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멜 이전의 사회학에서 사용되던 접근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꽁트와 스펜서가 주장한 유기체적 접근방식과, 칸트와 신칸트 학파가 지지한 독일 관념론의 일회적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기술방식이 바로 그것인데, 짐멜은 이러한 두 가지의 방식 모두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사회를 연구하고자 하였다.즉, 짐멜은 사회를 하나의 사물 또는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이해하는 유기체적 접근 방식과,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은 질적으로 상이하다는 전제 하에 보편적 자연 법칙을 내세우려는 연구 방식 대신, 인간 문화의 연구에는 인간 역사의 일회적 사건들을 묘사하고 기록하며, 법칙성의 수립을 거부하는 관념론적 접근방식을 모두 거부하며, 사회를 서로 일정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개인들 간의 복합적 관계로 이루어진 복잡한 관계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짐멜은 사회는 상호작용으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개인들을 지칭하는 이름에 불과하다. 라고 주장하며, 따라서 사회학은 사람들이 상호작용에 의해 집단을 형성하고, 그 집단의 존재에 의해 결정지어진다는 것을 밝히는 일을 주된 연구로 삼으며, 사회학자는 사회성(사람들이 서로 연합하고 상호작용하는 특수한 유형이나 형식)을 다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사회학을 인간의 모든 측면을 다루는 지배적 과학으로 만들려는 것은 짐멜에게 있어서 오히려 자기기만적인 것이었다. 모든 물질을 포용하는 전체적인 과학이 없듯이, 그러한 전체적인 사회과학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이 전반적인 전체성을 다루기보다는 현상의 재차원들이나 어떠한 한 측면을 연구해야 하듯이, 사회학이 다루어야 할 대상은 인간 상호작용의 특수한 형식들과 그것들이 집단적으로 결정화된 특성들을 묘사하고 분석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짐멜은 상호작용이 타나내는 영구적이고 제한된 수의 형식들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거대한 제도화된 구조를 사회학적 탐구의 정당한 영역이라고 간주하였지만, 대부분의 연구를 그가 사회의 원자들간의 상호작용 이라 부른 것의 탐구에만 국한시켰고, 대체로 그는 거대한 사회적 형성체의 밑에 놓여 있는 개인들간의 기본적인 상호작용의 형식에만 관심을 제한시켜, 그의 사회학은 다분히 미시사회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짐멜은 특수한 역사적 사건들은 일회적임을 인정하였지만, 그러한 일회성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들의 저변에 놓여진 제일성을 탐구하며, 구체적 내용으로부터 추상화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구체적 내용으로부터 추상화시킬 것과 사회생활의 제형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 때문에 짐멜의 접근 방식은 형식사회학 이라 불리운다.짐멜은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며, 형식은 내용 속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 독자적 실체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형식에 관한 견해는 플라톤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 짐멜은 형식을 독립적이고 나름대로의 존재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형식은 내용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며, 독자적인 실체가 아닌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현상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되어질 수 있으며, 복잡한 사회적 내용들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제한된 수의 형식을 분석하는 것은 사회생활에의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사회 현상의 형식과 내용을 구분한 그의 분류는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사회학은 인간의 사회성의 이질적 내용으로부터 형식을 분리해 내는 것이며, 이것은 사람들이 특정 연합체를 구성하게 되는 이해와 의도가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이해와 의도가 실현되어지는 상호작용의 사회적 형식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그런데, 사회현상은 복합적인 형식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 현실 속에서 발견되는 제형식들은 결코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짐멜은 순수한 형식이란 구성물, 즉 결코 완전하게 현실화되지 않는 전형적인 관계로 규정짓고, 막스 베버가 이념형을 사용하여 연구하였듯이, 현실의 제측면들에 관한 일반화가 아니라 현실의 밑바닥에 놓여 있으면서도 실제로 그 속에서 활동화되지는 않는 윤곽이나 관계들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과장이라는 방법을 통해 형식을 구성하여 사용하였다.짐멜의 형식사회학에서 형식 이란 용어의 선택에 대해 코저는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이중적 성격을 띠는 것도 포함하여 많은 철학적인 의미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짐멜이 형식이라는 용어 대신 사회구조란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그 개념이 가지는 혼란이 덜 했을 것이다. 짐멜의 후학들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형식사회학 이란 말 대신에 관계학 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짐멜은 또한 사회적 형식을 보완하기 위하여 사회적 유형이라는 것을 구성하였다. 그는 각자의 독특한 사회적 유형을 타자의 특수한 반응과 기대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 사람의 유형은 그에게 어떤 특정한 지위를 부여하고 그가 특정양식으로 행동할 것을 기대하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의 특성은 사회구조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모든 유형들은 모두 특수한 상호작용관계에 의하여 지위를 부여 그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적 창조물인 것이다.짐멜은 사회적 단위들간의 동적인 상호 연관성과 갈등을 변증법적 접근방법 분석하였으며, 개인을 사회의 산물로, 사회과정에 있어서의 연결용 고리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전체적인 삶의 내용이 사회적인 행동요소와 상호작용 등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있더라도, 동시에 독자성의 측면에서 개인의 경험에 지향된 것으로도 관찰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짐멜에 의하면 사회화된 개인과 사회는 참여와 대립이라는 언제나 이중적인 관계에 놓여져 있다. 