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
검색어 입력폼
  • [양무운동, 메이지유신]양무와 메이지 비교 평가A좋아요
    1. 들어가며2. 양무운동(洋務運動)3. 명치유신(明治維新)4. 양무운동과 명치유신 비교5. 나오며1. 들어가며경제란 재화와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활동 및 그와 직접 관련되는 질서와 행위의 총체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생존자료(生存資料)인 재화가 필요한데 재화 중에는 공기처럼 인간의 욕망에 비해 무한정으로 존재하여 매매나 점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 자유재(自由財)도 있으나, 욕망에 비하여 그 양이 한정되어 있어 매매나 점유의 대상이 되는 경제재(經濟財)가 대부분인 것이 현실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따라서 그 양이 한정되어 있는 경제재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 건 어찌보면 불가항력일 수도 있다. 인류의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먹을거리가 전제되지 않은 전쟁은 거의 없었다. 쉽게 말해서 내 가족, 더 나아가 내 민족, 내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담보하기 위해, 내 국가가 배부르게 잘 살기 위해 남의 국가나 민족의 것을 빼앗는 것에서 모든 전쟁의 원인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 나라의 경제정책과 발달사는 그 연결고리가 매우 깊다고 하겠다.2. 양무운동(洋務運動)아편전쟁의 패배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청조는 태평천국운동을 비롯한 인민의 반항을 시작으로 하여 영·불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이 침략 당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 정부는 자기 목전 앞에 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안일하게 대처하는 둔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막상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어느 정도의 반성과 성찰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자강운동을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고 한다.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서구세력의 중국대륙 침입은 청조 정치세력들에게 위기감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청조정부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보다는 서구의 자본주의 군사와 공업기술을 받아들이면 이러한 위기는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양무운동은 경제적 개혁을 주목적으로 한 군수공업진흥과 인재양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게 된다.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인식과 개혁이 없는 단순한 무기개혁이 실효성을 거둘 리가 없었다.양무운동의 한계점을 몇 가지 살펴보면, 우선 양무운동은 근본적으로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인식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한계점을 가졌다. 두번째로 그 진행과정에서 청말기의 고질적인 관료의 부패무능(腐敗無能)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고, 세 번째로 양무운동을 총괄하는 관리들이 정부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데다가 정부 내에서도 극히 일부의 진보적 관료를 제외하면 여전히 보수적 관료가 독점하고 있었던 상황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군다나 19세기 후반의 청조정 및 중앙정부는 양무운동을 통일적인 계획하에 추진할 실력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양무파라 불리는 관료 내부의 대립과 경합 등은 양무운동이 뚜렷한 성과를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들었다.3. 명치유신(明治維新)명치유신에서 시작되는 일본의 근대 산업화과정은 아시아 세계에 있어서의 최초의 자본주의적 공업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동시에 동아시아규모에서의 제국-식민지 분화의 장기적 누적과정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아울러 명치유신은 위로부터'의 정치적 변혁이었으며, 그 후의 진행과정에 있어서도 국권을 위하여 대외침략을 감행하고 침략을 위하여 군비를 확충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 조세를 증징하고 민권을 억압하는 코스를 관철함으로써 非시민사회적 부국강병국가로서 근대 일본국가가 있을 수 있게 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그러나 일본이 아시아의 강국, 더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된 것 또한 명치유신을 통한 경제적 근대화 성공이다. 일본의 정치, 군사적인 부분은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더불어 성장할 수 있었고, 이는 강대국으로서의 일본이 나타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양이 되기도 하였다.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명치유신은 정부 유도 하에 추진되었다. 