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요서 경략설의 검토목 차Ⅰ.서론Ⅱ.본론1. 요서영유 기사에 관련된 사료2. 백제의 중국 진출지의 지리적 위치3. 요서경락 기사의 분석4. 진출의 배경과 성격Ⅲ.결론Ⅰ. 서론《송서》의 백제전을 비롯하여 《양서》, 《남사》등의 남조계 사서에 기록된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사는 조선 후기 이래로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특히 근래에는 대중매체 등을 통해 이 문제가 선전되면서 일반인들의 관심도 상당히 높아져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갖게 되어 많은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는데 이들 연구의 주된 내용은 남북조대 중국의 정세와 백제의 세력정도를 파악하여 백제 요서영유에 대한 사실의 긍정이냐 부정이냐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내용은 오직 중국의 남조계 사서에만 전하여지고 있는 특수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 기사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우선 중국의 남북조대 중국인들이 백제 고구려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가 하는 점을 이해하여야만 할 것이다. 남북조시대의 사서에서도 당시의 동북 아시아상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용이 당사국인 북조계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남조계의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남조와 북조에서의 이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백제의 사료에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이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기록된 남조계 사서인《송서》, 《양서》, 《남사》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본 보고서에서는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여러 견해를 살펴보고 백제의 요서영유설이 발생하게 된 당시의 동아시아의 국제적 상황을 백제의 진출 배경 및 시기와 지역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Ⅱ. 본론1. 요서영유 기사에 관련된 사료백제의 요서영유에 관한 기록중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송서》는 梁의 沈約이 남제 영명 6년(488)에 편찬한 사서이다. 양의 沈約이 남제 영명 6년(488)에 편찬한 사서이다. 《송서》 〈백제전〉대중관계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동시대적이라고 하기 힘들다. 요서영유 기록 또한 대체적으로 《송서》의 답습으로 보이며 《남제서》의 내용이 첨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치소를 요서 진평이군으로 표현하고 있다.《남서》도 唐代에 편찬된 사서이다. 백제의 위치에 대하여는 《송서》를, 요서영유기록은 《양서》를 그래도 답습하고 있다. 《통전》에 의하면 요서 진평의 위치를 ‘今柳城北平之間’으로 기록하고 있어 위치의 추적에 참고된다. 이상에서 백제의 요서영유에 관한 직접사료는 송서, 남제서, 양직공도, 남사등의 제3자적인 남조계 사서에만 전하여지고 있는 것으로 요서영유의 당사국인 백제와 북조의 사료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2. 백제의 중국 진출지의 지리적 위치앞에서 사료를 통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가 중국에 진출하였다면 그 지리적 위치는 어디였을까?《송서》백제전에는 백제가 진출했던 곳을 요서군 지역이었다고 말하면서 그곳을 晉平郡 晉平縣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진출했던 요서군이 어느 시대의 요서군 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요서군의 위치를 오늘날의 요서 지역으로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상 행정구역은 여러 번에 걸쳐 바뀌었기 때문이다.(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행정구역이 바뀌지 않았는 데 지명이 바뀌는 예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그런데《송서》백제전과 거의 같은 내용을 싣고 있는《양서》백제전에는, 백제가 晉시대에 遼西?晉平 두 郡을 소유하여 스스로 백제의 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진출했던 지역은 진시대의 요서군과 진평군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진서》〈지리지〉에는 요서군은 보이지만 진평군은 보이지 않는다. 진평군은 다른 이름이 잘못 기록된 듯하다.진평군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므로 이를 확인하는 문제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요서군에 관한 기록을 보자. “요서군은 秦帝國에서 설치하였는데, 3개의 縣을 거느린다”고 말하고는 陽樂?肥如?海陽 등의 현이 있다고만 하였을 뿐 더 이상 자세한 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通典》〈州郡〉條를 보면 유성군에 대해서 동쪽으로 遼河까지는 4백80리이고, 남쪽으로 바다까지는 2백60리이며, 서쪽으로 北平郡까지는 2백 리이고, 북쪽으로 거란의 경계까지는 50리이다. 동남으로 安東府에 이르는 데 2백 70리이고. 서남으로 북평군에 이르는 데 3백70리이다. 라고 하였고 북평군에 대해서는,동쪽으로 柳城郡까지는 7백 리이고, 남쪽으로 바다까지는 1백리이며, 서쪽으로 漁陽郡까지는 3백 리이고, 북쪽으로 국경까지는 1백80리이다. 동남쪽으로 臨楡關에 이르는 데 1백80리이고, 서남쪽으로 馬城縣에 이르는 데 1백 80리이며, 서북으로 石城縣에 이르는 데 1백40리이고, 동북으로 柳城郡에 이르는 데 7백 리이다.라고 하였다. 유성군과 북평군은 요하에서 서쪽으로 4백80리 밖에 있었는데, 지금의 북경 가까이에 있었단 어양군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안평은 深州에 속해 있었던 현 이름인데, 심주는 戰國시대에는 조나라와 진나라에 속하여 上谷郡과 鉅鹿郡의 땅이었고 西漢시대에는 ????郡의 땅이었다고 하였다. 그곳은 지금의 하북성 안평 지역이었다.《신당서》〈지리지〉를 보면 유성군에는 현이 유성현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柳城縣은 중앙에 위치하여 서북쪽은 奚와 접하였고, 북쪽은 거란과 접경하였으며, 東北鎭의 醫巫閭山祠가 있고, 또 동쪽에는 碣石山이 있다.고 하였는데, 갈석산이 난하 동부유역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통전》인용문 내용 가운데 유성군과 북평군의 거리에 대해서 유성군조에서는 2백 리와 3백70리라 하였는데 北平郡條에서는 7백 리라 하여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한 차이는 唐시대에 행정구역 개편이 있을 때, 그 전과 후의 각각 다른 시기의 거리를 기록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유성군은 지금의 요하에서 서쪽으로 4백80리 떨어져 있었고, 동쪽에 갈석산이 있었으므로 그 위치가 지금의 난하 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평군은 유성군에서 서쪽으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있시키기 위하여 지금의 난하 서부유역에 교치되었던 것이다.