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천민들이 꿈꾸던 미완의 혁명 화척(禾尺)화척(禾尺)은 고려시대의 천민계급으로 양수척(楊水尺), 수척(水尺)?화척(禾尺)?무자리라고도 하였다. 그 기원에 대해서 《고려사》에서는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굴복하지 않던 자들을 모아 압록강 밖으로 쫓아버린 무리라 하였으나,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여진 또는 거란 계통의 북방 귀화인(歸化人)으로서, 일반 백성과 융합되지 못하고 수초(水草)를 따다가 고리를 만들고 사냥을 하는 등 방랑생활을 하며 도살(屠殺), 육상(肉商), 창우(倡優)를 업으로 삼아 특수부락을 형성하였다. 또 《고려사》에서는 이들은 국가의 부역(賦役)과 호적에서도 제외된 국민으로서 이주(移住)가 무상한 방랑집단이며, 특히 양수척의 유기장가(柳器匠家)에서는 기녀(妓女)가 나왔다 하여 기생의 유래를 양수척에 둔다. 이들의 일부는 왜구(倭寇)를 가장하고 민가 및 관청을 습격하여 노략질도 하고, 거란군이 고려에 쳐들어올 때 그 앞잡이가 되기도 하여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소설 의 신분 해방 투쟁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노비들 ? 거칠 · 걸보 · 저놈이(후에, 만적) · 받년이 - 은 압록강 하구의 낮은 땅에서 살던 ‘화척’ 출신 이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고려 의종24년(1169년)에 발생한 무신의 난으로부터 신종 원년(1197년)에 최충헌 의 사노 만적이 일으킨 무장봉기가 실패하기까지 28년간인데, 정중부의 반란에서부터 최충헌 이 집권하기까지 28년간의 무인정치사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비교적 소상하게 다룬 내용으로 구성되었다.의 작가인 김주영(金周榮)은 역사소설 로 새로운 역사 인식의 틀을 제시하였다는 호평을 받았고 , 등을 신문에 연재하며 주로 역사대하소설을 집필하였다. 1984년 로 제1회 유주현문학상을 수상했고, 1996년 으로 제8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었으며, 2002년 로 제5회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는 (1986), (1988), (2000) 등이 있다.그의 대표작인 은 전 5권의 장편 경이 되는 철원지방으로 세 번이나 답사하러 간 적도 있었다.그래서인지 그는 을 집필하던 도중 절필선언을 하게 된다.그 무렵 50대 초반의 힘있는 열정으로 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일년 반 정도 써온 시점에서 확인되기로는 확보하고 있는 자료에 여러가지 문제가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북한에 관한 자료들이 그러했는데, 예를 들자면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도라든지 관련 논문들이 너무 불충분 하다는 사실을 북한 자료의 개방과 더불어 알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더 공부하고 자료를 보완해서 다시 쓰겠다라는 결심에 앞서, 일단 중단을 결행하는 일이 내 양심에 부합된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또한 완간이 된 후 동아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국내외 고서와 논문들을 참조하여 고려시대 개성 시가지를 지도로 만들어보기도 했으며 등장 관리들의 승급 일자나 생몰일 하나하나가 실록과 같도록 했다’고 밝혔다. 작가는 ‘작품을 써오면서 고려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이 의외로 적다는데 실망하기도 했다’며 ‘이는 북한측의 고려 중시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각되지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 우리의 중세사를 이룬 국가라는 점을 감안, 합당한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작가는 출세작 에서처럼 이번 작품의 각 권 말미에도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옛말들과 순 우리말의 풀이들을 실어놓았는데 ‘통일이 되면 개성의 옛 거리와 북한의 고어들을 살리기 위해 작품을 더 손질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그는 작가의 말에서 ‘당시 고려의 조정이 무인들의 천하가 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한 인간관계가더럽혀지고 훼손되는 과정,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역사적 해석과 오늘의 우리는 과연 무자비하고 참혹하였던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려 하였다. 그렇기에 그 시간 속에서 명멸하였던 인간들의 미추와 훼예와 포폄을 생동감 있게 밝히려고 하였다’고 말했다.그리고 그가 소설 속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어휘력과 문장의 표현력. 동시대의 작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다양하고 풍성한 어휘, 번득 일으키고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된다. 반란의 주모자들은 정중부 · 이의방 · 이고 · 채원 등등인데, 이들은 어느 날 의종이 보현원으로 거동하는 길에 왕이 보는 앞에서 수많은 문신들과 환관들을 무참히 척살하고 사실상의 정권을 장악한다. 그들은 의종을 폐위하여 그의 희첩 무비와 함께 거제도에 유배시킨다. 이들은 중방에서 정치를 주도해나간다. 그들의 거사 동기 자체가 문반 우위 정치에 대한 반감이었기에, 대부분 문신을 죽이거나 축출하고 권력욕을 만끽하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고, 주동자들 중 가장 과격하였던 이고가 동지였던 이의방의 손에 죽는다.거칠은 막내 동생이 문반들의 사냥놀이에 몰이꾼으로 나갔다가 화살에 맞아 죽자 고향인 수자리 마을을 떠난다. 거칠은 이의방의 노적에 올라,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방량, 즉 노비로부터의 해방을 모색한다. 그는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아우처럼 아껴온 걸보와 조카 만적을 수자리 마을에서 데리고 나오지만, 노비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칠은 이의방을 숙청하려던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00여 명과 손잡지만, 결국 실패하고 주인에게 죽임을 당한다. 걸보와 거칠의 의형제 도금, 그리고 그의 처 윤소와 만적은 결국 개경을 떠나게 된다.무신정권은 조위총을 주모자로 한 반란군을 맞아 내전을 치르게 된다. 서북변경의주진군의 지휘관들인 도령을 주축으로 한 난군의 세력은, 그 일대 백성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기에 그 진압이 수월치 않았다. 