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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익대학교 주변지역 상권의 특정적 입지 요인과 그에 따라 형성되는 특정 문화현상에 관한 연구.
    ◇ 목차 ◇Ⅰ. 서론--------------------------------------------------------p.1-p.2Ⅱ. 본론 ----------------------------------------------------------p.3ⅰ. 홍대앞의 변천사-------------------------------------------p.3-p.4ⅱ. 홍대앞 클럽문화의 조성-------------------------------------p.4-p.5ⅲ. 홍대앞 클럽문화의 현황과 대안-----------------------------------p.51) 클럽문화의 위기-----------------------------------------p.5-.p.62) 클럽의 제도화 문제 --------------------------------------p.6-p.7ⅳ. 홍대 지역 문화지구 선정에 대하여-----------------------------p.7-p.8Ⅲ. 결론--------------------------------------------------------p.8-p.9Ⅳ. 참고문헌--------------------------------------------------------p.9Ⅰ. 서론.서울 시내에 자리한 대학교 주변은 어느 곳이든 간에 거의 20~30대 젊은 층의 인구 유동이 활발하다는 이점으로 인해, 유흥업소 혹은 문화 관련의 상권이 줄 지어 입주하게 되고 또 그에 따라 특정한 하나의 거리로 형성되기도 한다. 특히 홍익대학교 주변은 현재 대중에게 여느 대학가와는 또 다른 하나의 독특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는 지역이다.소위 ‘홍대앞’이라고 불리는 거리는 홍익대학교 정문에서 2호선 홍대입구 역에 이르는 4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펼쳐진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과 창천동, 상수동 일대를 일컫는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위와 같은 공식적인 지명보다 홍대앞 이라는 이름으로 그 일대를 지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홍대 앞의 거리는들, 그들의 작업장과 갤러리, 20 여개의 언더그라운드 클럽과 테크노 클럽, 200 여팀의 인디밴드, 200 여개의 출판사, 서울 최대의 디자인스튜디오, 예술적 경향이 강한 5개의 극장, 만화써클, 특이하고 재미있는 패션디자이너, 20 여개 단편영화팀, 인터넷컨텐츠웨어사, 전문요리가 등이 용광로처럼 서로 녹아 얽혀있는 홍대지역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대안문화가 생산되는 '문화공장' 이자, '문화엔진', '문화인큐베이터'라 할 수 있다. 홍대지역은 문화적 자생성과 독자성, 잠재력이 풍부한 곳으로 새로운 대안중심지로서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지니고 있다.』)Ⅱ. 본론ⅰ. 홍대앞의 변천사지금의 홍대 지역은 본래 한적하고 깨끗한 지역이었는데 서교동 일대가 1957년에 ‘서교구획정리사업지구’로 고시되면서 투기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며 마포지역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복잡해진 곳으로 발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부터 80년대까지는 전형적인 주거 지역으로써 홍대앞도 헌책방이나 분식집이 들어선 여느 대학가와 별로 다름이 없었으며 인접해 있는 이대와 신촌 일대의 유흥가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다.홍대앞 거리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90년대 초의 일이다. 사회전반의 소비 규모가 확대되면서 신촌의 유흥가가 확장하고 그에 영향을 받아 홍대앞도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홍대앞은 전혀 다른 두개의 성격을 가진 두 가지 공간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는데 하나는 홍대입구와 극동방송국 사이에 대규모의 까폐거리, 일명 ‘피카소 거리’ 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걷고 싶은 거리’가 조성되기 전의 ‘먹자골목’이었다.) 유흥공간 또한 확실히 유행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이 두 공간 이외에 산울림 소극장까지의 거리에도 까폐들이 속속들이 들어서면서 홍대앞은 한국의 소비문화가 확장되는 그 첨단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 밖에 명문 홍대 미대의 명성으로 인해 미술학원이 밀집하고 젊은 예술인들이 모여들었으며, 대학생은 물론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장소가 되어갔다.2002년에 들어서 서울.』라는 문구로 표현될 수 있겠다.)단순히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듯한 나이트 클럽과 홍대앞 클럽의 차이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를 첨부하여 비교하고자 한다. 홍대앞 클럽과 일반 나이트 클럽의 비교)구분홍대앞 클럽일반 나이트 클럽소모비용5천원에서 1만원테이블 기본요금 포함 평균 10만원 이상공간형태상대적으로 소형규모 (40-60평이 일반적), 테이블이 없는 홀, 춤추는 무대가 달리 정해져 있지 않음.상대적으로 대형규모 (200-600평이 대부분), 테이블로 가득한 홀과 춤추는 전용무대가 존재.운영형태서비스와 호객행위를 하는 직원이 없음, 다양한 파티가 열림.서비스와 호객행위를 하는 직원이 존재운영자의 태도음악과 문화의 활성화, 기본적인 영리추구.영리 추구 목적.DJ공연의 형태다양한 장르의 음악 또는 특정 장르의 음악을 내세우는 클럽존재. 즉흥연주인기 가요 등 대중음악 위주. 짜여진 CD음악홍대앞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는 박정희의 독재정권 시대의 문화에 대한 압재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면서 철저히 이데올로기적으로 거세당하여 국내에서는 좀처럼 퍼질 수 없었던 서구음악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93년 ‘발전소’, 95년 ‘드럭’등의 클럽들이 아직 주목받지 못하고 널리 퍼지지 못한 록음악 장르를 가지고 들어와 한국의 CBGB)를 꿈꾸며 홍대앞에 자리를 잡았고, 이 들이 어느 정도 장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홍대앞은 새로운 음악에 열광하는 속칭 ‘클러버’들과 ‘마니아’들의 보급자리를 형성해 나가며 한국 ‘클럽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초창기 홍대앞 클럽들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대중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갈증을 느낀 매니아들이 찾아와 음악을 즐기고 춤을 즐기던 문화 공간으로 시작했다. 당시의 점점 상업화에만 찌들어가던 대중문화를 비판하며 젊음과 저항정신의 뿌리인 록음악의 정신을 부활시키고자 모인 젊은이들이 서울의 라이브 클럽문화가 생성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만의 육박할 정도로 성황이지만 그것도 그저 하룻밤의 ‘반짝’으로 끝날 뿐이다. 평일에 찾아오는 클러버들의 수는 현재, 2001년보다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이는 멀리 내다보지 못한 클럽의 잘못된 운영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홍대앞 클럽들이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매니아층이 아닌 일반인들이 입소문을 통해 모여들게 되고 더 많은 일반 손님을 끌기 위해 클럽들은 고집해오던 소위 어려운 록음악 장르를 버리고 하우스 풍의 음악 등을 위주로 틀어 손님 끌기에만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반손님들은 날로 늘어 갔지만 그에 따라 클럽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음악을 즐기고 문화를 향유하는’ 분위기에서 ‘놀고 마시는’ 분위기로 점점 전락해간 것이다. 이에 마니아들은 점차 클럽을 등지게 되었고, 마니아들이 조성해내던 독특한 분위기에 끌려 클럽을 찾던 일반인들도 점점 식상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현재 홍대앞 클럽의 문화는 하향평준화 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홍대앞을 ‘젊음이들의 문화적 해방구’가 아닌 미군들이 젊은 한국여자를 끼고 걸어 다니는, 새벽 길거리에 공허한 눈빛으로 나앉아 담배를 피우는, 엑스터시와 향락에 찌들은 ‘타락한 거리의 풍경’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아직 전체적이고도 절망적인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다.) 