즉, 인간은 사회적인 연결 고리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존재이며, 사회의 산물이자 동시에 자율적인 중심을 지닌 삶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는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나며, 인간관계는 양면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짐멜은 개인의 사회적 행위를 그 자체로 파악하지 않고 다른 개인의 행위나 특정 구조 또는 과정과의 연관을 중심으로 파악하고 분석하였다.또한 그는 사회적 외형과 사회적 실체를 구분하였으며, 사회적 갈등은 상호적인 행위 속에서 상호적인 관계에 기초하며, 때로는 갈등은 기존의 연대를 강화하거나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적인 힘으로 간주하였다.짐멜은 집단의 양적인 제측면 이라는 논문에서 사회적 행위의 구조적 결정요인에 대해 분석하였다. 여기에서는 집단과정과 구조적 배열의 제형식을 순전히 양적인 관계에서 도출하여 조사하였는데, 사회집단을 가장 단순화하여 양자관계로 분석하고 이를 발전시켜 삼자관계를 연구하였다.양자관계에서는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며, 따라서 전적인 구속과 책임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삼자관계로 변화되면, 단순히 한 사람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질적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제 3자는 중개인의 역할을 맡거나 혹은, 양자의 다툼을 관망하다 어부지리를 얻을 수도 있으며, 분할과 지배의 방식을 사용하여 지배적 위치 점유하거나 혹은 갈등 유발시킬 수 있다. 삼자관계는 직접적인 상호작용에 입각한 양자관계와는 달리, 두 사람의 연합을 통하여 다른 한 성원에게 그 의지를 강요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삼자관계는 모든 사회생활을 형성하는 자유와 구속, 자율과 타율의 변증법의 가장 단순한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짐멜은 이 연구를 통하여 심리학적 환원주의의 전체적인 무용성을 입증하였고, 이를 소규모집단과 대규모집단 분석에 응용하였다.소규모집단은 구성원들 사이에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며, 구성원들의 높은 참여도를 그 특징으로 하는데 반해, 대규모집단에서는 상대적으로 참여도가 약해지며, 상대적 책무성이 줄어들게 된다. 또한 대규모집단에서는 그 집단을 효율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대표를 선출하고, 구조적으로 분화되어 불평등한 구조가 생기게 되고, 초인적인 권력으로 개인이 직면케 되는 객관적인 구조 속에서 개인의 자유가 구속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성원의 수가 그 집단의 특징을 결정하며, 다수는 개인에게 집단의 실재성을 믿게 만들고, 때로는 개인이 집단에 대해 적대성을 지니도록 만드는 것이다.짐멜이 사용한 자유와 집단구조간의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변증법적 접근방식은 역사발전의 주된 경향을 파악하고 평가하여 그 시대를 진단해 보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며, 이를 사용하여 짐멜은 집단관계와 사회적 연대의 유형과 속성을 이론화시킬 수 있었다.변증법적 접근방식을 통해 역사발전의 주된 경향을 파악하고자 했던 짐멜은 현대사의 흐름을 인간의 창조물인 문화적 산물이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점차로 증대시켜 감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속박과 인간에의 종속으로부터 개인이 점진적으로 해방되어 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지식사회학은 사회학의 한 영역으로서 간단히 말하자면, 사상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며, 지식의 사회적 존재적 제조건을 탐구하는 것이다.만하임은 지식과 사회 사이의 상호의존성의 성격을 고찰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는 그의 연구의 모든 부분에 걸쳐서 여러 사상들을 그들이 여러 가지로 뿌리박고 있는 구조들과 관련시켜 탐구하였다. 즉, 구조의 개념과 상호연관성의 개념이 그의 모든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모든 저작에 지침을 주고 있다.만하임은 사상에 대한 원자론적 고립적 접근 방법을 배격하면서, 사고란 것은 하나의 구조적 틀 내에서의 다른 사회적 활동과 반드시 관련되는 하나의 활동임을 강조하였다.{) 만하임에 있어서는 사회학적 관점이란 처음부터 모든 영역의 개인적 활동을 집단적 경 험의 맥락 안에서 해석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칼 만하임,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1936그러므로 사고는 반드시 집단 생활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지식은 처음부터 집단 활동의 협동적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이며, 집단 생활의 협동적 과정 속에서 공통의 운명과 공통의 활동과 공통의 곤란을 극복하려는 틀 내에서 각 개인은 자기의 지식을 전개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이다.만하임은 여러 가지 흐름의 사상과 여러 가지 학설과 관점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여러 가지 전망적 관점들을 통합하려고 시도했으며 하나의 새로운 종합을 창출해 내려고 시도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저작 속에서 지식과 사회의 관련에 대한 추론의 통합되고 일관된 방법을 배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만하임의 저작의 모색적 임시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그의 주요 사상을 간명하게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의 주장은 때때로 모순되는 듯 보이며, 만하임 사상의 초기관점과 후기관점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하임의 후기의 정식화(체계적 서술)는 초기의 그것을 상기시키며, 그가 중년에 도달한 정식화와는 크게 모하고 보다 깊은 연구를 인도한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비판적 합리주의에 기초한 계몽주의 철학은 사회이론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지식사회학적 이데올로기 분석과 관념의 관념 외적 영향관계를 규명하는 초기적 단서를 제시해주었다. 이러한 계몽주의적 철학의 전통은 칼 마르크스에 의하여 재확인되 었고, 조직 내지 도덕적 공동체와 원시사회에서의 공리적 범주 구성간의 폭넓은 관계를 규명한 에밀 뒤르껭, 딜타이의 세계관의 철학 과 실증주의를 비판하며 현상학적 관점을 주장한 막스 쉘러, 그리고 에서 이념적 요소와 물 질적 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야기되는 모든 사회적 현상의 인과율을 분석한 막스 베 버 역시 지식사회학의 이론적 선구자들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모 든 사상과 인식론을 비판하고 종합하여 지식사회학 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며 지식사회학의 연구대상과 방법론의 틀을 직접적으로 마련한 것은 칼 만하임이다.