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ⅰ시작하는글ⅱ중간글제 1장 불교와 여성의 지위제 2장 성차별 없는 재산상속제 3장 호적제도상의 여성의 지위제 4장 고려여성의 혼인, 이혼, 재혼제 5장 박유의 상소사건제 6장 고려여인의 일상생활제 7장 그래도 존재했던 고려시대의 남존여비ⅲ마치는글ⅰ시작하는 글태초부터 현재까지 여성과 남성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함께 공존하고 있는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사회가 가장 아름답고도 이상적인 사회라 생각한다. 여기서 조화라는 것은 남과 여가 각자의 열활을 줄을 그은 듯이 명확히 분담하여 사는 사회, 다만 남과 여가 존재하며 어울어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며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구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그 시기부터 지금까지 대부분 여성들은 남성에게 있어서 핍박의 대상이 되어왔다. 석기 시대에 모계중심의 사회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확실치 않는 추측에 불과하다. 나는 인류역사상 단 한 번도 모계중심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남성이지만 남성을 지배하는 것은 여성이라 는 소리없는 외침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합리화 시킬 뿐 단 한 순간도 여성은 남성들의 그늘 밑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석기시대 남성과 여성이 존재했을 때는 힘과 무력이 중요시 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약한 여성은 그러한 권력 싸움에서 배제되면서 오늘날까지 남성들을 위한 전리품의 역할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여성들에게는 성리학의 도입으로 인권조차도 용납되지 않았다. 남성들의 외도조차도 웃는 낯으로 받아들여야 했고 후손을 낳지 못한다 하여 쫓겨나는 등 비참한 대우를 참아야만 했다. 이러한 500년간의 뿌리 깊은 사상들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어서 남성의 외도나 이혼이 흉이 되지 않는 반면 여성의 외도나 이혼은 약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나는 이렇게 열악한 여성의 위치에 분노하며 21세기를 내다보는 오늘날 여성의 지위를 다시 한 번 의 차이점은 부(父)가 아니라 부모(父母)를 더욱 강조한 점이다.제 2장 성차별 없는 재산상속고려시대에는 이미 토지 사유가 발달하여서 농민들은 조상 대대로 보유해 온 토지가 있었는데, 이는 상속을 통해 전래되어 왔기에 고래(古來)의 정전(丁田) 이라고도 하고 민전이라고도 한다. 민전은 남녀 균분상속되었다는 사실은 거의 통설화되어 있어, 소유권 상속을 통해서 여자가 토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부모의 유언이 없을 경우 재산은 자녀간에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남녀 균분상속과 관련된 소송이나 사건이 사료 상에 등장한 시기는 인종(1122-1146) 때이다. 이지저는 풍표(風標)가 영아(英雅)하고 마음가짐이 관후하여 문장과 사업이 당대에 걸출하였으나 단 인색하여 父가 죽자 제매(弟妹)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았으며... 라는 인종대의 사료가 있다. 이는 균분상속이 적장자 우위 상속으로 서서히 변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 당시 이지저는 사람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아 널리 유행하던 상황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1남 5녀를 둔 나익회의 母가 재산을 균분상속하지 않고 아들에게 노비를 더 주려하자 아들이 이를 거부하고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는 사료 역시도 당시의 소송이나 분쟁들이 유교적인 정치 이념을 실현시키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부장적인 정치이념과 오랫동안 전해져 온 관습법이 상충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여겨진다.재산을 균분 분할 한 것은 그에 상응하는 노동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즉, 균분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 상응된 노동과 역할의 의무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재산상속에 따른 자녀의 의무는 부모 살아서는 부모 봉양을 잘 하는 것이고, 부모 죽어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를 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 생전에 부모에 대한 봉양은 조선 후기 이후에는 전적으로 장남의 몫이었던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딸도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 중기 이래로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장자의 책임이었고 이런 책임을 맡은 장자는 그 의무에 상응하결코 성차별이라 볼 수 없다라고 생각된다.제 3장 호적제도상의 여성의 지위고려시대는 양측(兩側)적 친속사회 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친족의 범위가 조선시대에 부계(父系)만을 강조하였던 것과는 달리 모계(母系)도 역시 거의 같은 비중으로 중시하고 있던 사회라는 의미이다. 고려에서는 그만큼 친속 내에서 외가나 처가의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기에 처족이나 외가의 친족 내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오복제(五服制)이다. 오복제는 상례(喪禮)에 상복을 입는 친족의 범위와 상복의 종류를 정한 법이다. 아버지의 상에는 가장 높은 단계의 상복인 참최 3년복을 입고 어머니 상에는 자최 3년복을 입으며, 조부모 상에는 그보다 낮은 단계의 상복을 입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웃나라였던 중국에 비해 고려시대에 시행되고 있던 오복제는 상대적으로 처족이나 외가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즉 중국에서는 외할아버지 상에 5개월 상복을 입은 것에 비해 고려의 경우는 1년 상복을 입고 있으며, 중국에서 상복을 입지 않았던 처의 형제에 대해서 고려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그만큼 고려시대에는 처족이나 외족이 친족 내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따라서 그마큼 친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남편이 없는 경우에 여성은 아들이 있는 경우에도 호주(戶主)였으나 고려말에서야 남성호주제로 굳어졌다. 