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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박에 관한 보고서
    도박에 관하여1.서론2.본론우연의 개념확률의 발전도박의 역사한국의 도박IT와 통신환경의 발전에 따른 도박형태의 변화도박의 문제점3.결론서론노무현 대통령은 31일 KBS 특별회견에서 ‘바다이야기’ 파문과 관련해 처음으로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비싼 수업료를 낸다고 생각하고 인내해 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대책을 세우겠다”고 말했다.북핵 사건이 터지기 전 지난 한달 한국은 ‘바다이야기’에 대한 얘기로 도배가 되었었다. ‘도박공화국’이니 하는 얘기들로 우리 스스로를 폄하하는 얘기도 놔왔고, 장관, 여당,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바다이야기’를 언급하며, 대국민 사과를 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었다. 사회의 각종 정치 대표, 관료들까지 나서서 이번 ‘바다이야기’ 사태에 대해 사과하는 것을 보면 도박이라는 것이 결코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사회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면 도박이라는 것이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이유와 특히 한국에서 도박이 어떻게 사회발전에 영향을 끼치고 앞으로 이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본론도박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그럼 과연 도박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역사안에서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발전했으며, 현재 우리사회 변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IT와 통신환경의 발전과 함께 어떠한 형태로 변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또한 한국에서 도박의 발전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고, 경영학도인 필자는 도박에 대한 경제적 손실에 대해 언급하고 결론을 내릴것이다.우연의 개념도박의 기원, 도박의 최초의 개념은 어떻게 보면 우연이라는 단어에서 온지도 모른다. 우연 이것은 놀랍게도 고대의 원시적인 사고체계에는 개념이 없었다. 고대인들은 무작위로 일어나는 사건을 일정의 신의 계시로 보았다. 즉 초월적인 존재가 보내는 보다 심오한 메시지를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세계관이 지배하던 었으며, 이 단어 자체가 점술이 신(divine)으로부터 유발된 행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점술에서는 신의 의도에 의해서 우연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확률의 발전우연이라는 것은 중세 이전에 신이 품은 의지의 부수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어, 그에 대한 해석을 하는 것 자체가 불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15세기 이후 새로운 상인 계급의 출현으로 상거래에서 상품의 분배, 상품에 대한 보험 그리고 여행이 성공적으로 끝날 가능성과 같은 상업과 관련된 문제들이 사회적인 이슈로 떠올랐고, 그 그것들은 비율, 분할, 상대적 양 등을 다루는 수와 관련된 문제들로 확률적 추론의 고유한 문제로 발전하였다. 복식부기를 처음 제안한 것으로 유명한 파치올리의 ‘산술, 기하, 비례 및 비율 총람’(Sunmma de aerthentica, geometia, proportioni et proportionalita, 1494)은 이러한 상업적 환경의 산물이었다.새로운 상업은 통계학적 개념을 촉진시켰고, 이것은 앞으로 확률론의 발전을 위한 토대로서 기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르다노의 ‘우연의 게임에 관한 책(1550)’이 나왔다. 이 책은 카르다노의 무작위성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 졌다. 하지만 확률의 수학적 이론을 기초하는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17세기 마침내 확률론이 탄생하게 되었다. 확률론의 발전으로 우연은 운명이나 신과는 무관한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리는 필수적인데, 확률이 우연을 설명하려면 우선 우연이 설명을 필요로 하는 독립적인 현상으로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후 확률 등의 수학적인 개념은 파스칼, 데카르트로 이어지고, 그와 함께 막스베버(Max Weber)는 합리적인 회계에 수치를 이용하는 것이 자본주의 기업가 정신의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보고, 보편적이고 수치화 된 기준에 따라 개별 사건과 현상을 수량화하고 비교하는 데 기여하였다.이렇게 우연이라는 것이 사회의 발전에 따라서 계산가능하고 수치 가능한 것 원시벽화에는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으며 고대 바비로니아에서는 도박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고 있다. 도박에 쓰이는 주사위는 고대 인도에서 발상된 것이며, BC 3000년 이집트에서는 이미 현재의 주사위와 같은 모양의 상아주사위가 있었고, 이것이 그리스, 로마, 지중해 연안지방으로 전래되었다.고대 중국문명과 에트루리아인들도 게임이나 행운에 조직적인 내기를 걸었는데 에트루리아인들은 귀족들의 장례의식의 하나로 노예 두명을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여 그 중 싸움에 진 자를 귀족의 저승길에 동행하게 하였다. 이 관습은 로마에 전래되었으며 후에 검투경기로 변형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로마인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검투사들의 처절한 싸움을 보면서 내기를 걸과 환호하였다.로마에서는 주사위, 수레바퀴, 전차, 검투, 복권 등 다양한 도박게임이 성행하였다. 로마인들은 ‘행운의 수레바퀴’에 돈을 걸면서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에게 행운을 빌었다. 복권의 효시 역시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복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복권을 팔았고, 네로는 불탄 로마 도시를 재 건설하기 위해 자금조달의 수단으로 복권을 판매하였다.복권이 본격적으로 발행된 것은 중세 유럽부터로 1400년대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형태를 갖춘 복권이 발행되었다. 당시에는 현금이 아닌 선물의 형태로 제공되었지만 이후 유럽 각국은 교회와 왕실의 재정을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앞다투어 복권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1490년 플랑드르에서는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기 위해 복권이 발행되었고, 1566년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항구보수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권을 발행하였다. 1530년대에는 이탈리아 피렌체 지방에서 처음으로 ‘로또’라고 불리는 복권이 나와 오늘날 로또 게임의 효시가 되었다. 1500년대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은 매년 추첨으로 90명의 정치가들 중에서 5명의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여기에 착안하여 90개의 숫자 중에서 5개의 숫자를 상류층을 제외한 평민과 하층민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면서부터 카지노는 부유층과 유명인사들이 재력과 신분을 나타내는 자기과시와 사교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독인에서는 최초롤 카지노에 룰렛테이블을 소개하고 베팅용 칩을 사용하면서 전성기를 열었다. 1850년에는 마카오에 카지노가 오픈되었으면 1931년 라스베가스에 카지노가 합법화되어 슬로머신, 룰렛, 블랙잭 등 다양한 도박게임이 지금도 성행하고 있다.