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19世紀末 淸商의 朝鮮進出과 反淸意識의 推移목차
Ⅰ. 序 言Ⅱ. 19世紀末 淸商의 經濟浸透
1. 19世紀末 淸의 對朝鮮政策
2. 漢城開棧과 潛商의 盛行
Ⅲ. 反淸意識의 推移
1. 大院君 拉致事件
2. 同盟撤市鬪爭
3. 淸商의 浸透에 따른 反撥
Ⅳ. 結 語
본문내용
Ⅰ. 序 言개화기는 조선사회에 있어 격동의 시기였다. 江華島條約으로 문호를 개방한 뒤 계속되는 日本과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은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고 自主近代國家로 서려고 하는 조선에 굴레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경제면에서 외국상인의 침투와 각종 경제이권의 상실은 民草들의 삶과 직결된 것이었다. 19세기말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당시 서구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청나라였다. 淸은 자국이 받은 경제적 압박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면서 조선의 植民地化를 시도하였다.
개항 이후 淸日兩商의 朝鮮浸透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어왔다. 다수의 연구가 개화기 일본의 경제침탈을 植民地期까지 연결시키거나 그 폭압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청상의 조선진출에 대한 연구는 淸日戰爭 이후 淸勢가 일소된 점을 들어 상대적으로 도외시되거나 청의 對朝鮮政策에 집중되어왔던 게 사실이다. 수치상으로 보면 일본이 교역량이나 거류민의 수에서 청인을 능가하였다. 그러나 日商이 조선의 곡물을 매입하는데 주력한 需用者의 입장이었다면, 淸商의 경우는 洋貨나 日貨까지 중개무역을 통해 조선인에게 팔아 이익을 남기는 供給者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수치상의 우열만으로 그 세력을 평가하기는 곤란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일부지역에서는 수치상으로도 청상이 일상을 앞서고 있어 청일전쟁으로 청이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할 때까지 이들이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상의 활동에 대한 조선민들의 대응은 和應과 反撥의 상반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일부 무뢰배들은 약간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청상과 결탁했지만 대부분은 점차 가중되는 청상의 압력을 體感하게 되면서, 청인들의 빈번한 횡포에 맞선 구타, 살상, 방화 사례가 증가하였다.
여기서는 壬午軍亂 이후 청일전쟁으로 청세가 일소되는 시기까지 청상의 조선진출 배경과 전개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朝鮮民들의 반응을 反淸意識의 측면에서 살펴보겠다. 1882년 청군에 의한 ‘大院君 拉致事件’을 반청의식의 실체를 추적하는 시작으로 삼고, ‘漢城 同盟撤市’와 민간의 소박한 반청정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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