만하임은 문화적 대상 내지 지적 현상을 다루는 두 가지 방법을 구분했는데, 하나는 이들을 안으로부터 (from the inside) 이해하는 것으로, 이것은 그 내재적 의미를 연구자에게 설명해 준다. 다른 하나는 지식사회학의 방법으로, 그것은 사상가가 불가피하게 그 안에 빠져드는 전사회적 과정의 하나의 반영으로서 밖으로부터 (from the outside)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지식은 존재구속성이며, 존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즉, 만하임은 사상을 단순히 안으로부터 관찰하는 방법으로부터 전환하여 사상을 사상가들이 여러 가지로 몰입되고 있는 사회구조에서 나온 결정인자들에 대한 반응으로 보는 방법으로 옮아갔다.또한 만하임은 철학을 실재와의 관련 속에서 연구하고자 한 마르크스의 실용주의적 연구 방향을 일반화하려고 기도했으며, 사상체계가 그 제안자의 사회적 위치에 의존하는 방법을 분석하려고 기도했다. 그는 사상을 사회적 조건에서 분리시켜 해석하는 역사주의자들의 경향에 반대하였고, 사상을 사회세계에 기다른 개념화들도 보충하여 활용하였다. 그는 모든 사상은 심지어 진리 까지도, 그것이 나온 사회적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되는 확률성을 인정하였다.만하임은 지식사회학을 사상의 사회적 존재적 조건화의 이론이라고 정의하였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지식과 모든 사상은 사회 구조와 역사적 과정 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떠한 위치에 구속되는 것이었다. 즉, 서로 다른 사회적 위치에 뿌리를 둔 상이한 시각으로부터 공통의 대상을 보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인지적 결론과 서로 다른 가치판단에 도달하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상은 상황적으로 제한적 인 것이다.지식의 존재 구속성이란 개념은 만하임의 학설의 주춧돌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지식의 존재 구속성은 지식 획득의 과정이 실제로 내재적 법칙에 일치하여 역사적으로 전개되지 않으며, 사물의 본질 이나 순전한 논리적 가능성 에 따르지 않고, 내적 변증법 에 의하여 추구되지 않음 이 나타내질 수 있을 때 확립되는 것이다. 만하임은 지식의 존재 구속성은 이론외적인 즉, 존재적인 요인들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음이 타나내질 수 있을 때 확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만하임은 설명의 특정 측면만이 편견으로 채워질 가능성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되는 이데올로기의 특수적 개념 으로부터, 사상의 전체 양식과 전체 형태와 전체 내용이 모두 그 제안자의 사회적 위치에 구속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체적 개념 으로 이행한 것이다.그는 존재구속성 이라는 용어는 기계적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였으며, 오직 경험적 조사연구만이 구체적 사례들 속에서 그 관계의 정확한 성격을 설명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설명은 사회구조와 지식 사이의 관계의 제형태를 규정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는 사고와 사회구조 사이의 관계를 보다 정확하게 지적하기 위하여 다양한 용어들을 사용하였다.만하임의 저작 속에서는 사상의 전달자들의 서로 다른 사회적 한다. 그러나 만하임은 자기자신을 마르크스의 계급분석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연구 프로그램에 한정시키지 않고 있다. 만하임은 사상의 존재적 규정 요인으로서 지위집단과 직업범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제요인을 포함하였다.만하임은 사상과 관련된 사회적 제요인에 추가하여 세대차의 요인을 분석하기도 했다. 세대의 사회학에 대한 분석은 과거의 연구들에서는 등한시되었으나, 만하임에 의해서 재발견된 것은 지식의 존재적 규정성의 하나의 중요한 예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지식사회학에 대한 만하임의 이론적 공헌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이해될 수 있다.즉, 그 한 부분은 사회관계가 실제로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들의 구조적 분석과 설명을 통한 순수한 경험적 연구 를 포함하는 중요한 공헌이고, 다른 한 부분은 타당성 문제에 대한 이 상호관계의 의미에 관련된 인식론적 연구 를 포함하는 중요한 공헌이었다.만하임은 지식사회학이 명제의 진실가치의 정립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으며, 그는 지식의 사회학적 이론, 사회학적 인식론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에 따라 설명의 진실성이 오직 그 저자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조사 연구를 통해서만이 확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보편적인 인식론의 상대주의를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한 명제의 진위나 전체적인 이론구성의 진위는 사회학적 설명이나 또는 다른 어떠한 초원론적 설명의 방법으로는 지지될 수도 없고 공격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등, 그의 주장은 작업 시기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지식사회학에 대한 그의 작업의 중년기에, 만하임은 모든 사고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는다고 의도적으로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비평가들은 그러한 입장은 자가당착적일 뿐 아니라, 전체적 절대주의와 허무주의로 인도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맞서 만하임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의 요청에 대한 실용주의적 적응이론에 관련된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적응이론 역시 취약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적응에 기여하는가 기여하지 않는가에 불만족스럽다는 사실이 판명되자, 사회적으로 자유부동(自由浮動)한 인텔리겐챠 (die sozial freischwebende Intelligenz){) Intelligenz : 좁은 뜻으로서의 인텔리겐챠는 19세기 중엽 제정 러시아의 구체제의 지적 비판가들을 말하며, 넓은 뜻의 인텔리겐챠는 지적 작업에 종사하는 중간적인 사회계층, 곧 일반적으로 지식인을 의미한다.개념을 사용하여, 타당성 있는 사상이 산출될 수도 있음을 주장하였다. 즉, 비록 모든 계층과 집단들이 사상들을 산출해 내고 그 사상의 타당성이 그 사상의 지지자들의 사회적 위치로 말미암아 타협된다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자유부동한 인텔리겐챠 는 그들의 사회적 배경과 단절되어, 상호 대화를 계속하여 상호 비판 속에 본래의 편견을 버릴 수 있으므로 타당성 있는 사상을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개인으로서의 지식인은 때로는 혼성(混成)의 세속 위에 있을 수 있으나, 하나의 범주로서의 지식인은 교육과 지적 노력을 통해 비판적 초연의 영역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실용주의적 적응 개념과 자유부동하는 인텔리겐챠의 개념은 만하임이 지적 받았던 절대주의적 허무주의라는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부족하였다.후기의 만하임은 모든 사상이 반드시 이데올로기적이며 따라서 타당성이 없다는 종래의 주장에서 조금 물러나서, 전망적 사상은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지지자들의 사회적 위치로 말미암아 일면적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모든 설명의 필연적 이데올로기성을 주장하기 보다는, 전망주의적 사상은 편파적 관점을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경고로서 상관주의(relationism)"를 주장하게 되었다.인식론의 혁명을 가져왔던 그의 사상은 상관주의 학설로 약화됨에 따라 그 이전의 신칸트학파와 막스 베버가 탐구한 가치연관(Wertbeziehung)의 입장에 현저히 접근하게 되었다.만하임은 지식사회학을 중요한 영역에서의 연구의 구체적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사상가들이 어떻게 그가 존재적으로 결합된 역사적 구조적 상황에 깊이 빠지게 되는가를
