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I. 서설(序說) P 1II. 사건의 사실관계〃III. 법적쟁점〃IV. 소송요건의 검토 P 2V. 본안 판단 P 5VI. 결론 P 7VII. 사견 〃※참고 문헌※I. 서설(序說)인류가 탄생된 이후,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게 되면서 인간은 규범이라는 체계를 끊임없이 만들고 변화시켜 왔다. 즉, 자기의 이해(利害)를 조절하고 또 그에 대한 재판을 추구해온 역사는 인류 역사 그것 만큼 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깝게는 조선시대부터 멀게는 부족국가 시대까지 소급해서 우리 역사에서 법과 재판의 존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우리의 역사를 보건대, 법제사적 측면에서 조선시대는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통일법전의 제정과 중국 대명률의 포괄적 계수를 통해 이전까지 왕법과 관습법에 의한 규율을 넘어 법치주의의 기초가 다져진 시기)가 바로 그 때인 이유이다.그러면 과연 조선시대에는 법과 재판이 어떤 의미로 여겨졌고 그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러한 의문은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사상과 이념을 살피고 실제적인 복원을 통해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조선의 법이 구현된 재판의 실상을 검토하여 조선의 판사인 추관(推官)들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하였으며 판결의 최종 결정권자인 임금이 사건 보고서인 계사(啓辭)나 문안(文案)을 통해 그것을 어찌 헤아렸는가를 알아볼 수가 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철처한 신분사회, 수직사회, 기득권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살아있는 법정신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조선시대의 판례에는 꽤나 흥미로운 사건들이 많다. 특히, 그 중에는 노비관련 송사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당시 노비의 수가 적게는 전체 인구의 1/3, 많게는 2/3 정도에까지 이르렀다하니) 당연 그에 관련된 다툼이 많았을 것이다. 이하에서 살펴보게 될 1586년 ‘다물사리’사건 역시 노비관련 소송이기는 하나 특이한 것이 여느 노비소송과는 달리 노비가 자신을 양인이 아닌 노비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 당시이 누구의 노비가 되는 것인가의 문제.IV. 소송요건의 검토1. 당사자 적격의 문제조선은 신분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양반 상민 천민의 구별 없이 모두 당사자능력과 소송능력이 인정되었으며, 상민이나 천민이 양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도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양반이나 부녀자들은 자신이 관사에 소송당사자로서 출두하는 것을 嫌忌하여 아들?사위?동생?조카[子壻弟姪]나 노비로 하여금 代訟케 하였다.)(1) 다물사리 사건의 경우당사자들 가운데 원고는 이지도이고 피고는 다물사리이다. 지금의 기준에서 엄밀히 보자면 이 두 사람은 모두 당사자가 아니다. 이지도는 어머니 서(徐)씨를 대리하여 소송하고 있으며 다투고 있는 것도 다물사리의 딸인 인이(仁伊)의 신분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소송대리인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지도는 서씨의 상속인이고 다물사리는 인이의 어머니인만큼 소송의 결과가 자신들의 이해와 직결되는 관계여서 당사자와 다름없는 지경이다. 당시에는 이런 경우에도 원고와 피고로서 자격이 있었다.(2) 현행 민사소송법에 의할 경우- 제55조(미성년자·한정치산자·금치산자의 소송능력) 미성년자·한정치산자 또는 금치산자는 법정대리인에 의하여서만 소송행위를 할 수 있다. 다만, 미성년자 또는 한정치산자가 독립하여 법률행위를 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87조(소송대리인의 자격) 법률에 따라 재판상 행위를 할 수 있는 대리인 외에는 변호사가 아니면 소송대리인이 될 수 없다.- 제88조(소송대리인의 자격의 예외) ① 단독판사가 심리·재판하는 사건 가운데 그 소송목적의 값이 일정한 금액 이하인 사건에서, 당사자와 밀접한 생활관계를 맺고 있고 일정한 범위안의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 또는 당사자와 고용계약 등으로 그 사건에 관한 통상사무를 처리·보조하여 오는 등 일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법원의 허가를 받은 때에는 제87조를 적용하지 아니한다.②제1항의 규정에 따라 법원의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사건의 범위, 대리인의 자격 등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대법원규칙으로하여 비리지송(非理之訟)을 부추기는 간사난법지민(奸詐亂法之民)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1478년(성종9) 정부는 외지부를 전가사변으로 엄히 다스리면서 취고대송(取雇代訟) 즉 외부인을 고용하는 대송을 금지하였다. 외지부가 불법화됨에 따라 고용대송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친인척에 의한 합법적인 대송은 여전히 있었다. 특히 왕족이나 양반, 부녀자들은 자신이 관사에 소송당사자로서 출두하는 것을 혐기하여 아들, 사위, 동생, 조카나 노비로 하여금 대송케 하였다.)(1) 다물사리 사건의 경우조선시대 당시 3대소송이라 불릴 만큼 노비소송은 매우 잦았는데 소장을 작성할 줄도 모르고 변론도 할 줄 모르는 일자무지, 유구무언의 존재인 노비가 소송할 수 있었던 것은 외지부의 도움 때문이었다. 