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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문] 청년부 설교 시편 23편 1-6절 매커니즘에서 변화로
    본문: 시편 23편 1-6절제목: 아포슬 생명사역(1): 매커니즘에서 변화로1. 매커니즘이 지배* 건강 매커니즘72.6킬로에서 아는 사람은 아는 나의 다이어트. 많은 사람들이 저를 따라서 다이어트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72.6킬로에서 오늘 아침 60.9였습니다. 다이어트 성공? 사실 다이어트도 쉽지 않지만, 이것을 유지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저는 72.6에서 지금의 몸무게는 아니지만, 62-3사이를 (최근에 더 빠져서 60.9임) 약 4년간 유지 했습니다. 2018년에 뺐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어요.저를 따라서 다이어트를 시작한 사람들은 엄청 많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도 많아요. 그 분들 대다수는 다시 정상복귀했어요. 이전보다 더 찐 사람도 많아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이렇게 4년간 유지를 하느냐? 저는 앞으로 평생 유지 가능합니다.유지가 어떻게 가능한가? 몸에서 음식에 대한 갈망, 폭발을 조절하는 몸이 돌아가는 매커니즘을 알면 가능해요. 그러나 돌아가는 매커니즘을 모르면 불가능합니다. 매커니즘이란, 어떤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을 알려주는 원리, 기전, 기제라고 할 수 있어요.사람들은 말합니다. 살 빼라고. 그리고 유지 하라고. 살 빼는 것 사실 안먹고 더 많이 움직이면 되는거 아니냐고. 입터지고 음식 갈망 일어나는 것, 그거 의지 박약 아니냐고.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이야기에요. 뺄라고 해도 안되는걸 어떻게해? 잘 참고 3개월 참고, 입이 터지는 걸, 그리고 그 터진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1년이상 가는 걸 어떻하냐고? 이게 다 몸이 돌아가는 생리, 매커니즘을 몰라서 그런 거에요. 알면 유지가 가능하다는 거에요.제가 몇가지만 예시를 들게요.①수면(맨발걷기/햇빛)음식 갈망을 해결하려면 잠을 잘 자야 해요. 잠이 안오는 걸 어떻게 해요? 또 많이 자도, 깊게 잠을 못자는 것을 어떻게 해요? 그래서 제가 하는 행동이 바로 맨발 걷기에요. 산에서 맨발로 걸어요. (사진, 영상)지구가 거대한 음전하 덩어리입니다. 태양의 복사열이 지구에 비취면 특정 구간에서 충전받고 머물러 있어서 방전되어야 하는 정전기가 빠져나가요. 일종의 접지죠. 이러면서 염증 수치가 낮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효과가 바로 숙면을 취하게 되는 거에요. 자, 맨발걷기 하고 싶어지지 않나요?매커니즘을 알면 이처럼 그 행동을 지속할 힘이 생겨요. 얼마전에 제가 담낭에 돌이 생겨서 통증이 왔는데 1주일 뒤에 타교회 청년 집회가 잡혀 있어서 수술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주에 어떻게 버텼느냐? 아팠어요. 그런데 매일 1시간에서 2시간씩 뒷산, 생명의 동산에서 맨발로 걷고, 거기에서 책읽고 했어요. 그러면 염증 수치가 낮아지죠? 실제 통증이 사라졌어요.사람들이 그리고 낮에 햇볓좀 보라고 보라고 해도 안해요. 뇌 속에서 세로토닌이 합성이 되어야 깜깜해 지면 그게 멜라토닌으로 합성이 되면서 잠을 잘 수 있어요. 물론 식이 단백질 속에 있는 트리토판을 인슐린이 알부민과 함께 뇌혈관 장벽을 통과 해야 안에서 세로토닌이 합성되는데 그게 있어야 밤에 멜라토닌으로 변환되면서 잠이 오는 겁니다. 낮에 햇볕을 보는 것이 생각보다 잠을 자는데 중요하다는 거에요.자, 그런데 사람들이 이처럼 수면을 잡지 않고 음식 갈망을 잡는다? 수면을 잡지 않고 입이 터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안되는 거에요. 수면이 안잡히면 다이어트도 안되고 유지는 더더군다나 안된다는 거에요. 저는 9시 30분에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지만, 신생아처럼 눕고 알람 울려 버리는 깊은 숙면을 취합니다. 이게 첫 번째 매커니즘이에요. 이것을 알면, 경험해 보면, 맨발 걷기 안할 수가 없어요. 막 하고 싶어지지 않습니까?②운동사람들이 살 뺄려면 식단이 제일 중요하다. 운동은 뭐. 해도 안빠지더라. 간헐적 단식, 저탄고지, 원푸드 다이어트. 많이 하는데 과한 운동은 해롭지만 운동을 일절 안하고 살 뺀 사람들은 100% 다시 요요가 옵니다. 왜냐? 살이 빠진게 아니라 수분과 근육이 빠진 거라서요.사실, 살을 빼고 유지를 할려면,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써야 하거든요. 그래서 식단 중요합니다. 그런데 식단을 잘 로 쓰지 않는다는 사실. 두둥. 그래서 뭘 에너지로 쓰느냐? 아미노산. 단백질. 그래서 근육을 분해해서 에너지원으로 그래서 근육이 빠지는 거에요. 그런데 근육의 글리코겐은 절대 굶거나 절식한다고 고갈되지 않아요. 오로지 운동으로만 고갈되는 거에요. 그런데 간과 근육의 모든 글리코겐이 소진 되어야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쓴다는 사실. 그래서 결국 근력운동을 조금이라도 해 주면,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쓰게 됩니다.자, 운동하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운동을 해서 칼로리를 태우는게 아니라, 운동으로 글리코겐을 고갈 시켜서, 운동하지 않는 시간에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쓰기 위해서에요. 물론 식단과 함께. 그래서 간헐적 단식을 해도 운동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거에요.③물/식이섬유세 번째 물. 물마셔라 물 마셔라.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물과 식이섬유는 해독과 장내 미생물의 관계를 다루는 것인데, 다 풀면 안되잖아요? 아포슬 티비에서 찬찬히 풀 꺼에요. 구독과 좋아요, 알람 설정까지.자, 결국 매커니즘을 아는 사람은 그 행동을 지속하게 되어 있어요. 