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은*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0
검색어 입력폼
  • [서양사, 로마사] 3일만에 읽는 로마제국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1에서 4번째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이고, 5에서 10번째 계명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계명이다.이렇게 공동체내에서 지켜야 할 약속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초기 로마는 별 볼일 없는 국가였다. 그런 로마가 왜 그렇게 강성할 수 있었는지 또 왜 멸망했는지에 대한 견해는 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도 밝혔듯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로마가 로마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법 이라고 생각한다.그리스 문화에 비해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로마가 그리스나 다른 나라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법 이다. 로마의 법은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로마인의 모습을 반영한다. 현대의 법이 로마법에 그 근간을 둘만큼 로마의 법은 법의 정신에 부합했다고 볼 수 있다.로마의 이미지는 강인함 으로 말할 수 있다. 잦은 전쟁으로 인한 강한 군사력과 대제국에서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의 이미지를 가능하게 한 것이 법이다. 이와 같은 로마의 이미지와 비슷한 것이 중국의 진(秦)을 들 수 있다. 두 나라 모두 법을 중요시했다. 두 나라에서 법은 단순하게 공동체의 약속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법에 의한 공동체 유지는 고금을 막론하고 현대사회에서도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고 그것은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다. 법치주의의 반대되는 개념이 인치(人治)이다. 오랜 역사에서 특정 개인에 의해서 공동체가 파괴되고 희생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인치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선지자적인 지도자가 한 공동체를 이끈다면 법치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권력이라는 것은 권불십년 이라는 말에서처럼 쉽게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인치가 가져오는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으로 법치가 나타난 것이다. 법치(法治) 또한 본질적으로 사람을 위하고 공동체를 위하는 것일 때만이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이 책의 저자가 로마의 강점으로 들었던 시스템(군사력을 포함)은 바로 이러한 법치주의의 포괄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시스템이란 인치보다는 법치에 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왕정이었던 로마는 이름 없는 국가였다. 그러한 로마가 귀족의 권력독점을 폐지하고 민주 정이 성립되면서 즉 법치주의가 바로 서면서 강성해졌다. 이러한 공화정 또는 법치주의는 로마인의 자부심이고 정체감이었다. 로마인들은 자신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은 수업시간이나 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유명한 법언(法言) 중에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할 필요가 없다. 는 말이 있다. 로마인들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잠재우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평민들은 성산 사건, 리키니우스법, 호르텐시우스법 등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법적 평등을 실현하였다. 이러한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중장보병 중심의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시민 개개인이 모두 로마라는 공동체의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자각으로 단결하였다. 전쟁시에는 명예를 중시하고 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무장하였다. 이는 로마인들이 병사되는 것을 권리이자 의무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로마인들은 영웅의 출현을 허용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카밀루스가 왕 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추방한 것을 통해 로마인들이 법치가 아닌 인치에 의해 공화정이 유린되는 것을 경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개인에 의해 공동체가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로마는 엄격한 권력분립을 실시했다. 거부권이나 임기제, 특히 독재관을 두어서 국가비상사태에 대비하였으나 그 임기가 6개월을 넘지 못하게 했고 집정관 2명을 두어 상호 견제하게 한 점은 대표적인 권력 분립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법치적 요소가 무너진 것은 포에니 전쟁 이후이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이후에 많은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된다. 넓어진 영토와 많은 노예는 소수에 의한 대농장 소유를 가능하게 했고 시민들간의 빈부격차가 생겨났다. 이렇게 부의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로마의 법치 또한 서서히 인치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크라쿠스 형제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겉으로는 중산층의 안정과 확대를 꾀하는 것이었지만 본질은 로마의 법치주의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의 개혁은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법치로 로마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많은 기득권을 소수의 원로원이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크라쿠스 형제의 개혁실패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 채 지속되다가 마침내 힘에 의한 정치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로마인들이 그토록 자랑해 마지않던 공화정이 변질되어 인치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속주 총독이었다. 원로원의 정무관들이 아직까지 법치가 살아 있는 로마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속주 총독이 되길 바랬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로마는 세력의 팽창과 더불어 시민법을 넘어서 만민법을 제정했다. 이것은 단순히 이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민족을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법치 안에 그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맹자에게 전쟁의 소득에 참여할 수 있게 한 점 그리고 피정복지에는 과세하지 않았다는 것은 로마의 이러한 법치정신을 잘 말해 준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시민권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이 책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로마군은 단일하고 균질화된 군단이 되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강해진 군사력은 후에 장군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직업적으로 싸우는 군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러한 장군의 권력 기반은 군부 독재로 이어졌고 각 군단이 각기 황제를 옹립하고 전투의 승리자가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군인황제시대가 막이 오른 것이다.술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로마시민은 무관심한 대중으로 전락하였고 창을 들지 않게 되었다. 이렇듯 로마시민의 평등성이 침해되면서 로마의 제국화는 가속화되었다. 유권자이자 로마 공화정의 중추인 시민은 대도시에서 대량으로 실업자가 되어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들이 공동체 유지와 법치주의 보호 라는 과제 대신에 빵과 서커스 를 선택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법치주의의 요체인 시민들의 몰락이 소수권력에의 인치를 가능하게 한 셈이다.