그러나 도박은 놀이로써 환대를 받기도 했지만 큰 죄악으로 받아들여저 금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도박을 금지하였고, 이를 위반하면 노예형에 처하였으며 그리스에서도 도박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도 완전히 도박을 근절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재정확충을 위해, 시민의 저항의식을 마취시키기 위해 지배계급과 정부는 공공연하게 혹은 암묵적으로 도박을 권장하였으며 설사 전사회적으로 도박을 금지시킨다 해도 은밀하게 도박이 성행하였다.한국의 도박한국의 도박에 대한 기록과 역사적 연구는 극히 한정되어 있어 그 연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삼국사기의 백제기에 의하면 백제의 개로왕때 고구려의 가첩승 도림이 개로와과 바둑을 두어 국사를 돌보지 않게 함으로 백제를 망하게 했다는 최초의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에서는 738년에 당나라로부터 바둑이 전해졌으며 이후 투호, 상희 등이 당나라에서 들여와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행해졌다. 또한 삼국싣4o에는 중국의 한무제가 서역을 정복할 때 서역에서 건너온 쌍륙이라는 놀이가 전해져 널리 성행하였다고 한다.고려시대에는 골패가 중국 송나라에서 수입되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투전과 더불어 민간 노름의 쌍벽을 이루었고, 이것은 오늘날 마작으로 발전하였다.우리나라에서 화투와 카드가 들어오기 전까지 대중적으로 인기있었던 놀이는 투전이었다. 이것은 청나라로부터 들여왔다고도 하지만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숙종조에서였다. 하지만 위세를 떨치던 투전도 화투가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 사그러들기 시작하였다. 도박이 민중들입이 허용되었지만 90년대 이후부터 도박 산업이 합법화되고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 시작된 경륜은 불과 7년만에 매출액이 2조원을 능가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그 동안 출입이 금지되어 왔던 카지노는 2000년에 지방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명분 아래 정선에 카지노가 섭립되어 내국인들에게 출입이 허용되었고, 이후 한바탕 심각한 카지노 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다.카지노, 경륜, 경마만이 도박은 아니다. 요행을 바라며 내기에 판돈을 거는 것은 모두 도박에 포함된다.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주식 역시 도박에 속한다. 주식투자는 포커 게임이나 브릿지 게임, 경마, 경륜 등과 마찬가지로 우연에 투자자의 기술, 추리, 정보, 그리고 허세를 부리는 능력이 가미된 도박의 일종이다.도박 산업은 적자를 모르는 산업이다. 도박산업의 구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카지노, 경마, 경륜들의 2001년 도박산업의 매출액은 십조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불법도박의 매출액은 추산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최근에는 사이버 도박 인구가 급증하여 큰 사회문제가 외고 있다. 도박산업의 규모나 이용인구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IT와 통신환경의 발전에 따른 도박형태의 변화IT와 통신환경의 발전과 함께 인터넷이 사회 전반에 있어 통신 수단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은 가상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가상공간에서의 게임은 대중적인 여흥이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정부 규제 때문에 카지노를 마음껏 할 수 없던 사람들도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을 통해 마음껏 도박을 즐기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방만하게 만연해 있는 온라인상의 도박은 정부 차원에서의 규제나 조절이 굉장히 힘들다. 그것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기술 집약적이고, 누구나 사용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온라인 도박의 종류1. 카지노온라인상에서 이용할 수 있는 카지노게임은 실제 카지노와 거의 유사한 영상이 제공된다. 기존의 카지노 보다 즉각성이 뛰어나다. 하지만 다른 게임 참여자들이나 살아있는 딜러들과의 미한다.
    생활/환경| 2007.04.03| 8페이지| 1,000원| 조회(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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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과 현대의 기업문화 차이 평가B괜찮아요
    목 차(1) 삼성의 경영이념(2) 삼성정신(3) 제 2의 창업(4) 삼성이 필요로하는 인재상(5) 기업문화(6) 현대그룹과 비교한 삼성의 기업문화1. 삼성과 현대의 기업문화(1) 삼성그룹삼성의 경영이념삼성의 경영이념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이다.사업보국은 사업을 통해 국가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기업경영의 목적은 처음에는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기업이 커지면 그 기업의 개인 소유의 자산과는 관계가 없어진다. 국부(國富)가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 아래, 우리나라와 같이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사업을 통해서 국가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고 이병철 회장은 "기업이 적자를 내는 것은 죄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적자가 나는 원인을, 첫째 경영의 부실 즉 소비자가 원하지 않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경영, 둘째 경영자의 사리사육, 즉 기업을 형식적으로 운영하고 개인의 이해를 추구하기 때문으로서, 이런 경우에는 기업이 망하게 된다고 아랫사람들에게 말해왔다. 결국, 경영을 건실하게 해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고 투자자에게는 적정한 배분율, 종업원에게는 충분한 임금을 주며, 나라의 자산을 부강하게 하고, 생활의 안정을 주는 것을 사업보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인재제일이란, 모든 것의 출발은 시설도 제품도 아닌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삼성은 국내 최초로 사원을 공개채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친인척 등 가족들에 의한 경영지배가 많지만 삼성은 공개적인 시험과 엄정한 "인사의 사다리"를 올라 성장한 사람들이 사장을 비롯한 경영층을 맡고 있다. 이처럼 공개체용과 공정한 인사관리가 삼성 경영의 뿌리이다.합리추구란 함리주의정신을 근간으로 경영한다는 것이다. 정치가는 검은 돌도 휜 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지만 기업은 엄청한 논리와 효율의 경쟁으로서 정치와는 다르다. 기업에서는 적당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효율경쟁, 원가경쟁, 인재력경쟁 등 합리에서부터 기업의 승부가 결정된다. 합리주의정신을 바탕으로 은 시대의 변천과 경영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듬어지고 재발굴되어 오늘날 4가지의 삼성정신으로 정리되었다.첫째는 창조정신(創造精神)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타구하며, 진취적인 기상으로 역경을 적극적 자세로 극복하고 개척하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최신의 기술과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재제일, 합리추구가 창조정신의 바탕이다.둘째는 도덕정신(道德精神)으로서 진실되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정직하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여 공명정대하게 행동하며 도의 문화를 진작해 나감을 의미한다. 기업의 관리자는 부하를 단순한 노동수단이나 조직 구성원의 하나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인 안목을 갖고 부하의 공동으로 책임지는 교사라는 것이 삼성의 철학이다.