지속하는 힘, 그 일을 행하는 힘은 작용기저를 아는 자가 하게 되어 있다는 거에요. 막연하게 살 뺄려면 운동이 좋다. 잠 잘 자야한다더라. 이정도만 아는 사람은 제대로 된 실천을 지속적으로 하기 어렵다는 거에요.2) 언어습득의 매커니즘①이해가능한 인풋 ② 흥미로운 자료-알면 하게 됨2. 인생의 매커니즘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 접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어요. 작용 매커니즘, 특히 신자와 비신자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자의 인생의 퀄러티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같은 고난과 고통을 당해도 그 매커니즘을 아는자는 내성이 있다는 거에요. 회복 탄성력을 가지느냐 마느냐를 결정합니다.1) 고통이 디폴트(신자/비신자)신자와 비신자 구분 없이 모든 인생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일반 법칙, 일반 원칙이 있어요. 그게 뭐냐?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표현했죠.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이것은 거룩한 전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의 말이에요.그래서 시편 기자는 인생을 표현하기를, 전쟁과 같은 살얼음판을 걷는 삶,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삶. 이것이 디폴트 값이라는 거에요. 신자, 비신자, 가난한자 부한자, 건강한자 연약한자, 다 똑같다는 거에요.여러분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모든 삶들이 그리 이상적이지 않다는 거에요. 여러분은 지금 초등학생들이 그리도 그리던 어른이 되었어요. 장난감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상황, 게임을 마음대로 혼자 할 수 있는 상황. 자, 행복합니까? 그 이상향에 도달해 보니 살만합니까? 고등학생들이 그리도 원하는 졸업을 했는데, 삶이 만만하고 그 자유가 여러분을 해방시켜 줍니까? 취업준비를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갈망하던 취업을 하니, 자, 얼마나 행복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인생에서 가장 큰 쓴맛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갈망하던 결혼을 한 사람도 몇 있죠? 물론 행복하겠죠. 행복하다고 해야 옆에 앉은 아내 얼굴 보기 덜 민망하니까. 그런데 꿈꾸던 그런 이상적인 삶이 기다리던가요? 예기치 않던 양가 부모님, 경제적 압박이 있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그리도 바라던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부유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있을 거에요. 특정 금액 이상의 연봉과 그 이상의 돈의 자유가 오니까, 행복 합니까? 예외 없이 누구나 할 것 없이 고통은 디폴트 값이라는 거에요. 인생은 전쟁의 연속이라는 거에요. 목자가 지켜 주지 않고 그가 무기를 가지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대신 싸워 주지 않으면 흔들 거릴 정도로 힘겹지 않아요? 이게 신자 비신자 할 것 없이 인생의 디폴트 값이고 그게 바로 고통이라는 거에요.2) 신자가 가진 희망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_없앨 것)그런데, 신자는 다른게 있죠. 그게 바로 1-3절이에요.첫 두 문장. 밑줄은 표제어에요. 미쯔모르 레다비드. 다윗의 시. 표제어를 제외하 아니라 당하는 자의 마음 상태도 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3) 원리적 측면(주변이 내편)꽃동산교회->부흥사건->다 내편5-6절에 그 디테일한 원리가 나옵니다. 그게 뭐냐?(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신다. 여기에서 상은 상품, 상급 이런게 아니라 밥상입니다. 그러면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차려준다는게 뭘까요? 고대 근동에서 식탁, 밥을 먹는 것의 행위는 특히 같이 밥을 같이 먹는 행위는 쉽지 않아요. 계층이 다르면 같이 먹지 않고 종교, 생각이 달라도 같이 먹지 않아요. 그러나 유목민 생활에서 나그네를 환대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죠. 그런데 공통점은 뭐냐? 식탁의 교제를 같이 한다는 것은 너와 나, 서로가 같은 편이라는 의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차려주신다는 것은, 주변이 다 내편일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원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다 내편으로 만들어 주는 거에요.제가 옛날에 어린이 교회로 유명한 곳에서 초등하교 4학년을 맡아서 4년간 사역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팠어요. 폐동맥 색전증으로,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고, 설교도 한번하고 뉘에서 누워서 쉬다가, 2부때 또 한번 하고, 누워서 쉬다가 3부때 설교하고는 지하 주차장에서 차에서 쉬다가, 저녁예배 드리고 교역자 회의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거에요. 그런데, 당시 1부 부장 집사님이 나에게 이러는 거에요. 전도사님, 혹시 뭐 지은 죄가 없는지 살펴보고 회개하세요. 그리고 몇주 지나서는 담임 목사님께 안수기도 한번 받아보세요. 그리고 1부때 내가 설교 하고 있는데 헌금 바구니 찾는다고 강단까지 나와서 강단 밑의 헌금 바구니를 꺼내가는 거에요. 어이가 없죠. 그분 생각에는 나는 죄인, 천벌 받은 놈. 저주 받은 교역자. 그래서 함부로 대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게다가 그 기간에 급성 녹내장이 왔어요. 실명할 수 있다. 악재는 겹쳐요. 이분이 얼마나 나를 무시하겠어요로.