    인문/어학| 2004.05.16| 3페이지| 1,000원| 조회(345)
    미리보기
  • [사회학, 정치학]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의 감상문 평가A+최고예요
    당신네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시오, 저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이오,이번 해만큼 좌우와 보수의 대립이 극렬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난 8·15 광복절을 맞아 광화문과 시청 앞에서 치러진 양측의 행사는 우리 한국 사회가 담고 있는 책에서 말하는 소위 극 의 병리학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옛날 서경천도를 둘러싸고 고려의 묘청과 김부식이 보수와 진보의 이념대립을 보였던 것처럼, 그보다 더 가까운 근래에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의 대립을 보였던 1946년 우리의 사회상에서는 양극단만 있었다. 이는 단순히 좌우 서로간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상호 존재의 필요성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논리만 제시하고 있다. 새가 잘 날기 위해서는 좌우의 튼튼한 날개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좌우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건강한 몸통이 필요하다. 즉 여론을 주도하고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건강한 중도세력이 필수적이다. 일례로, 프랑스는 르펜(Le pen)과 같은 극우도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좌우의 중도파가 51%와 49%라는 균형 잡힌 지지를 보내줌으로써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민주정치를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좌우간의 상호인정과 더불어 건강한 중도세력의 육성을 통해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갈 수 있는 민주주의의 새가 되어야한다.적대적 성격과 이해관계를 가진 인간집단들의 손에 핵폭탄이 쥐어짐으로써 공포의 균형 상태가 형성되었다. 핵무기 사용의 위험성과 가능성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최초의 원자탄 폭발 이후 두번째가 없이 반세기가 지났다. 인간의 이성과 도덕적 지각이 뛰어나서라기보다, 보복의 두려움 때문이었다.핵무기 북핵 문제로 인해 6자회담 이 한창이다. 아쉽게도 책과는 달리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기정 사실화된 현실에서 우리의 선택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남한 내 미군에 의한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는 대목이다. 한 세기 전 우리 나라는 4대 강국에게 각종 이권을 빼앗겼다. 최혜국 조항으로 인해 러시아에게는 철도부설권을, 미국에게는 운산 금광 채굴권을, 영국에게는 은산 금광 채굴권을, 일본에게는 국가를 빼앗겼다. 또 다시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해 줄 객관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UN이나 유럽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미국에게 한마디 던질 수 있는 프랑스와 같은 분단의 아픔을 겪은 독일과 건전하고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유럽의 선진 국가들과 손잡아야 한다. 통일은 밥숟가락(통일을 하겠다는 의지나 염원)만 들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밥을 뜨는(통일에 대한 노력과 실천)행위가 있어야지 그 밥이 통일한국이라는 피와 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한 세기 후에 또 다시 강대국에 의한 강탈이라는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게 그 끈을 잘라야 한다.미끈한 몸매의 이 두 열차가 쏜살같이 지나간 뒤, 동강난 국토의 남쪽 땅 절반의 산과 계곡을 씩씩거리며, 덜컥거리며, 볼품없이 기어가는 열차를 보면, 그것이 바로 이름도 거룩한 호라는 것이다. 겨레의 간절한 소원을 담은 이름의 기차로서는 그것이 받고 있는 멸시와 천대가 너무나 노골적이다.새마을운동에 밀려서 한국경제의 활짝 핀 미래를 위해서 통일은 잠시 뒷전이다 못해 대한민국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자들의 허황된 이상으로 치부되던 때가 있었다. 낡아빠진 통일 초처럼 어느 위정자도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에 발목이 사로잡혀 시원스럽게 나아가지 못하고 터덜터덜 힘겹게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언제인가 통일호를 없애자는 의견이 나온 적이 있다. 다행히도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아 사라졌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차라리 통일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쳐서 보기 좋게 운행하려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차라리 없애자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통일을 반대하는 이들과 논리가 비슷하다는 느경향은 새 동북아 질서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 없이는 평화적인 지역 틀 형성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중국 또한 동북아 패권을 두고 일본과 군비경쟁을 벌이고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현실에서 동북아 평화정착 이라는 과제는 어렵게만 보인다. 동북아 평화구축에 한반도 문제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남북대결구도와 전쟁가능성은 중국과 일본이 군비경쟁에 뛰어들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만약, 통일한국이 이러한 군비경쟁의 틀 안에서 동참하게 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동북아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도화선이 되는 세계 대전을 불러 일으켜 인류전체를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게 할 것이다. 한국이라는 변수가 능동적으로 역할을 한다면 중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가 될 수 있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 상처를 중국과 공유하는 한국이 일본과 중국간의 접점을 찾아야 하며 자본주의 체제를 일본과 공유하는 한국이 중국을 동북아 경제 질서의 틀로 이끌어 내야 한다. 