1853년에 페리(M.C.Perry)의 내항으로 시작되어 열리기 시작한 일본은 밖으로부터의 압력과 자생적으로는 발전할 수 없었던 보수적인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 주도 하의 '위로부터의 유도'가 없이는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이었다.따라서 정부는 근대화 공업정책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꾀했는데 이는 식산흥업정책으로 대변된다. 식산흥업정책의 핵심은 근대적 산업, 기술의 이식 육성에 있으며, 주요목표는 공업 및 광업 등의 주요산업부문에서 근대기업을 설립하고 새로운 기계 기술을 도입하면서 공업화를 추진하는데 있었다.4. 양무운동과 명치유신 비교양무운동과 명치유신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시작하여, 보다 발달된 서구의 것을 받아들이는 정책이었다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으나 그 밖에서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우선 성공 여부에서 큰 차이점을 보인다. 중국의 양무운동은 내부의 한계점에 부딪쳐 결국 지향했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나, 일본의 명치유신은 경제체제개혁의 성공을 이루었고 그를 기반으로하여 더불어 정치, 군사적인 성공도 끌어낼 수 있었다. 이는 1894년에 발발한 청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다.두번째로 개혁을 이끌고 있는 주동세력에서도 그 차이점이 나타난다. 중국의 양무운동 세력들은 정부 내에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데다가 주동세력 내부끼리 분권화되는 성향을 보여 힘있게 개혁을 끌어갈 수 없었다. 더군다나 양무운동 세력들은 전통적인 향신계층으로서 사회적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존 청조체제가 필요했었다. 따라서 그들의 개혁은 청조체제의 봉건적 보수적 성향에서 크게 벗어 날 수 없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청조정부는 근대화로 거듭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럴 능력도 없었다. 반대로 일본의 지도세력은 막부체제(幕府體制)의 사회적 의무와 상인들의 빚에 고통을 받고 있었기에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막부체제에 대해서 개혁하는 것에 크게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자연스럽게 反막부 운동으로 이어졌고, 끝내 기존의 막부체제를 타도하고 천왕중심의 개혁정치를 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세 번째로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여 수용하는 차원에서 차이가 있었다. 중국은 단순히 서양의 물질문명을 모방하는 단계에 그쳤지만, 일본은 서양의 사상, 제도, 기술 등 모든 것을 모방하는 동시에 이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융합시켰다. 이는 양국의 문화적 수용능력과 연관이 있는데, 중국은 큰 대륙을 바탕으로 중화사상(中華思想)이 강해서 외국의 문화나 사상보다는 자신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인식이 他 문화에 대한 배타의식과 함께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반면에 일본은 섬나라의 특수성에 의해서 자기 문화를 바탕으로 다른 문화를 수용, 발전시켜 자기 문화로 만들었다. 따라서 같은 서양 신식 문물의 유입이라도 받아들여지는 차원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인문/어학| 2003.05.04| 3페이지| 1,000원| 조회(979)
    미리보기
  • [영화] 느와르적 범죄영화 평가B괜찮아요
    1. 느와르적 범죄영화의 매력세계인에게 파멸과 죽음의 공포를 알려주고 찌푸둥하고 거무틱틱한 하늘을 시종일관 보여줬던 세계 2차 대전은 이 세계는 밝음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과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를 충분히 일깨워주고 종전됐다. 2차 대전 이후 사람들은 무엇이 善 이고 무엇이 惡 인지에 대해 재해석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가치관의대혼란이 도래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이전의 惡이라며 매장되고 도외시 되었던 개념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비난을 보내기 보다는 그 위험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다시보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느와르적 범죄영화는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환상적 낭만주의자와 이상적 계몽주의자들이 바라보는 현실은 리얼리즘에서 바라보는 현실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낭만주의자와 계몽주의자들은 현실이라는 실재를 너무 이상향과 끼워 맞추려 노력한 나머지 정작 그내들이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삶에 대한 바로 보기를 상대적으로 너무 도외시하는 愚를 범했다. 그러나 전쟁 후의 리얼리즘은 인간들에게 실재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시 바라볼 필요성을 던져 주었으며 삶의 또 다른 어둠이라는 이면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했다. 또한 어둠, 음지 속에서 살고 있는 삶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이러한 고민과 관심들은 관객들을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을 다룬 영화들 속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적법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자신이 누락되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다른 이면으로 이탈을 꿈꾸는 아이러니한 사고를 가진게 인간이라고 한다. 