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 評〉『만들어진 고대』,『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1. 들 어 가 며『만들어진 고대』의 저자는 책의 어느 곳에서도 제목에서처럼 고대가 만들어졌다고 쓰고 있지는 않지만 동아시아의 역사란 특히 동아시아의 고대사란 만들어진 것이라는 저자의 견해는 누구나 실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는 우리 역사인식의 변천과정 중 근대 이후를 살펴볼 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 책은 처음부터 일본의 기원절(태양력 2월11일)과 단군릉의 논쟁과 언론보도를 통해 보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우리가 아는, 또는 읽는 고대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고대일까. 재일 한국인 2세인 이성시 와세다대 교수의 『만들어진 고대』는 일본을 비롯해 한국, 북한, 중국 등에서 근대 라는 의식이 둔갑시켜버린 고대사의 본질을 파헤치는 도전적인 사론집이다.{) 한겨레신문 2001년 10월 26일자 기사노태돈의 『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은 미완결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지만 한국사에서 고대사의 쟁점들을 쉽게 정리해놓고 있다. 역사해석에 있어서의 쟁점이란 결국 역사인식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성시의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부분과도 맞닿은 부분이 발견된다. 개인적으로 학기말 과제의 주제로 잡은 고조선의 중심지 比定과 관련해 잘 정리해 놓고 있어 반가운 맘이 앞선다.여기서는 근대국민국가의 동아시아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기본적인 역사인식의 문제에 기반하고 있는 이성시의 글을 바탕으로 노태돈의 한국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한국인의 역사인식이라는 수업의 주제에 벗어나지 않도록 근대일본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특별히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극명한 역사인식의 문제를 보여주는 보론의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은 뒤에 다루기로 하겠다.2. 근대 국민국가의 동아시아 이야기이번 달 말에 열리는 역사학대회의 공통주제가 역사 속의 타자읽기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타자의 존재가 주는 중요성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무게를 타자는 대립항이자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는 서양의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이루어져왔다. 구미열강들은 아시아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들을 결정짓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인식은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아시아국가들의 오리엔탈리즘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는 기존의 아시아사를 부정하거나 미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본의 경우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근대일본 최초의 역사교과서인 『국사안』의 원형이랄 수 있는 『日本史略』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사무국 요청으로 편찬되었다. 또한 최초의 활자화된 미술사 『고본 일본제국 미술약사』 역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이 겨냥한 독자는 서양인 이었다. 일본은 이렇게 서양이라는 대립항을 통해서 일본사, 일본문화를 고안했던 것이다. 전통음악극인 노 도 완전히 잊혀졌다가 유럽 왕실의 오페라를 보고 온 이와쿠라 사절단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것임을 이 책에서는 밝히고 있다.{) 메이지유신과 서양문물의 흡수를 정당화하는데 활용된 고대의 견당사·견수사 역시 이와쿠라 사절단에 의해 발견된 것에 불과하다.일본의 근대사는 타자인 서양을 철저히 모방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역사연구는 이러한 목적에 크게 기여하였다.한국의 역사연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일제시기 식민사관과 근대적 연구방법을 통한 일본의 연구를 받아들이거나 저항하며 형성된 한국사 연구는 해방 뒤에는 식민사관을 반박하며 한민족의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성시는 광개토왕비문, 발해사, 동아시아 문화권 연구에 관한 각각의 논쟁적인 논문들을 통해 이런 전제가 근대적 상상의 소산 임을 밝히고 있다.{) 각기 다른 시기에 쓰여진 글이어서인지 일부분 겹치는 내용이나 서술이 발견되기도 한다.고구려 멸망 후 1200여 년 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광개토왕비가 19세기말 발견되자마자 대단한 반응을 이와 현실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광개토왕비문에서 논쟁이 되어온 것은 본론 제 1에 광개토왕의 무훈을 기록한 8년 8조 중의 32글자이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1880년 광개토왕비가 발견되고 4년 후 해독작업이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이루어졌고, 일본측에선 이 것이야말로 야마토정권의 반도남부를 예속시킨 자명한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백잔 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 00,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였다.