셋째는 제일주의(第一主義) 및 완전주의(完全主義) 정신이다. 모든 일은 목표를 가질 때 역동적이 된다. 한편 조직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만약 조직이 정체되고 관료화된다면 쇠퇴하고 마는 것이다. 완전주의는 모든 일을 주인의식을 갖고 정성스럽게, 철저하고 착실한 따져서 일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만드는 상품의 질과 신용이 완벽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에는 장단점이 생기고 잇지만, 어쨌든 삼성의 모든 행사는 치밀하고 빈틈이 없다. 기업의 흥망을 볼 때 30년을 넘게 흥한 기업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 원인은 도전하는 정신의 결여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조직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는 제품의 품질, 마케팅의 품질, 시장점유율 등에서 항상 제일을 추구한다는 정신이 필요하다.넷째는 서로를 존중하고 돕는 공존공영(共存共榮)의 정신이다. 이것은 종업원과 주주, 종업원과 관리자, 회사의 납품업자, 회사와 소비자 등 여러 관계에서 균형 감각을 갖고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관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저하게 소비자나 고객, 종업원, 납품업체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제 2 창업정신삼성은 선대 이병철회장 작고 후 제2세대 경영에 들어와 새로운 창업선언을 한 바 있다. 개방화된 세계 속에서 어떻게 하며 계속적인 성장을 하여 21처럼 어떤 아이템으로든지 세계를 시장으로 판매할 수 있는 기업이 되는 것이 하나의 과제인데, 그러기 위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위기의식"이다. "지금은 비록 한국에서 제일 나은 기업이나 앞으로 시장이 개방되고 일분의 전자제품들이 마구 들어오면 어려울텐데"하는 본질적 인식을 새롭게 하고 "우리가 선진국과 어떤 영역, 기술, 설계, 공정 등에서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가를 찾아내고, 그 문제를 앞으로 몇 년 안에 해결하여, 세계 초우량기업과 경쟁한다"는 구체적 도전목표를 세워, 거기에 인력과 자원을 투자하여 그 실행을 점검해 나가겠다는 생각이 현재 삼성의 조직 속에 흐르고 있다.두 번째로는 "전략경영", 혹은 "기회선점(先占)의 경영"이다. 지금까지는 모방기술을 가지고 어떻게 제품을 싸게 만드느냐가 중점이었다. 그러나 이제 누가 먼저 시장을 발견하고, 어떻게 기회를 선점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므로 전략경영, 기회경영을 강화하는데 많은 힘이 들이고 있다. 삼성의 기업문화도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한편 종업원의 태도, 가치관이 많이 달라져 있기 때문에 종전의 권위주의적, 가부정적 관리로부터 체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자율경영"이 추구되고 있다. 자율경영이란, Self - Starter로서 스스로 도전목표를 세우고, 스스로 통제하며 달성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의 관리체제도 지시와 통제에 의존하며 달성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의 관리체제도 지시와 통제에 의존하여 효율을 짜내는 체제에서 자율과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상과 창의를 진작시키는 분위기로 만드는 것이 회사발전에 더욱 필요하게 되었고, 이제는 조직도 방대하다. 자율경영을 위해서는 과감한 업무이양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사무관리체제는 아랫사람이 기안을 하여 윗사람의 도장을 받는 "품의제도"로서 윗사람이 도장찍기에 바빴다. 상사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태도는 생산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부하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자율경쟁을 하게 되면 두 가지의 이득을을 하게 되어 생산성이 높아지며, 상사로부터 도전적인 일가 그에 따르는 권한과 책임을 위임받은 부하는 의욕과 책임의식이 강화되어 직무만족을 가져오는 점이다.셋째는 "인간존중"이다. 과거에는 집단주의 관리를 해왔지만, 이제 인사관리는 개별주의로 가고 있다. 견해가 다양하고 주장이 다른 한사람의 욕구를 읽고, 그 욕구, 개성, 희망을 조직의 목적과 연결시켜야 하고, 자기계발을 촉진시키는 것이 인사관리가 당연한 과제이다. 이것이 곧 인간존중의 정신이며 이를 바탕으로 평생직장,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의 기업문화가 되고 있다.삼성이 필요로하는 인재상종래에 삼성은 부정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나 무책임한 사람, 협동심이 부족한 사람은 절대 기피하여 왔다. 반면에 성실, 근면, 정직하여 책임감과 협동심이 있는 사람을 선호하여왔다. 그러다 보니 한결같이 고정타입의 사람만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는 10명의 보편적인 사람을 뽑느라 1명의 창의적 자기 주장이 있는 특출한 사람을 뽑는데 실수하지 말자는 "개성과 중심"의 인사방침을 세웠다.삼성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면접이나 적성검사와 더불어 집단 토의를 하게 한다. 즉 주제를 놓고 5~6명의 참가자들이 5분 내에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여 집단토론을 하게 함으로써, 생각을 정리하는 능력, 임기웅변하는힘, 논리를 전개하는 남을 따라오게 하는 능력 등을 보는 것이다.삼성은 사원의 국제감각과 도전의식을 고무하기 위하여 아무런 일도 주지 않고 1년 동안 외국에 다녀오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 시행중이다. 대졸사원 중 5~10%를 뽑아 단신으로 1년간 세계 각국에 파견하여, 1인당 년간 5만 달러 정도를 주어 현지적응능력을 길러 생존하는 기술을 연마하게 하는 이 제도는 무력감을 추방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주고 있다.삼성그룹 기업문화환경은 안정적이고 정태적인 환경이며, 의사결정은 품위결정 및 컨센선스를 중시한다. 경영스타일은 합리적이고 관료적이며 고객은 소비재 중심의 최종고개를 중시한다. 외부용역중심이다. 기술/설비는 인력에 대한 의식이며 중시덕목은 근면성과 성실성이다.삼성기업문화의 장?단점합리적 전제로 한 철저한 관리는 삼성문화의 핵심이다. 사업추진 형태, 각종제도, 의식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엘리베이터 운행 프로그램까지도 합리성이 적용되는 문화다. 삼성맨들은 `오차가 없다`. 조직관리, 사업구조, 공장과 설비, 사무실 배치 등 모든 것이 최적의 상태로 관리되는 것을 선으로 추구한다. 삼성은 곧잘 `조직적`, `비인간적`, `인정이 없다`고 표현되는 것은 합리성을 강조, 실수나 비능률을 허용하지 않는 삼성의 기질과 관련이 깊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삼성만큼 더 인간적인 곳도 없다`. 평등과 인간존중을 바탕에 깔고있는 채용제도가 좋은 예다. 특정분야의 경력을 우대하기 보다 `삼성울타리` 안에서 똑같이 출발해 실력을 인정받도록 하는 전통문화가 있다. 삼성은 인재를 뽑지 않고 범재를 뽑아 준재로 길러낸다. 범재도 삼성이라는 용광로를 거치면 인재로 단련된다는 것 삼성출신이란 경력은 항상 우대를 받는다. 삼성은 업무에서는 완벽을 사업에서는 1등을 추구해왔다. 합리성과 이를 토대로 한 일등주의는 삼성의 상징이며 오늘의 삼성을 있게한 원동력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문화에도 단점이 있다. 삼성이 추진중인 신경영도 부정적 삼성문화에 대한 시정노력이다. 합리성을 추구하기 위해 규정과 제도를 강조하다 보면 관료주의, 권위주의적 타성에 젖을 수 있다. 이런 단점으로 삼성은 종종 기회를 놓치게 된다. 지난 93년 미국 컴퓨터 하드 디스크드라이브 업체 인수전은 그 전형적 사례. 삼성은 이 회사 인수를 위해 2년간을 검토하고 고민했다. 삼성이 2년간을 심사숙고 한다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게 현대의 결론이다. 이 사건은 삼성의 뛰어난 정보력과 현대의 결단력을 상징한다. 일등주의와 완벽주의도 적지않은 폐단이 있다. 그러나 삼성의 문화는 재계의 리더로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현재 추진중인 변화와 개혁은 재계전체와 정부의 변화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다.
