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國通鑑》의 編纂과 史論에 대한 考察目次Ⅰ. 머리말Ⅱ. 《東國通鑑》의 편찬1. 조선전기 역사서술2. 《東國通鑑》의 편찬과정과 편찬자3. 《東國通鑑》의 편찬배경과 목적4. 《東國通鑑》의 서술체제와 내용Ⅲ. 《東國通鑑》의 史論1. 旣往의 史論2. 撰者의 史論3. 史論의 경향성Ⅳ. 《東國通鑑》의 사학사적 의의Ⅴ. 맺음말Ⅰ. 머 리 말《東國通鑑》은 우리나라 최초의 官撰通史이면서 근대 이전의 국사체계의 기준이 되었던 사서로서 우리나라 사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해《東國通鑑》에 대한 연구성과는 적은 편인데,《東國通鑑》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으로는 鄭求福과 韓永愚의 연구) 鄭求福,〈東國通鑑의 史學史的 考察〉,《韓國史硏究》21·22, 韓國史硏究會, 1978.韓永愚,〈東國通鑑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 (上), (下)〉,《韓國學報》5, 一志社, 1978.가 있을 정도이다. 鄭求福은《東國通鑑》의 史論의 분석에 중점을 두었고, 韓永愚는 편찬경위와《東國通鑑》의 정치적 배경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이 글에서는 이 두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하여《東國通鑑》의 편찬과정과 그 내용, 그리고 사론 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덧붙여《東國通鑑》이 가지는 사학사적 의의를 조망해보고자 한다.Ⅱ.《東國通鑑》의 편찬1. 朝鮮前期의 歷史敍述조선전기에는《高麗國史》·《高麗史》·《高麗史節要》·《東國史略》·《三國史節要》·《東國通鑑》등 官撰史書를 위시하여, 朴祥의《東國史略》이나 吳澐의《東史簒要》등 私撰史書도 적지 않게 편찬되었다. 이전의 어떠한 시대에 비하여서도 이와 같이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한 특징이라고 하여도 좋은 것이다.) 鄭杜熙,〈朝鮮前期 歷史認識〉,《韓國史學史의 硏究》, 을유문화사, 1985, p.107.朝鮮前期 史學史硏究가 비교적 본격화되었던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4년 李元 은〈鮮初 史書의 歷史意識〉(《韓國民族思想史大系》中世篇, 1974)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의 후퇴 역시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韓永愚,〈『東國通鑑』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上)〉,《韓國學報》15, 一志社, 1979, pp.16∼20.세조대에 중단되었던 편찬작업은 예종 원년 10월에 崔淑精의 건의로 편찬을 승낙받았으나, 다음날 왕이 승하하여 다시 중지되었으며, 성종 5년에 와서 申叔舟에게 문신을 택하여 그의 집에서 편찬토록 하여 다시 편찬작업이 시작되었다. 申叔舟는 그 다음해에 죽었기 때문에 盧思愼과 徐居正이 申叔舟에 이어 책임자가 되었고, 실제 편찬은 李坡의 지휘로 金季昌·崔淑精에 의하여《三國史節要》가 완성되었다.《東國通鑑》은 삼국사와 고려사까지 서술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삼국사만을 다룬 내용으로는《東國通鑑》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三國史節要》라는 이름으로 완성하였다.《東國通鑑》의 편찬은 성종 14년 10월 徐居正의 건의에 의하여 다시 시작되었다. 이 때 徐居正은 문신들과《聯珠詩格》에 대한 註를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와 兼贊하기를 청하여 왕의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 편찬이유는 我國의 人士들이 本國의 事蹟에 대하여 茫然不知함이 많은 것을 시정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御經 講訖 知事徐居正曰 臣方文臣數人 註聯珠詩格 請兼撰東國通鑑 我國人 雖號爲儒士 於本國事蹟 茫然不知 若撰成東國通鑑 則人皆知之矣 上曰然"(《成宗實錄》卷159, 成宗 14年 10月 丁卯條).이 때 편찬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당시 새로이《東國通鑑》편찬원이 임명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서거정과 절친하고,《聯珠詩格》편찬을 담당하던 盧思愼, 許琮, 魚世謙, 柳洵, 柳允謙 등이 맡았다고 추측하는 주장이 있다. 특히 盧思愼은《三國史節要》를 함께 편찬한 사이이므로 이들 勳臣들과 더불어《東國通鑑》의 편찬방향도 《三國史節要》와 일치시키려 했다는 것이다.《東國通鑑》은 徐居正의 發議가 있은지 1년 후인 성종 15년 11월에 완성되었다. 편찬자인 훈신들의 뜻이 잘 맞고, 이미 만들어 놓은《三國史節要》를 대본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빨리 완성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때의《東國通鑑》은 소장된 각종 古記類를 모아들이도록 하명했다. 