한국 스스로도 그간의 지정학적 위치를 운운하며 수동적, 방어적 자세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를 이끌 수 있는 균형자 내지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적극적이고 건강한 자세만이 한반도 통일을 이끌고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꾀하는 지혜라고 여겨진다.< 제로섬적 대결구조에서 경제경쟁으로>만약 미국의 의도처럼 남한의 공업력과 군사기술 수준으로 대규모 군수산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킨다면, 남한은 결국 날로 커지는 미국의 무기시장 이면서 동시에 무기상인 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남한이 북한에 대해 군사력 우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면 결과적으로 미국-일본의 군사동맹체제 내의 종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민족내부의 문제가 외국 군사력에 힘입어 해결되는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는 뜻이다.오늘날 급변하는 동북아정세의 탈냉전 구조 속에서 더 이상 낡은 방식의 대결구조는 청산되어야 한다.아직도 한반도에는 군사적 대결구도가 있지만 그 위험성이 과거에 비해산다는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위정자들에게 그들의 집권야욕에 국민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보여주었다. 중국과 한국의 격동적인 현대사에 대만 「2·28」과 제주 「4·3」사건은 아직도 역사적인 사실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건 이라는 오명만 벗었을 뿐 구체적인 사실들이나 유가족들 위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규명과 함께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이들에 대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사건 의 회상>나는 6.25가 남한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선제공격 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대공반은 이론적으로 가능한 여러 해석을 가지고 남침 부정적 강의라고 몰아 부쳤다. 조승혁 목사와 강만길 교수는 같은 죄목으로 다루어졌다. 몇 달 간 고생 끝에 기소보류 (기소유예보다 무거운 처벌)로 풀려났다. 극우 반공주의 군사독재시대의 어처구니없는 한 토막 에피소드로 지금은 잊혀져 가는 사건이다.전교조가 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던 때가 기억이 난다. 참교육 을 부르짖으며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단에서 학생들과 진정한 교육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그들은 결국 해직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으로 그들을 지지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위정자들은 그들을 국가의 미래를 해치는 부정적인 집단으로 내몰았다. 그들의 떠나는 모습은 당당했지만 쓸쓸해 보였다. 그 동안 집권자들은 자신의 반대세력에게 빨간딱지 를 붙여서 그들을 탄압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문민정부 이후에 조금씩 변화가 있어왔고 전교조는 올 초에 NEIS를 두고 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그들의 목소리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아쉬운 점은 그들이 초기에 가졌던 참교육 에 대한 열정을 가진 진정한 교사라는 이미지보다는 교단을 둘러싼 이해집단으로 전락한 느낌마저 든다. 최근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의 처리를 바라보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가 이념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감각과 판단력의 지평을 넓혀 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말(言語)를 아름답게 다듬는데 각별히 신경을 써주면 고맙겠다. 최근에는 프랑스에서도 양키 문화 (텔레비젼 프로)의 침투로 문제거리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프랑스 방송의 오락물에서 프랑스어의 올바른 사용과 그 품위를 지키려는 노력을 본받을 만하다.베이컨의 4대우상 중에 극장의 우상 이 있다. 마치 저자가 영상세대에 대해서 매체에 의한 극장의 우상을 염려하는 것 같다. 특히 영상물에 대한 표절 은 앞으로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다. 소리바다 사건에서 드러난 음원 에 대한 시비가 영상 에 대한 시비로 옮아갈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더욱이 국제화를 넘어 세계화되는 이 시점에서 방영물에 대한 지적 소유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또한 미국 중심적 보도 행태와 사고방식의 전파는 정체성과 많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늘 미국 위주의 생각체계를 가지고 살아왔다. 국어보다는 영어를 더 잘해야 하며 우리 나라 역사보다는 미국의 대통령이 누구인지 더 잘 알아야 대접받는 풍토에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사대주의화 될 우려를 낳는다. 자기 정체성의 확보 없이는 진정한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미국보다 더 미국적 이고 싶어하는 또한 그렇게 해야만 대접받을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이 서글프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우리의 것은 반대로 시시한 것 이 되어 버렸다. 과연 도서관에서 국어 공부하는 이들이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관심이 없다 보니 우리의 말은 온통 외래어 일색이다. 순 우리말도 거대한 외래어 속에 묻혀서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프랑스처럼 외래어를 받아들이기 전에 한글화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얼마든지 한글화할 수 있는 단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는 데 더 방해되고 한글화된 단어보다 외래어를 써야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제안하고 싶은 것은 통일 시대를 대비하고 풍부한 한글을 만들기 위해 북한과 공동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남한에 비해 충실하게 한글화 작업을 했던 북한의 한글작업의 성과다.