    인문/어학| 2023.01.17| 6페이지| 2,500원| 조회(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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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사야의 시온 모티프
    이사야의 시온 모티프-남은자 사상을 중심으로목 차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277720272" 1. 서론 PAGEREF _Toc277720272 h 1 Hyperlink l "_Toc277720273" 1.1. 연구 목적과 의의 PAGEREF _Toc277720273 h 1 Hyperlink l "_Toc277720274" 1.2. 연구 방법과 전개 PAGEREF _Toc277720274 h 3 Hyperlink l "_Toc277720275" 2. 이사야서의 통일성 PAGEREF _Toc277720275 h 4 Hyperlink l "_Toc277720276" 2.1. 구약에서 이사야의 위치 PAGEREF _Toc277720276 h 4 Hyperlink l "_Toc277720277" 2.2. 이사야의 문학적 통일성 PAGEREF _Toc277720277 h 6 Hyperlink l "_Toc277720278" 3. 이사야의 남은자 사상에 나타난 시온 모티브 PAGEREF _Toc277720278 h 9 Hyperlink l "_Toc277720279" 3.1. 이사야 1:4-9의 시온 모티브 PAGEREF _Toc277720279 h 9 Hyperlink l "_Toc277720280" 3.2. 이사야 1:21-26의 시온 모티브 PAGEREF _Toc277720280 h 11 Hyperlink l "_Toc277720281" 3.3. 이사야 4:2-3의 시온 모티브 PAGEREF _Toc277720281 h 13 Hyperlink l "_Toc277720282" 3.4. 이사야 14:28-32의 시온 모티브 PAGEREF _Toc277720282 h 15 Hyperlink l "_Toc277720283" 4. 결론 PAGEREF _Toc277720283 h 16 Hyperlink l "_Toc277720284" 참고문헌 PAGEREF _Toc277720284 h 자는 본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수사학적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이사야의 문학적 구조와 통일성을 찾고, 그 통일성을 근거로 남은자 사상에 나타난 시온 모티브를 연구하고자 한다.2. 이사야서의 통일성2.1. 구약에서 이사야의 위치이사야서는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사야서의 위치를 논할 때 이사야서가 구약신학의 축이자 중심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오스왈트(John N. Oswalt)는 “신학적인 통찰력의 넓이와 발전에 있어서 어떠한 책도 이사야서와 비교될 수 없다”고 한다. 반즈(Albert Barnes)는 이사야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이사야 예언이 지닌 장엄함과 역동적인 힘, 문학적 아름다움, 강한 복음적 요소, 신약에서의 잦은 인용, 성읍과 왕국들에 대한 예언의 정밀성, 그리고 이사야 예언의 본질적인 난해함 등 이 모든 것이 이사야서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요소들이다와츠는 다른 두 가지 측면에서 이사야서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책임이 있음을 역설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이사야서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여기에 관련된 인물들을 종합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이사야서가 “종교적이고 문학적인 면에서 예언서 중의 왕자로 그리고 으뜸가는 예언서로 존중되어 왔다”고 말한다. 딜러드(Raymond B. Dillard)와 롱맨(Tremper Longman)역시 “구약의 책들 중에서 그 장엄함고 광휘에 있어서 이사야서에 필적할 만한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신약의 저자들이 예수 및 교회의 성격에 대해 논할 때 이사야서에 자주 의존했기 때문에 이 책은 기독교 성경 해석사 속에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라고 말한다.이사야서는 사상과 교리에 있어서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으뜸가는 구약의 예언자로 평가받는다.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는 특히 이사야서의 후반부를 가리켜 “구약의 로마서” 또는 “구약 속의 신약”이 이방을 향한 소망종(49)/종의 고난(50)/구원, 심판, 구원(51-52)/종의 고난과 영광(53)/ 위로와 초대(54-55)/이방인가지 구원함(56)/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경고(57)A’(58-66장): 원리적인 소망: 강한 소망(새 하늘과 새 땅)-약한 경고참된 예배 권면(58)/죄의 고백으로 구원됨(59)/시온의 영광(60)/여호와의 신이 임한 메시야(61)/시온의 영광(62-63)/ 남은자 구원(64)/ 이방의 구원(65)/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66)이를 살펴 보면 전체적 구조 분석을 통해 이사야서는 편집물이 아닌 단일 저자가 독특한 의도를 가지고 구성한 작품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결과를 수용한다면, 이사야 1-66장은 다수의 저작이 아니라 통일성을 지닌 단일 저자의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우리의 연구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3. 이사야의 남은자 사상에 나타난 시온 모티브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사야서는 단일 저자의 의도를 가진 작품임이 드러났다. 그러하다면 이사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통한 연구가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필자는 지금부터 이사야서에서 나타나는 남은자 사상에 나타난 시온 모티브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남은 자’는 단순히 이사야서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여러 주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신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남은 자’ 사상은 이사야에 나타나는 다른 모티브들과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시온 모티프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이사야의 사고에서 현저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이번 장에서 ‘남은자’ 사상이 이사야서 안에 나타난 시온 모티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고찰해 봄으로써 이사야의 시온 모티프가 그의 예언서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되는지 드러내어 보길 원한다.3.1. 이사야 1:4-9의 시온 모티브4 הוֹי גּוֹי חֹטֵא עַם כֶּבֶד עָוֹן זֶרַע מְרֵעִים בָּנִים מַשְׁחִיתִים עָזְבוּ וְאָשִׁיבָה יָדִי עָלַיִךְ וְאֶצְרֹף כַּבֹּר סִיגָיִךְ וְאָסִירָה כָּל־בְּדִילָיִךְ26 וְאָשִׁיבָה שֹׁפְטַיִךְ כְּבָרִאשֹׁנָה וְיֹעֲצַיִךְ כְּבַתְּחִלָּה אַחֲרֵי־כֵן יִקָּרֵא לָךְ עִיר הַצֶּדֶק קִרְיָה נֶאֱמָנָה(Isa 1:21-26 WTT)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22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25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26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Isa 1:21-26 KOR)이 본문은 청결케 하는 자와 청결하게 하는 효과적인 모습들이 여기에 그려지고 있다. 선지자의 통렬한 비난은 예루살렘에 대한 애도의 형태로서 나타나 예루살렘이 창기됨을 한하고 있다(사1:21). 이사야는 호세아가 사용했던 언어의 형태를 자신의 방법으로 사용했다(호1:2; 2:7; 3:3; 4:12-15; 9:1).