범죄 영화가 던져주는 이슈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어둠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내며 동시에 삶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이러한 매력들을 가지고 있기에 느와르적 범죄영화는 그 존재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2. 장르 분석갱스터 영화와 느와르 영화가 생성된 후 그 긴 세월동안 이 두 장르는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이들이 한 장르로 자리 잡는 데에 있어서는 그 생명력만큼이나 질긴 영화적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을 단순히 정형화된 분위기 정도로 한정한다면 그것은 부분적 이해에 그치는 것이다.갱스터 영화(Ganster Film)의 인물들의 태도는 상당히 탈도덕적이다. 갱스터 영화의 주인공들의 목표는 오직 부와 권력을 획득하는 것으로 한정되어진다. 그들은 그러한 체계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음모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들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주변의 분위기에 쉽사리 휩쓸릴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변 상황은 영화속 인물들을 파멸로 몰아간다. 정직, 충성, 애정, 예의로 표방되는 정의는 그들이 보기에는 한낱 가벼움에 지나지 않는다. 의리와 복수로 상징되어지는 폭력은 그렇게 포장되어 간다.느와르 영화(Film Noir)는 프랑스어로 검은 혹은 어두운 이라는 느와르 라는 말이 대변해 주듯 1940∼50년대 초반의 일련의 low key의 어두운 영화들을 말한다. 느와르 영화는 도시 이면의 범죄·폭력 조직을 배경으로 하여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을 시종일관 어둡게 드러낸다. 극중 등장하는 요부(femme fatale)는 흔희 다른 장르 영화의 여주인공과는 달리 교활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음모를 꾸미고 배신을 서슴치 않는 인물로 표현된다. 느와르 장르의 영화들은 일상에 내재된 공포를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느끼게 해준다.는 1953년도에 만들어진 자크 베케르 감독의 영화로서 프랑스 범죄 영화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막스라는 도시의 사기꾼이 크게 한건을 하고 은퇴를 결심했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요부의 꾀임에 빠져 안젤로라는 막스의 적수에게 인질로 붙잡히고 만다. 막스는 마지막으로 수입한 금괴를 그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내놓지만 결국 안젤로 일당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고, 막스는 안젤로 일당을 처치하는 것에는 성공하지만 그 대가로 친구 리통과 그가 훔친 금괴를 모두 잃는다. 결국 막스는 돈도 잃고 친구도 잃었지만 특이하게도 분위기상 그렇게 침울하지 않게 영화는 끝이 난다. 막스는 친구가 죽어가는 그 시각 친구 리통을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애인과 아침식사를 하며 그가 즐겨 듣던 음악을 들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이 영화 전반적인 스타일과 주제는 전통 프랑스식 범죄영화의 틀을 갖추고 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 인물들의 삶을 포장하지 않고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삶이 선인지 혹은 악인지에 대해서 명쾌한 구분을 내리는 것을 거부한다. 하나의 예로 마지막에 던져진 주인공의 현실이 관객들로 하여금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도 않게 만들고 그렇다고 해서 비극적으로 보이지도 않게 만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느와르적 범죄영화의 풍에 맞게 영화는 시종일관 어두운 범죄자의 삶을 화면 가득 담아 놓았고, 남자들 간의 의리로 대변되는 갱스터들의 우정과 배신, 사랑 등을 재즈 풍의 영화음악에 맞추어서 전해준다.
    예체능| 2002.12.19| 3페이지| 1,000원| 조회(685)
    미리보기
  • [고전] 관각문학 평가A좋아요
    목 차1. 관각문학의 정의2. 관각문학의 형성배경1) 조선초기의 역사적 사회현실2)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3) 사화(士禍)3. 관각문학과 관인문학의 명칭과 특징4. 관인문학의 소재5. 관인문학의 전성기1) 관인문학 전성기의 작품세계와 작가2) 중종 시절 이후의 관인문학의 동향6. 관인문학에 대한 선학들의 연구參考文獻1. 관각문학의 정의관각문학(館閣文學)은 조선시대 관각(館閣)에 종사하던 사람들의 문학을 말한다. 관각은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등 조정의 사명(詞命)을 제찬(制撰)하던 기관으로서, 중국은 일찍이 당·송(唐宋) 시대부터 일류 문사를 등용하여 문한지임(文翰之任)을 맡기고 제왕(帝王)의 측근에서 문학과 정치 양면의 구실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여기에 뽑힌 진신(搢紳)은 일대(一代)의 명예를 얻은 셈이었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문임(文任)을 중시하여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관(兩館)에서 문학을 맡는 것을 벼슬 중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기었다. 