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조직신학의 개념과 가치. 조직신학의 개념조직신학은 하나님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대한 질서 있는 진술을 제공하려고 애쓰는 학문이다. 인간의 구원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즉 신학함에 있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야 하므로 우리의 신학도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성경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많이 말을 하고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오직 그를 통해서만 우리가 아버지께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조직신학은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의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전체적으로, 통일된 체계로 제공해 보려고 노력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주해(exegesis)는 성경을 취하여 그 각 부분을 자세히 분석하는 것이다.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은 주해의 결과를 취하여서, 그것들을 다양한 단위들로 조직화해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추적해 가는 학문이다. 변증학(Apologetics)은 성경적 진리의 체계를 잘못된 철학과 잘못된 과학에 대항하여 옹호 하려고 한다. 실천신학이 이 성경적 진리의 체계를 어떻게 선포하고 가르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라면, 교회사는 이 진리의 체계를 수세기에 걸쳐서 어떻게 받아들여 왔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조직신학은 성경가운데서 주어진 진리의 체계를 밝히려고 한다.가. 조직신학의 가치우리는 마땅히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가 계시의 내용을 가지고 작업을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유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정신을 가지고서 작업해야 하는 것이다. 조직신학 연구는 우리의 영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개발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 경륜을 선포하도록 도울 것이다. 근래에 들어 일반인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졌고, 그들은 의사와 상관없이 진화론을 듣고 배웠다. 이 젊은이들을 목사가 돕서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절대적으로 자의식적인 하나님이 모든 인간지식의 원천이라고 주장을 한다.바빙크에 의하면 변증학은 조직신학을 앞서지 못한다. 참된 변증학은 교의를 전제한다고 한다. 기독교 교의학 내에는 기독교의 진리성과는 별도로 그것을 사용하여 자연신학을 수립할 수 있는 이성의 자리가 없다.이러한 바빙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전적으로 벗어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는 더 높은 것들에 대한 최소의 지식이 낮은 것들에 대한 확실한 지식보다 더 가치있다는 의미의 아퀴나스의 말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바빙크는 자신은 스스로를 토마스주의적 사변에서 완전히 끊었어야만 한다. 그는 일관성 있는 기독교적 입장을 희랍적 사변과 반은 기독교적이며 반은 희랍적인 토마스주의의 사변과 대립시키는 용감한 태도를 취하여야만 하는 것이다.가. 발렌틴 헤프의 입장헤프는 바빙크가 그만둔 그 논의를 다시 시작하는데, 인식론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추론의 선험적 원리가 문제가 있었다. 헤프는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특히 기독교적인 기초를 제공하기 원했다. 그는 성령의 증언에 근거하지 않은 그 어떤 지식의 확실성도 사람에게는 없음을 아주 분명히 하고자 한다. 그는 일관성 있는 기독교 인식론을 제시해 보려는 노력을 했다. 바빙크의 경우 그의 경험론과 합리론 비판에서 그가 최소한 어느 정도는 그의 적대자들과 중립적인 근거를 취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와 같은 문제가 헤프에게도 있었다. 헤프도 바빙크처럼 성경과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신학을 적극적으로 구성해 보려는 것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하지만 헤프가 비기독교적 관점에 대한 부정적 비판에서도 언제나 자의식적으로 기독교적 입장의 진리성을 전제하는 데서 진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온전히 분명하게 하지 않는 이상, 그는 자연신학을 구성해 보려던 오류를 피할 수 없게 된다.5. 기독교 유신론적 계시. 계시의 전제들계시의 개념에 분명한 의미를 주는 것은 절대적이며 절대적으로 자의식적인 존재이신 알지 못하면 이러한 것들에 대한 참된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자연으로부터의 하나님에 대한 게시: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자연의 하나님을 유비적으로 추론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온 후에도 계속해서 자연 안에 당신 자신을 계시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비적이 이난 일의적으로 사유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다고 하거나 어떤 한 신이 존재 한다고 결론을 짓지 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결론짓는 일은 결코 없다.가. 사람에게서 온 하나님에 대한 계시: 합리적 신학(Rational Theology)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고 있다. 즉 그들의 심저에서는 자연을 설명하려는 그들의 모든 시도에 있어 자신들이 우주의 참된 창조자에 대한 증언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ㄷ르이 그들 자신의 입장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더 자의식적이 되면 될수록 그들은 그들의 체계가 죄인들의 진리를 자신들로부터 숨기려는 도피기제임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에 대한 계시:신학 자체(Theology Proper)워너래 하나님께서는 낙원에서 자연과 사람 안에 주셨던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에 덧붙여서 당신 자신에 대한 적극적 사상의 전달을 해주셨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걸으시며 말씀하셨던 것이다. 여기에 참된 신현이 있었다. 이 적극적인 계시를 수단으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 당신 자신의 뜻과 목적을 전달하셨다는 것이다.9. 특별 계시. 특별계시의 필요성특별 계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가 사람에게 주신 일반 계시의 어떤 결점 때문에 필요하게 된 것이 결코 아니다. 죄로 손상을 입은 인간은 원래의 일반계시로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로서의 사람에게가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사람이란 그 조건에 특별계시 혹은 구원기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지성을 가진 이라면, 성직자의 개입이 없어도 그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요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가. 성경의 권위에 대한 현대의 대립성경의 권위를 개념을 거부한 근본적 이유가 태일러에 의하면 역사적 현상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그는 지식의 대상이 하나님과는 별개로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내린다. 