다물사리 역시 법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상대가 제시하는 문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하고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법률적 지식에 문외한인 다물사리가 소송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외지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사실, 다물사리의 경우도 노비로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팔순 노파라는 점을 고려해 볼때 그것의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다물사리가 외지부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다물사리의 사위인 구지의 평판을 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다. 실제, 이지도는 “구지는 본시 교활한 사람으로서 부유하게 살면서 우리집안을 능멸하고 불손한 말을 자주 뱉어냈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2) 현행법하에서의 문제1) 민사소송의 경우민사소송에서 변호사의 역할과 관련하여 우리 민사소송법은 제정 당시부터 변호사 대리의 원칙을 인정하여 변호사 아닌 자는 원칙적으로 소송대리인이 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민사소송법 제87조). 또한 변론능력이 없는 당사자를 위해서는 변호사 선임을 명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제144조) 그러나 변호사에게만 변론능력이 인정되는 변호사 강제주의에 는 영암에서 소송이 제기되었으나 원고 이지도가 피고 다물사리 측이 영암군 아전과 결탁하고 있다고 주장하자 보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나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또한 나주목사 김성일의 명성이 엄정하게 판결을 잘하는 것으로 높았기에 판결의 공정성을 의심받지 않을 만한 곳으로 이송한 것이다.(2) 현행법하에서의 문제1) 민사소송법- 제43조(당사자의 기피권) ① 당사자는 법관에게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때에는 기피신청을 할 수 있다.2) 형사소송법- 제17조(제척의 원인) 법관은 다음 경우에는 직무집행에서 제척된다.1. 법관이 피해자인 때2. 법관이 피고인 또는 피해자의 친족 또는 친족관계가 있었던 자인 때3. 법관이 피고인 또는 피해자의 법정대리인, 후견감독인인 때4. 법관이 사건에 관하여 증인, 감정인, 피해자의 대리인으로 된 때5. 법관이 사건에 관하여 피고인의 대리인, 변호인, 보조인으로 된 때6. 법관이 사건에 관하여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의 직무를 행한 때7. 법관이 사건에 관하여 전심재판 또는 그 기초되는 조사, 심리에 관여한 때- 제18조(기피의 원인과 신청권자) ① 검사 또는 피고인은 다음 경우에 법관의 기피를 신청할 수 있다.1. 법관이 전조 각호의 사유에 해당되는 때2. 법관이 불공평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는 때3) 소결현행법에 의할 경우 원고 이지도는 영암군 노비담당 아전과 다물사리가 결탁하였고 이것이 재판관에게도 영향을 주어 소송의 공정성을 침해 받을 수 있다고 여긴바 민사소송법 제43조 또는 형사소송법 제18조에 의하여 법관의 기피를 신청할 수 있을 것이다.4. 당사자 불출석의 경우조선시대에는 원고가 소장을 제출한 다음에 피고가 출두하여 원고의 소장에 대해서 응소(應訴)하는 답변서를 제출함으로써 소송이 시작되는데 이것을‘시송(始訟)’이라 하고, 피고가 제출하는 답변서를‘시송다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피고가 출두하는 데에는 오늘날과 같이 소환장을 발송하는 것이 아니라 원고가 제출한 소장의 끝에‘피고를 데려오라’고 하는‘제사(次期日)에 출석하지 않은 경우 상대방이 주장하는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보게 된다. 따라서 다물사리의 경우 재판장에 불출석 했으므로 현행법에 따르면 이지도의 노비임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V. 본안 판단1. 원고의 주장(1)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양인인 아버지 이순과 어머니 정소사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양인이 분명하고 그녀가 자신의 노비인 윤필과 결혼해 딸을 낳았으며 그 딸이 여섯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모두 자기 소유의 노비라고 주장한다.(2)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피고 다물사리의 호적을 내세우며 호적에는 분명히 다물사리가 양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며 양인 신분으로 이지도 집안의 종 윤필과 결혼했다고 주장한다.(3) 영암군 노비장부에 그녀의 이름을 올린 것은 영암군 노비담당 아전과 짜고 만든 거짓된 것이라 말한다.2. 피고의 주장(1) 다물사리는 자신의 어미가 성균관 노비인 길덕이며 자신과 자신의 자식 역시 성균관 소속 노비라 주장했다.(2) 이지도가 증거로 내세운 호적은 암록, 즉 이지도가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조선시대에는 양반들이 노비를 늘리기 위해 호적을 위조하여 멀쩡한 양인을 노비로 위조하는 경우도 있었다.3. 판단(1) 명나라 기본법전인 대명률을 보면 노비가 양인여성과 결혼할 경우 노비 자신은 물론 노비주인과 양인여성의 집안까지 처벌한다고 나와 있었고 명나라법을 따랐던 조선에도 이와 같은 규정이 있었다. 즉, 양천간에 결혼하는 것을 간이라고 하여 불법적인 혼인관계로 지칭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양천간의 혼인을 불법적이라하여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병산이라고 일컬으며 합법성을 인정받아 왔다. 즉, 노비와 양인여성간의 혼인이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2) 조선사회는 유교적 사회이기 때문에 종법 의식에 의거해서 부계혈통을 지향하는데 유독 노비들에게는 종모법을 따르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여기서 종모법이라 함은 말 그대로 자녀들이 어머니의 신분과 소속을 따라간다는 것으다.