대형자본이 홍대앞 클럽으로 굴러들어오면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한 초창기의 클럽들은 속속들이 장사를 접고 있으며 대형화되어 마치 나이트클럽처럼 변해버린 클럽이 얼마나 본래의 개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는 의문이다.홍대앞 클럽문화의 미래를 위하여 본질적으로 뜯어 고쳐야 할 문제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아주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 현재의 클럽문화가 하나의 문화적 인프라를 생성해내기를 바란다면 먼저 한국의 대중문화의 체질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90년대 초에 국내에 들어온 펑크락이나 테크노나 힙합 등의 비인기 장르는 영미권에서는 하위계층의 저항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을 담은 문화이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와서는 위와 같은 문화가 소위 ‘좀 있어 보이가치를 인정하고, 이러한 음악을 생산해내는 뮤지션이나 DJ의 중요성과 이들과 함께 클러버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문화를 인정한다면 단지 관광사업으로써가 아니라 문화컨텐츠 사업으로써의 클럽문화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클럽의 제도화에 대한 필요성을 공감할 수 있게 될 것이다.)한국에서 생성된 클럽문화는 비록 그 시작이 자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공권력에 의해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인정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위적으로 생산되고 이식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서구에서 클럽문화가 공권력에 의해 적극적인 반대를 받아온 것에 비하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이유도 작용하여 한국에서는 아직 클럽문화의 지지층이 그렇게 광범위하게 확보되어 있지 않다.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되고 사회적 협의가 도출되기 전에 정부의 수술을 거쳐서 빠르게 확산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기반이 두텁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클럽에 대한 합법화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사항이다. 테크노 클럽에서 춤추는 것을 단속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전근대적이고 반문화적인 행정이 아닐까. 일부 클럽 마니아들이 간혹 보이는 갖가지 돌출 행동을 우려해서 가치 있는 문화의 싹을 키우지 못하고 짓밟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ⅳ. 홍대 지역 문화지구 선정에 대하여먼저 ‘문화지구 선정’의 개념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문화지구 선정에 대해서 서울시는 “문화지구 지정대상은 문화예술진흥법상 문화시설 밀집지역이나 문화예술 행사가 자주 개최되는 지역,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인정되는 지역이며 대통령령으로 지정 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인사동은 갤러리와 찻집, 대학로는 소극장으로 이미 문화지구로 선정된 예가 있다. 인사동과 대학로의 문화지구 선정에 이어 이명박 시장이 홍대 클럽 문화 지구 선정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홍대앞도 문화지구 선정에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인디문화 혹은 언더문화로 불리는 비제도권 문화인 홍대문화는 사람과 프로그램이 주가 되고 뚜렷한 시설이나
    사회과학| 2008.06.30| 9페이지| 1,500원| 조회(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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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서양중세의 여성 권리 신장운동 평가A좋아요
    - 중세 여성의 이단 참여와 ‘역할거부론’, 여성 신비주의를 중심으로-◆목 차◆Ⅰ. 서론Ⅱ. 중세 교회의 여성관Ⅲ. 중세의 여성 운동1. 여성의 이단 참여2. 중세 여성의 ‘역할 거부론’Ⅳ. 중세 여성 신비주의1. 중세 여성 신비주의의 등장 배경2. 중세 여성 신비주의의 유형3. 중세 여성 신비주의의 특징Ⅴ. 결론Ⅶ. 참고 문헌Ⅰ. 서론역사를 뜻하는 history는 his story, 즉 그의 이야기라는 표현에서 유래한다. 이 같은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존의 역사서술이 남성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속에서 여성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유교적인 가부장적 관념이 지배적인 동양의 역사에서는 물론이며, 서양의 역사 속에서도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는 항상 남성의 존재만이 가득하다. 특히 중세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중세의 여성들은 관습적으로 혹은 법제적으로 남성에게 예속되어있었으며, 기독교적 관념에 의해 혐오와 멸시의 대상으로 여겨졌다.서양의 중세 사회를 지배한 것은 기독교였다. 로마 제국 말기의 방탕하고 문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두된 기독교 사상은 자연스럽게 남녀 관계를 죄악시 하였으며, 이것은 여성에 대한 경멸로 이어졌다. 또한 창세기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이브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이미지는 모든 여성을 ‘이브의 딸들’ 즉 죄의 온상으로 규정하게 하였다.위와 같은 기독교적 관념이 서양의 중세시기를 지배하는 동안, 당시의 여성들은 역사 속에서 목소리를 낮추었으며, 그 존재감 또한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존의 중세 여성에 대한 연구는 주로 남성에 의해 지배받고, 사회적으로 억압받았던 실상에 집중되어있다.그렇다면 서양의 중세 사회에 있어서 여성들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저항과 불만의 목소리를 표출 한 역사는 전혀 없었는가? 본고에서는 중세의 여성들이 낮은 지위에서 구속당하며 핍박받았던 실상으로부터 눈을 돌려, 그들이 스스로의 역할증대중심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했다.)교회가 여성을 이브로써, 즉 사악하고 열등한 존재로서 규정하여 낮은 지위를 합리화 시킨 것 또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뿌리로 하여 교부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이와 같은 이브적 여성관은 중세 여성의 위치가 종속적인 면에 머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고대 로마나 게르만의 낮은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세습적인 인식과 더불어 여성의 지위 격하가 중세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그러나 이러한 이브적 여성관과 더불어 12세기 이후에는 마리아적 여성관이 등장하게 되는데 종전의 여성관과는 상이한 이 여성관이 중세에 같이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리아 숭배의 발전은 여성의 이미지를 독실하고, 희생적이고, 구속하는 신자로써 묘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마리아적 여성관이 실제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 권위의 향상이나 지위의 상승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성직자들이 성모와 동일시 한 것은 여성 전체가 아닌 오직 수녀들에게 제한되었던 것이다. 