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I. 서론1II. 엘리아데 사상1가. 성(聖) 과 속(俗)2나. 상징2다. 시간, 역사2III. 인터넷 - 그 의미3가. 가상공간, 그 의미3나. 인터넷 - 이중적인 시간과 공간의 구조3다. 하이퍼텍스트 - 욕망을 이어주는 상징3IV. 인터넷 예배 (종교행위)의 의미4가. 인터넷의 자아 개념4나. 가상의 세계와 현실세계5다. 인터넷 예배 - 성속의 변증법적 존재는 가능한가?5V. 결론5??Ⅹ?Ⅸ. 서론요즘은 인터넷 시대이다. 하기에 모든 일들이 인터넷으로 실행 가능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번 종교와 신화 강의도중 나온 “성과속”의 개념은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네트(net)"의 세계에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의미일수도 있다.예를 들자면, 묘소를 참배하는 행위를 들 수 있다. 죽은이의 묘소를 참배하는 자가 분향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그가 행하는 분향(焚香)은 단순히 향을 피우는 행위가 아니라, 죽은이를 참배하기 위하여 하는 행위이며, 그는 그 행위를 할 당시 일상적인 시간에서 벗어난 시간, 즉 경건함으로서 죽은이의 명복을 비는 시간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사이버 묘소참배라든지, 사이버 분향이 가능하다. 인터넷상으로 실체없는 향을 불사르는 행위와 위의 참배행위가 같을 수 있을까?비단 묘지뿐이 아니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라.인터넷으로 예배를 보고 고해성사를 하거나, 헌금도 인터넷에서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등 `종교의식의 사이버화'가 확산되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각 교회는 성탄예배를 보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지만, 굳이 교회에 가지 않고도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 중략....이 교회가 올 3월 마련한 인터넷 예배 시스템은 교회 홈페이지에 접속한 뒤 `예배'를 클릭하면 목사의 설교를 동영상으로 듣거나 기도문을 들으면서 예배를 볼 수 있다. 이 교회 관계자는 ?직장일 등으로 바쁜 신도 등을 중심으로 사이버 예배자가 꾸준히 늘어났다?며 ?일반신도까지 포함하면 한 주에 1800만명이나 목적은 멀치아 엘리아데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이러한 “인터넷 종교”를 해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Ⅱ에서는 멀치아 엘리아데의 사상을 간략히 살펴보고 Ⅲ에서는 인터넷의 특질 등에 주목하여 논하여 보고 Ⅳ에서는 인터넷 예배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찰해보고 Ⅴ에서 부족하나마 결론을 내려보기로 한다.Ⅰ. 엘리아데 사상엘리아데의 종교학은 두가지 사실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비롯하고 있다. 하나는 전통 종교의 도그마티즘(DOGMATISM)에 대한 저항이고 또 하나는 현대과학이 갖는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대한 저항이다. 전자에 대하여 성속의 변증법적 구조를 통하여 저항하고, 후자에 대하여 성의 환원불가능성의 주장을 통하여 저항하고 있다.). 성(聖) 과 속(俗)엘리아데에 의하면 인간은 전혀 질적으로 다른 이중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양자를 성(聖)과 속(俗)이라 부른다. 그러나 양자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몰론 성은 속의 반대이기는 하지만, 이 둘은 성과 속의 변증법적 합일에 의하여 함께 있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경험이란 이 두 개의 이중적 질서를 하나로 경험하는 것이다.종교인은 그가 거룩한 것과 맺고 있는 관계, 혹은 종교경험 자체를 성현(聖顯)을 통하여 증언하는데 이는 어떤 특정의 사물이나 시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라도 자체의 의미를 넘어 “첨가된 의미”를 지닐 때 그것은 성현이 되는 것이다. 즉 그 사물은 더 이상 돌멩이이기를 그만두고 “성스런 어떤 의미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스러운 것은 첨가된 의미에 불과하다. 하기에 성과 속은 다르지만 함께 있는 것이 된다.가. 상징종교인은 성과 속을 함께 사는 사람이며 성과 속의 변증법적 구조를 경험적인 실재로서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은 성과 속을 항시 같이 인식하며 살아가며, 이 둘을 함께 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합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상징이다.즉, 상징은 성현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이고, 성에 참여하는 여러 방법들을 발견하기 위하여러 의미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즉 여러 의미를 구조적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삶의 현실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할 수 있도록 하는 투시가 가능토록 하는 역할을 한다.