걸보와 만적은 이 반란에 합류하여 후에 방량될 것을 꿈꾸지만, 결국 난군은 섬멸 당하며 걸보도 죽임을 당하고, 정중부의권력은 더욱 강화된다. 이의방은 천하의 권세를 좌지우지하며 학정을 하다가 정중부에 의해 피살당한다.이 반란의 진압으로 정중부와 그 아들 정균 등의 세력도 더욱 방자해지고 백성들의 원성도 다시 높아진다. 이러한 명분을 엎고 정중부 일당에 대한 반란이 다시 일어나는데, 경대승을 주모자로 한 허승 · 김광립 등이 그들이었다. 경대승은 자신을 중심으로 도 쓸어버린 경대승은 밤마다 겪게 되는 악몽과 가위눌림으로 서른 살의 나이에 병사해버린다. 그러자 그 밑에 있던 도금은 피신한다.그 다음의 권력자로 등장하는 이는 의종을 유배지에서 죽인 이의민 과 그의 아들 이지영이다. 이들은 경대승이 득세하자 변방으로 피해있었는데, 경대승이 죽자 이의민 이 왕명을 받고 개경으로 올라와 권력을 잡았다. 그러던 중 이지영 은 압록강 수자리 마을에 살고 있는 받년이라는 처녀를 기첩으로 삼는다. 받년이는 어린 시절 만적과 한 마을에서 장래를 약조한 사이였지만, 결국 자운선이라는 이름으로 기적에 올라 그를 따라 개경에까지 와서 총애를 받는다. 이의민과 이지영의 행패는 조정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들 부자는 최충헌 · 최충수 형제의 칼을 맞고 비명 횡사함으로써 그 영달을 끝낸다. 최충헌 등이 명종을 몰아내고 신종을 옹립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형 충헌은 과하게 권력을 탐하는 충수를 척살한다.만적은 화살을 맞아 죽을 위기에 있던 최충헌 을 구해줌으로써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이 인연으로 최충헌 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충헌의 집안일을 돕다가 어릴 적 수자리 마을에서 장래를 약조하였던 받년이가 이지영의 애첩이 되어있는 걸 알게 되지만, 다가가지 못하고 다만 지켜볼 뿐이었다. 만적은 자신의 의형제들과 함께 모역을 결심한다. 하지만 순정의 배반으로 만적은 척살당하고, 자운선은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소경이 된 후, 길을 떠난다.소설 은 민중적 시각으로써 지난 시대의 역사를 해석하려 하였다. 왕조의 변천과 더불어 무신정치사를 다루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와 같은 시대에 희로애락을 가진 천민들의 삶과 애환을 소설의 전반에 드러내고 있다.그 당시에는 벼슬아치들이 백성과 유민들을 수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으며, 여염의 여자가 저항조차 못한 채 겁탈을 당해야 하며, 벽란도 저자에서는 인육이 매매되는 사태에까지 이른다. 이는 당대 민중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고통스러웠으며 얼마나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는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무신들의 세력다툼과 끊임우처럼 아껴온 걸보. 조카 만적. 그리고 도금이와 그의 처 윤소. 노비는 아니라 하더라도 기적에 올라 있는 기생 자운선······등등의 인물들은 이른바 사회 상부구조의 권력싸움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각과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눈물겨운 싸움을 벌여간다. 따라서 고려 무신정권이라는 정치적 격변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 나서는 천민들의 처절한 삶의 투쟁사라고 할 수 있다.무신의 난으로 사회제도가 바뀌고 그 가치 기준이 무너져나갈 때, 가장 큰 희생자는 무력하고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천민집단이었다. 그들은 정권의 실세가 바뀔 때마다 죽거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혹은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바로 이 화척 출신의 노비, 예컨대 이의방의 노비가 된 거칠이나 최충헌 의 수노가 된 만적을 통해 천민들의 통한을 절실하게 드러내서, 그들의 존재가 역사적 사건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민중지향적 역사관인 것이다.이 소설은 작가의 완벽주의 때문인지 역사적 사건의 거의 다른 것이 없다. 다만 그 역사적 사건 사이사이에 만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허구적 인물들을 적절히 배치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만적으로 하여금 노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식을 더욱 깊게 심어준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거칠과 걸보 모두 방량되기 위해 노력하다 죽어가기 때문이다.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만적과 자운선은 실존하였던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는 만적과 자운선의 출신 성분과 그 행적에 관하여서는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만적이 거사를 도모하려는 이유, 즉 동기부여가 미약하다. 소설에서는 상전인 최충헌 이 패덕한 동생, 최충수 를 죽이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 시체를 만적이 옮기면서, 이를 계기로 인륜조차 지키지 못하는 자를 벌한다는 논리가 등장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소’ 라고 말하는 만적이 없는 것이다. 그 동안은 천예계급의 기본적인 권리요구나, 인간다운 대접에 대한 요구 등의 노비해방 운동의 본질적인 문제가 사라듯하다.
Ⅰ. 서론Ⅱ. 본론1. 동사강목의 편찬(1) 동사강목의 편찬동기(2) 동사강목의 편찬과정2. 동사강목(1) 동사강목의 서술방식(2) 동사강목의 체제3. 동사강목의 의의Ⅲ. 맺음말Ⅳ. 참고문헌Ⅰ. 서론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과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대하여, 그가 실학자이자 역사학자라는 것과 그리고 그 저서는 철저하게 고증학적 관점에서 쓰였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아마 이러한 이야기는 국사책에 잠깐 언급된 것으로 대부분 이와 같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는 실학자라고 할 수 있을까.안정복은 1712년(숙종38)에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당시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던 남인 계열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잦은 이사와 안정되지 못한 가정적 환경 속에서 다방면의 독서만을 하며 지냈다. 