몬터(W. Monter)는 마리아 숭배가 가지는 허구성에 대하여 하나의 해명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는 “마리아가 존경받는 이유는 그가 행한 것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숭배하는 남성들에게 고취시킨 용기, 고상함, 자비 때문”이었음을 지적했다.)또한 기사 낭만주의라고 하여 일부 소수의 귀족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성미화, 경건한 사랑 예찬은 불안하고 뿌리 없는 젊은이에게 일종의 행동 양식을 마련하였고 그들로 야기되는 사회적인 위험 요소의 상당 부분을 억제시켜 주었으나, 이분법 적인 요소는 그대로였다. 그들이 찬미하는 대상 이외의 여성은 여전히 음탕하고, 이브처럼 교활하고, 악의를 가지고 있으며, 심술과 질투의 상징으로 간주되었을 뿐이었다.)그리고 이와 같은 마리아 숭배나 기사도 문학의 등장 역시 그 본질이 남성들의 요구로부터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암흑기의 소란과 암울했던 현실에 대한 낭만적그러나 중세 이단과 여성 문제를 중세의 남성 중심적인 제도적 장치들과 관련해서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여성들의 이단 참여는 결국 중세 봉건사회와 교회의 性 역할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11세기의 도시는 경제적인 성장에 힘입어 점차 자유를 획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여성을 포함한 도시 거주자들이 자유를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차츰 장원의 관습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12세기의 많은 도시들에서 결혼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호되기 시작하였다. 재산 상속권과 소유권에 있어서도 도시의 여성들은 많은 자유를 얻게 되었고, 일부 도시에서는 부부 사이의 동등한 재산 상속권이 인정되었다. 이제 도시의 여성들도 재산 상속에 있어서 도시의 자유로운 공기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으나 전통적인 교구 제도는 도시의 급성장, 도시의 인구 비대화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였다.)12세기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사회 경제적 지위 향상의 시대였으며, 동시에 종교적 각성의 시대였다. 이 같은 종교적 각성은 당시 유럽 전역에 불어왔던 경건 운동의 결과였다. 도시의 성장과 더불어 폭 넓은 사회 경제적 자유를 획득했던 여성들도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에 고무되어, 합의 이혼을 하고 각기 수도 공동체로 들어가는 부부들의 수가 늘어갔다. 그러나 교회는 여성을 멀리하는 관습의 벽을 쉽게 허물지는 못했다. 12세기까지도 극소수의 수녀원만이 존속했고, 그나마 특정 계층 출신의 여성들에게만 문호를 개방했던 ‘귀족주의적 원칙’이 고수되었다. 이러한 제한 된 상황 속에서 하위귀족, 도시 상층민, 중간 시민계층의 여성들의 ‘종교적 삶에 대한 동경은 증가되었다. 대다수 여성들은 여성 포교에 적극성을 보였던 방랑 설교자나 이단 설교자들을 추종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단으로 많은 여성들이 흡수되자, 중세 가톨릭교회도 이제 여성에 대한 사목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그러나 기성교회의 여성 사목을 위한 노력은 너무 늦게 이루어졌다. 상당수의 여성들은 기성 교회가 아닌 다른 수도 공동체로 발길폐쇄적인 중세 봉건 사회 내에서는 상당히 새로운 변화였다. 여성들의 지위 상승은 재산권 보장과 같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 종교적으로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비록 대부분의 사료가 여성에 대한 박대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남성 기록자들, 특히 중세 성직자들에 의해서 쓰여졌지만, 사료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거친다면 우리는 중세 여성들의 목소리를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11세기가 시작되면서 유럽의 몇몇 지역에서는 이단적 교리를 신봉하면서 정통 교회의 테두리를 벗어나려했던 종교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이단에 대한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이미 1022년경 오를레앙과 툴루즈에서는 여성들이 종교 운동의 적극 가담자로 지목되었다. )중세의 여성들은 남성 중심적 봉건 사회에서 부인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해 왔다. 이러한 전통적인 ‘성(性) 역할 고정 관념’을 거부하고자 했던 움직임은 12세기에 진행되었다. 12세기에는 도시의 여성들이 종교적 삶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주로 도시 중산층 계층의 상인들의 부인이거나 혹은 도시 상층민에 속했던 여성들로써 봉건 사회의 귀족 계층에 속하지 않았다. 이처럼 도시여성들이 여성 운동을 적극 주도했던 것은 도시 여성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 경제적 지위 상승을 경험한 도시 여성들이 종교적으로도 귀족 여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종교 운동은 라인강을 따라 독일 남부, 스위스로 전파되었으며, 남부 프랑스에서는 프로방스 지역이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태리 여성들은 롬바르드 지역을 거점으로 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 지역들은 당시 유럽에서 도시 성장이 가장 활발했으며, 경제적으로는 핵심지역이었다. 따라서 여성들의 종교 운동은 유럽의 도시화와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非귀족 계층의 여성들은 수녀원이 ‘귀족주의적 원칙’을 고수함에 따라 종교적인 갈망을 채우기 위해 방랑으로 포기하고 종교적 생활에 몰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가족이라는 혹은 결혼이라는 굴레로부터 먼저 벗어나야만 했다. 중세는 신앙의 시대였다. 신을 위한 삶은 많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었다.)중세 전성기 여성들의 역할 거부 운동에 가담한 이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종교적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단으로 몰렸던 일부 여성들은 노래를 부르며 기꺼이 화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여성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망만을 충족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종교적 경건을 일상생활에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역할 거부론은 남성 지배적인 중세 사회 구조를 현실적으로 탈바꿈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여성들의 종교적 열정이나 소명은 여성적 신비주의를 낳았다. 사제직과 수사직은 남성들만이 존중되는 임무였던 이유로, 단순한 성직을 맡을 수도 없었고, 탁발을 하면서 참회할 수도 없었던 여성들은 신비주의적 환영(幻影)을 통해서 성직을 담당하고자 했다. 즉, 신비주의적 환영은 사제직과 수사직에 대한 여성적 바람의 대안이었다. 이를 통해서 이들은 성직 수행에 대한 바람을 표현했고, 더 나아가 남성들의 권력을 능가하려 했던 것이다.)Ⅳ. 중세 여성 신비주의1. 중세 여성 신비주의의 등장 배경교회사 2000년을 돌이켜보면 여성과 제도 교회의 관계 형성 과정에 대체로 유사한 흐름이 있다. 각 조직체마다 초기에는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나 차츰 제도화되고 체계화 되면 여성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남성들이 공식적인 모든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초대 교부들을 일반화시켜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각각의 교부들의 내용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대체로 교부들의 논점은 여성들이 교회 내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직책을 갖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때로는 여성들의 지도력을 ‘이단’으로 연결 짓기도 하였다. 결국 정통과 이단이라는 이분법적인 질서 속에서 여성들의 자리는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제도권 안에 들어가지.)