I. 들어가며어느 학문이나 그렇듯 교육학에서도 그동안 진행되어온 교육과정과 현황을 파악하는 작업은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미래로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그 의의가 크다. 따라서 지나온 서양 및 동양의 교육사에 대해 알고 한국의 교육사와 비교해보면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육제도 관한 고민과 그에 대한 개선을 해보는 것이 중요할 듯 싶다.II. 내용 요약1. 교육사 학습의 필요성1) 교육사 학습의 목적교육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교육의 역사에 대한 사실적 지식을 구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오늘날 교육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제반활동들의 기원을 추적하여 확인하는 중요하고 흥미있는 일이다. 둘째, 지금의 교육적 문제들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위한 것으로 현재의 교육적 문제들 중 역사적으로 지속되는 사안들에 관하여 역사저인 해명을 통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접근할 수 있다. 셋째, 현제 문제의 해결을 도구적 지식이 되어 실질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교육사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2) 교육사 접근의 방법역사적 사실에 접근할 때 견지해야 할 관점과 태도로써. 고려해야 할 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자료 : 역사적 자료를 ‘사료’라고도 하는데 이에는 주제에 대한 직접적 정보를 제공해 주는 1차자료와 연관되는 간접적 정보를 제공해 주는 2차자료로 나뉜다.? 인과관계와 상관관계 : 역사적 사실에 대해 원인을 규명하고 실제로 원인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에는 역사적 현상이 도출된 배경을 설명해 주는 다양한 변수들 간의 상관관계를 추정하게 된다.? 관념과 실제 : 그 시대의 관념을 밝히는 것과 실제를 밝히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과거와 현제 : 역사를 보는 관점 혹은 ‘사관’에 의하여 역사적 사실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들이 사실 그 자체이기보다는 사관이 투영된 것임을 부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교육사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관심 : 교육사는 다양한 이론과 방법론에 의해 접근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문헌자료에 의존한 실증적 방법론을 기본으로 하면서 구술사, 역사사회학, 계량적 역사연구, 미시적 문화사 등의 새로운 역사연구 방식들이 교육사 연구에서도 논의되고 적용되고 잇다.2. 서양교육의 역사적 전개1) 고대그리스(우리가 민주주의 기원을 배우면서 접했던 시대) : ? ‘소피스트’로 불린 지식인층이 청년들의 교육에 관여하면서 교육적 변화들이 나타남(수사학,변증법,기하학) ? 소크라테스는 논쟁 그 자체가 아닌 진리를 탐구하고 이성을 중시함.(특히, ‘문답법’ 내지 ‘신파법’ 이라 불리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 무지의 지 인정, 비판을 통한 정의의 방법을 추구.) ? 7개의 자유학과의 원형이 형성됨. 언어를 중심으로 한 세 개 과목(Trivium: 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수를 중심으로 한 네 과목(Quadrivium: 대수, 기하, 천문, 음악)으로 구분됨. ?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인의 이성 연마를 위해 노동하지 않는 삶 혹은 여가(schole)의 중요성을 강조함.2) 중세(4/5세기~14/5세기) : 기독교적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교육의 명맥이 유지되었는데 기독교화를 위한 문답학교에서 초보적 3R's(reading, writing, arithmetic) 교육이 실시되었고 중세후기에는 사원학교(cathedral schools)와 같은 형식교육 외에도 기사교육이나 도제교육등도 이뤄졌다. 그러다가 12세기부터 도시를 중심으로 대학이 설립됨.3)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 고대문화를 복원하고 인문주의교육(humanistic education)에 대한 관심으로 라틴어 중심의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또한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대중 교육 강조, 교육의 국가적 책임 부각, 인쇄술과 성경의 모국어 번역, 신과 나의 일대일 관계 강조, 종교교육에서 가정의 역할 강조,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교육체제의 구상으로써 공교육의 이념이 대두됨.3) 근대 : 17세기 이후 자연과학의 발달과 교육사상의 변화가 일어남. 대중교육(mass education)형성에 대한 국가의 교육적 책무가 대두되면서 공공성(중립성,평등성)이 중요시되었다. 그러면서 의무취학 규정이 생기고 개별적 교육보다는 집단적 교육원리가 강조되었다.3. 유학의 이해인(仁)과 정치적 리더쉽을 중시하고 덕(德)을 강조함으로써 덕치론, 인의 정치 사상이 나옴. 그러면서 유학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이고 어떻게 해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세워가는가.’를 문제의식으로 삼고 있다. ? 공자(기원전 552~479)에서 시작된 유학은 맹자,순자,동중서,한유등을 거치면서 발달. ? 개인의 학문적 완성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등 가정, 사회, 국가적 윤리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 치자의 학문으로서 인재를 양성하고 선발하는 것을 중요시 여김. ? 유학의 핵심교재에는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와 오경(시,서,예,춘추,역경)이다.
