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의{종전과 더불어 패전국이 된 일본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일본으로 접어들게 된다. GHQ(연합국군총사령부) 점령하의 일본에서 1946년 총리가 된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의 궤도를 설정하는 역할을 안게 된다.요시다 시게루는 1878년 도사(土佐)의 자유당 지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요시다 시게루(吉田茂)다케우치 쓰나(竹內綱)의 5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생후 18개월 만에 요코하마의 무역상 요시다 겐조의 양자가 된다. 요시다 겐조는 후쿠이 번의 무사인 와타나베의 장남이었고, 아버지 다케우치보다 열 살 젊었다. 당시 저디 매디슨 상회의 지배인으로 있었는데, 다케우치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요시다 겐조는 시게루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병사한다. 시게루는 당시 돈으로 50만엔 이상의 자산을 물려받았다. 덕분에 그는 89년의 생애 동안 한껏 돈을 쓰면서 돈 많은 도련님으로 성장했다. 요시다 시게루는 영국의 유명 양복점에 주문한 옷만 걸쳤다고 한다.1906년 도쿄 대학 졸업 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요시다 시게루는 외무성에 들어가 중국 펑텐에서 영사관보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1909년 외교계의 거물이던 마키노 노부아키의 장녀 유키코와 결혼하고, 1928년 외무차관, 1930년 이탈리아 대사, 1936년 영국 대사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지만, 외무성 동기인 히로타 고키에 비해 출세가 빨랐던 것은 아니다. 히로타는 외무장관과 수상을 역임했으나 패전 후에는 민간인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A급 전범으로 처형되고 말았다. 이에 비해 요시다는 개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2차 대전 패전 이전에는 정치의 중추에 진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덕분에 패전 후 공직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정치지도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1939년 3월 영국 대사를 끝으로 퇴임한 뒤, 패전 직후인 1945년 9월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외무대신으로 취임하기까지 6년 반 동안 민간인으로 지내는 동안 요시다는 장인 마키노 노부아키의 도움으로 독일-이1개 사단에 맞먹는 괴력을 지녔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요시다의 천황 숭배사상이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친 탓이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취임한 요시다는 천황과 맥아더 원수의 회견을 실현시키는 등 미·일 친선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했다. 요시다는 외무대신 취임 직후 스즈키 간타로 전 총리를 방문해 지혜를 구했다. 스즈키는 전쟁에서는 승리는 물론, 패전도 좋은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 고 말한다. 요시다는 이 것을 향후 GHQ의 대처 지침으로 삼는다.히가시쿠니노미야 퇴진 이후 등장한 시데하라 내각은 헌법 개정을 추진한다. 1946년, 메이지 헌법하의 마지막 중의원 선거에서 비교 1당의 자유당 당수였던 하토야마 이치로 총재가 연립정권 구성에 나섰다. 그러나 조각 직전 GHQ가 자신을 공직에서 추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토야마는 충격을 받고, 요시다에게 자유당 총재 취임과 조각을 요청한다.요시다는 정권을 담당한 후에도 총리 자리는 하토야마가 자신에게 잠시 맡겨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직 추방 조치가 풀리기 직전에 하토야마가 뇌일혈로 쓰러지자 생각을 바꾼다. 정당정치를 싫어하던 요시다는 하토야마를 둘러싼 미키 부키치, 고노 이치로 등 정당 정치가들이 하토야마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을 혐오했다고 한다.1946년 5월 15일 요시다는 자유당 총무회장에 취임하고 16일 조각에 착수하며, 본격적인 연립 공작에 나선다. 처음에는 자유·진보·사회·협동 4당에 의한 거국 내각을 추진했으나 협조를 얻는 데 실패하자 자유·진보 양당 연립정권으로 발족했다. 67세 때의 일이다.통산 7년 2개월에 이르는 요시다 정권은, 전후 부흥에 몰두한 제 1기(1946년 5월~1947년 5월)와, 강화 조약을 둘러싸고 요시다 정치 의 진면목이 발휘된 제 2기(1948년 10월~1954년 12월)로 나뉜다. 이 중 2기는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과, 그 이후로 다시 나눌 수 있다.1기의 요시다 내각은 요시다와 맥아더 원수의 개인적 관계 위에 성립되어있었다. 맥만, 요시다의 기지는 곧 두 사람의 호쾌한 웃음으로 바뀌면서 신뢰와 우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점령자와 피점령자 관계였음에도 상호 친근감을 갖게 되면서 현안을 원만히 처리할 수 있었다. 