자녀의 기록도 연령순이었고, 아들의 다음으로 딸을 기록하는 조선후기의 호적형태와 달랐다. 묘지명 등의 기록을 보면 낳은 자녀의 수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무조건 몇남 몇녀 라는 식으로 기록하지 않고 출생 순서에서 딸이 먼저인 경우에는 몇녀 몇남 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문제인 듯 싶지만 당시 여성의 지위를 단편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상속받은 몫에 대한 여성의 재산권 행사가 인정되고 보호되었다. 호구단자 등에 기록된 노비의 기록을 보면, 노비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점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는 되는 일이 허다하였다. 처가살이가 고려시대 일반적인 결혼 생활의 한 가지 유형이었던 만큼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자들이 시집살이를 강요당했던 조선시대에 비하면 고려의 여성들이 친정에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한 특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비록 시집살이를 하였더라도 남편이 사망하여 과부가 되었을 경우 계속해서 시집살이를 해야만 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의 경우에는 과부들 중 상당수가 친정에 되돌아가서 생활을 하였다.여성들의 외출도 자유로왔으며 남자들과 접촉할 기회도 많았다. 따라서 남녀간의 교제도 퍽 활발하여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는 등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다소 문란하였으므로 여자에게 수절(守節)을 강요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혼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와 송나라 사신의 고려 견문기인 고려도경 을 보면 고려인들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하니 가소로울 뿐이다 라고 되어 있다. 이는 이혼이나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시대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려사에 나타난 혼인사례(婚姻事例)를 보면 이혼할 경우, 처(妻)가 함부로 남편을 떠나 갈 경우 도형(徒刑) 2년에 처하고 가서 재가하였을 경우는 2,000리의 유형에 처하고 같은 죄를 첩(妾)이 저질렀을 경우는 도형 1년반 재가했을 경우 徒2년반형에 처하며, 사정을 알고 장가들었다면 재가(再嫁)한 쪽 남자도 같은 죄로 다스린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성은 무조건 자의(自意)로 이혼할 수 없으며 여성측이 권리나 의사를 반영할 여지가 없는데 비해 남성의 경우는 부모와 의논하여 합의를 보고 또 이혼이유만 정당하게 내세우면 어느 때고 이혼할 수 있었다. 당시 관례적으로 지켜지던 남편이 일방으로 이혼할 수 있던 조건은 다분히 추상적인 동양고래(東洋古來)의 칠거(七去)의 조건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사고불근(事姑不謹) 이니 유악질(有惡疾) 을 이유로 이혼한 당시의 사례가 전하고 있다. 칠거의 조건에 부합되고 남자가 원할 경우 쉽게 이혼할 수 있었고 그하며, 따라서 여성의 재혼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제 5장 박유의 상소사건대담했던 고려여인들의 예로써 이장에서는 박유의 일례를 들어보겠다.원 간섭기에 박유라는 재상이 상소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의 고하를 물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 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인원수의 제한이 없이 장가를 드는데 이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모두 북쪽으로 몰려가게 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처와 첩을 두게 하되 그 관품에 따라서 그 수효를 줄여서 서인에 이르면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얻도록 법제를 만든다면 원성은 줄어들고 인구는 번성될 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도리도 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전통적 혼인 제도인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도록 여성들의 집단적인 시위가 있었고 박유 그 자신의 아내 역시도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 대문을 걸어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재상들 중에 자신의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박유의 건의는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예로 보아 비록 여성들이 직접 국정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려시대 여자들의 언권은 꽤 강했던 것 같다.제 6장 고려여인의 일상생활고려시대 여성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에 비해 외출이 비교적 자유로와 남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음은 앞에서 설명하였다. 따라서 남녀간의 교제도 퍽 활발하여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다소 문란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남녀의 내외(內外)가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사료에는 남녀의 구별없이 의관을 벗어 계류(溪流)에 목욕(沐浴)하였으며 이것을 이상하다거나 괴이(怪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기의 사대부 여성들은 권문세가의 집안에 출입하며 남편의 이권운동(利權運動)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때로는 사회적 물의를 자아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 예의 하나로서, 공민왕 때의 집권자인 신돈(辛旽)의 행적을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