I. 들어가며누군가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짧지만 꽤나 의미심장한 말인 것 같고 특히, 대기업 위주로 돌아가고 있는 한국의 경제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이는 꼭 알아야 할 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중소기업은 자금, 인력, 기술, 마케팅 등 기업의 4대 생존조건에서 대기업에 비해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린듯 세계의 숨은 곳곳에서는 대기업을 KO시킨 작은 챔피언들의 반란이 일고 있다. 이점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히든챔피언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숨은 챔피언이지만 의역하면 글로벌 강소기업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책에서는 글로벌 강소기업들이 지닐 수 밖에 없었던 한계와 약점을 그들 나름의 목표와 비전에 접근하는 특유의 경영철학으로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II. 책의 요약히든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요건은 무엇일까? 책은 세계시장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 중소기업의 개념 및 특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세계화 과정에서 목표에 맞는 적절한 전략들을 개발함으로써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중간규모 혹은 소규모의 회사를 히든챔피언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요건은 크게는 1차적 조건과 2차적 조건으로 나뉘는데 제시되는 1차적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 전 세계의 시장을 지배한다. ? 눈에 띄게 규모가 성장하고 있다. ? 생존능력이 탁월하다. ? 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제품으로 전문적으로 생산한다. ? 진정한 의미에서 다국적 기업과 경쟁한다. ?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결코 기적을 이룬 기업은 아니다. 이외에 진정한 히든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2차적 조건으로서 세계시장에서 3위내에 들것을 요구하고 매출액이 40억 달러를 넘지 않으며 소비자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야 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작가는 히든 챔피언들이 성공할 수 밖에 없었던 요인들에 관해 분석을 시도하는데 그것으로써 성장과 시장지배력, 시장 집중, 세계화 그리고 핵심 역량의 강화 측면에서 접근을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성공을 거두는 기업가들은 기업과 정신과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동력으로 대담한 목표와 비전을 갖는다. 그러면서 자사의 시장지배력을 높이기 위해서 최고의 리더쉽에 관한 핵심역량을 키우며 경영 및 조직구조의 혁신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그들은 시장의 폭을 무조건 넓히기 위해 ‘오버’를 하지 않고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핵심 주류에 지속적으로 집중함으로써 특화된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집중’의 전략은 자칫하면 히든 챔피언을 말 그대로 숨어버린 존재로써 ‘우물 안 개구리’ 로 전락케 할 리스크도 안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여 세계화 전략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세계시장의 지배자로 발돋움 한다.대기업이고 히든 챔피언 이고 그들은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동일한 점 한 가지는 상대해야 할 고객이 같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히든 챔피언들이 고객과 맺고 있는 친밀성은 대기업에 비해 5배나 높다고 한다. 그것은 히든 챔피언들의 규모가 비교적 작아 부서들이 세분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과 경영진들의 ‘고객이 중심이다.’라는 고객철학에 주로 근거한다. 21세기는 세계시장의 변화는 그야말로 빛의 속도와 같다. 따라서 탁월하고 지속적인 혁신 없이는 결코 세상에서 주목을 끌 수도 세계시장지배력을 가질 수 도 없다. 히든 챔피언들은 혁신에 있어서 덩치가 큰 경쟁사들도보다 훨씬 잽싸고 능숙한데 그것은 다른 부서와의 순조로운 공조작업, 집중, 소수의 업무분할, 보다 짧은 결정과정, 중역들의 신속한 의사결정에 기인한다.세계시장에서의 지배력은 해당기업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기대감이란 구체적인 증거, 즉 경쟁우위, 최고 성과, 선도적 역할,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해결과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수행은 수 많은 경쟁사들과의 전쟁과 같은 치열한 승부속에서 진행이 된다. 히든 챔피언들은 단순히 경쟁자들을 관찰하고 적절한 모방정책을 추진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표준을 만들고 고유한 능력을 발휘하여 승부에서 승수를 쌓아간다.자금조달은 기업에 있어 젖줄과도 같지만 유명하지도 않은 중간 규모의 회사가 자금을 조달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성공한 히든 챔피언들은 아웃소싱이나 전략전 제휴, 자체제작들을 통해 보다 유연한 자금조달을 이끌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분권화 시도를 늦추지 않는다. 또 하나 기업에서 자금조달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사람인데 그중에서 회사의 최고경영진은 회사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히든 챔피언의 경영자들을 보게 되면 그들은 회사의 중요 과제들을 수행해기 위해 완전히 헌신하고 책임을 짐으로써 직원들에게는 물론 고객들에게도 큰 신뢰를 준다. 더욱이 그러한 경영자들이 세우고 실행했던 전략들을 보면 소름끼칠 만큼 철저하고 세밀하고 분석적인데 난해하고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서 단순하지만 효율적이고 논리적이고, 투명하고 빠른 결단과 개발들을 내놓는다. 그러한 전략들은 단순히 일회적이 아닌 연속성을 가지며 상의하달식은 물론 상향식으로도 유연하게 세워진다.