무주에서 텃골로 이사 온 해로부터 이후 이익을 방문하기 전 10년 동안 《성리대전(性理大全)》,《심경(心經)》등 여러 서적을 탐독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학문세계를 형성했다. 1746년에 성호학파의 한 사람이 되어,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당시 시대상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사상적 영역을 넓혀 간다.또 18세기 중·후반기의 영정시대는 정치적으로는 탕평의 안정기로 볼 수 있으나 사회경제적으로는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신분제의 변동이 격심해지고, 사상적으로는 남인실학과 문학사상이 성숙해 가던 시기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동과 사상계의 변화에 수반하여 역사서술상으로도 다양한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사서들이 출간되었다. 역사인식이 변화되면서 연구방법 또한 새롭게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역사의 독자성을 추구하고, 자국에 대한 독자적 인식을 추구하는 흐름이 강하게 나타났다. 연구방법 또한 다양한 사체가 등장하면서 실증적 사료의 해석과 서술의 객관성이 중시되었다.이렇듯 17·18세기에 학문적, 사상적으로 크게 변화하는 가운데서 편찬된 《동사강목》은 책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자국 서적 42종과 중국서적 17종 등 광범위한 자료들을 참고, 비교, 검토하는 지고 있었는데, 그 서문에서 ‘대개 사학의 방법은 정통을 밝히고 시비를 바로잡아 충절을 칭찬하는 것과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하는 것’이라 하여 기존 역사서의 오류를 지적한 후, 계통(系統)을 바르게 밝히고 보다 객관적이며 사실 고증에 충실한 역사서를 저술하고자 하였다.저술의 전체적인 방향,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 등은 안정복의 역사관에 기초를 하고 있으며, 저자가 안정복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안정복은 스승에게 올린 편지에서 우리나라 역사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는데, 그는 42세부터 48세에 이르기까지 6년간 이익과 더불어 강목 및 동사에 관한 문답을 했다. 실제로 이 편지의 대한 이익의 답변 내용이 《동사강목》 서술에 거의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병휴(李秉休) ? 체제공 ? 허전(許傳)은 이익이 기존 역사서의 소략함과 오류를 걱정하며 안정복에게 의례를 주어 《동사강목》을 편찬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렇다고 안정복이 이들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안정복은 올바른 논의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그것이 비록 주자나 이황의 것이라 하더라도 과감히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2) 동사강목의 편찬과정「순암선생연보(順庵先生年譜)」에 따르면, 《동사강목》의 편찬은 1756년(영조30)에 착수되어 1759년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안정복이 이익에게 1760년에 보낸 편지에 《동사강목》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를 볼 때 실질적으로 종료된 것은 1760년으로 짐작된다.1754년경 편찬의 뜻을 이익에게 바친 안정복은 곧 편찬에 필요한 관련 서적을 분석하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안정복은 이익을 비롯하여 성호문인인 윤동규와 이병휴 등에게 크게 학술적으로 의존하였다. 초고가 완성되자마자 곧 이익에게 보내졌고, 더불어 성호문인들의 의견을 구하게 되었다. 《동사강목》의 초고는 나오자마자 곧 재고에 들어갔는데 이는 주변 인물들의 의견을 청취하며 수정 보완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계속된 재고 과정, 안정복이 타계할 때까지 《동사강목》은 간행되지 못하였고,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1915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2. 동사강목(1) 동사강목의 서술방식《동사강목》의 본편은 외형적으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편년체 형식이지만, 강목체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책의 수권에 실려 있는 《동사강목》 범례에서 밝힌 이 책의 편찬 원칙 때문이다. 《동사강목》 편찬의 기본 방향은 역대 왕조와 군주를 정통과 무통으로 엄격하게 구분하고, 충성과 반역을 엄중하게 밝히고, 유교적 가치기준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시비를 바르게 한다는 원칙이 있다. 이는 기준에 따라 중요한 사실은 강의 항목에서 서술하고, 그보다 비중이 낮다고 판단되는 사실은 목의 항목에서 서술하였다. 목에 해당하는 사실의 서술은 강보다 글자를 줄여 서술을 시작하거나, 강의 항목은 별도의 표제를 붙여 목의 항목과 구별하여 서술하는 형식의 강목체 형식의 역사서술이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붙여야 할 곳에는 ‘살핀다.’는 뜻의 ‘안(按)’자를 붙여 두 줄로 쓰고 있으며, 주석도 두 줄로 썼다.강목체사서(綱目體史書) 자체가 강상도덕(綱常道德)을 가장 극렬하게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므로, 강상도덕을 강조하는 사론을 쓰지 않더라도, 이미 체재 차제가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복이 특히 강조하는 강상의 덕목은 충절(忠節)이다. 그의 충절에 대한 관념은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 강도는 어느 사론보다도 크다. 이는 안정복의 군신의 명분에 대한 집착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며, 현실적으로 왕권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안정복이 사용한 방법은 문헌고증 이었다. 이 고증과정에는 그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었다. 즉, 기록의 전거(典據)는 확실한가, 가능한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가, 불교에서 나온 허황된 기록은 아닌가, 기록의 내용은 합리적인가, 설화의 경우 교훈적인가 등을 엄밀히 따원년(192.B.C) - 온조 27년(9)10년 - 668년문무왕 9년(668) - 경순왕 9년(935)태조 19년(936) - 공양왕 4년(1392)부권(附卷)(2권)상권하권상중하고이(考異)괴설변증(怪說辨證)잡설(雜說)지리고(地理考)강역연혁고정(疆域沿革考正)분야고(分野考)①수권《동사강목》은 서문에 앞서 제동사편면(題東史篇面)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의 서문을 이익에게 요청했는데 이익이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홍범설(洪範設)만을 남긴 채 타계하고 만다. 10년 뒤 안정복이 이병휴에게 표제문을 부탁하자, 이병휴가 홍범설을 전제하고 덧붙여 쓴 발문이다.