Ⅳ. 이론과 실천에 관한 문제의 역사적 기원으로서 근대정신헤겔은 정신을, 스스로를 실현해 나가는 발전 또는 창조로서 사유했으며, 철학에 있어서의 정신을 역사 속에서 추구했다. 그는 인간의 노동과,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정신 개념을 노동과정으로서 사유했다. 즉, 그는 근대에 있어서의 변혁을 유럽적 세계의 획기에 나타난 노동의 성격에 연관시켜 파악한다. 여기에서는 그가 근대 유럽 자체의 본질을 이론과 실천의 문제와 연관하여서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 유럽의 위치를 그것의 노동의 성격이라는 근거 위에서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1. 유럽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인 노동과 지배의 성격헤겔은 의식과 의지의 유럽적인 입장에 대해 라는 개념을 통해 접근한다. 이론과 실천의 상호대립은 유럽적인 것이며, 자기의식적 이성은 자신에 대한 신뢰 속에서 이성에 대립하는 어떤 것도 이성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자기의식적 이성은 모든 것을 공격하여 그 속에서 스스로를 현현시킨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유럽 정신은 세계에 대립하여 자신을 정립하며, 세계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다. 동시에 유럽의 정신은 세계를 사유 속에서 자체내로 복귀시킨다. 모든 것을 대상화시키는 사유의 이와 같은 활동이야말로 근대유럽에 있어서 특징적인 이성적 의식인 것이다.근대의 출발 이전에는 인간실재는 세계 속의 사물들에 대한 다만 수동적인 경험만을 겪는 반면, 관찰하는 이성으로서 인간적 실재는 경험자체를 촉발시킨다. 이 주권적인 방식은 17세기 이래로 존재자를 정복하여 온 그 성과를 통해 점차적으로 유럽에 있어서의 삶과 인간의 존재자 및 인간세계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헤겔은 유럽적인 학문의 의식을 본질적인 자신에 귀속시키는 방법을 최초로 개념화시켰다. 유럽 근대에 있어서 이성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며, 주관성은 존재자의 실체 속에서 그 스스로를 의욕한다. 유럽정신은 이론적 태도에서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과 외계 사이에 산출되는 통일을 추구한다.헤겔의 이 이론적으로 형성되며, 프랑스에세는 의지 속에서 실천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독일 철학 즉 칸트, 피히테, 쉘링에 있어서 혁명은 사상의 형태 속에 침잠되어 있으며, 사상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 독일 철학지에 있어서는 사유는 다만 자기동일적이며 긍정적으로 존립하는 것을 형성할 뿐이지만, 프랑스에 있어서 사유는 부정적인 즉 스스로를 운동하게 하는 사유로서 제시되며, 따라서 그와 같이 스스로 운동하는 사유 속에서 개념의 절대적인 위력이 나타났다. 무엇 때문에 정신의 동요가 프랑스에서는 혁명으로 이끌어졌으며, 두 나라가 각기 다른 역사의 길을 걷게 된 내적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헤겔에 의하면 근대의 역사를 그 궁극에로까지 추동하고 있는 자유에의 의지는 독일에 있어서는 부동(不動)의 이론에 머무르고 있었다. 칸트는 자기의식의 단순한 통일을 자유로서 파악하였으며, 이론적 이성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 칸트는 자유의 계기를 의지에로의 의지 속에서 실천적인 방식으로 파악했던 루소와 대비된다. 루소는 자유 속에서 이미 절대적인 것을 제기했지만, 칸트는 그런 원칙을 다만 이론적인 측면에서 좀더 부연하여 제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원칙을 의지의 측면에서 제기했다. 독일이 이론적인 것으로부터 실천적인 것에로 이행하지 못한 이유를 에서 헤겔은 프랑스인들이 현실성과 행위 및 완성에 대한 감각을 소유하였고, 따라서 표상은 직접 행위에로 이행하므로 프랑스인들은 현실에 대해 실천적으로 향한 반면에, 독일인들은 다만 이론적으로만 자유롭게 작용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즉, 독일에서의 루터의 개혁은 곧 독일의 혁명이었으며 현실 속에서의 화해였다.프랑스와 독일의 이런 대립은 이론과 실천의 문제 중, 전면(前面)에 놓여 있는 현상만을 해명할 뿐이다. 헤겔은 근대철학에 있어서의 자유의 원칙을 근대적 혁명을 통한 역사적 실현과 연관하여 사유하기 때문에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의 상호작용은 훨씬 중요하다. 바로 여기에서 양자의 계기의 통일, 즉 개념과 현실성, 정신과 자기자신에게 대상성과 정재를 부여하는 활동성에 있다. 자기의식은 자기자신을 대상으로서 산출한다.헤겔은 인간이 존재자에 자기자신을 산출하는 작용을 인간학적 현상과 관련하여, 『예나시대의 강의』의 주제로 삼았다. 여기에서 자기 산출 작용은 이론적인 계기와 실천적인 계기 속에서 주제화되었다. 헤겔은 양자의 등근원성 속에서의 상호작용적 연관을 살폈는데, 여기에서 칸트 이후제시된 철학에 의해 헤겔의 사유에 있어서의 이론과 실천은 근본적인 변천을 경험하게 된다. 의식의 이중성과 선험적 반성의 양자 종합이야말로 헤겔의 분석에 있어서 철학적 단초를 형성한다. 피히테가 그랬듯이, 헤겔도 선험적 주관성의 활동방식들과 선험적 주관성의 산출작용 속에 현전하게 되는 것을 전제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런 활동방식들은 존재자와 관계하는 인간의 존재를 특징짓고 있지만, 존재론적 대립의 문제는 중요시되지 않는다. 존재론적 대립과 같이 서로를 배제하는 규정들은 한편으로는 고전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존재론의 파괴로부터 출현하지만, 존재론적 원칙 자체의 전제의 강요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규정성들은 인위적인 추상물로서, 인간의 구체적인 존재파악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헤겔에 있어서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다. 현상하는 세계가 의식의 수동성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아니면 의식의 활동성을 근거로 하는가 하는 싸움에 관해서 실재론자는 의식의 수동성을 주장하며, 관념론자는 물질의 수동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헤겔은 본래 어떤 이성적인 것도 얘기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자신을 유기체적 통일로 조직하는 의식의 제 계기들을 주관의 능력이나, 경향, 열정 및 충동 등과 같은 형식으로서의 측면 위에서 고찰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의 반대인 사물의 규정성들로서의 측면 위에서 고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들은 주관을 양자의 통일과 중심이며, 절대적으로 대자적인 것으로서 고찰한다. 