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색깔의 왕국' 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베네통사는 1950년 가내수공업에서 시작해 한해 1억벌, 2조원 이상의 옷을 파는 세계적 패션기업이다.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젊은이들의 욕구를 가장 빠르게 잡아채 세계 캐주얼 의류시장을 장악한 베네통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이탈리아 북부 도시 트레비소 인근 폰차노 마을에 있는 베네통의 본사 건물은 17세기에 건립된 지방 귀족의 별장을 재건한 것이다. 건물 곳곳에 그려진 화려한 프레스코화와 5월의 맑은 햇살 아래 놓인 녹색 잔디밭은 베네통의 트레이드 마크인 '색' 과 잘 어울려 보였다.그러나 베네통 임직원들 가운데 성공비결로 색 자체를 강조하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었다. 페데리코 사르토르 홍보실장은 "전세계 경쟁업체 중 베네통처럼 발랄하고 감각적인 색깔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문제는 끊임없이 변하는 시장의 욕구를 잡아내 남보다 빨리 제품을 공급하는 능력" 이라고 강조하였다.베네통 그룹은 미국 뉴욕 번화가에서 알래스카 이름 모를 시골마을에 이르기까지 세계 가장 많은 매장을 갖고 있는 세계 최대의 의류생산기업이다.모기업인 베네통 S.P.A를 비롯해 50여개 계열사와 6,000여명의 본사직원을 거느린 베네통 그룹은 120여개국에 8,000개 이상의 소매점을 거느리고 있다.또한 한해 8,000만장 이상의 의류를 생산하고 80억 달러 매출에 8억 달러에 이르는 순이익을 벌여들이고 있다. 여기다 2개의 대규모 자체 공장에서 계절마다 250여 색상, 3,300여종의 제품을 전세계 80여개 판매대리인에게 독점 공급한다.베네통에는 전세계 120개 나라에서 수행되고 있는 모든 사업을 통제 관리하는 중앙본부가 있고, 이를 통해 별개의 사업들은 아주 섬세하게 유기적인 연결을 이루며 통합효과도 일반인의 예상을 뛰어 넘는다.여기서 베네통은 어떤 신화를 거쳐 경영전략을 가지고 발전하였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겠다.Ⅱ. 본 론1.베네통의 신화 및 발전사1) 베네통의 신화아버지 레오네 베네통, 누이 줄리아나 베네통, 남동차 부품까지 선보였다. 베네통 화장품도 생산하기 시작했고 컬러즈 오브 베네통이라는 이름의 여성용 향수도 나왔다.제품이 인지도를 얻기 시작하자 이번엔 루치아노의 동물적인 사업감각이 발휘돼기 시작했다.그는 전문매장에 초점을 맞춘 판매전략을 수립했다. 저가 전략까지 곁들여 베네통 제품은 단숨에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베네통이 확실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1984년 패션 사진작가 올리비에르 토스카니를 광고업무 책임자로 발탁하면서부터 다른 업체와 다를 바 없던 베네통의 광고는 이때부터 혁신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를 거듭한다. 신부와 수녀의 키스, 탯줄을 자르지 않은 갓 태어난 아기, 오열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는 에이즈환자, 흰색 바탕에 꽉 차게 나열된 컬러 콘돔 ... 자극적이고 쇼킹한 일련의 광고는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베네통이라는 브랜드를 전세계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직력, 효율, 확실한 이미지, 효과적인 광고, 이 모든 것이 베네통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요소이다.2)베네통의 혁신적 발전사(1) 스웨터 제조 아이디어베네통의 창업자이며 현재 베네통그룹의 대표인 루치아노 베네통은 베네통의 가장 중요한 혁신으로 스웨터를 제조하는 아이디어를 꼽고 있다. 195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는 스웨터가 시중에 그다지 나와있질 않았다. 그래서 루치아노 베네통은 이 전혀 새로운 시장에의 수요를 기대하고 시작하였다.마침 젊은 세대가 케주얼웨어를 찾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스웨터는 딱 맞는 제품이었다.참신한 색을 많이 제작한 것도 색채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매력이라는 단순 명료한 발상에서 나왔던 것이다.(2) ‘후염색’ 기법이것은 스웨터 형태를 마름질한 후에 염색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색을 중시하는 방침에서 나온 것이다. 스웨터 모양을 미리 만들어 놓은 후에 필요한 색을 염색하는 방법이라 컬러 유행을 곧바로 뒤쫓을 수 있고 재고를 남기지 않고 신속하게 상점에 진열할 수 있었고, 이러한 후염색 기법은 노동집약적인 니트의 생산특징을 합당한 폭넓은 구색을 갖추기 위한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이 기반 조성의 열쇠는 네 가지의 특징이 있다. 우선 소비자에게 강력한 상품개념을 인식시키는 것으로 요컨대 자사가 제공하는 여러 계통의 상품에 일관된 이미지를 갖추는 것과, 두 번째가 효율적인 정보시스템의 도입으로 소비자의 동향을 즉각 생산활동에 반영시키는 것, 세 번째는 고도로 자동화된 응용범위가 넓은 생산활동을 실행하는일, 그리고 네 번째는 이들 세 요소를 잘 조화시킨 소매점망을 구축하는 일이다. 이상이 사업가가 항상 꿈꾸는 성공의 비결이며, 말하자면 구매욕구를 일으키게 하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베네통이 만든 것이 이 시스템의 베네통 형태였다. 최소의 위험으로 가능한 한 빨리 회사규모를 확대시킬 수 있었고, 이 확대도 개개의 단위를 수평으로 연결하는 특이한 형태를 취했다. 이 형태는 ‘독립단위의 민주적 조합’으로 이러한 형태가 취해진 것은 심리적인 요소가 컸는데 왜냐하면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는 그룹이다.