이러한 견해가 일본에선 상식처럼 받아들여졌지만, 당사자인 남북한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일본측 주장에 정인보가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한 후 그의 견해를 계승, 변형시켜 왜가 아닌 고구려의 우위를 강조하는 해석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일제의 육군 참모부에 의한 조작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무훈기사 특히 위의 32글자를 둘러싸고 일본과 남북한학계는 첨예한 대립점을 나타낸다. 倭의 활동을 과대평가하는 일본측과 이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려는 남북한측의 태도 모두 문제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비문의 실제와는 별개로 근대국민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의 틀로 광개토왕비문에 접근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성시는 광개토왕비문이라는 텍스트를 현대의 텍스트로서가 아니라 과거의 텍스트로 다시 읽을 것을 제안한다. 과거 낯설게 하기의 방식을 통해 광개토왕비 全文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문제시되는 32자를 그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고 있다. 이는 분명 현재의 잣대만을 고집하는 양태에 대한 신선한 비판이자 유용한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자칫 이도 저도 아닌 중도주의에 그칠 염려도 없지 않다. 야마토정권의 반도경략은 단순하게 비문의 내용만으로 결정될 일이 아니라, 그 시기 일본의 역사발전 단계나 문화적 수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이성시는 자신의 글에서 동아시아 3국이 고대를 해석하는데 있어 근대적 개념인 민족을 誤用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지적해사 관련 논쟁은 이러한 이념논쟁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노태돈 역시 『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 제 1부에서 한국민족 형성에 대해 논하면서 혈연공동체로서의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혈연의식은 민족을 구성하는 긴요한 요소인데 이러한 혈연의식은 실제적 혈연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제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역사적 산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혈연의식이 상고시대에까지 소급되어 고대사에 투영되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근대에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노태돈은 근대 이후에나 성립하는 민족의 개념에 대해 회의를 제기한다. 그는 민족을 구별하고자 할 때 한 족속 내에서 구성원간의 관계의 질적 변화의 측면과 타족속과 구분되는 면 중 후자의 기준을 민족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보아 전근대시기의 족속을 대상으로도 민족의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렇듯 민족의 개념을 규정하는 데 있어 차이를 보이는 양자는 고대사에 이를 적용하는데 당연하지만 차이가 나타난다. 『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와 『만들어진 고대』 두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차이는 발해사에 관련해서이다.이성시는 근래의 발해사 연구의 성과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왔고, 이것이 각 민족, 국가의 연구자들마다 뚜렷한 문제의식을 가진 채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밝힌 뒤 이를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 주가 되는 것이 남북한의 남북국시대론 이다.{) 후자의 민족 개념이 삼국시대 말, 통일신라기에 형성되기 시작되었다고 본 노태돈은 발해사를 한민족의 개념과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보는 듯 하다.박시형의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1962)는 북한학계의 발해사 연구에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고조선-삼국-통일신라-고려 로 정리되던 한국사체계에 발해사를 포함시킴으로써 단순히 발해사를 한국사로 발굴해냈다는 것만 아니라 한국사체계 자체를 개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를 위해 북한학계는 기존까지 고수하던 스탈린의 민족이론을 버리고 한민지지하는 세력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노태돈 역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보고 이를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데 동의한다. 발해의 건국자로 알려진 대조영의 출생과 대조영 집단의 성격을 추적하고 있는 글에서 그는 대조영과 그 집단을 고구려에서 세력다툼으로 갈라진 고려별종 으로 보았다.{) 대조영의 출생에 대해 『구당서』(고려별종)와 『신당서』(고구려화한 말갈계 주민)에서 각기 다른 서술을 보이고 있어 연구자들에게 논란이 되어왔다. 중국학계에서는 신당서를 인용해 발해를 말갈족에 의한 중국변방의 지방정권 정도로 자리매김한다.발해의 건국과 대조영에 관해서는 중국사서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와 같은 우리측 사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노태돈은 대조영의 출생에 대해서 그가 고구려인인가 말갈인인가를 따지기보다는 종합적인 견지에서 그 사회문화적 기원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발해인의 정체성을 살펴보았다. 발해인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문화적 유사성을 일본과 중국에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증명하고자 했다. 또한 발해 멸망 후 고려인구의 5%에 해당하는 발해유민이 고려로 들어왔음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여러 정황을 통해 노태돈은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화된 말갈족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국가로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시기를 남북국시대로 불러야 하는가는 미결의 문제로 남겨두고 있다.