 山陵問題와 服制問題로 또다시 유배를 가게된다. 하지만 특별석방을 임명받아 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다시 부용동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5년간 유유자적하면서 스스로 즐기는 생활을 하다가, 1671년 6월 부용동 낙서재에서 천명을 마쳤다.2) 文學觀고산연구는 다른 어느 시조작가보다도 활발하게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그에 비해 고산의 문학관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고산의 문학관을 확실히 파악함으로써 그에 대한 작가연구나 작품 연구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고산이 단편적으로 언급한 이야기들을 상고하면서 문학에 대한 기본인식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먼저, 詩와 歌에 대한 고산의 기본 인식을 작품을 통해 살펴보면, 고산은 詩와 歌의 개념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았고, 또 漢詩는 詩라는 의식 아래, 時調는 歌라는 의식 아래 창작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그의 문학관은 孔子가 주장한 전통유학의 詩觀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즉 그는 유교적 道를 발현하여 治國과 敎化에 공헌하는 것을 문학의 본질로 보는 道本文末論을 주장했다.그러면서도 그 나름의 독특한 문학관이 있었던 것이니, 이치를 숭상하고 말의 기교를 숭상하지 않는 점, 앞 시대의 사람을 답습하지 않고 新意를 창출해 낸 점, 리듬과 율격을 중시한 점, 모국어 의식이 투철했던 점, 창작면에서 서정시의 영역을 확대시킨 점 등은 문학에 대한 수준 높은 인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3) 作品論윤선도의 학문적 업적으로는 「孤山遺稿」6卷 6冊이 전한다. 고산은 多作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일단 저술을 하게되면, 그 글의 독창적 요소가 많았다. 따라서 「孤山遺稿」의 가치도 이러한 점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 고산 자신이 친필로 쓴 歌帖이 고산 종가에 전하는데 그 표제가 하나는 이고, 다른 하나는 이다.여기에서는 고산의 작품을 가지고 思想的 背景, 時調作品論, 漢詩作品論 순으로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1) 思想的 背景우리 민족의 사상적 배경은 전래된 노래하는 것이 조선시대 문학의 커다란 흐름이었다. 이러한 작품은 그 시대 사람들의 도피적 생활관과 관련성이 많으며, 현실에서의 불평불만을 자연을 통해서 보상받으려 하는 경향이 많았다.이러한 내용은 고산 문학의 자연관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고산의 일생은 출사와 유배와 은둔생활로 이어졌고, 이 세 가지 생활패턴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것이다. 특히 고산에게 있어서는 출사의 기간보다 유배와 은둔생활의 기간이 훨씬 길었다. 이러한 생활환경이 자연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했고, 水 , 石 , 松 , 竹 , 月 을 벗삼아 살겠다고 노래하게 했던 것이다. 또 과 등을 지어 자기의 뜻을 나타내보기도 했다.이러한 고산의 행적을 보면 윤선도와 자연의 관계는 어느 정도 숙명적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다는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립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ㄱ 自然愛의 의미잔들고 혼자안자 먼뫼흘 빛라보니그리던 님이오다 반가옴이 이러힝랴말싶도 우움도 아녀도 몬내됴하 힝노라 췽힝야 누얻다가 여흘아래 다리려다.락홍이 흘러오니 도원이 갓갑도다인셰홍딘이 언매나 까렷다니 위의 작품들을 살펴보았을 때 고산은 自然에 대하여 몰아의 대상 , 아름다운의 대상 , 숨어서 지내는 장소 , 즐거운 놀이터 , 자기위안의 대상 등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ㄴ 風流스러운 生活態度고산의 를 읽어보면 풍류적인 입장에서 한번쯤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풍류라고 하면 흔히는 술과 음악을 연상하는데, 고산의 풍류는 자연을 벗삼아 자연을 노래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政治觀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人生觀·宗敎觀 등이 시대의 환경과 역사적 배경, 사회적 변동에 무관하지 않으며, 그의 漢詩에는 그가 살던 역사와 당시 사회의 이념, 정치철학이 담겨 있다.4) 문학사적 의의첫째, 儒敎思想을 중심으로 하고 그 외 道·佛·老莊 등 다양한 사상적 배경을 수용하고 있다. 윤선도는 귀양살이의 錯雜한 심정을 토로하면서도 자신의 忠孝意識을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그밖에 유교사상의 본질인 天道와 仁義를 중심과제로 다루었는가 하면, 유가의 政治哲學인 經世濟民과 敎化善政을 강조한 작품도 있다. 또한 부처님의 힘을 굳게 믿고 佛力을 믿게 되면 세상근심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킨 작품도 있다. 