다시 말하면, 베네통은 베네통일가, 이윽고 친구와 동료들도 가세되어 판매대리인, 상점주인, 하청공장의 경영자 등의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면이 있는 관계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진부한 히에라르키(hierarchie. 피라미드현 신분상의 계층조직, 군대조직, 관료제도 등)를 만들어졌다. 결국 이러한 민주적인 조직은 베네통의 최대의 강점이 되었고 베네통이 단행한 혁신 중에서도 이 조직개혁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2. 베네통의 성공 전략1) 광고전략베네통은 옷을 파는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옷 광고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혀 무관한 문제들 폭력, 인종문제, 에이즈, 마약, 전쟁, 환경오염 등을 다룸으로서 인류가 처해 있는 현실문제를 직시하게 하는 것이 베네통의 광고이다.원래 이탈리아에서는 광고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의류회사 대부분이 광고를 하지 않았는데 베네통은 처음부터 광고에 예산을 많이 투자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구식 테크닉의 광고를 내보냈었다. 그러다가 1984년부터 광 후원하였고 외국 선수의 스카우트에도 후원하였다. 선수들에게 베네통 컬러로 된 녹색과 흰색의 유니폼을 입히므로서 광고효과를 보았다. 또, 사회공헌의 자세로서 1883년에 트레비조 교외에 “파라베르디(그린 경기장)” 라는 스포츠 경기장을 건설했는데 그 경기장을 모두가 베네통 스타디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지 측면에서 막대한 가치를 창출했다.2)물류 시스템 전략베네통 회사가 매년 큰 폭으로 매출을 확대시키며 급성장 할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가 최첨단 물류 시스템의 정확한 판매 공급과 재고 관리가 이루어 졌기 때문에 물류 시스템이 중요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1) 자동화 창고 시설의 위치 및 규모창고의 규모는 면적이 19000평방미터에 달하며, 상품을 보관하는 대형창고는 길이 170미터, 너비 83미터, 높이 20미터로 건축면적은 28만 입방미터이다. 창고 앞에는 길이 126미터의 선전과 하역을 위한 부지가 있다.설계는 스카파 건축회사에서 설계하였고 코마우사에서 공급한 자동화 시설 보유했다.그리고 베네통 그룹의 본부인[빌라미 넬리] 옆, 카스트레테에 위치 본사옆에 창고를 세운 이유는 빌라미 넬리는 새로운 상품과 생각이 창조되는 곳이고, 카스트레테는 이 같은 아이디어를 미래를 위해 구체화하는 여과처로 자리하기 위함이다.또한 창고 옆에는 폰차노 공장이 있어 지하로 된 통로가 있다. 이 통로를 이용해 완성된 제품을 바로 물류창고로 운반 할 수 있다. 또한 종합적인 창고와 본사 공장이 함께 모여 있다.(2) 생산 단계별 물류 창고의 기능정보 처리 단계는 전세계적으로 베네통 고객으로부터 받은 주문은 인포메이션 네트워크로 직접 연결돼 주문 명세표에 자동 삽입되고, 또한 창고내에 있는 컴퓨터의 parcel Expected(예상 상품) 파일에 저장된다. 여기에서는 모든 정보가 창고에 저장된다는 것이다.행정과 문서화 단계는 정보처리 단계와 동시에 이루어지며 출하를 위한 송장 작성 및 세관 절차가 법을 준수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단계이다.실제적인 생산 단계은 여러 공스 버스, 4개의 저장타워가 있다.복층높이 박스를 위한 창고은 (복층높이 라는 것은 옷걸이에 걸어야 하는 상품을 말함.) 13개층에 3만 6천 2백개의 복층높이 박스를 저장한다. 3개의 트랜스레이터, 1개의 트랜스 버서, 2개의 저장타워가 있다.크기가 1200x1200x1700인 팔레트로 운반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는 창고은 3천 2백개의 복층높이 박스를 저장할 수 있다.(5) 물류 차고 내의 제품의 이동공장과 직접 연결된 컨베이어 벨트에 의해 창고에 도착하는 것과 트럭에 실려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지는 것 등의 두가지 방법이 있다.상품분류기에서 제품을 분류은 두가지 방법에 의해 도착한 상품이 컨베이어 벨트로 들어와 리프트와 롤러를 사용해 바코드 스캐너에 의해 분류된다.타워의 선반에 적재은 분류된 상품은 타워의 선반에 적재 시킨다.추진기에 의해 트랜스 버서 위의 트렌스 레이터로 이동한다. 트랜스레이터의 적재된 상품은 각 저장소에 적재된다. 창고에서 나가는 상품에 대하여서는 들어오는 것과 반대로 움직인다.이렇게 해서 총 23만 6천개의 자리에 상자를 배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중앙 컴퓨터와 연결된 처리 장치에 의해 이루어진다.이러한 창고 규모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매출액 1조8천억원, 전세계 7천개의 매장, 7천5백가지의 상품 모델수, 연간 8천만 피스가 넘는 어마어마한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3. 루치아노 베네통의 경영 스타일베네통의 경우 원래 가족으로 시작한 회사이기 때문에 회사경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각 분양의 전문가에게 독립된 형태로 가세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루치아노 베네통이 총책을 맡고 있지만, 회사를 시작했을 당시부터 누이동생 줄리아나가 함께 했고, 조금 지나서부터 남동생 질베르토와 카를로도 거들어 그룹의 형태를 취해 왔다.하청제도도 상당히 일찍 도입하였고, 1982년 조직개혁에서는 많은 관리직도 탄생하였다. 이것은 권한 위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루치아노 베네통의 생각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주위의 사람들과 협력해서 일한이다.