노태돈의 견해는 한국의 발해사 연구 경향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성시는 여기에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다.발해사 연구에 관해서 국가간 상이한 견해차를 보임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구체적으로 중국은 발해를 중국의 소수민족인 말갈족에 의한 일시적인 지방정권으로 간주할 뿐 독립적인 왕조국가로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중국의 상황-10%의 소수민족이 60%의 국토를 점유하고 있는-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발해를 말갈족만의 고유한 독립국가로 위치 지우는 구소련의 연구 역시 당대의 현실정치상황에 기인하고 있다. 이성시는 남다.
19世紀末 淸商의 朝鮮進出과 反淸意識의 推移目 次Ⅰ. 序 言Ⅱ. 19世紀末 淸商의 經濟浸透1. 19世紀末 淸의 對朝鮮政策2. 漢城開棧과 潛商의 盛行Ⅲ. 反淸意識의 推移1. 大院君 拉致事件2. 同盟撤市鬪爭3. 淸商의 浸透에 따른 反撥Ⅳ. 結 語Ⅰ. 序 言개화기는 조선사회에 있어 격동의 시기였다. 江華島條約으로 문호를 개방한 뒤 계속되는 日本과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은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고 自主近代國家로 서려고 하는 조선에 굴레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경제면에서 외국상인의 침투와 각종 경제이권의 상실은 民草들의 삶과 직결된 것이었다. 19세기말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당시 서구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청나라였다. 淸은 자국이 받은 경제적 압박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면서 조선의 植民地化를 시도하였다.개항 이후 淸日兩商의 朝鮮浸透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어왔다. 다수의 연구가 개화기 일본의 경제침탈을 植民地期까지 연결시키거나 그 폭압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청상의 조선진출에 대한 연구는 淸日戰爭 이후 淸勢가 일소된 점을 들어 상대적으로 도외시되거나 청의 對朝鮮政策에 집중되어왔던 게 사실이다. 수치상으로 보면 일본이 교역량이나 거류민의 수에서 청인을 능가하였다. 그러나 日商이 조선의 곡물을 매입하는데 주력한 需用者의 입장이었다면, 淸商의 경우는 洋貨나 日貨까지 중개무역을 통해 조선인에게 팔아 이익을 남기는 供給者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수치상의 우열만으로 그 세력을 평가하기는 곤란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일부지역에서는 수치상으로도 청상이 일상을 앞서고 있어 청일전쟁으로 청이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할 때까지 이들이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청상의 활동에 대한 조선민들의 대응은 和應과 反撥의 상반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일부 무뢰배들은 약간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청상과 결탁했지만 대부분은 점차 가중되는 청상의 압력을 體感하게 되면서, 청인들의 빈번한 횡포에 맞선 구타, 살상, 방화 사례가 증가하였다.여기서는 壬午軍亂 이후 청일전쟁으로 청세가 일으로 청의 대조선정책이 적극성을 띠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에 대한 청정부의 입장이 바뀐 데에는 계속되는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이 주요했다. 東三省의 屛蔽 로 인식하던 조선의 안위를 위해 개항초기 聯美論 을 제기{) 구선희, 위의 책, pp.32~33했던 청은 임오군란의 진정과정에서 조선내 힘의 우위를 확보함에 따라 그 동안 일본에게 내주었던 주도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1882년의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은 조청관계가 조공관계의 틀을 벗어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1년 전부터 무역장정의 체결을 준비해온 청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더욱 강화된 입지에서 수월하게 요구할 수 있었다. 조선정부도 이의 체결에 대체적으로 동의했던 것 같다. 高宗이 무역장정 체결의 소임을 맡은 魚允中에게 당부한 것은 기존의 朝淸關係를 벗어난 성질의 것이었다. 또한 對日·對洋통상의 견제책으로써 청과의 통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의도와는 달리 청과의 통상관계를 맺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내용은 철처히 불평등하였고{) 구선희, 위의 책, pp.59~64前文의 屬邦條款은 대청교섭에서의 무력함을 여실히 보여준 결과였다.{) 무역장정의 체결을 맡았던 어윤중과 朝美修好通商條約에 屬邦條款을 넣는데 찬동한 김윤식은 속방조관을 통해 조선이 청의 보호 하에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고려했던 듯하다. 그러나 이는 청의 의도를 파 악하지 못한 채 표면적인 이해관계에 집착한 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가 중국의 屬邦이라는 것은 천하 가 다 아는 바이다. 항상 중국이 착실하게 담당할 뜻이 없으면 孤弱之勢가 될 것 같고, 大邦의 보호함이 없으면 실로 特立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했다...다른 나라가 중국이 우리 나라를 擔任한 것을 보면 각국이 우리를 경시하 는 마음도 또한 따라서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 그 아래에 自主한다는(구절)까지 넣게 되면 각국과 서로 교통하는 데 無害하고 평등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하여 失權할 염려도 없고 事大하는 데에도 어긋나지 않으니 양득이 된다고 할 당하는 직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종주국 청의 대표로 조선의 일체 정령을 감독하는 임무를 띠고 부임한 셈이었다. 