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희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1:22) 순수한 은으로부터, 그들은 찌끼가 되었고 이리하여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림을 당하기에 적합하다. 그러나 아마도 이전에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고귀한 것을 다 지시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그 모든 은에 해당하는 것들이 지금 아무 가치 없는는 살륙을 당하리라31 성문이여 슬피 울지어다 성읍이여 부르짖을지어다 너 블레셋이여 다 소멸되게 되었도다 대저 연기가 북방에서 오는데 그 항오를 떨어져 행하는 자 없느니라32 그 나라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Isa 14:28-32 KOR)이 본문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주어진 경고의 말씀으로 이사야는 블레셋에 내려진 심판으로 인하여 완전히 파멸이 닥쳐올 것이라고 선언한다. 28절에 따르면 이사야는 이 경고를 아하스 왕이 죽던 해인 715년에 받았다. 블레셋은 자신들을 위협하던 “막대기” 즉 앗수르가 망했기 때문에 안전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기아와 살육이라는 혹독한 징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에 시온에 피신한 유다의 백성들은 그곳에서 구원을 누릴 것이었다. 이 단락에는 남은 자의 개념이 상반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30절에서 ‘남은 자’는 블레셋인들 가운데 기근과 살육을 피해 살아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마저 궁극적으로 살육당할 것이다. 즉 블레셋의 “부리”마저도 생명을 보존하지 못하고 살해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블레셋은 어떤 영광도 얻기 못하고 전멸할 것이다. 즉 블레셋의 남은 자는 철저한 멸망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사용된 “너의 남은 자”(שְׁאֵרִיתֵך)란 어구는 부정적인 의미로 상용되고 있다. 다른 한편 32절에는 ‘남은 자’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유다 백성 중에 시온에 피신함으로써 안전을 누리게 될 “곤고한 자들”(עֲנִיֵּי עַמּוֹ)이라는 어구를 사용하여 ‘남은 자’ 사상을 표현한다. 그 근거는 이사야 28:16에서 증거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구원의 증거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돌이키는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사7:9; 30:15)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עֲAT 8
    인문/어학| 2010.12.17| 19페이지| 4,000원| 조회(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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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의제자를위한17가지성경의가르침
    목 차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277422833" 1.서론 PAGEREF _Toc277422833 h 1 Hyperlink l "_Toc277422834" 2.본론 PAGEREF _Toc277422834 h 2 Hyperlink l "_Toc277422835" 2.1. 기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PAGEREF _Toc277422835 h 2 Hyperlink l "_Toc277422836" 2.2. 조화의 문제 : 복음과 행함 PAGEREF _Toc277422836 h 4 Hyperlink l "_Toc277422837" 2.3. 목회서신이 말하는 경건 PAGEREF _Toc277422837 h 6 Hyperlink l "_Toc277422838" 3.결론 PAGEREF _Toc277422838 h 7 Hyperlink l "_Toc277422839" 4. 참고문헌 PAGEREF _Toc277422839 h 71.서론저자는 네가지 근원적인 질문들을 제기함으로써 본서의 주제들을 진행시켜 나간다. 즉 우리는 누구를 따르는가? 이는 우리가 따르고 있는 대상에 관련된 근원적 질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 삶의 원동력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세번째로는 어떻게 충성할 것인가를 다룬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생의 모든 근원을 꿰뚫는 통찰있는 질문들을 제기하며 해답을 얻어나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십자가가 남긴 교훈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누구를 따르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어 성령 안에서 사는 신자의 생활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뜻의 분별법,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자들에게 성경적 근거를 들어가며 상세히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그러나 신자라 할지라도 시련과 고난이 불신자와 동일하게 주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해쳐 나가야 할지에 관하여 독자들에국교회의 전통적이며 통속적인 견해들이 무의식적으로 끼어들어와 바른 성경적 관점을 형성하는 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가르침과 혼란은 한국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를 앗아갈 것이며 더 이상의 성장은 보장될 수 없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그리하여 특별히 필자는 한국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몇가지 질문들을 본서와 함께, 본서의 저자인 이한수 교수의 의견을 통해 다시 한번 추적하여 해답을 구해보고자 한다. 먼저 기적, 특별히 성령에 의해서 나타나는 이적과 표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며,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며 기적과 표적을 따라다니며 삶의 영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문제점과 그 둘의 조화를 위한 제언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2.본론2.1. 기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한국교회 만큼 기적과 표적이 많이 나타난 곳도 없을 것이다. 특별히 평양 대 부흥을 전후로 수많은 이적이 행해 졌으며 6-70년대 한국의 부흥은 수많은 기적과 표적들로 인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성령의 은사가 중지되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이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반대 극단에 대한 의견일 뿐이다. 이에 대하여 이한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신약의 어떤 구절들도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기적들이 중지될 것으로 교훈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것들의 기능을 사도적 복음의 확증에 제한시키려는 워필드의 은사중지론은 신빙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즉 성경의 어떤 구절에서도 은사 중지론을 주장하는 근거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은사 중지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실제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잘못된 극단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현대 사회에서 기적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서는 인정해야 할 것이고 논의가 필요한 현실이다. 