그리고 無爲自然 사상을 작품의 주제로 했거나 생활철학으로 신봉한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둘째, 고산은 自然詩人이라 할 정도로 자연을 제재로 한 작품이 많았고, 자연을 생활화하였으며, 자연을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 또한 다양했다. 그의 작품에는 自然親和思想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그의 작품세계에서의 자연은 절대자 , 최선의 것 , 최고의 경지 , 아름다운 경지 , 주객일체의 경지 등을 의미한다.셋째, 孤山作品은 대부분이 생생한 생활체험의 문학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生活日記, 實錄, 回顧錄, 自敍傳的 성격을 띠고 있다. 즉, 그의 삶이 문학이었고, 그의 문학이 바로 그의 삶 자체이다.넷째, 한시와 시조의 相關性 問題이다. 사실 한시와 시조는 정형시라는 입장에서 동류의 것이지만 그 표기체계나 作詩法 등에서 판이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산의 작품을 대하면 이 양자간에 同質性을 발견하게 되고 심지어는 말과 형식만 다르지 동일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한마디로 고산은 그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들을 한시로도 읊어보고 시조로도 노래해 보는 이중적 작업을 시도했다.다섯째, 고산은 작품을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1 忠義忠義的 思想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며, 이 충성은 곧 임금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애정과도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비유를 좋아하는 우리 선조들의 의식사고에서 연군의 정 은 님을 향한 여인네의 일편단심 으로 곧잘 표현되고 있다. 송강의 작품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성산에서 김성원의 생활 모습을 읊은 을 제외한 송강의 가사 모두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蓬萊山 님 겨신딪ㅣ 五更틴 나믄 소링ㅣ城너머 구름 디나 객창에 들이다다강남에 다려옷 가면 그립거든 엇디리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에 자고 있을 새벽, 들려오는 북소리에 성안의 임금을 생각하는 것은 송강의 마음 속에 임금의 자리가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이 몸 허러 내여 낸믈의 띄오고져이 믈이 우러 녜여 한강 여흘 되다힝면그제야 님 그린 내 병이 헐힝 법도 잇다니 자신의 몸을 헐어내어 냇물에 띄워 한강의 여흘 되어서 님 곁으로 가면 덜해질 법도 하련만, 그러나 그것은 한갓 하소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애절함을 읊은 것이다.그의 작품 속에는 시골 깊숙한 곳에 파묻혀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불평은 전혀 없다. 오직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걱정으로써 하루해를 보내며 살아간다. 다만 님의 사랑만 받을 수 있다면 평생동안 님을 믿고 살겠다는 님에 대한 믿음 이 곳곳에 깔려 있을 뿐이다.江湖애 病이 깁퍼 竹林의 누엇더니關東 八百里에 方面을 맛디시니어와 聖恩이야 기디록 망극힝다 송강이 벼슬을 떠나 생활하던 중 뜻밖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그 망극한 성은에 감격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감격한 심정은 조용한 감격으로, 소란스럽지 않고, 경박스럽지 않은 그러한 마음이다.2 孝송강의 작품에서 孝悌를 노래한 것은 를 비롯한 시조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수는 송강이 45살 되던 선조 13년(1580)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지은 것인데, 창작 동기 및 작자의 목적이 유교의 보편화를 위한 牧民歌이다.'부의모자(父義母慈)'아바님 날 나힝시고 어마님 날 기링시니두
Ⅰ. 머리말우리의 역사가 변화함에 따라 함께 변화하면서 전해 내려온 지식적·정신적 유산 중의 하나가 속담과 수수께끼이다.누군가의 입을 빌어 나온 민족 모두의 슬기의 발로로서 속담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은 공감을 얻어 널리 퍼진 민간의 격언으로 교훈·풍자·경험 등의 뜻이 담긴 짧은 말이며 수수께끼는 민간의 언어게임이자 말놀이이며, 기지·지혜의 경합이다.{) 김태곤 외 (1995)『한국구비문학개론』민속원, 405쪽이러한 속담과 수수께끼를 우리는 보통 쉽게 흘려 버려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속담과 수수께끼 안에는 조상들의 생활이 반영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의 특성ㆍ재치ㆍ지혜 등을 담겨 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속담과 수수께끼를 통해 삶과 생활의 지혜로 활용할 수 있도록 속담과 수수께끼에 대해 정확히 잘 아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속담의 용어와 개념, 특징, 형식과 기능과 수수께끼의 용어, 특징, 분류, 형식과 기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Ⅱ. 