袁世凱는 조선의 내정·외교의 감독뿐만 아니라 청상의 보호 및 세력확대까지 담당하였다. 조선에 대한 壓迫은 곧 淸國의 이익이라는 관점 하에서 袁世凱의 일련의 행위는 청정부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兵船章程의 강요, 對朝鮮 차관제공 건의, 朝俄密約說에 대한 강경한 대응{) 원세개는 2차 조아밀약설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폐위시킬 것을 이홍장에게 건의하였다.은 원세개의 대조선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袁世凱는 조선정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親淸人士들의 포섭에도 힘을 썼다.{) 실제로 갑신정변 직후 중앙요직은 김윤식, 어윤중 등 친청세력이 장악하고, 민씨일족으로는 민영익과 閔種默에 불과하였다.金允植을 높이 사 그의 중용을 고종에게 건의했지만 고종의 견제로 오래 있지 못하자 민씨일족 중 유력자를 찾기 시작했다. 친청인사들을 통해 원세개는 조선의 정치·외교에 보다 효과적으로 간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심해지는 원세개의 내정간섭은 고종 및 지도층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청으로부터의 종속을 탈피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2. 漢城開棧과 潛商의 盛行1882년 무역장정 체결로 漢城開棧이 허용되었다. 무역장정에서 청은 독점특권을 주장하였으나 일본을 위시한 각국은 最惠國待遇를 들어 이의 均霑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서울일대에 외국인 거류지가 확대되었다. 그 수나 규모를 보면 서구의 諸國이 청일 양국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三開港에서 일본이 청의 세력에 대해 항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데 반해, 서울의 경우 청상이 일상을 압도하고 있었다.일본 거류민은 제물포조약으로 일본군대의 주둔이 허용되면서 급격히 增加한 것으로 보인다.{) 韓 劤,『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 일조각, 1970. p.53.그러나 일본인이 점거하고 있던 진고개(泥峴)일대는 僻地와도 같아 상업의 번영을 꾀할 곳이 못되었다.{)「東洋風土, 朝鮮의 商業」『日淸戰爭實記』48(한우근, 앞의 글에서 않았다.{) 조선정부의 요청과 일본의 항의가 계속되자 원세개는 1889년 6월 28일(陽曆) 청인의 잠상을 금한다는 뜻을 밝혔 다. 그러나 위의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잠상의 폐단은 그치지 않았다.서해연안 및 대동강 일대의 잠상은 밀무역의 폐해만이 아니라 청인들에 의한 掠奪과 騷亂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大同船穀의 약탈{)『日省錄』高宗 18年 8月 8日, 朝鮮商船에 대한 해적질{)『統理機務衙門日記』, 高宗 22年 11月 22日, 23年 8月 21·23日과 淸船員이 하선하여 소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關海伯本月初四日長淵民徐丙朝呈稟於中國陳總辦云九尾箭浦口有中國船數隻下陸滋擾伐人之木,奸人之婦不勝駭然 『統理機務衙門日記』, 高宗 22年 8月 7日무역장정 체결 이후 적극성을 띤 청상의 조선진출은 점차 일상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일상의 주요활동 무대였던 부산항에 비해 인천이나 원산항에서 청상의 성장이 두드러지는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부산의 경우 개항이전 이미 對日本 교류의 중심지인데다 개항 후 租界地 설정과 이주민의 급증으로 외국인의 눈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보일 지경이었다.{) 英國領事館員이었던 T. Watters는 1887년 당시의 부산 居留 日本人數를 약 2千名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부산이 일본의 식민지처럼 비친다고 하였다. B.C.R. : Miscellaneous Series, No.84, Report of a Visit to Pusan and Yoensan, March, 1888, by T. Watters(韓 劤,『開港期 商業構造의 變遷』(1970)에서 재인용)인천, 원산의 경우 역시 居留民數에서는 청인이 일본인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1890년대에 들면 그 세력이 일상을 압박할 정도였다.{) 원산의 경우 청상의 수가 六家에 불과하나 전체 輸出入額 160餘萬元 중 79萬元을 차지하였다. 『統理機務衙門日 記』, 高宗 28年 4月 13日청상의 조선진출이 가속화되면서 對淸貿易의 규모도 對日貿易의 규모에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이밖에 전번에 난을 일으킨 무리들이 혹시 다시 음모를 꾸민다면 지금 대군이 바다와 육로로 일제히 진출한 것이 벌써 20개 영이나 되는 만큼 너희들은 禍와 福을 깊이 생각하고 진작 해산할 것이며, 그릇된 악감을 고집하여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지 말 것이다.아, 대국과 너희 조선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므로 情誼가 한 집안과 같다. 본 제독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와서 황제의 지극히 어진 마음을 재현하는 것이 부대의 규율로 되었으니 이것을 믿을 것이다. 특별히 절절하게 타이른다.{)『高宗實錄』, 高宗19年 7月 13日효유문에서 군란의 배후를 추궁하기 위해 대원군이 잠시 황제에게 갔다고 발표하고, 大院君의 天津行 에 대한 民人의 騷擾 를 엄금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소환이 정상적인 통로를 거쳤다면 효유문 자체가 불필요했을 것이다. 『高宗實錄』에서도 대원군의 被拉을 大院君行次天津 이라 쓰고 있지만 사실상 청군에 의한 강제 납치로 조선정계에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始覺大院君被執西行皆驚惑 ,『從政年表』, 高宗19年 10月 14日대원군의 납치는 대원군에게 희망을 걸고 있던 민중들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했다. 대원군이 추진한 민심수습책이 과도한 徵稅와 부역 및 주관 없는 개화정책의 추진이 빚은 폐단을 바로잡는 양상을 띠었기 때문에 대원군의 납치는 곧 이의 좌절을 의미했다. 民들은 또다시 外勢와 姦臣의 수탈대상으로 전락하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는 위기의식 속에 크게 동요하였다. 대원군에 대한 민간의 애착이 어떠했는지는 그가 귀국한 후 그를 보기 위해 校洞과 齋洞 사이가 열흘 동안 사람들로 붐볐다고 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梅泉野錄』1, 대원군의 귀국曉諭文의 처음에 조선을 중국의 속국이라 명시한 것은 1개월 후 체결된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前文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전통적 朝貢關係下의 朝淸關係를 재확인한다기 보다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이러한 의도는 청측이 이미 소요가 가라앉은 상황임에도 군대를 파견해 대원군의