요시다 수상은 맥아더와 배석자 없이 무려 75회나 직접 담판하여 미국의 군정 정책을 일본의 현실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에서 빼앗긴 것을 외교로 찾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1차 요시다 내각 때 신헌법을 비롯해 농지개혁법, 노동 3법, 교육기본법, 독점금지법 등 개혁 법률들이 만들어졌다. 신헌법은 제 9조{) 제 9조 :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 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혹은 무력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타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전쟁포기)를 포함해서 이전의 시데하라 내각 때 이미 초안이 만들어져 있었다. 요시다는 26일 중의원에서 제 9조에 대해 자위권 발동으로서의 전쟁은 물론, 교전권도 방기한 것 이란 견해를 표명했다.요시다는 맥아더와 GHQ의 정책을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경제 부흥을 최우선시했다. 명목보다 현실 생활의 개선을 추구하는 것이 당시의 정치지도자가 걸어야할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지위보다는 국민과 국가가 살아남는 길이 우선이라는 판단이었던 듯하다. 제 1기 요시다 정치의 업적 중 하나로 손꼽히는 헌법은 1946년 10월 7일 제정되어, 11월 3일 공포되었다.이 무렵 GHQ의 민주화 노선에 따라 1만 7천여 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1946년에만 파업 622건이 발생했고 51만 명이 참가했다. 그 해 12월에는 전(全) 관청 노동조합 등에 의한 요시다 반동 내각 타도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러한 움직임은 다음해 2·1 총파업으로 확대되었다. 요시다에게는 이를 통제할 힘이 없었고, 맥아더의 권력에 의존해야했다.이것은 당시의 권력이 GHQ에중참의원 선거, 제 1회 통일지방선거가 열렸고 요시다는 당선되었으나, 자유당은 사회당에 이어 2당에 그쳤다. 자유당이 3당인 민주당과 손잡으면 연명도 가능했으나 요시다는 제 1당이 정권을 담당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총사직했다.요시다 이후 등장한 내각이 단명으로 끝나, 예상보다 빨리 재집권하게 된다. 1948년 GHQ 내부의 GS(민정국, 이상주의 노선)와 G2(참모2부, 현실 노선)가 대립한다. G2는 요시다의 재집권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민주 자유당의 야마자키 다케시를 내세워 정권을 발족시키려했으나, 야마자키가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G2의 공작은 수포로 돌아갔다.소수 여당 정권이던 제 2차 요시다 내각은 집권 후 곧 의회를 해산한다. 1949년 1월 23일 치러진 제 24회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264석을 획득하여 절대과반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요시다는 국가 재건을 위한 거국체제 구축을 명목으로 이누카이 다케루 민주당 총재에게 보수연대를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당은 연립파와 야당파로 분열된다. 분열 결과 2월 16일 제 3차 내각을 출범시킨 요시다는 원 맨(one man)정치 라 불릴 정도의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사토 에이사쿠, 이케다 하야토 등 요시다가 발탁한 관료들이 당시 총선에서 대거 당선되어 요시다의 수족이 된다. 이들은 보수 본류 라 일컬어지며 전후 일본의 국가 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한다.요시다가 추진하려던 것은 경제부흥과 조기 강화 두 가지였다. 경제적으로 요시다는 GHQ에 의한 경제 안정 9원칙(균형 예산 편성 등) , 직접세 중심의 세제 개혁, 1달러 360엔의 고정환율제로 이행 등 상당히 대담한 개혁을 추진했다. 노동운동은 격화되었고, 철도청 직원 대량 해고 계획 실시를 앞둔 1949년 7월 시모야마 사다노리 국철 총재가 선로에서 열차에 치인 사체로 발견된 사건, 1949년 무인전차가 폭주하면서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 등의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또, 이케다 대장대신의 실언으로 서민의 반발이 있었다. 그럼에도 , 소련을 비롯해 동쪽 진영까지 강화 대상에 포함하는 전면강화는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외교관 출신인데다 현실주의자로서의 요시다의 감이 작용했던 것 같다.1951년 1월 덜레스 강화 특사가 일본을 방문하여, 요시다와 강화 조약 체결 교섭이 시작되었다. 덜레스는 일본의 재군비를 강조했다. 요시다는 당초 재군비에 반대했으나, 결국은 경찰 예비대, 해상 보안대 외에 5만 명의 보안대를 추가로 창설하는 안을 미국에 제시해 강화 문제를 타결했다.그해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대일 강화 조약 조인식은 요시다 전후 부흥정치의 결실점이었다. 