이한수 교수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논의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신약 성경에서 치유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 뚫고 은사중지론의 입장에 서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바라보지 못하는 맹인과 귀머거리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두 전망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하게 증거하셨다”(막16:20)는 전망이고, 다른 하나는 “표적에 대한 참 이해는 믿음의 눈과 귀를 요청한다”(마13:16)는 전망이다.그렇다면 성령의 카리스마틱한 사역과 결과를 믿음의 눈과 귀로 바라보는 영적 안목을 가져야 함을 전제한다고 치더라도 한구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삶이 받쳐지지 않는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에 관한 과제를 우리는 또한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2.2. 조화의 문제 : 복음과 행함성령의 윤리적 사역과 은사 문제는 분명히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순절 계통의 성령의 은사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아,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성령의 내면적이고 은밀한 사역보다는 보다 외적으로 현저하게 보이는 방언, 예언, 신유의 은사 같은 성령의 은사적 사역을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고 추구하려는 경향이 우리의 교회들 가운데 분명히 있다. 그러면 성령의 가시적 은사 사역과 인격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어떻게 조화 시키며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에 관하여 이한수 교수는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칭의와 사랑을 동시에 작용케 하는 힘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칭의 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며, 믿음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된 사건으로 이해하는 행위이다. 믿음은 한편에서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인지적 지향성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웃 사랑을 야기하는 능동적 지향성을 갖는다. 전자는 칭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는 반면, 후자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움직이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카톨릭 교회가 믿음이 갖는 이 두 차원을 구분하지 못하고결이 되는 과정과 이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영구적 가치를 지닌 이런 선생들은 칭의 경험이 지향하는 목적이다. 인류는 과거에 죄와 육체의 세력들 밑에서 포로처럼 갇혀 악의 통치를 받아 온갖 무가치하고 악한 행위들을 자행하였고 이제 그들은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운명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류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것이 칭의 사건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기초하여 죄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는 법률적 선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죄의 세력권 밑에서 해방하여 은총의 새로운 종말론적 통치권 속으로 인도해내어 ‘새 피조물’로 살 수 있게 만든 종말론적인 사건이다(고후5:17). 이제 칭의를 경험한 신자는 은총/성령의 능력이 지배하는 새로운 통치권 영역 속에서 살 수 있게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선한 삶과 행위를 실천할 수 있는 환경 속에 놓이게 되었다. 칭의는 악의 세력에서 해방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행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을 창조하는 목적과 연계된 분명한 방향성을 지닌다. 칭의를 경험하는 순간 신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선한 행위에 열심해야 할 책임을 질머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즉 칭의 자체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창조하는 목적을 가지며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선한 행위에 열심내야 하는 책임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지껏 한국교회는 칭의 따로, 행함 따로라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내 행함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반쪽 복음으로 비 윤리적 행위를 정당화 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라오며, 너의 믿음을 행함으로 논증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2.3. 목회서신이 말하는 경건위에서 우리는 행함이 따르는 성령의 역사, 칭의와 행함의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하였다. 이하나를 던져 보았다. 성령의 은혜를 겪으면서도, 카리스마틱한 은사들이 나타나면서도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국교회의 영적 혼란에 관한 질문이었다. 필자는 잘못된 가르침과 신학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이미 논의하였다. 한국 교회는 반대 극단인 은사중지론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으며 성령의 기적과 표적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인 믿음의 귀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역설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윤리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했다. 즉 칭의는 행함과 밀접하며 반드시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짊을 질머지게 되는 능동적 결과가 나타나게 됨을 살펴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중세 수도원 중심의 신비주의 영성 운동이 아니라 목회 서신이 말하고 있는 경건임을 깨닫게 되었다. 즉 경건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는 새로운 양식으로 삶을 살아내는 일이다. 교회의 윤리성의 회복되지 않은 채 성장한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며 복음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부디 본서를 읽고 한국교회가 경건을 향한 열망, 즉 믿음과 행함의 일치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4. 참고문헌김길성. 1998, "개혁주의 성령론 고찰(Ⅱ)" 신학지남, 65, 133-60.________. 1998, "개혁주의의 성령론 고찰" 신학지남, 65, 249-80.김성태. 1995, "오순절주의 성령론이 신교신학에 미친 영향력과 그에 따른 개혁주의적 관점 고찰" 신학지남, 62, 156-84.문병호. 2008, "알파코스 비판 : 개혁주의 성령론의 관점에서" 신학지남(Byungho Moon), 75, 283-307.이한수.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율법의 행위" -바울의 계시적 전망에서 본 새로운 해석적 시도".신약연구5 2006.________. 2005,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칭의 구원론과 “율법의 행위”" 신학지남, 72, 76-114.________. 2007, "목회서신이 말하는 경건" 신학지남, 74, 43-AT 1