    독후감/창작| 2004.05.16| 52페이지| 1,000원| 조회(450)
    미리보기
  • [헌법, 정부형태] 이원집정부제의 한국적 고찰 평가A좋아요
    {목 차Ⅰ. 서 론1. 한국정치의 현실2. 현재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권력구조의 비교Ⅱ. 본 론1. 이원집정부제1) 이원집정부제의 의의2) 이원집정부제의 특징3) 이원집정부제의 유형2. 프랑스 이원집정부제3. 한국의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 도입의 제도적 검토1) 현행 헌법 하에서의 이원집정부제 도입 가능성2) 개헌으로 인한 도입4. 한국 도입에 대한 견해1) 부정적 견해 비판2) 도입의 긍정적 측면(7가지)Ⅲ. 결 론Ⅰ.서론1. 한국정치의 현실2002년 대선의 승리로 인해 탄생된 노무현 정부는 집권 8개월만에 재신임이라는 문제를 들고 나옴으로써 국정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각 당은 자신들의 손익계산서를 들이밀며 개헌 내지는 현행 헌법 내에서의 권력구조의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헌에 대한 논의는 최근뿐만 아니라 정치개혁이 화두로 등장할 때마다 반복되었다.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병인 책임정치의 실종을 해소할 방안으로 그 동안 여러 가지 권력 구조가 논의되어왔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신임투표의 결과를 통해 권력구조의 변경도 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은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2004년 4월 총선 이후에 본격적으로 개헌이 논의가 이루어 질 것으로 예상된다. 권력구조를 둘러 싼 이러한 개헌 논의가 진정한 정치개혁보다는 각 정치세력의 손익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은 세계화의 무한 경쟁 속에서 국가발전을 고심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서 대단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정치안정은 경제발전의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지나친 권력집중에 있다.{) 한나라당 서청원 前대표 2003년 10월 20일 조선일보 인터뷰차제에 분권화를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현재 집권세력은 거대 야당에게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난하고 그 반대편에서는 현 정권을 아마추어리즘과 코드 정치로 규정하며 국정 혼란의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있다. 이러한 정치세력간의 대립각 속에서도 유일하게 일치된 것이 로서의 대통령은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다. 국민에 의한 대통령의 선출은 대통령제에 있어서 본질적 요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원집정부제의 대통령은 국민에 의하여 선출되기 때문에 의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며 책임을 진다고 한다면 국민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본다. 대통령은 비상시에 비상대권을 직접 행사하게 된다.{) 한태연, 헌법과 정치체제, 법문사, 1987, p223.(2)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은 수상임명권과 의회 해산권을 원칙적으로 갖는다. 의회에 의하여 선출된 의원내각제의 대통령과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이원집정부제하의 대통령과의 본질적 차이가 여기에 있다.{) 권영성, 헌법학원론, 법문사, 2003, p 939.(3) 내각은 의회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할 수 있다. 이 때에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 김철수, 헌법학개론, 박영사, 2003, p955.(4) 이원집정부하의 집행권은 대통령과 내각에 분립된다. 집행권의 이원화는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의 혼합에서 오는 결과이다. 내각은 의회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지고 의회의 불신임에 의하여 해산된다. 내각이 의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 대통령의 수상임명에 대한 중대한 제한이라 아닐 할 수 없다.{) 한태연, 헌법과 정치체제, 법문사, 1987, p225.(5) 긴급사태에 있어서 대통령은 수상과 각료의 부서 없이 행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통령의 비상대권은 대통령의 국민의 직선의 결과로 가지게 되는 권한이라 할 수 있다. 이 비상대권의 강화는 수상의 권한의 약화를 의미한다.{) 김철수, 헌법학개론, 박영사, 2003, p957.3) 이원집정부제의 유형{) 김헌, 의원내각제, 은하출판사, 1994, p37.이원집정부제의 유형에는 의원내각제에 대통령제 요소가 가미된 정부형태(1961년 터키헌법, 그리스 헌법)와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 요소가 강하게 가미된 정부형태(오스트리아, 핀란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다소 가미된 정부형태인 프랑스가 있다.이틀림없다.{) 성낙인, 프랑스 헌법학, 법문사, 1995, p358.그러나 현행 헌법상 정부형태를 대통령제적인 시각에 고정시키지 아니하고 반대통령제적인 시각에도 탄력성을 부여한다면 지난 13대 총선을 통해 나타난 여소야대하에서의 국정운용은 종래 집행권의 형식적 이원화에서 명실상부한 이원화로 해결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또한 최근 논의되고 있는 내각제로의 개헌에도 그 개헌에의 돌입 이전에 통합거대여당 내부에서 집행권의 이원화를 실천해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순리에 맞을 것이다.대통령과 의회의 다수파의 일치에만 길들여져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논지에 빠져 있는 한 민주주의적 정부형태상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결과의 애용은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민주주의의 꽃인 평화적 정권교체는 대통령이든 의회의 다수파이든 여가 야로 바뀜을 의미한다.{) 성낙인, 프랑스 헌법학, 법문사, 1995, p358노무현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2004년 총선에서 다수당을 차지하는 정당에게 총리 임명권을 주는 책임총리제를 실시하고 임기가 끝나는 2008년에 상황에 맞는 개헌논의를 시작할 것을 공언했다. 특히 지난 1998년에는 상이한 정치철학을 가진 두 정당이 공동정부를 구성하여 동거정부 내지는 이원집정부제의 가능성을 열었다.{) 2002년 11월 29일자 한겨레신문지난 대선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몽준과 이원집정부제를 고리로 후보 단일화를 이루기도 했다.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은 개헌 없이 책임총리제를 정몽준 후보는 이원집정부제를주장했다. 현행 9차 헌법이 많은 의원내각제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이원집정부제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있다고 하지만 의회해산권과 책임총리의 확실하게 보장하는 법적 장치가 없는 한 실질적인 이원집정부제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에게 국민투표를 부의할 수 있는 권한을 명시한 헌법 72조를 넓게 해석하여 의회해산이나 정치적 재신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한다면 가능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무리하게 적용한다면 헌법의 다른 규정과의 마찰이 일어날 수 의회해산권을 통해 신축적인 권력운용을 해야한다.현재로서 개헌의 목소리는 높으나 2004년 총선 이후에 정치구도의 변화에 따라 새 판짜기가 이루어 진 다음 개헌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4. 한국 도입에 대한 견해1) 부정적 견해 비판이원집정부제의 도입에 있어서 제도적인 제약뿐만 아니라 이원집정부제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도입에 큰 어려움이 되고 있다.