본문가. 속담1. 속담의 용어와 개념1) 용어속담은 민족 전체가 공유하는 민족적 언어예술이다. 일부 유식한 한학자에 의하여 한역되어 전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서민들의 입을 통하여 구전되어 온 속담은 삶의 지혜나 교훈을 비유적·상징적으로 압축해 놓은 훌륭한 우리의 문화적 유산이다.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속담(俗談) 이라는 어휘가 언제부터 상용화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문헌상으로 보면 15세기 중엽 세종실록 권73에 언왈 고려공사삼일(諺曰 高麗公事三日) 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중국어 교과서인 박통사 에 중국어 속담이 몇 개 나오는데 중종 때인 16세기 초 최세진이 번역한 번역 박통사 에는 원문의 상언(常言) 을 샹노말싶 으로 직역한 것을 보면 그 당시 속담이란 말은 잘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광해군 말년에 어우당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譚) 에 속담 조선공사삼일 등 몇 개의 속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속담 외에도 잠언이나 경구 등 속담과 유사한 형태와 기능을 지닌 관형적 표현들이 많아서, 속담을 이러한 표현들과 명백히 구별해 내기는 매우 어렵다.또한 속담 그 자체도 한 언어권 문화의 형성과 역사를 같이 하고 세대를 거듭하여 사용되어 오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어왔다. 따라서 오랫동안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속담의 정의는 언어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내려지고 있다.이 중 몇몇의 견해들을 소개하면, 속담은 민중 속에서 생성된 관용적 표현으로서 보편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쓰여지는, 일정한 기능을 갖는 세련된 말 {) 장덕순 외 (1981) 『구비문학개설』 일조각, 188쪽어떤 사실을 비유로 서술하는데 쓰이는 관용어구 {) 심재기 『관악어문연구 제7집』, 294쪽중지(衆智)로 만들어진 대중의 진리요, 사상이요, 도덕이요, 세계관이자 민족 정신이 담긴 언어 전승적 산물이고 문화적 유산 {) 조재윤 (1988) ,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3쪽겉으로 드러난 뜻과 안에 숨어 있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어서 듣는 사람을 긴장시키고 깨우쳐 주는 짧은 어귀 {) 조동일 (1981) 『구비문학의 세계』 새문사, 24쪽등으로 개념 정의를 하고 있다.이 밖에도 여러 견해들이 있으나 이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2. 속담의 특징{) 김태곤 외 (1995)『한국구비문학개론』민속원, 375∼378쪽속담의 일반적인 특징을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첫째, 간결한 표현이다. 속담은 구비문학으로 화자가 쉽게 기억·구연 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속담을 말 중의 말 이라 하는데 속담의 이러한 점을 잘 대변해 주는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다.둘째, 비유적 표현이다. 속담은 어떤 구체적인 사례(또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들어 추상적·보편적 관념을 유발케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추상적·보편적 진리를 구체적인 사실로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이 속담이다.셋째, 수사학상의 기교가 다채롭다. 속담이 상대의 관심을 끌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김종택{) 김종택 (1967) 『국어국문학』,국어국문학회, 70∼76쪽은 다섯 가지 유형을 설정했는데 이것은 한국 속담을 의미구조별로 구분하여 그 형태를 유형화시킨 것으로는 최초의 구식이 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E형을 제외한 나머지 형들은 각 유형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재검토되어야 할 문제점이 존재한다.A형 : 의미부a+의미부a' (a와a'는 언어재료만 다를 뿐 지향하는 의미주제는 같다)예) 염주도 목목, 쇠뿔도 각각B형 : 의미부a 의미부b (a와b는 각기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별개의 의미를 형성한다)예) 계집 자랑 반미치기, 자식 자랑 온미치기C형 : 재과부a+의미부b (의미제b는 재료제a와 결합함으로써 속담의 기능을 발휘한다)예) 연인은 돌리면 버리고, 그릇은 돌리면 깨진다D형 : 재과부a 재과부b (a와b 어느 하나만으로는 주제의미가 표시되지 못하고 둘이 결합 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예)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E형 : 의미부a (단어형태나 단문으로 이루어진다)※ +는 단순결합, 는 복합결합장덕순외 3명{) 장덕순 외 (1981) 『구비문학개설』 일조각, 195∼198쪽도 의미표현 구조를 중심으로 다섯 가지 유형을 설정해 놓고 있다.A형 : 간단한 단어나 어구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쓰여지는 속담이다. 