    인문/어학| 2006.11.29| 9페이지| 1,500원| 조회(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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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원평가제 보도의 프레임 분석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의 보도자료 비교를 통하여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의 보도자료 비교를 통하여-Ⅰ. 서론 - 미디어의 틀짓기. 제출일 : 2006년 11월 12일.매스컴이 현대사회에서 미치는 영향이 다대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사회적 쟁점을 형성하는 문제에 대해서 여론의 향방을 결정짓는데 매스컴의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공중이 사회적 문제를 접하는데 있어서 직접적인 경험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상의 이해를 위해서는 매스컴의 보도에 의존하게 된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현실 그 자체가 어떻게 보면 매스미디어를 통해 길러진 상들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매스컴은 각기 다른 주제를‘선택’하고, 그 주제의 의미를‘창조’하며, 하나의 쟁점을 가지고도 각기 다른 관점으로 수용자를‘설득’하려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언론의 보도에 따라 여론의 향방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이것을 프레임 효과(framing effect), 우리말로‘틀짓기’라고 한다.뉴스의 프레임은 현실의 어떤 측면은 강조하는 반면 다른 측면들은 생략하거나 무시함으로서 현실에 대한 일정한 방향의 해석을 유도하는 의미생산의 도구이다.) 매스컴이 공중의 의제를 설정하는 영향을 넘어서 구체적인 태도와 의견까지 틀짓기를 통해 규정해주는 것이다.본 고 에서는 교원평가제의 실시여부와 그 구체적인 사항들을 두고 정부와 전교조로 대표되는 교직원단체, 학생과 학부모간에 형성된 대립을 두고 언론이 어떤 식의 프레임을 구성하여 보도하였는지에 대하여 분석해보고자 한다. 매일 보도되는 수많은 사회적 쟁점 중에서 ‘교원평가제’라는 주제를 선택하여 분석한 이유는 내 스스로가 작년부터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분석을 위하여 필자의 주관적인 관점은 보고서에서 배재한 사실을 분명히 하겠다.분석을 위해 보수언론으로 대표되는 와 진보적 관점을 가진 의 기사를 비교했다. 기간은 교육부에서 2007년부터 교원평가제 본격도입을 발표했던 2005년 5월부터 최근의 교원평가제 제외하고 주관성이 내재된 성격의 기사가 약 35%의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사설과 칼럼들을 분석해보면 3개의 기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교육부의 교원평가제 실시에 대한 찬성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나마 3개의 기사 중 한 개의 사설만이 교원평가제 실시를 확실히 문제 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나머지 2개의 기사는 뚜렷한 관점이 잡히지 않는다. 특히 교원평가제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는 뉘앙스의 기사는 36개 중 30개가 여론면의 독자 기고로 되어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30개의 사설 중 단 하나의 독자기고가 [다시 짜야 할 교원평가제]라는 제목으로 현재 교육부가 실시하려는 교원평가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되짚는 주장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보도 자료의 편향성을 보았을 때 조선일보의 프레임은 교원평가제 실시의 찬반 여부를 둘러싼 논쟁에 있어서 두 편 중 교육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사설에 비중을 두고, 상대적으로 반대되는 전교조 입장에서의 서술을 소수로 다룸으로써 여론의 향방을 찬성 쪽으로 설득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매스컴은 이러한 뉴스 틀짓기를 통해 대중에게 특정 사회집단이나 관련 사건에 대한 편향된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한다.[교원평가는 좋은 학교를 만들자는 것이다],[당당히 평가받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선생]등의 헤드라인에서 보이듯이, 조선일보의 사설 면에서 교원평가제 실시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공교육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내지는‘공교육 환경 개선을 위함’으로 의미화 되고 있다.)반면 전교조에 대해서는‘교육에는 관심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집단’의 이미지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일보 2005년 9월 6일자 여론/독자 A35 면에 개재된 [전 국민이 全敎組를 지켜볼 때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는 “전교조는 교육의 소비자인 이들 학부모의 하소연 섞인 주장에 대해 자기네들이 힘들고 피곤해진다며 교원평가제에 반대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전교조를 비판하고 있으며, 2005년11월05일자대개의 경우 글에 주관적인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매스컴의 틀짓기 효과가 스트레이트 뉴스에 비해 적다고 할 수 있다. 스트레이트 뉴스는 어떤 사건에 대해 작성기자의 의견을 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도하는 대부분의 보도기사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 보도기사를 통해서도 언론은 보도내용을 취사선택하거나, 특정 관점을 부각시켜 보도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공중의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조선일보의 교원평가제 보도기사의 대부분은 교원평가제 자체에 초점을 맞춰 논쟁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구조를 조명하기 보다는 교원평가 반대를 위한 교원단체들의 집단행동을 중점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전교조의 이미지는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이미지로 규정되고 있다. [교원평가 시범실시 103개교 신청 ? 일부 학교, 전교조 신청 방해로 애 먹기도] (2005.11.17 / 사회 A12 면)에서는 교원평가를 신청한 학교 수를 시?도 별로 기재하고 “신청 학교가 없는 시?도도 있지만 전교조 때문에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또한 “신청하지 못한 학교들도 전교조의 방해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교장 떠나라” “제 命대로 살고 싶지 않냐” ? 교원평가 시범학교 협박·인신비방 몸살](2005.11.22 / 사회 A8 면)에서는 교원평가제 실시 시범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교조의 폭력적인 교장?교감에 대한 협박과 수업거부행위 등을 실었다. 그러나 전교조가 교원평가제에 반대하는 구체적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학부모와 학생들, 그리고 교육 행정가들의 인터뷰만 있을 뿐 전교조를 상대로 한 인터뷰는 개재하지 않고 있다.또한 교원평가제에 강력이 찬성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목소리를 부각시켜 모든 여론이 교원평가제 실시에 찬성하고 있다는 인식을 수용자에게 심어주고 있다. 