다음 범례부분은 우리나라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하고 역사고증을 철저히 하겠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범례 안에는 본례와 잡례가 있는데, 본례는 《자치통감강목》의 법례를 말하며 《자치통감강목》의 필법을 준수한다는 원칙하에 우리나라 역사의 독자성을 중시하여 잡례를 두었다. 이 내용은 주로 역사서술방법과 고증에 대한 규정으로 부록에서 이루어지는 고증의 기본원칙이 제시되고 있다.채거서목(採據書目) 부분은 그가 《동사강목》을 편찬하면서 참고한 문헌을 제시하고, 문헌의 비판을 해놓은 부분이다. 채거서목에는 국내문헌 42종, 중국문헌 17종, 총계 59종을 제시하고 있으나 본편이나 부록을 검토하여 보면 체거서목에 제시된 문헌은 그가 사용한 문헌의 일부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도(圖)의 상권에는 동국역대전수지도를 비롯하여 고조선,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등 5왕조의 기본 전세도가 실려 있다. 중권에는 고려통일도, 현재의 조선 지도를 포함한 8폭의 강역도를 넣었다. 이는 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끝으로 하권에는 23개의 관직에 대한 연혁을 요약 기록하였다.②본편《동사강목》의 본편은 모두 17권으로 이루어져있고, 각 권은 다시 상하로 나뉘어져 있다. 본편은 철저하게 정통체계에 따라 구성되었는데 조선, 마한, 통일신라, 고려 등을 정통왕조로 두고 무통 삼국으로 구성된 체재를 갖추고 있다자 종래 역사학자들의 시대구분에도 약간의 변동이 생겼다. 그 예로 보자면 고려 태조 원년부터 ·8년까지의 고려가 통일신라가 쓰여 있는 5권 하에 분주되어 있는데 이것은 정통 신라왕조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태조 18년에 고려에 투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통론에 비추어 볼 때 왕건이 재위한 18년간은 반역한 기간으로 처리되지 않을 수 없었다.두 번째 특징은 본국위주의 기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안정복은 《춘추》에서 공자가 자신의 고국인 노의 기년을 쓴 것처럼, 자기도 《동사강목》이 우리나라의 역사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년을 쓰겠다는 취지를 밝혔다.세 번째 특징은 자신의 사론과 인용 사론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이다. 인용하는 사론은 대부분 목의 끝부분에 쓰고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 사론은 안설을 통하되, 세주한다는 원칙을 세웠다.마지막으로 이익과의 서신 교환에서도 나와 있는 우왕과 창왕에 대한 부분이다. 기존의 역사서에서 신우, 신창으로 쓰거나 반역전에 넣어 고려왕실의 정통에서 제외시키려 하였던 것과는 다르게 우왕과 창왕을 왕씨라고 말하며, 각각 전폐왕우(前廢王禑), 후폐왕창(後廢王昌)으로 기록하여 정통체제를 갖추었다.이와 같이 《동사강목》본편은 철저한 정통체계에 따라 편년 강목체의 체제로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과 마한에 기년을 붙여 서술한 점은 우리나라 상고사 서술체재의 큰 변화라고 보아도 좋은 것이다. 또한 이처럼 안정복이 정통론에 충실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도 정통이 있음을 강조하여 중국 중심주의적인 역사관에 대응하여 우리 역사에도 독자성이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깊이 배어 있었다.③부록《동사강목》의 경우 기존의 역사책의 부록들이 본편을 보충하는 자료집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과는 다르게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즉 순수하게 역사고증을 다룬 부분으로서 이를 근거로 하여 본편의 많은 내용이 서술되고 있다. 이에 《동사강목》범례의 잡례를 통하여 부록에서 다룬다는 고증계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부분이기도 하다.부록은 상하권으로 나뉘어져 있어였다.
안정복의 동사강목Ⅰ. 서론Ⅱ. 본론1. 동사강목의 편찬(1) 편찬배경① 시대적 배경②안정복의 생애(2) 편찬동기① 안정복 개인의 동기②이익의 편찬권고(3) 편찬과정① 초고편찬② 재고과정2. 동사강목의 내용(1) 동사강목의 서술방식(2) 동사강목의 체제①수권②본편③부록3. 동사강목의 의의(1) 고증??자료 사학적 의의(2) 민족의 독자성 강조Ⅲ. 맺음말Ⅳ. 참고문헌Ⅰ. 서론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을 통해 매우 귀중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흔히 안정복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뒤이어 『동사강목』이라는 책을 떠올릴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뭣도 모른 채 김부식『삼국사기』, 일연 『삼국유사』에 이어 조선후기로 가서는 유득공『발해고』를 무작정 외웠던 것처럼 안정복『동사강목』도 어느덧 실과 바늘처럼 함께 외워질 수밖에 없었던 짝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조선의 역사가로서 고려사를 공부한 안정복에 대해 배우고자 할 때, 그의 저서『동사강목』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안정복은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대 후반기에 태어나 영조대를 거쳐 정조대까지 살았지만, 그의 정치적 삶은 비교적 평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상적 편력은 당대 어느 학자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박학 다독하였다.안정복의 사서 편찬은 고대에서 고려 말까지의 통사체계를 서술한 『동사강목』(20권)과 조선왕조사를 정리한 『열조통기』(25권)로 대표된다. 『동사강목』은 책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삼국사기』, 『고려사』, 『해동제국기』등 42종과 『사기』, 『한서』를 비롯한 중국서적 17종 등 광범위한 자료들을 참고, 비교, 검토하는 고증학적 연구방법을 사용하였고, 기왕에 연구된 한국사론을 모두 수렴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대표적인 역사서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이제 간단히 안정복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의 저서인『동사강목』의 편찬 동기 및 그 과정, 내용과 체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Ⅱ. 