이 때 進上令이 내려진 서책들은 상고사나 설화, 전설, 기담, 민간신앙과 관련이 많으며 단군조선 중심의 역사를 다룬 자료들이라고 짐작되는 것들이다. 즉 세조는 修史의 기본 방향이 군주와 왕실 입장이었던《高麗史》를 중심으로 高麗時代史를 정리하고《三國史記》와《東國史略》등에서 탈락된 상고사 부분을 古記類로써 보충하여 단군조선 이 중심이 된 고대사의 재구성에 주력하려 했던 것이다. 세조가 이러한 역사인식을 이루는 데에는 양성지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양성지는 국방강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고, 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단군신앙과 관련된 태백산·묘향산·구월산의 致祭를 주장했다.세조가 이렇게 고대사 개찬의 필요성을 느낀 이유는 專制王權을 강화하고 富國强兵策을 실시한 政治方向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원래 古記類의 사서들에 씌여진 내용은 고대국가의 始祖나 군주들의 出自를 신성화하고, 治績을 美化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고대의 신화·전설 등은 고대군주나 지배층의 選民意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자신의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었다. 특히 外民族과의 갈등이 격화되는 시기에 있어서는 자주의식을 고양시키는 기능도 갖을 수 있다. 따라서 古記類를 통한 역사서술은 군주의 권위를 높이고 국민이 단결하는데 유리한 작용을 한 셈이다. 결국 문종과 단종대에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자신의 집권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교적인 명분론보다 전제정치를 추구하였던 것이고, 이것이《東國通鑑》의 편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東國通鑑》을 편찬하게 된 배경으로는 우선 당시의 知的수준이 여러 가지 면에서 향상된 것을 들 수 있다.《東國通鑑》을 편찬하기 전에 이미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前 시대의 역사서인 김부식의 《三國史記》를 극복한《東國史略》을 편찬한 바 있다. 또한《高麗史》의 정리작업이《高麗國史》의 개찬을 통하여《원사》를 모방한 기전체의《高麗史》와《高麗史節要》로 완성되었다.《高麗史》와《高麗史節要》는 널리 수집한 사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外紀를 설정한 의도가 尊華思想이나 箕子崇拜와 관련된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資料와 관련된 것을 알아야 하겠다.) 鄭求福,〈東國通鑑에 대한 史學史的 考察〉, 앞의 책, p.459.鄭求福은《東國通鑑》에서 上古史를 外紀로 처리한 것은 단순히 上古史를 자료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外 紀로 처리하여 취급한 것은 역사적 성찰의 부족으로 인한 결과로서 안이하게《資治通鑑》의 外紀型式을 쫓은 데 크게 기인한다고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三國紀는 三國時代史 서술에 있어서 無正統의 시대로 처리하여 삼국을 독립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하나의 編年으로 묶어 서술하였다. 삼국을 대등하게 취급한 것은 파벌적·지방적 체제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자 남북의 영토와 遺民, 그리고 그 문화를 균형있게 포용하려는 진취적 역사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기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신라 고유의 君長에 대한 칭호를 모두 王으로 바꿔 표기하였고, 君主의 名號나 諡號, 王妃의 칭호 등은 事大에 구애받지 않고 사실대로 표기하였다.新羅紀는 文武王 9年부터 敬順王이 高麗에 歸付하는 高麗 太祖 18年까지의 歷史를 敍述하였다.) 韓永愚,〈東國通鑑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下)〉,《韓國學報》5, 一志社, 1979 가을, p.35.鄭求福은 新羅紀를 독립시킨 것이《三國史節要》와 일치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으나,《三國史節要》에서는 三國紀니 新羅紀니 하는 綱目을 붙인 사실이 없다.高麗紀는 高麗 太祖 19년부터 高麗 滅亡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한편 王의 年代 표기에 있어서는 卽位年稱元法을 써서 事實과 맞게 하였다. 