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광개토대왕비의 검토
- 최초 등록일
- 2006.05.30
- 최종 저작일
- 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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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개토대왕비문을 둘러싼 여러 논쟁(신묘년기사, 이진희의 비문변조설)을 중심으로 검토한 보고서 입니다
목차
1. 서론
2. 이진희의 주장 : 비문조작설 과 파장
3. 능비의 재발견과 비문이 공개되기까지
4. 비문 연구의 진전
5. 신묘년기사와 경자년기사를 중심으로
6. 비문 연구의 현단계 - 해방 이후
7. 비문 연구의 문제점
8. 복원 광개토대왕 시대사
9. 결론
본문내용
1. 序論
우리 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주목받는 왕을 꼽으라고 할때, 많은 지지를 얻곤 하는 왕 중에 한명이 바로 광개토대왕이다. ‘國岡上廣開上境平好太王’이라는 시호처럼, 국토를 넓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장수왕 3년)에 현재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퉁거우(通溝)에 세웠다. 높이가 6.39m에 달하는 광개토왕비문은 4면비로 1면 11행, 2면 10행, 3면 14행, 4면 9행, 각 행에 41자(1면 6행만 39자)로 총 1802자가 음각되어있다. 이 광개토대왕릉비가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한 것은 1880년으로 거의 140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비문 내용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구려 건국 내력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 업적, 묘를 관리하기 위한 守墓人烟戶등이 비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대외 정복 기록에는 중국을 쳐서 영토를 넓히고 왜를 격파하였다는 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과 일본인들도 대외 정복 기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역사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비문의 해당 부분을 쪼아내 알아낼 수 없게 했거나 석회를 발라 없는 글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상고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일찍이 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集安縣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인 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나 필담을 나누었는데 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비가 오랫동안 草萊 중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이 지방 영희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중국 토지를 침탈하였다는 자구들이 들어 있었으므로 중국인들이 그것을 도부로 쪼아냈습니다. 그 다음 일본인들이 이 비석을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탁본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닳아 없어지거나 이지러진 부분을 석회로 떼어 발랐는데 이 때문에 그동안 인식할 수 없었던 자구가 도리어 생겨나 참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사실이 첨가된 것 같습니다.’
특히 왜와 관계된 부분은 일본 관학자들이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변조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의 왜곡이었던 것이다. 1972년 일본 동경의 길천홍문관(吉川弘文館)에서 출간된 재일 사학자 李進熙의 ≪광개토대왕릉비의 연구≫라는 책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이유도,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의도적으로 변조되었다는 내용을 실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중국측에서도 후에 왕건군의 발표로 이어지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연구는 한⋅중⋅일, 3국의 현안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보고서에서는 현재 문제의 쟁점인 신묘년 기사와 비문조작설 등을 다룸과 동시에 광개토대왕릉비의 주요 내용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 李基東. <硏究의 現況과 問題點>. <<韓國史市民講座>> 3. 일조각, 1988
■ 徐榮洙.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歷史學報>> 119. 역사학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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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일, 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 pp. 28~37, 김영사, 2001
■ 서의식, 강봉룡,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 pp. 238~246, 솔,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