먼저, 이원집정부제가 실시되면 동거정부가 구성될 가능성이 커져 정치 이념이 상이한 정파가 대립하여 혼란이 우려된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에서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공동정부의 양축으로서 정당의 이념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이루었던 사례를 알 수 있다. 일부 헌법학자중에 이때부터 사실상 이원집정부제를 우리 나라가 받아들였다는 주장{) 성낙인, 프랑스 헌법학, 법문사, 1995, p358.이 있으나 이원집정부제의 본래의 성격에 비추어 보아 성급한 결론이라고 생각된다.민주화 과정은 타협의 제도화이며 정치게임에 관한 제도적 타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민주화 과정을 전략적 게임으로 이해하고 있는 쉐볼스키(Adam Przeworski)는 민주화 과정을 불확실성의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of uncertainty)', 즉 모든 정치세력들의 이해관계를 불확실성에 종속시키는 제도적 설계(institutional design)'라고 보았다. 따라서 민주화 공고화는 제도화의 정치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모든 정치세력들의 전략적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제도적 틀을 승낙함으로써 공고화 될 수 있다.{) 이계희, 이원집정부제의 한국적 응용, 사회과학논집 제9권(1998.12) 충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 소, p255∼274따라서 혼란을 정치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조금 더 나은 민주주의 시행을 위한 과정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또한 기존의 끼리끼리 정치를 타파하고 정책과 사안별로 각 정치세력간에 공조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마리안느 꼬안데(Mar영성, 헌법학원론, 법문사, 2003, p940.따라서 대통령과 수상이 자연스럽게 국민에 의해서 평가가 된다. 평가를 바탕으로 국민들은 다음 선거에서 지지할 정치세력을 쉽게 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 풍토가 확립이 되면 각 정치 세력이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이원집정부제에서는 바로 집행부 자체 내 직선을 통한 대통령과 직선으로 구성되는 의회의 신임을 받고 있는 수상이 공존{) 한태연, 헌법과 정치체제, 법문사, 1987, p244-5함으로써, 서로 상이한 선거를 통해 나타난 국민의 二重의 의사표시가 국가원수와 수상사이에 반영되기 때문에 대통령과 수상이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상당한 정도로 대등하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 성낙인, 프랑스 헌법학, 법문사, 1995, p339이러한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현재 구상중인 책임총리제와 차이를 보인다. 책임총리는 이원집정부제에서의 수상과 임명방식이나 역할이 비슷하지만 국민이 임명하는 성격이 강한 이원집정부제의 수상과는 달리 결정적으로 자신을 임명해 준 대통령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대등한 관계에서만이 진정한 경쟁이 이루어 질 수 있고 국민으로부터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대통령과 수상이 다르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둘째, 역할 분담을 할 수 있다. 한국의 정치 권력은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즉 대통령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대통령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게 되고 오히려 국정의 난맥을 초래하게 되었다. 때로는 대통령이 대통령을 못해먹겠다는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원집정부제가 필요하다. 내정은 수상이 맡고 외치는 대통령이 하면서 전체적인 틀은 대통령이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또한 각종 선거에서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을 뽑을 수 있다. 가령, 대통령에는 외치에 필요한 결단력이 있는 인물을 한다.
    법학| 2004.05.16| 13페이지| 1,000원| 조회(1,060)
    미리보기
  • [교육학, 국사] 안창호의 생애와 교훈
    Ⅰ. 서 론 - 안창호 선생과의 만남한인이민 100돌을 맞아 안창호 선생을 기리기 위해 미국의 LA 프리웨이에 안창호I 가 생긴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당시 군인이었던 나는 상당히 놀랐다. 안창호 선생을 독립운동가로서만 알았는데, 미국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특정 도시에 선생의 이름을 딴 IC가 생기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자료가 얼마 되지도 않는 군용 인터넷을 뒤졌던 기억이 난다. 그 때에 나는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흥사단의 존재가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사실이나 신실한 같은 기독교임을 알고 새롭게 안창호 라는 선생의 이름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서 민족운동가로서가 아닌 교육자로서의 안창호 선생의 모습을 새삼 알게 되었다. 안창호 선생은 1세기 전 우리 민족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몸소 겪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17세 때,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우리 나라가 외국군대에 짓밟히는 참상을 목격한 후 크게 깨달았다. 말로만 독립국가이지 힘이 없는 한국이기에 도산 선생은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생각으로 서울로 유학하여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사상을 배우고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선생은 우리 민족이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했다. 안창호 선생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각인이 되어 있다. 하지만 안창호 선생의 확실한 한 가지는 그가 우리의 선각자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민족의 교사로서 큰 역할을 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안창호 선생을 통해서 교사로서 어떠한 자질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더불어 그의 교육이념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도산 선생에 대한 인류의 선각자로서의 재평가를 해보고자 한다.Ⅱ. 본 론 1 - 도산 선생의 교육이념도산 선생은 독립할 수 있는 힘의 기초로서 전인격 건설과 공고한 단결이라는 두 가지 큰 원리를 자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신자세와 생활태도는 곧 산업과 정치제도를 근대화하고 민주화하는 기본적 요건이 되며, 이른바 근대국가의 번영이 이루어질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했다. 거짓과 공리, 공론 그리고 허위와 게으름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가장 퇴폐적인 결점이라고 생각한 선생은 바로 4가지 정신을 강조하게 되었다.이 4가지 정신이란 곧, 1. 務實, 2. 力行, 3. 忠義, 4. 勇敢의 네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도산 선생의 교육이념이다.1. 무실(務實)務實은 實을 힘쓰자는 것이다. 實은 두 가지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진실·성실의 뜻으로 진실하기를 힘쓰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실질·실력·착실의 뜻으로 공과 허를 버리고 실질을 숭상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務實이란 거짓과 허위를 버리고 성실하자는 것이고 거짓을 버리고 실력과 실질을 힘쓰자는 것이다. 