그래서 그 해석 활동을 하나님에게서 전적으로 독립하여야 한다고 가정을 한다. 하지만 만일 사람이 어떤 사실에 어떤 해석을 하게 되면, 그 해석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이루어진 궁극적 해석에 근거하고, 그 해석을 전제하지는 않는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다. 테일러는 사람이 어떤 해석적인 요소를 개입시키면 해석 전체가 사실상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적인 것이 된다고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독교 유신론은 하나님의 궁극적 해성과 사람의유한적 재해석은 하나님의 선행적, 절대적 해석이 없이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주장을 한다.나. 천주교회의 입장천주교회는 자연주의적 관점과 기독교적 관점 사이에 선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회는 흔히 생각되는 것처럼 현대주의에 반하는 강력한 보루가 되기는 커녕, 현대주의에 대한 그 어떤 강력한 반론도 제공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물론 천주교회도 성경을 믿는다. 그러나 전승도 같이 믿으며, 또한 성경과 전승 모두에 대하여 교황의 종극적 해석 능력을 믿는 것이다.다. 잘못된 신비주의에 대한 반론성경의 성격에 대한 정통적 개신교의 견해에 반하는 반론들로부터 우리의 교회로 하여금 바른 성경론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이단들에 반하여서 성경은 성경 자체와 연관해서만 해석되어야 한다는 개신교의 원리가 근본적 중요성을 지녔음을 분명히 보아야 하는 것이다.11. 성경의 영감성경의 영감은 그 자체가 교리는 아니고, 기독교 유신론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성경 개념의 논리적 절정이라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영감 문제를 이해할 때 우리는 같다.첫째, 하나님이 불가해적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의미된 바는 하나님의 자충족적 온전성 교리에 관여된 것으로 보여질 때에만 명확하게 주목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교리도 하나님의 온전성 교리외 하나님의 불가해성교리가 아무런 양보 없이 주장되는 것은 오직 개혁신학에서만 이다.둘째, 오직 자충족적인 하나님이란 가정과 계시의 전포괄성에 대한 가정을 생각할 때에야 우리는 언약신학에 대한 하나님의 불가해성교리 의 중요성을 볼 수 있게 된다. 언약시학은 개혁신학이다. 그러므로 언약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를 전적으로 함의 한다.셋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이런 강조점이 사람에 의해서 철저히 이해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해되면, “그 부분 부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본질과 내용”과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인식 방식“ 에 대한 거짓된 구별을 하지 않을 수 있다.13. 하나님의 불가해성의 변증학적 의미현대인은 첫째로 합리주의자이다. 모든 비그리스도인들은 합리주의자들인 것이다. 언약을 파기한 그들의 대표자인 아담의 후예들로서 모든 사람은 그들의 정신을 하나님의 정신에 복종시키기를 거부한다. 그들의 실재의 성질을 자신의 최종 준거점으로 삼아 해석하려고 한다. 바로 이런 합리주의적-비합리주의자인 사람에게 복음은 그 창조와 계시교리,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총을 통한 구속 교리를 가지고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이 복음이 최대한도로 폭 넓은 맥락에서 제시되지 않으면 현대인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도전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이러한 기독교적 입장과 비기독교적 입장의 두 입장은 서로 정면으로 대립을 한다. 창조주-피조물 관계의 우위성을 확언하면서, 개혁신앙에 의해서 일관성 있게 표현된 기독교적 입장은 사람은 어떤 때든지 그 심중에서 하나님께서 심중에 두시는 것과 정확히 같은 사상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을 한다. 물론 그의 하나님이 당신 자신은 영원하시다와 계시적 명제를 주실 때 사람은 하나님은 영원하시다고 이 명제를 반복할 수는 있다. 이 다.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서론통일 왕국의 왕들은 아비멜랙을 포함한다면 사울, 다윗, 솔로몬 등4명의 왕들이 있었다. 물론 B.C 1020년경 왕조시대로부터 B.C 587년 유다가 망하기 까지 430년동안에 41명의 왕들이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와 다르게 왕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비관적인 경우가 많다. 역사가들이 바라보는 왕은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 해야 했기 때문인데,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상황들을 인식한 이후에 평가되어져온 왕들에 대한 사료들을 분석하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 라는 책을 통해서 바라본 왕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평가와는 사뭇 달랐다. 물론 그것은 학문적인 작업이 가해졌기 때문이고,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책의 내용과 그 느낀 점들에 대한 서술을 통해서 한학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학습에 대한 척도를 삼고자 한다.본론Ⅰ통일 왕국의 왕들통일 왕국의 왕들에는 아비멜랙, 사울, 다윗, 솔로몬이 있다. 여기서 아비멜랙은 스스로 왕이라 칭한 자이며, 야망으로 계획된 인종차별, 지역감정등의 정치적 작업을 통해서 왕이 되었고, 결국 3년 동안 국력을 휘두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기에 역사의 냉철한 잣대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라는 평가받게 되는 영광을 갖는다. 당시 사무엘은 왕제도를 반대했었지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국으로부터의 생존의 위협에 대해 보호해 줄 수 있는 왕을 원했고, 사울이 왕으로 추대된 이후에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서 대부분 수용해 주어 안정을 찾아 주었다. 왕정이 실시되었다고 하지만, 지파동맹체의 잔재가 남아있어서 권력을 중앙으로 집권하기는 어려웠고, 다윗을 위시한 결과 다윗의 정치적인 술수에 밀러나 왕국을 다윗에게 빼앗기게 된다.다윗은 왕조를 형성하여 왕조를 형성하여 그의 후손이 통일왕국을 지나 분단왕국이 되어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렸고 그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나오게 된다. 다윗은 목동으로 알려져있지만 이는 아비야와 여로보암사이에는 여전히 전쟁이 계속된다. 역대하 13장 5~12절에 나와있는 연설을 통해서 보듯이 역대기 사가는 전쟁에 대해서 여호보암과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 계약을 어기고 별도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한 것이 불법이라고 비판했으며, 금송아지를 세우고 아론 후손이 아닌 사람들을 불법으로 제사장을 세운 것을 비판한다. 물론 이와같은 입장은 포로기가 끝나고 유다로 귀환한 다음 B.C 400여년경 새로운 유다 공동체를 시작하면서 다윗 왕조를 기본으로 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씌여진 역대기 사가의 관점에서 보았을때, 북왕조 이스라엘의 출발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비야는 백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이어갔으며, 산당을 짓고, 우상을 섬기고 가나안 풍습을 쫒는 등의 죄를 범하게 된다.아사는 B.C 913~873년까지 40년간 통치한 왕이었다. 순수한 야훼종교의 신봉자로서 남창(男唱)을 그 땅에서 쫒아내고 조상들이 섬기던 우상을 파괴하였으며, 자신의 어머니인 마아가 까지도 아세라를 만들어 섬겼다는 이유로 태후의 자리에서 폐하였다. 