의식 자체 속에는 활동적인 운동뿐 아니라, 수동적인 운동 역시 속한다. 그러나 의식은 운동 자체이다. 의식은 양자의 대립이 다만천적 태도라고 언급했다.인간은 자연대상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변형시키며 그의 욕구에 적합하게 하려고 시도하는 한, 자연에 대한 이런 가공 속에서 그와 같은 기술을 보존한다. 즉, 실천적 욕구는 실천적 태도를 정립하며, 자연에 대한 모든 실천적 활동성의 전제는 헤겔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욕구 속에 있다. 이런 실천적 태도 속에서 개별자의 기술은 자연적 존재를 마모시켜, 인간의 욕구를 위해 변형시키는 공학(工學)으로 변화된다. 인간이 자연의 저항에 대립하여 자연을 자연에 대립시킬 때, 또는 자연적 사물을 자연적 사물에 대립하도록 향하게 할 때, 인간 이성의 위력적인 능력이 제시된다. 즉 이것이 존재에 대립하는 이성의 간지이다.이 점에서 헤겔은 칸트를 넘어서고 있지만, 근대적 인간의 자연에 대한 기술적인 관계를 통찰하여 라는 용어를 통해 개념화시켰다. 칸트에게서는 존재를 위압하며 자체내 충족적인 인간의 능력이 간지의 개념 속에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헤겔에 있어서 기술적인 수공업자적인 능력은 인간의 실천적 활동을 통한 자연의 지배와 인간의 힘 속으로 고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가 인간의 기술에 관한 문제를 고전적 개념인 기술로써, 또한 그것의 자연에 대한 의존을 통해, 사유하는 반면, 헤겔에 있어서 인간의 기술은 기계적 세계의 도래를 통해서, 그리고 그것과 결합하여 자연에 대한 또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간 의식의 위치를 통해, 공학(工學)의 문제로 된다. 이런 공학은 한편으로는 지배와 실천의 관계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과 제작이 전통적인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물음을 제기한다. 헤겔의 『예나 강의』속에서 우리는 욕구와 활동성 및 실천의 연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인간의 욕구는, 헤겔에 의하면, 인간은 그의 충동이 그를 자극하여 그의 주관성으로부터 내몰아 객관성으로 밀어넣기 때문에 충동을 통해 외적 대상들에 대립하여 활동하게 된다. 인간이 도구로서 존재자를 가공하여 형성할 때, 충동의 추동성은 도구의 존재에로 이행함으로써, 도구는 그 자체 운동시하여 준다. 자신의 자연적 삶의 동일성으로부터 나오며, 사물들 속 또는 대상들 속에 특수화되어 있는 자연과 관계하는 인간의 운동을 헤겔은 노동이라고 부른다. 노동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실천적 운동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부정의 활동성이 부정되어진 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어 방임한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대상을 자신에 대립하여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객체는 헤겔의 말 그대로, 더 이상 객체일반으로서 부정되지 않고, 오히려 어떤 다른 것이 그 자리에 정립될 뿐이다. 노동이라는 실천적 운동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바로 욕구와 향락의 차별이다. 사실 여기에 있어서 향락은 저지되고 유예되어 관념적으로 된다.생명에 있어서의 실천은-헤겔에 의해 실천적 감정의 최초 가능성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다만 무화(無化)라는 한 가지 운동에 있지만, 그것에 반하여 욕구와 같은 내면적인 것으로부터 유래하는 인간의 실천적 운동은 외적 존재자에 대립하는 삼중적인 활동성을 전개한다. 그것의 처음은 대상의 단순한 동화이나, 대상을 자신에 귀속하는 것, 그 다음은 우리가 창조라고 부르는 대상의 형성, 마지막으로 대상의 보존 및 이것과 결합되어 있는 다양한 활동이다. 점유취득은 이와 같은 귀속작용에 있어서 최초의 관념적인 것, 또는 이런 귀속작용의 아직 활동하지 않는 휴식상태이다. 노동은 실재적인 운동이며, 귀속하는 주관이 객체의 실재성 속으로 침투하는 것이다. 세 번째 종합은 객체의 점유이며 객체의 보존 또는 절약이다. 이 세 번째는 첫 번째 계기에 따르면 객체 속에 실재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헤겔의 분석을 좀더 철저하게 해석하는 것은 이곳에서는 단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문제설정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다만 실천개념을 분간하는데 있어서 출발점은 생명체의 욕구 속에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이 점에서 헤겔은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사이의 모든 실천개념에 대한 이론과 구별된다. 그의 철학에서 새로운 점이란 그의 철학이 노동의 본질을 파악할 뿐락한다.
자유와 속박에 관한 이야기를 사르트르의 희곡 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자유와 속박은 상반되는 개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책임질 줄 안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신의 세계를 책임질 수 있다. 자신의 세계를 책임진다는 것은 자신의 동료 인간들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뿌리박고 있지 않고, 어떠한 의무도 짊어지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단지 속박받지 않는 자에 불과하다. 속박은 나를 자유에로 붙들어 매는 속박이며, 자신의 자유를 되찾으라는 호소인 것이다. 사르트르의 희곡 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복수를 소재로 재구성한 그리스의 비극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는 단순한 희곡이 아니다. 사르트르가 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고대 비극을 수용하여 인간의 삶의 운명적 차원,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서 정형화하고자 했던, 행복의 불행으로의 급변을 통찰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라고 하는 실존론적 논제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 남매가 자신의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아이기스토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작품의 초점은 단순히 복수에 맞춰져 있지 않다. 좀 더 자세히 작품을 살펴가며 이야기 해 보자.이 작품은 오레스테스가 낯선 차림으로 코린트에서 아르고스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된다. 처음에 오레스테스가 아르고스를 찾게 된 동기는 복수가 아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향수로 그의 스승과 함께 아르고스를 방문한 것이다.그가 고향에서 3년 간 추방당한 동안에 그 곳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고향을 방문한 그는 그 곳 사람들의 이상한 태도에 놀랄 뿐이다. 