위의 인용문 가운데 조선에 대한 설명은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요즘 통용되고 있는 중국 역사지도에 이 시기의 낙량군(樂浪郡의 이름이 변경되었음) 위치가 지금의 요하 서부의 대릉하 유역으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잘못은 고대의 요서와 지금의 요서를 같은 곳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오류인 것이다. 고대에 나타나는 요서는 지금의 북경 북부지역이었다. 광양군은 지금의 하북성 륭화 지역으로서 난하 상류유역이었고, 광릉군은 지금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었으며, 청하군은 지금의 산동성 익도 지역이었다. 그런데 성양군의 위치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남북조시대의 성양군은 지금의 하남성 신양 지역이었는데, 이곳은 중국의 내륙 깊은 곳이어서 백제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따라서 다른 곳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있는데, 앞의 광릉군과 청하군의 중간 지점에 晉시대의 성양군이 있다. 그곳은 지금의 산동성 ?縣 지역으로 바다에 가까운 곳이다. 이러한 지리 조건으로 보아《남제서》백제전에 보이는 성양군은 진시대의 성양군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가 중국에서 지배권을 행사한 것은 북위가 멸망한 뒤 북제시대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북제서》〈후주기〉와《삼국사기》〈백제본기〉위덕왕 17년조에는 북제에서 백제의 위덕왕을 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의 위덕왕이 동청주의 문무대권을 장악한 것을 북제가 인정했다는 것이다. 동청주는 지금의 어느 곳인가?《북제서》에는 지리지가 없다. 북위가 분열하여 서기 534년에 동위는 北齊, 서기 535년에 서위는 북주라고 나라 이름을 고쳤다, 따라서 북제는 북위의 행정구역 이름을 대개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므로《위서》〈지형지〉를 보면 청주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후한시대에는 치소가 임치였는데 사마덕종은 치소를 동양으로 하였고 위는 그것을 따랐다.고 하였는데《讀史方輿紀要》에는 청주에 대해서,처음에 北靑州의 치爲國家深害. 宜分其兄弟宗屬 徒于西境諸城 撫之以恩檢之以法 事不得散在居人 知國之虛實.(《晉書》권 109 慕容?載記)②-㉡ : 初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山 西徒近燕 而不說備 燕王? 遺世子儁 帥慕容軍?慕容恪?慕容根三將軍萬七千騎 襲夫餘.儁居中指授 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資治痛鑑》?권 97 목제 영화2년)③-㉠ : 是歲(490년)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 入其界 牟大遺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 率兵襲虜軍 大破之(《南齊書》백제전)③-㉡ : 永明六年(488年) 魏遺兵 擊百濟 爲百濟所敗(《資治痛鑑》권136 무제 영명 6년)③-㉢ : 永明二年(484년) 魏虜征之 大破百濟王卉都(《健康實錄》권 16 백제전)이상이 백제의 요서경락설에 대한 일이차적인 사료이다. 우선 ②-㉠는 345년에 백제 주민이 전연으로 도민하였고, ②-㉡은 346년 이전에 백제가 부여지역에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긍정론자들은 백제의 요서 진출 시기를 4세기 중반 이전으로 설정하고 3세기 후반 백제, 낙랑의 교섭기사, 2세기 초 마한, 현토 군의 쟁투기사등을 제시하기도 한다. 우선 ②-㉠는 345년에 백제 주민이 전연으로 도민하였다고 하고 있다. 당시 고구려, 단부, 우둔부 등은 345년 이전 전연의 침공을 받아 대규모로 도민된 적이 있으나 백제는 해당되지 않았다. 대신 전연이 285년 이래 부여인을 노획하였고, 346년에도 부여인 5만여명을 사민하기도 하였다. 이 자료에서는‘백제’가 ‘부여’의 訛傳일 가능성이 있다. ②-㉡에서는 부여가 전연의 침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에 따르면 346년 전연이 부여를 초략한 다음 북부여로 진공하려다 고구려에 저지당했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가 부여의 원거주지인 녹산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전에 부여를 공략한 주체도 고구려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백제’는 ‘고구려’의 訛傳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료 ③은 백제와 북위 사이의 군사충돌을 의미하고 있는데, 사료의 시점이 5세기 후반으로
廣開土大王陵碑의 檢討1. 序論 3) 僞作 “倭滿倭潰”2. 이진희의 주장 : 碑文造作說 과 파장 4) ‘倭’의 실체3. 능비의 재발견과 비문이 공개되기까지 6. 비문 연구의 현단계 - 해방 이후4. 비문 연구의 진전 7. 비문 연구의 문제점5. 신묘년기사와 경자년기사를 중심으로 8. 復元 廣開土大王 時代史1) ‘後’자의 삭제와 위작 ‘왜’자 9. 結論2) ‘後’자의 削除 再論1. 序論우리 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주목받는 왕을 꼽으라고 할때, 많은 지지를 얻곤 하는 왕 중에 한명이 바로 광개토대왕이다. ‘國岡上廣開上境平好太王’이라는 시호처럼, 국토를 넓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장수왕 3년)에 현재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퉁거우(通溝)에 세웠다. 높이가 6.39m에 달하는 광개토왕비문은 4면비로 1면 11행, 2면 10행, 3면 14행, 4면 9행, 각 행에 41자(1면 6행만 39자)로 총 1802자가 음각되어있다. 이 광개토대왕릉비가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한 것은 1880년으로 거의 140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비문 내용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구려 건국 내력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 업적, 묘를 관리하기 위한 守墓人烟戶등이 비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대외 정복 기록에는 중국을 쳐서 영토를 넓히고 왜를 격파하였다는 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과 일본인들도 대외 정복 기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역사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비문의 해당 부분을 쪼아내 알아낼 수 없게 했거나 석회를 발라 없는 글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상고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내가 일찍이 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集安縣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인 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나 필담을 나누었는데 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비가 오랫동안 草萊 중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이 지방 영희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중국바 있는 沈彦光이 압록강 너머로 능비를 목격하고 기록을 남겼다. 