그러나 아사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교적 관습들을 완전히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아사의 재위 기간 중 두 번의 전쟁이 있었는데, 한번은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이고, 또 한번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이다. 이스라엘과의 국경전쟁에서 결국 유다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데 이 결과로 시리아 족속이 갈릴리 지방에 머물게 되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아사는 죽기 2년전에 발에 병이 걸렸는데 이에 대해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사를 부르고, 그들은 마술행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야웨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서 그는 비판을 받는다.여호사밧은 히스기야, 요시야와 함께 신명기 사가와 역대기 사가의 칭송을 받은 몇 명 되지 않는 유다 왕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호사밧은 그 부친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여호사밧은 그의 아버지 아사가 계획한 종교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율이었다. 요아스는 즉위 초기, 즉 제사장 여호야다의 자문을 받고 있는 동안에는 야훼의 뜻에 따라 바른 정치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야훼 종교를 촉진시킴으로서 계약을 성실히 준수 하였다. 그 기간은 대략 23년을 조금 넘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역대기 사가는 요아스가 여호야다 사후에 야훼의 성전을 더 이상 찾지 않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고 비판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여호야다의 아들 제사장 스가랴를 보내서 최종적으로 경고한다. 그러나 그는 스가랴를 성전 뜰에서 돌로 쳐 죽인다. 스가랴를 죽인 후 일여 년이 지난 다음 시리아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쳐내려 왔다. 요아스가 실라고 내려가는 길목에서 신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요아스는 그의 통치 후반기에 하나님과의 계약도 파기하고, 백성들과의 계약도 파기하였다. 더군다나 그의 생명의 은인인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이는 배은망덕한 포악한 왕으로 변신했던 것이다.아마샤는 25세에 왕위에 올라 29년간 다스렸다. 아마사는 여호람이 유다를 통치할 때 유다로부터 이탈하여 독립을 쟁취했던 에돔을 공격하여 일만 명을 죽이고 셀라를 점령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에돔을 정복한 아마샤는 북왕국 요아스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아마샤는 요아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아마샤의통치에 반기를 든 무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웃시야는 열여섯 살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올라 52년간 통치하였다. 웃시야는 국권 회복정책을 성공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유다는 그의 통치 기간에 최고의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강대국의 침략도 없었으며,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도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였다. 웃시야는 내체에도 관심을 기울여 농업과 산업을 진흥시켰다. 웃시야는 야훼 하나님을 잘 섬겼으며,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백성들을 보살핀 훌륭한 왕이었다. 그러나 스가랴가 죽은이후 그의 통치는 곁길로 벗어나 문둥병에 걸려 별궁에서 지냈다.요담은 그의 부친인 웃시야가 나병에 걸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부친과 공동으로 통치하다가 부왕이 죽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므낫세의 정책 즉 친앗시리아 정책을 답습했는지는 성서에 언급이 없다. 아몬의 정치기간이 매우 짧았는데, 고관들로 짐작되는 그의 신복들에게 암살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다른 세력이 나타나 반란자들을 죽이고 요시야를 왕으로 추대하였다.요시야가 즉위하고 왕으로 재직할 동안에는 그렇게 막강한 세력을 떨치던 앗시리아도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여 제국의 말기적인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요시야는 이 공백상태를 틈타서 민족적인 자립과 정치적인 독립, 그리고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정치개혁 이후에 종교개혁 역시 성공하였다. 우선 성전 수리부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율법서가 발견되었다. 그 다음 요시야는 앗시리아의 제단을 헐고 앗시리아 제의행사를 폐쇄하였다. 요시아의 종교개혁 절정은 유월절 행사이다. 그는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유월절 행사를 치렀다. 그러나 요시야는 앗시리아를 치러 가는 이집트 왕 느고의 길을 막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하였다.여호아하스 즉 살룸은 요시야의 넷째 아들이다. 여호아하스는 아버지가 므깃도에서 죽음으로써 유다의 독립과 다윗 왕조의 부흥을 이루려는 꿈이 산산조각난 상황에서 왕위에 올라, 3개월간 통치하는 도중 시리아의 중앙 리블라에 자리잡은 자신의 사령부로 느고가 잡아다가 왕위를 박탈하고 이집트로 끌고 간다. 결국 유다의 독립은 여호아하스가 이집트로 끌려감으로서 끝이 나고 말았다.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킨 이집트의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 대신에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리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그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 그는 나라를 통치하기에는 부적합한 폭군이었고, 백성들을 무책임하게 억압하고, 착취하였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여호야긴의 통치는 겨우 석 달에 불과하였다. 이 짧은 시기에도 불구하고 신명기와 역대기 사가는 “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처럼 야훼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부정적인 평가를한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이미 바빌론 군된다.나답을 살해한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가문 전체를 몰살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바아사는 예언자의 지명받고 왕이 되었다. 자기 생애의 말년까지 24년 동안 통치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수도를 요단 강 동쪽의 브누엘에서 요단 강 서쪽의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디르사로 옮겼다. 바이사는 라마에 성벽 요세를 건축함으로써 유다로 통하는 길을 통제하고 예루살렘과의 모든 왕래를 차단시키려고 하였다. 이후 남북 국경분쟁이 나오는데 유다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바이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었고, 평화보다 전쟁을 일으켜 유다와의 갈등을 증폭시켜 외국의 침략을 자초한 어리석음을 범하였다.엘라는 겨우 2년 동안 통치하였으며, 궁전 관리인의 집에서 베풀어졌던 잔치에서 취하여 있을 때, 전차 부대의 절반을 통솔하는 장교인 시므리에게 살해되었다. 