프랑스 혁명에 관하여…9조 발표자:이상훈혁명의 시작 원인구제도의 모순 * 제 1신분(성직자)·제 2신분(귀족)의 특권적 지위 * 제 3신분(시민, 농민, 수공업자, 소상인)시민계급의 활동 신분제 사회에 불만 계몽사상의 수용농민의 활동 봉건적 공납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림 시민계급의 움직임에 동조할 태세 갖춤혁명의 시작루이 14세 시대 말기 이후루이 16세 미국독립혁명 참전튀르고와 네케르의 재정 개혁안 실시 주장국민회의국민회의 결성국왕의 국민회의 무력 탄압일부 진보적 귀족과 평민 대표,하급 승려등이 중심 테니스 코트의 서약파리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전국적인 농민 봉기의 빈발혁명 전개 과정* 봉건적 특권의 폐지 결의* 헌법제정(1791)-입헌군주제·단원제 의회*개혁 조치 - 교회재산의 몰수, 길드의 폐지, 지방행정제도의 개혁 등* 바렌 도피사건-국왕의 국외 탈출 기도혁명의 과격화와 공포 정치혁명의 과격화입법의회 시대국민공회 시대공포 정치자코뱅당의 권력 장악공포 정치 실시총재 정부총재정부 수립총재정부의 무능과 부패* 루이 16세의 일기와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에 의해 처형당한 루이 16세(1754∼1793)는 노는 데 매우 열심이었던 군주였다. 그의 취미는 3일에 한 번 정도 사냥을 하는 것이었으며,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일기에는,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오직 사냥에 관한 거 밖에 씌어 있지 않으며, 사냥을 하지 않은 날에는 아무 기록도 하지 않았다.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당한 1789년 7월 14일, 그의 일기에는 그저 날짜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의의 및 결과전형적 시민혁명 자유,평등,박애의 이념 제시 정치; 절대왕정 타파 경제; 봉건적 잔재 제거 사회; 신분제에 기초한 법적인 불평등과 특권타파 사상; 계몽사상 확립{nameOfApplication=Show}
수출에 있어 영향을 미치는 제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수출하는 품목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며 따라서 그 요인도 아주 다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크고 공통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뽑아서 그 요인들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을알아보도록 한다.환율일반적으로 환율의 변동은 수출 및 무역수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환율의 변동이 수출에 미치는 경로를 살펴보면 수출품에 대한 수요변동의 요인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외국통화로 표시된 수출품의 가격의 변동을 통하여 수출물량 및 수출금액을 변동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때 환율변동이 수출가격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적인 영향과 간접적인 영향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먼저, 환율이 변동할 경우 수출가격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수출의 수익성이변하게 되어 외국통화로 표시된 수출가격을 조정하게 되는 것이다. 즉 국내통화가외국통화에 대하여 그 가치가 하락할 때 국내통화로 표시된 수출품의 가격은 상승하게 된다. 이때 수출품의 원가가 종전과 같다면 수출의 수익성은 높아지게 된다.따라서 환율이 상승할 경우 외국통화로 표시된 수출가격을 인하할 수 있는 여유가발생하게 된다. 반대로 환율이 하락할 때 외국통화로 표시된 수출가격을 종전과같은 수준에서 유지할 경우 국내 통화로 환산한 금액은 하락하게 되어 수출의 수익성은 악화된다. 따라서 수출기업들은 환율이 하락할 경우 외국 통화로 표시된 수출가격을 인상하게 된다.환율변동이 수출가격에 미치는 간접적인 효과는 수출품 생산요소가격의 변동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환율이 변동할 경우 수입가격, 국내물가 등 생산요소의 가격이변동하게 되고 수출품의 생산원가에 영향을 미쳐서 수출가격이 변동할 수 있다. 환율이 하락할 경우 국내 통화로 표시된 수입품의 가격은 하락하게 된다. 따라서 해외로부터 수입되는 부품이나 원재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제품의 생산원가는 환율이 내려감에 따라 하락하게 된다. 또한 환율하락으로 인하여 수입품의 가격이 하락할 경우 전반적인 국내물가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고 나아가 근로자의 임금안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물가가 하락하고 임금이 안정됨에 대하여 근로자들의 노동생산성이 상승할 경우 수출품의 생산원가는 하락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경로를 통하여 환율하락이 수출품의 제조원가의 하락으로 이어질 경우 수출가격이 하락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대로 환율이 상승할 경우에는 국내 통화로표시된 수입품의 가격은 상승하게 된다. 따라서 해외로부터 수입되는 부품이나 원재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제품의 생산원가는 환율이 올라감에 따라 상승하게 되고 환율상승으로 인하여 수입품의 가격이 상승하여 전반적인 국내물가의 상승으로이진다. 이로 인해 근로자의 실질적 임금이 하락하고 근로자의 노동생산성은 하락하게 된다. 