또 年紀의 표기는 맨 먼저 干支를 최상단에 적고, 그 다음에 中國 年號를 적은 후, 마지막에 우리나라 王年을 적었다. 그러나 統一新羅나 高麗時代처럼 單一王朝가 세워졌을 때에는 干支 밑에 王年을 적고, 그 다음에 中國 年號를 기록하였다.) 韓永愚,〈東國通鑑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 위의 책, p.39.《東國通鑑》의 서술내용은 性格이 비슷한 사건들을 함께 묶어 大綱을 먼저 적고 뒤에 그 顚末에 대한 사론으로는《高麗史節要》에 실려있던 것이 대부분인 것 같다.《三國史記》에 실려있던 사론 중에는 5편의 사론을 삭제하였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수록하지 않은 것 같다.《東國史略》으로부터 인용된 史論은 총 48편이 있고,《高麗史節要》의 사론이 대부분 수록되고 있다.《東國通鑑》에서는 몇몇 사론을 제외하면《東國通鑑》의 撰者들의 견해와 다른 사론도 거의 전부를 수록하였다. 이는 세종·세조때의 역사편찬에서 기왕의 사론을 그대로 싣는 전례에 따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史論의 添削에 관한 내용은 별첨하였다.2.《東國通鑑》 撰者의 史論《東國通鑑》찬자의 史論은 204편으로서『臣等按』으로 起文되고 있다.『臣等按』이라고 표한 것은 官撰史書로서 史論을 쓴 사람이 두 사람 이상이기 때문이다.《東國通鑑》찬자의 史論은 117편이 崔溥의 作이고, 나머지 87편은 孫比長, 表沿沫, 徐居正 등의 作일 것이라 추론한다.《東國通鑑》의 史論은 그 내용의 성격에 따라「史學的인 史論」과「敎訓的인 史論」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사학사적인 사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史學的인 史論사학적인 史論은 撰者가 역사적 사건 서술에 대한 解明, 事件의 原因이나 結果에 대한 史的인 推究, 역사적 사실의 誤謬문제 등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우선 撰者는 서술입장을 해명하기 위한 史論 3편을 쓰고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첫째로 新羅君主의 稱號를 최치원, 권근의 例에 따라 始祖 이하를 모두 王으로 쓰고 新羅라는 국호를 국초부터 붙였다. 둘째로 撰者는 踰年稱元이 禮로 보아 옳으나 역사에서의 실제성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권근의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정하여 즉위년칭원을 따르고 있다. 셋째로《高麗史》卷頭에서는 김관의, 민지의 高麗 太祖의 世系에 대한 說話的인 記事를 싣고 있는데《東國通鑑》에서는 황주량의 實錄記事가 더 믿을 만한 史料라고 생각하기에 전자의 史料를 擇하지 않고 後者의 것을 擇한 입장을 해명한 史論이다.이들 세 史論을 通하여《東國通鑑》의 찬자가 역사서술에 있어서 윤리적인 다.
Ⅰ. 머리말高麗 恭愍王代(1351.12 ~ 1374.9)는 元의 간섭과 통제로 시작된 고려후기의 제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질서의 수립을 추진해간 역사적 과도기의 시작이었다. 원명 교체기라는 국제 정치질서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공민왕의 정치적 개혁은 대내외적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었고 이후 조선왕조 개창에 이르는 정치개혁의 중요한 일보를 내딛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공민왕대 정치사의 내용과 그 성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겠다.Ⅱ. 恭愍王代의 政治內容① 初期 反元的 改革政治고려 공민왕 5년 5월에 전격적으로 奇轍 등의 부원세력을 제거함으로써 막이 오른 반원적 개혁정치는 고려 정치사의 새로운 전개를 알리는 커다란 변혁이었다. 고려의 자주성 회복과 왕권의 강화로 특정지워질 수 있는 이 변혁이 원의 쇠퇴와 한족의 반란이라는 중국대륙에서의 정세변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고려가 원의 부마국으로 있는 가운데 꾸준한 변화가 이루어져 적극적으로 전환기에 대응할 수 있었던 점이라 하겠다.우선 반원적 개혁정치가 전개되는 과정을 살피고 마무리되는 사정을 검토하겠다.사전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奇轍 등의 대표적 부원세력을 전격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제1단계에 접어든 이 변혁은 鴨綠江以西의 八站과 쌍성총관부에 대한 군사적 공격이 성공함에 따라 제 2단계로 진입하여 원의 至正年號를 정지시키고 관제를 復改시키고 내정의 개혁을 추진하는 적극적인 시책을 폄으로써 커다란 진전을 보았으며, 이에 대한 원의 대응이 소극적이고 사태를 축소 해석하려는 것임을 간파한 고려는 제3단계로 들어가 將帥인 印 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여 斬殺시켜 원에 사과하는 형식으로 일련의 사태를 수습했는데 그것은 고려가 失地의 수복과 자주성 회복이라는 큰 성과를 旣定事實化한 다음의 일이었다.