그는 고구려의 왕릉을 여진족 完顔氏가 세운 금의 황제묘로 생각했으며 역시 광개토대왕릉비를 금의 황제비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덧 광개토대왕릉비는 한국인 사이에서 잊혀지는 존재가 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능비에 대한 세 번째 기록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청이 중국을 차지하면서 집안지방을 비롯한 그 주위 일대에는 인적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는 당시 청조가 만주족의 발상지로서 집안지방을 지목, 봉금 제도를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집안지방과 마주하고 있었던 만포진 일대의 한국인들은 능비를 계속 관찰할 수 있었다. 순조 30년(1830)에 편찬된 《江界邑誌》에는 능비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데, 높이가 10丈(약 30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의도적인 과장이라기 보다는 직접 답사하여 실측하지 못한 채 그저 멀리서 바라다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광개토대왕릉비가 오랜 세월의 망각에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만주지방의 봉금을 해제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1860년대 이후 청조의 엄격한 봉금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유민수는 늘어나고 있었고 1870년대 후반에는 청조도 이를 기정사실화하여 이지방에 懷仁縣을 설치하기에 이르른다. 능비가 재발견된 것은 1880년 무렵으로 발견 당시 능비의 표면은 온통 두꺼운 이끼와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고 한다. 황폐한 고구려시대 고분에서 출토되곤 했던 옛 기왓장을 찾아나선 사람들에 의해 능비가 재발견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되자 회인현의 관리였던 章越은 막료로 데리고 있던 關月山과 함께 조사를 실시하였다. 관월산은 비면을 덮고 있던 이끼를 일부 베껴낸 다음 탁본 제작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탁본이 작성되는 시기는 장월의 후임 지현으로 부임했던 陳士芸때 즉, 1882년이 되어서야 가능하였다. 당시 탁본 재료가 나쁜데다가 탁본 기술마저 부족하여 이때 만들어진 탁본은 그 자체로 매우 조잡하였을 것이다. 할 수 있다. 1938~1940년 사이에 연구 및 집필이 이루어졌으나 해방 후에 발표가 되었던 에서 그는 비문의 내용 중 가장 난해하고 동시에 가장 중시되었던 辛卯年條 기사에 대해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일본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반박하고 ‘도해파’의 주어가 고구려이고 격파 대상이 倭이며, 백제가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정인보의 주장이 일본학계의 비문 해석과 대립되는 상황에서 그의 주장이 옳다면 남한경영론의 근거는 설 땅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주장은 1960년대 이해 북한 역사학계에 의해 전폭적으로 지지되었으면서도 정인보의 논문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5. 신묘년기사와 경자년기사를 중심으로1) ‘後’자의 삭제와 위작 ‘왜’자광개토대왕릉비의 전문을 밝힌 사까와의 쌍구가묵본은 맨 끝에 의외의 ‘後’자가 첨가되어 있었음이 특징이다. 사까와란 자가 1880년을 전후하여 육군 참모본부의 대청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작성하엿지만 쌍구가묵본의 4면 1행부터 8행까지의 하단 32개 글자와 제 9행 첫 글자 등이 이상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제 9행의 끝부분의 “...制令守墓” 뒤에 글자의 여백 뒤에 ‘後’자가 첨가된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1883년 일본 육군참모부가 ‘海軍御用’와 ‘宮內省圖書案’등의 한학자를 동원, 해독하여 내놓은 것이 일본 아세아협회에서 발간한 것이 1889년 6월에 펴낸 《會餘錄》 제 5집이다. 그 후 쌍구가묵본 제 4면의 잘못 편성된 부분을 바로 잡으면서 ‘後’자가 三宅米吉의 석문에서 삭제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사까와가 쌍구가묵본에 남긴 ‘後’자는 무엇을 의미하며 三宅米吉에 의해 삭제된 ‘後’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이 쌍구가묵본의 여섯 개의 ‘後’자 중에 어느 한자라도 이와 똑같은 형태로 쌍구가묵 되었어야 하는데 동일한 글자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총 6개의 ‘後’자가 있지만 육군하니 성이 복속되어 안라인을 융병으로 삼고 신라성 □성에서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다시 말해서 사까와의 쌍구가묵본과 三宅米吉의 석문과는 상반된 내용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부분은 ‘倭寇大潰’가 ‘倭滿倭潰’로 변조된 부분이다. 그런데 왕건군은 두개의 탁본의 차이에 대해서 ‘잘못’ 묘사된 것뿐이라고만 하였다. ‘倭寇大潰城內’6자는 자획이 약간 흐려서 잘 보이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틀리게 베낀 것일 뿐 의식적인 개찬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탁공인 초천부, 초균덕 부자가 자획이 약간 보이지 않는 상태라고 글자를 틀리게 베낀다는 것은 말도 안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배후에는 일본 제국주의 군부와 관학자들의 소행이 있을 확률이 높다. ≪회여록≫ 이후의 탁본, 특히 일제가 만주지역을 장악한 후에 나온 탁본에도 이렇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왕건군은 다른 채탁자들이 고증자의 석문에 영합하기 위해서 석회로 수식한 결과 많은 탁본의 구절이 모두 ‘倭滿倭潰’로 나온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왕씨는 사까와의 행동과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당시 행동이 밝혀졌지만 사까와와 일본 참모본부의 위조행동은 없었다는 식의 궁색한 답변이다. 다시 말해 왕씨는 비문의 엄연한 변조자를 발견하고 또 간첩활동과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음모가 밝혀졌다고 하면서도 결코 사까와나 참모본부에 대한 조작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노략질하다가 쫓겨났다.’는 내용을 ‘한나라를 지배했다.’는 내용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쌍구가묵본을 만들 때 일제는 왜에 유리하도록 ‘倭寇大潰’를 ‘倭滿倭潰’로 바꾸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의 2차에 걸친 현지조사에서도 ‘倭滿倭潰’로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倭寇大潰’와 일치하다는 결론이 나왔다.4) ‘倭’의 실체비문에는 동북아시아 정세가 어느 사서보다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비문에서 광개토대왕이 남긴 업적 중 남쪽의 여러 나라, 즉 백제, 신라, 왜구와의 관계에서 중심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문에는 총 ‘왜’가 여섯로 한 주변 여러 국가 혹은 종족과의 국제관계의 구조를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수묘인연호의 구성에 대한 자료를 통해 광개토왕 당시 영역 지배의 실태를 분석하였다.