본론1. 동사강목의 편찬(1) 편찬배경① 시대적는 인식에서 비록 된 것으로 청의 고증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역사학자들의 현실 개혁에 대한 논의가 크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유형원의 『반계수록』, 이익의『성호사설』인데, 대부분 자신의 논저를 통하여 나타내었다.이렇듯 『동사강목』은 17·18세기에 학문적, 사상적으로 크게 변화하는 가운데서 편찬될 수 있었던 것이다.②안정복의 생애안정복은 1712년에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당시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던 남인 계열이었는데, 그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연마하기에 전념하였다. 1746년에 성호학파의 한 사람이 되었고 이에 이황과 이익으로 이어진 철저한 주리설이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어린 시절 잦은 이사와 안정되지 못한 가정적 환경 속에서도 안정복은 유?소년기에는 다방면의 독서를 하며 지냈다. 무주에서 보낸 청소년기에는 할아버지와 어머니 등 가족의 영향으로 인해 역사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이 시기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같은 역사서를 접하게 되는데,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에 입문한 초기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무주에서 텃골로 이사 온 해로부터 이후 이익을 방문하기 전 10년 동안 『성리대전(性理大全)』,『심경(心經)』등 여러 서적을 탐독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학문세계를 형성했다. 이때 이미 역사 지식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통에 대한 인식도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또한 실천적인 정신과 학문태도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접한 유형원(柳馨遠)의 저서가 그의 역사인식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고 보여 진다.이후 안정복은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당시 시대상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사상적 영역을 넓혀 간다. 이익은 17세기 학자인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안정복은 그의 저서에서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안정복의 역사학이 정립되어 갔고, 『동사강목』편찬의 기반을 철저하게 반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으며, 실제로 이 편지의 대한 이익의 답변 내용이 『동사강목』 서술에 거의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 이렇듯 『동사강목』이 편찬되기 까지 이익의 직접적인 영향이 컸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이익이 『동사강목』의 편찬을 권유했다는 직접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병휴 ? 체제공 ? 허전은 이익이 기존 역사서의 소략함과 오류를 걱정하며 안정복에게 의례를 주어 『동사강목』을 편찬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렇다고 안정복이 이들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안정복은 올바른 논의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그것이 비록 주자나 이황의 것이라 하더라도 과감히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3) 편찬과정① 초고편찬「순암선생연보」에 따르면, 『동사강목』의 편찬은 1756년에 착수되어 1759년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나 안정복이 이익에게 1760년에 보낸 편지에 『동사강목』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를 볼 때 실질적으로 종료된 것은 1760년이 아니었을까 한다. 연구와 집필했던 동안 안정복은 초기부터 스승인 이익의 지도를 받았으며, 성호학파의 학자들로부터도 학문적인 도움을 받았다.1754년경 편찬의 뜻을 이익에게 바친 안정복은 곧 편찬에 필요한 관련 서적을 분석하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허나 편찬은 안정복 혼자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경제적인 곤란, 병약했다는 점, 편찬에 필요한 학문적인 자문으로 인해 어려움이 자주 발생하여 이익을 비롯하여 성호문인 가운데 윤동규와 이병휴 등에게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사강목』의 편찬은 여러 가지 여건의 불리함 때문에 비록 늦어지기는 했지만, 안정복의 집념과 이익을 비롯한 성호문인의 협조로 꾸준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안정복의 건강이 매우 악화었던 한 때 편찬이 중단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 때 안정복은 『동사강목』의 완성을 위해 이원양, 권기명에게 집필을 맡기고, 윤동규에서 마지막 윤문을 부탁한 유서를 남겼다. 당시 집필된 『동사강목』은 고려 인종 역점을 둔 사서가 아닌데 반해서, 『동사강목』은 그 방면의 비중이 매우 높다. 이러한 사실고증과 사론의 발달은 조선후기에 이룩된 사학연구의 독자적 성과와 특색을 반영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연도표시에서 그 차이점을 볼 수 있는데, 『자치통감강목』은 갑자(甲子)를 맨 위에 적고 그 밑에 중국의 기년(紀年)을 표시하고 있는데 비해, 동사강목은 갑자 밑에 우리나라의 기년을 적고, 갑자 위에 세주(細註)로 중국의 기년을 표기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는 우리의 연도로 표시하겠다는 주체적 의식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1) 동사강목의 서술방식『동사강목』의 본편은 외형적으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편년체 형식이지만, 『동사강목』은 강목체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책의 수권에 실려 있는 『동사강목』 범례에서 밝힌 이 책의 편찬 원칙 때문이다. 『동사강목』 편찬의 기본 방향은 역대 왕조와 군주를 정통과 무통으로 엄격하게 구분하고, 충성과 반역을 엄중하게 밝히고, 유교적 가치기준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시비를 바르게 한다는 원칙(명통계, 엄찬역, 정시비, 포충절)이 있다. 