속담의 대부분 이 A형에 속한다.예)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열 소경의 한막대A+A형 : 개별적인 의미를 중첩함으로써 속담의 기능이 발휘되는 형이다.예)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 반 잔술에 눈물나고, 한잔 술에 웃음난다.A+B형 : 전후 주종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뒷부분이 강조된다.예)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옷은 새 옷이 좋고, 사람은 헌 사람이 좋다.B형 : 문면 자체의 의미가 그대로 속담의 기능을 발휘한다.예)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것이 있다.B+B형 : 전후 관계에서 뒷부분이 강조되는 수가 많으나 때에 따라서 바뀌어 질 수도 있다.예) 계집자랑럼 우리네 속담의 외설적 언어는 상민들의 고달픈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2) 국민성이 나타남속담에는 그 나라 국민의 특성, 재질, 정신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국민의 역사, 종교, 미신, 풍속, 제도, 인정 등을 관찰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우리나라 속담을 살펴보면 '양반은 죽어도 짚풀은 안 쪼인다.', '양반은 물에 빠져 죽어도 개헤엄은 안친다.' 는 우선 추운데 짚풀이든 숯불이든 가릴 필요가 없으며 물에 빠져 죽을 처지에 이른 주제에도 체통 깎이는 행동을 않겠다는 말이니, 이것을 통해 옛날 양반들이 체면만 생각하고 얼마나 형식만을 꾸미려고 하였는지 그 시대의 풍습을 과히 짐작할 수 있다.'시집살이 못하면 동네 개가 상대를 안한다.', '귀머거리 삼년이요, 벙어리 삼년이라.', '색시 다루기는 다홍 치마적 부터 하여라.' 는 과거에 우리네 집안에서 입이 있어도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고, 귀로 들으면서도 그저 모르는 척 하며 전통과 가문이라는 사슬 속에서 허수아비와 같은 생활로 청춘을 지내던 새색시들의 시집살이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또한 조선시대 유교적 도덕관, 가족관을 드러내는 속담도 있다. '큰어미 죽으면 풍년든다' 는 큰어머니 밑에서 잘 얻어먹지 못한 첩의 아들을 빗대고, '딸은 가을볕에 내보내고 며느리는 봄볕에 내보낸다' 는 딸과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차별대우를 상징한다.(3) 경고적, 충고적, 교훈적이다.속담이 경험적 산물이라고 할 때, 그 경험은 언중 대다수의 경험 이를테면 보편적, 경험인데 이를 통하여 형성된 것이 속담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도덕적, 교훈적이다.달리 말하면, 속담에는 오랜 세월을 거쳐 얻은 경험의 정수가 담겨 있으므로 속담은 어떠한 사실을 지적함과 동시에 또 그렇게 되는데 대하여 경계할 필요가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경우가 많다.{) 서석연 (1975) 〈속담의 비교연구〉, 전남대 박사학위논문, 406쪽즉, 우리는 속담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돌이켜보고, 그리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간적920년대에 수수걱기, 수수꺽기, 수수격기라고 하던 것을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펴내면서 수수께끼를 표준어로 정한 것이다.그런데 놀랍게도 여러 학자들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수께끼의 사투리는 전국적으로 52가지나 된다고 한다. 몇 가지만 살펴 보면, 수수고끼, 쉬시겐끼, 수수적기, 수수저꿈, 수지기,시지저름, 시끼저리, 수리치기, 숭키잽기, 수때치기, 준치새끼, 껄룰락, 말지러미, 깍퉁이 등 재미있는 용어가 많다.그럼,'수수'란 무엇이고 '께끼'란 무엇인가? 수수란 숨은 것을 찾아낸다는 뜻이고, 께끼란 겨룬다는 뜻이니, 요컨대 수수께끼란 '질문자는 숨겨서 아리송하게 묻고, 해답자는 숨긴 것을 찾아내는 겨루기'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수수께끼를 한자로는 '미어(謎語)'라고 하고, 영어로는 'RIDDLE'이라고 하는데 이런 말들 속에도 모두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숨긴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2) 발생수수께끼는 언제 어떻게 해서 발생하였을까? 이것은 설화나 속담 또는 민요처럼 확실한 근거를 대기는 어려우나, 현재 수수께끼가 갖는 기능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구조가 단순하고 표현이 재미있으면서도 지식을 주는 효과를 생각해 보면, 설화나 민요보다 앞서 생겼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으며, 그 시대는 아마 인류의 기원과 때를 같이할 것이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문제에 부딪치고 이를 해결해 나가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이러한 생활에서의 필요가 수수께끼를 발생시켰다고 보기 때문이다.기록으로 전해지는 우리 나라 최초의 수수께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유리태자'의 이야기이다.2. 수수께끼의 특징첫째, 구연에 있어서 화자·청자 쌍방이 참여한다. 다른 구비문학 장르들-이를테면 설화·판소리·속담·민담 등-이 일방적인 전달을 목적으로 함에 비하여, 화자와 청자, 쌍방이 다같이 구연에 참여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수수께끼의 구성은 발문(跋文)과 응답(應答)으로 이루어진다.둘째, 묘사가 극히 단순하다. 묘사의 단순성은 비단