이는 도산 선생의 4대 정신 중 가장 중요한 정신으로 우리민족의 생활과 성격을 예리하게 분석한 결과 찾아낸 중요한 정신적 지주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무실의 이념은 우리 조선 후기에 대두된 실학파의 사상과 일맥 상통된다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의 삶과 괴리되어 지속되어 온 성리학적 질서에 관한 논쟁에 대한 비판으로 실학이 등장하였고 이렇게 실학은 실질적인 모습을 지향하는 면에서 무실과 닮았다. 우리에게 무실주의의 이상과 원리를 제시한 도산 선생은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는 대선각자였다. 이러한 무실적 인간관은 미래 세대의 바람직한 인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2. 역행(力行)力行은 行하기를 힘쓰자는 것이다. 力行은 곧 실천주의다. 무실의 반대는 거짓과 허위이며 力行의 반대는 공리공론으로 이를 배격하여 행동하기를 힘쓰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역행이다.다시 말해, 力行이란 務實의 實在化 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知行合一, 즉 아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는 것이 구체화되어 行하기를 힘쓰는데 그 아는 것의 가치가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기를라고 생각했다.3. 충의(忠義)忠義는 忠誠과 信義의 두말을 합한 말이다. 여기서 忠이란 일에 대한 충성, 사물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것으로 일을 할 때 정성을 다하는 것을 말하며 義란 대인관계를 주장하는 말로 사람을 대할 때는 신의로써 대하라는 뜻이다.도산의「오늘 할 일은 오늘에」란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나는 나의 생명을 다하여 나의 오늘에 할 일은 그 오늘에 다하여 보려고 힘씁니다.」도산 선생은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맡겨진 일에 매진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매사에 작심삼일하기 쉽다. 그리고 작은 일을 무시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가 많다. 큰 성공을 하는 사람은 작은 성취감을 많이 맛 본 사람이라는 격언처럼 아주 사소한 것에도 자신의 노력을 다해야 함을 도산 선생은 강조하셨다. 개인적으로 작은 것이 아름다운 이유를 아는 사람이 도산 선생의 충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충은 단순히 국가나 임금에 대한 충성을 넘어서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대상이 확대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자신의 생명을 다하라는 것은 일에 대한 忠義다.충의의 또 다른 축은 신의다. 교육에서 信義의 원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학생들이 교사들의 가르침을 안심하고 메모하는 것은 교사의 인격과 지식을 굳게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공교육이 무너지는 중요한 이유도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학생들이 학교의 교사들보다 학원강사의 가르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는 졸고 학원에서는 강사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 이러한 공교육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도산 선생이 강조한 충의가 교사와 학생간에 필요하다. 이처럼 공교육과 관련하여 도산 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되새겨 볼 만하다.도산은 무슨 일이든지 일단 작정을 하면 불리하든지 이롭든지를 막론하고 끝까지 성실함을 다하고 신의를 지켰으며 도산이 가장 싫어한 것은 변절과 불신으로 그는 "충의정신 함양이 교육의 구국사상이다" 악과 대결한다.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칠지라도 은둔과 도피의 길을 택하지 않아야 한다. 안창호 선생은 은(隱)의 태도와 둔(遁)의 자세를 버리고 진(進)의 태도와 쟁(爭)의 자세를 가질 것을 강조하셨다. 악과 대결하여 싸울 의지를 지녀야 한다. 그것이 용감이라고 했다. 플라톤의 중용에서 보면 용감은 만용과 비겁함의 중용적 덕목이다. 비겁하지도 않으면서 만용을 부리지 않는 중용적 지혜를 강조한 점은 그가 그리스사상에서 보여지는 서양교육의 핵심인 자유교양교육을 이해한 것으로 생각된다. 도산 선생은 용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인생에서 높은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함과 동시에, 그 이상과 목표를 구현할 수 있는 왕성한 노력과 견고한 의지를 기르고 단련시키는 일이 교육의 목표라고 했다. 도산 선생 자신도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도산 선생은 민족과 자신의 신념에 忠과 誠을 다하였고 일제의 폭압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위에서 말한 이 4가지 정신은 민족교육의 지표이자 도산 선생의 교육활동에 있어서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종래의 이러한 교육자로서의 안창호 선생에 대한 평가가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면만을 부각시킨 점이다. 4가지 교육이념으로 볼 때, 도산 선생은 단순히 우리 민족을 넘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계 시민적 자질을 향상시켜 주는 인류의 선각자로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공을 초월한 교육이념을 통해서 서두에서도 밝혔던 도산 선생에 대한 기존의 생각들을 깨는 작업이 필요하다.Ⅲ. 본 론 2 - 민족을 넘어 세계로기독교에 입교한 안창호 선생은 기독교를 통하여 서구의 자본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계질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바로 보고 철저한 자기비판 의식을 통해 우리 민족도 실력양성, 즉 '힘'을 길러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또한 기독교 사상과 서양의 고등학문을 접한 안창호 선생이 교육학을 전공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그는 단순히 민족을 뛰어 넘어 세계로 나아 역행의 정신을 강조했다는 점이 도산의 실천적 삶을 잘 말해준다. 점진학교와 대성학교를 세우고 태극서관이라는 자기회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독립협회나 신민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은 물론이고 지식인으로서 아는 것을 실천하는 자세의 모범을 보이셨다.마지막으로 선생은 우리 민족에게 사랑하기 공부를 강조하였다. 나라를 사랑하는 공부, 동료를 사랑하는 공부, 이상과 주의를 사랑하는 공부 등 기독교의 기본정신인 사랑하는 공부를 강조하셨다. 사랑하는 공부를 통해서 우리 민족이 좀 더 성숙해지길 바랬고 세계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안창호 선생은 단순히 우리 민족의 선생을 넘어서 세계 시민의 선생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일부에서 안창호 선생을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근시안적인 이해라고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특정한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신념을 가지고 사랑의 자세로 실천하는 것은 오늘날 세계 속에서 시민으로서 살아갈 때 필요한 자질들이다. 따라서 안창호 선생은 민족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지도자로 재평가되어야 한다.Ⅳ. 본 론 3 - 시대를 뛰어넘는 교육의 리더본론 2에서 언급하였던 민족을 넘어선 교육자인 도산 선생을 시간을 초월한 스승으로서 본론 3에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의 교육이념과 철학은 단순히 1세기 전 민족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적용되며 그리고 특히 미래에 그의 사상은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통해 우리의 미래 교육의 지침을 잡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것이다.1. 점진적 학습학습에 점진이 뜻하는 것은 첫째로 근면성을 말해 준다. 도산 선생은 학습하는 과정에서 후퇴하는 일은 공부에 성실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훈계하고, 작은 일에도 성실을 갖고 차근차근 깨달아.