    독후감/창작| 2010.12.17| 8페이지| 2,500원| 조회(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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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배를 통해 본 한국교회의 지향점
    예배를 통해 본 한국교회의 지향점목 차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277600877" 1. 서론 PAGEREF _Toc277600877 h 1 Hyperlink l "_Toc277600878" 1.1. 연구의 동기와 목적 PAGEREF _Toc277600878 h 1 Hyperlink l "_Toc277600879" 1.2. 연구의 한계 PAGEREF _Toc277600879 h 2 Hyperlink l "_Toc277600880" 2. 빈야드 예배 PAGEREF _Toc277600880 h 2 Hyperlink l "_Toc277600881" 2.1.빈야드 예배의 순서와 특징 PAGEREF _Toc277600881 h 3 Hyperlink l "_Toc277600882" 2.2. 빈야드 예배 평가 PAGEREF _Toc277600882 h 4 Hyperlink l "_Toc277600883" 3. 한국교회의 지향점 PAGEREF _Toc277600883 h 6 Hyperlink l "_Toc277600884" 3.1. 목회자 양성 PAGEREF _Toc277600884 h 7 Hyperlink l "_Toc277600885" 3.2. 교육 목회 PAGEREF _Toc277600885 h 8 Hyperlink l "_Toc277600886" 3.3. 예배의 지향점. PAGEREF _Toc277600886 h 16 Hyperlink l "_Toc277600887" 4. 결론 PAGEREF _Toc277600887 h 19 Hyperlink l "_Toc277600888" 참고문헌 PAGEREF _Toc277600888 h 201. 서론1.1. 연구의 동기와 목적본 연구의 동기는 예배에 관한 소박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했다. 한국교회가 나아가고 있는 예배의 모습이 지향해야 할 궁극의 모습인가 아니면 그와는 점점 멀어져 가는 본질을 상실한 예배인가? 정일웅 교수는 한국교회의 예배에 관의 관계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의 답을 경험하게 하는 관계이고, 둘째는 세상의 여러 가치 혼돈 가운데서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느끼도록 밝히는 관계이며 셋째는 인간과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는 관계로 예배는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빈야드 예배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과의 관계에서 추구되는 인격적 만남으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표적과 기사’란 성령의 가시적인 영적 체험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경험을 예배의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의 역사와 전통에서도 벗어난 예배의 모습으로 전환된 것이라 하겠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정일웅 교수는 빈야드 예배의 약점을 예배와 성령의 관계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다. 이러한 만남은 성령의 함께하심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령은 예배와 함께하시며,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과 감사와 찬양을 도우신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신령(성령)과 진정(진리 안에서)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예배의 방식을 교훈하셨던 것이다(요4,24). 그러나 문제는 성령이 어떤 순서로도 구속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인간과 함께 하심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지 결코 우리의 그 어떤 모양으로도 한정 지울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빈야드의 예배는 이러한 성령의 이해를 뛰어넘어 성령의 직접적인 경험을 가시화하려고 한다. 바로 그러한 성령의 가시적 경험 때문에 기도사역의 순서에 안수와 방언의 기도, 그리고 치유와 귀신 축출등의 신유적인 형태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고 있으며, 또한 예배중에 거룩한 무질서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예배는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시며,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바로 그 때문에 바울은 개인적으로 각양의 은사 받기를 권장하면서도 방언의 통역의 은사를 받은자보낸 편지에서 교회는 교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동시에 교리에 의한 교육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우리는 칼빈이 얼마나 교리교육(Katechismus)을 중히 여겼던가를 느낄 수 있다.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교육이라는 것이다. 교회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며 그 같은 신앙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는 차원에서 교회의 교육적 사명은 막중할 뿐 아니라 이러한 교회의 교육적 과제와 함께 교회는 평생교육의 장으로서 교육 과정안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의 교육적인 면에 관하여 정일웅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예배의 기능적인 면에 있어서 D. Rossler에 의하면 3가지 영역으로 나주어지게 되는데 그 첫째가 바로 예배의 교육적인 면이다. 종교개혁자 M. Luther는 바로 예배의 교육적인 임무를 그의 예배에 관한 글 『deutsche Messe』에서 밝히고 있는데, 즉 예배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야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자의식(신앙)을 일깨우고, 강화시키고, 도우는 역할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Luther의 예배에 관한 교육적 이해는 “Orthodoxie시대를 거쳐 Schleiermacher 시대까지 계속되었고 요리문답과의 관계 속에서 예배의 교육적 기능은 크게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예배의 교육적 이해는 후에 F. Neibergall에 의하여 새로운 발전을 하였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Erbauung(신앙적 교화)에 있었다. 이것은 예배의 전체를 통하여 신앙이 연약한 자들에게 신앙적인 감화와 깨달음을 주고자 하는데 있었으며(경건주의의 영향) 역시 교화(Erbauung)란 교육적 기능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육적 기능은 후에 부흥운동과 함께 부흥설교, 전도설교에서 결정적 역할로 바뀌어지게 된다. 이러한 예배의 교육적 기능은 Calvin과 개혁파교회의 전통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강한 교의 언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서 인류와 창조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려는 희망을 제시한 것이디. 