이러한 요인들이 제조원가의 상승으로 이어질 경우 수출품 생산원가는상승하게 되고 따라서 수출가격이 상승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이와 같이 볼 때 환율변동이 수출가격에 미치는 직 . 간접적인 효과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환율이 하락할 경우 직접적인 효과는 외국통화로 표시된 수출가격의 상승으로 나타남에 비하여 생산원가의 조정을 통한 간접적인 효과는 수출가격의 하락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환율변동이 수출의 수익성에 미치는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반면 생산요소의 가격에 미치는 효과는 시차를 두고 점진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환율의 변동은 외국 통화로 결제받은 수출대금을 국내통화로 환전하는 순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앞으로 선적할 수출품의 수익성에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이미 선적을 완료하고 대금을 결제받지 못한수출품의 수익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환율이 변동하더라도 해외로부터수입되는 물품가격의 변동을 통한 국내물가와 임금 등 생산요소가격의 변동효과는생산요소에 따라 상당히 긴 시차를 두고 실현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환율변동이후 국내 통화로 표시된 수입품의 가격 변동효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나타나지만 수입물가의 하락이 국내 생산자물가의 하락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보다 긴 기간이소요될 것이다. 따라서 환율변동의 효과가 국내 소비자물가 및 임금의 변동으로나타나기까지는 더욱 긴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환율의 변동이 수출가격에 미치는 효과가 완전히 실현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2) 관세수출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무역국들의 정책을 들 수 있다. 이러한무역 정책에는 수입 억제정책과 수출 촉진 정책이 있다. 수입 억제 정책이라 하면보통 관세정책을 의미하게 된다. 또 수출 촉진 정책으로는 국가의 금융, 행정적 지원을 들 수 있다.1>관세정책 :종가세(수입액에 일정률 부과)물품의 가격을 과세표준으로 하는 관세이다. 종가세는 종량세보다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이미 고대와 중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동일한 물품에 대하여 동일한 비율의 관세를 부과하더라도 그 물품의 가격이 상승하면 관세수입도많아지며 가격이 하락하면 관세수입이 적어지는 것이 종가세의 특징이다. 종가세는 관세의 과세표준을 물품의 가격에 의하여 세율을 책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점에는 ① 관세를 상품가격에 따라 공평하고 균등하게 부과할 수 있으며, ② 상품의 가격이 등락하더라도 과세부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고, ③ 아무리 급격한인플레이션이 발생하더라도 세율설정 당시와 동등한 관세를 부담시키게 되어 안정된 재정 확보를 기할 수 있는 점 등이 있다.이에 반하여 단점으로는, ① 상품의 가격은 시간과 시장에 따라 항상 변동되므로과세적 정가격을 정확히 포착하기가 어렵고, ② 과세적정 가격의 정확한 포착이곤란함에 따라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따른 복잡한 절차와 비용이지출되기도 하고, ③ 동일물품이라도 상품의 적출국에 따라 시장가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과세상에 차이가 생기며, ④ 근거리 수입을 촉진시키고 원거리 무역
신앙, 종교는 원시시대 때부터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왔다. 한국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선 오래 전 부터 많은 종교들이 유행해 왔다. 따라서 그 종교들의 종류와 끼친 영향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그 중에 그나마 한국의 문화에 예부터 현재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는 신앙, 종교들을 꼽으라면 불교, 기독교, 유교, 도교, 풍수지리사상, 무속신앙을 꼽을 수 있다. 앞의 네 가지는 외국에서 전래된 종교들이며 뒤의 두 가지는 한국의 전통 민간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제 이러한 종교, 신앙들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을 종교별로, 또 분야별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1) 불교불교는 석가모니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한 교법을 종지로 하는 종교이며, 기원 전 후에 인도 ·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다.한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6월 진나라의 순도와 아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이불란사 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삼국 시대에 민간에서는 천신을 비롯한 여러 자연신을 섬기는 무속, 점술 등의 토속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국왕은 시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면서 천신의 후손으로 자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그러나 중앙 집권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이러한 여러 신앙을 가지고서는 확대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었다. 