이 같은 특징은 [교원평가 찬·반 또‘쪼개진’교단 전교조 “시범학교 선정 피하라” 공문 좋은교사운동 “거부땐 국민이 등돌려”] (2005.11.1005년 5월 1일부터 2006년 10월 31일까지 교원평가제 실시를 주요 이슈로 다룬 기사는 70개를 꼽을 수 있었다. 2007년부터 교원평가제를 전면 실시하겠다는 교육부 방침이 밝혀진 2005년 5월 초부터 구체적인 시행 방안과 전망을 기사화했고, 이 후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교육부와 교원단체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보도 하고 있다.그러나 교육부와 전교조의 프레임은 조선일보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교원평가제 실시 자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한겨레에서는 교원평가제 실시를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환경과 관련하여 문제점을 조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05년 11월 11자에 [근평 유지한 채 새 교원평가 안돼]라는 제목의 이수일 전교조 위원장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교원평가제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전교조가 제시하는 반대 이유는 무엇이고, 대안은 어떤 것을 계획하고 있는지에 대해 긴 논의가 담겨있다. 또한 [교원평가는 성적순 교육 못 바꾼다] (정치/ 2005.11.28)라는 제목의 사설은 교원평가 이전에 학교평가가 전제되어야한다는 주장과 입시위주의 교육현실 속에서 교사의 어떤 점을 가치 있게 평가해야 하는가의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선 ‘교육문제에서 언제나 교육 종사자가 아닌 사람들과 교육의 본질을 도외시한 교육기득권 세력 및 교육을 이용하려는 정치인 기업가, 관료들에 의하여 교육의 본질이 왜곡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본다.’라고 이야기하며, 교육정책 제정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또한 전교조의 과격한 반대 시위를 기사 전면으로 내세운 모습이 눈에 띠지 않는다. 조선일보 지면엔 전교조의 투쟁으로 인한 서울시내 교통 혼란에 대한 기사와 공청회에서 전교조들의 고성과 같은 사건을 다루었는데 반해 한겨레는 이러한 면을 배제하고 있다.교원평가제를 반대하는 입장에 있어서 전교조 뿐 아니라 시민단체(참교육학부모회와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등)와 교총의 의견을 보도하고 있는 것도 조선일보와 비교되는 특징이다. 교’, ‘합의 없는 일방적 강행’ 등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교육시민단체 “졸속 교원평가 철회를”](사회/2005.05.27) [교원평가 시범실시 강행](사회/2005.11.04)’ [‘학부모·학생 들러리 소식에 교원평가 ‘원군’마저 등 돌려..](사회/2005.05.29)‘, [고립무원(孤立無援)' 자초 교육부](문화/2005.05.29)’등의 기사에서 교육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드러난다.전교조의 입장에서는 장혜옥 새 위원장의 인터뷰 기사를 최근 기재하여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70%가 교원평가제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정부와 언론이 국민들에게 왜곡된 정보를 줬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실었다.시범학교 운영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보도하는 관점도 조선일조의 그것과는 대조된다. 조선일보에서는 일선 학교가 자진해서 시범학교를 신청을 희망하고 있으며 전교조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프레임을 가지고 보도한 데 비해 한겨레신문은 시범학교 선정과정에서 도교육청이 학교를 상대로 시범학교 신청을 회유하고 종용했다는 전교조의 주장을 기사화 하는 등 대조적인 프레임을 구성하고 있다. 시범학교 운영 결과에 대해서는 조선일보의 보도가 ‘수업의 질 향상’ ‘학부모와 학생 교사 모두 만족’의 프레임을 구성한 반면, 한겨레는 2006년9월 26일 사회면에 실린 [교원평가 시범운영 평가 극과 극]이라는 보도기사에서 교육부와 전교조의 상반된 평가 결과를 이야기 하고 있다.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한겨레는 교원평가제 실시를 둘러싼 교육부와 교원단체의 갈등에 있어서 전교조의 학교 이탈행위와 과격성에 대한 초점을 피하고, 교육부 정책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구체적인 쟁점에 대해서 조명하는 프레임을 취하고 있다.Ⅳ. 결론교육부가 교원평가제 실시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작년 5월 이후로 이를 둘러싼 각계각층의 논란이 현재까지도 그 쟁점의 중심을 조금씩 옮겨가며 여전히 뜨겁게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 매스컴에서 연이어 보도하고 있는 ‘교육현장에서의 교권실추’나 ‘교
    사회과학| 2006.11.29| 5페이지| 1,500원| 조회(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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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2C 중세 유럽사회로의 바이킹의 진출과 영향
    8-12C 중세 유럽사회로의 바이킹의 진출과 영향- 목 차 -Ⅰ. 서론 ----------------------------------------------------------- 2Ⅱ. 본론1. 데인 족 ------------------------------------------------------- 32. 노르웨이 족 ---------------------------------------------------- 53. 스웨덴 족 ----------------------------------------------------- 6Ⅲ. 결론 ----------------------------------------------------------- 7Ⅳ. 참고 문헌 ------------------------------------------------------- 8Ⅰ. 서론바이킹은 지금의 스칸디나비아와 덴마크 지방에 살던 민족으로서 게르만 민족과 아주 유사한 민족성을 지닌다. 수많은 빙하와 피오르드가 있는 지역에서 그들은 해상으로의 진출을 통해 살 길을 찾아왔고 뛰어난 항해술을 가지고 유럽 여러 지역을 침략하는 야만인의 모습으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무식하고 힘센 야만인은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뛰어난 세공술과 야금술을 가졌으며 ‘룬’이라는 문자도 가지고 있었다. 그 동안의 단순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상세히 알아보는 것이 바이킹을 아는 데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바이킹의 활동연대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시기는 9세기로부터 12세기에 이르는 기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노르만인들의 근거지는 오늘날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지역이다. 이들 중 가장 악명 높게 해적활동을 한 세력이 유럽해안을 약탈한 바이킹들이다. 그러나 같은 계통의 바이킹이라 하더라도 유럽해안을 침범하고 약탈하는데 열중하지 않고,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그리고 북미대륙으로 진출한 세력들은 그렇게 호전전인 것이 아니었독교에 대해서 불경스러운 마음을 가져서, 혹은 그 신을 싫어해서 약탈하고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의 선교사가 이미 8세기 초에 덴마크를 방문한 바 있었고, 안스가르라는 용감한 독일 수도자는 9세기에 스칸디나비아에서 사람들을 개종시켰지만 순교를 당하지도 않았다. 