나. 시간, 역사엘리아데에 의하면 원시인이나 고대인은 그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인 시간에 대한 주기적인 회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즉 제의를 통한 신화의 재연은 근본적으로 역사란 원형이탈의 시간을 거부하는 행위이다.즉, 고대인들은 그들이 노동을 할 때, 전투나 사냥을 할 때, 항상 천지창조의 원형을 투사하기를 원했고, 이러한 바램은 각각의 의례로, 상징으로 실현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원형의 본모습이 되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서 시간을 소거시키는 것이다.그러나 현대의 합리적인 시간인식, 사고방식은 고통을 안겨다 준다. 시간은 불가역적으로 흐르며, 이는 역사란 이름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 또한 끊임없이 이 사실을 상기하여야 한다는 사고방식, 이는 속적인 실재의 무의미성에 압도되어 “자기상실”의 공포를 겪는 것이다. 한편 이 공포의 원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통의 원인과 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밖에는 가져오지 못한다.Ⅱ. 인터넷 - 그 의미. 가상공간, 그 의미인터넷은 말하자면 일종의 가상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현실에서의 자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는 ID로 코드화 되며, 그의 생각과 행위는 넷(NET)망을 통하여 자유롭게 이동한다. 각 개인은 분절화 되며, 또한 비트화된다. 그는 육체의 껍질에서 이탈하며, 단지 육체는 현실세계에 거주하는 집에 불과하게 된다.또한 육체로부터 벗어난 비트화된 개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흐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모든 제약들에 반대하며, 그들의 사상과 사고는 거대담론에서 자유롭다. )가. 인터넷 - 이중적인 시간과 공간의 구조인터넷 상에서 개인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ID에 의하여 코드화 된다. 코드화된 그는 더 이상 현실에서의 “그”가 아니다.코드화된 그는 넷상을 돌아다니며 는 각각의 욕망을 이어주는 상징이다. 현실의 시간과 공간과 육체에서 “탈주”한 그가 다른 비트화된 개인을 만나게 하는 연결통로이며, 그들의 욕망이 연결되는 통로이다. 하이퍼 텍스트는 거대한 욕망과 욕망의 실현인 “정보”를 상징하는 상징기재이며, 각각의 텍스트를 표상하는 상징이다.하이퍼텍스트를 통하여 각각의 텍스트는 중층적으로 상위-하위기재로 계층화 된다.Ⅲ. 인터넷 예배 (종교행위)의 의미일상적으로 미사를 보는 이를 생각해 보자). 그는 성당이라는 “공간”에서 “미사”라는 의식을 통하여 종교행위를 한다. 그 종교행위의 장소인 예배당은 단순한 건물이 아닌, 성화된 장소이며, 또한 “미사”라는 행위는 종교의 창시자(founder)의 종교체험에 다가가는 행위이다. 또한 각종 성상(聖像)들은 이러한 종교체험을 통하여 본원적인 원형으로의 회귀를 도와주는 일종의 상징이다.미사라는 행위는 천주교의 독특한 종교의례이며, 이 의례의 구성요소는 크게 공간의 성스러움, 시간의 성스러움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인터넷이란 공간은 개인의 욕망이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 넷망을 타고 무한히 떠돌수 있는 공간이다. 실재하지 않는 공간임과 동시에 실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몇가지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인터넷 예배를 통하여 예배를 보는 행위는 “종교행위”로 볼 수 있을까? 또한 종교행위의 큰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는 시간, 공간의 성화는 인터넷 예배를 보는 사람에게 일어날 것인가? 또한 상징의 의미는? 이에 대하여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인터넷의 자아 개념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터넷이란 공간은 개인의 욕망이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 - 오히려 탈출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 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인터넷 속에서 id로 코드화된 개인은 현실에서의 개인과 동질의 것인가?일단, 인터넷은 자아를 분절화시키는 공간이다. 분절화된 자아는 코드화된 자아와 육체적 한계속에 있는 현실의 자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양자는 동질적인가?사람의 인식은 여러 지각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으연속성”을 부여하여 우리는 비슷한 것을 동질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터넷에서 ID로 표상되는 자아와 현실세계의 자아는 다르며, 인터넷에서의 행위는 현실세계에서의 행위와 연속성을 갖지 못하게 된다. 즉 인터넷의 자아는 육체적 실체가 아닌 욕망의 흐름에 불과하며, 이러한 욕망의 흐름은 개인의 지각다발 중에서 하나이다. 