이는 범례에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 기준에 따라 중요한 사실은 강의 항목에서 서술하고, 그보다 비중이 낮다고 판단되는 사실은 목의 항목에서 서술하였다. 목에 해당하는 사실의 서술은 강보다 글자를 줄여 서술을 시작하거나, 강의 항목은 별도의 표제를 붙여 목의 항목과 구별하여 서술하는 형식의 강목체 형식의 역사서술이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붙여야 할 곳에는 ‘살핀다.’는 뜻의 ‘안(按)’자를 붙여 두 줄로 쓰고 있으며, 주석도 두 줄로 썼다.강목체사서(綱目體史書) 자체가 강상도덕(綱常道德)을 가장 극렬하게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므로, 강상도덕을 강조하는 사론을 쓰지 않더라도, 이미 체재 차제가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복이 특히 강조하는 강상의 덕목은 충절(忠節)이다. 그의 충절에 대한 관념은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 온조 27년(9)10년 - 668년문무왕 9년(668) - 경순왕 9년(935)태조 19년(936) - 공양왕 4년(1392)부권(附卷)(2권)상권하권상중하고이(考異)괴설변증(怪說辨證)잡설(雜說)지리고(地理考)강역연혁고정(疆域沿革考正)분야고(分野考)①수권『동사강목』은 서문에 앞서 제동사편면(題東史篇面)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의 서문을 이익에게 요청했는데 이익이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홍범설(洪範設)만을 남긴 채 타계하고 만다. 10년 뒤 안정복이 이병휴에게 표제문을 부탁하자, 이병휴가 홍범설을 전제하고 덧붙여 쓴 발문이다. 이익과 이병휴의 생각이 담긴 글을 서문보다 앞서 『동사강목』의 첫머리에 두었다는 점에서 『동사강목』은 성호학파의 역사서라는 점을 자처한다고 볼 수 있다.다음 범례부분은 우리나라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하고 역사고증을 철저히 하겠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범례 안에는 본례와 잡례가 있는데 이는 중국과 다른 우리역사의 독자성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의 본례는 『자치통감강목』의 법례를 말하고 『자치통감강목』의 필법을 준수한다는 원칙 하에, 우리나라 역사의 독자성을 중시하여 잡례를 두었다. 이 내용은 주로 역사서술방법과 고증에 대한 규정으로 부록에서 이루어지는 고증의 기본원칙이 제시되고 있다. 이처럼 범례에서 역사고증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제시되기는 아마도 『동사강목』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채거서목(採據書目) 부분은 그가 『동사강목』을 편찬하면서 참고한 문헌을 제시하고, 문헌의 비판을 해놓은 부분이다. 채거서목에는 국내문헌 42종, 중국문헌 17종, 총계 59종을 제시하고 있으나 본편이나 부록을 검토하여 보면 체거서목에 제시된 문헌은 그가 사용한 문헌의 일부란 사실을 알 수 있다.다음으로 도(圖) 부분은 수권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상권에는 동국역대전수지도를 비롯하여 고조선,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등 5왕조의 기본 전세도가 실려있다. 중권에는 고려통일도, 현재의 조선지도를 포함한 8폭의 강역도를
목차서론본론정도전의 의 완성결론서 론조선시대의 정치를 이야기 하면서 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조선은 갖추어진 법전에 의해 제도를 마련하고 행정을 펴 나간 법제 국가였으며,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법전 편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전기간에 걸쳐 국가운영의 기본 질서로 간주되었다. 고려 말부터 사용하던 율의 정리에서부터 시작하여 과 (1397) 그리고 (1485)으로 이어지는 법제, 법전의 정비과정을 거치면서 유교이념에 맞는 통치구조가 확립되어 갔다. 조선은 단계적인 개혁과정을 거쳐 중앙정치제도, 정치운영의 원칙이 마련되는 가운데 체제로 집약되는 왕조의 정치체제를 마무리하였는데, 그것은 국왕을 중심으로 정치·경제·군사·사회의 모든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경국대전》의 구성을 살펴보자면, 조선왕조 개창 때부터의 정부체제인 육전체제를 따라 6전으로 구성되었다. 원래 육전체제는 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를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니고 현실에 맞게 조정하였다. 육전을 살펴보자면, 〈이전〉은 궁중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직제 및 관리의 임면과 사령, 〈호전〉은 재정을 비롯하여 호적·조세·녹봉·통화와 상거래 등, 〈예전〉은 여러 종류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외교, 의례, 공문서, 가족 등, 〈병전〉은 군제와 군사, 〈형전〉은 형벌·재판·노비·상속 등, 〈공전〉은 도로·교량·도량형·산업 등에 대한 규정을 실었다.조선은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한 사회이며, 국가의 체제도 유교에 따라 운용되었다. 속에는 조선 초의 정치적·사회적 배경은 물론, 당시 지배층의 정치이념과 지향하는 바가 반영되어 있다. 이렇듯 은 조선의 정치제도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사료가 된다. 이번 레포트를 통하여 이야기 할 것은 정도전의 에서부터 으로 이어지는 법전의 편찬과정이다. 의 법제사적 의미 또한 매우 중요하지만, 법전이 편찬되는 정치·사회적 상황을 위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본 론정도전의 은 조선 태조 3년(1394) 삼 자세한 조문은 전하지 않고, 육전마다 총서와 항목별 개요라고 할 수 있는 소서만 남아있다. 여기에는 새로 출범하는 조선왕조의 이상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에 이어져 법치국가 조선을 500년 동안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그 내용으로는 정보위·국호·안국본·세계·교서 등으로 나누어 국가 형성의 기본을 논술하였으며, 이에 주례 이래의 중국의 전통적 관제에 따라 치·부·예·정·헌·공의 6전을 설치하여 각 전의 업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는 에서 이․호․예․병․형․공의 순서에 따라 국가에서 규율 해야 할 규정들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흡사하다. 정도전의 뿐만 아니라, 등의 책에 집약되어 있는 그의 건국 구상은, 조선이 나아 갈 방향을 정치이념 등을 선명히 제시해주었으며, 이 후의 경제육전과 경국대전과 같은 법전으로 이어져 구체화․현실화 하게 된다.