개화기 조선의 對동아시아관Ⅰ. 序 言韓·中·日 삼국은 장구한 시간을 인접국으로서 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 변화를 계속해왔다.사실상 중국이 동아시아의 종주국으로서 그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었고, 일본은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다소 중국의 영향력이 약한 채 역사적 발전을 이뤄왔다. 반면 한반도는 일본과는 달리 중국과 접해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고대부터 잦은 충돌과 교류가 있어왔고 중국이 통일왕조를 이루며 그 세력을 넓혀감에 점차 그 영향권에 흡수되고 말았다.중국의 朝貢國으로서 조선은 명목상 중국 천자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례적인 것이었고 사실상 외교나 내정에 중국이 개입, 간섭하지 않았고 조선이 자주적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동아시아가 명목상이나마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체제였다는 점에서 조선과 중국의 그리고 일본의 연결성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서구세력의 침입과 그에 따른 삼국 저마다의 상이한 대응과정에서 변화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여기서는 개항기에서 한일합방까지의 기간을 통해 나타나는 조선의 對동아시아관을 諸세력의 특징을 통해 기술하도록 하겠다.Ⅱ. 조선의 對동아시아관(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변화를 중심으로)1. 甲申政變 주도세력의 對동아시아관1884년 12월 郵政局 개국식을 기회로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봉건적 조선사회를 근대적 국가로 변혁시키고자하는 일단의 노력이었다. 비록 3일 천하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 기간 중 공포한 革新政綱의 내용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이들이 추구했던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여기서는 갑신정변의 근대적 성격이나 그에 따른 파장을 보고자 하는 게 아니고 그 속에서 대청·일관을 보기로 하겠다.갑신정변에 대해 일본의 지원에 의존한 대외의존적 개혁이었다는 평가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김옥균 등 개화당의 역할과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경우이다. 실제로 갑신정변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개.) 윤응렬의 신식군대 470명, 박영효가 광주에서 육성한 신식군 500 그리고 忠義契 인사, 김옥균 등이 일본 사관하교에 유학시킨 14명의 사관생도들이 그 군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일본의 군사적 지원은 공사관 호위병 150에 불과했다.혁신정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청에 대한 조공국으로서의 의례를 폐지하고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밝히려 한 점이다. 혁신정강은 14개 조항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정강에서는 임오군란시 청군에게 납치되어간 대원군의 還國을 요구하면서 청에 대한 사대를 청산코자 하고 있다.) "大院君不日陪還事朝貢虛禮議行廢止", 「革新政綱」『金玉均全集』, 서울아세아문화사, 1979, p.95~96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당 세력이 이처럼 반청적 의지를 드러낸 데에는 임오군란의 진압과정에서 청국이 보여준 강압적 태도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1882년 임오군란으로, 퇴각했던 대원군이 민비일파를 대신에 집권하자 청은 3000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였다. 이과정에서 대원군이 청국 군함에 초대된 채로 납치, 保定府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자행되었다. 조선에는 陳樹棠과 뮐렌도르프가 각각 재정고문, 해관고문으로 조선의 내정에 관여하였고 외교문제에까지 간섭하려 들었다. 또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개화운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이라 보고, 온갖 방법으로 개화당을 탄압하고 개화운동을 저지하였다.) 신용하, 『甲午改革과 獨立協會運動의 사회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p.265임오군란에 대한 청국의 개입으로 드러난 가장 두드러진 결과물은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이었다. 그 前文에 조선을 청국의 '屬邦'이라 써넣었다. 또한 장정의 내용 또한 중국이 서구 열강들에게 당했던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해 놓은 것으로 조선에 대한 수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金基赫은 '事大以禮 字小以德'이라고 하는 중·한 종속관계의 유교적·도덕적 정신과 기반은 파괴되고 청·한 양국간의 조공제도는 그 껍질만 남게주시하고 있다. 「開港을 둘러싼 國際政治」p.34이러한 상황에서 점진적 개화를 통해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던 개화당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에게 있어 청(중국)이란 청산해야할 봉건적 잔재의 산물이었고, 조선을 수탈하려는 제국주의의 다른 형태일 뿐이었다.2. 