비문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주장한 이진희의 주장은 국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체로 변조설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동방연서회 발행의 ≪서통≫에서도 오래된 비문의 탁본 사진이 실리고 임창형 소장의 능비 탁본이 소개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검토가 행해지지는 않았다. 당시 학계의 들뜬 상황을 반영하는 분위기였다. 정인보의 비문 해석에 대해서도 대부분이 옹호 내지 추종하는 입장에서 이에 대해서 약간의 새로운 견해를 보태는 상황이었다. 이형구와 박노희는 자신들의 신설을 포함해서 능비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연구를 제기하기도 하였다.그러나 최근 비문변조설은 중국측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왕건군이 그간의 조사연구를 집대성한 ≪好太王碑硏究≫를 발표, 일본 참모본부에 의한 비문변조설을 비판한 것이다. 당시 탁본을 업으로 삼던 초천부, 균덕 부자가 울퉁불퉁한 비면에 종이를 대고 탁본해야만 했던 기술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 초씨 부자는 공정을 덜고 재료를 절약하기 위해서, 탁본 문자의 정확성을 위해서, 금석학자들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서 비면에 석회를 칠하거나 석회로 글자를 고쳤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봐야 겠으나, 그가 여러 종류의 탁본을 비교하면서 실제 비면의 글자와 한자, 한 구절씩 맞춰보면서 대조한 결과는 주목할 만하다. 1775자가 총 글자수임을 밝혀낸 점이라든가, 89자를 새로이 판독하고, 29군데 적발하는 등 180개의 부분을 해결한 점은 업적이라고 봐도 된다. 그리고 비문의 해석을 통해서 정인보의 신묘년조 기사에 대해 비판을 하였으나 남한경영설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 또한 일본에서도 비문 변조설에 대한 반론이 본격화되었다. 武田幸男은 조선학회의 공개강연에서 ‘원석탁본’의 문제를 제창하였다. 그가 말하는 원석탁계
고대의 지배 이데올로기1. 序論 7. 유교의 수용과 의미2. ‘샤머니즘’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 8. 나라 사랑과 치덕의 근본으로서의 忠3. 고대 한국인의 세계관과 샤머니즘 9. 사회교육의 표본으로서의 孝4. 고대 한국의 샤머니즘과 샤먼의 역할 10. 인간관계의 모범으로서의 仁義와 信5. 불교의 전래와 불교적 세계관의 적용 11. 유교적 덕목의 의례적, 공동체적 전개6. 세계를 보는 시각의 이동 : 祈福에서 求道로 12. 結論1. 序論한국 고대인들은 어떻게 삶을 인식하고 살아왔을까? 이는 한국 고대사를 이해하고,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문화전통을 이해하며 보편적으로 시공을 넘어선 인간을 바라보는 중요한 길을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어떠한 세계관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그를 통해 생활의 지침을 찾고 이상적인 생활의 방향을 설정해갔을까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논의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본고를 통해서 고대를 지배했던 생각의 체계, 즉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오랫동안 우리 민중의 삶을 지배했던 샤머니즘과 이후 국가에 의해 도입된 고급 종교인 불교, 그리고 불교와 함께 도입된 유교의 전래 양상에 대해서 역사적, 문화적인 시각에서 이해를 하게 되고, 불교에서 제시한 인간관과 유유교의 원리가 고대인의 생활에 끼치는 영향 등에 대해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2. ‘샤머니즘’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샤머니즘’은 복합적인 문화현상의 하나로, ‘초자연적 존재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가능한 샤먼을 중심으로 한 종교현상’이라는 것으로, ‘샤먼’이라는 존재가 초자연적 존재가 ‘직접적인’ 교류를 한다는 점에서 특징을 지을 수 있다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脫魂形과 憑依形의 두 종류의 샤먼이 있다. 시베리아 지역의 샤머니즘에서는 탈혼형이 우세하기는 하지만, 빙의형도 샤만의 특질을 기본적으로 규정짓는 ‘초자연적 존재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가능케하는 忘我(trance) 상태의 한 갈래로 보고 있다. 이러한 정의를 문제를 따라간다면 샤머니즘이란 ‘초자작하고 있다. 즉 창조신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20세기에 채록된 무가 중에서 우주기원론을 말한 신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유로 우선은 신화의 문자화 과정에서 고대사회에서 지식과 정보와 문자를 독점한 계층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건국신화를 선택하였다는 역샂거 배경도 생각해야 할 것이지만 고대 한국인들은 ‘기원’의 문제보다는 ‘현존’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문제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면서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세계와 삶에 대한 태도가 건국신화 같은 설명체계를 선호하고 이를 남기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여기서 우선 단군신화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단군신화는 문자로 채록된 시기도 너무 늦고 고려 시대 이후의 무속의 신념이나 의례체계를 너무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만큼이 고조선 시기의 역사 경험을 반영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신화의 구조와 거기에 포함된 사고체계는 고조선 당대의 것이며, 최초의 세계관의 반영물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다. 단군시환에서는 신들의 세계인 천P와 인간세상인 지상계가 서로 교류하고 조화하는 세계를 통해 그 존재를 더욱 확실히하고, 풍요로운 이상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이러한 세계관은 ‘초자연적 존재와의 직접적 교률를 통한 인간과 사회의 이상 실현’이라는 샤머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과 나무와 같은 매개체가 설정되고 있다는 점도 잘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의 신화들은 무게중심이 좀더 인간에 가 있는데, 인간을 뛰어넘는 신성성, 신들의 움직임에 의해서 인간세상은 보다 풍요로워진다는 믿음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신화들은 지배층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며, 이 조차도 고대인들의 기본적인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세계관은 인간에 의한 세계에 대한 인식이며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주구조론이나 형성론, 시간론, 영혼론, 내세론 등으로 전개되기도 하고 반대로 이런 것들이유지, 전승되었다. 몽고 등 북방민족의 풍속에 비쳐볼 때, 巫祝은 제사대상신을 친히 보고 그 의지를 알 수 있다고 믿었다는 기록에서 적절히 드러나 있다. 물론 그의 존재가 희박해진 다음에도 의식과 사유체계는 지속될 수 있었다. 