일본에서는 이케다, 도마베치 기조, 호시지마 니로 등 여섯 명의 전권에 수행원 등 27명이 참가했다. 48개국이 조인했고, 소련·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3개국이 거부했다. 미·일 안보 조약 조인식은 샌프란시스코 교외 제 6병단 사령부에서 열렸고, 일본측에선 요시다가 혼자 서명했다. 이 강화조약은 전문(前文), 제 1 장 평화상태의 회복(제 1 조), 제 2 장 영역(제 2∼4조), 제 3 장 안전(제 5∼6조), 제 4 장 정치 및 경제(제 7∼13조), 제 5 장 청구권 및 재산(제14∼21조), 제 6 장 분쟁의 해결(제22조), 제 7 장 최종 조항(제23∼27조)으로 되어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제 3 장의 안전조항으로서, 미·일 안전보장조약의 체결을 위한 복선을 그어 놓은 것이다. 즉, 국제정치의 입장에서 일본을 반공진영에 편입시키는 성격을 띠었다. 일본에서는 51년 10월 26일 제12회 임시국회에서 심의되어 11월 19일 비준서(批准書)에 천황의 인정서명을 받아 11월 28일 미국정부에 위탁하였고 52년 4월 28일부터 조약발효가 개시되었다. 그 밖에 일본은 타이완과 52년 4월 28일에, 인도와는 6월 9일에 강화조약에 서명하였다.강화는 사실상의 독립이며 이로써 일본의 국가적 지위는 회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51년 이전부터도 미국과의 강화로 전후 일본의 국가정책의 1순위가 외있다.
《 마녀를 잡아라!!! 》15세기 무렵부터 17세기까지의 유럽은 "마녀 사냥"의 기간이었다. 이 "마녀 사냥"은 중세의 모든 기독교 국가, 즉 거의 모든 서유럽을 황폐화시키고 17세기 말 신대륙에까지 그 여파가 퍼졌다. 마녀재판이 극점에 다다른 것은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말 사이였다. 이 당시 수만, 수십만의 마녀가 살해되었고, 혹은 살해된 후 불태워지고, 또는 살아있는 채로 불태워졌다.원래 마녀는 중세의 마녀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하였다. 군주들은 점성술사를 두기도 하였다. 이때의 '와이즈 우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신비한 직관으로 의학지식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기도 했으며 여성의 다산을 돕거나 또는 반대로 낙태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필요에 의해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을 행했던 이 사람들은 곧 마녀로 처형되기 시작했다.마녀재판의 희생자가 된 마녀들은 주로, 가난한 집안의 어린 소녀나 중노년층 여성이었다. 또,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여자, 남편과 사별한 여자, 나이 많은 과부는 처형해도 뒤탈이 없었기 때문에 손쉬운 표적이었다. 그러나,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역시 마녀 사냥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의혹의 말을 꺼낸 사람은 여지없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주층이 여성이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이들은 주로 고발, 위증, 세상의 소문 등에 의해 마녀 용의자가 되었는데 마녀의 판별법은 현대에는 이해할 수 없을 어이없는 방법이었다. 마녀용의자의 몸무게를 달아보는 저울시험도 마녀판별법의 하나였다. 마녀는 몸이 가볍다는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형리들이 저울의 눈금이나 추의 무게를 속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또, 가장 흔한 것이 물에 의한 실험이었다. 마녀로 지목된 자를 무거운 바위에 매달아 물 속에 던져 보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물 위에 떠오르면 악마와 교접한 근거가 되었고, 빠져 죽으면 결백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마녀용의자는 오직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누명을 벗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물에서 살아나서 마녀로 간주되어 감당할 수 없 마녀를 판가름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교황사절은 마녀판별에 고민하는 재판관들을 향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라. 신이 분별해 주실 테지"라고 독려하였다고 한다.) 박원순 지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2002, 한겨례신문사고문의 방법으로는 우선, 고문실에서 피고를 나체로 만들고 고문도구를 여러 가지 보여주어 위협한다. 몸을 꽁꽁 묶고 채찍질하며, '손가락 조기', '사다리' 등의 형벌로 고문한다. 또, '매달아 올리기', '매달아 떨어뜨리기', '뼈 부수기' 등이 쓰였다. '가장 탁월한 기술'로 알려진 손톱 밑 바늘로 찌르기, 밧줄과 쐐기를 이용하여 두 다리 비틀기, 불로 발바닥 굽기 등도 주된 고문 방법이었다. 소극적 고문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기아, 불면, 정좌, 강제보행등이 쓰였다. 고문은 세 번 허용되었으나 고문과 고문 사이 잠깐 동안 휴식시간을 주는 게 보통이었다. 