린디스판과 기타 해안의 수도원들을 침략한 바이킹들은 황금 십자가나 보석이 박힌 복음서 등 그곳에 보관된 보물들을 탐냈을 뿐이었다. 또한 수도자들은 무력 저항이 없는 만만한 상대였기 때문에 침략의 유혹이 더욱 강했다. 바이킹은 기독교도 출신 해적들과는 달리 이들 성소에 대해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들은 일부 수도자는 학살했고, 또 일부 수도자는 약탈품과 함께 끌고 가서 노예로 삼았다.)이처럼 처음 바이킹 들은 해안 지역의 마을과 교회 등을 습격하면서 만족하였지만 점차 그 경향이 과감해지고 내률 깊숙이 침투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미 9세기 초가 되면서 바이킹 전사들은 얕은 강물에서도 잘 뜨는 바이킹 선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으로 진출하였다. 바이킹들은 현지를 침탈하여 주민들로부터 많은 조공을 받았는데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약탈품과 전리품의 수량은 많아지는 것이었다. 때때로 일부 바이킹들은 약탈한 지역에 아예 눌러앉아 정착민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 인들로 일컬어지는 바이킹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아직도 진행중에 있다. 이제 이 글에서는, 명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그들의 진출 경로와 상황에 따라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족 셋으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Ⅱ. 본론1. 데인족바이킹 침략의 첫 기록은 Anglo-Sazon Chronicie에 나타나 있다. 이 침략은 영국의 남해안 도아세트(Dorset)에 있는 포트랜드(Fortland)에 대한 것으로 북방인(Northmen)의 세 척의 배로 이루어졌다. 영국에서의 이 기록은 793년 6월 8일 린디스판의 수도원 공격으로 시작되고 있다. 794년 바이킹은 제로우를 침략하였고, 노섬브리아(Northumbria)는 등 잉글랜드 인들은 데인 족들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이러한 잉글랜드의 적개심을 잘 통합시켜 저항세력으로 조직한 사람은 웨섹스의 알프레드 대왕이었다. 많은 통치자들은 데인겔드 라는 조공을 데인 족에게 바침으로서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이는 주민들에게 많은 세금을 걷게 되는 것이며 불안정한 평화를 얻는 방법이었다. 알프레드 대왕은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데인 족들과 맞섰고 이윽고는 데인 족들과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의해서 데인 족들은 템스 강 하구에서 아일랜드 해까지 잉글랜드를 대각선으로 분할했을 때 광대한 북쪽 지역과 동쪽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지역을 데인로 라고 했는데, 대략 6만 4,000km2 에 해당하는 이 땅은 스칸디나비아 이외의 지역에서는 제일 크고 비옥한 바이킹 정착지였다.) 이후 이를 계승한 에드워드왕은 924년까지 바이킹으로부터 마아샤와 동 앙그리아를 탈취하였고, 노섬브리아에 있어서 스칸디나비아인의세력은 954년 에델렛드(Etheired)왕에 의하여 배제되었다. 그란 980년 이후 뒤에 노르웨이 왕이 된 오라프(Olaf)와 뒤에 덴마크 왕이 된 스웨인(Swein)이 인솔하는 바이킹의 침략이 재개되어 잉글랜드는 덴마크 왕 카누트(Canute)제국의 일부로 되었다. 그 후 1042년 에드워드(Edward)왕의 즉위로 잉글랜드의 왕가가 평화적으로 부흥했다. 그러나 에드워드왕의 사망 후 바이킹의 피를 계승하고 이미 프랑스 화 하고 있던 노르만디 공, 윌리암(William)이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라 놀만 왕조가 개시되므로 바이킹의 위력은 사라졌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인에 의한 침입은 잉글랜드에 대하여 큰 영향을 미쳐 사회기구, 방언, 지명, 인명 등에 있어서 발견되고 있다.) 이 시기에 데인로에 대한 통치 질서를 확립하던 영국 왕들이 이들을 완전한 외국인으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이들 지역에서의 혼성 인구의 존재를 인정하고 두 민족간의 평화 공존 및 동화를 추구하면서, 그리고 두 민족간 그리고 언어간의 동질적 요소의 존재로 말미암아 크게 영으로 발달하였다. 5000여명에 이르는 바이킹은 프랑크 족 원주민들과 쉽게 융화되었다. 롤로는 베랑제 백작의 딸 포파와 결혼했다. 점차 바이킹과 기독교 사회는 하나로 합쳐졌다. 롤로의 선례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일반화되었고, 스칸디나비아 남자와 프랑크 족 여인들 사이의 결혼이 증가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서 일부다처제 같은 그들의 이교도적인 관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양쪽의 언어와 관습, 사회적 인습 등이 융화됨으로써 롤로의 후계자들은 이후 수세기 동안 상업적, 군사적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2. 노르웨이 족노르웨이 인들은 정기적으로 해상 약탈을 자행했고, 사람이 살지 않거나 별로 살지 않는 땅을 점령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 바이킹들이 들어와 살았다는 흔적은 과거에 하나의 학설일 뿐이었지만 요 근래에 들어서는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이다. 이처럼 노르웨이 인들은 뛰어난 항해술을 가지고 서유럽의 여러 지역과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북아메리카 까지 영향을 끼쳤다. 노르웨이 인들은 인구가 희박한 스코틀랜드 북부와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헤브리디스 제도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곳의 해안은 아일랜드와 맨섬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며,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약탈하러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노르웨이 인들은 수 많은 해상 진출을 통해 아일랜드와 그 주변 일대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한 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후에 새로 침략해 들어온 데인 인들과 아일랜드 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그 영향력은 상실되어 갔으며 점차 아일랜드의 켈트 문화와 조화되어 그 특색은 사라지게 되었다.이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인들은 영국 해협의 해변에서 포르투칼까지 침략하였다. 843년 노르웨이인은 프랑스 서부의 낭트를 약탈하고 누아르무티에섬에 교두보를 건설했다. 그들은 루아르와 투르까지 항해해 올라가 프랑스 중부 전역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소금 교역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들은 브르타뉴의 그루아 섬에 상륙했다. 884년 노르웨이인은 으며, 결국 그린란드라는 땅을 발견하였다. 982년 바이킹의 두목 붉은 털 에리크는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되었는데 서쪽으로 항해하여 새로운 땅 그린란드를 발견하였다. 그는 그 땅의 이름을 ‘초록색 나라’라는 뜻으로 그린란드라 붙인 최초의 인물인데 그를 따라서 많은 아이슬란드 인들이 그린란드로 이주해 왔다. 많은 이주자들이 이 이름에 끌려 그를 따라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이듬해 봄, 사람과 짐을 잔뜩 실은 25척의 배가 항구를 떠났다. 배에는 집을 짓기 위한 목재와 소, 그 밖에 이주민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실었다. 