1정보화 시대에 통신 교류의 유력한 매체로 떠오르며 나날이 보급되어 가는 컴퓨터로 인해 인터넷은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자리까지 올라섰다. 이런 인터넷의 보편화로 인해 사용인구가 급속히 불어나면서 네티즌들만의 전유물 같던 통신 언어(혹은 채팅 언어)가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게 일상화해 가고 있으며 또한 약어와 은어, 암호 등의 통신 언어가 끝없이 양산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통신 언어는 더 이상 네티즌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이제 우리 사회의 공동의 과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통신 언어 문제는 지구촌 전체의 과제이다. 미국의 위싱턴 포스트지가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채팅 용어로 사용되는 약어와 은어, 암호는 한국만의 고유물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실제로 미국에서는 채팅용어를 모르는 네티즌들을 위해 사전구실을 하는 웹사이트까지 개설돼 벌써 1천4백여 종이 등록돼 있으며, 지금도 계속하여 채팅 용어들이 속속 합류하고 있는 상태이다.따라서 우리는 지구촌 전체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신 언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럼 여기에서는 통신 언어의 등장 배경과 그것의 관련 용어, 장·단점을 살펴보도록 하자.2통신 언어는 90년대 중반 PC통신을 사용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비싼 통신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많은 내용들을 좀 더 빠른 속도로 전달하기 위해 탄생한 것으로「방가방가」(반갑습니다)나,「안냐세여」(안녕하세요) 등의 축약어(縮約語)의 형태였다. 오늘날에 와서도 채팅은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므로 통신요금이나 혹은 이용요금(예를 들면 PC방 같은)같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라도 얼마나 빠르고 간단하게 말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되도록 줄여서 말을 하고 어려운 받침은 간단하게 하며 소리나는 대로 쓰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실제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판에서 타자하기 편한 글자를 자주 치고 shift키를 눌러야 하는 불편한 글자들은 되도록 피하며 특히 겹받침은 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한다.통신 언어가 나타나게 된 또하나의 이유는 속도 때문이다. 채팅은 우리가 흔히 컴퓨터에서의 대화라고 하는데 이 말처럼 채팅상의 언어는 구어체의 속성을 지닌 문어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박또박 글 쓰듯이 해서는 안되고 마치 말하는 듯한 속도로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 따라서 속도를 생명으로 하는 채팅에서 속도가 느리면 아예 대화에 나서기도 힘들게 된다. 그래서 단어를 줄인 축약어를 만들거나 복잡한 받침을 피하고 소리나는 대로 적게 된 것이다. 또 자판에서 손이 가기 쉬운 글자를 쓰게 되었다. 이는 다시 말해, 언어의 간결화를 통해 자신의 의사전달을 극대화하려는 실용성 측면에서 채팅 용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또한 컴퓨터 통신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공간과 문화를 향유하려는 속성을 보이는데 이 때 이러한 은밀성과 집단성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는 수단으로서 타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언어를 만들게 된 것이다. 즉, 구어체도 아니고 완벽한 문어체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언어 양식이 출현한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통신 언어가 언어의 경제성의 속성을 갖게 되어 의미나 정보만 전달된다면 짧게 쓰여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이버 공간에 등장하는 채팅 용어는 번뜩이는 위트가 넘치는 간결한 약어와, 때로는 의미를 고농도로 농축시킨 초약어까지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3채팅과 관련된 용어는 크게 채팅 용어와 이모티콘(emoticon·감정을 표현하는 기호)으로 나눌 수 있다.