이것은 마녀 용의자에 대해 이어질 고문에 대한 공포심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고문실은 고문기구가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설치되었고 고문에 못 이겨 터져나오는 신음과 절규가 옆방에서도 들리도록 설계되었다.또한, 마녀로 판별된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의 처형비용까지 물게 했는데, 독일의 쾰른의 대주교가 형리의 부당한 요금청구에 시달림을 방지하기 위해 1757년에 공포한 "공정 처형 요금표"를 보면 그 잔인함과 어이없음을 느낄 수 있다.◎ 규정요금) 영남대학교 사학과 < http://ynucc.yeungnam.ac.kr/~history >1. 네 마리의 말로 사지를 찢게 한다: 5 타렐 26 알푸스2. 팔다리와 몸을 넷으로 잘라 나눈다: 4 타렐5. 참수. 화형: 5 타렐 26 알푸스9. 산채로 화형: 4 타렐11. 차바퀴에 묶어 생체분쇄: 4 타렐29. 혀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잘라내고 그 위에 빨갛게 달군 인두로 구강 내를 태운다: 5 타렐32. 익사, 물에 뛰어들거나 다른 방법으로 자살한 죄인의 사체를 이동시켜 구멍을 파고 묻는다: 2 타렐마녀재판을 통해 들어오는 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교회와 국가, 성직자와 귀족들의 정치적 무능과 도덕적 타락에 따라 나타난 사회적 현상에 대해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사회지배계급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의도에서 즉,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행해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잔느의 재판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성녀 잔 다르크. 우리의 잔 다르크는 소위 무지 몽매한 17세의 시골 처녀였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다고 말하며 혼란에 휩싸인 프랑스를 구하고자 했으며 샤를 7세를 왕위에 즉위시켰다. 또한, 영국과의 백년전쟁의 와중에 빼앗겼던 프랑스의 영토를 되찾았으며, 그 보다 더 중요한 프랑스 군인들의 사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샤를 7세의 즉위 이후, 샤를 7세는 그녀에게서 멀어졌으며 그녀의 승승장구 끝에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느낀 당시의 지배계층은 잔느에게 군사 및 물품에 대한 지원을 거의 끊다시피한다. 그리고 잔느는 영국군에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는데, 이 때부터 잔느에 대한 마녀재판이 시작된다. 이미 출병하기 이전에 마녀심사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잔느가 하나님과 직접 소통한다는 말에 거부감을 느낀 성직자들은 잔느의 재치있는 답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마녀로 몰아갔으며, 소신을 굽히지 않던 잔느는 결국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잘잘못을 교회가 판정하겠다는 재판관들에게 승복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영국인의 손에서 프랑스인들에 의해 마녀로 화형당하고 만다.그러나, 마녀재판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에도 마녀재판의 허구성을 밝히고 비판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노력과, 이성적 세계관, 과학적 정신의 확산으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마법과 마녀에 대한 현상은 점차 미신의 영역으로 밀려났다.그렇지만 중세 유럽의 마녀재판은 끝났지만 결코 마녀재판 그 자체가 끝났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우리는 드레퓌스 사건, 독일의 나치즘, 미국의 매카시즘과 우리나라의 6.29 선언 이전의 상황,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국가보안법의 적용 모두 마녀재판과 같은 광기를 엿스는 혁명의 이념을 한때나마 무너뜨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에밀 졸라의 양심적인 글-"나는 고발한다"와, 조르주 클레망소의 변론 같은 도움과 몇몇 양심 덕분에 사면되었으나, 언론과 대중의 광기에 의해 희생된 일종의 마녀사냥의 희생양이라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을 듯하다.또한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아리안 우월주의가 나타난 독일의 민족주의 사상, 나치즘으로 인해 히틀러의 제국에서 유대인이 그 피로 바다를 메울 만큼 많은 수가 죽었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에 위치한 독일의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는 다수의 유대인을 포함한 유럽의 일반시민이 수용되었으며, 40개의 캠프로 나누어진 수용소에서는 사람들은 강제노동과 영양실조·전염병으로 죽거나 또는 욕실·청결·건강’이라는 등 거짓 푯말이 붙은 독 가스실로 연행되어 학살되었으며, 일부는 의학실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학살된 자의 금니·모발 등은 자원으로서 회수되었다. 