보통 샤먼의 역할 및 기능을 설명할 때 사제로서의 기능, 치병자로서의 기능, 예언자로서의 기능 등인데 그러한 샤먼의 활동이 사회의 운영과 유지, 또는 변화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대 한국의 巫는 왕의 자문에 응하고, 점복과 예언을 하고, 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다스리며, 다양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샤먼이 국가와 사회의 존망에 관여하고, 그에 대한 방책을 시도하는 것은 그만큼 샤먼의 중요성을 의미하며, 신들의 힘과 그 세계와의 관계가 현재 사회의 존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가치는 ‘天 ’으로부터 구현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천의례가 중요시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였고, 그것은 사회의 통합에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제천의례를 통해 중심 지배집단의 대표성을 받아들이고 이런 문제들의 결정들에 대해 승복을 하는 사회적 가치의 합일을 이룰 수 있기 떼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천의례에 참가하지 않은 귀족을 하늘의 이름으로 처단함으로서 권력을 과시하는 것도 가능하였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제천의례의 주관자나 의식집단자들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제천의례의 복잡화, 형식화가 나타나면서 巫의 역할이 많이 위축되었던 것이 사실이나, 巫라는 매개체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당시 사회적 통합을 가능케하는 보편적 가치의 최고 구현자인 天에 제사를 주관, 내지 집전하였던 巫는 결국 사회적 가치의 창출자이며 유지자로서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다.역사 속에서도 巫의 중요성은 잘 드러나는데, 주몽이 군주임과 동시에 무당이기도 하며, 그와 동행한 오이?협부?마리 등 역시 무당으로 볼 수 있는 견해라든지, 혁거세와 석씨 왕실의 탈해가 무적인 성격의 왕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혁거왕의 서 확대된 보편적인 세계관의 정립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예를 든 인물인 대세는 내물왕 7세손인 귀족 출신으로 승려와 교류하면서 세속적 삶 이외의 다른 삶을 모색하였다. 귀산의 경우도 원광 법사를 통해 얻고 있기도 하다.당시 신라는 읍락사회가 해체되면서 등장하는 새로운 지식인들이 불교수용에 대해 주체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다는 논의로 지적, 사회적으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이들을 통해 불교가 전해주는 가르침이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불교 수용 초기에 전해진 불교의 교리는 업설로 윤리적인 성찰을 통해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삼국의 불교 수용 초기의 가르침은 모두 이 업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는 인간의 의지와 실천을 중시한다. 최치원은 모든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것이 석가의 가르침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에 받아들여진 불교적 세계관의 요체일 것이다.불교의 사회윤리를 대표하는 것은 자비정신으로 나 이외의 다른 인간, 다른 생물에게도 확대되는 정신이다. 순장을 금하고 살생을 하지 말라는 법령을 취했던 것은 불교적 자비정신의 수용의 국가적 표현이었다. 나 이외의 다른 인간, 다른 생물에 대한 확실한 태도는 잘 알 수 없다. 여전히 사냥이 중요한 생산활동 이었으며, 자신의 세계와 유지와 풍요를 위한 도구의 인식이 강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정신은 제한을 뛰어넘음으로서 보편성을 확보한다. 불교는 인간의 자각을 통한 실천을 전제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잘 드러나는 사상이 如來藏思想이다. 불교의 평등사상은 새로운 사회관계를 모색하고 있던 중앙의 하급관리와 지방의 지식층들에게 고무적인 것이었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국가지배체제를 지향하던 왕실세력에게도 정치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상이 불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계속해서 상기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불교의 정치이론으로는 비이기적인 사회의 창조이며 인간의 세계인식과 행위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모을 모르는 것과 다르겠는가? 내 장차 떼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오월에 일러 차츰 스승을 좇아서 도를 명산에 물으려 하네. 그래서 만일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나 신선을 배울 수 있다면, 표연히 바람을 공허의 밖에서 탈 것이니 이는 천하의 기이한 놀이요, 볼 만한 과경일 걸세. 자네도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이후 중략).”당시 신라인들이 겪었을 지성적 갈등을 살펴 보았다. 신라인들은 지연과 혈연을 뛰어넘는 보다 넓은 세상을 갈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 1에는 대세, 구칠, 담수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대세는 어릴 적부터 인간 세계를 초월하려는 이상을 품었으며, 이런 그의 제안을 담수는 거절했지만 구칠은 뜻을 같이 하여 구도여행을 떠난 것이다. 또한 유교 등의 수용은 고대국가로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데 구체적인 동력을 제공하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통합을 위한 사상적 지주로 기능하였으며, 고전적 세계관에 있어서도 한국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 측면이 강하다.7. 유교의 수용과 의미먼저 유교가 언제 수용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때 우선 삼국시대에 들어온 한 대의 오경사상이 유교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전해져 온다. 張志淵의 箕子朝鮮說, 李丙燾의 樂浪時代說, 玄相允의 三國時代說, 한자전래와 유교의 전래를 동시대로 봐야한다는 설 등이 제시된 바가 있는데, 이 때 주의할 사항이 있다면 바로, 하나의 외래종교가 특정 사회에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이기백은 접촉이 반드시 수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기능을 발휘해야만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입장을 토대로 볼 때, 고구려에서 태학을 설립한 소수림왕을 중요한 연도로 起算하였다. 이 때 이미 유교가 보편화, 일반화하였고 국가를 이를 공인한 결과라고 보았다. 유교 수용의 기점에 대해 제반 학설과 입장을 살펴보았을 때, 기점에 대해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 다만 사회 정치제도와 세계관에 구체적인 입장을 끼친 시자.