먼저, 채팅 용어는 지난해 12월 말, 문화관광부의 요청으로 한말연구학회에서는 총 2,352개의 통신용어를 수집해 분석한 “통신언어 어휘집”을 발간되었는데 이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일반 통신 어휘는 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거나 현실적인 발음을 반영한 ‘형태 변이’, 형태변화 없이 새로운 환경에 따라 의미가 전이되어 사용되는 ‘의미 전이’, 품사가 바뀌는 ‘통사 변이’, ‘새 말’로 크게 구분된다.통신언어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인 ‘형태 변이’는 한글 맞춤법이 형태를 밝혀 적어서 명사와 조사, 어간과 어미 따위를 구분하고 있는 것을 무시한 적기이다.‘9럼’(
기로에 선 자본주의- 앤서니 기든스 Anthony Giddens, 윌 허튼 Will Hutton 편저 -친구가 추천해 줘서 읽게 된 이 책은 나에게 자본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자본주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자각도 없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두 얼굴(중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분노했을 뿐 사회주의보다는 나으니까 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우리가 IMF를 겪게 되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 답을 알려준 것이 바로 『기로에 선 자본주의 ON THE EDGE』라는 책이다.『기로에 선 자본주의』는 한국 사회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의 저자 앤서니 기든스와, 「옵저버」「가디언」지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윌 허튼이 공동으로 편집한 책으로,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세계화의 흐름을 진단하고 21세기 사회의 방향을 모색한 책이다. 이 책은 정치·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류학, 사회학, 환경학, 정보학 등 주요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통합적 분석까지 시도하고 있는데 여기에 실린 글들은 미래에 대한 낙관론(토인비, 울리히 벡)부터 비관론(반다나 시바, 제프 폭스, 래리 미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이 시대에 자본주의가 승승장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1990년대에 소련을 비롯한 중동유럽 국가들에서 국가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자본주의 체제로의 본격적인 이행이 추진되면서, 자본주의가 세계적 추세로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전지국적 자본주의 , 정보 자본주의 , 디지털 자본주의 , 지식 경제 , 탈소재 경제 등으로 불리우는 21세기 자본주의는, 세계가 단일 시장으로 통합되고, 정보통신 등 첨단기술의 급속한 혁신이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며, 아이디어와 소프트웨어가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경제라 할 수 있다.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주의는 옳은가. 그리고 세계화 시대의 자본주의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이 책은 오늘날 펼쳐지고 있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상반된 두 얼굴을 다양한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첨단에 도달한 역동적인 자본주의인 동시에 우리 인류를 위기에 몰아넣고 벼랑 끝 저편의 나락으로 떨어드릴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하고 냉혹한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그것이 가진 경제적 역동성과 효율성에 힘입어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불평등이나 인간 소외 등의 병폐로 인하여 부단히 비판받고 도전 받아왔다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병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버릴 수 있느냐하면 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자본주의는 단지 경제 체제의 양식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모습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상당히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다. 1997년에 겪은 IMF, 기업의 도산과 구조조정, 일부 부유층의 환차익과 높은 이자율로 부 축적, 그로 인한 소득과 부의 불평등과 사회의 양극화의 심화 등 우리는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우왕좌왕하고 있다.