    경영/경제| 2007.04.03| 6페이지| 1,000원| 조회(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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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에서의 매매춘과 위안부
    < 매매춘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 조원 -김정훈김규호고이영란- 목차 -머리말제1장 한국내 일본군 ‘위안부’의 등장과 설치1. ‘종군위안부’가 아닌 ‘위안부’ 혹은 성노예2. 일본군 ‘위안부’ 등장과 근대일본3. 한국내 일본군 ‘위안부’ 설치 및 상황4. 중국 매매춘의 역사5. 중국내 일본군 ‘위안부’ 설치 및 상황제3장 국제여론과 법에 따른 위안부 피해보상 실태1. 일본군 전범 ‘일본 천황’과 위안부2. 일본군의 국제법 위반에 따른 위안부 피해보상제4장 우리 정신대 할머니들1. 위안부, 일본 군인에 의한 민족 정체성 재구성2. 침묵을 깬 저항의 몸짓, 위안부 운동맺음말머리말2006년 시모무라 하쿠분 일본 관방 부장관은 25일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1993년 고노 요헤이당시 관방장관 담화와 관련, “역사적 사실관계를 잘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며 재검토를 주장했다. 사실상 옛 일본군의 위안부는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현재까지 이어진 일본 제국주의는 과거 침략전쟁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확대해가면서 점령지구에서 군인들의 강간행위를 방지하고 성문제를 해결한다는 핑계로 본토와 식민지 및 점령지역의 젊은 여성들을 동원하여 군대 주둔지역과 심지어는 최전방 전투지구에서까지 집단적으로 수용, 군인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게 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전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지만 이른바 종군위안부를 데리고 다니면서 전쟁을 치른 군대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찍이 있었는지 의문이다.아시아 태평양 지대의 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전범군 일본에 의해 유린된 여성의 역사는 특히 유교문화권인 한, 중, 일 동양 3국에서 남존여비사상과 음양의 논리에 의해 더욱 낮게 취급되고, 가부장제하에서 남성이 재산, 제사 및 호주를 상속하여 사회를 남성 선호사상이 지배함으로써 이러한 성 차별을 더욱 조장하였다. 요컨대 ‘위안부’문제는 민족 차별과 성 차별이 응축된 것으로서 문제의 본질이 해명되야할 과거사로 여전히 남아있다. 본 조는 한국내 위안부에도 안 간다고 하여", "특수간호부로 취업된다고 하여" 등을 내용으로 한 기만이 이루어졌다. )국외적인 배경으로는, 1931년에 일본군은 중국 동북부 만주의 철로를 폭파한 이래, 이듬해 상하이사변으로 침략전선을 확대해 나갔다. 일본 군인은 곳곳에서 여성들을 폭행, 강간했다. 그중에서도 아주 잔악한 예가 난징에서 일어난 집단 강간과 학살이었다. 이 사실은 몰래 촬영된 사진 등에 의해 전 세계에 전해졌다. 국제사회에 악평이 퍼질 것을 두려워한 일본군 간부는 병사들의 성 상대를 할 ‘위안부’를 제공할 위안소 개설을 계획했다. ‘위안부’제도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는데, 현지 여성에 대한 강간방지, 매춘에 의한 성병 예방, 매춘에 의한 성병예방, 병사를 성적으로 위로한다는 것이었다.) 1932년에 상하이에 해군위안소 17개소가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위안소 정책의 시작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상하이 파견군 고급 참모 오카베 나오사부로의 1932년 3월 14일자 일기로 “이 무렵 병사가 여자를 찾아 이리저리 우왕좌왕한다는 풍기 문란한 이야기가 자주 들려왔다. 이는 병사가 평상심을 찾으면 피할 수 있는 일이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설의 설치를 인정하고, 병사의 성 문제 해결에 관한 각종 배려의 실시에 착수한다.”라고 쓰여있다.)3. 일본군 ‘위안부’ 설치 및 상황전쟁 당시 일본군인들에게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받도록 강요받았던 ‘위안부’. 이 여성들 중에는 한국인 외에도 일본인, 타이완인, 중국인,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 버마인, 네덜란드인, 호주인도 있었다. 한국인 위안부들은 주로 12-20세의 연령대에 있는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속거나 팔리거나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부’가 되었다. 이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구체적인 군문서들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군인들은 위안소를 ‘니규이치’(29대 1)라고 했는데, 이는 위안부 여성 1명당 하루에 29명의 군인들 ’받아야‘한다는 계산에서였다. ‘니규이치’는 일본 군인하왕조 시기에 이미 노예기녀가 등장하고 있다. 한자사전인 《사해(辭海)》에는 이런 기녀를 단순히 '고대사회에 있어 매춘을 강요당했던 여성'이라 해석하고 있지만, 고대에 있어서 기녀의 정확한 뜻은 '노래와 춤에 능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중국에서 성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매매춘의 등장을 씨족사회에서 사유제가 출현하는 시기와 밀접하다는 입장이다. 즉, 일부일처제가 사회관념으로 정착하면서 결혼은 남성우월주의를 제한하는 속박이 되었고, 이에 따라 사회의 강자격인 남성이 약자인 여성을 금전의 힘을 빌어 성노리개로 전락시켰다는 주장인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급속히 재편되어 가는 신분제 구조와 맞물리면서, 여성의 소유를 하나의 권력행위로 인식하는 의식이 보편화되기도 한다. 신분이 높은 지배계급에 있어서 여러 명의 여성을 거느리는 것이 하나의 특권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의 매매춘은 단순히 돈을 통한 매매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남성'이란 존재의 권력화, 계급분화를 통한 권력화는 여성을 일부일처 다첩제의 구조에서 철저한 하부매개로 빠뜨리면서 수천년 중국사회를 지탱하는 통념으로 자리 잡는다. 씨족공동체적 사회 유풍을 완전히 벗어나 고도의 국가체계를 형성하는 춘추전국시대에는 중국의 매매춘, 이른바 기업이 장족의 발전을 이룬다.《한서(漢書)》에 따르면, 한무제는 수천 명의 후궁을 두었고 귀족-호족들은 십여명의 첩을 거느렸으며, 각 지방의 기관마다 보통 수백 명에 달하는 관기를 운영했다고 한다. 일부 백성들이 결혼 상대자를 제대로 구하기 힘들자 쌓여가는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민간에서 운영하는 기원도 갈수록 늘어난다. 이것은 시대 변화에 따라 진전되는 신분제와 화폐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매매춘이 사회구조의 한 일각을 차지하는 요소로까지 정립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관기는 그 후 왕조의 위상에 따라 심한 변화를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국가권력이 약했던 위진남북조시대와 송대에는 쇠퇴하지만 통일제국으로 강성했던 수-당대와 원대에는 다시 그 수등의 고난스런 농촌을 도망쳐 나오는 용감한 농촌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허나 도시로 나온 가난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한정되었다. 대다수 열악한 환경의 공장이나 작업장을 찾았지만, 저임금에 착취적인 반복노동, 상사에 의한 성적 희롱 속에서 희망을 상실하는 여성들은 결국 기원에 몸을 기탁하면서 생활을 연명했다.20세기 전반기의 중국 매매춘은 서구문화의 충격 속에 재빨리 변신하면서도, 지역에 따라서 옛 형태를 간직하면서 번성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일본은 대륙진출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본토로 밀려들어 오게 된다.5. 