반원적 개혁정치는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워낙 커다란 변혁이었던 만큼 몇 가지 후속조치가 필요했다. 우선, 정치적 안정을 위해 이제현과 같은 온건한 인물을 다시 등장시키면서도 잔존한 부원배들은 철저히 응징하였고 자주성을 되찾은 독립왕국으로서 가장 긴요한 군사력의 확보와 군제의 정비를 꾀하여 원과 접경한 북방지대의 군비를 갖출 수 있었으며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여 원과는 외형적인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영향을 철저히 봉쇄하는 한편 중국대륙에서 새로이 흥기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군사적, 외교적으로 적극 대처함으로써 외압을 해소시키는 방도를 모색하였다. 약 3년 동안의 후속조치를 통해 반원적 개혁정치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여겨지자 공민왕은 誅奇轍功臣을 封功함으로써 일련의 변혁에 일단 종지부를 찍고 이 역사적 대사건의 정당성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閔賢九, 〈高麗 恭愍王代 反元的 改革政治의 展開過程〉, 《韓國史學論叢》, 일조각, 1992 pp.256-257② 辛旽의 등장반원적 개혁정치로 무장세력이 성장함에 따른 왕권의 제약은 공민왕이 즉위 이래 추진하여온 왕권의 강화와 공민왕 중심의 개혁정치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반원적 개혁정치로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공민왕의 신변과 국가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무장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공민왕은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이에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師傅로 삼아 국정을 자문하고 최영을 鷄林尹으로 폄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였다. 신돈과 비주류 무장, 그리고 재등장한 세족의 연합아래 내재추제) 내재추제도- 도당의 권한을 제약하고 축소시키기 위하여 궁중에 재신과 추밀의 일부를 두어 주요한 정무를 처결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의 실시를 통하여 도당의 권한을 약화시킨 상태에서 신돈 집권 초기의 개혁은 시작되었다. 이 개혁으로 일군의 과거급제자 출신의 관료들이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의 성장이야말로 신돈 집권기 동안의 가장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이런 개혁의 방향과 신진사류의 정치세력화는 신돈 집권기 초기에 정치를 주도한 세력 중 신돈을 제외한 비주류 무장들과 재등장한 세족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들은 대거 연합하여 신돈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 목적으로 신돈 집권기 이전에는 무장들이 정치세력화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신돈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들은 비로소 무장세력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 모의는 실패로 돌아가 신돈 집권기 동안에는 정계에 복귀할 수 없었다.이렇게 공민왕의 의지와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신진사류들에 의해 신돈을 등용한 개혁정치는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러나 국내외적인 여건의 변화는 공민왕이 새로운 시도를 계획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먼저 국내적으로는 신돈이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갖게 되어 신돈의 권력이 공민왕의 왕권을 망각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추측하게 한다.다음으로 국외적인 상황의 변화로 어떤 세력이 중국을 통일할 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공민왕은 중국의 여러 세력들과 폭 넓은 교류를 해나간다. 그러나 점점 원의 세력이 약해지고 새로운 강자로 명이 자리잡자 자신의 왕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명과의 국교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간다. 