    교육학| 2004.05.16| 5페이지| 1,000원| 조회(1,534)
    미리보기
  • [중국선교] 로버트 모리슨
    주님이 이끄는 삶을 산 로버트 모리슨역사교육과 2002104037 허은철야베스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자신에게 복에 복을 더하여 지경을 넓히고 주의 도우심으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역대상 4장 10절) 로버트 모리슨의 삶은 야베스의 기도를 연상하게 한다. 이처럼 로버트 모리슨은 1782년부터 1834년까지 52해를 살면서 주님이 이끄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로버트 모리슨은 중국이라고 하는 가장 어렵고도 힘든 곳을 땅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사명감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그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로버트 모리슨의 뒤를 이어 중국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중국은 세계에서 단순히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일 뿐만 아니라 미국에 견줄만한 강한 국력을 지닌 나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중국선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807년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광동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중국선교는 시작되었다. 비록 양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행한 일들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제2, 제3의 로버트 모리슨이 중국선교를 하는 데 있어서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로버트 모리슨은 1782년 1월 5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청빈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로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다.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생활은 로버트 모리슨이 주님이 이끄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비교적 가난한 가정환경이었으나 자상하신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러나 1802년 그는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러던 모리슨은 그의 인생에 가장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가장 긴 분량인 시편 119편을 하룻밤에 다 외울 만큼 총명한 로버트 모리슨은 실제로 그가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떠난다고 하자 주변의 많은 이들이 그를 말렸다. 대학강사라는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오직 주님의 사역을 위해 고난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한 것이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려움이 제일 많은 곳으로 그리고, 가장 축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친히 그가 가는 곳을 예비하셨다. 처음 그는 중국이 아닌 아프리카와 같은 오지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런던선교회와의 만남을 통해 중국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중국에 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한 어린 영혼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한다.런던선교회는 로버트 모리슨과 함께 동역을 할 선교사를 찾았다. 그러나 마땅한 선교사를 찾지 못하고 우선 모리슨 혼자 출발하기로 하고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다. 모리슨은 그 때 당시, 영국으로 유학 온 중국인 용삼덕과 서로의 어학교사가 되어 주기로 하고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서로 성격상 잘 맞지 않았던 둘은 종종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나 로버트 모리슨은 용삼덕의 화냄을 다 받아주고 참아냈다. 하나님께서는 용삼덕을 모리슨의 중국어 교사로 삼아 모리슨이 중국에서 받을 힘든 선교과정을 맛보게 하신 것 같다. 용삼덕을 통해 모리슨은 동양과 서양의 층돌을 미리 경험한 셈이다.이렇게 모리슨은 나이 23세 때, 런던 선교회에 중국선교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선교사 훈련의 과정을 거친다. 또한 현지적응과 선교를 위해 의학 및 천문학 지식까지 갖추게 되었다. 1807년 1월 8일에 목사가 된 직후에 미국 뉴욕을 향하는 레미탠스호에 몸을 실었다. 모리슨이 곧바로 중국으로 향하는 배를 타지 않고 미국으로 향하는 레미탠스호를 타게 된 이유는 당시 영국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동인도회사가 독점으로 관장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영업상의 이익보장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는 회사 배를 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동인도회사의 배를 타기에는 어려웠다. 미국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가기 위해 레미텐스호에 몸을 실은 것은 후에 그의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후원자인 미국 프로테스탄트들을 얻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비록 꼬박 110여 일을 거쳐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4월 20일 드디어 뉴욕항에 닿았지만 모리슨은 미국에서 큰 환대를 받고 중국으로 가는 데 있어서 큰 편의를 제공받게 된다. 미국까지 가는 길은 마치 중국에서 그가 받을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예견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가 레미탠스호의 힘든 항해를 마치고 뉴욕에서 뜻밖의 환대를 받은 것은 그가 주님의 사역을 마치고 주님께 돌아가는 날 그가 받을 상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1807년 9월 트라이던트호는 드디어 중국땅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러나 죽기로 각오하고 온 중국땅에 모리슨을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동인도 회사 마카오 주재 대표부의 차디차고 오만에 찬 태도만이 모리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인도 회사 소속 상인 이외에 그 누구도 마카오에서 머물 수 없다는 냉대와 기존의 마카오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로마 천주교 신부들의 견제로 인해 그는 마카오를 떠나, 광주에서 우선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놀랐던 것은 그곳에 체재하고 있던 유럽인이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즉, 로버트 모리슨이 중국에서 활동한 19세기초는 결코 외국인으로서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중국은 외국인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지적했듯이, 중국인보다는 오히려 같은 외국인이자 하나님을 믿는 형제라 할 수 있는 카톨릭교도들이 그의 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되었다.