국사 (p 95~107)학습영역 : 지적영역3. 근세의 정치대단원 : 조선 초기 정치구조의 정비방향을 설명할 수 있다.소단원 : 2) 근세사회의 성립과정을 말할 수 있다.교수항목수업목표1.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비교고려말의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를 비교할 수 있다. (평가)2. 신진사대부의 온건파와 개혁파의 비교신진사대부의 온건파와 개혁파를 비교할 수 있다.(평가)3. 과전법의 성격과전법의 성격과 영향을 말할 수 있다.(적용)4. 왕자의 난의 배경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의 배경을 설명할 수 있다.(지식)5. 태종의 정책들의 특징태종의 정책들을 열거하여 그 특징을 말할 수 있다.(종합)6. 6조직계제의 성격6조직계제의 성격을 말할 수 있다.(분석)7. 세종의 왕권과 신권의 조화정책세종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위해 실시한 정책들을 열거할 수 있다.(지식)8. 의정부 서사제의 성격의정부 서사제의 성격을 분석할 수 있다. (분석)9. 집현전의 기능집현전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다. (이해)10. 세조의 정책의 특징세조의 정책들을 살펴보고 그 특징을 말할 수 있다.(종합)11. 홍문관과 경연의 기능홍문관과 경연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다.(지식)12. 세조대의 긍정적 견해와 부정적 견해세조대의 긍정적 견해와 부정적 견해를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다.(평가)소단원 : 3) 통치체제의 정비13. 경국대전의 영향경국대전이 조선의 통치체계에 미친 영향을 설명할 수 있다. (종합)14. 3사의 기능3사의 기능을 통해 조선시대 정치적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적용)15.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한 의도모든 군현에 파견된 수령을 통해 국가의 의도를 말할 수 있다.(이해)16. 향리의 변화향리의 지위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지식)17. 유향소의 기능유향소의 기능을 말할 수 있다.(적용)18. 관찰사의 직책관찰사의 직책을 열거할 수 있다. (지식)19. 경재소의 업무경재소의 업무를 통해 그 기능을 말할 수 있다.(분석)20. 조선초의 군역제도조선 초기 군역제도를 설명할 수 있다.(종합)21. 진관체제의 운영진관체제의 운영방식을 설명할 수 있다.(이해)22. 중앙군과 지방군의 역할중앙군과 지방군의 구성과 역할을 비교할 수 있다.(종합)23. 군사조직과 교통?통신체계군사조직과 교통 ? 통신체계의 정비가 중앙집권에 끼친 영향을 말할 수 있다.(지식)24. 조선시대 관리등용제도조선시대 관리 등용제도를 설명할 수 있다.(분석)25. 상피제의 역할상피제의 역할과 목적을 진술할 수 있다.(이해)26. 서경제도서경제도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다.(지식)27. 조광조의 개혁정책조광조의 개혁정책들을 열거하여 그 특징을 말할 수 있다.(종합)28. 훈구와 사람의 비교훈구와 사림을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다.(평가)29. 사림의 정치적 성장사람의 정치적 성장을 설명할 수 있다.(분석)30. 붕당정치의 출현붕당정치의 출현과 그 성격을 말할 수 있다.(이해)의 글에서 추론할 수 있는 정도전이 추구한 정치 방향은?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에게 정치의 실현을 부여하고, 위로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솔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①국왕 중심의 국방력 강화②강력한 전제 왕권의 수립③지방 세력 견제로 중앙 집권의 실현④향촌 자치에 의한 왕도정치 실현⑤왕권을 규제하고 신권을 강화b조선을 개창한 혁명파 사대부에 대한 바른 설명은?①고려말 사대부들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②대개 음서를 통하여 관료로 진출하였다.③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공포하였다.④학술과 언론을 바탕으로 향촌 자치를 추구하였다.⑤점진적인 개혁으로 고려 왕조의 모순을 개혁하려 하였다.b조선 시대 관리 선발 제도에 대하여 잘못 설명한 것은?①가까운 친인척과 같은 관서에 근무하지 않도록 상피제를 적용하였다.②모든 과거에서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에게는 응시를 제한하였다.③2품 이상의 고관의 자제는 음서의 혜택을 받아 고관으로 승진하였다.④인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5품 이하 관리의 등용에는 서경을 거치도록 하였다.⑤문과는 3년마다 실시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증광시, 알성시 등의 별시가 있었다.zb다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조선의 정체 체제는?6조직계제를 시행한 이후 일의 크고 작음이나 가볍고 무거움이 없이 모두 6조에 붙여져 …… 의정부의 관여 사항은 오직 사형수를 논결하는 일뿐이므로 옛날부터 재상을 임명한 뜻에 어긋난다. …… 6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뒤에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보내어 시행한다.①의정부 서사제②6조직계제③기인제도④관찰사 파견⑤향약 보급조선 세종의 치적과 관계 있는 것은?①사병을 폐지하여 왕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였다.②경국대전을 반포하여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③고조선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④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을 대거 등용하였다.⑤왕도 정치를 내세우고 유교적 민본 사상을 실현하였다.b조선의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에 대한 설명 중 틀린 것은 무엇인가?①조선 초기에는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었다.②조선 초기에는 진관체제라는 지역 단위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다.③군역의 원칙은 양인개병제였다.④중앙군은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다음은 조선 전기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성향을 비교해 놓은 것이다. 적절치 않은 것을 고르시오.훈구파 사림파①연원 혁명파 사대부 온건파 사대부②정책 왕도정치, 향촌자치 부국강병, 중앙집권③기반 중앙, 농장(대토지겸병) 향촌, 서원, 향약④성리학에 사회개혁 논리 성리학 지상주의대한 태도⑤기본성격현실적 관념적zb다음 중 조선의 붕당 정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①정치 세력간의 상호 비판과 견제의 기능을 가졌다.②각 지방의 서원은 붕당 정치의 인적인 토대가 되었다.③학벌, 문벌, 지연과 연결되어 국가 사회 발전에 지장을 주기도 하였다.④사림 세력이 대두하여 훈구 세력을 비판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⑤정치에 참여하려는 양반의 수에 비하여 관직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zb조선 왕조가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둔 목적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는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 3사의 언론은 고관들은 물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①전제 왕권의 확립②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③권력의 독점과 부정 방지④과거 제도의 폐단 시정⑤사림의 세력 기반 약화조선 시대 지방 행정 조직에 대한 설명이다. 바르지 못한 것은?①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였다.