기회와 가능성의 화신인 자본주의. 그러나 여전히 인간 소외를 심화시키고 처절한 파국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다.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전지구적인 자본주의가 몰고 온 위험 요소를 제거해 나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본주의가 갖는 창조적 혁신 능력을 살려나가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허튼과 기든스의 이 편저는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직시하고 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자세를 갖을 것을 촉구 하고 있다.이 편저는 21세기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개별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보화 사회, 국제 금융시스템과 IMF의 기능, 소득 불평등 문제, 환경 제국주의, 글로벌 시대에서 '개인주의'의 문제, 미디어 제국주의, 그리고 '보살핌의 사슬'까지 종횡무진 오간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핵심은 결국 '세계화'라는 것, 그리고 그 세계화의 동력인 '국제금융자본주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이 많은 주제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이야기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소득 불평등 문제 였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 돈만을 중시여기는 것이 비록 천민자본주의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자본주의에서 돈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테니까 - 그런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일반 서민들에게는 왜 돈이 없는 것일까. 소수의 부유층들이 몇 백만원짜리 명품 가방, 옷을 살 때 왜 나는 짜가를 구입하는지... 이러한 현실을 대할 때마다 왜 나는 그들에 비해 잘 살지 못하는 건지 원망스럽다.세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탈규제적인 시장의 급속한 전지구적인 확장으로 인해 모든 사람의 삶의 기준은 더 빠르게 높아질 것이고 소득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약속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불행히도 아직까지 그와 같은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무역과 금융시장들이 활짝 열리는 과정에서 소득은 더 빠르게가 아닌 더 느리게 증가했다. 그리고 국가들 간의 평등은 개선되지 않았고, 많은 최빈국들은 소득의 엄청난 하락으로 고생하고 있다. 더욱이 국가들 안에서의 불평등은 이전보다 악화될 것으로 생각된다.1996년에 UNDP는 지구촌의 억만장자 358명의 재산은 세계인구의 45퍼센트가 갖고 있는 재산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고 보고했다. 이는 전지구적인 상품과 금융 시장들의 탈규제가 세계적 수준의 투자가, 기업가, 전문가들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어 이들 가장 꼭대기 층의 부의 축적은 엄청난 반면에 낮은 소득계층에게는 자본주의에 의한 번영이 내려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자료를 살펴보면 1960년대 중반에 미국 기업들의 최상위 최고경영자(CEO)들의 소득과 일반적인 생산직 노동자들의 임금 사이의 비율은 39 대 1이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1997년에는 그와 같은 비율이 254 대 1이었다.자카르타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일으켰던 폭동, 미시건에서 노동자들이 일으키는 파업, 러시아에서 임금을 받지 못한 광부들의 불만 그리고 일자리가 없는 동독의 스킨헤드족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이러한 소득의 불평등은 종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세계화에 대한 적개심을 형성하게 하여 사회의 발전에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극적인 산업화와 높은 경제 성장의 시기를 거쳤다. 하지만 이러한 가속되는 성장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가난과 불평등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IMF를 겪으면서 일부 부유층에서는 환차익과 높은 이자율, 하락한 자산 가격에 힘입어 부를 축적하는 호기를 맞았다. 이로써 소득과 부의 불평등과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