중국내 일본군 ‘위안부’ 설치 및 상황20세기 초 일본군의 중국 진출과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가 설립되게 되는데, 그 설치 지역 또한 다음과 같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에 본 조는 중국 군위안소의 지역별 분포는 다소 임의적이지만 만주, 화북, 화중, 화남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1) 만주만주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이른바 '관동부'를 설립하여 만철 부속지의 지배권을 획득한 이후 매춘업이 더욱 왕성하게 되어 1905년에 '예기 작부 및 고녀 취체규칙', '창기 취체규칙', '대좌부 취체규칙'이 제정된 이래 오랫동안 공창제도가 실시되어왔다. 그런데 이 지역의 특성상 공창제도의 성립은 대만과 같이 군의 필요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의 증가가 그 필요를 부채질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까닭에 군위안소나 그와 유사한 것들이 일찍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생존한 전 군위안부의 증언, 전 군인 군 속의 증언이 가장 많이 나온 곳도 만주이다. 당시 자기가 거주하는 곳에서 국경을 넘을 경우 도항증이나 여행증명서 등 각종 허가증이 있어야 했고 일반인의 이동은 극히 제한되었다. 하지만 만주로의 조선인 이주정책이 실시되고 있는 등 민족해방운동과 관련된 경우가 아니면 다른 지역에 비해 이동이 용이한 편이었다.일본은 대소련전에 대비하여 소련과 만주의 국경지대에서 7,80만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와 함께 일 모아오고 있다.)위 중국내 일본군의 여성 위안부 동원은 첫째로 일본의 군, 관 권력구조에 의해 물리적 행정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와, 둘째로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하에 매매춘 시장구조를 통해 이루어진 경우로 나뉜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거의 매매춘 시장을 통해 위안부가 동원되었다. 하지만 식민지나 점령지에서는 군이 강제로 납치하거나 지방관리나 경찰관, 군속 등이 매개되어 여성들을 연행해갔다. 이것은 전 군위안부의 증언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식민지나 장기 점령지의 경우 첫 째로 매매춘 시장을 이용하여 충원했겠지만 점령 초기나 전쟁 진행과정에서는 군위안부의 대부분을 외부에서 조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과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 군위안부의 안정된 조달처 역할을 한 것이다.제2장 국제여론과 법에 따른 위안부 피해보상 실태1. 위안부의 전범 ‘일본 천황’의 처벌요구일본의 과거청산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안'이다. 그런데 그 해결을 가로막고 있는 중요한 장애물이 천황제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천황제의 연속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또한, 일본 국내적으로 주체적인 과거청산은 전혀 없었다. 그 전형적인 표현이 천황 히로히토의 면책이었다. ‘대일본제국헌법’상 주권자이며, 최고 권력자이며, 통수권자이며, 게다가 신이기까지 한 히로히토야말로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전범을 처벌한 '도쿄재판'의 법정에 히로히토는 피고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증인으로서도 서지 않았다. 물론 히로히토의 면책은 일본 점령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격화되는 냉전 속에서 일본을 대소 방파제로 만들기 위해 천황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국의 정치적 고려의 산물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던 맥아더는 "만일 천황을 재판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동요가 일어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최소한 백만의 군대"와 "아마도 수십만에 이르는 행정사무관"이 필요할 것이라는 논거를 내세우며, 연합국 내의 반발을)
    인문/어학| 2006.11.23| 17페이지| 1,000원| 조회(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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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여성의 결혼과 생활 (송대의 여성을 중심으로) 를 읽고 평가A좋아요
    서론역사는 승리자의 소산이다. 이 말은 역사는 승리한자에 의해서, 승리한 자를 위해 쓰여 지지만 승리하지 못한 자는 패자라는 허울과 함께 승리자가 만든 변형된 역사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 특히 중국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남성들에 활동무대였고 남성들의 활약과 성취로 채워져 왔다. 지금까지 배워온 중국사의 서술 역시 남성 중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무측천이나 양귀비 등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여성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역사속에서 여자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듯 자신들의 삶을 감히 글로 적을 수 없었던 여성의 역사는 어머니에게서 딸로 전해지면서 역사라는 권위, 공식성을 부여받지 못하고 사적인 이야기로 밀쳐지거나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다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중국여성의 결혼과 생활?이라는 책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열녀전’으로 일정한 여성상을 강요받으며 살아왔고, ‘여성의 작은 발이 아름답다.‘는 전족과 같은 형태의 관습이 청대 말까지도 넓게 자리 잡아 남성 위주의 뿌리 깊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살아온 중국 여성에 대해 비판적인 접근이 아니라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한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성에게 불리한 중국의 여성상이나 유교적인 가족제도를 비난하기보다는 이 제도 안에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꾸려 왔고, 남자들 못지 않게 노력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좀 더 정확한 모습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중국여성의 결혼과 생활?은 ‘송대의 여성을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왜 하필 송대일까? 송대는 약 1천년전인 960년에 시작되어 1279년까지 3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그런데 송왕조 초기에는 이전에 당이 고수했던 국경으로부터 거란을 쫓아낼 수도 없었고, 왕조 중기에는 여진이 중국 고대 북쪽의 중심부를 정복하는 것을 막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반세기에는 급속히 팽창하는 몽골의 끊임없는 침략을 저지하는데 실패하였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 송신감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송대는 나약한 시대로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지도자들이 외부의 이민족들을 대항하는데 있어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인 시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송대는 철저한 문인 중심의 사회였다. 