엘라도 야훼 신앙에 충실하지 못하고 이방 신을 섬겼다.엘라를 살해한 시므리는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시므리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다. 시므리는 엘라를 죽이는데 성공하였으나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데는 실패했다. 온 백성들은 군대 장관인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하고 시므리에게 대항하였다.시브리가 죽은 후 오므리는 백성들가운데 깃나의 아들 디브니를 오므니대신 왕으로 추대하려는데 대해서 많은 정적들을 제거한 후 유다 왕 아사 제 31왕이 되었다. 이스라엘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오므리 정책은 다윗과 솔로몬의 정책을 본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국내에서는 평화상태를 유지하고, 유다 및 페니키아 인들과는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으며, 요단 동부, 특히 시리아 족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쓰는 것이다. 이같은 정치적 수완으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했다. 따라서 오므리는 그 때까지의 북왕국의 왕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아합은 왕위에 오른 후에 그의 아버지 오므리의 외교정책을 따라 주변 나라들과 화친하며 동맹관계를 맺어 시리아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는 정책을 펴 나갔다. 두로나 시돈이 있.
김기덕 감독 영화 「시간」감상문1. 시간의 한계 속에 갖혀 버린 사랑미국 코넬대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교수팀은 남녀간의 애정이 얼마나 지속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2년에 걸쳐 다양한 문화집단에 속한 남녀 5천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연구팀은 남녀간에 가슴뛰는 사랑은 18-30개월이면 사라진다고 밝혔다. 남녀가 만난지 2년을 전후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사랑의 화학물질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오히려 사라지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이 변하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것이 연구팀의 주장이다. 이것은 인간이 한낮 종족번식의 수단으로 사랑을 이용한다는 관점으로서 주장한 학설이고, 이러한 사랑에 변함이 있다는 전제 하에는 ‘시간’이라는 요소가 존재한다. 영원을 약속하며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연인들은 시간이주는 공포를 잊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유한적인 존재인 인간은 시간 앞에서 영원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한계 속에 갖혀버린 사랑은 젊은 날의 전유물일까? 매슬로우(Maslow, Abraham H))에 의하면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욕구중 상위개념의 욕구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 욕구가 충족될 때 삶에 있어서 고차원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평생 지속되는 욕구인 사랑은 시간에 지배를 받으며 유한성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렇다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의 개념은 무엇이며 인간이 극복한 시간에 맞선 사랑은 무엇인가?사랑에 대한 정의는 개개인 마다 다르다. 단순히 종족번식을 위한 수단 즉 Sex를 사랑이라고 한다면 시간의 한계성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며, 그러한 것은 가슴 설레임 같은 감정 없이도 가능하기에, Sex 자체를 사랑으로 정의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남녀 간에 애로스 적인 사랑만을 보편적 사랑으로서 정의 하는 것은, 사랑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치를 한정짓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즉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서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인격적인 교제, 또는 인격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은 승화단계를 거치면서 후대에 가시적형태의 주옥같은 문학과, 비가시적 형태인 종교, 철학 속에 스며들어 인류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공통적으로 인간으로서 누구나 공감하게 되는 것이 되어온 것이 바로 사랑이니 말이다.2. 감독 김기덕김기덕 감독은 1960년생으로 경북 봉화에서 출생했다. 경기도 일산에서 농업전수학교를 마친 뒤, 총회신학교를 거쳐 1990년부터 2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회화를 공부하였다. 1993년 영화 ‘화가와 사형수’의 시나리오를 집필해 같은 해 시나리오작가협회 창작상 대상을 받으면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였고, 이듬해 ‘무단횡단’으로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대상을 받았다. 1996년 저예산영화 ‘악어’의 각본·감독을 맡으면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파격적인 내용과 충격적인 영상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여대생과 창녀의 역할 바꾸기를 소재로 다룬 ‘파란 대문’(1998), 잔혹한 표현과 여성비하 논란을 일으켰던 ‘섬’(2000), 단 3시간 만에 촬영을 끝낸 ‘실제 상황’(2000),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창녀로 만든다는 내용을 다룬 ‘나쁜 남자’(2001) 등이 있다. 그 밖에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 ‘수취인불명’(2001), ‘해안선’(2002),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등을 감독하였고, 2004년에는 여고생의 원조교제를 소재로 한 ‘사마리아’로 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은곰상)을 받았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인정을 받는 감독으로, 1997년 밴쿠버국제영화제에 ‘야생동물보호구역’을 시작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누사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 몬트리올국제영화제, 스톡홀름영화제, 선댄스 영화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브뤼셀 판타스틱 국제영화제 등 각종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또한 누사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월드시네마상 (1998),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넷팩상,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판타스포르토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브뤼셀 판타스틱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대에서의 경험은 그 나름대로 명명한 ‘반추상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뒤섞는 그림을 그리게 했었고,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경험이나 느낌들이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지게 된다.