이들의 문학은 전아(典雅)한 수사(修辭)와 유장(悠長)한 절조(節操), 통창(通暢)한 서술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체를 관각체(館閣體)라 하여 위와 같은 특징을 나타낸 경향의 문학을 관각문학이라 한다. 이는 화려한 궁중(宮中)과 벌열층(閥閱層)의 생활을 배경으로 한 귀족문학인데 당(唐)·송(宋)의 고문(古文)을 존중하는 정통문학(正統文學)이며, 이른바 순정문학(醇正文學)이라 할 것이다. 권근(權近) ·서거정(徐居正) 등을 계승하여 조선 중기에 와서는 일대 장관을 이루었으니 상(象)·월(月)·계(谿)·택(澤)으로 일컬어지는 4대가(四大家), 곧 상촌(象村) 신흠(申欽),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계곡(谿谷) 장유(張維), 택당(澤堂) 이식(李植) 등이 저명하다.2. 관각문학의 형성배경2-1. 조선초기 역사적 사회현실조선왕조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사대부 신분인 사족(士族)과 향리 신분이 이족(吏族)을 엄격하게 갈라놓고서, 이족이 사족으로 성장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지배신분의 확대를 막았다. 사대부면서 변화가 나타났다. 1438년에 벌써 사장을 존중하자는 주장이 반영되어, 서거정(徐居正)이 나중에 자랑한 바와 같이, 시부(詩賦)를 힘써 익혀야 급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를 초시와 문과로 나누어 초시에서는 경학을 다루는 생원과(生員科)와 사장을 시험하는 진사과(進士科)를 두었고, 문과에서는 둘 다 요구하되 사장을 더욱 중요시했다. 이렇게 되자, 사림파는 차차 사장 위주의 과거를 비난하며 개혁을 부르짖게 되었고, 과거를 위한 공부를 떳떳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과거에서 요구하는 문장은 더욱 격식화되었다.사대부는 사(士)와 대부(大夫)를 합친 말이다. 물러나면 사이고 나아가면 대부이다. 사대부라면 누구나 사로서 능력을 기르고 대부가 되어 경륜을 펴고자 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말로 두 가지 일을 모두 힘써 해야 한다는 원리를 제시했다. 그런데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되면서, 대부 노릇을 대대로 할 수 있는 쪽과 사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쪽이 갈라졌다. 실제로는 둘 다 할 수 있어도 어느 쪽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사상과 문학의 노선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서거정은 대각(臺閣)의 문학, 초야(草野)의 문학, 선도(禪道)의 문학이 서로 다르다고 하면서, 훈신석보(勳臣碩輔)가 나라의 정치를 맡아서 치세지음(治世之音)을 들려주는 대각의 문학이야말로 자기 시대의 큰 성과라고 거듭 자랑하고, 초야의 문학은 불우한 사람의 빈 소리라고 했는데, 사림파가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2-3. 사화(士禍)사화는 조선시대에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을 통칭하는 말이다. 조선 개국 이래 역대의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儒學)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선비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세조∼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 ·사상 ·감정 ·정실(情實) ·향토(鄕土)관계 등으로 여러 파별(派別)이 생겼는데, 개중에는 기미가 상통하는 파도 있 사화이다.세 번째의 기묘사화(己卯士禍)도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이다. 훈구파의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훈에 비판적이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일으켜 심정(沈貞)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에게 타격을 가하려다 그들의 반격을 받아 패배한 사건이다. 조광조 ·김식(金湜)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구(金絿) ·김정(金淨)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죽거나 유배되었다.네 번째는 1545년(인종 1)의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것은 왕실의 외척인 윤임(尹任), 즉 대윤(大尹)과 같은 파평(坡平) 윤씨인 윤원형(尹元衡), 즉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다툼에 말려들어 많은 선비가 타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것도 갑자사화의 경우처럼 선비사회 사이의 싸움은 아니지만 많은 선비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사화라고 한다.4대 사화는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당쟁(黨爭)이 일어나기 전의 선비들에 대한 옥사였다. 그러나 사화는 소수인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파당을 가진 다수인의 공공연한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고, 한 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파가 또 생겨 그것이 또 다른 사화를 야기시켰다. 이러는 동안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지고,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고 당 ·서원 등을 세워 유생(儒生)들의 집합 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삼는 동시에, 그들 일족의 자녀교육을 하고 이를 통하여 동족적인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화에 의하여 육성된 정치비판과 반대파에 대한 복수관념은, 서원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당쟁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뜻있는 선비들의 향토 복귀와 교육 실시는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공리적 ·세속적인 관학(官學)에 대하여 수양과 사색을 주로 하는 진리탐구의 참다운 학문을 하겠다는 사조와 경향을 낳게 하고, 이로 인하여 사내용의 도덕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대체로 보아 변함없는 일이었다.4. 