아리안 인종 우월주의에 따른 이 20세기 최대의 비극은 히틀러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고, 비밀 경찰 등을 통해 나의 이웃을 신고하고, 유대인이라고 멸시하였던 군중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하겠다.이 뿐만 아니라, 1950~1954년 미국을 휩쓴 일련의 반(反)공산주의 선풍인 매카시즘도 또한 현대사의 마녀사냥의 그 하나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매카시즘이란 미국 위스콘신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 R .매카시의 이름에서 나온 말로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폭탄적인 연설에서 발단한 것이다. 정확히는 1949년이래 수년에 걸쳐 매카시가 상원의 비미(非美)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행한,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이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전통적인 미국자본의 시장이던 중국의 공산화와 잇달아 발생한 한국의 6 ·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국민으로부터, 그의 주장은 광범한 지지당은 싫어요'라고 말했던 소년의 용기를 배웠으며, 1990년대, 2000년대에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우리의 동생들은 아직까지도 6.25 기념으로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반공글짓기를 하고, 반공표어를 만든다. 빨갱이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 이미, 공산당은 나쁘다고 말하고, 공산당의 색깔은 빨갛게 칠한다. 빨강은 언제부터인가 나쁜 이미지를 얻어왔고, 아직도 여기저기에 반공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남아있다. 1948년에 여순 사건을 계기로 남한의 좌익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제정, 공포된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모체로 구성되었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여러 번의 개정을 거쳤으면서도 정권의 독재강화로 인해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공, 반통일, 반민중적 성격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부역자 처벌에서부터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제정, 범민련사건, 96년의 연세대 한총련 사건의 처리, 김영삼 정부의 한총련 대의원에 대한 검거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보안법은 많은 시민과 학생들의, 헌법에 보장된 언론, 출판, 사상의 자유 등 기본적인 자유들을 억압한다. 특히 소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처럼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던 시절에는 공정한 재판 절차는 실종되었으며, 고문에 의해 사건은 조작되었고, 자백을 중시하는 재판이 난무하였다. 일제시대 때 터득한 고문의 기술과 국가보안법의 올가미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었을 것이고, 불고지죄라는 갈고리로 동료와 친지들을 쓸어모아 대형사건을 만들었으며, 기술자로서의 고문수사관이 존재하였다. 또한, 연좌제를 통해 월북 혹은 납북한 자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모든 사회적 불이익이 돌아갔다. 1998년 7월 28일의 대법원 판례에서 국가보안법에 의해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였고 문민정부 이후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믿지만, 그 이전에만 해도 연좌제에 걸린 사람들은 이사를 가더라도 신고를 해야했고, 직장을 얻더라도 소위 말하는겠다.
'욕망은 과연 절대적 추구의 대상인가?'유순하씨의 이 「참된 페미니즘을 위한 성찰」이라는 책은 1996년에 쓰여진 것으로 이 시대의, 이 나라의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들의 논조로 자신을 이해시켜달라고 하는 듯 보이지만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쉽게 공감할 수만은 없고, 저자가 지나치게 매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저자는 현대의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의 제 문제의 근원을 가부장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남성을 여성의 적으로 규정하는 2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젊고 성공한 여자, 가정주부, 며느리, 배운 여자, 직장 생활을 하는 여자에 대한 언급과 그들의 주장은 나와도, 늙은 여자, 어린 여자, 창녀, 배우지 못한 