초저예산을 가지고 빠른 속도로 찍어내는 게릴라식 영화 작업에 대해 많은 논란이 따라다니지만, 국내시장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적이 없는 김기덕이 감독으로 계속 생존해나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운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 감독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중산층 혹은 부르주아 출신인데 반해, 김기덕은 생애의 대부분을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살았기에 김기덕 감독은 인간적인 삶의 조건을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에 관해 뛰어나게 묘사한다. 절망과 타락에 길들여져 있고, 자기 구원을 향한 자각이 생겼다가도 이내 희미해져 버리는 인간 군상을 김기덕만큼 잘 알고 있는 한국 감독은 없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의 모든 영화들은 어두운 세계에서 솟아오르는 한 점 불꽃 같은 상상력과 매혹적인 그래픽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3. 영화 「시간」1) 시간이 무너뜨린 사랑2년동안 사귄 한 쌍의 연인이 있다. 남자(지우)는 자신이 지겨운 것이냐고 묻는 여자(세희) 말을 부정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곤 하는데, 여기에 세희는 불안감을 느끼고 지우가 눈길을 주었던 여자들에게 대해서 적대감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지속된 성관계를 갖으면서 세희에게 성감을 느끼지 못하는 지우에게 세희는 아까 봤던 커피숍 종업원을 떠올리라고 하고, 지우는 세희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만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히스태리를 부리는 세희는 지우와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한 원인을 시간이 만들어 놓은 육체의 지루함이라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세희는 극단의 상황 속으로 자신을 몰고 가며 육체적 사랑에서 사랑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해답으로서 얻은 것은 새로운 육체를 선보이는 것이고, 결국 세희는 지우에게 새로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아무런 말없이 이사를 , 빈자리 역시 너무 컸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육체가 이끄는 날이면 빈자리를 채워줄 다른 여자를 만나곤 한다. 예전 짝사랑 하던 여자의 전시회에 초대 받고서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보려 시도도 해보고,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도 밤을 같이 해보려 하지만, 몰래 지켜보고 있던 세희는 번번히 나타나서 여자들을 회유시키고 돌아가게 만드는데,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려 했던 여자들이 번번히 갑자기 돌아서서 가려는 이유를 지우는 알지 못한채 더욱 갈급한 육체와 사랑하는 여인의 그리움 가운데서 갈등을 하게 된다. 여기서 사랑이 가진 조건을 살펴볼 수 있다. 본능적인 육체적인 사랑은 순간적이며 남녀로 하여금 모든 것을 내어주게 하는 힘을 가졌다. 물론 이것은 윤리적인 방어본능을 무시하고서 언급하는 것이다. 지우가 느끼고 있는 보편적인 여자에 대한 갈급함은 육체가 원하는 것으로서 그의 정신이 사랑하고 있는 세희와는 별개이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지 않아도 사랑의 형태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불행일지도 모른다. 육체의 사랑을 쫒으면 그 욕망의 끝에는 더욱 큰 공허함이 존재하며, 공허함의 건너편에는 정신적인 사랑을 꿈꾸는 자아가 본능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둘을 일치 시키지 않고서 사랑을 만들어 가면 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인간은 충분히 불행의 가능성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에 대한 방비책으로서 인간에게만 주어진 기능은 욕구를 억제할 수 있는 제어능력인데, 스토이시즘은 이러한 기능으로서 인간이 선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견해를 가졌었다.3) 어긋난 사랑지우가 외로워 하던 중 커피숍에서 우연히 매력적인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다름아닌 세희다. 이름을 새희로 고쳐서 지우에게 다가온 세희를 지우는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여자로 받아들인다. 지우의 외로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한 육체를 지닌 세희에게 지우는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세희는 이러한 지우를 통해서 처음의 사랑을 잠시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지우와 가까워 지면 가까워 질 수록 지우 속에 내재하고 세희는 모든 사실을 밝히게 되고, 세희가 아니라 새희로서 좋아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지우는 큰 충격을 받고 새희를 두려워 하며 떠난다.많은 고민 끝이 지우는 세희가 성형수술을 받았던 병원에 가서 그녀를 수술한 의사를 만나 혼란스러운 따져보기도 하지만, 결국 지우 역시 새로운 지우로서 새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못알아 보도록 수술을 한다. 세희는 지우가 잠적한 후 이러한 사실을 의사를 통해 전해듣고 그 때부터 모든 남자를 잠재적 지우로 보게 되고 지우를 찾기 위해?여러 남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테스트를 해보지만 지우는 찾을 수가 없다.그러던 중 지우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을 하는 한 남자를 찾게 되어 기뻐하며 그를 지우라 부르지만 그는 자신이 누구면 어떠냐며 자신은 지우가 아니라 정우라고 한다. 새희는 전에 새희가 세희임을 안 순간 지우가 보였던 행동처럼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그와 있던 공간에서 뛰쳐나간다. 그 후, 새희는 길을 가다가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고, 지우라고 생각하여 자신에게 붙잡히지 않으려는 그를 필사적으로 쫓아 뛰어가다가 자신을 피해 뛰던 남자가 트럭에?깔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의 시체를?보며 절규하던 그녀는 비틀비틀?다시 성형외과로 향하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자, 의사는 그녀에게 “아무도 못 알아보게 해주길 원하느냐”는 의사의 제안하고 이를 받아들여 수술을 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결국 세희는 마지막 장면에서 수술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에 수술을 통해 잃어버렸던 사랑에 대한 시간들을 다시 되돌려 놓고자 하는 다시 한번의 선택을 하면서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4. 시간이란 무엇인가?1) 시간에 대한 대답우리는 매일같이 시간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며 시간에 쫓겨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닌다. 그렇지만 막상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설명을 하려 들자면 말문이 막히고 만다. 이라는 물음 앞에서의 당혹스러움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표현하여 우리의 혼란스러움을 대신 말해 주고 있다.“과연 우리는 시간의다.