시민들은 모두 상복을 걸치고 불안에 쫓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대문을 닫아 걸고 집안으로 도망쳐버리는 사람들에게서 오레스테스 역시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시민들의 이상한 태도는 그리스적인 환대가 베풀어질 때면 더어떠한 것에도 속박받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고자 하지 않는다. 아니, 자기 자신의 삶조차 책임지기를 두려워한다. 오레스테스 역시 마찬가지다. 자유에 대한 그의 단순한 앎이 그의 삶을 떠다니게 하는 것이다. 그의 삶은 무게가 없다. 속박 없고 매임이 없는 삶은 뿌리를 잃어버린 삶이다. 사물들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그 위를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자유의 결핍을 의미한다.하이데거가 말했듯 한 사물과의 왕래를 통해 사물 그 자체는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사람들은 그 사물에서 무엇이 자신에게 중요한지를 경험한다. 오레스테스에게서 아르고스란 도시는 단순히 그의 출생지일 뿐이다. 그의 유년의 경험은 아르고스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그에게선 더 이상 아르고스가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그러므로 오레스테스는 아르고스를 떠나고자 한다.그러나 극의 제 3장에서 엘렉트라의 등장으로 상황은 급변한다. 엘렉트라는 주피터 상에 제물 대신 쓰레기통을 쏟아붓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이 돌아와 죽은 자들의 신의 지배를 멈추게 하길, 그 신의 입상을 칼로 조각내어 모두가 두려워하고 따르며 숭배하는 그 입상이 단순히 나무로 만들어진 조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희망한다. 오레스테스는 엘렉트라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궁중에서 겪어야만 했던 수모와 친구도 친척도 없으므로 인해 생겨난 공포스런 고독감에 대해 알게 된다. 엘렉트라의 삶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들을 증오하는 것으로 일관되어왔다. 엘렉트라는 시민들이 거행하는 의식을 비웃는다. 그녀는 군중들의 후회의 고백이 거짓임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고백은 단지 다름 범행들을 숨기기 위해 짜낸, 특정의 범행을 고백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엘렉트라의 의심과 그녀의 유일한 희망, 그녀의 괴로움과 굴욕, 쓸쓸함 등 그 모든 것이 오레스테스의 결심을 뒤바꾸고 그를 도시에 머무르게 만든다.제 2막에서 군중들은 동굴 앞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기를 기다린다. 왕과 왕비는 공주로서 거기에 참석해더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신들과 왕들의 고통스런 비밀은 인간들이 자유롭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은 자유롭다네 아이기스토스여.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 그러나 신들과 왕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네……. 자유가 한번 인간의 영혼 속에서 터트려지고 나면, 신들은 이러한 인간들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사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자유를 터트린 인간을,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거나 그를 목졸라 죽이는 다른 인간들-오직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지."주피터는 처음에는 오레스테스가 도시를 떠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아이기스토스에게 오레스테스를 잡을 것을 설득한다. 그것은 오레스테스가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아는 인간이며, 그의 본보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인위적으로 세워진 질서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자는 권위에 대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제 3막에서 이루어지는 주피터와 오레스테스 사이의 대화 속에서 작품의 주제가 강조된다. 오레스테스는 아이기스토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인 후 자유로움을 느낀다."…… 우리는 하나야. 어제까지 우리는 혼자였지만 오늘은 내게 누나가 있어. 우리는 이중으로 피의 끈으로 묶였어. 우리는 한 핏줄이자 피를 함께 흘렷기 때문이지. …… 엘렉트라 누나, 나는 자유야! 자유가 번개처럼 나를 덮쳤어."" 자유라고? 나는 자유가 느껴지지 않아. 이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해줄 수는 없겠니? 무엇인가 일어났어. 우리는 그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가 없어.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않은 거야."" 누나는 내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길 원했다고 믿는거야?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어. 그리고 나의 이런 행동은 훌륭했어. 나는 나의 행동을 나의 두 어깨에 짊어지겠어. 사공이 여행객을 물 위로 실어 나르듯이 말이야. 나는 나의 행동을 강변 저편에 다다르게 한 뒤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겠어. 내 행동을 짊어지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의 기쁨은 커지겠지. 왜냐하면 나레스테스, 엘렉트라 등이 주고받는 대화이다. 주피터는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에게 도움을 줄 것을 약속한다. 또한 아르고스의 왕관까지도 그들의 손에 쥐어 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붙는다. 그 조건은 바로 그들 자신이 한 행위를 후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레스테스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주피터는 그의 누이가 겪는 고통을 지적하며 오레스테스를 설득하려 든다."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피조물아. 너 자신을 보거라. 너는 굶주림에 지친 암캐들에 둘러싸인 채 도움을 베푸는 신의 두 발 사이에 몸을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만 같구나. 네가 자유롭다고 감히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깊은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의 자유와 십자가 처형을 받은 노예의 자유도 칭송해야 할 것이다."사르트르는 자유란 어떠한 외부적 힘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려 한다. 사람들은 사로잡힐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다. 오레스테스는 주피터에게 반항하지만 엘렉트라는 주피터의 조건에 동의한다. 