②현까지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나 속현도 많았다.③인구와 토지를 기준으로 군현을 정비하였다.④향리는 수령 밑에 예속시켜 그 권한을 축소시켰다.⑤수령은 지역의 조세 징수권을 가지고 있었다.〈이원분류표〉행동내용지식이해적용분석종합평가계조선의 건국0010023(10%)국왕중심의 통치체제정비1001103(10%)유교정치의 실현노력1101003(10%)문물제도의 정비1000102(6.7%)중앙정치체제0010113(10%)지방행정조직2111005(16.7%)군역제도와 군사조직1100204(13.3%)관리등용제도1101104(13.3%)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0101013(10%)계7(23.3%)5(16.7%)3(10%)5(16.7%)6(20%)4(13.3%)30(100%)학생원 점수백분위점수편차(X-M)Z점수T점수A6/1060%0.4160B5/1050%-0.6-1.535C4/1040%-1.6-410D7/1070%1.43.585E6/1060%0.4160F8/1080%2.46110G6/1060%0.4160H3/1030%-2.6-6.5-15I7/1070%1.43.585K4/1040%-1.6-410L6/1060%0.4160M7/1070%1.43.585N5/1050%-0.6-1.535O8/1080%2.46110P2/1020%-3.6-9-40▶ 본 평가는 00고등학교 3학년 중 임의의 15명을 선정하여 실시하였음▶ 평균치 : 5.6점▶ 변산도 (표준편차) : 0.4402?0.4점수분포
(국사 및 근현대사교과서)- 재생산론적 관점 -- 목 차 -Ⅰ 머리말Ⅱ 역사교과서 분석 - 문화재생산론적 관점1) 국사교과서 분석2) 근현대사교과서 분석Ⅲ 맺음말Ⅰ 머리말우리는 중?고등학교 동안 국사를 과목을 배워왔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지난날의 영화로운 때를 감상적으로 즐기고자 함이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며 분개하고자 함에 있지 않다. 우리는 역사를 보는 것에 있어서 마음은 보다 넓게, 그리고 눈은 보다 멀리 향해야 할 것이다. 즉, 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과거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현재를 바로 인식하고, 미래를 올바로 설계함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바르게 처리할 역사적 능력을 계발, 신장시키고, 민족의 역량을 확산하는 속에서 현재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입시라는 과정속에서 학생들에게 교과서는 절대적인 진리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교과서가 과연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담아내고 있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재생산론적인 관점에서 교과서는 한 사회에서 지배집단은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기관으로 인정받는 학교를 통해 그들에게 유리한 문화를 가장 가치 있고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결국 그들에게 유리한 권력구조를 자연스럽게 유지, 강화해 간다. 즉 현재의 역사교과서가 특정집단의 중심의 서술이거나 특정집단의 가치관을 배우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 보고서에서는 고등학교 7차 국사교과서와 근현대사교과서에서 들어난 지배층위주의 문화 재생산론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Ⅱ 역사교과서 분석1) 국사 교과서 분석국사교과서는 사회구성원의 정치?사회적 이념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국사교과서의 지배층 중심의 서술이라는 점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배층 중심의 서술은 결국 지배층이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인식하게 하고 민중은 단순히 지배층의 지배를 받는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밖에 여겨지게 만통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지배층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로 인해 각 시대의 대다수 성원을 이룬 민중들 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다. 또한 교과서에서는 사회 모순에 대한 항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변혁운동 등을 사회 모순구조의 반영으로서 평가되지 않고 사회혼란을 몰아붙이거나 지배층들의 권력다툼이나 왕 개인의 실정으로 치환되고 있다. 또한 지배층 중심의 역사는 당연히 왕조 중심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교과서는 왕조를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였기 때문에 한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한 사회가 잘 발전하다가 왜 모순이 격화되는가, 한 사회가 어떻게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발전해 나갔는가 등 시대구분상의 특성, 이행의 계기·과정 등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시대의 과제와, 그 과제를 해결해나갔던 민중들의 삶과 변혁의 주체적 노력이 축소 또는 배제되고 있다. 지배층 중심의 역사서술의 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고구려는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 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 과정에서 커진 군사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왕권이 안정되어 왕위가 독점적으로 세습되었고, 통합된 여러 집다들은 어부 체제로 발전하였다.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온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국사 page 49)"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다. ........" (국사 page 54)이러한 서술 방법은 학생들이 모든 역사가 왕 개인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고 생각하게 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그리고 고대의 경제 생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서로 인식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문서로서 일본의 정창원에서 발견된 민정 문서에는 현재의 고려의 왕조 교체의 분기점에서 “신라의 골품제 사회는 이들 호족에 의해 점차 해체되었고 중세 사회로의 진입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국사 page 65) 라고 서술하여서 이 시기에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인해 결국에는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신라의 지배권이 흔들리게 되었고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를 추구하였다는 점은 간과한 채 기존의 신분질서에 반발하게 된 6두품 세력과 지방 호족세력이 사회변화를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 새로운 권력계층인 6두품 세력과 지방 호족세력은 피지배자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변화가 없던 지배자인데 사회전체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조선 전기의 경우, 조선왕조 성립과정까지는 왕조 개창의 주체인 무인세력과 신진 사대부가, 개창 이후는 왕 또는 양반 지배층이 서술의 주어가 된다. 