여자, 시어머니 등의 언급이나 주장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전자들은 사회적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고, 소위 사회적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주장하지만 후자들은 쉽게 보아도 똑같은 혹은 더욱 심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 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로 같은 여성이면서도 핍박하는 자로 비추어지는 시어머니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들은 욕망은 절제의 대상이 아니라 추구의 대상이며, 희생과 헌신은 구시대의 폐습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가정과 가족에 평생을 헌신한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에게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또한 이혼은 결혼이 그랬듯 또 하나의 선택이며, 공동체의 가치보다는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남성은 여성의 적인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기를 남성과 여성은 공존해야 하며, 새로운 성으로서 양성성이 요구되고 있다고 배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양성성을 이야기하면서 여성은 남성화 된다. 성평등을 주장하면서 여성이 남성화되고, 남성의 여성화를 요구한다. 아니, 이전에 여성성과 남성성의 구별이 있어야 양성성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통해지는 여성적, 남성적 역할.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것들은 잘못된 것이며, 이러한 문제는 바로 가부장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나 또한 고등학교, 중학교의 사회 시간에 그렇게 배웠다. 가부장제가 많은 사회적 문제를 가져왔다고. 가부장제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나 또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향후 나의 사회진출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사회적 편견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항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길은 여기서 막혀버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가부장제만의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사회에 팽배한 가부장적 사고로 인해 여성을 남성보다 무능력한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무능력은 약한 존재라는 말로 바뀌어야 하며, 약하다는 것은 능력이 모자라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이 남성에 비해 신체적 힘이 약하다는 것일 뿐 그것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한 알려야 한다. 가부장제의 문제라고 나오는 것은 결국에 그 제도에 눌려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 약하다는 것을 인정해버린 것에서 나오는 것인 듯하다. 또한, 자녀들의 이탈, 가족의 해체, 성적 문란, 이혼의 증가를 과연 가부장제의 폐해라고만 볼 수 있을 것인가. 자녀들의 양육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이 공유하고 있는 문제이며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성장에 관한 문제이다. 많은 남성들이 권위주의에 물들어 가부장적 사고에 물들어 아이들의 양육은 어머니에게 전담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우리의 선조들은 어머니에게 자녀의 교육을 맡겼지만 그것은 절대로 전담시킨 것이 아니고, 아버지들 또한 자녀의 훈계 등에서 교육의 일부분을 담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가족을 외부로부터 좀더 안전하게 지키기위해 신체적 강자인 남성위주로 가부장제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나에게는 가부장제 그 자체가 과연 나쁜 것인가 계속해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주장들이다. 이혼이나 그 밖의 가족의 해체 역시 남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남성 여성이 공동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남성과 여성은 공존할 수 밖에 없으며, 공존해야 하는 대상으로 가족은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혼의 원인은 남성의 외도도 있으나 여성의 외도 또한 존재한다. 그 수가 다르다고 한다. 물론 직접적인 이혼의 원인으로 책에서 제기되기로는 여성의 외도가 더 큰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것은 여성에게만 순결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이다. 