중국사회는 8세기 중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송이 건국되는 10세기 후반까지 정치, 문화, 경제 등 각 방면에 걸쳐 혁명적이라 할 만큼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것이 이른바 당송변혁이다. 이렇게 지식과 교양을 바탕으로 과거제를 통하여 지배층을 형성한 송대 사대부의 모습은 그 이후 변함없이 명?청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갔다. 이러한 당송 변혁은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송대는 여성의 상황이 눈에 띄게 악화된 시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학자들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졌고,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렇기에 송대를 선택하였다. 송대 여성에게 상황 악화는 전족의 보급이나 과부의 재혼에 대한 비난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렇게 여성들의 지위가 악화된 것은 송대 유학의 부활에 그 원인이 있다.그런데 송대에 초점을 맞추는 또 다른 이유는 좀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송대에 여성의 재산권이 특별히 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이유와는 꽤 상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권이 보장된 것은 송대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전족의 확산과 여성의 재산에 대한 권리가 특별히 강했던 일이 동시에 발생했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본론?중국여성의 결혼과 생활?은 전체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분의 1이상이 결혼의 의미, 결혼의 성립, 의식과 축하연, 지참금, 재혼 등 결혼에 관한 내용이다. 그 외에 가정의 관리자, 어머니, 과부, 첩으로서의 여성의 역할과 여성의 노동, 부부관계, 여성을 통한 가계의 계승, 간통, 근친상간, 이혼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필자는 저자의 내용에 대해 네 가지 테마로 나누고, 위의 의문점을 풀어보도록 하겠다.첫 번째, 이 책은 송대의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인 차별성거나 살짝 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집의 안과 밖을 나누어서 그린 그림에는 채씨 문희라는 인물을 호송했던 남성들은 집밖에, 마당 안쪽에는 여성들이 배치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렇게 두 개의 그림에서 보이듯이 남성들과 여성들간에 신체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유교의 관습 내지 윤리적 가르침이었다.위의 그림들과 함께 남녀간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이 전족이다. 이것은 여자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하여 헝겊으로 묶던 풍습을 말한다. 여성들이 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고통과 괴로움과 불편을 감수하도록 강요된 풍습이었다. 별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되고 앉아있는 것과 집에 있는 것을 선호하게 되어 체격이 더 작아져 남성들의 모습이 더욱 크고 강하고 활동적으로 보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두 번째 결혼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법적인 모델에 의하면 결혼의 의미는 남자의 신분에는 거의 변화가 없지만 대조적으로 여성의 신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결혼하는 순간 며느리이며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위치에 서게 된다. 또한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하고 여자는 종속관계로 남편의 가정안으로 결합되었다.또한 결혼은 단지 개인간의 결합만이 아니라 가족간의 결합이었다. 그래서 심성, 훌륭한 가문 경제적 측면에서 따져보기도 하고 그들의 배우자가 될 친척들의 인간성 등을 고려하기도 했다. 자식의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여성들은 주도권을 행사하거나 혹은 거절하거나 하는 권한이 주어져있었다. 과거제도가 중시되어가던 때라서 사람들이 원했던 유망한 사윗감은 과거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고위직으로 승진할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이는 송대의 집안에서는 죽은 선조의 명성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살아있는 친척들의 사회적인 위치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을 알 수 있다.결혼연령에 있어 자녀들의 배우자를 찾을 때 가족들은 딸의 나이와 남편감이 될 사람의 나이를 비교해 보는데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통계적으로 여성들의 평균결혼연령은 19세 남성은 21세였다. 또한 여러 이야 모두 결혼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배우자를 선택한 후에 약혼을 했는데 약혼을 행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약혼식의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결혼식이 끝난 후 서로간의 교류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모든 의식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약혼은 남편과 아내간의 차이점이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그 들의 모습을 널리 알려주었다. 신부는 얼굴을 가리고, 덮개가 딸린 마차를 타며, 남자가 밖에 나가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어 손님들과 함께 있는 동안 닫혀진 방 안에서 머물렀다.이러한 결혼제도와 의식 속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지참금이 있었다. 이것은 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고, 시집 간 집안의 식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물질적 방편을 제공해 주었으며, 곤궁한 처지에 빠지지 않도록 적으나마 방책을 하는 방법이었다.이렇게 결혼 상대자를 찾아 모든 의식을 치루게 되면 내조자라는 명함을 갖게 되는데 좋은 내조자란 수동적이거나 종속적인 여성이 아니고 지적인 능력, 세상살이 능력, 그리고 활동력이 있는 여성을 말했다.좋은 내조자의 덕목에 활동력이라는 것이 있지만 대부분의 중국 여성들이 한 일은 느리고 지루한 일, 보통 직물을 생산하는 것이었고, 대체로 가내에서 이루어졌다. 여성들이 천을 짜는 일은 상업적인 경제행위에 참여하고 가정에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특히 과부들이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택했던 방법으로 천을 짠 일이 많았다.세 번째, 여성의 역할에 대한 테마로 나눌 수 있다. 교훈서에 의하면 부부 사이의 유대관계는 아내가 기꺼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상하수직 관계였다. 하지만 결혼생활에서 남편과 아내가 삶에 대해 공통된 관심사가 있다는 것은 부부관계에 동반자의 측면도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모든 부부가 행복하지는 않았다. 