또한 에서는 법이 아닌 인에 근거한 덕을 우선시하는 통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법만으로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덕치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를 배제하고 유교적 이념 정치이념을 근본으로 설정하였다.이런 것으로 볼 때 은 태조6년(1397) 조선 최초의 성문법전인 으로 계승된다고 할 수 있다. 은 제도와 그 취지를 설명하는 서문만 있고, 구체적인 법률이 없다. 이는 이 의 편찬원칙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통일법전의 모델은 원의 에서 시작됐다. 여말선초의 법전 제작은 이 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비록 정도전의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이었지만 조선의 법전체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이를 통해 주목해야 할 점은 정도전과 같은 개국공신들 가운데 개혁을 추구했던 인물들이 육전에 입각한 체제개혁이야 말로 새로운 통치체제의 토대를 확고히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법전을 간행하고자 했다는 점이다.은 조선 최초의 성문법전으로 위화도 회군(1388) 이후로 태조 6년까지 개혁파 사류가 추진해온 개혁안과 정책들이 집약되어 있었다. 그리 및 판례법과 관습법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위화도회군이 일어난 후 10년간 공포된 조례중에서 법전에 수록할 것을 선정하여 육전으로 나누어 편찬했다.이 지니는 중요한 성격 중 하나는 고려시기의 제도와 법규를 적지 않게 수록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말해준다. 은 고려 우왕14년부터 조선 태조6년까지의 법령과 조례들을 선정하여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시기의 제도와 법규가 포함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조문에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 있는데, 의 고과항목에서 고공사의 관리가 공좌부를 놓고 관리들의 출퇴근을 장악하게 한 것과, 의 과전, 의 승재 항목의 9재에 관한 규정 등은 모두 고려시기의 제도를 그대로 경제육전에 반영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건국 후, 조선 초기에 고려를 무조건 배척하는 경향만이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편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자의 난이 발발하는 등 정치적 파동을 겪으면서 정국 주도세력이 바뀌었다. 더불어 에 대한 문제점이 거론되기 시작하였으며, 개찬사업도 추진되었다. 의 편찬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서로 다른 목표와 지향점들로 인해 온전한 내부적 통일이 되지 않았던 것뿐만 아니라 새로 정국을 주도한 세력의 정책방침이 상당히 어긋났기 때문에 문제점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후 태종대 이 간행되는 등 몇 차례의 개찬사업이 일어나는데, 이는 그때그때 정국 운영을 앞장서 이끌며 편찬 및 개찬사업을 주도하던 계열들의 계열 들의 체제개혁에 대한 입장이 잘 드러난다. 또한 왕조교체기였던 조선 초기의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국가 사회생활의 전반의 혼란함을 생각할 때 끊임없이 그 내용을 정리하고 보완해야 하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태종계열이 추진해왔던 통치체제 개편작업의 결과물로 볼 수 있는 에 대해 살펴보자. 태조 7년에서 태종 7년까지의 수교(受敎)를 모은 것으로 체제는 원전의 체제를 그대로 따랐으나, 태조대의 체제에 대한 수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신법을 제정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두려 하였다세종이 본격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데, 이 때의 법전편찬의 특징은 전대에 비해 국왕의 비중이 커진 점에 있다. 수정을 거쳐 수찬된 지 10개월 만에 6권으로 간행되었다. 은 태종 후반기부터 논란이 되었던 신구 법령간에 어긋나는 내용을 조정하여 법전내용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체제문제를 배려하여 수교를 원문 그대로 싣는 방식에서 중복되는 수교는 합하는 등, 조문을 다듬고 분류방식에서도 연월을 배제하고 항목별 분류를 강화하고, 이를 일일이 주로 밝혔다. 세종은 태조대의 과 태종대의 을 망라하여 정리하되 가능한 한 양쪽을 절충하고 조화되는 방향에서 자신의 구상이 구체화되도록 했다. 이러한 계속되는 수정 작업을 거쳐 자체의 완성도를 높였으며, 의 보급 및 그에 의거한 정치의 시행을 강조하였다.의 완성은 세조 즉위년(1455)이후 이 반행된 성종16년(1485)까지 30년간에 걸쳐 순차적으로 편찬된 조선의 통일법전이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후대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최항·김국광·한계희 등에게 명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세조6년(1460)에 먼저 이 완성되었고, 1년 뒤인 7년(1461)7월 이 완성되었다. 이들에 대한 검토작업을 거치며 세조12년(1466)에 나머지 4전(사전, 예전, 병전, 공전)이 완성됨으로써 의 이 편찬된다. 과 이 먼저 완성된 것은 조선 초기 사회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확립할 수 있는 중요한 법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속에 담긴 호적제도와 토지제도, 조세제도 등은 국가의 재정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에는 노비와 관련된 규정과 절도법 처벌규정 등이 사회안정과 관련이 있다.은 적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세조는 그에 따른 보완을 위해 시행이 미뤄졌다. 예종 때에 2차 작업이 끝나 1469년 9월 은 6전체제가 완비된 통일법전으로 법적 효력을 가진 최초의 이었으나 예종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성종 때 들어와서 수정이 계속되에는 다시 감교청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하여, 1485년부터 시행하였다. 