그리고 위대한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과 이웃과 자연과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성령의 중생의 능력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문화적인 사명과 기회를 새로이 수용해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죄 용서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뉘우치게 되었으며, 이제 그들의 문화적인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에 적극적으로 공헌하도록 불려진 존재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기독교 교육의 과제는 그리스도라는 선물과 격려를 통하여 이러한 생생한 변화의 영역에서 사람들이 모든 것의 주인이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실제로 삼의 모든 것은 가르침의 주제가 되며, 기독교 교육의 일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문화적인 사명의 다양화된 차원들로 제시도어야 한다.2) 코메니우스의 인간론코메니우스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인간론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피조물이 바로 인간이며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을 그대로 모사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이로인해 인간은 거울과 같은 존재라고 본다. 즉 그냥 인간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사하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또한 인간의 모습을 세계의 질서와의 관계에서 파악한다면 소우주의 모습을 가진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즉 인간이 이성을 가진 정신적 존재이며 질서에 속한 한 본체로서, 세계의 질서와 그것들의 법칙에 종속할 때에 소우주의 모습이 거기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인간론은 그의 교육론에도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기에 교육에 대한 접근법 자체가 유물론적 교육론과 차이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그의 범 교육론이다.3) 코메니우스의 범교육론코메니우스의 한 것으로 보지 않았고, 음악 없는 예배를 시편을 찬양하도록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의도는 1537년의 규정인 공중기도로서 시편을 부르도록 제안한 것에서 처음부터 나타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편의 찬송은 공중 예배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도 부르도록 했던 것이다.이처럼 칼빈이 실천한 제네바의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였다.그것은 하나님이 예배의 주인이시며, 예배에서 그의 백성들을 통하여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영광스러운 예배였다. 예배에서 섬기는 예배순서 담당자들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서의 활동이었다. 그리고 칼빈의 예배는 역사적인 예배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하나의 표준적인 예배모범을 제시하기 위하여 예전적인 형식을 갖춘 예배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적인 형태를 갖추었다는 것은 예배가 하나님 중심이 되도록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역할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칼빈에게서 성례의 의미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었다. 역시 세례와 성찬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칼빈은 예배 찬송을 시편에 곡을 부친 노래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로마가토릭교회가 회중찬송을 알지 못하고 성가대만을 이용한 제한 적인 모습을 회중이 찬송하게 함으로서 예배의 의미와 공간을 더욱 확대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분명 말씀과 성찬의 두가지 중심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정일웅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하나님의 일’(opus dei)로 이해된 기독교 예배는 초대교회에서부터 말씀과 성찬의 두 가지 내용을 예배의 중심요소로 삼았다. 말씀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서 밝히는 일로써 증거하는 행위가 중심이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신 구속사건의 실제적인 모습으로써 성찬은 일상에서의 제자들과 나누었던 식탁의 교제, 최후의 만찬의 모습을 그 전형으로 삼아 예배의 중심적인 행위로 표현하였던 것이다.그렇다면 한국교회 예
    인문/어학| 2010.12.17| 22페이지| 4,000원| 조회(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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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형룡의 내세론과 루이스벌코프 비교
    목 차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277021151" ■요약 PAGEREF _Toc277021151 h 2 Hyperlink l "_Toc277021152" 일반적 내세론 PAGEREF _Toc277021152 h 2 Hyperlink l "_Toc277021153" 제 1 장 그리스도의 재림 PAGEREF _Toc277021153 h 2 Hyperlink l "_Toc277021154" Ⅰ. 사실성과 중요성 PAGEREF _Toc277021154 h 2 Hyperlink l "_Toc277021155" 1. 재림의 사실성 PAGEREF _Toc277021155 h 2 Hyperlink l "_Toc277021156" 2. 재림교리의 중요성 PAGEREF _Toc277021156 h 3 Hyperlink l "_Toc277021157" Ⅱ. 재림 전의 대사변들 PAGEREF _Toc277021157 h 4 Hyperlink l "_Toc277021158" 1. 복음의 세계적 전파-이방인의 부름 PAGEREF _Toc277021158 h 4 Hyperlink l "_Toc277021159" 2. 이스라엘 전국의 회심 PAGEREF _Toc277021159 h 5 Hyperlink l "_Toc277021160" 3. 대배교와 대환란 PAGEREF _Toc277021160 h 5 Hyperlink l "_Toc277021161" 4. 적 그리스도의 나타남 PAGEREF _Toc277021161 h 5 Hyperlink l "_Toc277021162" 5. 징조와 기사 PAGEREF _Toc277021162 h 6 Hyperlink l "_Toc277021163" Ⅲ. 재림의 시기 PAGEREF _Toc277021163 h 6 Hyperlink l "_Toc277021164" 1. 천년기 전 PAGEREF _Toc277021164 h 6 Hyperlink l "_Toc27들릴 것이다. -이런 비상 사면들은 재림과 세상 끝에 향해 나가는 시대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전쟁을 세상 끝에 가까운 시대의 표지로 말씀하시어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고 하셨다(마24:6)세상끝이 가까운 때에는 이 모든 징조들이 놀랍게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 자연적인 생성들에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수반하는 것일 것이다. 주께서는 강조하여 말씀하시되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24:33)하셨다.Ⅲ. 재림의 시기1. 천년기 전요한계시록 20장에서 요한이 묘사한 “천년동안”과 동일시되어 “천년기”라 칭한다. 그리스도의 귀환이 천년기 보다 앞설 것이라고 주장한다. 밑받침이 되는 성구는 계시록 19장 그리스도의 귀환, 제 20장 천년기, 21장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순서와 연관이 있다.2. 대환란기천년기를 표준으로 하여 그 이전에 재림이 있을 것을 믿는 천년기 전 재림론은 또한 대환란을 표준으로 삼아 대 환란 전 재림론과 대환란 후 재림론의 두 파로 나눈다. 교회역사에 따르면, 초기 3세기간은 재림의 시기가 적그리스도, 대환란, 그리스도의 귀환 들의 순서로 말하였고 대환란 전 재림의 관념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중세기에는 이 초대해석이 포기되고 계시록의 영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이 대치되었으며 종교개혁 이후 18세기말까지는 교황을 적 그리스도로 보는 역사적 해석이 성행하여 “프로테스탄트”견해라 칭하였다. 19세기는 대환란 끝에 있을 그리스도의 단일 재림으로 보았으며 19세기 후반에는 대환란 후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는 경향을 짙었다.1) 대환란 전인가?