주피터는 그녀의 행위를 용서하기 위해 그녀가 꿈을 꾼 것처럼 꾸며서 그녀 자신이 무거운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스스로를 속일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가 주피터의 해석을 승인하는 순간 그녀는 오히려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자신의 행위와 동일시 하지 않으며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그녀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 - 그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해석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하는 자,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이 산출해주기를 바라는 자는 자신의 행동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삶까지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이란 곧 그의 행동들이기 때문이다.오레스테스가 신에 의해 설정된 법칙 아래 예속되도록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피터는 알고 그는 신들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주피터는 자연의 신이다.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은 각자의 자리왕으로 삼았고, 옛날의 범죄는 도시의 성벽들 사이 여기저기에서 출몰하며, 주인을 잃은 개처럼 낮은 신음 소리로 울어댔다. 너희는 나를 직접 바라보고 있다. 아르고스의 시민들이여, 너희는 내가 저지른 범죄가 나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그 범죄를 태양이 내려다보는 앞에서 나를 위해 요구한다. 나에 의해 저질러진 그 범죄 행위는 내 삶의 근거이자 나의 자랑이다. 너희는 나를 응징할 수도, 나에게 벌을 내릴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불안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시민들이여,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너희 때문에 살인을 한 것이다. 너희를 위해서. 나는 내 왕국의 반환을 요구하기 위해서 왔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너희 가운데 한 명이다. 오! 나의 백성들이여. 우리는 피로써 맺어졌다. 나는 너희의 왕이 될 만하다. 너희의 죄와 너희의 참회, 밤마다 되풀이되는 너희의 불안, 아이기스토스의 범죄함 등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그것은 다 나의 책임이다. 너희의 충성스런 파리떼는 너희를 떠나 내게로 날아왔다. 그러나 아르고스의 사람들이여, 두려워 말라. 내가 앉게 될 왕자는 나에게 죽임을 당한 자가 차지하고 있었던, 아직도 피비린내가 나는 그런 왕좌가 아니다. 한 신께서 나에게 그런 왕좌를 주겠노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왕좌를 거절했다. 나는 나라도 신하도 없는 왕이 될 것이다. 나의 시민들이여, 잘 살아라. 살기를 노력하라. 여기는 모든 것이 새롭다. 모든 것은 처음부처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오레스테스는 시민들을 뚫고 지나간다. 에리니에스들이 그의 뒤를 따른다. 오레스테스가 전제 군주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여 시민들을 파리떼로부터 해방시키기는 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그는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고, 또 시민들이 그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로 인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를 죽이려한다. 그가 속임수로 시민들을 현혹시킴으로써 아르.
◀ 목 차 ▶. 서론- 문제 인식. 본론-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의 과정과 배경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과 '새 역사 교과서'자유주의 사관의 특징과 역사교육의 목적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주요 일지- 일본 교과서의 역사왜곡 내용 분석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실태와 우리측의 수정 요구-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대한 우리의 대응. 결론- 역사 왜곡에 대한 앞으로의 대응 방안 모색. 참고 자료. 서론- 문제 인식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지난 2001년의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2001년 4월 3일,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8종의 역사 교과서 중에서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新しい歷史敎科書をつくる會)'에서 만들고 후소샤(扶桑社)가 펴낸 중학교 사회과 역사 교과서(이하 후소샤 교과서 로 표기)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후소샤 교과서는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관한 내용을 기존 교과서보다 대폭 축소하거나 미화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왜곡 표현했던 것이다. 이는 국제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은 우리측의 수정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그 내용을 수정하였지만 여전히 우리의 고대사와 일본의 침략전쟁 등 상당 부분은 왜곡된 채 표현되어 있는 실정이다. 후소샤 교과서의 채택률은 비록 그것을 기획했던 모임의 목표인 10%에는 못 미치는 저조한 비율이었지만 몇몇 사립학교에서 교과서로 채택되었고, 그들이 기약한 4년 후는 2005년, 곧 내년이므로 또 한 차례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이 터질 것으로 예상된다.물론 일본의 역사 교사서 왜곡이 문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러한 일본의 역사 왜곡은 이미 6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80년대 초부터 국제적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역사 는 학생들에게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국민으로서의 자질을 길러주는 기본 교과로, 세계화, 국제화 시대인 현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타문화를 존중하고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기 위해서 역사 교육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그런데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따라서 시바 사관 은 현대인의 눈이 아닌 역사상 인물의 눈과 감성만으로 그 당시의 역사를 보려고 하는 동시대사적 한계를 갖고 있다. 고 지적한 뒤 역사학이라는 것은 대상으로 하는 시대의 동시대인의 사상·감성에 몰입해서 그 논리를 분명히 함과 동시에 그 동시대인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고 비판하고 있다.{ 山田朗, 위의 논문, p.58.