이는 실체적으로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과 단절성이 있어 때때로 인터넷에서의 나와 현실의 나는 다른 괴리감을 느끼게 되며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는 현실세계의 자아와 인터넷 (혹은 가상공간)속에서의 자아가 다름을 나타내는 것이다.가. 가상의 세계와 현실세계양자의 자아가 다르다며 양 세계는 확연히 구별이 가능한가?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단순한 가상세계일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양자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면 인터넷을 통한 혹은 앞으로 더 발전한 기술에 의하여 창출된 사이버 공간에서의 더 정교해진 종교행위는 말 그대로 행위자에게는 성화된 장소에서 성화된 시간에서 원형의 시간을 재현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예컨데, 현실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구성된 가상세계에서 종교행위를 한다고 하자. 말하자면, 종교행위를 하는 당시에 자아는 성화된 장소와 시간의 흐름을 경험한다고 인식하는 것이다.그러나 양자의 구별이 가능하다면, 위의 논변은 단순한 착각에 불과하며, 그에게는 성화된 시간도, 성화된 공간도 아닌 착각만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양자는 다르다. 왜냐하면 첫째 현실세계와 동일한 가상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가상세계는 현실세계일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세계에서 가상세계로의 접근은 가능하지만 가상세계에서 현실세계로의 접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나. 인터넷 예배 - 성속의 변증법적 존재는 가능한가?본 리포트의 맨 앞에서 언급한 인터넷 예배가 과연 현실에서의 예배와 동질적인가? 결론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인터넷은 개인의 욕망의 통로이다. 개인의 욕망의 통로는 넷망을 통하여 욕망의있다.
목 차I. 서론1II. 경제성장의 근원1(1) 생산요소의 증가11) 자본의 증가 12) 노동의 증가23) 자본과 노동의 증가2(2) 기술의 진보2III. 실증분석3(1) 모형의 설정3(2) 모형의 추정4(3) 추정에 대한 평가4(4) 모델의 유의성 검사5IV. 솔로우 잔차5(1) 1970년 ∼ 2000년 까지 성장회계식의 추정5V. 결론 - 평가 및 의미6(1) 과잉 중복투자로 인한 경제환란인가?6(2) 연구의 한계와 의미6{- -서론1997년 구제금융 사태이후, 이 사태의 본질에 대한 여러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이 실물부문, 금융부문에서 모두 원인을 찾을 수 있겠으나, 1990년대 들어 일부업종에서 과도한 투자가 이루어 졌고, 이는 자본의 효율성의 저하를 초래하여 구제금융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국회국정조사 특별위원회 (1999)이러한 지적에 주목하며, 1990년 이후 과잉중복투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과정을 고찰하고, 그 과정에서 과도한 투자로 인한 구제금융 사태는 필연적이였으며 예고된 것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요인에 의하여 발생한 우발적인 사태에 불과한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하기에 이 리포트의 목적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근원을 밝히고, 자본 노동 및 총요소 생산성의 변화를 고찰함으로써, 중복투자에 의한 경제대란 이라는 명제를 다시한번 평가해 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Ⅱ에서는 간단한 성장회계식을 고찰해 봄으로서 각 생산요소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해 보고 Ⅲ에서는 우리나라의 데이터를 기초로 이를 추정해 보았으며, Ⅳ에서는 총요소 생산성을 추정해 봄으로서 우리나라 경제성장에서 기술진보가 미친 영향을 분석해 보고, Ⅴ에서는 결론으로, 중복 과잉투자에 의한 IMF 환란이라는 명제를 평가해 보기로 한다.경제성장의 근원{) 거시경제학, G. MANKIW, 시그마프레스 PP.120∼125생산요소의 증가생산요소의 증가가 어떻게 생산량의 증대로 연계되는가? 아래와 같은 생산함수를 생각해 보자{Y=F(K,L)위와 같은 생산함수에서는 기술발전은 없고, 생산량은 생산요소의 양이 증가할 때만 증가한다.자본의 증가자본량이 변화할 경우를 생각해 보면{MPK = F(K+1, L) - F(K,L)(MPK는 자본의 한계생산물)자본의 한계생산물은 자본 1단위가 증가할 경우 증가하는 생산량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본이 ΔK만큼 증가하면 생산량은 {MPK TIMES ΔK만큼 증가한다.즉 {ΔY=MPK TIMES ΔK이다.노동의 증가노동의 변화가 생산량이 미치는 영향도 위의 자본변화와 동일한 방법으로 도출해 낼 수 있다.즉 노동이 ΔL만큼 증가하면 생산량은 {MPL TIMES ΔL만큼 증가한다. (MPL은 노동의 한계생산물)자본과 노동의 증가두 생산요소가 모두 변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즉 노동이 ΔL만큼, 자본이 ΔK만큼 증가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위의 결과에서 도출된 식을 이용하면 다음의 식이 나온다.