그들은 처음 이주해 오면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가지고 정착하였지만 그 생활은 그렇게 오래 갈 수 없었다. 엄청난 숫자의 빙하, 유빙에 의한 배의 난파 생활에 꼭 필요한 목재의 부재 등으로 생활이 정말 어려웠지만 모피와 가죽, 바다코끼리의 엄니, 철 등을 팔아 간신히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공동체는 근근히 그 생활을 이루어 나가다가 완전히 절멸할 때까지 근 5세기 동안 존속하였다.3. 스웨덴 족스웨덴 인은 동쪽에서 상업적인 모험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약탈과 무역행위를 번갈아 하면서, 발트 해 해안에서 흑해 및 콘스탄티노플 관문까지 진출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 루스(슬라브 인이 스웨덴 인을 부르는 말)는 그 땅에 러시아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비잔틴 제국뿐만 아니라 부유한 아랍 세계와도 연결 관계를 구축했다. 사실 스웨덴 인들이 러시아의 내륙 깊숙이 진출한 것도 아랍의 은 때문이었다. 은은 그들의 국가를 부강하게 했으며, 오늘날의 스톡홀름 근처에 있었던 비르카를 부와 생명력이 넘치는 시장도시로 만들었다. 비르카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스웨덴 왕의 보호를 받았다. 왕은 현지 행정장관을 임명해 치안을 담당하도록 했으며 외국인들이 공평한 법적보호를 받는지 감독하도록 했다. 가령 스웨덴 인은 방문 중인 데인 인이나 독일인을 죽이면 동포 스웨덴 인을 죽인 것과 똑같은 처벌을 받았다.) 스웨덴 왕은 외국상인들이 비르카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다녔다.
    인문/어학| 2006.11.29| 7페이지| 1,000원| 조회(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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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전통이론과 그에 대한 비판 평가A+최고예요
    Ⅰ. 서론한반도에서의 남북관계는 현재 상호불안의 관계이다.) 한편에서는 6.15 남북 공동 선언으로 획기적인 화해 국면이 조성되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북핵문제 등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갈등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핵을 둘러싼 한반도에서의 긴장위기나 서해에서의 무력충돌 등 휴전의 긴장상태는 계속되고 있다.오늘날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분단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국제 열강들의 권력 다툼과 경쟁으로 인해 발생된 한국전쟁을 그 원인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통일 민족 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비해 한국전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한국의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근본적 원인을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고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그러나 한국전쟁의 해석과 평가에 있어서 과거 냉전시기 전통주의 학자나 수정주의 학자들은 모두 자료의 빈곤과 정치 이념적 편견으로 인해 한국전쟁의 기원을 규명하는데 많은 제약을 받았다. 한국전쟁을 연구한 초기의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냉전의 산물로 파악했다. 전통주의 학자들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소련의 팽창주의적 세계 적화정책에서 규명하려고 했던 반면, 수정주의 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하지만 자료의 부족은 이들 모두를 상황에 근거한 추론적 분석에 머물게 했다.)이제까지 한국전쟁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가장 첨예한 쟁점으로 되어온 문제는 ‘전쟁 발발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즉,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가,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누군가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전쟁을 어느 쪽이 무슨 이유로 일으켰는가에 관한 학설이 무려 28가지에 달한다고 한다.)물론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가 하는 문제는 반드시 해명되어야 할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에 관한 모든 논의를 전쟁 발발 문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나타나듯이 중국공산당의 대륙제패를 미국이 '방관'한 사실은 북한이 남침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곳으로 예측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허점공격설은 미국의 개입여부에 대한 소련의 계산착오를 강조한다.)넷째, 미국의 결의실험설 또는 저항력 실험설이다. 스탈린이 자신의 세계적화 대전략을 실천하기에 앞서 미국과 서방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남침을 시도했다는 주장이다.다섯째, 무력시위설이다. 중국대륙의 적화에 이어, 북한의 남침으로 손쉽게 남한적화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소련의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의 공산세력을 고무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여섯째, 미·중 대결유도설 또는 미·중의 자기소모 유도설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함정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의 출발점은 중국공산당에 대해 스탈린이 불안함을 갖고 있었다는 분석이다. 소련의 지원을 크게 받음이 없이 독자적으로 대륙을 제패한 중국공산당에 대해 스탈린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중국이 독자적으로 노선을 추구해 나가는 경우, 즉 '제2의 유고슬라비아'가 되는 경우, 소련의 세계적화전략에는 많은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을 직접적 대결속에 묵어놓아 중국을 고립시키고 미국을 중국이라는 '깊은 늪'속에 빠뜨려 양자의 국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중국이 한국전에 끌려나왔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유엔에서 '침략자'로 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면하지 못했으며, 특히 미국의 봉쇄정책이 묶였던 것이 바로 스탈린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결과라는 것이다.)일곱 번째, 미국 텍사스 대학교의 교수인 채피 교수의 추론으로서 소련이 시베리아의 안전을 위해 장개석 정부와 협정을 통해 중국 황해안 항구를 기지로 활용해 왔는데 중국의 공산화 이후 더 이상 기지를 쓸 수 없게 되자 한반도 공산화를 통해 모택동과의 갈등 해소 그리고 시베리아 안전 보장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이루려 했다는 가설이다.이상의 7개의 가설은 정 문제들과 여타 문제들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타의 문제들 가운데서 한국전쟁 계획안이 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전통주의자들은 주장했다. 