즉 “건국의 주동세력인 신흥 사대부들은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사회융합을 꾀하는 한편, 부국강병을 추진하여 국가역량을 키우려 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역량’을 키우려 한 것이나 ‘부국강병의 개혁’이, 지배 계층이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체제를 재편하고 강화하는 과정이라는 측면은 배제되어 있다. ‘민생안정’, ‘부국강병’의 이면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미와 재정의 비축이며, 농민을 군역체제 속에 철저히 복속시키고, 축성에 동원되는 체제 정비였다. 또한 직접생산자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애써서 이룩한 개간 및 농지개량, 생산력 확대 등을 무시하고 모두 왕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쓰여져 있다. 농민들이 관행으로 사용하던 농업기술을 수집하여 농서를 간행한 일마저 ‘농사기술과 품종 등의 개발’을 위하여 국가사업으로 편찬되었다고 한다.이처럼 지배층, 왕, 왕조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이유는 국가주의적 입장에서 ‘위로부터의 통치’를 미화하고 ‘안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의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대부분 국가의 발전은 중앙집권에 의해서 이루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국가의 위기와정비되고, 15세기에 버금가는 문화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조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 실권은 외척에게 집중되어”, “사회혼란을 가중시켰다”고 한다. 왕권이 강화되면 백성이 살기 좋고, 약화되면 사회가 혼란하게 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16세에 들어서면서 예송논쟁으로 인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가져왔다……(p 124~125)에 나타나 있는데 당시의 예송논쟁은 피지배계층의 생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성격의 다툼이었다. 즉 민생치안은 무시하고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위한 정권다툼의 문제이지 민생과는 괴리된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 서술의 방식은 지배층 중심의 역사서술이라 할 수 있으며, 민중의 당시 상황은 무시한 채 붕당을 행한 사대부들의 싸움에 대한 아무런 비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당시에는 민중을 위한 대동법의 확대과정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없는데 대동법의 시행은 한 번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대동법의 실시에 대해 당시 지배층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은 하고 있었으나 자신들이 지주층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숙종 때의 탕평책은 왕권강화의 성격을 가지는 측면이 강한 정책이었다. 그러므로 민중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정국 개편이었던 것이다. 즉 왕권강화와 양반관료의 처신에 대한 입장이 강한 성격이었는데 교과서에서는 민중을 포함한 전 인민을 위한 정국개편이라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양반 사회의 모순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지배이념이었던 성리학은 그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사회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사회 개혁론을 적극 제기하였다. 이른바 실학이 대두한 것이다. 즉, 실학은 조선 후기의 사회ㆍ경제적 변동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p 311~317)에서 이러한 내용이 나오는데 실학의 탄생에 있어 그 주도 세력은 몰락한 양반 내지 남인 학파였다. 이들은 소외된 계층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미얀마, 인도 전선에까지 파견되어 영국군과의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다.”(p.199)고 하여 마치 광복군이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광복군 가운데 실제 전투에 투입되었던 인원은 미얀마 전선에 파견된 8명 정도였고, 이들조차 대 일본군 방송 공작대원으로 잠깐 복무하였을 뿐이다.그리고 중국 공산 당 지구의 독립동맹에 대한 서술이 고의적으로 빠진 원인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한 것으로 사료되며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지배의 확립화의 측면에서 일부로 누락시킨 것으로 추측된다.우리나라는 개항 후 세계 자본주의체제 속에 편입되면서 민족 모순?계급 모순의 중첩적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곧 민족 내부에 민족적 이해와 대립되는 여러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밀려들어오는 제국주의 세력은 침략을 유리하게 하고 식민지 지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동반자 세력을 찾게 된다. 이때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이들과 손을 잡는 자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러한 자들이 바로 사대주의자ㆍ 매국자들이다. 그러나 교과서에서는 가능한 이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였다.. 역사서술의 방식에서 치욕적인 장면을 넣는 것도 긍정적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매국노나 사대주의자들에 대한 행각을 설명하여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겠다는 방식의 서술도 중요한데 일부로 누락시킨 원인은또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청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인 세력은 민비 정권과 개화파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비판의 내용은 거의 없으며 ‘어쩔 수 없는’이라는 식으로 무마하려 한다. 교과서는 “정부는 동학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청에 파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텐진 조약을 구실로…”(p.80)라고 하여 청?일의 침략의사를 뒷받침해 준 국내 매판세력에 대한 서술은 빈약한 면이 보인다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고 국권을 지키려는 국채 보상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어……(p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