{ΔY=(MPK TIMES ΔK) + (MPL TIMES ΔL)위의 식을 대수적으로 정리하면{ΔY OVER Y = LEFT( { MPK TIMES K } OVER Y RIGHT )ΔK OVER K + left({MPL TIMES L} OVER Y RIGHT)ΔL OVER L위 식에서 {{MPK TIMES K} OVER Y는 생산량중 자본의 몫이고, {{MPL TIMES L} OVER Y는 생산량중 노동의 몫이므로, 이를 α와 β로 대체하면 위의 식은{ΔY OVER Y = α{ΔK OVER K} + β{ΔL OVER L}기술의 진보기술진보의 효과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생산함수에 총요소생산성을 의미하는 매개변수 Α를 곱하면 된다.{Y=AF(K,L)이를 위에서 전개하여 정리한 바와 같이 정리하면 하기와 같이 정리된다.{ΔY OVER Y = α{ΔK OVER K} + β{ΔL OVER L} + ΔA OVER A위의 식은 경제성장을 계산하는데, 중요한 성장회계식으로, 총 생산량의 변화량은 자본의 변화량에 자본의 기여도를 곱한 값과, 노동의 변화량에 노동의 기여도를 곱한 값과 총요소생산성의 변화를 더한 것이다.이와 별도로, 총요소 생산성은 전체 생산량중에서 노동의 기여한 몫과 자본이 기여한 몫을 뺀 값으로 솔로우 잔차 (SOLOW RESIDUAL)이라고도 한다. 이를 간단히 수식으로 표현하면{ΔA OVER A = ΔY OVER Y - α ΔK OVER K - β ΔL OVER L이 된다.실증분석그러면 성장회계식에서의 각 생산요소의 기여도를 실제 우리나라의 데이터를 기초로 추정하여보도록 하자. 이를 추정함으로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중복 과잉투자로 인한 IMF 경제대란이라는 명제를 평가해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모형의 설정먼저 다음과 같은 곱 더글라스 생산함수를 가정해 보자{Y=AK^α L^β양변에 자연대수를 취하여 식을 정리하면 하기와 같다.{lnY=lnA + αlnK + βlnL상기의 식을 계량모형으로 설정하면 다음과 같다.{lnY=a + αlnK + βlnL +u_i(단 a는 lnA)위에서 ui는 교란항으로서, 변수에 포함되지 않는 생산량에 변동을 초래하는 요소들과 잔차들을 의미한다.모형의 추정1970년부터 2000년까지의 노동인구중 취업인구와, 국내 총자본 형성과, 국내총생산을 데이터로 사용하여 위의 모형을 추정해 보았다. 각 성장회계식에서 1970년 부터 10년 단위로 나누어 추정해 보았으며, 10년마다 매년 성장원천별 성장율을 추정 고찰해 보았다.데이터를 이용 추정해 본 결과는 아래와 같다.{1970 ∼ 1979{lnY=-67.752 + 0.434lnK + 5.190lnL#(-8.856)~~~(2.047)~~~(6.123)#- atop R^2 =0.9931980 ∼ 1989{lnY=-19.831 + 1.119lnK + 1.008lnL#(-1.370)~~(2.561)~~~(0.606)#- atop R^2 = 0.9551990 ∼ 1991{lnY=-108.933-1.982lnK+12.3lnL#(-12.821)~~~ (-5.548)~~~ (11.253)#- atop R^2 =0.974추정에 대한 평가일단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규모의 수익체증이 있다고 볼수 있으나 90년대의 경우는 자본의 기여도가 마이너스 값이 나온 것은 의외이다.위의 추정치를 보면, 70년대 자본의 기여도가 0.434 80년대 자본의 기여도가 1.119 90년대 자본의 기여도가 -1.982로 90년대 자본의 기여도가 마이너스로 나온다. 또한 노동의 기여도는 70년대 5.190, 80년대 1.008 으로 나타나며, 90년대는 11.8이다.수정된 {R^2의 값은 모두 0.9 이상으로 매우 설명력이 높은 것으로 나온다.모델의 유의성 검사모델의 유의성을 검사하기 위하여 유의수준을 보면 다음과 같다.{1970년대1980년대1990년대유의수준(sig error)상수0.0000.2130.000α0.0800.0370.001β0.0000.5640.000모든 모형의 유의수준은 매우 낮은 것으로 나온다. 70년대 90년대의 경우 유의수준 1%안에서 모형이 적합한 것을 알 수 있으나, 1980년대의 경우 유의성이 의심스럽다.한편 95%신뢰구간에서 t 검정을 해 보면 α와 β가 0이 아니라는 귀무가설을 기각할수 없다.{) 자세한 것은 맨 뒤의 출력물을 참조하기 바란다.솔로우 잔차1970년 ∼ 2000년 까지 성장회계식의 추정동일한 데이터를 사용 1970년 이후 2000년 까지 성장회계식을 추정한 결과는 아래와 같다.{lnY = -71.374 + 0.240lnK+5.781lnL#(-4.901)~~~(0.529)~~~(3.330)#- atop R^2 =0.983우리나라 전체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자본의 축적, 노동의 축적 이외에는 다른 여타의 요인은 설명할 수 없다. 특히 노동의 기여도는 매우 높은 것으로 노동집약적 경제성장의 일면을 볼 수 있다.수정된 {R^2의 값은 0.998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결론 - 평가 및 의미지금까지 우리나라 성장원천별 경제성장의 기여도를 회귀모형으로 추정해 보았고, 또한 총요소 생산성을 추정해 보았다. 우리나라의 총요소 생산성은 소위 선진국에 비하여 낮은 편이다. 즉, 생산량의 증가에서 노동, 자본 의 증가로 인한 증가분을 감하고 나면 따로 설명할 부분이 거의 남지 않는다. 과거기간에 총요소 생산성의 급속한 증가를 경험하지 못했고,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기술혁신을 통한 경제성장이라기 보다는, 노동 자본의 축적으로 이루어진 경제성장이라는 것을 반증한다.과잉 중복투자로 인한 경제환란인가?1999년 한국은행은 우리나라 자본이윤율의 경향적인 하락현상을 지적한 바 있다. 