큰소리를 치는 아내도 있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도 있었다.여성들은 또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갖게 되었다. 관계를 맺어 임신, 출산의 과정을 거쳐 아이가 태어나게 다는 것을 참고해볼 때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아기가 건강히 태어나게 되면 여성들이 몸소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여서 키우는데 이것은 어머니로서 헌신적인 행동이라고 여겨졌다. 또한 자식을 얼마나 잘 길렀는가는 여성에 대한 존경심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 중국의 가치관은 어머니의 역할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에 젊은 여성보다는 나이든 여성에게 유리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보다는 아이를 낳았던 여성에게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가족제도는 여성들에게 훌륭한 어머니가 되게 하는 모든 가능한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자상하고 인자한 어머니가 되기를 권장했다.어머니 중에서도 남편을 잃었지만 여러 역경을 극복하고 자식을 훌륭하게 양육한 심지가 굳은 과부들은 높게 칭송받았다. 보통 과부들은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지만 재혼하지 않는다면 남편의 사유지에 계속해서 남아 있을 수 있었고, 아들이 없을 때는 남편의 재산을 관리하고 남편의 후계자를 세울 수 있었다. 재혼하는 것을 거절한 젊은 과부들은 영웅적인 인물로서 널리 존경받았다. 즉,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기 보다는 가문과 결혼한다는 의미가 더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다고 재혼이 불법은 아니었다. 남편이 죽었거나 이혼한 여자가 다시 결혼하는 것은 완전히 합법적이었다. 과부의 재혼을 아주 강력하게 반대한 어떤 재판관도 재혼의 합법성은 인정했다. 과부가 젊으면 젊을수록, 딸린 자식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리고 과부가 머물고 있는 곳에 계속 머물게 되므로 인해 생기는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확실히 개가했다. 재혼이 불우한 처지에서 살아남으려는 하나의 방편으로 묵인된 것이라는 모든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혼에 대해 탐탁치 않게 여기는 감성적인 힘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여자들이 결혼으로 인연을 맺은 가정을 떠나서 다른 두 번째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순결하지 못하고,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것이 그것이다. 여성의 재혼에 대해 겉으로는 수긍하나 속으로는 반대하는 중국인들의 이중
    독후감/창작| 2006.10.27| 5페이지| 1,000원| 조회(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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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의 과거 현재 미래
    순 서서론본론1. 삼성의 시작(1) 이병철의 성장과정과 삼성의 역사(2) 이건희의 성장과정(3) 이건희의 삼성2. 97년(IMF)까지의 삼성(1) 삼성의 조직 구조의 변화(2) 조직문화관점에서 본 삼성의 위기와 성공요인(3) Kotter의 변화의 추진관점에서 본 삼성3. 97년(IMF)이후 삼성의 위기 극복(1) technology(2) product and service(3) strategy and structure(4) culture(5) IBM과 삼성의 비교 연구4. 삼성의 미래(1)3세 경영 체제 (삼성의 리더십 승계)(2)삼성의 청사진결론쯤이야의 삼성 분석 보고서서론지금까지 각가지 모형과 사례를 통하여 조직관리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에 대해서 습득하였다. 이번 레포트는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총동원하여 어떻게 삼성이 세계 일류 기업이 되었고, 앞으로 향후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해보려 한다. 이에 앞서 본론을 네 부분으로 즉 1. 삼성의 시작, 2. 97년(IMF)까지의 삼성 3. 97년 이후 삼성의 위기 극복 4. 삼성의 미래 이렇게 나누어 보았다. 이렇게 파트를 나누어 삼성에 대해 조사하던 중 우리는 이러한 삼성의 발전이 강력한 리더쉽에 의한것이라 판단하여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 이렇게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삼성가의 리더쉽에 초접을 맞추어 분석을 해보았다. 그럼 과연 삼성의 리더쉽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이어가며, 어떻게 이어갈지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겠다.1. 삼성의 시작1. 이병철의 성장과정과 삼성의 역사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은 1938년 3월 1일 대구 서문시장 골목에서 ‘삼성상회’를 시작하였다. 그가 당시 3만원의 자본금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한 지 66년, 이제 그 작은 기업이 세계 최고의 기업 ‘삼성’이란 브랜드로 세계 곳곳을 뛰고 있다.이제 세계인들은 한국은 몰라도 ‘삼성(SAMSUNG)'이란 브랜드는 확실히 알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 브랜드 가운데 1위가 코카콜라이고 삼성은 21위이다.이처럼 막강한 브생각을 많이 하고 늦은 시각까지 책을 읽는 다든가 중요한 사람과 아주 집중적인 대화를 갖기도 한다.3. 이건희의 삼성(1) 프랑크푸르트 선언회장에 취임한 후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정리한 이건희는 19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발표한다. ‘마누라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라는 개혁의 화두를 던진 이건희는 곧바로 『7?4』제를 실시, 즉 7시에 출근하고 4시에 퇴근하는 새로운 생활 패턴을 시도하여 삼성의 새로운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7?4』제는 이런 개혁의 분위기를 더욱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생활 패턴부터 바꾸자는 것이었다.(2) IMF를 극복한 삼성의 경영IMF 사태가 터진 직후 이건희 회장은 1천2백80억 상당의 개인부동산을 비록한 개인 소득 주식매각대금 등 총 1천4백60억원 규모의 개인재산을 기업 자금화하였다. 1998년 반도체 분야에 들어갈 투지금 1조5천억만 남기고 상당부분 투자계획을 뒤로 미루었다. 유동성 확보와 임금삭감, 그리고 조직 축소에 들어갔다. 임원 급여 10%감소, 전 직원 상여금 대폭 삭감 등 비상경영을 시도한 한해였다. 그리고 중견 간부 이상에 연봉제를 확대 실시하고 조직 30%를 축소하라는 고강도 처방을 하였다.(3)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다.리더십 연구의 권위자 바스(Bass)교수가 이회장을 평한다면, 아마 「개혁 지향적 리더」(transformational leader)라고 할 것 같다. 카리스마가 있고, 지적자극을 주고 있으며, 사람을 키우고 있거, 그래서 탁월한 성과를 부하들에게서 얻어내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고위임원들에게 “어느 날 실리콘이 필요없는 반도체를 개발한다면 삼성의 D램 사업은 언제든지 망할 수 있다.”는 상시 위기의식을 강조했다.(4) 인재제일주의 경영①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천재급 인재② 분야별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핵심인재③ 남다른 경력과 관점으로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끼’있는 인재아버지 이병철의 인재 제일주의 경영은 고스란히 제2대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에 의해 더 강조되고 구성원간 공통의 의미체계, 규범을 말한다.