I. 들어가며‘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한국인 비판’. 책 제목 참 살벌하고 비장하다. 얼마나 심한말을 해댔기에 맞아죽을 지도 모른다고 했을까? 또, 소위 ‘쪽바리’라 불리는 그네들이 뭐 잘났다고 우리를 비판한다고 펜을 들었을까?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듣도 보지도 못한 일본인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받아야 했을까? 책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점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입장은 이렇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한 우리는 그에게 변명할 수도 또 맞아 죽어라 때릴 수도 없다. 왜냐면, 다 맞는 말이니까.난 먼저 일본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에 관해 살펴보기 전에 한국인으로서 스스로 생각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어떠한지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을 그려보고 그 다음에 다른 이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듣고서야 스스로 생각했던 제 모습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테니까.II. 착한 한국인한국은 과거 원조받는 국가에서 단시일내 눈부신 성장과 경제발전을 일궈내며 소위 ‘기적의 나라’라 불리었다.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무장된 한국인은 오랜시간 일하는데다 빠르게 일하므로 짧은 시간안에 놀랄 만한 성과를 이루어낸다. 또 한국의 가족관계는 효를 근본으로 하여 이루어지는데 이는 한국인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관계가 되고 도리(道理)를 중시하고 신의(信義)를 지키는 삶을 살게한다. 이것뿐인가? 한국인은 자신의 나라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다. 때로는 깊은 자부심을, 때로는 심한 좌절감을 느끼면서 기복이 많은 나라의 운명에 늘 함께했다. 축구하나로 전국민이 하나되어 시청광장을 수놓았던 붉은 물결은 지금도 선명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국인이 가진 정(情)의 문화이다. 어려운 자연환경과 고난의 역사 속에서 집단성과 정서성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기에 한국인에게는 남과 나눌 수 있는 정(情)이 많다. 오죽하면 초코과자이름에도 정(情)이라는 글자가 붙어있겠는가. 이런것들만 보면 참 칭찬할 거 많은 한국인일거 같다.III. 쓴소리, 그렇지만 들어야할 소리책은 이제 우리가 가졌던 착각을 하나씩 짚어 준다. 결코, 숨기지도 않고 과장하거나 부풀리려 하지도 않고 느낀 그대로지적해주려 한다. 설사,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기억되는 일조차도 작가의 시각에서는 개조되야할 비정상적인 일이라 판단되면 가차없이 따져준다. 그리고 한시 빨리 뜯어고치고 바꾸라고 재촉한다.1. 얼렁뚱당 넘어가기1998년 한국은 ‘IMF사태’라는 경제적 위기에 맞딱드리게 된다. 그 와중에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금’모으기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약 2달 반 동안(1998.1. 5~3. 14)약 225t의 금을 모을 수 있었다. 이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국민 스스로가 자발적인 위기 극복의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많은 이들이 금모으기 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저력과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마음으로 뭉친 일체감, 그리고 헌신적인 애국심이 표출된 것”으로 인식하면서 민족의 저력에 감격해 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었다. 슬기롭게 그리고 끈질기게 노력해서 눈 앞에 놓인 위기에 대처했지만 정작 국가위기를 초래한 정부의 정책 실패나 책임을 추궁하는 움직임에는 미지근했다. 그저 누가 제창했는지도 모를 모호한 ‘금모으기 운동’ 열풍에 감정적인 국민들이 재빠르게 반응한 것일 뿐이었다. 이것은 한국인인 나조차 곰곰이 생각해보면 좀 안된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하물며 만약 따지기 좋아하는 일본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질까. 책에서 작가 역시 유사한 사안을 예로 들며 이와 같은 한국인의 습성을 비판한다. 수재민 돕기에 인정(人情)많은 한국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금모음에 동참하지만 정작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또, 공중전화기가 부당하게 동전을 삼켜버린 경우에도 결코 따지는법 없이 너그러이 넘어간다. 차라리 그런 무던함이 작은 일에서만 그치만 다행이다. 