자본이윤율이 하락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계생산성은 체감하므로, 그런것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중복 과잉투자는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자동차, 철강등의 중복과잉투자는 더이상 자본의 축적으로 인한 경제성장에는 한계점에 도달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연구의 한계와 의미물론 총요소 생산성이 단지 기술의 발전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여타 다른 요소도 포함된다는 점, IMF 사태가 단순히 실물부분이 아닌 금융부분의 위기에서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위의 연구는 한계가 있다.그럼에도, 실물부분을 주목하는 이유는 또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과정을 추적하는 과정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금융부분의 위기를 충분히 흡수할 수 없을 만큼 금융시스템이 취약한 상황에서는 실물부분의 건실성과, 그 성장과정의 건실성이 있었다면, 그러한 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최근 매일경제신문에서 주최한 간담회에서는 미시적 이라 할 수 있는 구조조정을 정부주도의 "거시적 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였다. 아직도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주도의 구조조정이라는 측면에서 여러 좋지 않은 일들이 많다. 공적자금의 유용등이 대표적인 실례일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을 읽고...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은 우울하다. 왠지 모를 암울함과 적막감이 글 전체를 에워싼 느낌이었다. 오현우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삶이 사실은 매우 역동적이며 살아있는 삶일 수 있음에도 그들의 삶마저 정적으로 느끼게 했다. 왜일까? 이것은 보는 시각을 옮기게 한 작가의 의도 때문인것 같다. 80년대의 이야기를 하면서 독자는 2000년을 사는 사람임을 인식하였던 까닭일까?7∼80년대를 정말 치열하게 살아갔던 오현우의 삶, 그리고 그의 주변에 끊임없이 존재한 여인 한윤희, 그리고 글을 전반에서 가장 담담한 그들의 아이 은결.... 오현우는 글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은결이처럼 말하자면 그도 한가지 밖에 모르는 사람이지 은결과 한윤희에 관한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가지 밖에 모른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즉, 나의 세대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일것다. 좋아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어요. 엄마는 한가지 밖에 몰랐잖아요? 이 구절은 과거 운동권에서 살아간 사람들을 현 시대의 아이들이 보는 시각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보였다.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뭘 수집하든가 늘 같은 길로만 다니든가..... 신들린것처럼요. 그럴 것이다. 은결에게는 어머니나 아버지나 모두 지난 시간 한가지만 알면서 자신을 배후에 남겨둔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흔히들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고는 한다. 나 다음에 살아가야 할 내 아이들을 위해서 세상이 바뀌었으면 한다고.. 그러나 여기서 오현우는 은결이의 존재 여부조차도 모르고 18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아이가 18살이 되어서야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남겨놓은 글들을 통해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사실 또한 담담히 받아들여 나를 놀라게 했다.한윤희는 마치 그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의 시각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버지 덕에 빨간색 컴플렉스를 가지고 그럼에도 사회 변혁세력에게 많은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일선에 뛰어들기에는 무언가 자신은 없고.... 아니다. 자신이 없다기 보다는 어울리지 않는 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렇게 오현우를 기다리며 세상이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방관자 아닌 방관자적인 모습이 어울린다. 자신에게 큰 피해가 주어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람들의 운동을 도우면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도 않으면서 오현우의 석방이 의미하는 화해의 장을 기다리는 그런 모습이 그녀에게는 가장 잘 어울린다. 그런 그녀와 그녀의 첫 남자의 만남은 어떤 면에서는 극히 당연스러운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 남자와의 추억(?)