관인문학의 소재시대에 따라 문제의 소재는 변화해 왔으나 관각문인들이 일상적으로 대면했던 당대의 현실적인 景物은 향토와 왕도,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 그리고 국가의 질서에 봉사하고 있는 전원의 풍경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경물은 모두 당대의 주변의 자연, 이른바 산수시(山水詩)의 영역에 속하는 성질의 경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 관각문인들은 국가의 공식적인 문장을 짓는 여가에 자기의 문학세계를 주변의 산수자연에서 찾아 개인적 서정을 토로하는 작품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산수자연은 관각문인들이 국가의 공식적인 문장을 지으면서 국가의 기맥을 드러낼 수 있는 소재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서정을 표현하는 문학적 소재의 원천이기도 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산수자연에 대한 관각문인들의 태도를 밝히는 것은 산수자연을 통한 國家氣脈의 구현을 목적으로 삼았던 관각문인들의 미적 태도의 근원을 밝히는 작업이라고 여겨진다.아름다운 산수자연에도 국가의 기맥은 두루 퍼져 있다고 하면, 아름다운 산수자연을 마음껏 누리는 것은 곧 국가의 바야흐로 흥성해가는 기운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의 산수에 대한 취미는 다름아닌 흥성하는 국운을 미적으로 인식한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현실과 산수자연고의 거리는 엄존하고 있었으므로 아름다운 산수시가 창작된다는 것이 개인적인 전망이면서 동시에 국가적인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거리가 아닐 수 없다.5. 관인문학의 전성기조선 전기 관인문학의 전성기는 성종 때이고, 그 주역은 서거정(1420∼1488)이다. 서거정은 집현전 출신이고, 성삼문보다는 불과 두 살 아래였지만, 왕조의 사업이 최고조에 이른 성종 때 주로 활동하면서 무려 23년 동안이나 대제학 노릇을 했다. 자기의 위치와 사명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흔들릴 수 없는 문학적 규범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 점에서 고려 전승소(李承召, 1422∼1484)이승소는 문장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 능한 사람이었는데 서거정 때문에 가리어진 것이 애석하다는 평을 듣는다. 집현전 출신으로 성종 때에 활약하면서, 신숙주, 강희맹과 함께 편찬한 를 올리는 글을 썼는데, 거기서 "문물이 찬란하고 예악이 갖추어지면 천지가 도와주어 백성이 감화하며, 신과 사람이 화합하고 위와 아래가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그렇다고 생각한 시절에 필요한 사업을 하는 데 능력을 발휘했다.강희맹(姜希孟, 1424∼1483)강희맹은 활동적인 사업가도 아니고 안온한 기질을 가진 문인이다. 서거정만한 포부를 내세우지도 않았고, 이승소처럼 자기 시대를 의식하지도 않았다. 이름난 화가인 형 강희안과 함게 화초나 기르고 완성하는 생활을 취미로 삼았던 것처럼 보인다. (養花小錄)을 지어서 화초 가꾸는 기술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올려놓고자 했다.성간(成侃, 1427∼1456)성간은 성임(成任)의 아우이고, 성현(成俔)의 형이다. 문벌을 자랑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재능을 보였다. 14세에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해서 집현전에 들어가 문명을 떨쳤는데, 30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책을 너무 탐독하다가 건강을 해쳐 명을 재촉했다고들 하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다. 용모가 추하고, 성격이 괴팍해 웃음거리였다고 하며, 훈구파의 폐쇄적인 의식에 불만을 품은 기질 때문에도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성현(成俔, 1439∼1504)성현은 서거정에 이르러서 확립된 보수적인 문학관을 이으면서 성간의 반발에 대해서도 공감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현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에는 집현전이 없어지고 홍문관이 그 뒤를 이었는데, 홍문관은 연구기관이 아니고 이미 익힌 글재주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동안에 집권세력은 진취적인 기상을 더욱 상실하고 부귀를 자랑하는데 집착했고, 재야 중소지주 세력인 사림파의 도전이 더욱 심각해졌으며, 문학을 두고서도 논란이 치열해졌다. 성현은 이런 시기에 훈구파의 통치질서를 옹호하는 데 적극 가담해 사자다.
    인문/어학| 2002.10.28| 12페이지| 1,000원| 조회(639)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7
7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2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5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7일 수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3:27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