(2)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조직문화의 변화삼성의 조직문화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건희 회장이 1988년 삼성의 제2창업선언에 이어 1993년 선언한 제 2창업 2기 출범에서부터이다. 이때 이건희 회장은 삼성에 위기의식을 불어넣으며 변화에 준비할 것을 전사적으로 지시했다. 이때부터 삼성의 기업문화역시 변화에 빠르게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고 창의성이 발휘 될 수 있는 조직문화로 만드는데 힘쓰게 된다. ‘마누라와 자식들만 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다 바꾸라.’는 말은 여기에서 등장했다.(3) 1인지배 체제의 부작용으로 인한 삼성의 위기먼저 삼성의 소유구조를 알아보자. 50년대를 거치며 소비재 중심 산업에서 재벌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그 내부에는 이병철을 중심으로 하는 소유구조가 정착되어 왔다. 87년 에는 창업자 이병철을 계승한 셋째 아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최대 주주가 되었다. 99년 삼성에서 분리한 신세계 백화점과 한솔 제지는 창업주 이병철의 딸들이 소유하고 있다. 또한 현재 삼성은 2세간 재산분할은 물론이고 3세로의 승계 작업도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이재용씨는 언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최대주주로써 그룹경영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준비를 마친 것이다.삼성의 1인 지배체재는 그룹총수인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승계되어 총괄적으로 관리 운영되기 때문에 총수의 판단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삼성에 속한 수십만명의 운명이 그룹총수 1명의 결정에 흔들린다는 표현이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영방식은 서구 산업국가에서 Ford, Morgan과 같이 가족지배 규모의 집단들이 있었지만 장기간에 걸쳐 감소하고 있는 기업경영 방식이다.물론 이 같은 경영 방식이 결정적인 의사 결정시 주주들의 의사결정 이전에 방향을 제시해주는 등의 신속성을 주기도 하지만 독단적 기업경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힘들여 일궈낸 기업의 업적을 총수 한사람의 의사결정으로 물거품으로체의 수립을 가능케 하였다. 구조조정본부는 객관적인 태도로 CEO의 주관적인 견해로 인해 놓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조정을 해주기도 하고 계열사간의 사업영역을 조정하는 데에도 관여해 중복투자를 방지하고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3) 비전의 제시와 공유삼성전자는 IT산업의 변화방향에 따라 기업전략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IT산업의 장기적인 미래 기술을 이해하고 기회선점을 위한 전략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비전선포식을 통하여 신개념 메모리 사업의 비전으로 '디지털 혁명의 불꽃(Spark of Digital Revolution)'을 제시하고 공유함으로써 '복합화를 통한 신개념의 반도체' 시대로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4) 변화를 기업문화에 정착우리나라의 기업 중에 삼성만큼 변화에 대한 시도를 많이 하는 기업은 드물다. 하지만 변화를 통한 새로운 행동양식이 기업 내에서 뿌리내리고 공통의 가치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변화를 추진하는 압력이 그치자마자 곧 퇴화해 버리기 쉽다. 삼성전자는 경영 방향과 전략을 제시하는 이건희 회장을 정점으로 하고 이 회장과 삼성전자 경영진의 경영판단을 돕는 구조조정본부와 실제 경영을 지휘하는 CEO가 양 축을 이루는 삼각편대 구조를 이루어 제시되어진 변화를 적극적으로 기업문화에 정착하려고 노력을 했고, 그 결과 성공적으로 정착되었다.3. 97년(IMF)이후삼성의 위기 극복삼성 브랜드가 세계화 된 것은 삼성이 IT분야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가능했다. 위기 이후에 삼성이 이를 극복하고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게 된 이유인 삼성의 IT분야에 주 초점을 맞추고 ‘혁신과 성공’ 부분을 분석했다. 삼성의 IT 분야에 대한 개괄적인 구조조정내용은 다음과 같다.1. 부실 사업을 정리하고 IT관련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였다.2. 부실자산을 매각하고 인력을 감축하여 비용을 축소하였다.3. 고객 중심으로 조직 및 시스템을 재구축하였다.4. 경영투명성을 높이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하여 세계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 즉, 메모리형 반도체사업에 있어서는 가격이외에 크게 차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구매를 결정하는 주요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경쟁우위전략 중 차별화전략보다 비용우위전략이 더 중요하다. 삼성의 비용우위의 원천에 따른 전략은 다음과 같다.(1) 규모의 경제 :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 분야의 경우 자본 집약적이고 비메모리 분야의 경우 연구개발 투자가 많이 소요된다. 대규모의 투자를 통해 원가를 시장가격이하로 낮출 수 있을 정도로 대량생산을 할 수 없는 기업들은 시장진입이 어렵다.(2) 경험효과 : 경험효과는 기업의 비용우위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다. 반도체 산업에서 생산량을 2배 늘릴 때마다 30%의 비용이 줄어든다. 경험효과에 따른 가격경쟁우위전략은 특히 후발업체인 대만기업들을 방어하는데 효과적이다. 삼성측에서는 16메가디램의 경우 일찍 생산에 들어가면서 이에 따른 경험효과로 인해 이미 상당한 만큼의 원가절감을 이룰 수 있었고 세계최고의 가격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삼성보다 늦게 16메가디램 생산을 시작한 대만으로서는 시장가격보다 높은 원가비용으로 말미암아 경쟁력이 뒤지게 되었다.(3) 최고의 제품개발능력 : 혁신적인 신제품을 가장 빨리 개발할 수 있는 생산공정기술능력은 시장에 그만큼 빨리 진입함으로써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근원이 되며 후발업체의 진입시 chip shrink전략을 구사함으로써 후발업체의 진입을 어렵게 하고 반면에, 삼성에게 유리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가격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하였다.2. 차별화우위일상재인 메모리형 반도체는 가격을 제외한 차별화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다시 말하면, 물리적으로 제품을 차별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품 자체의 특성을 차별화하는 것보다 빠른 서비스, 기업과 고객간의 관계에서 기업이 고객만족을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하는 유?무형의 차별화 방법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그 방법으로써 서비스를 강화하는 유형의 차별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기업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무형의
    경영/경제| 2006.10.27| 30페이지| 2,000원| 조회(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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