이에 삼국은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불교는 사회 윤리와 호국 사상 을 심어 주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의 불교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시기에 만들어진 석가탑, 다보탑, 석굴암 등의 신라 건축물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적 건축물 중에도 가장 빼어난 수준을 자랑한다. 또, 삼국은 불교를 통하여 음악, 미술, 과학 기술 등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 과정에서 중국과 서역의 문화가 우리 나라에 전해져서 민족 문화 발전의 기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인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신앙의 근본교의로 삼는다. 한국에는 18세기에 가톨릭이 처음 전래되고, 프로테스탄트가 19세기에 들어온 이래 꾸준히 교세가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는 가톨릭을 천주교, 프로테스탄트를 개신교 또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라고 부른다. 가톨릭은 처음에 서학이라 하여, 일종의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이 베이징에서 마테오 리치의 저서인《천주실의》를 가지고 돌아와 소개한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천주교로 개칭하게 되었다.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서양 학문으로서 한국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공리공론에 빠진 형식적인 주자학에 반대하고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실학운동의 발생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후 학자들은 점차 가톨릭의 종교적 진리를 깨닫게 되어,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뚜렷하여졌다. 가톨릭이 한국에 전래된 것은 당시 정치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약소민족으로서의 고난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는 어지러웠고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이러한 때였으니,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새 이념과 사상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역사의식이 강한 학자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주자학을 배척하고 새 학문인 서학에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주자학에 지배되고 있던 조정과 충돌하게 되어 많은 박해사건을 초래하였다. 1791년(정조 15)의 신해사옥,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 1839년(헌종 5)의 기해사옥 등이 일어나 외국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1882년(고종 19)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면서, 비로소 한국땅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 후 조선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에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주요 종교의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가 한국에서 종교로 발전 될 무렵, 한국은 주변 열강국과 서유럽 열강국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이 점차 현실화되어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나라의 학제인 국학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에 이미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에 통하게 하고 사부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명종 ·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퇴계 이황 · 율곡 이이가 가장 뛰어나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 이이를 ‘동방의 성인’이라 할 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이후 유교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당쟁과 예송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리공론만 거듭되는 순리학파를 대신하여 실사구시의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파가 대두하였다. 