한편 야마시나 사부로(山科三郞)는 전략론이란 원래 자국의 국익을 방위하기 위하여 어떤 정책을 입안하고 어떻게 군사력을 배치하고 유사시에 어떻게 유효하게 군사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라는 관점에서 지리적 위치 관계나 정치적·경제적 역관계를 파악해 국가 권력의 중추인 군사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어느 국가에 대해 사용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국제 정치에서 국가전략을 마련하는 사고 방법 으로 자국의 국익을 최고 가치로 삼는 국익지상주의 사관 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군사력을 행사해 타민족의 생존권을 유린한 사실도 정당화하는 군사중심주의 사관 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山科三郞, 松島榮一·城丸章夫編《「自由主義史觀」の病理》, 大月書店, 1997, p.23.후지하라 아키라(藤原彰)도 전략론적 리얼리즘이란 지도자의 전략으로 메이지 국가지도자의 전략인 대일본제국의 팽창 확대를 무비판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藤原彰, 《歷史評論》No.579, 校倉書房, 1998, p.9.{) 위의 논문 315 ~ 316쪽 참고.각주 14, 15, 16, 17번은 원문에 달린 각주를 재인용 한 것입니다.* 자유주의 사관의 본질적인 문제점역사교육이란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 사관의 보다 본질적인 문제점은 1 많은 교사들과 국민들의 큰 호응을 얻어 사회적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것, 2 기존의 역사교육과 역사교과서를 비판하기 위한 논리로 구성주의적 역사교육론의 주장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것, 3 자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는 일본인 육성을 역사교육의 목적으로 강조하서 왜곡 결의안 채택, 외무부 장관, 일에 교과서 입장전달일본교과서 왜곡규탄집회. 성명 확산장쩌민 중국 국가주석, 일 우익 교과서 불합격 요구 {) 서울 연합 뉴스, 2001. 2. 282001년 3월: 교총, 일 교과서 왜곡 규탄대회 {) 서울 연합 뉴스, 2001. 3. 12001년 3월: 일 문부상 역사기술은 집필자의 판단 이라고 발표중국해커, 일본 기업컴퓨터 침입 역사응징 {) 홍콩 연합 뉴스, 2001. 3. 22001년 3월: 남북 역사학자, 일 교과서 왜곡 규탄 {) 서울 연합 뉴스, 2001. 3. 32001년 3월: 중국 정부, 일 역사교과서 불합격 요청 {) 한겨레, 2001. 3. 42001년 3월: 일 왜곡교과서 137곳 수정 … 기본틀은 그대로 유지 {) 한겨레, 2001. 3. 52001년 3월: 일 우익교과서 식민지 표현 추가일 역사왜곡 반대연대 발족. 일, 중국 교과서 외압 반박 {) 도쿄 연합 뉴스, 2001. 3. 72001년 3월: 자민련 김종필 명예 총재, 교과서관련 한국정부 우려전달모리 총리 교과서문제로 관계훼손 원치않아일 자민당 교과서 부당외압 반대 결의 {) 도쿄 연합 뉴스, 2001. 3. 82001년 3월: 북, 남한에 일 교과서 공동투쟁 촉구 {) 도쿄 연합 뉴스, 2001. 3. 92001년 3월: 일본, 교과서 관리체제 재검토 {) 도쿄 연합 뉴스, 2001. 3. 102001년 3월: 일본, 유엔인권소위결의안 내용도 왜곡 논란 {) 한겨레, 2001. 3. 122001년 3월: 일 교과서 고대사도 수정 {) 한겨레, 2001. 3. 132001년 3월: 일본교과서 개악저지운동본부 결성일 우익교과서 난징사건 수정” {) 서울 연합 뉴스, 2001. 3. 142001년 3월: “일 교과서 우려”여 대표단, 일에 전달 {) 한겨레, 2001. 3. 152001년 3월: 일 지식인 17명, 왜곡교과서 불합격 요구 {) 도쿄 연합 뉴스, 2001. 3. 162001년 3월: 북,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비난 {) 서울 팀목으로 기능했다. 따라서 식민사관의 극복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된다.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이 {) 일본 나라[奈良]시대에 관찬(官撰)으로 편찬된 일본의 역사서.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뒤 임나(任那:伽倻){) 임나가야(任那伽倻)의 줄임말로, 신라에서는 금관가야(金官伽倻) 다음으로 6가야의 맹주국(盟主國)이었다고 하여 대가야라고 불렀다.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의 분국설(分國說)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광개토왕비문의 해석은 비문의 훼손부분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신라의 지원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왜군 격퇴했다는{) 외교통야스가 펼친 노력에 대한 설명 없이 사실만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통신사의 파견목적 초빙이유 등을 설명하지 않고, 일본장군 습직(襲職) 사절단으로만 기술하였으며, 조선에서 부산왜관을 설치해 준 사실을 은폐하고, 일본이 외국땅에 마련한 행정기관인 듯이 서술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5) 정한론(征韓論)이와쿠라 사절단과 정한론일본 국내에서는 1873년 일본의 개국 권유를 거절한 조선의 태도를 무례라고 하여, 사족(士族)들 사이에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개국을 강요하자는 정한론이 터져나왔다. 일부 사족들이 정한(征韓)의 전투로 자신들의 존재의의를 나타내고자한 일면이 있었다. 그들 중 사이고 다까모리(西鄕降盛)는 자신이 사절로 조선에 가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자신이 조선에 가서 살해당하면 그것을 명목으로 일본이 출병하고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후소샤, 204-205쪽새 정부와 세계 - 중국ㆍ조선과 관계인근의 중국ㆍ조선과 관계에서는 먼저 1871년 청국과 대등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조선은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사이고(西鄕)와 이타가키와 같은 사족(士族)들은 군대를 보내 조선을 공격하자고 했다.(정한론) 마침 구미에서 귀국한 오쿠보(大久保)는 국내를 정비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하여 이 움직임을 억제하였기 때문에 사이고 다까모리는 정부를 떠났다.{) 일본서적, 186쪽☞ 여기에서는 조선의 조약체결 거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일본입장에서 편파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조선이 일본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일본이 기존의 교린체제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려 했기 때문인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마치 조선이 사이고를 살해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처럼 가정하여 서술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6) 강화도 사건청ㆍ조선과의 국교수립한편 이에 앞서 일본군함이 조선의 강화도 부근에서 조선군과 교전한 사건(강화도 사건, 1875년)을 계기로 일본은 재차 조선에 국교수립을 강하게 요구했다. 청조가 조선에 일본과 국교교섭 개시를 허가한 결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