이와 같은 대외관계 변화는 신돈 집권기와는 달리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을 필요로 하게 되고 무장과 도당을 억제하는 역할을 맡았던 신돈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고 만다.) 李亨雨, 〈高麗 恭愍王代의 政治的 推移와 武將勢力〉,《군사 제39호》, 서울 국방군사연구소,1999, pp 35-45③ 恭愍王의 정치운영공민왕은 또 다른 정치변혁을 시도하는데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조처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왜구의 침입도 한 원인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두 차례에 걸쳐 동녕부 정벌을 단행한 사실과 명이 고려에 대하여 고압적인 외교자세를 취한 것 등 중국 대륙의 정세변화가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또한 공민왕은 도평의사사의 역할을 강화시켜준다. 이것은 기득권을 가장 많이 누리고 있는 고위관료층, 다시 말하면 도당을 자신의 왕권을 지지하여 줄 세력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변화를 주도한 것은 어디까지나 공민왕 자신으로서 공민왕은 도당에게 국정운영의 권한을 일부 양도한 것이지 결코 도당에 의하여 왕권이 크게 제약당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무장세력은 비록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공민왕의 명령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작전을 수행하면서 공로를 세워 나갔지만, 이미 신돈 집권기에 철저히 소외를 당한 경험이 있던 만큼 그 이전처럼 자의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경을 넘는 작전 등을 통하여 그들의 휘하 군사에 대한 통제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민왕이 뜻밖의 시해를 당한다. 그리고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무장세력은 이후 정치운영의 주도세력으로 다시 일선에 나설 수 있었다.) 李亨雨, 〈高麗 恭愍王代 政治的 推移와 武將勢力〉, 《군사 제39호》, 서울 국방군사연구소, 1999, pp47-53Ⅲ. 恭愍王代 政治의 性格① 군주 중심 정치 질서의 지향공민왕대의 정치의 성격을 알아보려면 우선 공민왕의 지향하는 바를 알아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공민왕은 문헌에 나타나는 이상적인 군주상과 같아지려고 했고 그것과 비슷한 정치형태를 보임으로써 자신이 이상적 군주상에 걸맞는 인물임을 보이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일반 신하들보다 우월한 자신의 정치적 주도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이러한 공민왕의 생각은 정치를 주도하는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다. 시기마다 주변의 세력들을 바꾸면서 그 중심에 서서 행동했고 왕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이던지 정당화시켰다.② 측근 중심의 정치운영공민왕은 원 간섭기 국왕들의 일반적인 정치운영 방식인 측근 중심의 정치운영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즉위 당시의 정계 구성은 그 이전의 원 간섭기 국왕들이 즉위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새로 즉위하는 국왕과 국내 관료세력과의 직접적인 유대관계가 미약했던 전 시기와 달리 공민왕은 당시 국내의 중요 정치세력인 이제현 중심의 개혁 지향적 관료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공민왕은 귀국 이후 국내에서 자신을 후원하였던 개혁관료들을 소외시키고 전대의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연저수종공신들을 비롯한 측근세력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조일신란으로 귀결되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조일신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공민왕은 다시 개혁관료세력의 후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공민왕 5년에 단행된 본격적인 반원개혁과 부원세력의 척결은 역시 국왕 측근세력들에 의해 단행되었고 이때도 개혁관료들은 논의의 중심에서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