甲午農民戰爭의 對日·中의 성격1894년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발전한 갑오농민전쟁은 그 성격규정에 대한 논란도 많지만, 여기서는 농민전쟁을 주도했던 지도층과 농민들이 일본과 중국(청)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1894년 5월 31일 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점령되자, 고종은 청국에 군대파병을 요청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청군과 일본이 인천과 아산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외세의 간섭을 우려한 농민군 지도부와 정부간의 타협이 이루어진 후였다. 조선정부의 철병요구에 응하지 않은 일본은 일본군 1개 대대를 서울에 진입하도록 하여 친일정권인 개화정권을 세웠다.농민군의 1차 봉기에서는 특별한 외세에 대한 농민군의 입장이 드러나지 않는다. 봉기의 목적으로 대원군의 재집권과 간신배들의 처벌을 주장했을 뿐 '逐滅倭夷') 『大韓季年史』, 『東學史』에서는 1차 봉기시 내세운 4대 강령의 하나로 외세의 배척을 적고 있으나 박찬승은 2차 사료로서의 성격상 이를 믿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와 같은 과격한 표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공연히 일본이나 청국을 자극하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계산에서였을 것이다.) 박찬승, 「1894년 농민전쟁의 주체와 농민군의 지향」, 『1894년 농민전쟁연구5』, 역사비평사, 1997, p.145그러나 결국 청·일 양군은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철병하지 않고 버티었고, 일본군은 7월 23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8월 1일 청군에 대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전쟁을 시작했다.그리고 9월 농민군은 2차 봉기를 일으켰다. 내정개혁에 국한되었던 1차 봉기와는 달리 2차 봉기는 반외세의 기치를 명확히 이 분개하여 일본인과 접전하고자 했다고 하고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전봉준 공초」『東學亂記錄 下』, 1959, 『자료 한국근현대사입문』(이종범, 최원규編, 1998)에서 재인용6월 일본군의 경성 침입을 보며 일본의 의도를 가늠하였지만 적의 힘이 강성함을 알고있었기에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방금 外寇가 대궐을 범하고 君父가 욕을 입었으니, 우리는 마땅히 나아가 의로써 죽어야 할 것이지만, 저 오랑캐들이 지금 淸兵과 교적하고 있는데 그 예봉이 심히 날카로우니...(중략)...시세를 살핀 연후에 기세를 돋우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만전의 방책이 될 것이다." 「수록」『사료대계5』, p.278~279그러나 이미 일본을 조선을 병탄하려는 寇賊으로 판단하고 그에 맞설 대응을 준비하고 있었다.청에 대해서는 일본보다는 다소 온건한 입장을 보인다. 전봉준 공초에서 보이듯이 청은 지금까지 조선이 공물을 바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 우리나라를 병탄하려고까지는 하지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동경조일신문』1895년 3월 6일(1988『사회와 사상』, p.262)한 발 더 나아가 일본군을 막는데 청군과 연합하고자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이지, 일반 농민들은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통한 중국상인들의 횡포에 대해 일본상인들에게처럼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3. 衛正斥邪세력의 對日인식서구의 동아시아 침탈이 계속되고 이에 한 발 앞서 체제개혁에 성공한 일본이 그 무리에 합류해 조선의 문을 두드림에 개화파는 나라의 문을 열어 그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개항에 대해 반대했던 무리들 또한 많았다. 이들이 소위 위정척사파라 불리우는 세력이다.위정척사에는 최익현을 비롯한 성균관 유생들이 앞장섰고, 지방 유생들도 대거 상경하여 반대하였다.최익현은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疎)') 1876. 1. 23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엎드려 조일수호조규의 체결교섭을 반대하며 올린 글이다.에서 일본과 수교할 경우의 애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洋賊)이옵니다." 『근현대한국탐사』中 '持斧伏闕斥和議疎'"倭와 洋 두 추물들이 마음과 몸을 같이하여....", 같은 책또한 병자호란시 강화와 비교하면서 만주족인 청은 중국의 우두머리 노릇을 능히 하면서 仁義의 이름을 흉내낸 夷狄에 그칠 뿐이지만, 왜인들은 한갓 재화와 色만 알고 조금도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禽獸들 뿐이라고 하고 있다.최익현은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을 인식함에 있어 이는 이웃나라와 강화하는 것이 아닌 도적과 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그러나 최익현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끼를 들고 왕의 길에 엎드렸다하여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였다.개항 후에도 이질적인 문물의 수용에 대해서는 유생층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金弘集이 일본 수신사로 다녀오면서 가져온 『私擬朝鮮策略』의 배포에 대한 반발이었다. 조선책략에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親中國·結日本·聯美國'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전국의 유생들이 반대상소를 올렸는데, 여기서는 1881년 2월 26일 李晩孫을 대표로 한 영남지역 유생들이 올린 '嶺南萬人疎) 日本外務省 편, 『日本外交文書』제 14권 p.371~375'를 보기로 한다.만인소에서는 조선책략의 利害를 여러 가지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그 첫째로 든 것이 중국과의 사대에서 일본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무릇 중국은 우리가 신하로 섬기는 나라입니다. 해마다 요동을 거쳐 북경까지...(중략)...일본 천황이 朕이니 하는 존칭을 써서 보내온 국서를 우리가 하루아침에 안이하게 받아들여 그 사신을 가까이 하고 그 글을 보관할 경우, 중국이 이를 짚어서 문책해온다면...", 같은 책최익현으로 대표되는 위정척사파들에게 있어 청국은 200년 동안이나 섬겨온 종주국이었고, 일본(개화하여 조선의 개항을 강제한 일본)은 이미 이웃나라가 아닌 서양 오랑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과의 수교에 대해 최익현은 목을 내놓고 반대.