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장면에서도 그 점이 역력히 드러난다. 헌데, 참 사람의 관계란 쓸쓸한 일이죠. 유행가에도 늘 등장하지만 두 사람이 지니고 있던 온갖 감정과 느낌의 배경이 젖혀지고 나면 세상 속에 그들의 삶의 알몸이 드러나 버리거든요. 종이 인형에 갈아 입힐 의상을 제 마음대로 색칠하고 디자인하고 가위로 오려내어 상자갑 안에 차곡차곡 쟁여두고는 하지요, 얼굴과 몸집만을 내놓고 그것들을 차례로 입혀보고 다시 벗기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랜 뒤에 그 상자를 열어보면 예전에 그린 색깔과 디자인은 초라하게 변해있죠. , 멜로 영화에 많이 나오는 줄거리 흔하다는 건 바로 당대 생활의 반영이라면서요?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부분을 통해 이렇게 사회의 내부의 아픈 곳에 관심을 가지던 이들도 정작 자신의 사회적 출세와 성공 욕에 불타게 되면 바로 기성 세대적 발상으로 돌아서 버리는 그 점을 빗대어 이야기 하고자 이 사람을 등장시킨것이다. 한윤희에게 다가서는 그의 모습과 떠나 갈 당시 그의 모습... 한윤희는 심지어 이부분 조차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진 오현우와의 만남...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차라리 그 신부님이 5월 광주의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그럼 얼마나 좋았을까? 오현우를 만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을텐데... 그것이다.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던, 차라리 몰랐더라면 하는, 이미 인식하고 나서의 상황은 그전과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까닭 없는 죄책감과 알 수 없이 자신에게 밀려드는 무력감. 그 시대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것으로 고민하고 힘들어했을 것이다. 광주에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저자 황석영씨 또한 오랜 시절 고통스러워 했으므로.. 그는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나마 하고있다. 나 개인적으로는 어린 벗들이 죽고 고통받았던 그때 광주에 없었다. 광주에 있다가 현대문학연구소의 소극장 건립 비용을 마련키 위해 우연히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5·18이 터졌다. 그 후 살아 남은게 부담이었고, 작가로서도 5·18이 부담이었다. 그때 어디에 있었나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질문의 형식과 방법도 발전·승화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조선일보 2000년 5월 18일자 인터뷰"혁명, 그 다음엔 뭘 할 거지? 무인지경의 산맥이나 들판이 있고 달구지와 나귀가 겨우 지나 다니는 거친 길이 있는 두메 산골이 이거나 소총 아니면 겨우 기관총 정도가 살상 무기이던 시절의 서부 영화 같은 장면에서나 가능한 일일 거야. 자동 소총ㅇ,ㄹ 메고 탄띠를 두른 니카라과의 여전사 사진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정규군의 막강한 군사 퍼레이드가 광장을 휩쓸고 지나간다. 부두에 하역되고 있는 산처미 같은 무기들, 하늘을 가르고 편대 비행을 하는 초음속 돌파 전투기들. 레이더와 함정과 항공모함의 불야성. 유리와 강철의 탑처럼 하늘로 치솟은 도심지의 빌딩들. 산업시찰을 돌고 있는 깨끗한 작업복 차림의 높은 사람들 일행이 기계의 옆으로 느릿느릿 움직여 가고 있다.(중략)제도를 부숴 버리는 동안에 그것을 부수는 제도가 만들어지겠지. 누구나 언제든 투쟁하는 전사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혁명위원회도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중략)혁명이라고. 그건 정지된 섬광이야. 오현우처럼 유폐되거나 그의 아우들같이 바리케이드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한 그는 출퇴근하는 토론자로 기진맥진 살아가게 될 테니까. 그 침을 꿀꺽 삼키며 환멸에 치를 떨게 된다 할지라도 피부를 찌르는 듯한 전율로 나는 살아있다고 중얼거리게 하는 사업 {) 오래된정원 중 109-110p
탈 권력의 통일 담론을 읽고...지금까지 우리는 반공주의를 지상과제로 삼을 만큼 RED COMPLEX에 시달려 왔다. 그러나 많은 부분들의 허상이 이번 정상회담으로 인하여 깨어졌다. 어떤 초등학교 교사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이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보고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던데요...했을 때 더 이상 교과서에 나오는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라고 말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체제를 유지하여야한다는 하나의 목적에 입각하여 북한에 거품을 띄워 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그런 것들이 정상 회담으로 인하여 서서히 붕괴되어가자 더 이상 교과서식의 통일 논리가 아이들에게 먹혀들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정말로 당연한 것이다. 