남성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사회적 분위기 말이다. 그러나, 가족과 가정에 대한 책임은 결국에 모두에게 있다. 그리고 성의 개방, 성적 문란의 문제이다. 개인의 성에 대한 욕망, 그리고 그 외의 욕망들은 추구될 수 있다. 기존의 짓눌린, 음성적 성보다는 양성적으로 나타나는 성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욕망은 절제되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아서는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무엇이든 지나쳐서는 좋을 것이 없다. 욕망-돈에 대한 욕망, 성에 대한 욕망, 성공에 대한 욕망들은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절대적이 되어서는 결국 계속에서 멀리 올라가는 풍선을 잡으려는 것 밖에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희생과 헌신이라. '여성에게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가 여성을 위축되게하고 많은 사회적 문제를 낳게 된다.'라는 주장. 희생과 헌신. 희생과 헌신은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을 구시대의 폐습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의 삶을 모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평생 세 명의 주인을 모신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 결혼한 후에는 남편,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 이 것이 과연 현재의 우리 사회에 적용될 수 있을까? 과거의 우리 사회에는 적용될 수 있을까? 우리의 여성들이 희생하고 헌신하였듯이 남성들 역시 희생하고 헌신하였다. 여성들이 그랬듯 가족을 위해서 말이다. 여성의 희생, 헌신을 폐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여성의 희생, 헌신을 강요되었다고 생각하고, 여성들만 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잘못된 교육을 받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 아버지들의 가족에 대한 희생과 헌신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성의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성의 상품화를 나타낸다. 물론 성의 상품화의 대상은 주로 여성이다. 남성도 나오지만 극히 소수이며 속살을 내보이며 웃고 있는 광고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벗을 필요가 없는 광고에 벗고 나오는 사람도 여성이다. 그렇지만 성적 자극은 광고의 가장 확실한 대상이다. 그들은 확실한 광고를 위해 누군가를 벗겨야만 한다. 그것이 거의 여성이라는 것만 문제 삼으면 될 듯하다.성의 상품화를 다시 잘 살펴보자. 여성이나 남성이나 서로에게 호감을 주어야 하고, 호감을 얻지 못하면 짝짓기를 할 수 없다. 짝짓기는 생존의 본능이다. 인간을 단순히 동물과 비교해서야 되겠느냐마는 종족의 번식을 위해서는 짝짓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짝짓기를 위해 남성과 여성은 스스로를 가꾸지 않으면 안된다. 좀 더 나은 상대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것에서 꾸미는 것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는데, 현대 사회를 보자.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도 스스로를 꾸미고 가꾸고 포장한다. 다만, 그들은 섹스어필을 강조하는 광고에 덜 등장할 뿐이다. 여성은 더 예뻐 보이기를 원한다. 더 시선을 끌기를 원한다. 물론 일부의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존재한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그리고 그들은 그에 따라 화장하고, 자신을 포장한다. 그리고 시선을 끌기 위해 더 대담해진다. 입고 싶은 것을 입는데 왜 그런 논리가 필요하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또, 그러면 시선을 끌지 않기를 원한다고 꼭꼭 싸매고 다녀야 하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를 더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여성들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것이 아닌 가 싶다. TV속의 사람들은 상품화 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이름만으로, 얼굴만으로, 그 신체로서, 능력으로서 상품이다. 스스로를 상품으로 내건 사람들이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들을 따라서 여성이건 남성이건 자신의 신체적인 것을 강조하고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타인에게 광고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