예컨대 달린 교수는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를 원용하여 "북경과 모스크바는 북한이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데 동의했다. 그들은 북한이 외부의 군사적 지원 없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미국이 개입하여 전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에만 중공은 소련의 대공 엄호와 군사지원을 받아 참전한다"는 내용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회담에서 결정되었다고 주장했다. 워커 교수와 모즐리 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제시했다. 이처럼 일부 전통주의자들은 중·소의 음모 아래 북한의 전쟁준비가 이뤄졌다고 주장했다.)Ⅲ. 비판이론의 주요내용1960년대 중반 이후 소수인종의 권익을 증대하려는 민권운동의 신장과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비판하는 반전운동의 심화를 배경으로 하여 냉전의 기원을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찾고자 하는 발상의 전환이 모색되었다. 소위 수정주의 학파라고 불리우는 이 이론적 경향들은 1960년대까지 소수에 머물러 있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광범위하게 주장되었다.) 전기 수정주의 학자와 후기 수정주의 학자들 사이에는 내부적 견해차이가 존재하지만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 냉전을 초래한 일차적 책임자라는 사실에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소련에 대하여 공세적 대외정책을 펼쳤고 따라서 냉전은 미국의 대소정책의 여하에 따라서 피할 수도 있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 소위 60년대세대의 학자들은 그 이전의 학문적 풍토가 냉전적 시각에 매몰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 정당성에 도전했다. 여기서는 한국전쟁의 전통적 이론에 대한 비판 이론들을 살펴보고자 한다.1. 내전론커밍스는 1960년대 후반 대학을 졸업했고 한국에서의 평화봉사단 활동을 통해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수정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된 1975년 무렵부터 미국에서는 후기측면을 부각시키는 주장은 이러한 군사전력을 채택한 정치적 목적에 대한 분석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서울을 점령한 후 정치 협상을 통하여 정국을 주도하려는 계획은 정국 주도권 장악의 진정한 목적이 한반도 적화통일이라는 목적의 한 과정일 QNs이었기 때문에 북한이 남침을 하는 그 순간 북한은 한반도 전역을 적화통일 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또 다른 한 가지는 서울지역점령 제한전이라는 내전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스탈린이 단순히 김일성의 정치적 목적 달성만을 위해 한국전쟁을 승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승인하면서 소련이 한반도의 적화를 통하여 미국과의 냉전대결에서 어떠한 세계 전략적 목적들을 추구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그렇다면 왜 북한군은 3일을 서울에서 허비했을까? 한국전쟁 중 김일성이 1951년 5월 초 북경에서의 회담을 위하여 부산방어선을 뚫지 못한 원인 분석 서류가 미국에 노획되어 공개되었는데, 이 문서에 따르면 가장 큰 이유로 서울점령 후 인민군이 한강을 지체없이 도하하지 못한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소진철의 논문에서 주장된 춘천전투 실패설이 가장 유력한 것 같다. 한강 이남을 포위 공격하려던 북한의 전술이 춘천전투에서 패배함으로 3일을 지체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적이다.)인민군의 초기 작전 실패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춘천전투 실패나 미국군의 개입 등에 대비해 이미 한국전쟁 결정 이전부터 대비책을 준비해 두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 승인 의사를 표명하면서 반드시 사전에 모택동과 이 문제를 상의하고 동의를 얻도록 했다. 1950년 5월 김일성과의 북경회담에서 모택동이 남침에 동의한 후 만약 미국이 참전한다면 중국이 병력을 파견하여 돕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러한 김일성과 모택동의 회담 결과로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승인하기로 결정하면서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었다고 보고 한반도를 전쟁의 장소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소련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두 나라가 북한을 전략적으로 어떻게 여겼는지에 대한 풍부한 의문을 제기하는 장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4. 미국의 전쟁 유도설한국전쟁 기원에 관한 논란 중에서 소련이 좋으냐 나쁘냐 만큼이나 많은 논쟁을 가져왔던 주제가 미국에 관한 논쟁이다.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는가? 아닌가? 또는 미국이 이 전쟁을 알았는가? 몰랐는가? 전통주의 학자들이 한국전쟁 발발 원인을 스탈린에 의한 여러 가지 동기와 음모에서 잡고 있는 데 반해 수정주의 학자들은 이승만, 맥아더, 델레스 그리고 장개석까지 포함시켜 이들이 한국전쟁이 일어나도록 유도했다는 가정에 입각하고 있다. 제한적 북침설이라고도 하는 남침유도설의 이론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1949년 이후 미국의 대한 정책은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즉, 거의 억지를 쓰다시피해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미국이 1949년 이후 전쟁 발발에 이르기까지 미군 철수)(1949.6), 에치슨발언)(1950, 1, 12), 이승만의 군사 원조 요청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등 일정하게 태도를 바꾸어 남한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강력하게 제기되는 것이 미국의 전쟁 유도설이다. 즉 사회주의 진출에 대해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미국은 한반도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북한측에 대해 허점을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군으로 하여금 제한적인 공격을 도발케 함으로써 한국전쟁을 유도했다는 것이다.)미국과 남한이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계획을 사전에 인지했는가의 문제는 특히나 수정주의 학파에게 한국전쟁의 기원을 밝히는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자료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의 의도 자체가 전쟁의 결정적 요인으로 취급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제 논란은 끝났다. 봐라 소련이 주도했지 않느냐”라는 전통주의 학파의 주장은 전쟁개시 3일 만에 적극적으로 참전한 미국이 왜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적이다.
    인문/어학| 2006.11.29| 11페이지| 1,500원| 조회(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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