중화민국 초기의 국가체제와 軍閥{목 차Ⅰ.서 언Ⅱ.국가체제의 집권과 분권1.中 國1.軍閥의 난립2.聯省自治運動3.자원동원의 힘1)재정의 조달2)徵 兵4.국가와 사회의 주도세력5.국가의 형성6.국민의 형성2.日 本1.廢 藩 置 縣2.자원동원의 힘1)地 租 改 正2)徵 兵 令3.국가와 사회의 주도세력1)메이지 정부의 주도세력2)주도세력의 특징4.국가의 형성5.국민의 형성Ⅲ.결 언Ⅰ. 序 言1911년 武昌봉기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자 이를 제어할 힘을 이미 상실한 청조는 사실상 붕괴하였고, 이를 진압하기로 한 袁世凱가 청조에 등을 돌림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던 전제체제 마저 무너졌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미 성장할 대로 성장한 지방세력들은 청조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며 각 성의 자치를 요구하였다. 여기에는 식자층 및 입헌군주파들이 가담했고, 지방 군벌들도 자신들의 보호책으로서 주장하기도 하였다.결국 십여년에 걸치는 軍閥割據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1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다시금 전개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중국은 피폐해져만 갔다.반면 일본은 19세기에 이미 유신을 통해 봉건적 막부체제를 종식시켰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하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리에 끼어 오히려 중국을 핍박하였다.여기서는 일본의 메이지 체제를 비교하면서 中華民國初期{) 여기서는 武昌蜂起 이후 혁명으로 孫文이 1912년 1월 중화민국 남경임시정부를 성립한 이후부터 연성자치 운동의 움직임이 꺾이는 1924년까지를 보기로 한다.의 분권적 세태와 근대적 국가와 국민의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져갔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Ⅱ. 국가체제의 집권과 분권1. 中 國1. 軍閥의 난립군벌의 개념과 군벌통치의 시기를 규정하는 데에는 여러 주장이 있다. 여기서는 군벌을 중국의 半식민지, 半봉건사회에서 강화된 지방분권적 상황과 정통적 권위를 갖는 강력한 중앙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사적 무장력을 기반으로 중앙과 일정 지역을 제국주의의 경제·군사적 지원을 받거나 민중에 대한 수탈적 방법을 통해 그 지배를 실현나 장개석에 의한 북벌의 완료 후에도 여전히 지방에는 군벌적 세력들이 할거하였던 게 사실이 다. 이들은 후에 反蔣을 내걸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밖에 지역군벌들은 정세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대응하면서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각 성의 자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 주요한 세력으로는 雲南軍閥, 廣西軍閥을 들 수 있다. 또한 손문을 도와 광주탈환에 참여했던 광동의 진형명 또한 커다란 세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후에 북벌을 감행하는 국민정부에 합류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討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2. 聯省自治運動남경임시정부의 성립은 사실상 군벌들이 割據하는 상항에서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군벌들간의 내전으로 국토는 피폐해졌다.1920년대 남쪽의 광동정부와 직예파가 장악한 북경정부 사이의 대립과 지역군벌의 난립 하에서 통일의 바램은 소원해지고 있었다. 이에 각성의 자치를 위주로 한 새로운 방식의 통일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는 5. 4운동을 겪으면서 성장한 민중의식 속에서 더욱 발전하였고 이러한 흐름은 서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聯省自治運動으로 이어졌다.모택동 등 청년들에 의해 주도된 湖南省共和國 수립운동(1919~1920)이 있었고, 省憲自治運動 의 형태로 浙江, 四川, 廣東으로 번져갔고, 雲南, 貴州, 陜西, 江蘇, 江西, 湖北, 福建 등지에서도 민중운동의 주도든 성당국의 주도든 간에 制憲自治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白永瑞, 「중국의 국민국가와 민족문제」『동아시아의 귀환』, 2000, p.80~8120년대에 들어 활발해진 연성자치의 논의는 결국 각계연합회들이 모인 國是會議(1922) 에서 그 1조에서 중화민국을 聯省共和國으로 한다 고 명시하는 헌법초안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한편에선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우려와 반대도 많았다. 북벌을 통한 중국통일체제를 지향하는 손문의 광동정부가 그랬고, 결국 국공합작을 통해 세력성장을 이룬 국민당정부의 북벌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목소리는 자연히 줄어들게 되었다.3. 자원 동원의 힘1) 재정 조달1910년差(군대에 의한 갖가지 징수나 징발), 預徵(조세를 앞당겨 징수)이 묵인되었다.또한 각종 부가세 및 잡세로 재정조달을 했고, 아편재배, 화폐/公債발행으로 재정조달을 했고, 외국의 차관도 그 일환이었다.국민당정부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광동지방에서의 세수입, 특히 광주 상인층으로부터의 세수입에 국한해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중앙집중적인 징세나 재정의 확보가 이루어지는 것은 장개석 군대가 북벌을 완료하는 1928년 이후였다.2) 징 병군벌의 주력을 형성하는 일반병은 빈농이나 도시유이민, 또는 귀순한 土匪 출신이 대부분이었다.