하지만 그것이 교통법규 위반, 또 부실 공사로 이어지면서 수 많은 인명사고와 대한민국 전체를 총체적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하니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사회에서는 무딘 국민의 덕에 힘입어 부실이 판치고 비리가 속출하게 되며 문제개선의 동기나 자극조차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2. 가족이 최고“한국은 가족이 밑바탕을 이룬 나라이다. 한국의 가족 구조를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세상이다. 서양에서는 가족관계가 좀 느슨한 편인데 한국에서는 혈연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룬다. 한국인은 전통적인 가족 안에서 정서적으로 더 할 나위 없는 편안함을 얻고, 나아가 사회에서 잘 뭉칠 수 있는 응집력과 안정감을 발휘하는 것이다.”)위의 내용은 이케하라 상과 마찬가지로 오랜동안 한국에 머문 한 서양인이 쓴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같은 아시아인은 아니지만 일본인이 바라보는 시각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맞다. 한국의 가족은 정말 끈끈하게 맺어져 있다. 한국인은 부모와 자식 관계를 수직축으로 하여 그 주위로 친척이 연결되고 궁극적으로 사회의 모든 관계가 연결된다. 이는 유교에서 일컫는 인의 근원이고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살아숨쉬며 한국인이 느끼는 정(情)의 원천이 된다. 그런데 이 정(情)의 원천이 자주 문제가 된다. 과거에는 정(情)을 주는 대상의 범위가 넓었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된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정(情)을 줄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오로지 가족에 한정되고 심지어 오직 ‘나’에게만 한정되는 경우가 되버렸다. 이는 결국 타인에 대한 배려는 안중에도 없고 서로를 구분하기만 하고 존경과 신뢰의 가치는 녹아들 틈이 없게 한다. 때문에 이 역시 이케하라 상의 시각에서는 큰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는 출근하기 위해 아파트의 복도를 지나가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쉴새없이 손과 발을 움직인다. 그의 앞길을 막고 있는 아이들의 자전거와 이웃집의 세간을 치우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다. 퇴근길에 전장터와 같이 무질서하게 택시 잡는 길에서도 갑자기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의 부모가 보여주는 적반하장적 태도에서도 배려없는 한국인의 태도에 실망한다. 그가 말하는 ‘망나니로 키우는 가정교육’ 과 입시위주의 국가교육이 시기와 질투에 사로 잡혀 인재를 키워줄 수 없는 풍토를 만들게 하고 다이옥신 보다 걱정스럽다는 님비와 같은 지역이기주의를 낳고 있는 것이다.3. 정치와 정부는 걸음마 수준4·11 국회의원 총선거가 눈앞으로 다가 왔다. 이에 후보자 등록 마감일인 23일 총 927명이 등록을 마쳤다. 그런데 그 전력들이 너무 화려하다. 후보자 가운데 151명(16%)이 병역 의무 대상이면서도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고 186명(20%)은 전과 기록이 있었다. 그 중에서 전과 3범 이상도 무려 28명이나 됐다. 죄목도 다양해 반공법, 대통령 9호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은 물론 사기·협박·폭행 전과와 부정수표단속법 위반등의 전력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할 지니 오죽하면 책에서는 한국을 전과자가 떵떵거리는 나라라고 표현했을까. 그가 말한 바대로 전세계를 통틀어 사회 지도층의 역할을 하는 그룹에서 전과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한민국만큼 높은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 역시 질서회복에 대한 의지가 미약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가 아닌 단기적인 방침을 내놓는데 급급할 뿐이다. 또한 풍부한 인적 자원이 밑천인 한국에서 교육방향의 설정은 국가의 생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이나 교육제도에 관한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다. 참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4. 세계속의 한국인책에서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은데도 한국 사람 스스로는 아주 높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남의 쓴 소리는 귀담아듣지 않고 언제까지나 자기만족에 빠져 허우적대는 공주병 환자의 추태를 보인다고 한다. 그 뿐인가? 외국의 골프장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변명으로 신의를 저버리는가 하면 외국인이다 싶으면 바가지부터 씌우는 것이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이다. 세계속의 한국인이 빛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다. 덧붙여 한국 고유의 대중문화를 발전시켜야 할 것도 큰 숙제인데 단순히 외국의 문화를 돈벌이에만 급급하여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따라하는 것은 한국 문화 발전에 독이 될 뿐이다. 결국, 외국인 관광객 유치의 활성화를 위해 뛰어난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일본 따라하기 식의 방송프로그램 포맷 설정을 피하여 한국 나름의 개성을 살린 프로그램 제작에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문화 관련 산업은 전멸하고 말지도 모른다.