Freud와 Erikson의 인지발달 이론 비교를 통한청소년교육 모델 연구Ⅰ.연구 목적Personality는 우리말로 인격, 인성, 성격, 사람됨이라는 말로 옮겨지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성격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올포트 (G.W. Allport)의 정의에 의하면 성격이란 「환경에 대한 그의 독특한 적응을 결정지어 주는 한 개인의 심리적, 신체적, 역동적인 조직」이라고 했고, 길포오드 (J.P. Guilford)는 성격을 「인간의 사회적 자극체제」로 보았으며 모든 능력의 집합체와 개인의 일반적 특징, 그리고 적응과정이 다른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성격이 형성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어느 한 이론으로써 정의를 내린 다는 것이 힘든 것이다. 또한 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쳐서 청소년기에 이르러 성격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번 연구에서는 프로이드와 에릭슨의 인지발달 이론 을 비교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청소년 시기에 알맞는 교육 모델을 연구해 보고자 한다.Ⅱ.본론1. 프로이드와 에릭슨의 성격이론1)프로이드의 심리성적 발달프로이드는 개인의 성 본능에 내재하는 에너지인 리비도(Libido)가 삶의 힘 또는 기본 심리에너지로 개인의 쾌락에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성격발달이 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특히 초기 부모님과의 관계에 따라 성격발달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태어나서 다섯 살까지 유아기의 경험을 중요시 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유아는 여러 단계의 심리성적 발달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단계의 구분은 성적 에너지 Libido가 집중적으로 모이는 성감대의 변화에 따라 나누어진다.)프로이드는 입, 항문, 성기 등의 순서로 성감대가 바뀐다고 믿고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로 구분하였으며 이 시기를 성격형성의 결정적 시기로 보았다. 그리고 다섯 살부터 성적으로 깨어나는 청소년기까지를 잠복기, 청소년기 이후를 생식기로 구분했다. 각 단계에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개인의 성격형성이 결정되며 각 단계에서 아동이 추구하는 성적 쾌감을 충분히 느인 애정을 느끼면서 아버지로부터 애정이 박탈당할까 걱정하고 아버지에게 거세불안을 가진다. 또 여아는 남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남근을 부러워하며 이 책임을 어머니에게 돌리며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약해진다. 그래서 아버지를 더 좋아하게 되는 멜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를 느낀다.이러한 콤플랙스를 극복하기 위하여 남아는 힘센 아버지를 인정하면서 적대감을 누르고 아버지와 같은 남성다움을 갖기 위해 동일시 현상이 일어난다. 여아는 어머니도 자신과 같이 남근이 거세당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동일시하며 어머니와 같은 여성다움을 갖고자 노력한다. 이 시기를 잘 극복하지 못했을 때 성 불감증, 동성애, 신경성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d. 잠복기(latent stage)초등학교에 다니는 시기로 성적인 욕구가 억압되어 심리적으로 비교적 평온하고 잠잠하나 아무 변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성적으로 침체된 시기다. 이때 아이들은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기술과 사회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배우며, 운동능력을 배양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관점도 알게 되는 활동적인 시기다.e. 생식기(genital stage)사춘기에 접어들면 다시 성적인 욕구가 일어난다. 구강, 항문, 성기 등 자기 신체의 자극을 통해 얻던 단순한 쾌감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찾아 만족을 얻고자 한다. 정서적으로 지나치게 이성의 부모에게 밀착감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욕이 일고 사랑의 대상자로 이성을 찾는다. 성격발달 단계 중 가장 긴 시기로 사춘기에서 노쇠하기까지 오랫동안 해당되며 성격 기제나 방어 기제가 개인의 성격구조로 나타난다. )2)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에릭슨 이론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에서 출발했으며 프로이드의 입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이론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여러 면에서 프로이드의 관심을 달리했다. 주요 관심은 건강한 인격의 발달에 두고 원본능(i은 주장했다. 이렇게 본다면 자녀 양육에 너무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고 단지 불신감 보다 기본적 신뢰감이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을 시사한다. 에릭슨은 이 시기를 인생의 초기단계 중 가장 비중 있게 취급한 이유는 발달 특성으로서의 기본적 신뢰감이 인생 후기에서 갖게 되는 사회적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며 성인이 된 후 정체감(identity)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b. 2단계: 자율성 대 수치심(2세~3세)유아가 모든 것을 자기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애쓰는 독립심을 보이는 시기로 걷고 조작하는 운동능력이 발달한다. 이때 부모의 지나친 간섭보다 허용적인 분위기가 유아의 자율성 발전에 도움이 된다. 특히 언어사용은 자율성의 표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내가 할꺼야”,“안 해”라는 말을 함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그러나 유아가 자율성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거나 반복적으로 실패하게 되면 자율성 대신에 수치심과 의심을 가져올 수 있다.c. 3단계: 주도성 대 죄책감(4세~5세)이 시기 유아들은 감각을 통해서 물리적인 세계를 탐색하며 이성과 상상력, 창의력을 동원하여 주변세계를 알아간다. 부모와의 진정한 애정관계가 중요한 시기로 양심이 발달한다.이 시기 유아는 다양한 신체적 활동과 언어활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주도성이다. 신체적 활동과 언어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통제 당하면 좌절을 느끼고 이 좌절은 곧 죄책감을 가져온다.d. 4단계: 근면성 대 열등감(6세~11세)이 단계는 초등학교시기로 성적 충동이 잠복기로 들어가고 인간관계도 가족에서 학교라는 사회로 넓어진다. 아동은 이때 인지적 사회적 기술을 습득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한다.이 시기의 과제는 사회가 아동에게 요구하는 일련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기술을 배우고 난 뒤 성취감과 또래집단에 비해 자기가 잘할 수 있다는 우월감, 타인의 인정 등은 근면성을 획득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반면 기대하는 기공의 차원에 자신의 삶을 통정하는 것으로 높은 차원에서 자기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반추과정 자신이 살아온 삶이 무가치한 것으로 후회가 되더라도 다시 인생을 살아볼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든다.그러므로 이 시기의 특징은 자신의 삶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삶을 만족과 감사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죽음까지도 받아 들여 죽음으로 끝나는 생애주기를 초월하려는 궁극적 관심까지도 갖게 된다. )3. 프로이드와 에릭슨 이론의 비교1) 공통점인간의 자아를 추적하고 분석하여 볼 때, 프로이드의 성격발달이론이나 에릭슨의 사회성 발달이론이 모두 인간의 자아분석에 기초를 두고 자아의 성장과정을 설명하고자 했다.두 이론 모두 출생 후 인생 초기가 인생에 후기 기초를 형성하는 중요한 시기로서, 초기 경험을 중요시 여겼다.두 이론은 인간의 성격 단계는 미리 예정되어 있으며, 그 순서도 불변한 것으로 보았다. 