그리스도가 대환란 끝에 영광으로 나타나리라는 것은 성경이 명백히 가르친다(마24: 29,31). 그러나 이 현현 전에 그리스도가 공중에 비밀히 오셔서 지상의 성도들을 휴거하시리라는 것 즉 대환란 전 재림은 성경의 지원을 가지지 못한 관념이다.대환란 전 재림론은 부활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첫째부활(계20:4,5)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이니, 대환란의 시초에 한 것이라고하여 그의 귀환을 요원한 장래에로 추방할 것도 아니다.2. 주의 교훈우리 주의 교훈들은 명백하였다. 경성의 권면을 절정으로 한 예언적 강론에서 그는 자기의 귀환이 즉각적이 아닐 것을 밝히시었다. 즉 그는 그의 승천과 영광스러운 재림 사이에 긴 시간이 경과할 것을 선언하셨다. 그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은 세상 끝에 가까운 시대의 특성이요. 그 끝 자체의 표적은 아니라 하셨다. 그는 그의 강론을 종결하는 비유들로 자기의 재림의 오랜 지연을 강조하였다. 그는 말씀하시되 신랑이 밤중까지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것이라고 하셨고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저희와 회계할”것이라고 하셨다.(마25: 14,·19)그런즉 그리스도는 그의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기” 전에 상당히 긴 시간이 경과하며 어떤 지정된 사변들이 반드시 생기할 것을 분명히 가르치신 것이다.3. 초대 제자들의 형편그러나 이 지연을 예언하시며 이 사변들을 묘사하시는 동시에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그의 귀환을 깨여 대망함이 가하다고 역설하셨다. 그들은 주의 귀환을 대망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먼저 정치계에 큰 위기가 오리라는 것, 군대들이 소집되고 예루살렘이 파멸되고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밞히리라“는 것을 (눅21: 24) 알았다.그들은 주의 귀환이 있기 전에 먼저 베드로가 늙어 순교자의 죽음을 죽을 것을 알았다(요21: 18-22). 또한 제자들은 주의 귀한 전에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마24: 24)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후까지도 예루살렘 성 외에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주의 귀환을 대망하고 있었다.우리는 비록 주의 귀한 전에 있을 사변들을 알지라도 반드시 깨어 대망하여야 한다.4. 바울의 실례그는 자기가 주의 귀환까지 살겠노라고 진술한 일이 있었으나 그는 그가 그리할 수 있다는 것을 자주 암시하였다. 그가 “우리 살아 남은 자도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라고 말할때에 그는 단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더 후기로 정한다.그러나 소위 전화점 이전에는 예수께서 이방인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거나 그 후에 왕국을 전파하기를 중지하셨다는 것은 주장되기 불능하다.⑤ 기성 교회와의 소원시대론자 신봉자들은 기성교회와의 관계에서 소원하여지고 있음이 주목할만하다.시대론자들은 거의 항상 교회의 신경들을 경시하고 초교파주의, 혹 비교파주의에의 경향을 나타낸다.⑥ 개혁파 신학과의 난관시대론이 하나님의 왕국과 교회를 엄밀히 구별하여 현재의 지상 교회를 왕국으로 보기를 거절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교회관 신국관과 정면 충돌을 면하지 못한다. 신도 게요(25장 2조)와 소요리 문답(26)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말한다.이 세계에 존재하여 교회를 외면적 현현으로 가지는 왕국은 아직 이것의 준비적 계단에 있다. 이것은 현재의 교회 시대를 통하여 전진하다가 그리스도의 귀환 후에 영광의 왕국으로 결과될 것이다. 은혜의 왕국은 이미 임재하고 영광의 왕국은 장차 나타날 것이다.2) 역사적 천년기 전론의 정당성① 시대론과 다르다역사적 천년기 전론과 시대론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데, 시대론은 재림론의 제 4 견해요. 결코 본래의 천년기 전론과 혼동될 것이 아니다. 사도 시대로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존재한 유일형의 천년기 전론은 그 때에 “천년론”이라 칭한 것이니 우리가 역사적 천년기 전론으로 특징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이것을 포지한 자들은 교회가 환란을 통과하리라는 것, 그리스도가 귀환하신때에 그는 즉각적으로 천년 왕국을 세우시리라는 것을 믿었다.②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사실상 예언 해석에 두 가지 방법이 다 필요한 것이고 어느 하나를 제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천년기 전론도 예언의 영해를 취하지 않는 바 아니나 그것이 과도하여 사실과 진리의 지식을 올바로 얻지 못하는 지경에 가지 않기를 힘쓸 뿐이다. 천년기 전론이 항상 예언의 영해에 신중하고 문자적 해석에 용심한다면 그것은 사실과 진리의 정해를 기함에서다.시대론이 과도한 문자적 해석을 시도한다면 름은 현재 한국교회에 큰 태풍으로 몰려 왔으며, 너도나도 거기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릭워렌의 구도자 예배, 수정교회등 예배를 쇼로 탈바꿈 시켜버린 현상들이나 소위 제3의 물결이라는 테제 아래 능력 전도를 부르짖는 빈야드 계열과 알파사역은 한국교회의 분별력을 상실케 만들었을 뿐아니라 성공주의라는 병에 감염되게 만들어 버렸다.총신대 교수였던 서철원 박사는 믿음으로 신학함에 관한 지론을 견지하였으며 상승 기독론에 대한 전면적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현상들이 인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상승기독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계시적이며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서철원박사는 우리의 신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우리의 신학은 개혁교회(ecclesia reformata)의 신학 곧 개혁신학이므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confessions ecclesiae reformatae)을 규범(norma)과 근본(fundamentum)으로 삼는다. 그리고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의 신학을 기초로 삼는다. 특히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에 나타난 성경이해를 준거해서 신학한다.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규명하는데 필수적인 작업 중의 하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미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변천과정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특히 구 프린스톤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이 미친 한국 장로교회를 올바로 파악하는데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다. 특히 상당수의 선교사들이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특별히 근본 교리 수호에 최선을 다한 메이첸에 관한 연구는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김길성 교수는 다음과 같이 메이첸을 말한다.미국 장로교 안에서 전개되었던 근본주의 및 현대주의 간의 논쟁은, 교회론에 관련된 논의가 형식적 원리로 작용했다면, 구원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내용적 원리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기독교의
    인문/어학| 2010.12.17| 31페이지| 5,000원| 조회(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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