군대의 충원방법은 대체로 급료를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경우나 강제적 수단에 의해 편입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김세호, 위의 책, p.34에서 재인용군벌전쟁으로 인한 농토의 피폐와 가혹한 징세를 피해 파산한 농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土匪가 되거나 용병으로 입대하는 일 뿐이었다. 군벌의 정규군이 되는 것은 열악하나마 일정한 급료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급은 과잉상태였고, 토비의 토벌 및 군벌간의 내전으로 인해 병력도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아래의 표는 매해 증가하는 병력을 잘 나타내 준다.{연 도병력(만명)연 도병력(만명)19**************************1991.*************01924133출처 : 東亞同文會 調査編纂部(1927), p.379그러나 군벌들은 징병제도를 시행할만한 행정체계나 강제성을 갖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용병제로 군대를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손문 영도하의 국민당은 직접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을 보유하지 못했다. 그들이 가용할 수 있는 군대는 客軍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楊希閔, 劉震 의 객군세력이 광주의 군사적·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적인 군사력의 확보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독자적 혁명군대의 양성을 위해 黃 軍官學校를 설립하였지만(1924), 유진환 등의 객군세력을의미에서 1910년대와 20년대 초 중국의 현실은 1차대전의 종전 이후 다시 가열차진 외세의 침탈과 분열된 국토의 통일이라는 당면과제 앞에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특히나 국공합작 이전까지의 정치적 양상은 국민을 배제한 채 국가체제의 성립에만 집중되어 있었다.그러나 신문화 운동으로 민중의 각성이 이루어지고, 노동계급도 잠재력을 자각할 수 있었다.陳獨秀와 胡適이 주도한 사상혁명과 문학혁명은 서구의 계몽사상을 도입하여 전통적 유교의 폐단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개인주의적 시민의식이 도입되어 사회전반에 걸친 흐름을 만들어내는 듯 했다.이후 진독수가 마르크스주의자로 개종하면서 그의 슬로건은 계몽에서 救國으로 논조가 변하였고, 이런 변화는 중국의 민주·인권 성숙에 큰 장애가 되었다.{) 요코야마 히로아키著, 박종현譯, 『中華民國史』, p.104그러나 결국 노동자나 민중의 정치참여로 나타난 노동봉기나 자유주의적 데모도 군벌의 무력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이후 국민국가에 대한 논의는 연성자치운동으로 이어졌으나, 손문이나 북경정부가 지향하는 통일의 물결 속에 쇠퇴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國民會議促成運動(1924)으로 이어졌다.그러나 제국주의의 침탈과 내전이라는 현실 속에서 가장 급선무는 反帝反軍閥 이었다. 결국 그러한 기치 아래 국민 개인의 문제는 민족주의적 要望 속에 묻혀버릴 수밖에 없었다.2. 日 本1. 廢藩置縣1867년 12월 왕정복고 대호령이 발포되어 형식적으로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신정부가 수립되었나 실질은 討幕派와 公武合體派의 몇 藩들이 모인 오합 정권에 불과할 뿐 메이지 정부의 힘은 아직 미약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보신전쟁에서 승리해 에도로 거점을 옮기고 예전의 幕府 영토를 직할지로 하였으나 그밖에는 변함 없이 300여 개의 번으로 나뉘어 독자적으로 다스리는 지방분권체제가 계속되고 있었다.구미 열강에 의한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번을 해체하여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메이지 정부는 그대로 藩의 붕괴를 기다리기5%로 인하하였다.그러나 결과적으로 메이지 정부는 지조를 근대적인 조세형태로 확보함으로써 국가운영의 경상재정을 안정시켰으며 법적으로 절대적인 사유가 인정된 토지는 담보의 대상물이 되어 지방산업육성을 위한 자금으로 크게 공헌하였다.{) 박영재 외 『19세기 일본의 근대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 pp. 133-1342) 徵兵令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되었어도 처음에는 정부 자신의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에도를 비롯하여 오오우, 에찌고에 있는 여러 번들이 공격해오면 언제나 조정파의 여러 번의 군대를 징용해서 대항하였다. 메이지 2년에 군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프러시아, 프랑스 제국의 병제를 조사하였다. 그 후 여러 번의 상비병의 수를 제한하고, 군제를 육군은 프랑스 식, 해군은 영국식을 참작하여 편제하기로 하고, 각 항의 육군도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후 메이지 3년(1870)에 징병규칙을 제정발표하였다. 거기에 의하면 각 道府藩縣은 어떤 신분을 막론하고, 신체 건강하고 병졸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를 선발해서 오오사까 출장병부성에 보내도록 하였다. 이것은 중앙정부가 직접 징모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에 개의치 않는다는 점에서 국민개병주의의 제일보라고 할 수 있다.메이지 4년(1871)에는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藩兵을 해체시켰다. 이리하여 국방군비의 제도 확립은 차차 그 기운이 익어갔는데, 메이지 4년 말에는 兵部大輔 야마가다 아리도모 등이 국방에 관하여 국민개병주의를 건의하고 겸하여 본토 수호를 위한 예비병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다음해 메이지 5년(1872) 11월에는 징병에 관한 천황의 조서가 전국에 발표되었고, 6년 1월에는 징병령이 발포되었다. 메이지 정부의 군사개혁으로 인하여 모든 성인 남자들이 사회적 배경에 관계없이 3년간의 현역복무와 4년간의 예비군의 복무의 의무를 갖게 되었다. 이것으로서 평민과 무사의 기능적 구분이 없어지고, 집권화 되고 근대적인 군사제도가 실시된 것이다. 징병제가 완전히 효력을 발휘하기까지는 몇 년이 소요되었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