이제 22이 되는 나도 역시 어릴 때 간첩을 그리면 뿔달린 도깨비 형상으로 그렸던 기억이 생생한데, 실상 우리 아이들의 교과서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교과서에 관한 이야기만을 언급한 듯 한데 실상은 이렇다. 우리가 흔히 보는 세미나 주제 중 하나가 북한은 변하고 있는가? 북한의 경제문제의 심각성의 해결방안은 무엇인가? 이런식의 주제들은 남한 중심적 사고로 뭉친 소수 엘리트 계층들의 자기중심적 발상이라고 할 수있다. 변하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사회란 절대로 정체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자기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왜곡들을 해온 것 일까? 솔직히 나는 아직도 북한 사람들의 삶이 평범하다는 점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행해져온 언론의 왜곡과 교육(?)의 대가로 나는 어느새 인가 색안경을 끼고 북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다른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곳이 다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독 북한에 대한 것만은 왜곡되고 굴절되어 우리에게 비쳐져온 것이다. 그 이유는 언론이 한 몫을 했음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독재 정권과 군 정권하, 그리고 끊임없는 레드 콤플렉스로 인하여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의 영향까지 더해져서 우리는 그렇게 북한을 바라봐왔다. 언론은 북한의 정보가 10~20년쯤 전의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는 혹은 알더라도 묵인하에 촌스러운 것들의 일색으로 북한을 국민들에게 알려 왔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생존했던 사람들은 전쟁의 악몽으로 혹은 당시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부인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 혹은 월남의 면죄부로 북한을 더욱 왜곡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작업들이 무려 50년이라는 시간동안 지속되어왔다면 우리 국민이 집단 최면에 걸리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소로 의사소통의 단절을 들 수 있다. 직접 북한에 가서 북한의 모습을 겉에서라도 보고 온 사람이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될까? 그리고 설혹 북한을 봤더라도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북한에서 남한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한번만 생각해보자. 시간이 흐른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벽을 쌓아놓기만 하였지 그 안을 들여다 볼 생각도 여유도 없었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소말리아 어린이 돕기는 아무런 스스럼없이 하면서 북한 어린이 돕기에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어릴 적부터 머리 속 깊이 뿌리 박힌 서로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면 이제는 하나의 민족임을 느껴야 할 때이다. 같은 민족보다 만리 타국 땅의 피부색 다른 아이들을 돕는 것을 더욱 당연히 여기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컬한 분단의 비극이다. 이것은 한겨레 신문 12월 14일자에 나온 기사이다.북에는 없는 '주적'...남에는 있다제4차 남북장관급회담 개최 직전에 또 다시 남북간에 남측의 `주적 개념' 논란이 일어 지난 12일부터 진행 중인 장관급 회담석상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측은 이전부터 남측 국방백서 에 명시된 `북한은 주적'이라는 `북한 주적론'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여 왔다. 주적과 마주 앉아 대화하고 협력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지극히 당위론적인 논리로 주적 개념 철폐를 요구해 왔다. 이러한 요구는 북측이 남한을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도 나름대 로의 근거를 갖고 있다. 북측의 각종 법, 간행물, 또는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남한은 북한 의 주적'이라는 주적개념은 북측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좌급(영관급) 북한군 출신 탈북자는 "북한군에는 남측과 같은 `주적' 개념이 없으며 더욱이 남한군이 북한군의 주적이 라는 말도 없다"고 말했고 또 다른 고위급 군출신 탈북자 역시 "북한군은 일반적으로 `미일 제국주의자'를 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JFK - 미국! 그 절대적인 권력의 폭력성에 대한보고JFK 라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영화에 대한 느낌은 일종의 냉소였다. 그렇고 그런 음모론 중 하나겠지 하는 생각이 가장 크게 자리잡았다. 왜냐하면 권력과 그 권력에 대한 동경과 피해의식은 음모론이라는 형태의 시니컬한 반응으로 드러나곤 하기 때문이다. 