즉, 인간의 발달은 몇 개의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발달 단계설을 주장하였다.두 이론 모두 과학적 정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실험연구 과정을 거쳐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도출된 이론이 아니라, 광범위한 대상으로부터 두 연구자가 통찰과 직관의 과정을 거쳐 추적되고 구성한 이론이기 때문이다.2) 차이점에릭슨은 인간의 행동을 이드(Id)로부터 자아(Ego)로 그 강조점을 돌렸는데, 프로이드는 인간의 행동의 동기를 이드에 두었다. 이러한 에릭슨의 자아개념은 인간의 의사 결정과 문제해결 과정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인간은 본질적으로 충동적이라고 묘사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사고를 완전히 급선회했다.프로이드 이론은 유아기의 꿈이나 사고, 기억의 분석을 통하여 이루어진 이론인데 반해, 에릭슨의 이론은 사회적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진 자아분석에 근거한 이론이라는 점이다. 두 이론 모두 자아분석에 의해 수립된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프로이드 이론은 개인의 인성발달에 치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에릭슨의기에 해당하는 단계이고 에릭슨에 의하면 5단계 정체감 대 정체감 혼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이 시기는 정체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두 이론을 근거로 적절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프로이드와 에릭스의 이론으로 교육 시스탬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교육의 목적을 각 단체나 집단생활, 소규모의 모임 등으로 구성된 사회 속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하며, 가정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가치관을 가진 독립개체를 양성하는 데 두고 있으며, 총괄적인 교육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교육 정책 수립 시 고려해야 할 부분들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논하고자 하며 이에 앞서 청소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겠다.1) 정체성확립 과정 이해프로이드와 에릭슨의 이론을 근거로서 청소년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은 생식기로써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끼며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정신과 육체의 성숙과정 속에서 개인의 역할이 다양해지며, 개인이 속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다.그 과정은 많은 변수를 지니고 있다. 우선 청소년이 속해있는 사회는 가정, 학교, 종교단체, 동아리 모임, 또래집단 등이 있을 텐데 어느 한 집단이 절대적 영향을 주기 보다는 각각의 사회 환경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역할을 요구하며 각각의 집단의 필요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이 확립되어 가는 것이다.청소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욕구는 청소년의 정체성이 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욕구는 목적이 되기도 하기에 욕구의 방향은 정체성 정립 과정의 틀을 제공한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프로이드와 에릭슨의 이론에 근거하면 청소년은 생식기 단계로써 사랑에 대한 성적욕구를 느끼며,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욕이 일고 사랑하는 사람의 대상으로써 이성을 찾는다. 그리고 급속한 성장과 성적 성숙으로 정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무엇인가? 행위로써는 인간에게 구원이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을 구속하고 있으며, 율법이 행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마저 불확실 해지는 경우 또한 볼 수 있다. 신학적으로 확실한 정립이 되어있지 아니한 상황이라면, 이러한 율법과 구원과의 관계에 있어서 혼돈을 야기 시킬 수 있을 것이다.희미하게 나마 알고 있던 복음과 율법의 관계, 복음과 윤리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를' 읽고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전에는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고 신약시대에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처음부터 믿음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약에서는 그 믿음이 그림자처럼 어렴풋이 제시되었지만 신약에서는 확연히 드러나 버렸다는(히11:39-40) 차이만이 있을 뿐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구원의 기쁨을 얻는다. 롬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이 구절은 복음의 핵심이고 결코 변함이 없고 믿음 이외에 다른 공로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그러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 들어가는 것인가? 그것도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믿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없다고 여겨주신 것이다. 분명히 죄가 있는데도 하나님은 없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길이 바른 길임을 증명하려는 증거는 무엇인가?첫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신 부분이다.(창 15:6) 창히 큰 상급 이니라"하나님께서는 착잡해 있는 아브라함을 위로하시고 자신이 상급임을 보여주시고 후손에 대해서 언급하신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상속자를 다메섹의 엘리에셀로 선택해 놓은 상태였다. 사라의 태가 닫혔기 때문에 더 이상 후손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되지 아니하고 사라의 태속에서 날 자가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는 의롭다함의 자격을 받았다. 그가 의롭게 된 것은 그의 행위가 가미된 것은 결코 없고 그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 다만 마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을 뿐이다.둘째,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러므로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앞서 정하여진 언약을 없이 하지 못한다.(갈 3:17) 즉 율법이 언약의 내용인 구원의 길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이 약속은 여럿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다고 하였다. 그가 그리스도이다.(갈 3:16) 아브라함에서 시작한 언약은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성취된다. 바로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나타낸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는데 그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 길을 가리키고 있다.그렇다면 이제는 율법은 필요가 없는 것인가? 수천년 동안 지켜졌던 이 율법은 사라지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율법의 기능을 살펴보자.