성종이 즉위 한 후 15년 만에 갑오대전을 거쳐 으로 최종적인 완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은 역대의 법전과 법령, 중국의 법전 등을 두루 참고하면서 현실에 맞는 내용을 갖춘 만세지법의 창출을 의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정치 제도는 일단의 정리를 보임으로써 왕실의 여러 문제뿐만 아니라 행정 · 문화 · 교육 · 제도 · 군사 · 외교 등의 세세한 일들에 대한 처리와 이를 관리 기획하는 관원들의 승진 및 처우 등의 문제에 대해 전체적인 균형을 맞춰가며 운영해 나갈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법적용에 있어서 경국대전을 기초로 우선 적용하는 근거가 되었고, 고려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판례, 관습법과 조선조에 들어와서 여러 차례 나온 규정, 수교, 속록 등을 하나의 틀로 정리했다.결 론은 위화도회군부터 시행되는 1485년까지 약 백 년 동안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완성된 것이다. 이미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법전체제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식은 싹트고 있었고, 이는 정도전의 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비록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 이지만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 법전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조선 최초의 성문법인 과 이를 수정 보완하며 나오는 , 등을 거쳐 나오는 은 그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은 새로운 법의 일방적인 창조라기보다 당시 현존한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를 막고 조선 사회 나름의 질서를 후대로 이어주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의 건국 주체들은 불교를 배격하고 유교정치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인의정치를 내세우면서 조선의 성립이 천명과 인심에 순응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정치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는 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지금까지 의 편찬과정 대하여 알아보았다. 단지 이런 레포트로 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기는 힘들지만, 이미 연구된 논든다.
최충과 구재학당1. 최충의 생애고려의 문신.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로 불렸다. 호는 성재, 월포, 방회재, 시호인 문헌으로 잘 알려져 있다.최충은 벼슬이 수상에 이르고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 네 조정에 역사(歷仕)하였다. 치사(致仕) 뒤에도 군국(軍國)에 관한 큰일은 그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로 신임이 지대하였다. 1005년 문과에 급제하여 우습유에 올랐고, 1013년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하여《칠대실록(七代實錄)》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정조 초에는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현종실록(顯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법률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 아래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했다.2-1. 구재학당말년의 최충은 자기 집 사랑방에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공부를 가르쳤다. 그리고 자기 재산을 털어 새 집을 짓고 방을 여러 개 만들어 학교 모양을 갖추었는데, 최충이 이 때 세운 학교가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사립학교였다. 세상 사람들은 최충이 세운 이 학교에 교실이 9개가 있다 하여 9재학당이라고 불렀다. 14~15세 이상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문벌 자제들에게 악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의 9재(九齋)로 나누어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쳤다.2-2. 사학의 배경전후 복구와 부흥 문제 때문에 교육제도를 충실하게 정비할 여유가 없었다. 두 차례에 걸친 요의 침입은 관학의 부재문제를 가져왔고, 이러한 관학 부재의 공백을 메운 것이 사학의 발흥이었다. 또 북송 초기 각처에서의 유학이 발흥 이것이 나중에 서원으로 발전하였던 것에서 자극을 받은 면도 적지 않다.2-3. 시중최공도와 문헌공도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 문하시중(門下侍中)의 관직에 있었던 최충의 공도(公徒)의 의미. 구재학당에서 배운 학생들을 ‘최공도’또는 ‘최충도’라고 하기도 했다.문헌공도(文憲公徒): 최충이 죽은 뒤 그의 시호를 문헌(文憲)이라하였으므로, 구재학당이라고 불리던 것이 문헌공도가 되었다.의 번역무릇 사학은 문종 때에 대사 중서령 최충이 후진을 불러모아 가르쳐 깨우치기를 게을리하지않으니 청금과 백포가 가득차게 되어 구재로 나누니, 악성대중성명경업조도솔성진덕대화대빙이라. 이것을 시중최공도라고 하는데 의관 자제로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무리에 예속되어 공부하였다. 해마다 더운 달에는 승방을 빌려 하과를 하였으며 도중에서 급제하여 학문이 우수하고 재능이 많은데 벼슬하지 못한 이를 택하여 교도를 삼았으며, 학과는 구경과 삼사였다. 간혹 선진이 찾아오면 각촉부시하고, 그 차제를 개방하여 이름을 불러 들어오게 하고 인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동관이 좌우로 벌여서 준조를 받들어 진퇴에 예의가 있고 장유의 차서가 있어 해가 지도록 술을 돌리며 노래하니 관람하는 자로 가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이 이후로부터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또한 모두 구재의 명부에 이름을 두니 이를 문헌공도라 하였다.3. 명칭과 그 의미악성(樂聖):『법언』 성인도 즐겨 하는 바가 있다는 의미대중(大中):『주역』 유柔하여 존귀한 지위를 얻고 크고 중간에 있기 때문에 상하가 응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극히 중정(中正)한 도를 의미하는 말성명(誠明):『중용』 밝힘에 정성을 드리는 것을 성이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고 하였다.경업(敬業):『예기』 옛날 교육을 언급할 때 3년에 경업에 낙군을 본다라고 하였다.조도(造道):『맹자』 군자가 도를 깊이 탐구함에 있어서 스스로 체득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도에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