처음 그의 생활은 전적으로 런던선교회에서 주는 후원금에 의존하였다. 그것은 곧 그의 삶을 궁핍하게 하였고 중국선교라는 큰 목표를 이루는 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는 신분 보장과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동인도 회사의 직원이 되기로 결정한다.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는 그것이 중국선교라는 소명에 어긋나지 않을까 많은 고민을 하게 당시 하나님을 잃어 가고 있었던 동인도회사에 모리슨을 보내심으로써 동인도회사가 조금씩 변화되는 역사를 보이셨다. 모리슨은 단순히 런던선교회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무엇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인지를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노력하였다고 생각한다. 모리슨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을 진행하면서 기존의 관념에 얽매여 오히려 사명을 그르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교훈적으로 알게 해준다. 그는 동인도 회사에서의 업무 외에도 중국어를 배우면서 사전을 편찬하고, 비밀리에 성경을 번역하는 등 다양한 사역을 전개해 나갔다.모리슨은 마카오 주재 영국 상무의 일을 보는 모턴의 딸 메리와 결혼하면서 그 동안의 이국생활에서의 외로움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동역자로서 충분하였다. 이 부분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처럼 하나님께서 외로워하는 모리슨을 위해 메리를 보내주셨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첫 아들인 제임스가 죽고 아내가 병환에 시달리면서 모리슨 부부는 어려움에 처한다. 하지만 곧 딸 레베카와 후에 중국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동역자가 되어 줄 아들 존을 보내주셔서 모리슨 부부를 위로하신다.모리슨은 중국선교가 중국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카톨릭교에서의 견제로 인해 효과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음을 인식하고 런던선교회에 중국에서 벗어난 말라카에 선교지부를 세울 것을 제안한다. 또한 중국뿐만 아니라 인근 동남아시아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갠지스강 이동선교회 를 구상하고 실천에 옮기게 된다. 동남아시아의 민족에 대한 선교를 어떻게 추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라플즈 총독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으로 1834년까지 근무하면서, 1818년 말라카에 외국인에 의한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영화서원을 세우는 일을 해내기도 했으며 인쇄소를 설립하여 정기간행물을 발행하였다. 이러한 그의 선교활동은 중국선교를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틀을 만들었다는 데 큰 의의를 들 수 있다. 모리슨은 중국인들이 직접 성경을 볼 수 있도다하였고 이와 더불어 중영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모리슨은 중국에 있으면서 채아고라는 당시 27세의 청년에게 중국에서 최초의 세례를 중국인에게 주었다. 또한, 모리슨을 통해 양아발은 중국 프로테스탄트 역사상 최초의 중국인 목사가 되었다. 모리슨은 이 중국인 가정이 이 이교도의 땅에서 그들 주위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파의 수단이 되기를 기도했다.그러던 중, 메리가 콜레라에 걸려 고생하다가 1821년 사망하였다. 그리고 선교의 중심인 밀느가 36의 나이로 병사하자 중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기초 건설은 또 하나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주께서 오실 때까지 자신의 고유한 직무에 충성하고 싶다는 고백하게 된다. 즉,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리슨은 자신이 다해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이후에, 로버트 모리슨은 일시적으로 귀국한다. 영국으로 일시 귀국해 있는 동안에 모리슨은 환대를 받고 성경번역의 성과를 총회에 출석하여 당당히 최초의 중국어 성경을 공중 앞에 제출한다. 이뿐만 아니라, 영국과 유럽의 국민이 중국에 대한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우선 영국의 대학에 중국어 강좌가 개설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세계언어연구소이다. 모리슨은 1년간 그것을 감독 지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소에서 모리슨이 하는 역할이 너무 컸기 때문에 모리슨이 중국으로 출발한 직후인 1828년에 이 연구소는 해산되고 만다. 이와는 별도로 그의 동남아 선교의 기지인 싱가포르연구소가 해산되면서 그는 실망하게된다.그의 중국선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외롭지 않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많은 동역자를 보내주셨다. 모턴의 딸 메리를 통해 부부의 정을 느끼게 하셨고, 모리슨 부부가 고대하던 밀느 부처와 말라카로 협력 선교사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온 메드허스트 부처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리슨이 중국선교에 있어서 틀을 만드는 데 협력자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외에도 많은 동인도 회사의 고위직원과 관료들이 .
    인문/어학| 2004.05.16| 5페이지| 1,000원| 조회(412)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9
19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6
  • B괜찮아요
    11
  • C아쉬워요
    1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7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1:54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