첫째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죄인임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둘째로 율법은 악이 세상을 지배하여 세상이 무질서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견제하는 통제장치로서 기능을 발휘한다.셋째로 율법은 신자들이 현재와 미래의 생활을 해나가고자 할 때 생활지침으로서 작용한다. 율법은 처음부터 구원하고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그것의 역할법이 구원의 통로는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위에서 율법의 기능을 이야기했듯이 율법은 죄를 정죄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여 율법이 나에게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반드시 따른다. 기독교 윤리는 율법의 기준에 준하여 이루어진다. 특히 구약의 율법중 도덕법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믿음으로 인하여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전히 세우는 것이다.(롬 3:31) 그러나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요즈음 기독교인들이 윤리적으로 바른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하여 윤리와 성화를 너무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칭의의 근거로 율법을 강조한다면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지금까지 믿음과 율법에 대해서 논했다. 이제는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된다.(갈 3:27) 이 사람은 성령의 역사아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옷을 입었으니 옛날의 더러운 옷을 그리워하여 윗도리만 새 것을 입고 아랫도리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거나 더러운 속옷을 입고 새 옷을 입는 일은 새 옷을 더럽히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옛날의 더러운 옷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하고 더 이상 더러운 옷을 그리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새롭게 된 우리들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관계가 성립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격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었는가 아니면 입지 않았는가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우리는 그리통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였다.(갈 4:1-6)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의 새로운 삶, 즉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초보적인 종교의 원리들에 종속된 모습을 묘사한다. 날과 절기와 해를 중시하는 것을 보고 가슴아파하면서 다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하고 있다.(갈 4:19) 옛것의 더러운 옷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되는데 다시 주워 입으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면서 그의 수고가 헛되이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알리고자 하였다. 우리도 선을 많이 행하여 나의 의를 드러내려하고 남들 보다 더 많은 성경공부와 예배출석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갈 5:1에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3장, 4장의 결론부분이다. 그리스도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아가서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이 자유는 어떤 자유인가? 이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선언을 받아내기 위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만큼 완벽하게 율법을 행해야 하는 엄청난 부담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본문의 앞에서 반복된 질문인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언급하고자 한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히 율법에서 벗어났는가? 율법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율법을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대하게 된다.갈 5:13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섬기는 일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하였다.(롬 13:10) 율법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할 때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 19:18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랑은 강요가 아닌 우리의 마음에서 나온 진실한 사랑으로 어떠한 의를 얻고자 하는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임을 깨닫는다.그리고 갈 5:16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움을 입었지만 여전히 우리 속에는 죄성이 역사하고 있어 끊임없이 율법의 아래로 끌고 간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과 노력에 의지하지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한다면 무의식적으로 율법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결코 행하지 않을 것이고 율법 아래 있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성령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 자신을 철저하게 의탁한다면 그분이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기계적으로 행하여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고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강권함을 넘지 않는 차원에서 일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격과 자발적인 결단을 중시하신다.우리의 삶 속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알아보자. 육체의 일은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같은 성적인 타락을 가지고 온다. 성적인 범죄는 자신의 몸을 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성적인 타락을 경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의 모든 의지를 맡겨야 한다. 그리고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은 하나님의 십계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범하는 엄청난 범죄이다. 그리고 분쟁과 시기와 분냄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발생하는 육적인 일이다. 그리고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은 연합하지 못하고 분열하려는 죄의 특성임을 강조하는 죄악이다.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갈 5:19-21) 그와 같은 것들은 죄의 결과에서 오는 나쁜 습관과 같아서 끊을 수 없는 죄의 사슬에 묶여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강조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