I. 내용 요약‘중국적 세계질서(Chinese world order)’의 의미는 역사상 실제로 중국 중심으로 편성·유지되었던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현실적 세계질서를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상 실제와 상관없이 동아시아 세계질서가 중국중심으로 편성·유지된다고 인식하거나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중국인의 관념적 세계질서를 의미하는데 이 양자는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서로 깊은 영향을 미친다. 또, ‘동아시아 세계’란 말도 흔히 사용되는데, 이는 특정한 지역명칭과 세계라는 보편적 명칭이 결합되어져 자칫 모순적인 말이라 생각될 수 있으나 전통시대의 동아시아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전세계로 인식이 되었고 정치적 통합과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현실을 반영한 말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전통시대에 동아시아에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던 주요 성분은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베트남 즉 월남, 몽고, 티베트 즉 토번, 요동 즉 만주, 일본 등을 들 수 있다.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질서나 운영체제가 중국인에 의해서만 구축되거나 확립·운영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당시 세계의 중심에는 중국이 놓여있었기에, 중국인의 입장과 태도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형성과 운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운영체제로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책봉체제(冊封體制)’와 ‘조공관계(朝貢關契)’이다. 이러한 ‘책봉-조공체제’를 통해 세계질서를 확립, 유지할 책임은 책봉의 주체로써 중국 국가의 군주와 조공의 주체로써 그 주변 국가의 군주들에게 모두 귀속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가 있다.‘중국’을 하나의 국가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근현대에 국한하여 인정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전통시대에는 ‘중국’ 이란 말이 국가의 뜻으로 쓰인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전통시대에는 특정국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음에도 그것은 전통시대의 문헌기록에 수 없이 등장한다.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등장하는 ‘중국’은 ‘사국(四國)’에 대응하는 말로 이는 여러 성읍국가들에 에워싸인 중심된 성읍국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첫 영토국가시대라 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범위가 확대되었고 이 시기의 ‘중국’은 지역 개념만을 포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생활공간과 혈통, 문화, 언어 습속 및 역사적 경험과 역사의식 등을 공유하는 특정한 역사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이후 ‘진(秦)’이 중국의 통일을 가져오고 ‘한(漢)’ 무제 통치시기에 이르러서는 중국 밖까지 그 지배의 범위를 확장하게 되었다. 특히 한은 침공한 영토에 군현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서 군현이란 군주에 의해 장악된 국가권력이 인민 개개인에게 개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공간을 가리켰다. 그러나 당시 ‘중국인’은 한의 영토로 편입된 월(越),맥(貊),호(胡),저(?),강(羌)등의 공간을 중국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 주민을 ‘중국인’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중국’의 범주와 ‘한 영역’의 범주는 일치 되는 개념이 아니었다.10~11세기 이전에 동아시아 세계는 만리장성을 기점으로 하여 남방의 농경권역과 북방의 유목권역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북방 유목권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세력은 서북에서 발흥, 활동했다. 그러나 10~11세기에 이르러 북방 유목권에서의 축이 동북방으로 이동되면서 ‘요동(遼東)’지역에서 발흥,성장한 세력이 장성의 북방세력을 대표하여 장성 이남세력과 대립·힐항했다. 거란(契丹),여진(女眞),몽고(蒙古),만주(滿洲)등 동북세력은 요동국가를 건립하고 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하고 ‘중국’을 장기적으로 지배했다. 그러나 요동국가는 그 이전의 진(秦),한(漢),당(唐)등이 ‘중국’의 국가로서 비중국을 통합·지배했던 것과는 달리 비중국 국가로서 중국을 통합·지배했다. 때문에 이 시기 ‘중국’의 범주가 당시 중국을 지배한 국가의 영토범위와 일치하지 않고 국가 개념과도 일치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이후에, ‘중국’개념의 본질적 변화가 진행되는 시기가 나타나는데 바로 동아시아 세계가 서구세계와 통합되는 근대화·서구화의 시기였다. 이전까지 ‘중국’이란 말은 동아시아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한 한 국가가 지배하는 대상의 일부를 표현하는데 그쳤으나 서구세력의 출현으로 것은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 전체를 표현하는 뜻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중국’의 경우 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우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한국’ 역시 전통시대에는 특정한 국가의 명칭이 아니라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했던 특정한 역사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어 오다가 근대에 이르러 ‘대한제국(大韓帝國)’ 과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출현함으로써 역사공동체와 국가를 동시에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이다.