그러나 이 학파는 때마침 동점(東漸)한 서학(西學)에 물들었다는 혐의로 조정의 탄압을 받아 끝내 탁월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그 후 성리학이 부흥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이들은 여전히 여러 학설로 갈리어 자기 학파의 학설만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의 이같은 유학자들의 지나친 형식과 체면에 집착하는 완고와 고집은 한국 개화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다만 일제의 침략으로 국세가 위급하자 안중근 등의 유학자가 앞장서서 애국의 대의를 펼쳤다. 8 ·15광복 후 전국 유림의 조직체인 유도회를 결성하고 성균관대학을 창립, 유교정신에 의한 새로운 민주교 띄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잡유되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여 현세이익을 희구하는 양재기복의 기축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도 재초(도교행사)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조광조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려진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하여 왔고 식자층에서는 노자 ·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는가 하면 참동계 용호비결 등의 도서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 ·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도교 역시 유교처럼 현재로서는 종교로서의 역할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들의 생활 습관 속에 뿌리 박혀 있다고 할 수 있다.5)무속신앙. 한국 무속의 샤머니즘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긍정 ·부정으로 학설이 나뉘며, 또한 북부의 강신무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계통이고 남부의 세습무는 남방계의 주술사 계통이라는 설도 있으나, 무속은 그 전체가 샤머니즘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념이다. 한국 무속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지만,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은 왕호이자 무칭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무당의 기록이 보인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대다수 민중 속에서 크게 변질됨이 없이 로 오늘날까지 우리 민간신앙으로 뿌리 깊은 신앙이 되어 있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었고, 결국에는 그것으로 멸망하고 말았다고 할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가졌고, 조선시대에도 비결 신앙으로 상당히 힘을 발휘하였다. 풍수의 요체는 문자 그대로 바람 물의 자연조건의 힘에 의존하는 신앙이다. 자연조건을 전재로 하는 점에서 자연 과학적 요소가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자연에 대한 신앙이지 과학은 아니다. 즉 인간의 죽은 시체를 묻으면 자연에 묻힌 뼈가 생기를 타고 동기에게 영향을 입힌다는 신앙이다. 삼국시대에 도입된 풍수사상은 신라 말기부터 활발하여져 고려시대에 전성을 이루어 조정과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개경도 풍수상의 명당이라 하여 《삼국사기》 , 이중환의 《팔역지》,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 등에도 개경의 풍수를 찬양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것도 그 태반의 이유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이다. 즉 개경은 이미 지기가 다해 왕업이 길지 못할 것이라는 풍수가들의 의견에 따라 구세력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신 왕조의 면목을 일신하기 위해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 밖에도 《정감록》을 믿고 계룡산이 서울이 된다는 등 실로 풍수지리설이 국가와 민간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 현재 일반의 관념으로 보면, 풍수란 묘지의 길흉을 점치는 법술로 생각되고 있다. 풍수는 묘지의 길흉에 한한 것이 아니라 지리의 여하에 따라서 인생에 미치는 화복의 영향을 연구하고, 그 화를 피하고 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때로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쓴다던지 남의 무덤을 파내는 등의 비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이로서 우리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종교, 신앙을 대충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과거에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며, 또는 백성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 주면서 발전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면서 그러한 기능은 많이 약화되고 대신 형식적인 절차에 치중하는 껍데기 뿐인 종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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