마치 많은 시청자들이 얼마 전 미 드라마 시리즈의 하나인 X파일 에 열중했던 것처럼 말이다. 권력과 음모는 마치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단어이고, 이 영화 역시 음모론 이란 이름으로 권력에 대한 동경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결코 음모론에 대한 영화가 아니었다. 또한 케네디 암살의 진실을 파해치려는 영화도 아니다. 여기에서 검사가 주장한 것은 케네디 암살이 쿠데타라는 점이지만, 올리버 스톤 감독은 미국 , 국가란 이름의 절대권력이 지니는 폭력성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다.사회과학 서적에서는 흔히들 미국을 군산복합체란 단어로 규정짓곤 한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인 듯 하다. 국가란 권력, 특히 미국과 같이, 세계에서 절대적인 힘의 우위로, 세계의 경찰 임을 자청하는 자만이라면 자만이랄 수 있는 강대한 권력의 기반은 역시 자본의 이익에 복종하는 기구 이기 때문일 수 밖에는 없다.영화에서도 언급했듯이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다시 말해 자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국의 전쟁산업을 위하여 - 세계 각국에 반혁명을 수출한다. 반혁명은 개혁과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그 나라의 민중들의 열망을 피와 전쟁으로 짓밟는 행위로 결과지어지곤 한다.영화에서는 케네디에 의하여 쿠바에 대한 반혁명 수출의 계획이 좌절되고, 월남전에서 철군움직임이 케네디 암살의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케네디의 정책이 미국 전쟁산업체들과 야합한 군부, 그리고 강경파들의 생존을 위협했기에 케네디는 암살이라는 결과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전쟁산업체의 생존조건은 끊임없는 전쟁으로 이루어지는 군사기술의 수요창출이기 때문이다. 성조기의 깃발아래 행군하는 미군의 강대한 권력과, 그 뒤에 온갖 음모와 전쟁기획을 담당하는 CIA의 비호아래 세계각지에 전쟁 이라는 그들만의 독점시장을 창출하는 것만이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네디는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CIA를 해체하려 하였고, 쿠바에 대한 쿠데타 계획을 반려하는 등, 그들의 생존을 위협했었다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영화는 케네디의 암살이 군부쿠데타적 성격이라고 검사의 입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의혹을 파헤쳐가려는 검사의 모습을 통해 그 논지를 하나하나 증명해 나간다. 이 영화에서는 가장 인상적인 것은 검사의 모습이었다. 합리적인 이성과 미국적 정의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이 검사의 모습에서 그래도 미국은 이래서 강대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유를 찾으려는 감독의 의도가 살짝이나마 엿보였다. 그러나 진실은 여전히 묻혀지게 마련이고 영화는 용기있는자, 비록 패하였지만 승리하는 자의 뒷모습에 여운을 남기며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역시 영화는 영화이기 마련이고, 올리버 스톤은 미국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라 덮어주어야 할 것 같다.1960년대 미국. 이 시대를 미국인들은 동경하는 것 같다. 과거 우리나라 TV에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케빈은 12살(원제:the wonder years) 인가하는 드라마도, 또 몇 년 전에 개봉되었던 포레스트 검프 에서도, 60년대는 동경과 추억의 시대로 묘사된다.위에서 언급한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이 당시 미국의 사회는 저항의 시대였다. 흑인운동, 반전운동, 그들의 저항과 함께 반동의 물결 역시 거셌다. 킹 목사의 암살, 그리고 케네디 상원의원의 암살..... 끊임없는 암살과 죽음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그런데 왜 미국인들은 이 시대를 반추하는 것 처럼 보일까?그것은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작금의 끔찍하리만큼 혼란으로 가득 찬 미국사회에 비하여, 당시의 혼란은 어쩌면 모든 이에게 동일한 기회로 주어졌는지는 것으로 받아들여 지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권력 의 야만적인 폭력속에 늘 깨어지기 마련이었고, 남은 현실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70년대 이후는 미국인들에게 고단한 시대였고, 그러했기에 지금에 와서 영화들은 그래 그 때는 잘나갔었지 라고 회상하며 과거를 반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물론 감독은 이 60년대를 반추하면서, 저항과 반동이란 두 틀거리는 놓치지 않는다. 또한 감독은 케네디의 죽음을 통해서 미국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자들의 야만성을, 미국의 대통령, 즉 국민의 총의로 뽑힌 대표자마저도 갈아치우는 그들의 독단을 이야기하려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