‘중국’과 ‘한국’이 역사공동체의 이름으로 출현할 무렵, 동아시아세계에는 유사한 다른 역사공동체들이 등장했는데 이들 역사공동체는 성읍국가 단계(신석기 후기 및 청동기문화 단계)에서는 대체로 비슷한 수준의 독특한 문화를 각각 창출·향유했으나 영토국가 단계(철기문화단계)로 이행되어오면서 각자가 처한 자연환경과 역사적 조건에 따라 문화적 발전속도를 달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전국시대에 이르러 전세계를 문화가 발전한 곳으로써 ‘중(中)’ 혹은 ‘화(華)’와 발전되지 못한 곳으로써 ‘이(夷)’ 혹은 ‘적(狄)’으로 나누게 되었다. 또, 당시 여러 역사공동체들 가운데에서 ‘남만(南蠻)’,‘북적(北狄)’,‘동이(東夷)’,‘서융(西戎)’ 이 4방과 중국을 합쳐 5방으로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는 세계관도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진(秦)’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고 ‘한(漢)’을 거치면서 남만과 북적, 동이와 서융등 역사공동체의 대부분이 진과 한의 영토 안으로 병입된 상태가 지속됨에 따라 진한시대 이후의 남만과 북적, 동이와 서융 등은 역사에 실재하는 역사공동체의 실명이 아니라 중국인의 전통적 세계관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남겨진 허명이 되었다.진한 시대 이후 중국인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크게 유가사상에 기초하여 세계를 고급한 문화와 저급한 문화의 두 권역 혹은 문화가 있는 곳과 문화가 없는 곳으로 이원화하여 이해하는 경우와 법가사상에 기초하여 세계를 일원적으로 파악하려는 경우로 나뉘었다. 이 두 가지 세계관은 대외정책의 방향 설정에 있어 뚜렸한 구별을 보였는데 유가주의자들은 이적에 대한 정치적 지배나 이를 위한 군사활동을 반대한 반면에 법가주의자들은 전세계를 일원적 지배대상으로 간주하고 이를 위해서는 정벌이라는 형벌을 중국 뿐만 아니라 이적에도 행사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이 두 세계관의 차이에 따른 논쟁은 이후 대외관계를 수립하거나 대외적 화전(和戰)을 결정할 때면 언제나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른바 유법 투쟁에서 유가가 승리를 하면서 중국인은 비중국을 한 국가의 영토 안으로 병입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세계를 문화와 비문화의 권역으로 나누는 이원적 세계관을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의 가장 강력 군사적 힐항세력 흉노(匈奴)가 내조(來朝) 하겠다는 통고를 해오면서 내조의 접수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재개가 된다. 이때 한의 조정은 외이(外夷)가 번국(藩國)을 자칭해도 신하로 삼지 않음이 곧 기미(羈?) 의 뜻 이라고 보고 선우를 객례(客禮)로써 대우하기로 정한다. 여기서 '기미'란 말의 굴레와 소의 고삐를 가리키는 것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끊지는 않지만 지배나 통제를 강요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흔히 '느슨한 고삐 정책(loose reins policy)'으로 표현되는 태도로 군사적 침공등 강압적 방법으로 군현화를 추구하는 법가적 정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후 중국 국가들은 이를 대외정책의 기본원칙으로 삼았다.그 당시 중국 국가가 이적의 국가를 기미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군사적 강압수단을 관철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의 안보와 외교적 이익을 보장 받을 수 있는가는 어려운 문제였었다. 무제시대의 한은 여러 군소 국가들을 침공하여 그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황제가 지배하는 국가로써 제국(帝國)체제를 확립하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제력과 군사력을 소모해야 했으므로 무제 사후에 계승자들이 취한 것이 기미정책 이다. 그것은 중국 국가와 비중국 국가의 관게는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형식적으로는 차등적 관계를 수립하는 관계, 즉 책봉(冊封)과 조공(朝貢)을 교환하는 관계였다. 책봉과 조공의 교환은 상주시대에 중국의 성읍국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국제적 관행이었고 영토국가 단계로 이행하면서 사실상 소멸되었지만 군현제를 엄격히 실현했던 진 제국이 단기간에 붕괴되자 책봉과 조공의 교환을 통한 봉건적 국제관계가 다시 출현한 것이었다. 한 대 이후 중국 국가들과 비중국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책봉-조공관계를 통해 차등적이나 독립적인 관계를 가졌다.책봉과 조공이 교환되는 차등적이나 독립적인 관계는 진·한이래로 중국의 국가들이 지향한 제국체제와 명백히 모순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기 나온 것이 책봉-조공체제를 군현체제와 결합시킨 제3의 독특한 지배체제였다. 그것은 외형상으로 비중국계 국가나 세력을 중국 국가의 군현, 즉 영토안으로 편입시키면서 실제로는 책봉과 조공을 통해 그 국가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체제로 여기서 중국 국가의 군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내속(內屬)’이라 하고 군현 밖에 머무르면서 중국 국가와 일정한 제도적 관계를 갖는 것을 ‘화친(和親)’이라 했다. 이처럼 중국 국가들은 상대하는 비중국계 국가들과 자신의 정치적,외교적,군사적,경제적 혹은 문화적 역량과 역사적 조건, 사회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관계를 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